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 Case Study: 관광 불모지서 ‘재생의 아이콘’으로
“ 스토리가 있는 폐광” 모두가 열광 역발상으로 기적을 캔 ‘광명동굴’
관광 불모지였던 베드타운 광명시는 2011년 광명동굴을 개장해 수도권에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2016년 140만 명의 유료 관람객이 이곳을 찾았다. 폐광을 단장해 테마파크로 성공한 광명동굴의 비결은 다음과 같다.
1. 최소 요구 조건부터 맞춘 개발 계획: 시청의 한계를 파악하고 되는 일부터 차근차근 진행
2. 린스타트업 같은 공무원 조직: 10인 규모의 별동대 조직이 동굴로 출퇴근하며 5∼6년째 ‘빠른 실험-피드백 수집-개선’을 끊임없이 반복
3. 핵심/비핵심 업무영역의 분리: 콘텐츠 기획과 운영은 시청에서 전담하고 기타 부문은 외부기관들과의 파트너십을 적극 추진
4. 브랜드 네이밍: 누구나 기억하고 부르기 쉬운 이름을 선택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조규원(홍익대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초여름인데 하얀 입김이 나왔다. 광명동굴 지하층은 시원한 정도를 넘어 추운 느낌마저 들었다. 사방 단단한 바위와 지하수 폭포에서 나오는 냉기 때문이었다. 왜 이 동굴이 수도권 서남부 관광명소가 됐는지 알 것 같았다. 화강암벽의 거친 질감에 은은한 조명이 잘 어울렸다.
광명동굴 개장 이전의 광명시는 관광과는 큰 인연이 없는 동네였다. 서울 근교 베드타운 중 하나,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 소재지, 비교적 최근에는 이케아 매장이 들어섰다는 것 정도가 외부인들이 광명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였다. 광명시를 찾은 관광객은 연간 수천 명이었다고 하지만 딱히 관광지라 할 만한 것이 없으니 숫자를 집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2011년 시험적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2015년부터 입장료를 받기 시작한 광명동굴은 2016년 142만 명의 유료 방문객을 받았다. 경기도 내 내로라하는 관광지인 캐리비안베이(142만 명), 한국민속촌(149만 명) 등에 뒤지지 않는 수치다. 2017년은 아예 200만 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아직 성수기가 시작하지 않았지만 동굴 안팎은 평일에도 내외국인 관광객으로 붐빈다. 한여름에는 주차장 진입에만 수시간 걸렸다는 증언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다.
어떻게 서울 근교에 길이 8㎞에 달하는 동굴이 있을 수 있을까? 왜 최근에야 각광을 받게 된 것일까? 사실 광명동굴은 천연동굴이 아니다. 일제시대부터 60여 년에 걸쳐 인간의 힘으로 꾸준히 파 들어간 금속 광산이다. 1970년대 광산이 문을 닫고 40년 가까이 버려졌지만 광명시청 공무원들의 지혜와 열정으로 새 삶을 찾았다. 광명동굴은 2017년 유료 개장 2년 만에 한국관광공사가 ‘한국 100대 관광지’로 선정했다. 또 시민에게 400여 개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재생의 아이콘’으로 주목받고 있는 광명동굴 개발 사례를 분석한다.
관광 불모지의 버려진 광산
광명동굴의 옛 이름은 시흥광산이다. 한일합방 2년 후인 1912년 일본인에 의해 ‘시흥 동(銅) 광산’이 설립됐다는 기록이 있으니 100살이 넘었다. 광산은 광명시 남쪽 외곽에 있는 가학산 중턱에서 시작한다. 산을 동서로 관통하는 갱도가 척추 역할을 하며 거기서부터 60여 년 동안 꾸준히 파내려간 흔적이 지하 8층, 총연장 7.8㎞에 달한다. 한창때는 500∼600명의 노동자가 하루 250톤의 암석을 캐냈다. 주요 산물은 금, 은, 동, 아연 등이었다.
수도권 최대 금속광산이던 시흥광산은 1972년 홍수 때문에 문을 닫았다. 광산 앞 공터에 쌓여 있던 광미(광석 찌꺼기)가 물에 쓸려가 일대의 논밭, 하천을 덮쳤다. 광미에는 미량의 중금속 성분이 남아 있기 때문에 제대로 처리를 하지 않으면 중금속 오염을 일으킬 수 있다. 피해보상 문제로 하루아침에 문을 닫은 광산을 1974년 한 사업가(김기원)가 매입했다. 하지만 정부는 채굴 허가를 다시 내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소유주는 인근 소래포구에서 나온 새우젓을 한 통에 1만 원씩 받고 저장해주는 창고 용도로 갱도의 일부만을 사용했다. 그러는 동안 전체 8층 중 하단부 7개 층은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지하수에 서서히 잠겨버렸다. 산 곳곳에 위치한 출입구와 외부 시설물은 잡초와 덩굴, 나무 속으로 묻혀 들어갔다.
