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갖는 것이 왜 중요할까?


1. 섹스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섹스 : 이성간 혹은 동성간(나는 동성애를 지지한다)의 육체적 행위

  섹스의 정의 자체는 비교적 간단하다. 추상적인 의미가 아닌 시각적이고 물질적인 행동을 수반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대상의 중요성을 분석하기에 앞서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대상의 개념부터 정의해야하는 추상적인 대상-행복, 사랑, 우정 등-들에 비하면 상당히 수고가 줄어드는 느낌이다.

 섹스라는 것은 행위 그 자체보다, 행위의 목적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한 특수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섹스의 존재는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하는데에 그 근본적 목적이 있다. (몇 몇 자웅동체 생물을 제외하면) 이는 지구 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생물체가 후대에 자신을 남기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섹스를 택했고, 왜 지구상의 생물체는 이러한 방법을 취했냐함에 대한 답은 오로지 신의 뜻에서만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욕을 이드(Id)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욕동 중 하나로 보았는데, 생존을 이어나가기 위한 투쟁이 인간의 역사 였던 점을 곱씹어보면 프로이트가 인간 심리의 이해에서 성욕을 그리 강조한 것도 어느정도 이해가 간다. 즉 섹스는 자신을 후대에 남기기 위한 본능적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섹스는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이라는 중요성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정도로 강력한 「쾌락」이라는 것을 부산물로써 지니고있다. 섹스는 오르가즘이란 말로 대표되는 매우 높은 수준의 육체적 쾌감을 느낄 기회를 준다. 오르가즘이 인간에게 주는 쾌락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쾌락이 섹스의 목적인지 부산물인지 착각하게 만든다.

 이 때문에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와 「쾌락의 섹스」는 섹스의 목적이라는 타이틀을 두고 끊임없는 싸움을 벌여야 한다. 사실 섹스의 목적이라는 타이틀의 주인공은 전자의 섹스이지만 후자의 섹스는 시시틈틈 그 자리를 노린다. 특히나, 피임의 기술이 발달하여 전자의 섹스의 힘이 약해질대로 약해진 현대는 후자의 섹스가 타이틀 자리에 오르는 장면도 쉽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섹스 윤리란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의 지원군이다.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가 타이틀자리를 뺏기지 않도록 도와주는 초자아적 생각이다. 우리는 섹스를 통한 육체적 쾌락에 유혹당할만 하지만, 섹스는 쾌락이전에 생명의 탄생을 목적으로한 행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는 언제나 '섹스를 통해 창조될 수도 있는 생명'과 연관되는 것으로, 생명이 섹스와 연관되면 섹스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 진다. 인간의 생명이란 가장 존중받아야할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에 대해서도 책임감 있게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쾌락의 섹스」는 옳지 않은 것인가?

 하지만 「쾌락의 섹스」가 무조건 비판받아야할 대상은 아니다. 글 서두의 섹스의 정의에 포함된 동성간의 섹스는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의 기능은 만족시킬 수 없는 행위로, 「쾌락의 섹스」가 갖는 이점에 대해서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행복의 충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오히려 발달된 피임법으로 능숙하게 컨트롤된 「쾌락의 섹스」가 우리에게 주는 만족감은 행복에 더 맞닿아 있지 않은가 라는 의문도 제기된다. 

 이를 분석해보기 위해서는 「쾌락의 섹스」가 지닌 이점을 알아보아야 한다. 섹스가 쾌락을 줄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무릇 육체적인 쾌락때문은 아니다. 그 쾌락 속에는 정신적인 요인도 포함된다. 사랑하는 남녀, 남남, 녀녀가 만나 이루는 섹스를 통해 인간은 그 어떤 스킨쉽을 능가하는 정신적 교감을 다지고, 서로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의 고리타분한 성격이 우리에게 주는 위압감과는 완전히 다른 행복감을 우리에게 맛보여주고 섹스를 나누는 서로의 관계도 진전된다. 

 정리하면, 섹스라는 행위는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와 「쾌락의 섹스」라는 목적을 지닌다.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는 섹스 윤리로서 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포함하고, 「쾌락의 섹스」는 육체적쾌락, 정신전쾌락(정신적 교감, 존재감 확인)을 포함한다. 섹스가 갖는 이미지가 무거워지는 이유는 전자의 섹스때문인데, 발달된 피임으로 전자의 섹스가 같는 성질을 불완전하게 제거하면 섹스라는 행위에는 육체적쾌락, 정신전쾌락(정신적 교감, 존재감 확인)만 남아 우리는 섹스라는 행위로 하여금 행복을 영위할 수 있다.


