1. 배경 : 법정스님의 글;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마라.
 

진정한 인연과 스쳐가는 인연은 구분해서 인연을 맺어야한다. 

 

 

진정한 인연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좋은 인연을 맺도록 노력하고

스쳐가는 인연이라면 무심코 지나쳐 버려야한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헤프게 인연을 맺어놓으면,

쓸만한 인연을 만나지 못하는 대신에

어설픈 인연만 만나게되어 그들에 의해 삶이 침해되는 고통을 받아야한다.

 

인연을 맺음에 너무 헤퍼서는 안된다.

옷깃을 한 번 스친 사람들까지 인연을 맺으려고 하는 것은 불필요한 소모적인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살아가고있는 우리지만,

인간적인 필요에서 접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위에 몇몇 사람들에 불과하고

그들만이라도 진실한 인연을 맺어놓으면 좋은 삶은 마련하는데에는 부족함이 없다.

 

진실을, 진실된 사람에게만 투자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좋은 일로 결실을 맺는다.

아무에게나 진실을 투자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내가 쥔 화투패를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는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인연을 맺음으로써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피해도 많이 당하는데,

대부분의 피해는 진실없는 사람에게 진실을 쏟아부은 댓가로 받는 벌이다.

 

-법정스님


 

2.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메커니즘
 

 법정스님의 글에서 영감을 얻어 인간관계에 대해 좀더 심층적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결과, (나의 생각으로는) 아래와 같은 메커니즘을 통해 인간관계가 이루어 진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래는 각각의 메커니즘의 요소들에 대한 설명이다.



ⅰ.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란 무엇인가?
 인간관계가 시작되는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란, 사람과 사람이 만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같은 해에 입학한 같은 과의 동기와 둘도없는 친구가 되었다면, 내가 그 대학에 그 해에 그 과에 입학하게 된것은 단순히 인력만으로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최초에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ⅱ. 인사라는 것의 중요성
 운명을 통해 최초의 만남을 갖더라도 그 사람과 만남이 시작될지 아닐지는 인사에 의해 그 가능성이 열리거나 닫히게 된다. 스쳐지나 갈 수 있는 지나가는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내면 만남으로 이루어 지고 시간과 노력을 어떻게 쏟느냐에 따라 진정한 인연이 될지, 진정하지 않은 인연이 될지, 스쳐가는 인연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주 마주치게 될 수 있는 상황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사를 건네지 않으면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질 수 없다.

. 진정한 인연? 진정하지 않은 인연? 스쳐가는 인연?

 나는 인연을 진정한 인연, 진정하지 않은 인연(인맥), 스쳐가는 인연 세가지로 분류하게 되었다. 법정스님의 글에 의하면 인연은 진정한 인연과 스쳐가는 인연으로 구분되지만, 나는 스쳐가는 인연을 두 가지로 세분화 했다. 하나는 진정하지 않은 인연이며, 둘째는 스쳐가는 인연이다. 진정하지 않은 인연이란 진정한 인연도 그렇다고 무심코 스쳐가버리는 인연도 아니지만 인간적인 필요 외적인 이유로 유지되고 있는 인연이다. 쉽게 말하면 인맥이다. 스쳐가버리는 인연이라 말 그대로 관심을 쏟지 않고 그저 지나가는 인연이다.
그렇다면 위 세가지 종류의 인연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나는 고심 끝에 인연을 구분하는 세가지의 기준을 마련했다.

ⓐ내가 상대를 얼마만큼 신뢰하는가?
ⓑ상대는 나를 얼마만큼 신뢰한다고 믿는가?
ⓒ성격적 상성은 얼마만큼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하는가? 

①여기에서 의미하는 신뢰란 무엇인가?또한 신뢰를 인연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은 이유
 이때의 
신뢰란 「나의 생각이나 상황을 솔직하게 공유할 수 있는 정도」를 의미한다. 진정한 인간관계란 인간적 유대를 통한 자신의 존재이유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상황을 상대와 공유함으로써 불안감을 해소하고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인간관계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신뢰를 인연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②성격적 相性이 기준으로 들어간 이유
 내 주변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분석한 결과, 상대를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느냐는 관계를 구분짓는 큰 원인임에 분명했지만, 특히하게도 상호간에 솔직함을 보여줄 수 있음에도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몇몇 발견되었다. 가령 나의 한 친구 A는 나와 오랫동안 함께한 친구로 그에게 나의 대부분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줄 수 있었고, 그도 나에게 솔직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이였지만 그를 생각했을 때의 느낌은 '애증'이었다. 그 이유는 그 친구의 공격적인 말투, 그리고 부정적인 사고관으로 때때로 충돌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단순이 그 친구의 성격이 나쁘자 좋다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나의 성격과 그의 성격이 맞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사실 성격적 상성은 신뢰보다 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신뢰도는 시간과 노력에 의해 개선될 수 있지만, 자라온 환경에 따라 형성된 성격은 固定的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③인간관계 그래프
 나는 조금은 냉정하지만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다. 
진정한 인연, 진정하지 않은 인연(인맥), 스쳐가는 인연을 구분하는 ITU(I Trust U), UTM(U Trust M), 상성의 요소에 대해 각각 점수를 부여해 그것을 그래프화 한 것이다.
 또한 함께한 시간에 따라 
ITU(I Trust U), UTM(U Trust M), 상성을 평가하는 정확도가 달라지므로, 함께한 시간・현재 함께하는 정도의 수치를 0.5씩 두고   ITU(I Trust U), UTM(U Trust M), 상성의 합계에 가중하여 정확도를 높혔다.
 당연한 결과지만 내가 평소에 매우 신뢰하며 함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래프의 상위에 올랐고,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했음에도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하위에 머무르는 사람들도 발견하게 되었다. 또 나의 예상을 깨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프를 통해서, 진정한 인연, 진정하지 않은 인연(인맥), 스쳐가는 인연 의 마지노선을 그어볼 수 있다.
 

그래프1. 인간관계 그래프(엑셀파일로 첨부)
*세로축은 ITU,UTM,상성의 합계점수이며 가로축은 각각 사람이다.


 


* 그래프 해석
M은 학창시절을 함께한 친구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보장받을 수 있는 환경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에 대해 느끼는 신뢰감은 높지만 상성은 낮다. 만약, 그와 그러한 환경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진정한 인연이 될 가능이 무척이나 낮았겠지만, 그와 그러한 환경에서 만날 수 있게된 것 자체가 신이주신 운명이라 생각된다.

위 그래프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세가지 요소 외에도 어떤 사람과 공유한 시간과 노력의 절대적 양을 반드시 고려해야한다. AG는 상성은 높지만 신뢰가 낮다. 만약 AG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나누었음에도 신뢰가 낮다면 더 이상 관계가 진전될 가능성도 낮아보이지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나누지 않았다면 높은 상성을 베이스로 그 이상의 인연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다.

. 시간과 노력의 제약


①인연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은 필수적
 인간관계의 굉장히 예외적이고 특수한 경우(남녀간의 사랑)를 제외하고, 단순한 만남에서 인연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수적이다. 상대에게 나의 시간과 노력을 어떻게 쏟느냐에 따라 진정한 인연, 진정하지 않은 인연(인맥), 스쳐가는 인연이 되고, 한 번 형성된 인연도 이후의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위치가 달라진다. 진정한 인연이라도 몇 년 후에 스쳐가는 인연이 될 수 있고, 스쳐가는 인연이라도 몇 년 후에 진정한 인연이 될 수도 있다. 
 인연에 있어서 시간과 노력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의 인식에서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초,중,고의 친구들이 진정한 친구들이라고 말하곤 한다. 위의 그래프에서도 대학친구들 보다 초, 중, 고의 친구들이 상위에 랭크되어 있다. 그 이유는 바로 함께할 시간이 보장되어 있는가 없는가 때문이다. 초중고는 국가에서 지정한 커리큘럼, 조직에 따라 생활하기 때문에 싫든 좋든 함께할 시간이 보장되어 있다. 하지만 대학은 자신이 조정한 커리큘럼에 의해 생활하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할 많은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다. 대학 친구가 진정한 인연이 될 확률이 낮은 이유는 그 친구가 나빠서가 아니라 함께할 시간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②제한된 시간과 노력에서 어떠한 인연을 만들어 갈 것인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또 기울일 수 있는 노력은 제한적이다. 때문에 우리는 인간관계를 구축할 때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다. 진정한 인연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시간과 노력 속에서 서로 간의 신뢰를 구축할 수 있고, 상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하지 않은 인연(인맥)은 진정한 인연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일정 시간과 노력은 필요하다. 
 쓸 수 있는 시간과 노력이 100이라고 가정했을 때, A라는 사람은 20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5명에게 쏟아 5명의 진정한 인연을 구축하고, B라는 사람은 5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20명에게 쏟아 20명의 진정하지 않은 인연(인맥)을 구축했다.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옳다고는 말할 수 없다. 좁지만 깊은 인간관계로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넓지만 얇은 인간관계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표1. 진정한 인연/진정하지 않은 인연(인맥)의 장단점 분석표

 

 

진정한 인연을 중심으로 구축

인맥을 중심으로 구축 

장점

 

① 인간적인 접촉이 필요할 때 기댈 수 있다. 

 

① 다양한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쉽다.
②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③ 다양한 특성을 지닌 사람들을 경험해 볼 수 있다.

 단점 

① 한 명의 진정한 인연을 만드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② 유지에도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편이다. 
① 정말 필요할 때 인간적 접촉을 기대할 수 없다.
② 가벼운 인맥은 스쳐가는 인연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일이 될 수도 있다.
*진정하지 않은 인연의 단점은 법정스님의 글에서 잘 파악할 수 있다.

