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 Case Study: 관광 불모지서 ‘재생의 아이콘’으로

“ 스토리가 있는 폐광” 모두가 열광 역발상으로 기적을 캔 ‘광명동굴’

Article at a Glance

관광 불모지였던 베드타운 광명시는 2011년 광명동굴을 개장해 수도권에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2016년 140만 명의 유료 관람객이 이곳을 찾았다. 폐광을 단장해 테마파크로 성공한 광명동굴의 비결은 다음과 같다.

1. 최소 요구 조건부터 맞춘 개발 계획: 시청의 한계를 파악하고 되는 일부터 차근차근 진행
2. 린스타트업 같은 공무원 조직: 10인 규모의 별동대 조직이 동굴로 출퇴근하며 5∼6년째 ‘빠른 실험-피드백 수집-개선’을 끊임없이 반복
3. 핵심/비핵심 업무영역의 분리: 콘텐츠 기획과 운영은 시청에서 전담하고 기타 부문은 외부기관들과의 파트너십을 적극 추진
4. 브랜드 네이밍: 누구나 기억하고 부르기 쉬운 이름을 선택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조규원(홍익대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초여름인데 하얀 입김이 나왔다. 광명동굴 지하층은 시원한 정도를 넘어 추운 느낌마저 들었다. 사방 단단한 바위와 지하수 폭포에서 나오는 냉기 때문이었다. 왜 이 동굴이 수도권 서남부 관광명소가 됐는지 알 것 같았다. 화강암벽의 거친 질감에 은은한 조명이 잘 어울렸다.

광명동굴 개장 이전의 광명시는 관광과는 큰 인연이 없는 동네였다. 서울 근교 베드타운 중 하나,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 소재지, 비교적 최근에는 이케아 매장이 들어섰다는 것 정도가 외부인들이 광명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였다. 광명시를 찾은 관광객은 연간 수천 명이었다고 하지만 딱히 관광지라 할 만한 것이 없으니 숫자를 집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2011년 시험적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2015년부터 입장료를 받기 시작한 광명동굴은 2016년 142만 명의 유료 방문객을 받았다. 경기도 내 내로라하는 관광지인 캐리비안베이(142만 명), 한국민속촌(149만 명) 등에 뒤지지 않는 수치다. 2017년은 아예 200만 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아직 성수기가 시작하지 않았지만 동굴 안팎은 평일에도 내외국인 관광객으로 붐빈다. 한여름에는 주차장 진입에만 수시간 걸렸다는 증언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다.

어떻게 서울 근교에 길이 8㎞에 달하는 동굴이 있을 수 있을까? 왜 최근에야 각광을 받게 된 것일까? 사실 광명동굴은 천연동굴이 아니다. 일제시대부터 60여 년에 걸쳐 인간의 힘으로 꾸준히 파 들어간 금속 광산이다. 1970년대 광산이 문을 닫고 40년 가까이 버려졌지만 광명시청 공무원들의 지혜와 열정으로 새 삶을 찾았다. 광명동굴은 2017년 유료 개장 2년 만에 한국관광공사가 ‘한국 100대 관광지’로 선정했다. 또 시민에게 400여 개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재생의 아이콘’으로 주목받고 있는 광명동굴 개발 사례를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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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불모지의 버려진 광산

광명동굴의 옛 이름은 시흥광산이다. 한일합방 2년 후인 1912년 일본인에 의해 ‘시흥 동(銅) 광산’이 설립됐다는 기록이 있으니 100살이 넘었다. 광산은 광명시 남쪽 외곽에 있는 가학산 중턱에서 시작한다. 산을 동서로 관통하는 갱도가 척추 역할을 하며 거기서부터 60여 년 동안 꾸준히 파내려간 흔적이 지하 8층, 총연장 7.8㎞에 달한다. 한창때는 500∼600명의 노동자가 하루 250톤의 암석을 캐냈다. 주요 산물은 금, 은, 동, 아연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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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최대 금속광산이던 시흥광산은 1972년 홍수 때문에 문을 닫았다. 광산 앞 공터에 쌓여 있던 광미(광석 찌꺼기)가 물에 쓸려가 일대의 논밭, 하천을 덮쳤다. 광미에는 미량의 중금속 성분이 남아 있기 때문에 제대로 처리를 하지 않으면 중금속 오염을 일으킬 수 있다. 피해보상 문제로 하루아침에 문을 닫은 광산을 1974년 한 사업가(김기원)가 매입했다. 하지만 정부는 채굴 허가를 다시 내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소유주는 인근 소래포구에서 나온 새우젓을 한 통에 1만 원씩 받고 저장해주는 창고 용도로 갱도의 일부만을 사용했다. 그러는 동안 전체 8층 중 하단부 7개 층은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지하수에 서서히 잠겨버렸다. 산 곳곳에 위치한 출입구와 외부 시설물은 잡초와 덩굴, 나무 속으로 묻혀 들어갔다.

안양, 의왕, 시흥, 인천, 부천 등 주변지역이 도시화되는 가운데서도 그린벨트에 속한 가학산 지역은 도시 속의 산골로 남아 있었다. 1990년대 정부가 광산 주변 오염된 땅을 정화, 매립한 후 그 자리에 쓰레기소각장을 건설한 것이 유일한 변화였다.

1990년대 후반, 이 폐광산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강원랜드 카지노 개장 등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폐광 지역 개발이 이슈가 됐기 때문이다. 1998년 2기 민선시장으로 부임한 백재현 시장(현 지역 국회의원)은 부임 다음 해 시청 직원들에게 가학산에 있다는 옛 광산 일대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조사는 막 신설된 시청 정책개발팀이 맡았다.