3. 

 하지만, 「쾌락의 섹스」는 행복을 줄 수 있는 행위이지만, 섹스의 목적이라는 타이틀에서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는 언제나 「쾌락의 섹스」의 누르고 1등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불완전한 피임은 일시적으로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를  시상대 밖으로 끌어내지만,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가 잠깐 자리를 비운사이 「쾌락의 섹스」가 1등의 자리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2등의 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가 가진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상기하며 인간본능 섹스의 중요성을 고수하는 것이 섹스윤리이다. 최소한의 섹스윤리도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 사회에서는 인간의 생명과 그 생명의 삶에 대한 의미도 무색해질 것이다. 

  「쾌락의 섹스」의 이점만을 누리고 싶은 남성은 정관수술을 하라. 그렇다면,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가 갖는 책임감은 완전히 사라질테니.


4. 원나잇 스탠드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논의에 의하면, 섹스는 생명에 대한 책임감, 윤체적 쾌락, 정신적 쾌락으로 구성된다. 이 구성요소로 원나잇 스탠드를 평가하고자 한다.

 

섹스가 갖는 성격 중 원나잇 스탠드가 만족하는 구성요소

 생명에 대한 책임감

육체적 쾌락

정신적 쾌락(정신적교감,존재확인) 

 X

 


 원나잇 스탠드는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를 위한 섹스가 아니다.  원나잇을 즐기는 인간들의 머리속엔 「자손을 남기기 위한 인간본능의 섹스」는 시상대에 초대조차 못된다.(이를 섹스윤리가 무너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하루밤을 즐기고 다음날 일어나서 자연스럽게 자기갈길가는 이들은 상대에게 정신적교감, 존재확인과 같은 정신적 쾌락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원나잇은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행위이다.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원나잇은 비판받아 마땅한가? 육체적 쾌락으로 상호간에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 좋은것 아닌가? 프로이트의 구조이론을 빌려 섹스가 갖는 성격들을 분석하면, 생명에 대한 책임감은 초자아에 해당하며,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은 이드에 해당한다.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은 같은 이드에 해당하지만 그 성격이 상이한데, 육체적 쾌락은 정신을 배제한 육체가 느끼는 쾌락이며 정신적 쾌락은 말 그대로 정신이 느끼는 쾌락이다. 

육체적 쾌락은 인간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매우 본능적인 욕구이다. 이드, 자아, 초자아에 관한 글을 이용하면

 욕구와 욕구의 만족 외에 알지 못하는 유아는 외부의 자극에 대한 지각체계를 발전시키며 이것이 '초기형태의 자아'로 분화된다(이드로부터 자아의 분화). 둘째, 이드에서 자아의 원시적 분화에 상응하여 욕구로부터 성(sexuality)이 독자적으로 분화하기 시작한다(욕구로부터 성의 분화). 그리하여 처음에는 욕구와 섞여 있던 성이 독자적으로 분화되기 시작하여 구순기, 항문기, 남근기 등의 순으로 리비도의 순차적 발달국면을 통과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아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진입하게 되고 그것이 소멸하면 아이의 마음속에는 초자아의 원형이 형성된다(자아로부터 초자아의 분화)

"욕구와 욕구의 만족 외에 알지 못하는 유아" 가 느끼는 가장 초보적인 수준의 욕구가 육체적 쾌락인데, 이는 동물과 다를 바가 없는 상태이다.

 즉, 원나잇은 그 성격으로 보아 자연상태의 동물과 하등 다를바가 없는 육체적 욕구만을 갈망하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아니, 최소한 동물의 교미는 후대를 남기려는 목적만을 지니며, 그 결과 태어난 자신의 새끼들에 대해서는 독립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까지 돌봐주므로 책임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섹스의 다른 성격들을 무시한 채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동물 이하가 되는 수모를 겪든, 동물 이하가 되어도 상관없으니 원나잇을 통한 소소한 쾌락을 느끼든 어느쪽의 손익이 더 큰지 판단하는 것은 당신의 몫이다.(인간으로서의 자존심 vs 쾌락)