의견

진정한 인연과 인맥을 적절히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3. 자문자답

Q.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기면 진정한 인연과 진정하지 않은 인연을 구분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 또 그 사람에게 내가 노력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지는 것도 크게보면 운명이겠지만, 위에서 언급한대로 진정한 인연과 진정하지 않은 인연의 기준은 신뢰와 상성이며, 신뢰와 상성을 확인하기 위해선 본인의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Q.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은 진정한 인연으로 거듭나기 위한 필수 조건인가? 짧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서도 진정한 인연이 될 수 있는가?
-현재 진정한 인연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고, 그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을 경우를 상상해보자.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交友의 관계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뒷바침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Q. 
많은 시간을 나의 노력으로 만들 수 있는가?



Q. 
진정하지 않은 인연에 대해서는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Q. 
진정한 인연이라고 판단된 사람이 진정하지 않은 인연이 될 수 있을까? 진정하지 않은 인연이라고 판단된 사람이 진정한 인연이 될 수 있을까?
-
진정한 인연이라고 판단된 사람을 진정한 인연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관계를 유지하려는 시간과 노력 없이는 진정한 인연도 진정하지 않은 인연이 될 수 있다. 사람일을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으므로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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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하여


1. 배경

 내 주변에 소설을 유난히 싫어하는 친구가 있다. 나는 소설에 꾀나 재미를 느끼는 터라, 왜 소설을 싫어하는지 궁금해서 그에게 물어봤다. 그는 어떤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삶에 무게에 눌려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답답하고 했다. 또 심심찮게 바람피는 등장인물의 모습을 보면 그들의 상식이하의 인생이 진열된 글을 읽는데 자신의 시간을 쏟는 것이 시간낭비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아, 소설에 대해 이렇게 느낄 수도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감사하는 점은, 그가 소설에 대해 느끼는 나와는 상반되는 태도를 통해 '나는 왜 소설을 읽는가?' 라는 물음에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2. 소설을 읽는 이유 :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점이 흥미로왔나?(지극히 개인적인 주장)


ⅰ.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질문과 마주함으로써 새로운 생각의 영역 정립 그리고 통념에 묻혔던 생각들의 재정립 

 이 항목은 소설뿐만 아니라 책을 읽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다만 소설에서는 위와 같은 생각을 할 기회가 더욱 비번하게 제공된다는 것이다.

 그녀(사비나)가 이 교회에서 예기치 않게 만난 것은 신이 아니라 아름다움 이었다. 이 교회와 위령 기도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녀가 소란스러운 노래 속에서 며칠을 보냈던 청년 노둥대와 비물질적으로 유사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임을 그녀는 잘 알았다.미사는 마치 배반당한 세계처럼 느닷없이, 음성적으로 그녀에게 나타났기에 아름다웠다. 

 그날 이후 그녀는 아름다움이란 배반당한 세계라는 것을 알았다. 그 아름다움이란 박해자들이 실수로 어딘가에서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만 만날 수 있다. 아름다움은 노동절 행렬의 배경 뒤편에 숨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배경이 그려진 화폭을 찢어야만한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위의 대목은 소설 내의 등장인물인 사비나가 배신을 일삼는 심리적인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책의 표면적 내용만 이해 한다면 '사비나가 이러한 이유로 배신을 일삼는구나'라고 생각하겠지만, 사회적 통념상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배신을 자신의 인생에서 미덕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사비나의 태도를 보고 단순히 책에 적힌 내용만 이해하고 넘어갈 독자는 사실 없다. 위의 문단을 통해서 독자는 스스로에게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사비나가 위와 같은 이유로 배신을 일삼는 것이 과연 옳은 판단인지, 옳고 그름의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지, 더 근본적으로는 배신이란 과연 무엇인지에 까지 스스로에게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또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소설은 독자에게 다양한 것을 스스로 생각해볼 기회를 또 기존의 자신의 생각과 비교하고 그것이 그르다면 다시 재정립할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ⅱ. 심리분석

 소설의 꽃은 단연 등장인물과 그리고 인물 간의 갈등이다. 이는 소설 이외의 분야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참재미이다. 등장인물과 갈등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들의 심리 이해이다. 쉽게 말해 소설속 인물이 되어 입장바꿔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에 한발더 나아간 독자라면 등장인물의 입장에서 공감하는 것을 뛰어넘어 등장인물이 그러한 심리상태를 가지게된 더 근본적인 환경을 이해하고 그들의 심리상태를 정신분석학 입장에서 분석해보려는 시도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요코가 쉴새없이 아이에게 재잘대고 나간 뒤에도 그 목소리가 피리 소리처럼 여전히 주위에 여운을 남겨, 검게 번들거리는 낡은 현관 마루에 세워놓은 오동나무 샤미센 상자가 지닌 가을밤의 정적에도 시마무라는 왠지 마음이 끌렸다.
-설국 중에서

 주위의 환경이나 등장인물이 사소한 몸동작을 통해서 동장인물의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기법이 매우 인상적이다.

 

ⅲ. 인생의 대리경험

 소설 속의 등장인물은 현실적이지만 현실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다양한 경험을 하곤 한다. 물론 그러한 등장인물의 경험도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 가공된 것이지만 우리는 두 번 다시 살아 볼 수 없는 인생의 경험을 등장인물을 통해 대신할 수 있다. 


ⅳ. 작가의 숨겨진 의도파악

 소설은 말그대로 시작부터 마지막 마침표하나까지 작가에 의해 세심하게 다듬어진 가공품이다. 때문에 독자가 느끼기에는 사소하고 의미없는 것 같은 한 문장이라 할지라도, 작가는 수십번을 읽고 다듬고 글을 쓰기 때문에 소설내 어느 한 문장도 의미가 없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능숙한 독자는 소설의 문자를 초월하여 작가의 입장이 되어 소설을 볼줄안다. 작가가 어떤 방법으로 글을 구성하고, 다양한 표현 중 어떤 표현방법을 썼다는 것은 모두 의도된 것이며 작가의 입장에서 소설을 바라보면 글이 다르게 보일 때가 많다.


ⅴ. 한 번에 이해하기 힘든 소설의 한줄을 이해했을 때의 성취감

 지식제공을 목표로 하는 인문서, 자기계발서는 한 줄의 내용이 딱 그만큼의 내용만큼만을 독자에게 전달해 줄 수 있을 때 아름답다. 왜냐하면 지식전달이 주요목적이기때문에, 전달할 내용을 최대한 간결하게 전달하는 것은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은 지식제공을 목표로 하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한 줄의 내용이 딱 그만큼의 내용만을 담고있는 경우는 드물다. 때문에 깊게 이해하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분야이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것을 내포하는 한 줄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했을 때 그 성취감은 매우 크다.


ⅵ. 아름다운 표현

 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마치 내 온몸의 감각기관으로 전해지는 듯한 작가의 아름다운 표현이다. 때로는 사랑스럽고, 때로는 설레고,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무섭기도 한 훌륭한 표현들을 볼때면 글을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의 전률을 온몸으로 느낄 때가 있다.

1. 배경

 

JP모건 스탠리 인턴을 위한 엔트리시트를 작성해야 했다대학교에서 써왔던 레포트에 비하면 내용면에서나 분량면

에서 전혀 더 어렵고 복잡한 내용이 아니었지만엔트리시트를 보자마자 머리 뒤쪽이 뻑뻑하게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나 스스로 이게 스트레스구나라고 감지할 만큼 강렬한 느낌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곧 인턴이 시작되는 시즌이므로 인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지원을 준비할 때나 취업에 관한 이야기들을 가볍게 꺼낼 때마다 이런 강렬한 느낌이 나를 찾아왔었던 것을하지만그런 신호들이 감지될 때마다 나는 애써 그 신호들을 억압하거나 무시했다또 결국엔 아직은 생각하지 말자라고 합리화해버렸다내가 헤쳐나가야 할 문제들이 내 앞에 직면했을 때 새로운 도전에 대한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스트레스라고 단언할 수 있는 이런 강렬한 느낌이 내 뒤통수를 후려쳤던 건 굳이 기억이 아니라 몸으로도 기억할 정도였다그 신호들을 억압하거나 무시하거나 합리화했던 것은 분명 내 안의 방어기제였다나는 어떤 무의식을 감추고 싶어 이러한 방어기제들을 동원했는가나는 합리적 자아를 통해 왜라는 질문으로 끊임없이 무의식과 소통함으로써무의식의 영역에서 나도 알 수 없는 그 이유를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내고자 한다.

 

 

2. 거부감을 유발한 가능성이 있는 요인들

 

-지원서 자체의 작성이 어려웠는가?
-10
여년 동안 지속해온 학생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는 최초의 행동이 인턴 지원이기 때문에새로운 도전에 대한 불안감이 있는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가

    *자신감이 없는가

    *변화의 불안

    *존재의 불안

    *미래의 불안

-벌써부터 취직실패에 대한 불안감이 드는가?( 미래불안)
-
그룹워크프레젠테이션 같은 인턴 활동에 자신이 없는가?(→결국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에 관한 것)

학생때보다 취준할때 할게 많아지려나?

 

 

1.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왜드는가? -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는  자신이 "준비가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그런데 준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생긴다면 그것은 '변화'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새로움에 대한 긴장의 시간이 어느정도 흐르고 나면 두려움이 더뎌지게 되고  다른 진보를 위해 노력하는 힘과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것이다. 2. 두려움의 필요성은 충분히 필요한가? - 필요하다공지영작가의 '즐거운 나의 '이라는 장편소설을 읽은적이 있다작가는 말한다용기란 충분히 두려울걸 알지만  두려움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생기는 힘이라고나역시  말에 동의한다세상의 어떠한 도전도 두렵지 않은것이(두려운것이 인지상정이다.) 사실이다 두려움을 감추고 부정하기보다는 순리라고 인정하고무엇이  소중한지 곰곰히 고민해 본다면 새로운 도전에 대한   용기가 생길 것이라 확신한다.

 


3. 거부감을 유발한 무의식의 원인의 가설1 : 지원서 자체의 작성이 어려웠는가?