안양, 의왕, 시흥, 인천, 부천 등 주변지역이 도시화되는 가운데서도 그린벨트에 속한 가학산 지역은 도시 속의 산골로 남아 있었다. 1990년대 정부가 광산 주변 오염된 땅을 정화, 매립한 후 그 자리에 쓰레기소각장을 건설한 것이 유일한 변화였다.
1990년대 후반, 이 폐광산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강원랜드 카지노 개장 등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폐광 지역 개발이 이슈가 됐기 때문이다. 1998년 2기 민선시장으로 부임한 백재현 시장(현 지역 국회의원)은 부임 다음 해 시청 직원들에게 가학산에 있다는 옛 광산 일대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조사는 막 신설된 시청 정책개발팀이 맡았다.
설계도도, 길잡이도 없었다. 당시 42세 팔팔한 나이로 팀장 직무대리를 맡고 있던 최봉섭 현 시민행복국 국장이 탐험에 앞장섰다. 진입로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하던 터라 우선 칡넝쿨을 잡고 기어 올라가 산 정상 부근에 있는 사갱(비스듬한 갱도) 입구에 이르렀다. 다음번에는 헬멧과 로프 등 장비를 챙겨왔다. 나무에 로프를 묶고 최 팀장이 다시 앞장을 섰다. 무시무시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은 일이었다. 로프 한 가닥에 몸을 의지해 한참 내려가니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공간이 나왔다. 거기서부터 아래쪽으로는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갱도가 물에 잠겨 있었다. 수평 방향으로 이어진 다른 갱도를 따라가 보니 새우젓 저장고와 과거 광산의 정문으로 쓰이던 입구 쪽으로 이어졌다. “동굴이 생각보다 크고 미로처럼 복잡하게 돼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고 최 국장은 기억한다. 정책개발팀원들은 이후 동굴을 샅샅이 탐사해가며 도면을 그렸다. 수소문 끝에 광업진흥공사가 보관 중이던 갱내도를 입수했다.
인내로 꽃을 피운 동굴 개발
이렇게 만들어진 ‘가학광산 개발 정책보고서’는 광산과 일대의 그린벨트 지역을 포함하는 대형 테마파크를 그렸다. 약 500억 원의 투자금이 들어갈 것으로 추산했다. 광산 테마파크, 워터파크, 실내 스키장 등이 이 프로젝트에 포함됐다. 하지만 광명 같은 중소도시 입장에선 그만한 투자 프로젝트를 진행할 여력이 부족했다. 개발 계획은 일단 보류됐다. 그렇게 10여 년이 흘렀다. 선거철마다 시장, 국회의원 후보들은 이 보고서를 토대로 가학광산(시흥광산) 개발을 공약에 포함했지만 예산과 사업성 문제로 실행까지 옮기지는 못했다.
2010년, 민선 5기 양기대 시장이 부임하고서야 일이 진척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 정치인이 된 양 시장은 이 지역 국회의원 선거에서 두 번 낙선한 후 세 번째 도전에서 비로소 성공을 거둔 참이었다. 그는 일단 기존 가학광산 개발 보고서를 토대로 공약을 만들었지만 부임 한 달 후 광산에 직접 들어가 보고 나서는 머릿속에 그림을 새로 그려갔다.
보통 광산이라 하면 풀풀 날리는 검은 석탄재와 비좁은 통로,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토사가 연상된다. 하지만 가학광산은 입자가 무른 석탄이 아니라 단단한 금속을 캐던 곳이다. 워낙 단단한 화강암 암반에 구멍을 뚫은 것이라 광산 전체에 침목 하나 없어도 안전에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석탄재 같은 것도 없어서 공간도 쾌적했다. 또 충분히 넓었다. 조금만 길을 넓히면 메인 갱도에는 작은 트럭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양 시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건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 주변 지역의 개발 필요성이 절박해진 상황이라 광산 재개발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당시 KTX 광명 역사가 종착역에서 중간역으로 계획이 변경되면서 지역 개발에 활력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광명동굴이 딱 거기에 필요한 프로젝트였다”고 그는 설명한다.