설계도도, 길잡이도 없었다. 당시 42세 팔팔한 나이로 팀장 직무대리를 맡고 있던 최봉섭 현 시민행복국 국장이 탐험에 앞장섰다. 진입로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하던 터라 우선 칡넝쿨을 잡고 기어 올라가 산 정상 부근에 있는 사갱(비스듬한 갱도) 입구에 이르렀다. 다음번에는 헬멧과 로프 등 장비를 챙겨왔다. 나무에 로프를 묶고 최 팀장이 다시 앞장을 섰다. 무시무시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은 일이었다. 로프 한 가닥에 몸을 의지해 한참 내려가니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공간이 나왔다. 거기서부터 아래쪽으로는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갱도가 물에 잠겨 있었다. 수평 방향으로 이어진 다른 갱도를 따라가 보니 새우젓 저장고와 과거 광산의 정문으로 쓰이던 입구 쪽으로 이어졌다. “동굴이 생각보다 크고 미로처럼 복잡하게 돼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고 최 국장은 기억한다. 정책개발팀원들은 이후 동굴을 샅샅이 탐사해가며 도면을 그렸다. 수소문 끝에 광업진흥공사가 보관 중이던 갱내도를 입수했다.



인내로 꽃을 피운 동굴 개발

이렇게 만들어진 ‘가학광산 개발 정책보고서’는 광산과 일대의 그린벨트 지역을 포함하는 대형 테마파크를 그렸다. 약 500억 원의 투자금이 들어갈 것으로 추산했다. 광산 테마파크, 워터파크, 실내 스키장 등이 이 프로젝트에 포함됐다. 하지만 광명 같은 중소도시 입장에선 그만한 투자 프로젝트를 진행할 여력이 부족했다. 개발 계획은 일단 보류됐다. 그렇게 10여 년이 흘렀다. 선거철마다 시장, 국회의원 후보들은 이 보고서를 토대로 가학광산(시흥광산) 개발을 공약에 포함했지만 예산과 사업성 문제로 실행까지 옮기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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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민선 5기 양기대 시장이 부임하고서야 일이 진척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 정치인이 된 양 시장은 이 지역 국회의원 선거에서 두 번 낙선한 후 세 번째 도전에서 비로소 성공을 거둔 참이었다. 그는 일단 기존 가학광산 개발 보고서를 토대로 공약을 만들었지만 부임 한 달 후 광산에 직접 들어가 보고 나서는 머릿속에 그림을 새로 그려갔다.

보통 광산이라 하면 풀풀 날리는 검은 석탄재와 비좁은 통로,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토사가 연상된다. 하지만 가학광산은 입자가 무른 석탄이 아니라 단단한 금속을 캐던 곳이다. 워낙 단단한 화강암 암반에 구멍을 뚫은 것이라 광산 전체에 침목 하나 없어도 안전에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석탄재 같은 것도 없어서 공간도 쾌적했다. 또 충분히 넓었다. 조금만 길을 넓히면 메인 갱도에는 작은 트럭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양 시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건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 주변 지역의 개발 필요성이 절박해진 상황이라 광산 재개발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당시 KTX 광명 역사가 종착역에서 중간역으로 계획이 변경되면서 지역 개발에 활력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광명동굴이 딱 거기에 필요한 프로젝트였다”고 그는 설명한다.

양 시장은 일단 땅부터 확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과거 광명시가 고려했던 계획은 민간자본과 함께 대규모 테마파크를 개발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민간과 합작하면 대규모 투자가 가능하지만 공공사업으로 진행할 때보다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많고 규제 관련 이슈도 복잡해진다는 단점이 있다. 당장 그린벨트 지역의 개발은 경기도와 중앙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하는 사항인데 프로젝트에 민간자본이 참여하면 허가 절차가 복잡해진다. 양 시장은 우선 빠른 업무 진행을 위해 민간자본 없이 시 단독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특히 토지부터 빨리 매입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다음 해 예산에 43억 원의 폐광 매입비를 편성했다. 계약은 2011년 1월에 체결됐다. 시장이 동굴을 방문한 지 5개월 만이었다.

세 번째 작업은 폐광에 좋은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었다. 신문기자 출신답게 양 시장은 이름 선정에 민감하게 고민했다. 원래 이 광산의 이름은 시흥광산이었고 광명시가 시흥시에서 독립해 나온 후에는 가학광산으로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가학’이라는 말이나 ‘광산’ 혹은 ‘폐광’이라는 말 모두 관광객에겐 좋은 인상을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여러 후보를 놓고 고민하던 중 오종우 한국동굴학회장으로부터 “자연동굴이나, 인공동굴이나 다 같은 동굴이니 동굴이라고 부르는 건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들었다.1 그럴듯했다. 동아일보 옛 동료들도 같은 의견을 줬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당시로써는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무릎을 치게 만드는 발상이었다. 광명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시민들에게 친근감을 줬고 또 동굴의 위치를 쉽게 알리는 효과도 있었다. 발음도 예뻤다. 한국어에서 ㅇ과 ㄹ 받침은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자연스럽게 새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달라붙었다.

약 8개월간의 준비작업을 거쳐 2011년 8월 처음으로 동굴이 일반에게 공개됐다. 하루 두 번,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안전헬멧을 쓰고 동굴을 방문하는 방식이었다. 손님을 맞기 위해 새우젓 드럼과 40여 년간 부스러져 내린 흙을 깨끗이 치웠다. 바닥엔 깨끗한 돌을 깔고 천장엔 낙석방지망을 달았다. 전등도 가설했다. 별다른 콘텐츠 없이 약 400m 되는 갱도를 견학하는 코스였는데, 1년 내내 섭씨 12도 정도로 유지되는 갱도 안이 워낙 시원해서 방문객들의 반응이 좋았다. 8월 말부터 12월 말까지 입소문만으로 1만6000여 명이 동굴을 찾았다.