 
가장 일차적인 이유부터 분석해 나가고자 한다내 속의 무의식이 거부감을 보인 이유는 지원서 자체를 작성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인가이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 위해 지원서의 질문을 언급하자면지원서의 질문은 당사에 인턴으로 지원하는 이유 400자로 논하는 것이었다
지원서의 질문이 나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는 이유 분석
 
당사에 인턴으로 지원하는 이유 같은 질문은 평소에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있는 생각이 아니다취직과는 아직 담을 두고 살아온 학생이라는 벽 속에서 지식의 축적과 학생이 가질 수 있는 여유에 심취해있는 나로서는 더더욱 평소에 만나기 어려운 질문이다내가 익숙하지 않은 낯선 질문을 받았을 때 답하기는 거북하다
 그렇다면 
당사에 인턴으로 지원하는 이유 대해 지금부터 생각해보아야 한다먼저 당사에 해당하는 JP모건 스탠리가 어떠한 회사인지 정보를 수집해야 하고또 그곳에서 인턴이라 함은 어떤 일을 하는 것인지도 알아야 한다여기 까지는 질문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 정보수집이다다음으로는 인턴으로 (이러이러한일을 하는 (이러이러한) JP모건이라는 회사에 내가 왜 지원하는지 대한 이유를 내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인턴이란 비교적 모두에게 기회가 열려있는 제도이기 때문에 내가 흥미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지원해 볼 수 있었을 텐데왜 나는 하필 이 회사에 매력을 느꼈는지 스스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③ 당사의 지원이유에 대해 곧바로 대답할 수 없는 회사에 내가 지원하고 있다면이 회사는 내가 진정 흥미를 가지고 있는 회사이고 나는 이 회사에 지원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자문이 든다이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직결되는 비판이다나는 돈의 흐름과 세상의 흐름을 알기 위해 금융의 영역에 관심이 있었다그래서 금융 쪽의 인턴을 알아본 것이다굳이 스스로 찝찝하다면 이렇게 하자나는 구체적이지 않지만 사무 쪽의 업무에 대해서는 비교적 포괄적으로 일을 수용할 생각이 있으나이 쪽의 일은 정말이지 안되겠다 라는 곳에 대해서는 지원하지 말자.
가설의 부분적 수용과 폐기의 이유 분석
 
지원서 자체의 작성이 어려웠는가 라는 내 거부감의 이유에 대한 가설은 부분적으로 맞지만 근본적인 이유가 아니다설령 질문의 내용이 어렵다 하더라도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분량도 400자에 지나지 않는다만약 수업에서 과제로 더 어려운 질문을 받는다고 가정하면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받았겠지만 이처럼 위기감을 수반한 스트레스를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원서의 작성에 대해 스트레스 받을 필요가 없는 이유 분석
① 어떤 문제(지금과 같은 경우는 인턴 지원서를 작성해야 하는 것)가 내 앞에 닥쳤을 때그 문제를 풀어내야 하는 것은 지금에야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평생 있는 일이다
② 나는 생각하는 연습과 작문 연습을 오래도록 해왔기 때문에 인턴 지원서를 작성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4. 
거부감을 유발한 무의식의 원인의 가설2 : 사회인이란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가?

죽음이 슬픈 이유에 대하여
 

 죽음이 슬픈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이 무엇인지, 슬픔이 무엇인지가 정의되어야 한다. 죽음을 단순하게 생물학적 입장에서만 정의할 수도 있지만, 철학적인 죽음은 그보다 복잡하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셸리 케이건)」에 의하면 죽음을 명확히 정의하기 위해서는 물리주의와 이원론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물리주의란 인간은 육체만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며 이원론은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 졌다는 주장이다. 즉, 물리주의와 이원론에 대한 논의가 선행된 후에 죽음이란 육체의 죽음인지 영혼의 죽음인지 영혼과 육체의 죽음인지에 대해 정의해야하는 것이다. 본 포스트에서는 죽음에 관한 장황한 정의는 생략하고 슬픔에 대한 이야기와 죽음이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이유에 대한 생각에 대해 정리해본다.


1. 슬픔에 대하여

ⅰ. 슬픔이란 무엇인가? 

  슬픔은 소중했던 뭔가를 잃어버렸을 때 느끼는 상실감()의 표현이다. 슬픔을 유발하는 중요한 상실(loss)의 대상을 정리하면 사람, 물건, 지위, 가치  네 가지가 있다. 애인·친구·가족과의 이별, 질병, 사고, 죽음, 싸움 등이 슬픔을 초래하고, 추억이 깃든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정든 집을 떠날 때,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동료들로부터 따돌림당할 때,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 성공하거나 존경하던 사람한테 실망할 때 등 여러 가지 상황에서 슬픔을 느끼게된다.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c.s루이스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는 슬픔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나는 내가 어떤 (슬픔의)상태를 묘사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슬픔의 지도를 그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슬픔은 '상태' 아니라 '과정'이었다. 

-c.s루이스 '헤아려본 슬픔' 中

ⅱ. 슬픔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슬픔은 우울함을 동반하여 부정적인 이미지로 보이기 쉽지만, 엄밀히 말하면 다른 기본적인 감정과 마찬가지로 슬픔은 좋고 나쁘고의 가치판단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슬픔이라는 과정을 이후의 변화하는 나의 모습을 통해서 내가 겪었던 슬픔이 좋았던 것인지 나빴던 것인지 판단하려 한다는 것이다. 슬픔을 통해 더 좋은 내가 되었다면 내가 경험한 슬픔은 좋은 슬픔이 될 수도, 슬픔을 통해 더 안좋은 내가 되었다면 경험한 슬픔은 안 좋은 슬픔이 될 수도 있다. 즉, 슬픔 자체는 가치 판단 대상이 아니지만, 슬픔을 대하는 나의 대처능력을 통해 좋은 것으로 기억될 수도 나쁜  것으로 기억될 수도 있다.  슬픔은 인위적으로 피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며 좋은 것인지 안좋은 것인지 평가도 할 수 없는 매우 자연적이고 중립적인 존재다. 따라서, 슬픔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슬픔을 대하는 나의 태도이다.


ⅲ. 슬픔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슬픔을 주는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솔직한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 솔직한 자세란, 내가 느끼는 슬픔을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고 슬픔이 우리에게 주는 그만큼만 그대로 받아내는 것이다. 그대로 받아낸 다는 것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눈물, 하소연, 분노 등의 자연스러운 해소 방법을 통해 뜨겁게 표현하고, 또 어떤 이유로 슬픈지 또 그 슬픔이란 대상이 내 마음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냉철하게 분석해서 그 슬픔을 나의 컨트롤 하에 두는 것이다.(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로 통할 수 있을까?) 
 프로이트의 구조이론에 근거하여 위의 과정을 분석하면, 의식과 무의식이 원활이 소통할 수 있도록 하고(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기) 슬픔이 가능한 한 의식의 영역에 많이 머무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냉철한 분석). 슬픔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않으면, 무의식으로 침전한다. 무의식은 내가 의식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한 번 무의식으로 빠져버린 대상은 다시 찾아내기 쉽지 않다. 무의식에 숨어버린 슬픔은 나도 모르는 마음 속 어딘가에서 더 큰 상처가 되어 다시 돌아온다. 


2. 죽음이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이유 ; 나를 향한 슬픔, 죽은자를 향한 슬픔

ⅰ.나를 향한 슬픔

① 그리움, 아쉬움, 후회감, 두려움 ; 곁에 있는 사람이 죽었을 때 일차적으로 슬픔을 느끼게 되는 원인들

- 그/그녀와 함께 만들었던 추억에 대한 '그리움'

그/그녀와 함께 만들었던 과거의 행복한 추억을 미래에는 더 이상 만들지 못할 거라는 '아쉬움'

- 스스로는 더 잘해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그녀에게 더 잘해주지 못했다는 '후회감'

- 더 이상 그/그녀의 도움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


② 대체불가능성

 내 곁의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가 슬픔을 느끼게 되는 일차적인 이유는 그리움, 아쉬움, 후회감, 두려움이다. 이때, 그리움, 아쉬움, 후회감, 두려움의 원인이 되는 공통분모를 찾아보면, 결국 위 네 가지의  슬픔의 감정은 대체불가능성이라는 공통적 원인에서 기인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대체불가능성이란, 어떤 사람만이 가진 고유한 외적모습 그리고 그 사람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경험한 생각을 토대로 헝성된 고유한 내적모습이 합쳐진 존재의 유일성을 의미한다.  

- (대체불가능한) 그/그녀와 함께 만들었던 추억에 대한 '그리움'

- (대체불가능한) 그/그녀와 함께 만들었던 과거의 행복한 추억을 미래에는 더 이상 만들지 못할 거라는 '아쉬움'

- 스스로는 더 잘해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대체불가능한) 그/그녀에게 더 잘해주지 못했다는 '후회감'

- 더 이상 (대체불가능한) 그/그녀의 도움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


③ 죽은자의 대체불가능성이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를 향한 슬픔

 대체불가능성에서 기인된 그리움, 아쉬움, 후회감, 두려움이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이유는 "다시는 그/그녀와 시간을 보낼 수 없을 것" 이라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좀 더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보기 위해 다시 질문하면, "다시는 그/그녀와 시간을 보낼 수 없을 것"이라는 마음은 왜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가? 죽은자는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므로 세상에서 더 이상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즉, "다시는 그/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을 것"이라는 대체불가능성에서 기인된 슬픔의 원인은 죽은자를 향한 슬픔이 아니라 나를 향한 슬픔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가 그/그녀를 통해 느낄 수 있는 나의 행복의 감소」라는 사실이 대체불가능성이라는 매개를 거쳐 슬픔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④ 나를 향한 슬픔에 대한 그 외의 논의

 A. 슬픔의 깊이 ; 죽은자가 나와 어떻게, 얼마나 관련있는가?

 슬픔이 깊이는 그 이유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음을 알 수 있는다. 그리움이 아쉬움보다 더 슬프다거나 후회감이 두려움보다 더 슬프다거나 그 원인에 대한 우위를 따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움, 아쉬움, 후회감, 두려움의 감정은 그 중 어떤 슬픔의 원인이 더 슬픈 것이 아니라, 내가 사자死者와 어떻게, 얼마나 관련이 있느냐에 따라 슬픔의 깊이가 다르다. 그와 나눈 추억이 많다면 그만큼의 그리움, 그와 즐거운 시간을 많이 보냈다면 앞으로 그와 함께 보낼 수 있었을 즐거운 시간들에 대한 그만큼의 아쉬움이, 내가 그에게 잘 해주어야 하는 관계에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그만큼의 후회감이, 내가 그에게 많이 의존하고 그를 많이 존경해왔다면 그가 사라진 것에 대해 그만큼의 두려움이 파도가 되어 가슴 깊은 쪽까지 차갑게 적셔온다. 