양 시장은 일단 땅부터 확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과거 광명시가 고려했던 계획은 민간자본과 함께 대규모 테마파크를 개발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민간과 합작하면 대규모 투자가 가능하지만 공공사업으로 진행할 때보다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많고 규제 관련 이슈도 복잡해진다는 단점이 있다. 당장 그린벨트 지역의 개발은 경기도와 중앙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하는 사항인데 프로젝트에 민간자본이 참여하면 허가 절차가 복잡해진다. 양 시장은 우선 빠른 업무 진행을 위해 민간자본 없이 시 단독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특히 토지부터 빨리 매입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다음 해 예산에 43억 원의 폐광 매입비를 편성했다. 계약은 2011년 1월에 체결됐다. 시장이 동굴을 방문한 지 5개월 만이었다.
세 번째 작업은 폐광에 좋은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었다. 신문기자 출신답게 양 시장은 이름 선정에 민감하게 고민했다. 원래 이 광산의 이름은 시흥광산이었고 광명시가 시흥시에서 독립해 나온 후에는 가학광산으로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가학’이라는 말이나 ‘광산’ 혹은 ‘폐광’이라는 말 모두 관광객에겐 좋은 인상을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여러 후보를 놓고 고민하던 중 오종우 한국동굴학회장으로부터 “자연동굴이나, 인공동굴이나 다 같은 동굴이니 동굴이라고 부르는 건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들었다.1 그럴듯했다. 동아일보 옛 동료들도 같은 의견을 줬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당시로써는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무릎을 치게 만드는 발상이었다. 광명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시민들에게 친근감을 줬고 또 동굴의 위치를 쉽게 알리는 효과도 있었다. 발음도 예뻤다. 한국어에서 ㅇ과 ㄹ 받침은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자연스럽게 새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달라붙었다.
약 8개월간의 준비작업을 거쳐 2011년 8월 처음으로 동굴이 일반에게 공개됐다. 하루 두 번,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안전헬멧을 쓰고 동굴을 방문하는 방식이었다. 손님을 맞기 위해 새우젓 드럼과 40여 년간 부스러져 내린 흙을 깨끗이 치웠다. 바닥엔 깨끗한 돌을 깔고 천장엔 낙석방지망을 달았다. 전등도 가설했다. 별다른 콘텐츠 없이 약 400m 되는 갱도를 견학하는 코스였는데, 1년 내내 섭씨 12도 정도로 유지되는 갱도 안이 워낙 시원해서 방문객들의 반응이 좋았다. 8월 말부터 12월 말까지 입소문만으로 1만6000여 명이 동굴을 찾았다.
가장 고무적인 것은 동굴 내 넓은 동공에서 열었던 음악회였다. 처음 동굴을 탐사했을 때는 상당 부분 물에 잠겨 있던 공간이었지만 펌프로 물을 빼내고 나니 수십 명 이상 들어가는 가설 콘서트장을 만들 수 있었다. 자연적으로 메아리 효과가 나는 동공에서 펼쳐지는 국악, 오페라, 연극, 가요 등 각종 공연은 동굴 체험의 피날레였다.
개발 두 번째 해인 2012년에는 동굴 개발을 전담하는 테마관광과를 신설했다. 1999년 처음으로 폐광을 탐사했던 최봉석 팀장이 부임했다. 양기대 시장은 아예 테마관광과 직원들을 위해 동굴 앞에 간이 사무실을 차려줬다. 다른 일엔 신경 쓰지 말고 동굴을 성공시키는 데 전념하라는 뜻이었다. 본인도 6㎞ 정도 떨어진 시청을 오가며 현장 회의를 주재했다. 테마관광과는 스타트업처럼 기획부터 의사결정, 실행까지 빠르게 업무를 진행했다. 시장과 직원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놓고 토론을 벌이는 일도 흔했다. 시장과 팀원들은 짬이 날 때마다 국내외 여러 관광지를 다니며 동굴을 어떻게 꾸밀지 아이디어를 모아왔다. 폴란드 소금광산, 대만 금광산 등에서 특히 좋은 아이디어를 얻었다.(표 1) 이렇게 벤치마킹한 내용은 회의에서 진행 가부 여부를 결정한 뒤 시청공무원들이 직접 제작과 설치를 맡았다. 이들은 동굴에 맞는 콘텐츠 제작에 있어서는 자신들보다 더 전문성이 있고 더 열정이 있는 조직은 적어도 대한민국 안에는 없다는 자신감을 쌓아갔다.