가장 고무적인 것은 동굴 내 넓은 동공에서 열었던 음악회였다. 처음 동굴을 탐사했을 때는 상당 부분 물에 잠겨 있던 공간이었지만 펌프로 물을 빼내고 나니 수십 명 이상 들어가는 가설 콘서트장을 만들 수 있었다. 자연적으로 메아리 효과가 나는 동공에서 펼쳐지는 국악, 오페라, 연극, 가요 등 각종 공연은 동굴 체험의 피날레였다.

개발 두 번째 해인 2012년에는 동굴 개발을 전담하는 테마관광과를 신설했다. 1999년 처음으로 폐광을 탐사했던 최봉석 팀장이 부임했다. 양기대 시장은 아예 테마관광과 직원들을 위해 동굴 앞에 간이 사무실을 차려줬다. 다른 일엔 신경 쓰지 말고 동굴을 성공시키는 데 전념하라는 뜻이었다. 본인도 6㎞ 정도 떨어진 시청을 오가며 현장 회의를 주재했다. 테마관광과는 스타트업처럼 기획부터 의사결정, 실행까지 빠르게 업무를 진행했다. 시장과 직원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놓고 토론을 벌이는 일도 흔했다. 시장과 팀원들은 짬이 날 때마다 국내외 여러 관광지를 다니며 동굴을 어떻게 꾸밀지 아이디어를 모아왔다. 폴란드 소금광산, 대만 금광산 등에서 특히 좋은 아이디어를 얻었다.(표 1) 이렇게 벤치마킹한 내용은 회의에서 진행 가부 여부를 결정한 뒤 시청공무원들이 직접 제작과 설치를 맡았다. 이들은 동굴에 맞는 콘텐츠 제작에 있어서는 자신들보다 더 전문성이 있고 더 열정이 있는 조직은 적어도 대한민국 안에는 없다는 자신감을 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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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30분 거리에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암벽 동굴이 있으며 은근히 볼거리도 있다는 입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2013년은 방문객이 40만 명에 달했다. 관광 불모지였던 광명시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2014년 초 조사기관에 의뢰해 광명시민 800명과 인근 뉴타운지역 주민 634명을 상대로 실시했던 여론조사 결과는 더욱 고무적이었다. 주민의 83%가 시의 동굴 개발 사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표 2)


다음 단계는 유료화였다. 애초에 가학광산 테마파크 개발 프로젝트는 지역 내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계획된 것이었으니 유료화는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다만 민간자본 투입 없이 시의 예산으로 진행되는 프로젝트니만큼 지갑을 쥐고 있는 시의회와 기타 이해관계자들도 사업성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참고 기다려온 것일 뿐이었다.



유료화와 콘텐츠 다양화 전략

유료화 개시는 2015년 4월로 잡혔다. 시청 내 전반적인 분위기는 좋았지만 우려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기적적으로 연인원 40만 명이 방문하는 광명시의 대표 관광지, 아니 광명시 유일의 관광지가 됐는데 섣불리 입장료를 걷겠다고 했다가 도로 사람이 빠지고 을씨년스러워지면 어쩔 것이냐는 일부 시의원들의 반대가 있었다. 그만큼 동굴은 광명의 자존심 같은 존재가 돼가고 있었다. 양 시장과 테마관광과 직원들은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입장료를 받으면 40만까지는 몰라도 30만 명은 충분히 올 거라 생각했다. 양 시장은 한술 더 떠서 입장료를 국내 관광지로서는 높은 수준인 8000원으로 책정하자고 제안했다. 화들짝 놀란 시의원들의 반대로 결국 4000원선에서 타협을 봤지만 ‘기왕 유료화하는 것 제대로, 확실하게 하자’는 그의 의지는 직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사실 양 시장이나 테마관광과 직원들이 가격 결정, 타깃 세그멘테이션, 홍보전략 수립 등 마케팅 업무를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방법론에 따라 진행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공무원이지 경영전문가는 아니었고 어설프게 경영전문가 흉내를 낼 생각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을 타깃으로 잡아야 할지도 감을 잡지 못했고 그런 불확실성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했다. 다만 무료 개방 기간 동안 가족 단위 관광객들과 연인들이 주로 찾는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조부모부터 손자손녀까지 3대가 함께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동굴 전체를 어떤 하나의 콘셉트로 통일해 꾸미는 것보다는 다양한 연령층과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각자 좋아하는 바를 찾아서 동굴을 즐길 수 있도록 콘텐츠도 다채롭게 준비하자, 그리고 반응을 보면서 조금씩 개선해나가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가격 측면에서도 콘텐츠 보강은 필요했다. 2014년 초 진행했던 광명시민 설문조사에서 약 50%의 시민들이 동굴 입장료로 1000∼3000원이 적정하다고 답한 바 있었다. 이것보다 더 많이 받기 위해서는 볼거리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유료화 직전 4개월은 동굴 문을 닫고 직원들이 밤낮과 휴일을 가리지 않고 콘텐츠 보강에 매달렸다. 시장도 하루 서너 차례까지 방문해 함께 회의를 했다.