 대체불가능성에 의한 죽음은 나와 관련이 있는 죽은 자와 내가 매우 친밀한 관계였는지 혹은 서먹한 관계였는지를 불문하고 슬픔을 준다. 친밀하면 친밀할 수록 그리움과 아쉬움때문에 반대로 서먹했다면 후회감에 슬픔을 느끼게 된다.



ⅱ. 죽은자를 향한 슬픔


 하루에도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는다. 그 엄청난 수의 죽음은 대부분 우리와 전혀 상과없는 일이지만, 가끔은 우리에게 중요한 존재인 누군가가 죽기도 하므로 어떤 죽음은 우리와 아주 상관있는 사건이 된다. 그래서 그 누군가의 죽음은 우리에게 특별한 상실감으로 다가온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체할 수 없음'의 속성을 죽은 사람의 성격이나 특징으로 기술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서술한 내용을 살펴보면, 어느 누구도 미하일 로프를 잘 알지 못했다는 점을 명확히 짚고 있다. (...)즉, 한 인간의 특성과는 다른 중요한 무언가가 한 죄수의 죽음을 바라보는 이들의 반응과 연관돼 있음을 알려준다.

                                                                                -크리스토퍼  해밀턴 '일생에 한 번 내게 물어야할 것들' 中

 나와 상관있는 사람의 죽음은 죽은 사람의 성격이나 특징의 ' 대체할 수 없음 ' 의 속성이 원인이 되어 나에게 슬픔으로 다가온다. 반면, 나와 상관없는 죽음은 ' 대체할 수 없음 '의 원인을 지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나와 상관없는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고 애도하기도 한다. 즉,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나와 상관없는 죽음에 느끼는 슬픔에 대해서는 사자의 성격이나 특징의 ' 대체할 수 없음 ' 의 속성이 원인이 아닌 다른 중요한 무언가가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① 인간적 삶이 끝난 것에 대한 연민, 안타까움


 친구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내적인 삶이란, 친구가 자신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노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동물에게는 내적인 삶이란 게 없다. 때문에 하이데거는 동물은 죽을 수 없으며, 단지 소멸verendet할 뿐이라고 말했다. (...)

 하지만 이 불가사의(내적인 삶의 절멸;죽음)와 맞닥뜨리기 위해 망자의 성격을 조목조목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죽은 이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충격을 받고 불가사의에 일격을 당하고 만다. 이때 우리는 죽은 이에게 내적인 삶이 있었으며 그가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열심히 고군분투했다는 점을 인식하기만 하면 된다.

-크리스토퍼  해밀턴 '일생에 한 번 내게 물어야할 것들' 中

 위에서 언급하는 내적인 삶이란 '자신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노력'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기준이기도 하다. 동물은 순환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순환하는 삶에서는 과거의 존재와 현재의 존재가 구별을 보이지 않는다. 순환하는 삶은 단순히 언제, 무엇을 했다는 기록만으로 끝난다. 하지만, 인간의 삶을 순환하는 삶으로 인식할 수는 없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제와 오늘 같은 곳에서 일어나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생활패턴을 지내고 같은 곳에서 잠이들더라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존재가 아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존재가 되어있다. 즉,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로써 매 시간 다른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둥글게 순환하는 삶이 아닌 직선의 삶을 살아간다. 아기에 대해 느끼는 연민도, 죽은자에 대해 느끼는 연민도 이 때문이다.아기에 대해서는 '이 순수하고 연약한 존재가 변화무쌍 속에서 고통스럽기도한 인간의 삶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을까?' 하는 연민을 지닌다. 죽은자에 대해서는 그의 육체적 삶이 멈춘 것에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의 직선적인 삶의 구조가 끝난 것이 당혹스러운 것이다.하이데거는 죽음을 '자신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끝나는 것 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자신의 삶에 대한 이해가 없는 동물의 생물학적 끝은 죽음이 아닌 단순한 소멸인 것이다.



 



3.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곁에 있는 사람의 죽음뿐만 아니라 우리와 연관이 없는 사람의 죽음에 이르기 까지 죽음이란 우리에게 슬픔 이외의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래 불안에서의 인용문은 죽음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바를 제시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의 가장 큰 효과는 나일 강변에서 술을 마시든, 책을 쓰든, 돈을 벌든, 우리가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로부터 가장 중요한 일로 시선을 돌리게 해준다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덜 의존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신에 죽어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 자신의 소멸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생활방식을 향해 눈길을 돌리게 된다.

-알랭드보통 '불안' 

 알랭드보통의 불안에 따르면 우리는 죽음의 간접 경험을 통해 자신의 인생의 더욱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할 기회를 얻는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 후 인생의 경로가 눈에 띄게 변하는 사람들을 보면 전혀 설득력 있는 이야기 인것 같다.


4.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생각들

ⅰ. 삶과 죽음 혼재론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 뿐만 아니라 많은 소설가 또한 삶과 죽음의 혼재에 관해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삶의 끝에 죽음이 도래한다는 삶과 죽음의 단절론을 거부하고, 삶 속에 곧 죽음이 있고 죽음 뒤에 삶이 있을 거라는 삶과 죽음의 혼재론을 믿는다. 삶 속에 어디에나 이미 죽음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이 한 껏 친절하게 느껴지기 까지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생각으로 삶속에 죽음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죽음을 넓은 의미로 파악하여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죽음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비가시적인 죽음도 죽음이라고 한다면 – 가령 나의 도전의 죽음나의 의지의 죽음사랑의 죽음우정의 죽음 – 우리의 삶은 이미 많은 죽음을 경험했고 또 경험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간접적인 죽음의 경험 후에도 우리는 죽음 혹은 소멸의 고통에 전율한다이러한 고통덕분에 우리는 실제의 죽음에 대하여 예비 경험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삶 속에 죽음이 혼재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예를 들어사랑의 소멸 후 (여기서 사랑은 소멸이라 해야 할 지 죽음이라 해야 할 지)우리는 찢어질 듯한 가슴 속 상처를 느낀다이처럼 이미 삶 속에 혼재하고 있는 죽음은 우리에게 죽음의 공포를 경감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의 도처에 존재하는 죽음에 관하여(삶과 죽음 혼재설)-죽음에 관한 포스트 인용

 죽은 자의 땅인 릉과 그것을 둘러싼 산자의 소나무 숲. 그 사이의 돌담. 그리고 그 돌담위에서 누워있는 나. 이런 생각을 하니 애매한 감정이 불쑥 느껴졌다.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그 돌담 위에서 나는 한가롭게 봄바람이나 만지면서 멜로디에 전율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이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죽음은 무언가에 의해서 단절된 상반된 것이 아니다. 소나무 숲의 일부가 돌담이기도 하고, 릉의 일부가 돌담이기도 한 것처럼 삶속에 죽음의 일부가 존재하는 것이고, 죽음 속에 삶의 일부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단절된 죽은 자의 땅이나 산자의 땅에 있는게 아니라, 그 사이 어딘가의 돌담위에서 위태롭지만 행복하려고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즉, 삶과 죽음은 함께 녹아있는 것이다. 완벽한 삶이나 죽음이란 애초부터 없다.

- '가치관제작소 (삶과 죽음에 관해서)' 

도쿄에 올라와서 기숙사에 들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내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 그것 뿐이였다.

-중략-

 처음에는 그렇게 잘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잊어버리려해도 내 안에는 뭔가 뿌옇게 흐린 공기덩어리 같은 것이 남아 잇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덩어리는 단순하면서도 뚜렷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형상을 이런 말로 바꿔 놓을 수가 있다. 그것은 이런 것이었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말로 해버리면 평범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공기덩어리로서 몸 안족에서 느겼던 것이다. 당구대 위에 나란히 놓여 잇는 네 개의 빨간색과 하얀색 공 안에도 죽음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마치 미세한 티끌처럼 폐 속으로 들이마시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죽음이란 것을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잇엇다. 즉 죽음은 언젠가는 확실히 우리들을 그 손아귀에 거머쥐게 된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들을 사로잡는 그날까지 우리들은 죽음에 붙잡히는 일이 없는것이다.. 라고

 -중략-

그러나 기츠키가 죽은 밤을 경계선으로 하여, 나로선 이제 그런 식으로 죽음을 단순하게 파악할 수는 없게 되어 버렸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저쪽에 있는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 죽음은 ;나; 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잇는 것이며, 그 사실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런 공기덩어리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열여덟 살의 봉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심각해지지 않으려고도 노력했다. 심각해진다는 것이 반드시 진실에 가까워진다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어슴푸레하게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ⅱ. 죽음은 영원한 현재보다 축복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유한한 삶에 더욱 충실할 수 있다. 무한한 삶 속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갈까? 운동 경기에 시간이 주어진 만큼 선수들이 주어진 시간내에 자신의 기량을 더욱 뽐내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유한한 삶은 우리에게 더욱 윤택한 삶을 선사한다.