서울에서 30분 거리에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암벽 동굴이 있으며 은근히 볼거리도 있다는 입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2013년은 방문객이 40만 명에 달했다. 관광 불모지였던 광명시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2014년 초 조사기관에 의뢰해 광명시민 800명과 인근 뉴타운지역 주민 634명을 상대로 실시했던 여론조사 결과는 더욱 고무적이었다. 주민의 83%가 시의 동굴 개발 사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표 2)
다음 단계는 유료화였다. 애초에 가학광산 테마파크 개발 프로젝트는 지역 내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계획된 것이었으니 유료화는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다만 민간자본 투입 없이 시의 예산으로 진행되는 프로젝트니만큼 지갑을 쥐고 있는 시의회와 기타 이해관계자들도 사업성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참고 기다려온 것일 뿐이었다.
유료화와 콘텐츠 다양화 전략
유료화 개시는 2015년 4월로 잡혔다. 시청 내 전반적인 분위기는 좋았지만 우려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기적적으로 연인원 40만 명이 방문하는 광명시의 대표 관광지, 아니 광명시 유일의 관광지가 됐는데 섣불리 입장료를 걷겠다고 했다가 도로 사람이 빠지고 을씨년스러워지면 어쩔 것이냐는 일부 시의원들의 반대가 있었다. 그만큼 동굴은 광명의 자존심 같은 존재가 돼가고 있었다. 양 시장과 테마관광과 직원들은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입장료를 받으면 40만까지는 몰라도 30만 명은 충분히 올 거라 생각했다. 양 시장은 한술 더 떠서 입장료를 국내 관광지로서는 높은 수준인 8000원으로 책정하자고 제안했다. 화들짝 놀란 시의원들의 반대로 결국 4000원선에서 타협을 봤지만 ‘기왕 유료화하는 것 제대로, 확실하게 하자’는 그의 의지는 직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사실 양 시장이나 테마관광과 직원들이 가격 결정, 타깃 세그멘테이션, 홍보전략 수립 등 마케팅 업무를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방법론에 따라 진행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공무원이지 경영전문가는 아니었고 어설프게 경영전문가 흉내를 낼 생각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을 타깃으로 잡아야 할지도 감을 잡지 못했고 그런 불확실성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했다. 다만 무료 개방 기간 동안 가족 단위 관광객들과 연인들이 주로 찾는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조부모부터 손자손녀까지 3대가 함께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동굴 전체를 어떤 하나의 콘셉트로 통일해 꾸미는 것보다는 다양한 연령층과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각자 좋아하는 바를 찾아서 동굴을 즐길 수 있도록 콘텐츠도 다채롭게 준비하자, 그리고 반응을 보면서 조금씩 개선해나가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가격 측면에서도 콘텐츠 보강은 필요했다. 2014년 초 진행했던 광명시민 설문조사에서 약 50%의 시민들이 동굴 입장료로 1000∼3000원이 적정하다고 답한 바 있었다. 이것보다 더 많이 받기 위해서는 볼거리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유료화 직전 4개월은 동굴 문을 닫고 직원들이 밤낮과 휴일을 가리지 않고 콘텐츠 보강에 매달렸다. 시장도 하루 서너 차례까지 방문해 함께 회의를 했다.
이 기간 만들어진 구역들은 현재까지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예술의전당’(공연장) 옆에는 동굴에서 나오는 1급수 지하수를 이용해 수족관을 만들었다. 어떤 물고기가 이 물에 적응할지 몰라서 국내외에서 여러 희귀종을 사다가 일단 수조에 집어넣어 보고 살아남은 종들을 모아 전시했다. 또 황금광산이라는 역사를 살려서 일부 구간에는 벽과 바닥에 황금칠을 하고 ‘황금의 길’이라 이름 붙였다. 마치 절에서 기왓장 시주를 하듯 14K 도금판에 소원을 적어서 벽에 걸 수 있게 했다. 양 시장은 원래 이 아이디어에 반대했지만 실무 담당자였던 테마관광과 직원의 고집으로 기어코 황금의 길도 유료화 개장에 맞춰 준비했다.