이 기간 만들어진 구역들은 현재까지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예술의전당’(공연장) 옆에는 동굴에서 나오는 1급수 지하수를 이용해 수족관을 만들었다. 어떤 물고기가 이 물에 적응할지 몰라서 국내외에서 여러 희귀종을 사다가 일단 수조에 집어넣어 보고 살아남은 종들을 모아 전시했다. 또 황금광산이라는 역사를 살려서 일부 구간에는 벽과 바닥에 황금칠을 하고 ‘황금의 길’이라 이름 붙였다. 마치 절에서 기왓장 시주를 하듯 14K 도금판에 소원을 적어서 벽에 걸 수 있게 했다. 양 시장은 원래 이 아이디어에 반대했지만 실무 담당자였던 테마관광과 직원의 고집으로 기어코 황금의 길도 유료화 개장에 맞춰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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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4일, 드디어 유료 개장식이 열렸다. 4월 한 달간 3만7000명 이상이 찾아왔다. 날씨가 더워지고 또 TV 예능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방문자는 빠르게 증가했다. 어린이날엔 무려 1만4000명이 들었다. 6월에 메르스 사태가 터지면서 상승세가 꺾였지만 그래도 연말까지 총관광객은 92만 명이었다. 무료 개방 때보다 오히려 두 배 이상 늘어난 수치였다. 2016년은 더욱 성공적인 한 해였다. 8월에 이미 방문자 100만을 돌파했고 연말까지 총 142만 명이 광명동굴을 찾았다. 특히 황금의 길이 인기였다. 한국, 중국 관광객들이 좋아했다. 5000원에 판매하는 소원성취 도금판은 2만 장이나 팔렸다.

성공에 도취될 만도 하지만 테마관광과 직원들은 쉬지 않고 콘텐츠를 추가해나갔다. 기온이 가장 낮은 지하층에는 ‘귀신의 집’을 열어 여름에만 운영하는 특별 어트랙션으로 만들었다. 또 영화 ‘반지의 제왕’ 특수효과를 맡았던 뉴질랜드의 웨타워크숍으로부터 길이 41m에 달하는 용 모형을 주문 제작해 들여왔다. 이 용은 워낙 거대해서 조각을 낸 상태로 동굴로 들여온 다음 내부의 동공에서 전문가들이 조립해야 했다. 웨타워크숍과는 업무 협약을 맺고 국내 최초의 ‘판타지 아트 공모전’을 3년째 광명동굴에서 개최하고 있기도 하다. 전국의 판타지 아티스트들에게 작품을 응모 받아 동굴 안에서 전시하고, 1등 수상자는 웨타워크숍 본사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는 기회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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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의 성공을 거둔 코너는 와인동굴이다. 뒤편 깊숙한 곳에 와인셀러를 마련해놓고 전국 곳곳에서 생산되는 국산 와인을 맛볼 수 있는 와인동굴을 꾸몄다. 전국에 와인동굴을 만든 지자체는 여러 곳이다. 대부분 자기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주로 전시하는 데 반해 광명은 애초에 포도 농사를 짓지 않는 지역이므로 타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들을 다양하게 구비했다. 방문객이 여러 종을 비교해가면서 시음해볼 수 있게 한 것이 히트를 쳤다. 한편 음악과 무용 공연을 하던 공연장은 콘텐츠를 변경했다. 2017년부터는 울퉁불퉁한 암벽의 질감과 레이저 영상을 이용한 ‘미디어 파사드’ 공연을 상영하고 있다. 동굴 관광객 수가 증가하면서 1회 공연 시간을 줄이고 관객 회전율을 높여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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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자원이 없는 지역이니 그냥 한번 해보자 해서 시작한 동굴 개발이지만 그렇게 하다 보니까 타깃층도 생겼고 콘텐츠도 차차 쌓이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처음엔 ‘동굴에 기껏해야 종유석이나 있겠지’ 하고 방문하지만 실제로 방문해서는 곳곳에 꾸며놓은 다양한 콘텐츠들을 보고 그중에서 각자 자기가 공감하는 바를 찾는 것 같습니다.” 최 국장의 말이다.

확장은 동굴 내부로만이 아니라 동굴 외부에서도 진행됐다. 2016년 4월에는 동굴 입구에 프랑스의 유명 건축가인 장 누벨이 설계한 ‘라스코 전시관’이 문을 열었다. 원래는 프랑스 라스코 동굴벽화를 가져와 한정기간 전시하기 위한 시설로 만들어졌는데 전시물이 워낙 거대해서 동굴 안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되자 아예 따로 전시시설을 만들었다. 라스코 특별전이 끝난 이후에도 이 공간은 그대로 남아 연중 다양한 예술 전시들이 열리고 있다. 이는 문화시설이 부족했던 광명 일대 주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또 동굴과 마주 보는 쓰레기소각장 옆 홍보관 건물에는 경기도의 지원을 받아 ‘업사이클아트센터’를 열었다. ‘업사이클’은 ‘업그레이드+리사이클’, 즉 버려진 물건에 예술적 가치를 더해 새롭게 재탄생시킨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소방관이 썼던 호스를 재활용해 만든 배낭, 와인병을 녹여 만든 친환경 양초 등을 전시하고 판매하고 있다. 광명동굴 자체가 100년 묵은 폐광에 콘텐츠를 더해서 재탄생시킨 ‘업사이클’ 콘텐츠라는 상징성이 있어서 업사이클센터를 나란히 배치한 것이다.



입장료 유료화 이후 약 1년8개월 동안 광명동굴은 누적 방문객 약 250만 명, 세외 수입 125억 원을 올렸다. 또 약 400명의 직원을 정규직과 파트타임으로 고용해 지역 경제에 공헌하고 있다. 한여름에도 서늘한 동굴, 서울에서 30분 만에 갈 수 있는 동굴로 TV 방송에 수차례 소개되면서 적어도 수도권 서남부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는 명소가 됐다. 지방에서도 소문을 듣고 KTX나 차량 편으로 찾아오는 이들이 늘었다. 인천공항에서도 인천대교를 통해 50분 안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중국과 일본, 태국 등 해외 관광객도 꾸준히 오고 있어 이들을 위한 외국어 가이드도 상시 고용하고 있다.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권 중저가 숙소에서 묵는 해외 단체 관광객들에게는 공항에 가기 전에 쉽게 들를 수 있는 위치다. 동굴 사업이 확대되면서 2012년 10명 안팎으로 시작했던 테마관광과도 30명으로 수가 불어났다. 이름도 ‘글로벌관광과’로 바뀌었다. 이제는 동굴뿐 아니라 인근의 쇼핑시설과 전통시장, 오리 이원익 서원 등을 연결하는 광명시 전체 관광 프로그램의 개발과 운영을 맡고 있다. 관광 불모지였던 광명이 경기도의 ‘핫’ 한 명소로 거듭나고 있는 중심에 광명동굴이 있다.