ⅲ. 죽은 자의 땅으로의 합류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부모, 선생, 친구, 연인 등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앙한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죽음은 우리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은 때로 우리보다 먼저 이승을 건너기도 한다. 죽은은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해 마지않던 먼저 죽어버린 그들과 다시 함께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준다. 배우자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한 남자가 '이제 당신 옆으로 갈게' 라는 유서만을 남기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건, 죽은 자의 땅으로 합류해 내가 사랑하고 존경했던 사람과 다시금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 아닐까.



5. 죽은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나를 꼭 기억해 줫으면 하는 것. 내가 존재했고, 이렇게 와타나베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언제까지라도 기억해줄래?』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미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 등장하는 나오코의 한 마디는 우리에게 중요한 두 가지를 알려준다. 

 그 첫번째는 죽은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그들이 죽고나서도 산자가 그들을 기억해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 산자가 그들의 존재를 기억해주는 것이 죽은자에게 혹은 죽음을 맞이한 자에게 있어서 가장 뜻 깊은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의 2가지를 이해해야한다. 그 두 가지란, 상념적 존재와 물질적 존재이다. 여기에 상념적 존재와 물질적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가 있다. 가령 지구가 어느 날 사라질 거란 예고도 또 사라진 흔적도 없이 일숨에 사라졌다고 가정해보자. 탁상 위에 놓여있던 쿠키가 누군가에게 한 입에 먹히기라도 한 것처럼 지구라는 행성 전체가 그렇게 쿠키처럼 사라졌다고 생각해보자. 무엇이 남는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지구에서 몇 억 광년 떨어진 행성의 우주인이 지구를 끈질기게 관찰하고 있었고 그 우주인은 지구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게 되었다. 그 우주인은 지구를 기리고자 지구가 어떤 행성이었는지, 또 그 행성의 위치는 어디였는지, 지구라는 행성 안에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 지구의 생명체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를 기록하고 후대에 남긴다. 이번엔 무엇이 남는가? 지구에 대한 기억이 남는다. 이처럼 어떤 물질적 존재가 있었고 그것이 사라졌을 때 그 존재의 기억마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로 끝인 셈이지만, 존재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그 존재는 어떤 측면에서는 사라졌다고 할 수 있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여전히 살아있다고 할 수도 있다. 반대로 어떤 물질적 존재가 현존할 때, 그 존재에 대한 기억이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면, 그 존재는 어떤 측면에서는 살아있으나 어떤 측면에서는 사라졌다고 할 수도 있다.

죽음을 맞이하려 하는 자는 이처럼 자신의 물질적 존재는 사라지지만 상념적 존재는 잊혀지길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념적 존재로써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는 한 산자들과 함께 할 수있을 거라는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위와 같은 시각의 연결선상으로 볼 때, 실제 물질적 존재의 죽음이 아닌 상념적 존재의 죽음-가령 이별과 같은-은 물리적 존재의 죽음과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완전한 이별이 없기에 완전한 상념적 존재의 소멸도 없겠지만, 완전에 가까운 상념적 소멸이 가능하다면 이별한 사람의 물질적 존재가 현존하는지 사라졌는지는 알바가 없게되는 것이다.



섹스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갖는 것이 왜 중요할까?


1. 섹스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섹스 : 이성간 혹은 동성간(나는 동성애를 지지한다)의 육체적 행위

  섹스의 정의 자체는 비교적 간단하다. 추상적인 의미가 아닌 시각적이고 물질적인 행동을 수반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대상의 중요성을 분석하기에 앞서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대상의 개념부터 정의해야하는 추상적인 대상-행복, 사랑, 우정 등-들에 비하면 상당히 수고가 줄어드는 느낌이다.

 섹스라는 것은 행위 그 자체보다, 행위의 목적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한 특수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섹스의 존재는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하는데에 그 근본적 목적이 있다. (몇 몇 자웅동체 생물을 제외하면) 이는 지구 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생물체가 후대에 자신을 남기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섹스를 택했고, 왜 지구상의 생물체는 이러한 방법을 취했냐함에 대한 답은 오로지 신의 뜻에서만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욕을 이드(Id)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욕동 중 하나로 보았는데, 생존을 이어나가기 위한 투쟁이 인간의 역사 였던 점을 곱씹어보면 프로이트가 인간 심리의 이해에서 성욕을 그리 강조한 것도 어느정도 이해가 간다. 즉 섹스는 자신을 후대에 남기기 위한 본능적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섹스는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이라는 중요성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정도로 강력한 「쾌락」이라는 것을 부산물로써 지니고있다. 섹스는 오르가즘이란 말로 대표되는 매우 높은 수준의 육체적 쾌감을 느낄 기회를 준다. 오르가즘이 인간에게 주는 쾌락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쾌락이 섹스의 목적인지 부산물인지 착각하게 만든다.

 이 때문에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와 「쾌락의 섹스」는 섹스의 목적이라는 타이틀을 두고 끊임없는 싸움을 벌여야 한다. 사실 섹스의 목적이라는 타이틀의 주인공은 전자의 섹스이지만 후자의 섹스는 시시틈틈 그 자리를 노린다. 특히나, 피임의 기술이 발달하여 전자의 섹스의 힘이 약해질대로 약해진 현대는 후자의 섹스가 타이틀 자리에 오르는 장면도 쉽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섹스 윤리란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의 지원군이다.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가 타이틀자리를 뺏기지 않도록 도와주는 초자아적 생각이다. 우리는 섹스를 통한 육체적 쾌락에 유혹당할만 하지만, 섹스는 쾌락이전에 생명의 탄생을 목적으로한 행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는 언제나 '섹스를 통해 창조될 수도 있는 생명'과 연관되는 것으로, 생명이 섹스와 연관되면 섹스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 진다. 인간의 생명이란 가장 존중받아야할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에 대해서도 책임감 있게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쾌락의 섹스」는 옳지 않은 것인가?

 하지만 「쾌락의 섹스」가 무조건 비판받아야할 대상은 아니다. 글 서두의 섹스의 정의에 포함된 동성간의 섹스는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의 기능은 만족시킬 수 없는 행위로, 「쾌락의 섹스」가 갖는 이점에 대해서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행복의 충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오히려 발달된 피임법으로 능숙하게 컨트롤된 「쾌락의 섹스」가 우리에게 주는 만족감은 행복에 더 맞닿아 있지 않은가 라는 의문도 제기된다. 

 이를 분석해보기 위해서는 「쾌락의 섹스」가 지닌 이점을 알아보아야 한다. 섹스가 쾌락을 줄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무릇 육체적인 쾌락때문은 아니다. 그 쾌락 속에는 정신적인 요인도 포함된다. 사랑하는 남녀, 남남, 녀녀가 만나 이루는 섹스를 통해 인간은 그 어떤 스킨쉽을 능가하는 정신적 교감을 다지고, 서로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의 고리타분한 성격이 우리에게 주는 위압감과는 완전히 다른 행복감을 우리에게 맛보여주고 섹스를 나누는 서로의 관계도 진전된다. 

 정리하면, 섹스라는 행위는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와 「쾌락의 섹스」라는 목적을 지닌다.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는 섹스 윤리로서 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포함하고, 「쾌락의 섹스」는 육체적쾌락, 정신전쾌락(정신적 교감, 존재감 확인)을 포함한다. 섹스가 갖는 이미지가 무거워지는 이유는 전자의 섹스때문인데, 발달된 피임으로 전자의 섹스가 같는 성질을 불완전하게 제거하면 섹스라는 행위에는 육체적쾌락, 정신전쾌락(정신적 교감, 존재감 확인)만 남아 우리는 섹스라는 행위로 하여금 행복을 영위할 수 있다.


3. 

 하지만, 「쾌락의 섹스」는 행복을 줄 수 있는 행위이지만, 섹스의 목적이라는 타이틀에서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는 언제나 「쾌락의 섹스」의 누르고 1등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불완전한 피임은 일시적으로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를  시상대 밖으로 끌어내지만,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가 잠깐 자리를 비운사이 「쾌락의 섹스」가 1등의 자리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2등의 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가 가진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상기하며 인간본능 섹스의 중요성을 고수하는 것이 섹스윤리이다. 최소한의 섹스윤리도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 사회에서는 인간의 생명과 그 생명의 삶에 대한 의미도 무색해질 것이다. 

  「쾌락의 섹스」의 이점만을 누리고 싶은 남성은 정관수술을 하라. 그렇다면,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가 갖는 책임감은 완전히 사라질테니.


4. 원나잇 스탠드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논의에 의하면, 섹스는 생명에 대한 책임감, 윤체적 쾌락, 정신적 쾌락으로 구성된다. 이 구성요소로 원나잇 스탠드를 평가하고자 한다.

 

섹스가 갖는 성격 중 원나잇 스탠드가 만족하는 구성요소

 생명에 대한 책임감

육체적 쾌락

정신적 쾌락(정신적교감,존재확인) 

 X

 


 원나잇 스탠드는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를 위한 섹스가 아니다.  원나잇을 즐기는 인간들의 머리속엔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는 시상대에 초대조차 못된다.(이를 섹스윤리가 무너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하루밤을 즐기고 다음날 일어나서 자연스럽게 자기갈길가는 이들은 상대에게 정신적교감, 존재확인과 같은 정신적 쾌락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원나잇은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행위이다.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원나잇은 비판받아 마땅한가? 육체적 쾌락으로 상호간에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 좋은것 아닌가? 프로이트의 구조이론을 빌려 섹스가 갖는 성격들을 분석하면, 생명에 대한 책임감은 초자아에 해당하며,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은 이드에 해당한다.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은 같은 이드에 해당하지만 그 성격이 상이한데, 육체적 쾌락은 정신을 배제한 육체가 느끼는 쾌락이며 정신적 쾌락은 말 그대로 정신이 느끼는 쾌락이다. 