2015년 4월4일, 드디어 유료 개장식이 열렸다. 4월 한 달간 3만7000명 이상이 찾아왔다. 날씨가 더워지고 또 TV 예능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방문자는 빠르게 증가했다. 어린이날엔 무려 1만4000명이 들었다. 6월에 메르스 사태가 터지면서 상승세가 꺾였지만 그래도 연말까지 총관광객은 92만 명이었다. 무료 개방 때보다 오히려 두 배 이상 늘어난 수치였다. 2016년은 더욱 성공적인 한 해였다. 8월에 이미 방문자 100만을 돌파했고 연말까지 총 142만 명이 광명동굴을 찾았다. 특히 황금의 길이 인기였다. 한국, 중국 관광객들이 좋아했다. 5000원에 판매하는 소원성취 도금판은 2만 장이나 팔렸다.
성공에 도취될 만도 하지만 테마관광과 직원들은 쉬지 않고 콘텐츠를 추가해나갔다. 기온이 가장 낮은 지하층에는 ‘귀신의 집’을 열어 여름에만 운영하는 특별 어트랙션으로 만들었다. 또 영화 ‘반지의 제왕’ 특수효과를 맡았던 뉴질랜드의 웨타워크숍으로부터 길이 41m에 달하는 용 모형을 주문 제작해 들여왔다. 이 용은 워낙 거대해서 조각을 낸 상태로 동굴로 들여온 다음 내부의 동공에서 전문가들이 조립해야 했다. 웨타워크숍과는 업무 협약을 맺고 국내 최초의 ‘판타지 아트 공모전’을 3년째 광명동굴에서 개최하고 있기도 하다. 전국의 판타지 아티스트들에게 작품을 응모 받아 동굴 안에서 전시하고, 1등 수상자는 웨타워크숍 본사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는 기회를 부여한다.
의외의 성공을 거둔 코너는 와인동굴이다. 뒤편 깊숙한 곳에 와인셀러를 마련해놓고 전국 곳곳에서 생산되는 국산 와인을 맛볼 수 있는 와인동굴을 꾸몄다. 전국에 와인동굴을 만든 지자체는 여러 곳이다. 대부분 자기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주로 전시하는 데 반해 광명은 애초에 포도 농사를 짓지 않는 지역이므로 타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들을 다양하게 구비했다. 방문객이 여러 종을 비교해가면서 시음해볼 수 있게 한 것이 히트를 쳤다. 한편 음악과 무용 공연을 하던 공연장은 콘텐츠를 변경했다. 2017년부터는 울퉁불퉁한 암벽의 질감과 레이저 영상을 이용한 ‘미디어 파사드’ 공연을 상영하고 있다. 동굴 관광객 수가 증가하면서 1회 공연 시간을 줄이고 관객 회전율을 높여야 했기 때문이다.
확장은 동굴 내부로만이 아니라 동굴 외부에서도 진행됐다. 2016년 4월에는 동굴 입구에 프랑스의 유명 건축가인 장 누벨이 설계한 ‘라스코 전시관’이 문을 열었다. 원래는 프랑스 라스코 동굴벽화를 가져와 한정기간 전시하기 위한 시설로 만들어졌는데 전시물이 워낙 거대해서 동굴 안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되자 아예 따로 전시시설을 만들었다. 라스코 특별전이 끝난 이후에도 이 공간은 그대로 남아 연중 다양한 예술 전시들이 열리고 있다. 이는 문화시설이 부족했던 광명 일대 주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또 동굴과 마주 보는 쓰레기소각장 옆 홍보관 건물에는 경기도의 지원을 받아 ‘업사이클아트센터’를 열었다. ‘업사이클’은 ‘업그레이드+리사이클’, 즉 버려진 물건에 예술적 가치를 더해 새롭게 재탄생시킨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소방관이 썼던 호스를 재활용해 만든 배낭, 와인병을 녹여 만든 친환경 양초 등을 전시하고 판매하고 있다. 광명동굴 자체가 100년 묵은 폐광에 콘텐츠를 더해서 재탄생시킨 ‘업사이클’ 콘텐츠라는 상징성이 있어서 업사이클센터를 나란히 배치한 것이다.