밧줄을 몸에 두르고 동공으로 뛰어내렸던 1999년부터 폐광이 관광 테마파크로 변하는 과정과 함께해온 최봉섭 국장은 감회가 남다르다. “KTX 광명역이 처음에는 KTX 시발역으로 계획됐지만 중간역으로 변경되면서 이 지역은 허허벌판으로 방치돼 있었습니다. 동굴은 완전히 폐허였죠. 쓰레기 소각장 하나 있는 곳에 누가 오겠나 싶었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런 역경들을 다 이겨낸 겁니다.”



광명시는 2011년부터 현재까지 토지 매입, 주차장과 도로 건설, 각종 콘텐츠 개발 등 광명동굴 사업에 시 예산 약 570억 원을 투자했다. 국비 39억 원, 도비 199억 원을 포함하면 총투자비는 810억 원 정도다. 한편 동굴의 입장료 등 현장에서 발생하는 수입은 2015년 40억 원, 2016년 85억 원이었다. 광명시가 한국산업관계연구원에 의뢰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앞으로 30년간 매년 약 137억 원의 수입이 발생하고 비용을 제한 순수익은 연 60억 원 정도일 것으로 추산된다. 이를 토대로 산정한 광명동굴의 현재가치(present value)는 1530억 원이다. 투자 대비 2배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셈이다.

광명동굴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정해진 것은 없지만 민간자본과의 합작 투자를 포함해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는 상태다. 2017년 6월까지 동굴 내외부의 콘텐츠 구비는 완료된다. VR(가상현실) 체험관, 미디어관, 타임캡슐 등이 추가되면 당분간 큰 업그레이드는 없을 예정이다. 다만 시청 측은 장기적으로 동굴과 KTX 역사가 위치한 광명시 남부지역 전체를 개발해나간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이미 약 2㎞ 떨어진 역사와 이케아, 코스트코 매장 주변에 30∼40층을 넘나드는 고층 아파트와 상업시설들이 들어서고 있으며 동굴 인근까지도 개발 계획을 세우고 있다. 광명역사와 서울 사당, 양재를 잇는 강남순환고속도로 개통도 이미 지역 활성화에 도움이 되고 있다.

2017년 5월 현재 광명동굴 앞 진입로는 2차로에서 4차로로 확장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국도변에 여분의 주차장을 확보하는 공사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여름, 수용용량에 비해 너무 많은 인파가 몰려서 주차장에 들어가는 줄이 수백m 이어졌던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올해의 목표는 방문객 200만 명이다. 칡넝쿨에 뒤덮여 새우젓 창고로나 쓰이던 폐광이 불과 6년 만에 광명시의 자랑으로 떠올랐다. 시청 공무원들의 힘이다.



성공요인 분석

광명동굴의 성공사례는 공공영역뿐 아니라 기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요 포인트를 정리해본다.

1. 최소 충족 조건부터 맞춘 린 스타트업

광명시 남부 그린벨트 지역에 있는 가학광산은 개발 잠재력이 큰 관광 아이템이었다. 광명, 서울, 인천, 안산, 시흥, 안양 등 30분에서 1시간 거리 안에 수백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수도권 서남부 지역에는 타 지역에 비해 볼거리, 즐길거리가 적기 때문에 관광지로서의 경쟁에도 유리했다. KTX 역사 개통(2004), 인천대교 개통(2009), 이케아 입점(2014) 등 주변 호재도 충분했다. 그러나 이런 장점들이 실제 개발사업에는 오히려 저주로 작용하는 측면이 있었다. 지역 개발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은 게 문제였다. 1999년 작성된 정책보고서는 500억 원 이상의 민관합동 투자를 전제로 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KTX 역세권 개발이 시민들의 기대보다 뒤처지자 이 지역의 다른 개발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회의론이 일었다. 동굴 개발 사업계획 역시 10년 이상 캐비닛에서 잠자는 신세가 됐다.

2010년 부임한 양기대 시장은 전임자들과는 달리 눈높이를 낮추고 시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진행하는 방식을 택했다. 동굴 자체의 잠재력을 두 눈으로 확인하자 40억여 원의 시 예산을 들여 부지부터 매입했다. 매입된 토지는 어차피 시의 자산이 되는 것이므로 의회도 반대하지 않았다. 광산이 시의 소유가 되니 그다음부터는 신경 써야 할 요인들이 줄고 일이 술술 풀렸다. 민간자본이 개입되는 사업이었다면 그린벨트 개발 허가를 받거나 경기도와 중앙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문제도 훨씬 어려웠을 것이고 시간에도 쫓겼을 것이라는 게 양 시장과 최 국장의 견해다. 또 직원들에게는 ‘이 광산은 우리 것’이라는 주인의식을 심어주는 효과도 있었다.



최 국장은 이것이 가장 결정적인 성공요인이자 ‘티핑포인트’였다고 생각한다. “제가 정책 개발을 오래 해봤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10년 시장님이 땅을 매입해서 개발해보겠다고 나섰을 때였습니다. 그걸 보고 속으로 ‘그렇지, 개발은 저렇게 해야 하는 것인데’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것이 굉장히 잘했던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잘못 끼운 단추를 처음부터 다시 맞춘 셈이다.