육체적 쾌락은 인간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매우 본능적인 욕구이다. 이드, 자아, 초자아에 관한 글을 이용하면

 욕구와 욕구의 만족 외에 알지 못하는 유아는 외부의 자극에 대한 지각체계를 발전시키며 이것이 '초기형태의 자아'로 분화된다(이드로부터 자아의 분화). 둘째, 이드에서 자아의 원시적 분화에 상응하여 욕구로부터 성(sexuality)이 독자적으로 분화하기 시작한다(욕구로부터 성의 분화). 그리하여 처음에는 욕구와 섞여 있던 성이 독자적으로 분화되기 시작하여 구순기, 항문기, 남근기 등의 순으로 리비도의 순차적 발달국면을 통과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아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진입하게 되고 그것이 소멸하면 아이의 마음속에는 초자아의 원형이 형성된다(자아로부터 초자아의 분화)

"욕구와 욕구의 만족 외에 알지 못하는 유아" 가 느끼는 가장 초보적인 수준의 욕구가 육체적 쾌락인데, 이는 동물과 다를 바가 없는 상태이다.

 즉, 원나잇은 그 성격으로 보아 자연상태의 동물과 하등 다를바가 없는 육체적 욕구만을 갈망하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아니, 최소한 동물의 교미는 후대를 남기려는 목적만을 지니며, 그 결과 태어난 자신의 새끼들에 대해서는 독립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까지 돌봐주므로 책임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섹스의 다른 성격들을 무시한 채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동물 이하가 되는 수모를 겪든, 동물 이하가 되어도 상관없으니 원나잇을 통한 소소한 쾌락을 느끼든 어느쪽의 손익이 더 큰지 판단하는 것은 당신의 몫이다.(인간으로서의 자존심 vs 쾌락)


5. 지인의 반론과 그에 대한 반반론

ⅰ. 반론1

매슬로 욕구 5단계설에서는 최하등의 욕구에 성적욕구도 포함되는데, 안전욕,식욕,성욕 등의 기초적 욕구를 충족하고 나서야 비로소 좀 더 고차원적 욕구를 충족하려고 한다고 한다. 리비도를 가장 최하등의 욕구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방식이 번식의목적과 정신적 교감을 배제한, 이 글에서 말하는 소위 '숭고한'행위가 아닌 원나잇이고 매춘이라고해서 그 사람이 동물적이고 원초적 욕구만을 추구하는 사람라고 비난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매슬로는 욕구를 단계별로 나누어두는데, 기초적 본능을 채운 후에서야 그 상위계층의 욕구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반론1에 대한 반론)
 본문의 원나잇에 관한 주장을 정리하면 "섹스의 다른 성취가능성(생명존중의 마음, 정신적 쾌락)을 무시한채 육체적 욕구만을 채우려는 원나잇은 동물적 욕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원나잇은 인간 이하인 동물의 행위이다." 이다. 

비판대로 인간은 인간이기 이전에 동물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가장 근본적 욕구인 안전욕, 식욕, 성욕을 달성하고서야 고차원적인 욕구를 갖추기위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이 주장을 바꿔말하면, 성욕은 인간만이 영위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욕구가 아닌 일차원적인 동물적 욕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동물적 욕구를 충족하려는 인간의 본능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본능은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섹스는 매슬로가 말하는 단순한 성욕(여기서는 동물적, 육체적 욕구)과는 다르다. 인간의 섹스는 동물적 쾌락 이상의 가치를 지니며 그것이 동물과는 구분되는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된다. 교미와 섹스는 모두 성욕을 만족시키는 행위이지만, 교미를 할것인지 섹스를 할 것 인지는 개인의 가치판단에 달려있다. 

ⅱ.반론2

글로벌시대의 사회적 통념상 원나잇 스탠드에 대한 시비의 잣대는 온전하지 않다. 글에서는 인간 내에서 어떤 사회적 통념과 맞아떨어지도록 또 그런 의미에서 바르게 형성된 슈퍼에고를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슈퍼에고는 후천적 학습이므로 개인이 성장한 사회적 배경이 영향을 미친다. 원나잇이나 매춘을 하는 사람을 향한 비난은 '나의 사회에서 학습받은 초자아는 당신네의 초자아와는 다르다' 라는 논리로서 반박될 수 있을 것이다.


(반론2에 대한 반론) 

비판의 내용을 정리하면, "글에서는 어떤 초자아를 전제로하고 있는데 성장환경마다 초자아는 다르게 형성될 수 있으므로, 초자아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는 것이다.

 비판대로 본문의 주장에는 어떤 사회에서 학습된 "올바른 초자아"가 전제되었고, 그 "올바른 초자아"의 명확한 정의가 결여된 오류를 인정한다. 따라서 "올바른 초자아"를 정의하고자 한다. 
 초자아는 인간의 관계에서 생겨난다. 나의 욕구만을 만족시키자 한다면 타인의 욕구에 피해가 가므로, 다른 사람의 욕구를 방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나의 욕구를 최대한 발휘하려는 노력이 가장 「기본적 의미의 초자아」이다.

 본문의 초자아에 해당하는 섹스윤리는 인간의 생명의 소중함을 근거로 한다. 인간의 생명에 관한 논의는「기본적 의미의 초자아」를 넘어서는 영역이다. 생명을 해치려는 행위나, 생명을 방관하는 행위는 다른 사람의 욕구를 방해하지 않는 것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올바른 초자아"를「기본적 의미의 초자아」라고 정의한다면, 그 속에는 생명존중의 개념도 포함되어 있다. 즉, 본문에서 원나잇이나 매춘을 비판하는 근거인 섹스윤리는 생명을 논리의 베이스로 하므로, 만국적으로 통한다고 할 수 있는 「기본적 의미의 초자아」보다 더 근본적인 도덕관념이다.
 생명 존중의 개념을 포함하는「기본적 의미의 초자아」는 교육이나 환경으로 초자아의 형성이 어떤 식으로 바뀌건 간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에게 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시,「기본적 의미의 초자아」조차 만족되지 못하는 사회는 더 이상 올바른 사회로서의 의미도 없다고 할 수 있으며,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로 밖에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1. 우리는 왜 행복을 원하는가?

  행복의 정의에 의하면 행복은 자기만족이다. (타인의 행복을 존중한 상태에서) 자기만족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정신 상태를 포괄적으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샤워를 할 때의 만족감, 타인을 도와줌으로써 얻어지는 만족감,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의 만족감, 자신을 멋지게 치장했을 때의 만족감, 오락을 즐길 때의 만족감, 대자연을 느낄 때의 만족감, 지적 성취를 이루었을 때의 만족감 등 만족감의 원인이 되는 상위개념을 생각하면 그 가짓수가 셀 수 있을 정도로 압축되겠지만, 개개인은 모두 다른 개성을 지니기 때문에 피상적으로 우리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가짓수는 사람의 수만큼 많다고 보면 된다.(Q : 행복은 자기만족. 그렇다면 자기만족은 무엇인가? 자신의 존재가 인식될 때 자기만족을 이룰 수 있나?)  행복은 욕구의 만족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아래의 메커니즘과 같이 욕구가 만족될 시에 행복하며, 결핍될 때 불안/스트레스와 같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감정과 생각이 들어선다. 한층 더 나아가서 욕구란,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존재 - 욕구 - 행복과 불행 이라는 인과관계를 따라가 봤을 때, 궁극적으로 우리가 행복을 원하는 이유는 '존재'다.(2016.8.31)





 

* 참고 : 행복의 정의에 대한 조금 더 깊은 생각

http://blog.naver.com/da91love/220789181850



2.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할 수 있을까?

 더 많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의 키워드는 '행복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행복의 정의」에서 논의한 대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의 내면이므로 내부와 외부에서의 자극을 어떻게 행복으로 느낄지는 모두 그것을 받아들이는 생각의 역할이다. 즉, 행복은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인 개념으로 행복하게 되는 방법도 절대적이지 않으며, 단지 어떤 올바른 생각이나 행동들은 우리가 더 행복할 가능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행복은 욕구에 대한 만족의 결과물이다. 매번 욕구를 만족할 수 있다면 베스트지만, 우리네 삶은 원하는 욕구를 만족할 수 있을 때보다 없을 때가 더 많다. 아래의 방법들은 욕구 불만족의 결과가 자아 존재의 부정적 인식이나 불안, 스트레스로 이어지지 않토록 하는 인생의 현명한 방법들이다. 아래의 현명한 생각들을 내 것으로 만드는데에 신은 어떠한 댓가도 요구하지 않는다. 나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생각의 방향을 살짝 비틈으로 인해 불행의 영역에서 행복의 영역으로 가는 다리를 이을 수 있다. 아래의 "공짜 생각들"은 당신에게 "공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공짜 도구"들이다. 그렇다면 아래의 생각들을 취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다만 불쌍한 자들은 그러한 방법을 모를 뿐이거나,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거나, 심지어는 알면서도 부정하고 싶을 뿐이다.