입장료 유료화 이후 약 1년8개월 동안 광명동굴은 누적 방문객 약 250만 명, 세외 수입 125억 원을 올렸다. 또 약 400명의 직원을 정규직과 파트타임으로 고용해 지역 경제에 공헌하고 있다. 한여름에도 서늘한 동굴, 서울에서 30분 만에 갈 수 있는 동굴로 TV 방송에 수차례 소개되면서 적어도 수도권 서남부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는 명소가 됐다. 지방에서도 소문을 듣고 KTX나 차량 편으로 찾아오는 이들이 늘었다. 인천공항에서도 인천대교를 통해 50분 안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중국과 일본, 태국 등 해외 관광객도 꾸준히 오고 있어 이들을 위한 외국어 가이드도 상시 고용하고 있다.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권 중저가 숙소에서 묵는 해외 단체 관광객들에게는 공항에 가기 전에 쉽게 들를 수 있는 위치다. 동굴 사업이 확대되면서 2012년 10명 안팎으로 시작했던 테마관광과도 30명으로 수가 불어났다. 이름도 ‘글로벌관광과’로 바뀌었다. 이제는 동굴뿐 아니라 인근의 쇼핑시설과 전통시장, 오리 이원익 서원 등을 연결하는 광명시 전체 관광 프로그램의 개발과 운영을 맡고 있다. 관광 불모지였던 광명이 경기도의 ‘핫’ 한 명소로 거듭나고 있는 중심에 광명동굴이 있다.
밧줄을 몸에 두르고 동공으로 뛰어내렸던 1999년부터 폐광이 관광 테마파크로 변하는 과정과 함께해온 최봉섭 국장은 감회가 남다르다. “KTX 광명역이 처음에는 KTX 시발역으로 계획됐지만 중간역으로 변경되면서 이 지역은 허허벌판으로 방치돼 있었습니다. 동굴은 완전히 폐허였죠. 쓰레기 소각장 하나 있는 곳에 누가 오겠나 싶었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런 역경들을 다 이겨낸 겁니다.”
광명시는 2011년부터 현재까지 토지 매입, 주차장과 도로 건설, 각종 콘텐츠 개발 등 광명동굴 사업에 시 예산 약 570억 원을 투자했다. 국비 39억 원, 도비 199억 원을 포함하면 총투자비는 810억 원 정도다. 한편 동굴의 입장료 등 현장에서 발생하는 수입은 2015년 40억 원, 2016년 85억 원이었다. 광명시가 한국산업관계연구원에 의뢰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앞으로 30년간 매년 약 137억 원의 수입이 발생하고 비용을 제한 순수익은 연 60억 원 정도일 것으로 추산된다. 이를 토대로 산정한 광명동굴의 현재가치(present value)는 1530억 원이다. 투자 대비 2배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셈이다.
광명동굴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정해진 것은 없지만 민간자본과의 합작 투자를 포함해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는 상태다. 2017년 6월까지 동굴 내외부의 콘텐츠 구비는 완료된다. VR(가상현실) 체험관, 미디어관, 타임캡슐 등이 추가되면 당분간 큰 업그레이드는 없을 예정이다. 다만 시청 측은 장기적으로 동굴과 KTX 역사가 위치한 광명시 남부지역 전체를 개발해나간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이미 약 2㎞ 떨어진 역사와 이케아, 코스트코 매장 주변에 30∼40층을 넘나드는 고층 아파트와 상업시설들이 들어서고 있으며 동굴 인근까지도 개발 계획을 세우고 있다. 광명역사와 서울 사당, 양재를 잇는 강남순환고속도로 개통도 이미 지역 활성화에 도움이 되고 있다.
2017년 5월 현재 광명동굴 앞 진입로는 2차로에서 4차로로 확장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국도변에 여분의 주차장을 확보하는 공사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여름, 수용용량에 비해 너무 많은 인파가 몰려서 주차장에 들어가는 줄이 수백m 이어졌던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올해의 목표는 방문객 200만 명이다. 칡넝쿨에 뒤덮여 새우젓 창고로나 쓰이던 폐광이 불과 6년 만에 광명시의 자랑으로 떠올랐다. 시청 공무원들의 힘이다.
성공요인 분석
광명동굴의 성공사례는 공공영역뿐 아니라 기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요 포인트를 정리해본다.
1. 최소 충족 조건부터 맞춘 린 스타트업
광명시 남부 그린벨트 지역에 있는 가학광산은 개발 잠재력이 큰 관광 아이템이었다. 광명, 서울, 인천, 안산, 시흥, 안양 등 30분에서 1시간 거리 안에 수백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수도권 서남부 지역에는 타 지역에 비해 볼거리, 즐길거리가 적기 때문에 관광지로서의 경쟁에도 유리했다. KTX 역사 개통(2004), 인천대교 개통(2009), 이케아 입점(2014) 등 주변 호재도 충분했다. 그러나 이런 장점들이 실제 개발사업에는 오히려 저주로 작용하는 측면이 있었다. 지역 개발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은 게 문제였다. 1999년 작성된 정책보고서는 500억 원 이상의 민관합동 투자를 전제로 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KTX 역세권 개발이 시민들의 기대보다 뒤처지자 이 지역의 다른 개발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회의론이 일었다. 동굴 개발 사업계획 역시 10년 이상 캐비닛에서 잠자는 신세가 됐다.