2. 린스타트업(lean startup)형 조직

토지를 매입한 후 테마관광과는 서두르지 않고 동굴을 단계별로 정돈하고 꾸며나갔다. 일부 구간들을 시민들에게 개방해서 피드백을 받았고 입소문을 유도했다. 2015년의 유료화는 그 이전 4년간의 준비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자본을 퍼부어서 화려한 관광지를 만드는 게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조금씩 새로운 콘텐츠를 실험해보고 기획을 업그레이드해가면서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추는 방식이 주효했다. 테마관광과를 시청에서 분리해 동굴 앞 간이 사무실과 쓰레기 소각장 내부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한 것도 린스타트업 다운 발상이었다. 자동차로 20분 이상 걸리는 시청에서 근무하면 그때그때 동굴 콘텐츠를 기획해서 빠르게 실험해보고 피드백을 수집하기 어렵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런 린스타트업 방식을 적용하다 보니 초창기에는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과감하게 폐지하거나 변경한 아이템들도 있다. 일례로 ‘예술의전당’이라는 동공에서 벌어지는 예술 공연들은 오픈 초기 광명동굴의 대표 상품이나 다름없었지만 이용객이 많아지고 관람객 동선(動線)의 흐름에 방해가 되자 과감하게 ‘미디어 파사드’ 레이저쇼로 전환했다. 가학산 정상 부근의 외부 전망대로 이어지는 사갱 역시 동굴 개방 초기에는 주요 어트랙션으로 홍보했지만 방문객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미련 없이 접었다. 이미 투자된 돈, 즉 매몰비용에 대해서 아까워하고 책임을 묻기보다는 미래의 수익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렇게 일반적인 공무원 조직과는 다른, 민첩하고 날씬한 조직 운영이 가능했던 것은 양 시장이 직원들에게 스타트업과 같은 사고의 유연성을 독려했기 때문이다. 광명시청에서 이렇게 현장에 상주하는 조직은 테마관광과가 유일했다. “어차피 가보지 않은 길이었고 경험도 없었습니다. 교과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예산도 풍족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조금씩 써가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 회의를 통해 계획을 수정하는 식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말이다.

3. 핵심 업무영역과 비핵심 영역의 분리

광명동굴 개발은 외부 전문가가 아닌 광명시청 공무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했다. 이들 중 원래부터 동굴 전문가나 테마파크 전문가였던 사람은 없다. 대신 내부 단면도부터 하나씩 손으로 그렸을 정도로 누구보다도 광명동굴에 대해서는 잘 알고, 또 애착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벤치마킹 대상을 선정해 아이디어를 수집하고, 콘텐츠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고, 피드백을 수집해 업데이트하는 것 역시 시청 테마개발과(현 글로벌관광과)의 주 업무였다. 팸플릿 등 홍보물을 만들 때도 외주 업체에 아이디어만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을 담당한 직원이 가안을 만들고 마지막 터칭만 외부 업체가 손보는 정도였다. 그 결과 초기부터 근무했던 직원들은 지자체 테마관광 전문가로서 어디서도 찾기 힘든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현재 광명동굴 콤플렉스에서 근무하는 약 400명의 직원 다수는 광명시 시설관리공단 소속이지만 콘텐츠를 담당하는 해설사들만큼은 광명시청에서 직접 고용하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동굴만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라스코 전시관’ 및 광명시 인근의 다른 관광지에 대한 안내도 맡는다.

이렇게 테마공원의 핵심 영역인 콘텐츠 기획과 운영은 철저히 시청에서 맡고 비핵심 영역에서는 외부기관과의 파트너십도 적극 추진한다. 당시 광명시장과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소속 정당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두 리더는 동굴 개발에 의기투합했다. 또 KTX 역사 주변에 아웃렛 매장을 낸 롯데그룹이 지역사회에 대한 보답의 뜻을 밝히자 가학산을 둘러서 동굴까지 이르는 산책로를 달릴 코끼리열차를 기증하도록 주선했다. 이 열차는 아웃렛 방향과 동굴 방향을 이어주므로 양측에게 윈윈이 되는 사업이다. 또 프랑스 라스코 전시회 유치, 뉴질랜드 웨타워크숍과의 협업도 광명동굴 관계자들의 오픈마인드에서 비롯된 파트너십이었다.



4. 네이밍(naming)

서비스업도 브랜드가 중요한 시대다. 특히 입소문을 많이 타는 관광산업의 경우 작명에서부터 승부가 갈리는 경우가 많다. 중국 윈난성의 디칭 주정부는 1997년부터 지명을 ‘샹그릴라’로 바꿨다. 샹그릴라는 영국의 제임스 힐턴이 1933년 쓴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가상의 지명이다. 디칭과는 연관이 없는 이름이었는 데도 불구하고 이후 이 지역을 찾는 외국 관광객이 연평균 25%씩 성장했다.

광명동굴은 샹그릴라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발음이 귀엽고 기억하기에 좋은 이름이다. ‘가학광산’이 주는 부정적 이미지가 없다. 또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곳이니만큼 지자체의 이름을 알린다는 효과도 있다.

흔히 지자체들이 만드는 관광자원들은 스토리텔링에 대한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작명에 과도한 힘이 들어가곤 한다. 신문기자 출신 시장이 결정해서일까. ‘광명동굴’은 장식성보다는 실용성에 초점이 있다. 또 단순하기 때문에 다양한 콘텐츠로의 변주(變奏)가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다. 실제로 처음 고려됐던 이름 중에는 ‘광명황금동굴’도 있었지만 너무 이미지가 굳어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광명동굴’로 최종 결정됐다. 앞으로 추가 개발에 있어서도 가능성을 넓게 열어놓은 셈이다.