 

3. 욕구가 만족 되지 않을때, 행복할 가능성을 높여주는 생각들


ⅰ. 긍정과 감사

 내면의 긍정은 합리화와 동의어일지도 모르겠다. 긍정화는 이미 벌어진 불행한 일에 대하여, 이미 벌어진 일이므로 생각의 전환에 의하여 불행을 상대적 행복으로 바꾸려는 시도이다. 교통사고를 당한 어떤 사람은 이미 발생한 교통사고에 대하여 분노하고 아파할 수도 있지만, 더 큰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긍정화하면 사고가 발생하고 자신이 피해를 본 것은 동일한 상황임에도 어느 누구는 스트레스만 받을 수도 어느 누구는 안도감에 따른 상대적 행복감을 느낄 수도 있다. 긍정의 힘은 특히 인간을 성장시키는데 효과가 크다.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투덜거림에 불과했던 사건 속에서도 배울점을 찾으므로써 성장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긍정적이지 않은 삶은 사람에게 매시간시간은 낭비일 뿐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매시간은 배움의 장이자 만족의 연속이다. 상사나 선배가 힘든 청소를 시켰다고 가정해보자. 부정적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정말 하기 싫다. 내가 이걸 왜해야 하지?" 이 생각을 한 이상 이 사람에게 청소하는 시간은 그저 배울것 하나 없는 낭비의 시간일 뿐이다. 자신의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부정은 불만과 연결되고 불만할 수록 감사와는 점점멀어져 행복한 삶을 찾기도 어려워진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음, 시키는데는 이유가 있겠지? 나는 청소를 하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이 사람에게 청소하는 시간은 , 설령 그 시간이 정말 무의미한 행동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만큼은 그 시간은 값진 시간이다. 함든 시간 속에서 있는 자신을 긍정하게 하는 법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낭비라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에 청소를 배움으로써 인생의 부족한 부분을 하나하나 채워나가고 있다. 즉, 긍정하면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행복과 배움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

 감사도 긍정의 일종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긍정함으로써 불행을 상대적 행복으로 전환할 수 있는 생각의 힘이다. 


+ 긍정적 비관주의

 긍정적 비관주의란 단어는 상당히 모순되어 보인다. 긍적적이라는 의미와 비관적이라는 의미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나는 "긍정"이라는 단어와 그 반대 의미인 "부정"이라는 단어에는 현시점을 부여하고, "비관"라는 단어와 그 반대 의미인 "낙관"이라는 단어에는 미래시점을 부여했다. 그렇다면, 긍적적 비관주의란 더 이상 모순되는 단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현재는 긍정적으로 보되, 미래는 비관적으로 보자는 것이 긍정적 비관주의 이다. 

 긍정적 비관주의의 장점은 명확하다. 내가 속한 현재는 긍정하되, 다가오지 않은 미래는 반드시 밝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여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힘을 잃지 않게 해준다.



ⅱ.  불행 (불행은 행복과 반대일까?)

 행복은 행복감을 느끼는 감정의 상태일 뿐이며 일시적이다.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행복감을 통해서 무언가를 더 배우려는 노력에 까지 이르기는 힘들며 행복의 잔여물은 행복감을 통한 짜릿한 일회적 기억 그 뿐이다. 그러나 불행은 불행을 분석하고 긍정화하려고 노력 가운데, 그 노력 속에서 태어난 가치가 지속적이다.  

 세상 만사를 행복한 일과 불행한 일로 이분화해보자면, 세상에는 행복한 일보다 불행한 일이 더 많다. 세상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에게 하기 싫은 문제를 던져준다. 문제를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과정이 인생이다. 따라서, 행복보다 더 빈번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려는 인지적 노력은 그러한 일련의 노력으로 한 인간의 인생이 의미가 결정된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불행을 상대적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간단하다. 먼저 불행을 긍정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불행을 저주하는 마음 속에서는 불행을 객관적으로 직시할 수 있는 생각이 발현되지 않는다. 불행을 긍정화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면 다음은 불행을 "왜"에 기초하여 분석해보자. "왜" 이 사건이 나에게 불행한 느낌을 주는 것인지, "왜" 이사건이 발생했는지. 그리고서는 분석된 불행을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다음에는 이러한 불행이 나에게 찾아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클 뿐만 아니라, 설령 그러한 불행과 재회하였다 하더라도 이전보다 더 능숙한 자세로 불행을 상대적 행복으로 긍정화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이 성장이며, 성장은 내가 행복할 가능성을 더 높여준다.


ⅲ. 성장 ; 성장이란 무엇일까?

 위에서 언급한대로 인생은 평탄한 포장길이 아니다. 바닥에는 작은 조약돌부터 한번에 지나가기 힘든 바위까지 많은 시련과 고난이 깔려있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이 바닥을 건너간다. 미숙한 시기에 우리는 바퀴가 조그만 세발자전거를 타고 울퉁불퉁한 길을 건넌다고 상상할 수 있다. 바퀴가 작아 작은 돌맹이를 넘어가는 대도 자전거 전체가 크게 흔들린다. 성장이라는 과정은 바퀴의 크기가 점점 커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장을 거듭할 수록 바퀴의 크기도 커져, 이전에는 넘기힘들던 조그만한 돌맹이따위는 이제 쉽게 넘어간다. 즉, 나에게 주어진 문제를 간단히 해결하여 불행을 행복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성장은 우리가 행복할 가능성을 높여준다. 작은 고난에 쉽게 동요되지 않도록 도와준다.


  ①인간에게 공부가 필요한 이유: 성장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이 물음에 대하여, 공부를 인생에서 배우게 되는 모든 것이라고 포괄적으로 정의하면 공부를 해야하는 이유가 성장을 통한 행복성취와 너무 쉽게 맞물리므로, 더 이상의 분석이 필요없게 된다. 따라서, 공부를 좁은 의미에서의 공부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분석보고자 한다. 즉, 청소년기에 학교를 다니면서 주로 사회분위기에 위한 강압으로 공부를 하게되는 데 나는 이때의 공부라는 것을 왜 해야하는 것에 대한 답을 적고자한다. 좁은 의미의 공부란 단지 '지식 습득'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의 학생이 배우는 공부 -경제,법,화학,물리 등- 은 인간의 생존과 직접적이지 않은 것같은 방향으로 멀리 돌아와버렸지만, 사실 지식이 이렇게 복잡해지기 전 지식의 근원을 따져보면 그것은 매우 생존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다는 것을 알수 있다.  

 초기의 지식은 다음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쉽게 피하는 법, 동물을 효과적으로 사냥할 수 있는 날카로운 돌을 만드는 법, 곡식을 저장하는 법, 아픈 발을 보호하는 법, 불을 만드는 법 등의 지식은 자신을 보호하고 후대를 남기기 위한 생존 노하우의 축적이었다. 그 이후 작물화와 가축화를 통해 원시 시회에서 현대의 사회라고 불릴만한 공동체가 등장한 이후에는 복잡한 사회와 더불어 지식도 한층 복잡해졌을 것이다. 게다가 잉여 생산물을 통해 지식만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여 지식의 다양성과 복잡성은 더욱 빨라졌을 것이다. 가령 과거에는 동물을 효과적으로 사냥하기 위한 방법으로 동물의 어느 부분이 약점이다, 어떻게 도망간다를 기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냥을 했다고 하면, 발전된 사회에서는 동물의 생태학적, 동물학적 성질을 바탕으로 복잡한 물리학이 적용된 무기를 사용했다. 과거에는 한 마리의 동물을 잡아 눈대중으로 사회구성원에게 식량분배를 했다면, 발전된 사회에서는 경제학을 기초로하여 사회의 효용을 최대로 하는 자원분배를 하려고 노력했다. 이처럼 인간의 진화, 사회의 발전에 따라 단순했던 지식은 현대와 같은 다양성과 복잡성을 갖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현대의 복잡한 학문들은 (그 연관성을 쉽게 눈치챌 수 없지만) 과거 선조들의 생존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생존법들의 축적의 결과물이다. 행복은 인간의 생각이라는 내부성을 통해 직접적으로 실현되지만, 생존법이란 외부성은 행복할 확률을 높여주는 유용한 도구이다. 즉, 지식 축적이라는 것은 생존법 축적을 통한 성장으로 생각할 수 있고, 성장은 우리가 행복할 확률을 높여줄 수 있다.




ⅳ. 사물,인간,장소의 관찰

같은 것을 보고 얼마만큼 감상할 수 있느냐에 따라 풍요와 빈곤이 나뉩니다. 그러니까 삶 의 풍요는 감상의 폭이지요. 이철수의 한 문장을 읽고나서는 열매를그냥 못지나칩니다. 삶에 변 화가 생기는 겁니다. 옛날에는 1 킬로미터를 걸어가면서 아무것도 안 보 였는데, 지금은 베인 나뭇잎, 날아가는 새 반짝이는 빗방울이 다 아름답습니다. 제가죽을때 떠오르는 장면은 프레 젠테이션 석상에서 박수 받는 순간이 아닐 겁니다. 아마 어느 햇살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어느 나뭇잎이 떠오를 것 같고, 어느 달빛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혹은 어떤 대화 표정, 그런 것들이 많이 축적되어 있으면 풍요롭게 살다 가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 박웅현 도끼中


-> 레이더의 단계

1. 오감(시각,촉각,청각,미각,후각)을 활용하기

2. 5W1H로 보기

3. 말로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으로 하나하나를 매우 구체적으로 보고, 듣고, 만져보기




ⅴ. 현실에 충실하기

이게 바로 말씀드린 개처럼 살자입니다. 지금 꼬리치면 꼬리를 치고 밥을 먹으면 밥만 먹고, 잠을 자면 잠만 자야지. 잠을 자면서 아까 꼬리 치던 생각을 하거나 밥 먹을 궁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죠. 같은 맥락으로 톨스토이 인터뷰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대학시절 읽고 나 서 요즘 강의할 때 자주 언급하곤 하죠. 기자가 "지금 당신한테 가장 중 요한 일과 가장 중요한 사람을 얘기헤주세요"라고 톨스토이에게 물었 답니다. 그러 자 답하길.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당신이고, 가장 중 요한 일은 이 인터뷰다"라고 했습니다. 찾아보면 사방에서 뭔가 배울 만 한게있다고 하는사람들은 다 같은 얘기를 하는 것 같지 않나요? 현재 에 집중하라는. 순간을 사랑할줄아는 조르바는 이런말도 합니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 있게 붙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일하고 있네."잘해보세..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하는가?"·여자에 게 키스하고 있네."조르바. 잘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 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 고민을 하든 일을 하든 공부를 하든 놀든 그 무엇을 하든 지금 당장의 순간에 최선을 다하기



운명론적 사고




ⅵ. 선행의 환원



1. 「자기분석이란 무엇인가」 - 의문 발생의 배경

 취업시즌을 맞이하는 대학생들은 자기분석이란 단어에서 벗어나고자 해도 벗어날 수 없다. 각 기업에서는 엔트리시트에 자기분석을 기초로한 질문들을 쏟아낸다. 이러한 추세때문에 자기분석 서비스를 전문으로 제공하는 회사까지 설립되고 각 대학에서도 취업을 대비해 자기분석 강좌를 개설하는 한편 그 자기분석 분야의 전문가까지 생겨날 정도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 자신이 좋아하는 것 혹은 싫어하는 것, 자신의 성향 등등의 지표를 제시하면서 "이것이 자기분석" 이라고 주장하며, 학생들에게 그 항목들을 생각해 볼 것을 강요한다. 하지만, 정작 스스로 자기분석의 의미를 정의내리지 못하고, 회사가 자신에게 자기분석을 요구하는 핵심적인 이유를 파악하지 못하면  그것은 진실된 자기분석이 아니라 그저 생각의 쥐어짜기와 암기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분석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왜 생각해 보아야할만한 것일까? 또 회사에서 지원자에게 자기분석을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 자기분석이란?