2010년 부임한 양기대 시장은 전임자들과는 달리 눈높이를 낮추고 시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진행하는 방식을 택했다. 동굴 자체의 잠재력을 두 눈으로 확인하자 40억여 원의 시 예산을 들여 부지부터 매입했다. 매입된 토지는 어차피 시의 자산이 되는 것이므로 의회도 반대하지 않았다. 광산이 시의 소유가 되니 그다음부터는 신경 써야 할 요인들이 줄고 일이 술술 풀렸다. 민간자본이 개입되는 사업이었다면 그린벨트 개발 허가를 받거나 경기도와 중앙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문제도 훨씬 어려웠을 것이고 시간에도 쫓겼을 것이라는 게 양 시장과 최 국장의 견해다. 또 직원들에게는 ‘이 광산은 우리 것’이라는 주인의식을 심어주는 효과도 있었다.
최 국장은 이것이 가장 결정적인 성공요인이자 ‘티핑포인트’였다고 생각한다. “제가 정책 개발을 오래 해봤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10년 시장님이 땅을 매입해서 개발해보겠다고 나섰을 때였습니다. 그걸 보고 속으로 ‘그렇지, 개발은 저렇게 해야 하는 것인데’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것이 굉장히 잘했던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잘못 끼운 단추를 처음부터 다시 맞춘 셈이다.
2. 린스타트업(lean startup)형 조직
토지를 매입한 후 테마관광과는 서두르지 않고 동굴을 단계별로 정돈하고 꾸며나갔다. 일부 구간들을 시민들에게 개방해서 피드백을 받았고 입소문을 유도했다. 2015년의 유료화는 그 이전 4년간의 준비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자본을 퍼부어서 화려한 관광지를 만드는 게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조금씩 새로운 콘텐츠를 실험해보고 기획을 업그레이드해가면서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추는 방식이 주효했다. 테마관광과를 시청에서 분리해 동굴 앞 간이 사무실과 쓰레기 소각장 내부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한 것도 린스타트업 다운 발상이었다. 자동차로 20분 이상 걸리는 시청에서 근무하면 그때그때 동굴 콘텐츠를 기획해서 빠르게 실험해보고 피드백을 수집하기 어렵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런 린스타트업 방식을 적용하다 보니 초창기에는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과감하게 폐지하거나 변경한 아이템들도 있다. 일례로 ‘예술의전당’이라는 동공에서 벌어지는 예술 공연들은 오픈 초기 광명동굴의 대표 상품이나 다름없었지만 이용객이 많아지고 관람객 동선(動線)의 흐름에 방해가 되자 과감하게 ‘미디어 파사드’ 레이저쇼로 전환했다. 가학산 정상 부근의 외부 전망대로 이어지는 사갱 역시 동굴 개방 초기에는 주요 어트랙션으로 홍보했지만 방문객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미련 없이 접었다. 이미 투자된 돈, 즉 매몰비용에 대해서 아까워하고 책임을 묻기보다는 미래의 수익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렇게 일반적인 공무원 조직과는 다른, 민첩하고 날씬한 조직 운영이 가능했던 것은 양 시장이 직원들에게 스타트업과 같은 사고의 유연성을 독려했기 때문이다. 광명시청에서 이렇게 현장에 상주하는 조직은 테마관광과가 유일했다. “어차피 가보지 않은 길이었고 경험도 없었습니다. 교과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예산도 풍족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조금씩 써가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 회의를 통해 계획을 수정하는 식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말이다.
3. 핵심 업무영역과 비핵심 영역의 분리
광명동굴 개발은 외부 전문가가 아닌 광명시청 공무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했다. 이들 중 원래부터 동굴 전문가나 테마파크 전문가였던 사람은 없다. 대신 내부 단면도부터 하나씩 손으로 그렸을 정도로 누구보다도 광명동굴에 대해서는 잘 알고, 또 애착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벤치마킹 대상을 선정해 아이디어를 수집하고, 콘텐츠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고, 피드백을 수집해 업데이트하는 것 역시 시청 테마개발과(현 글로벌관광과)의 주 업무였다. 팸플릿 등 홍보물을 만들 때도 외주 업체에 아이디어만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을 담당한 직원이 가안을 만들고 마지막 터칭만 외부 업체가 손보는 정도였다. 그 결과 초기부터 근무했던 직원들은 지자체 테마관광 전문가로서 어디서도 찾기 힘든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현재 광명동굴 콤플렉스에서 근무하는 약 400명의 직원 다수는 광명시 시설관리공단 소속이지만 콘텐츠를 담당하는 해설사들만큼은 광명시청에서 직접 고용하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동굴만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라스코 전시관’ 및 광명시 인근의 다른 관광지에 대한 안내도 맡는다.