조진서 기자 cjs@donga.com



생각해볼 문제

1 광명동굴의 경제성 분석을 한 전문평가기관은 향후 30년간 약 60억 원의 연간 순이익이 들어올 것으로 전제하고 할인율(discount rate)은 공공 부문 대출이자율인 3.89%로 잡아서 순현재가치(net present value)를 계산했다. 그래서 동굴의 가치를 약 1500억 원으로 평가했다. 이 분석에 사용된 가정들은 충분히 합당한가? 만약 내가 시청 재무담당자라면, 혹은 지분투자를 하려는 기업 경영자라면 어떤 점을 더 고려해야 할까?

2 동굴 외에는 별다른 관광지가 없는 광명시가 동굴개발사업에서 키운 조직원들의 노하우와 역량을 재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3 테마파크 방문객의 고객생애가치(customer lifetime value)를 최대화하기 위한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DBR mini box



위치: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광명 KTX역 서편 가학산 그린벨트 구역 내)
채광물질: 금, 은, 동, 아연
갱도 길이: 지하 7층까지 총연장 7.8㎞ 중 2㎞ 구간 개방
연 방문객: 142만 명 (2016년)
고용인원: 약 400명
수익: 85억 원 (2016년)


연혁

1912년 채굴 시작
1972년 폐광
1999년 최초 탐사, 가학광산 개발 정책보고서 작성
2011년 1월 광명시가 광산을 매입
2011년 8월 시범 개방. 5개월간 방문객 1만6000여 명
2012년 9월 테마개발과 신설 (동굴 개발 전담)
2015년 4월 유료 개장. 첫 달 방문객 3만7641명
2016년 4월 프랑스 ‘라스코 동굴벽화’ 전시회
2017년 1월 ‘대한민국 100대 관광지’ 선정
동아비즈니스리뷰 298호 Future Mobility 2020년 6월 Issue 1 목차보기


지평막걸리 성장전략




DBR Case Study: 막걸리 인식 바꾼 ‘지평주조’의 성장 전략

동네에서 전국구로
막걸리의 지평을 넓히다

Article at a Glance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도 수십 년 동안 동네 양조장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던 지평주조가 최근 10년 사이 메이저 막걸리 업체로 성장한 비결은 무엇일까. 외부에서는 지평주조의 약진을 ‘마케팅의 성공’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정작 내부의 평가는 다르다. 김기환 대표이사는 지평주조의 성공을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실제 지평주조는 ‘맛의 표준화’를 목표로 소규모 양조장으로는 드물게 생산 공정을 자동화하고 좋은 맛을 내는 미생물을 연구해 지평막걸리의 맛을 업그레이드한다. 또 영업에서도 대리점과의 상생 등 기본 원칙들을 지켜나간다. 이 과정에서 지평막걸리만의 깔끔한 맛에 반한 젊은 소비자들이 지평막걸리를 나서서 SNS에 홍보하고 대리점들과의 관계도 좋아지면서 업계 최초로 전국 유통망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지평주조 측은 이는 결과일 뿐 비결은 ‘원칙을 지키는 것’에 있다고 강조한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김미라(성균관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허름한 뒷골목 선술집에서 싼 맛에 먹는 중장년층을 위한 술.’

우리가 막걸리에 대해 갖는 일반적인 이미지다. 하지만 이런 막걸리가 와인이나 맥주를 누르고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시기가 있었다. 2010년을 전후해 막걸리가 일본에서 ‘맛코리(マッコリ)’란 이름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일본의 사케(약 14∼16%)보다 낮은 알코올 도수(약 5∼6%)로 술이 약한 사람도 즐길 수 있고 피부와 건강에 좋은 발효 식품이라는 인식이 일본에 널리 퍼진 덕분이다. 또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맥주 공장들이 가동을 멈추는 바람에 일본 맥주 공급에 차질이 생겼는데 그 반사이익을 막걸리가 얻기도 했다. 여기에 당시 일본 내 불었던 한류 열풍도 일본 내 막걸리 인기에 한몫했다. 덕분에 막걸리 수출량이 큰 폭으로 늘었다. 관세청 자료에 따르면 막걸리 수출 물량은 2009년 7405t에서 2011년 4만3082t으로 6배 이상 증가했다.

이 일본발(發) 막걸리 훈풍은 현해탄을 건너 한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막걸리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주점이 홍대·강남 등 번화가에 줄줄이 생겨났다. 막걸리 인기에 출고량도 크게 늘었다. 막걸리 출고량은 2009년 17만6000㎘에서 2010년 26만1000㎘로 1년 새 47.8%나 증가했을 정도다.

하지만 막걸리의 봄은 짧았다. 인기는 금세 사그라들었고 막걸리 시장은 다시 쪼그라들었다. 2011년 5079억 원(출고액 기준)이던 막걸리 시장 규모는 2017년 4469억 원으로 감소했다. 막걸리 수출액도 2011년 5273만 달러(약 620억 원)로 고점을 찍은 뒤 2018년 1241만 달러(약 146억 원)로 빠르게 감소했다. 한일 관계 냉각화 등 여러 원인이 있지만 영세한 국내 막걸리 양조장들의 전략 부재와 마케팅 역량 부족이 큰 원인 이었다. 특히 막걸리의 품질과 맛에 집중해 고급화를 시도하기보다는 막걸리 열풍에 편승하고자 가격 경쟁에만 매몰되면서 질 낮은 재료를 사용한 싼 막걸리들이 시장에 많이 나왔고 이는 소비자들의 실망으로 이어졌다. 막걸리 시장은 반짝 인기 후 장기 침체기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막걸리 시장의 침체 속에서도 모든 막걸리 제조업체가 다 어려워진 것은 아니다. 시장 상황과 상관없이 빠른 속도로 성장한 회사가 있다. 지평주조가 그 주인공이다. 지평주조는 막걸리 붐이 한창이던 2010년 당시 매출 2억 원을 올리는 동네 양조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2010년 김기환 현 대표이사가 회사를 맡은 후 불과 9년 만에 매출액 230억 원(2019년 추정 매출액)을 올리는 막걸리 업계 강자 중 한 곳으로 성장했다. 특히 이 회사의 성장세에서 놀라운 점은 기존 막걸리의 주요 고객인 50대 이상 장년층이 아닌 2030 젊은 세대의 입맛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더불어 기존 막걸리 업계 강자인 서울탁주나 부산생탁도 못한 전국 유통망을 경기도 작은 마을의 양조장이 구축했다는 점도 이 회사가 최근 주류 업계의 주목을 받는 이유다. 지평주조가 짧은 기간에 막걸리 시장의 메이저 플레이어로 떠 오른 비결을 DBR이 분석했다.