 먼저 다양한 나의 철학적인 질문들이 다음과 같은 전제 하에서 그 해답에 대한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했듯이, 나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자기만족 = 행복" 이라고 전제하고 자기분석에 대한 개인적인 의미를 정의하고자 한다. (참고로, 많은 철학자들이 무엇이 행복인지에 대한 기준을 설정하는 것은 개인에게 자유롭게 맡겼지만, 삶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이라는 것에 대한 주장만큼은 대부분 동의했다. 만약, 삶의 궁극적 목적을 스스로 정의하지 못한 사람이나 그것이 행복이 아닌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이상 이 글을 읽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자기분석도 결국 행복을 위한 행위로 인식하면, 자기분석이란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하고 그렇지 않은지"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이때 "무엇"이란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까지, 세속적인 것부터 근본적인 것까지, 일차원적인 것부터 고차원적인 것까지 모든 것을 포함하는 말이다. 인간이 삶을 살아가며 발생한다고 상정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무엇"에 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물을 좋아하는지, 명예가 좋은지 돈이 좋은지, 수학이 좋은지 싫은지, 어떤 이성이 좋은지 싫은지 등 가치판단이 가능한 모든 질문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하고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고 자기분석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여기까지에 머무른다면, 종이에 프린터된 여러 항목을 제시하고 자신이 맞는 항목에 체크하여 "이것이 당신의 자기분석입니다" 라고 알려주는 자기분석제공 서비스 회사와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콜라보다 사이다를 좋아하는구나’ 라는 사실을 찾아낸 것이 자기분석이 끝이 아니다.

 진정한 자기분석의 필요는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하고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해답에 "왜"라는 물음을 붙이므로써 존재이유가 생긴다. 즉, 행복을 전제 하에 1차적으로 단순히 정의한 자기분석에 왜라는 질문을 더하여 재정의하면, 


자기분석이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과 행복하게 하지 않는 요소들에 스스로 납득할만한 원인을 붙여나가는 과정」


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내가 콜라보다 사이다를 더 좋아한다면 왜 그런지 고민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성장환경과 무의식 속에 녹아있던 자기 자신을 더욱 뚜렷히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두껍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먼지 안에 있는 보물을 찾아내는 것과 비슷한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분위기 있는 식당보다 시끌벅적한 시장에서 먹는 식사가 더 좋다는 사실의, 자만하는 것보다 겸손한 것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 하이힐보다 단화가 더 좋다는 사실, 친절한 것이 더 좋다는 사실  원인을 분석하는 것으로 스스로도 잘 알지 못했던 감춰진 우리의 모습이 더 선명히 드러난다.


3. 자기분석은 왜 중요한가?- 회사에서 지원자에게 자기분석을 요구하는 이유

 자기분석의 해답을 행복을 전제로하여 생각해내었으므로, 결국 자기분석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 분석이었다. 즉, 자기분석을 통해 자신의 진면모를 확인하고 자신이 어떤 것을 할때 행복한 인간인지 스스로 어느정도 판단할 수 있다. 또한, 자기분석은 어떤 선택의 기준이 외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더욱 의존하게 하기 때문에 더욱 주체적인 선택을 하게 해준다. 납득을 위해, 자기분석이 진행되어 있지 않은 사람A와 자기분석이 어느정도 진행되어 있는 사람 B를 가정하고 상황을 예측해본다. 자기분석이 진행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아직 먼지 속에 묻힌 스스로의 모습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선택이 개인적의 소신보다는 사회적 소문이나 타인의 의견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클 것이다. 반대로, 자기분석이 진행되어 있는 사람은 외부적인 소음(외부적인 소음과 수용할만한 가치가 있는 충고를 구분한다)을 완벽히 차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중심이 되어 선택을하는 경향이 클 것이다.

 안타깝게도 회사에서 지원자에게 자기분석을 요구하는 이유는 전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장기적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회사의 입장에서 개개인의 지원자에게 더 큰 행복을 주기위해 자기분석과 관련된 이런저런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단지 주체적인 인재를 원할 뿐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선동하기 쉬운 사람은 부리기 쉽다는 장점이 있으나 그로인한 효과는 단기적이다. 주체적인 인재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회사의 이윤을 과감히 포기할 가능성이 있으나 그들을 잘 요리하기만 한다면, 혁신을 이루어낼 가능성이 더 높다.


4. 가치관과 자기분석의 관계

 자신의 가치관을 세우는 것은 자기분석을 통해 얻은 스스로에 대한 자료를 기초로 한다. 가령 위의 예를 다시 빌리면, 자기분석이 두껍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먼지 안에 있는 보물을 찾아내는 과정이라면 가치관은 그 보물을 어떻게 사용할지 정하는 과정이다. 먼지 안의 보물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쓰이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질투
 

 

1. 질투의 원인

불안 ; 사랑하는 사람의 연인이란 위치에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그 자리를 뺏길 것만 같은 심리 상태.


2. 불안의 원인

상대가 나를 떠나고 그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는 것이 왜 불안한가?

상대가 내 곁을 떠나 혼자가 되는 것이 왜 불안한가?


불안의 원인을 파악해보도록 하자.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 사람들이 우리 농담에 즐거워하면, 우리는 나에게 남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자신을 갖게 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면, 나에게 큰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방에 들어갔을 때 눈길을 피하거나 직업을 밝혔을 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

 이상적인 세계에서라면 이런식으로 남들의 반응에 좌우되지는 않을 것이다. 무시를 당하든 주목을 받든, 칭찬을 받든 조롱을 당하든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누가 엉터리로 우리를 칭찬하는 소리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여, 다른사람이 우리가 못났다고 넌지시 암시한다 해도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나라는 사람에 대하여 아주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내가 똑똑하다는 중거를 댈 수 있고 바보라는 증거도 댈 수 있으며, 익살맞다는 증거도 댈 수 있고 따분하다는 증거도 댈 수 있으며, 중요한 인물이라는 증거도 댈 수 있고 있으나마나 한 존재라는 증거도 댈 수 있다. 이렇게 흔들린다면 사회의 태도가 우리의 의미를 결정하기 마련이다. 무시를 당하면 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자신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고개를 쳐들며, 미소나 칭찬과 마주치면 어느새 역전이 이루어진다. 혹시 남의 애정 덕분에 우리 자신을 견디고 사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주어야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없다. 남의 관심때문에 기운이 나고 무시때문에 상처받는 자신을 보면,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어디있나 싶어 정신이 번쩍들기도 한다. 동료 한 사람이 인사를 건성으로 하기만해도, 연락을 했는데 아무런 답이 없기만해도 우리의 기분은 시커멓게 멍들어버린다. 누가 우리 이름을 기억해주고 과일 바구니라도 보내주면 갑자기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환희에 젖는다. -  알랭드 보통 '불안' 中에서(이레출판사 p 21~22)


 알랭드 보통의 또 다른 저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 의하면, 우리의 자아는 아메바와 같다. 어떠한 형태를 지니기는 하지만, 상대가 어떠한 틀을 씌워주는 냐에 따라 그 모양이 변한다. 우리의 자아가 타인에 의해 규정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 외에 여기서 다른 중요한 점은 나에게 틀을 씌워주는 상대가 누구냐인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유난히 확신이 없는 사람은 그 대상이 지나가는 행인의 말 한마디 일 수도 있고, 꾀나 찐득찐득한 아메바를 지닌 사람이라면 자신이 선택한 몇 몇 사람에 의해서만 틀이 씌워질 수도 있다. 스스로는 나에게 틀을 씌우는 사람을 선택할 수 없다. 그 선택권은 오로지 자신의 가치를 아는 내안의 또다른 나에게만 주어져 있다. 즉, 내 안의 내가 스스로를 더 능숙히 규정할 수 있다면 선택의 힘도 더욱 강해진다. 

 그러나, 신은 인간이 스스로를 완전히 알 수 있도록 만들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완전히 규정할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은 존재해도, 자기 자신을 완전히 규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때문에 불안이며 사랑 혹은 질투가 존재한다. 스스로의 존재의 불투명성에서 사랑이라는 꽃이 피어나는 미스터리인 것이다. 인류 모두가 자신을 완전히 규정할 수 있다면, 관심도 사랑도 존재 하지 않을 것이다.


 불안의 원인은 내 스스로가 나를 규정할 수 없기에, 타인의 관심과 사랑으로부터 나의 존재를 규정하고 싶은 마음에서 생겨난다. 상대가 없다면 나를 규정해줄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나를 규정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나의 존재는 확신받지 못한다. 


3. 질투란?

나의 존재가 상대로부터 규정된다고 믿는 만큼 상대를 믿고 사랑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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