5. 지인의 반론과 그에 대한 반반론

ⅰ. 반론1

매슬로 욕구 5단계설에서는 최하등의 욕구에 성적욕구도 포함되는데, 안전욕,식욕,성욕 등의 기초적 욕구를 충족하고 나서야 비로소 좀 더 고차원적 욕구를 충족하려고 한다고 한다. 리비도를 가장 최하등의 욕구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방식이 번식의목적과 정신적 교감을 배제한, 이 글에서 말하는 소위 '숭고한'행위가 아닌 원나잇이고 매춘이라고해서 그 사람이 동물적이고 원초적 욕구만을 추구하는 사람라고 비난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매슬로는 욕구를 단계별로 나누어두는데, 기초적 본능을 채운 후에서야 그 상위계층의 욕구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반론1에 대한 반론)
 본문의 원나잇에 관한 주장을 정리하면 "섹스의 다른 성취가능성(생명존중의 마음, 정신적 쾌락)을 무시한채 육체적 욕구만을 채우려는 원나잇은 동물적 욕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원나잇은 인간 이하인 동물의 행위이다." 이다. 

비판대로 인간은 인간이기 이전에 동물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가장 근본적 욕구인 안전욕, 식욕, 성욕을 달성하고서야 고차원적인 욕구를 갖추기위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이 주장을 바꿔말하면, 성욕은 인간만이 영위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욕구가 아닌 일차원적인 동물적 욕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동물적 욕구를 충족하려는 인간의 본능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본능은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섹스는 매슬로가 말하는 단순한 성욕(여기서는 동물적, 육체적 욕구)과는 다르다. 인간의 섹스는 동물적 쾌락 이상의 가치를 지니며 그것이 동물과는 구분되는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된다. 교미와 섹스는 모두 성욕을 만족시키는 행위이지만, 교미를 할것인지 섹스를 할 것 인지는 개인의 가치판단에 달려있다. 

ⅱ.반론2

글로벌시대의 사회적 통념상 원나잇 스탠드에 대한 시비의 잣대는 온전하지 않다. 글에서는 인간 내에서 어떤 사회적 통념과 맞아떨어지도록 또 그런 의미에서 바르게 형성된 슈퍼에고를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슈퍼에고는 후천적 학습이므로 개인이 성장한 사회적 배경이 영향을 미친다. 원나잇이나 매춘을 하는 사람을 향한 비난은 '나의 사회에서 학습받은 초자아는 당신네의 초자아와는 다르다' 라는 논리로서 반박될 수 있을 것이다.


(반론2에 대한 반론) 

비판의 내용을 정리하면, "글에서는 어떤 초자아를 전제로하고 있는데 성장환경마다 초자아는 다르게 형성될 수 있으므로, 초자아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는 것이다.

 비판대로 본문의 주장에는 어떤 사회에서 학습된 "올바른 초자아"가 전제되었고, 그 "올바른 초자아"의 명확한 정의가 결여된 오류를 인정한다. 따라서 "올바른 초자아"를 정의하고자 한다. 
 초자아는 인간의 관계에서 생겨난다. 나의 욕구만을 만족시키자 한다면 타인의 욕구에 피해가 가므로, 다른 사람의 욕구를 방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나의 욕구를 최대한 발휘하려는 노력이 가장 「기본적 의미의 초자아」이다.

 본문의 초자아에 해당하는 섹스윤리는 인간의 생명의 소중함을 근거로 한다. 인간의 생명에 관한 논의는「기본적 의미의 초자아」를 넘어서는 영역이다. 생명을 해치려는 행위나, 생명을 방관하는 행위는 다른 사람의 욕구를 방해하지 않는 것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올바른 초자아"를「기본적 의미의 초자아」라고 정의한다면, 그 속에는 생명존중의 개념도 포함되어 있다. 즉, 본문에서 원나잇이나 매춘을 비판하는 근거인 섹스윤리는 생명을 논리의 베이스로 하므로, 만국적으로 통한다고 할 수 있는 「기본적 의미의 초자아」보다 더 근본적인 도덕관념이다.
 생명 존중의 개념을 포함하는「기본적 의미의 초자아」는 교육이나 환경으로 초자아의 형성이 어떤 식으로 바뀌건 간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에게 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시,「기본적 의미의 초자아」조차 만족되지 못하는 사회는 더 이상 올바른 사회로서의 의미도 없다고 할 수 있으며,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로 밖에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