이렇게 테마공원의 핵심 영역인 콘텐츠 기획과 운영은 철저히 시청에서 맡고 비핵심 영역에서는 외부기관과의 파트너십도 적극 추진한다. 당시 광명시장과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소속 정당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두 리더는 동굴 개발에 의기투합했다. 또 KTX 역사 주변에 아웃렛 매장을 낸 롯데그룹이 지역사회에 대한 보답의 뜻을 밝히자 가학산을 둘러서 동굴까지 이르는 산책로를 달릴 코끼리열차를 기증하도록 주선했다. 이 열차는 아웃렛 방향과 동굴 방향을 이어주므로 양측에게 윈윈이 되는 사업이다. 또 프랑스 라스코 전시회 유치, 뉴질랜드 웨타워크숍과의 협업도 광명동굴 관계자들의 오픈마인드에서 비롯된 파트너십이었다.
4. 네이밍(naming)
서비스업도 브랜드가 중요한 시대다. 특히 입소문을 많이 타는 관광산업의 경우 작명에서부터 승부가 갈리는 경우가 많다. 중국 윈난성의 디칭 주정부는 1997년부터 지명을 ‘샹그릴라’로 바꿨다. 샹그릴라는 영국의 제임스 힐턴이 1933년 쓴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가상의 지명이다. 디칭과는 연관이 없는 이름이었는 데도 불구하고 이후 이 지역을 찾는 외국 관광객이 연평균 25%씩 성장했다.
광명동굴은 샹그릴라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발음이 귀엽고 기억하기에 좋은 이름이다. ‘가학광산’이 주는 부정적 이미지가 없다. 또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곳이니만큼 지자체의 이름을 알린다는 효과도 있다.
흔히 지자체들이 만드는 관광자원들은 스토리텔링에 대한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작명에 과도한 힘이 들어가곤 한다. 신문기자 출신 시장이 결정해서일까. ‘광명동굴’은 장식성보다는 실용성에 초점이 있다. 또 단순하기 때문에 다양한 콘텐츠로의 변주(變奏)가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다. 실제로 처음 고려됐던 이름 중에는 ‘광명황금동굴’도 있었지만 너무 이미지가 굳어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광명동굴’로 최종 결정됐다. 앞으로 추가 개발에 있어서도 가능성을 넓게 열어놓은 셈이다.
조진서 기자 cjs@donga.com
생각해볼 문제 1 광명동굴의 경제성 분석을 한 전문평가기관은 향후 30년간 약 60억 원의 연간 순이익이 들어올 것으로 전제하고 할인율(discount rate)은 공공 부문 대출이자율인 3.89%로 잡아서 순현재가치(net present value)를 계산했다. 그래서 동굴의 가치를 약 1500억 원으로 평가했다. 이 분석에 사용된 가정들은 충분히 합당한가? 만약 내가 시청 재무담당자라면, 혹은 지분투자를 하려는 기업 경영자라면 어떤 점을 더 고려해야 할까? 2 동굴 외에는 별다른 관광지가 없는 광명시가 동굴개발사업에서 키운 조직원들의 노하우와 역량을 재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3 테마파크 방문객의 고객생애가치(customer lifetime value)를 최대화하기 위한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
DBR mini box 위치: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광명 KTX역 서편 가학산 그린벨트 구역 내) 채광물질: 금, 은, 동, 아연 갱도 길이: 지하 7층까지 총연장 7.8㎞ 중 2㎞ 구간 개방 연 방문객: 142만 명 (2016년) 고용인원: 약 400명 수익: 85억 원 (2016년) 연혁 1912년 채굴 시작 1972년 폐광 1999년 최초 탐사, 가학광산 개발 정책보고서 작성 2011년 1월 광명시가 광산을 매입 2011년 8월 시범 개방. 5개월간 방문객 1만6000여 명 2012년 9월 테마개발과 신설 (동굴 개발 전담) 2015년 4월 유료 개장. 첫 달 방문객 3만7641명 2016년 4월 프랑스 ‘라스코 동굴벽화’ 전시회 2017년 1월 ‘대한민국 100대 관광지’ 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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