연 매출 2억 원에 직원 3명인 동네 양조장을 물려받다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에 위치한 지평주조 양조장은 1925년에 생겼으며, 현재 막걸리를 생산 및 유통하는 양조장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됐다. 특히 이 양조장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사령부로 쓰이기도 했고 치열했던 지평리전투에서도 유일하게 포탄의 피해를 입지 않고 보존된 건물이다. 그래서 2014년에는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역사적 가치만큼이나 스토리도 있는 양조장이다.

하지만 2010년 전까진 지평주조는 그저 그런 지역 양조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역사적 가치와 스토리를 품고 있었고 맛이 좋은 막걸리를 만들고 있었지만 김동교 전 대표(김기환 현 대표의 아버지)는 막걸리 사업을 크게 키울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김동교 전 대표는 막걸리 사업을 정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돈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변화가 일어난 건 김기환 대표가 지평주조의 대표이사 자리에 오르면서부터다. 2010년 김기환 대표가 아버지로부터 양조장을 물려받을 당시 지평주조의 연 매출은 2억 원, 직원 수는 3명에 불과했다.
사실 김동교 전 대표는 아들에게 막걸리 사업이 아닌 미곡종합처리장(RPC) 사업을 맡기고 싶었다. 사업 규모나 수익 면에서 월등했기 때문. 그러나 김기환 대표는 무슨 이유인지 꼭 막걸리 사업을 해보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는 양조장 사업에 욕심을 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려서부터 우리 양조장 막걸리가 맛 하나만큼은 좋다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2009년 전후로 막걸리 붐이 불면서 전국에 시음 행사가 많이 열렸고 아버지도 우리 제품을 들고 참가하셨는데 가는 곳마다 맛으로 호평을 받았다. 특히 젊은 층의 호응이 좋았다. 그래서 젊은 층을 타깃으로 막걸리를 팔면 되겠다 싶었다.”

결국 아들은 아버지를 설득했고 새로운 방식으로 젊은 소비자들을 공략하겠다는 아들의 뜻에 아버지는 “망해도 좋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라며 양조장 운영을 맡긴다. 하지만 회사를 물려받았을 당시 김 대표의 나이는 29세. 사회생활 경험이라고는 서울에서 홍보대행사에 잠깐 다닌 것이 전부였다. 막걸리는 먹을 줄만 알았지 만드는 법도, 파는 법도 잘 몰랐다.

이때부터 김 대표는 막걸리와의 동거를 시작한다. 김 대표는 일단 막걸리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 전문 교육기관에서 양조 교육을 받았다. 또 경험 많은 양조장 직원들과 함께 새벽에는 직접 밀 입국(粒麴, 곰팡이 배양) 온도를 맞춰가며 밤잠을 설쳤다. 이즈음 김 대표는 결혼을 하게 됐는데 신혼살림도 양조장 한편에 차렸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막걸리 배우기에 임했다.

동시에 김 대표는 자신의 홍보대행사 경험을 살려 먼저 양조장 일부를 개조해 지평주조 홍보관을 만들었다. 양평에 놀러 오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양조장으로 끌어오려는 시도였다. 양조장 자체가 문화유산인 데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지휘소로 쓰인 역사가 있어 역사적인 가치와 스토리를 막걸리에 입혀 매력적인 관광명소를 만들고자 했다. 또 종전 60주년을 기념한 특별 막걸리 ‘자유를 위하여’도 출시했다. 막걸리 업계에선 신선한 시도라고 받아들여졌고 실제 양평에 놀러 왔다 지평주조 홍보관을 들러 막걸리를 사가는 외지 손님들이 생겼다. 하지만 김 대표의 초반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진 못했다. 전통주 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겉 포장만 바꾸는 방식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김 대표는 포장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은 내실을 다져야 했다.


원칙을 지키며 판로를 개척하다

직원 3명이 전부인 동네 양조장이 내실을 다지기 위해선 무엇부터 해야 할까.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가장 시급한 것은 ‘판로 개척’이었다. 지평주조는 앞서 말한 대로 2010년 당시 양평 일대에 막걸리를 공급하는 동네 양조장이었다. 달리 유통망이라고 할 것이 없었다. 당시 막걸리 시장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그 지역을 대표하는 막걸리 브랜드가 시장을 주도하고 있었다. 서울의 장수막걸리, 부산의 부산생탁, 인천의 소성주, 대구의 불로막걸리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과 비교하면 지평막걸리는 지역 특산 막걸리 정도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판로 개척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류 시장은 수없이 많은 도매상과 소매상이 존재한다. 판매 채널도 식당과 술집부터 대형마트, 소형 슈퍼마켓, 편의점 등 다양하다. 지평주조는 일단 양평군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수도권 동쪽 상권에 도매상들을 접촉해 지평막걸리를 유통하고자 했다. 하지만 도매상 입장에서 이미 잘 거래하고 있는 곳들이 있는데 굳이 잘 알지도 못하는 새로운 막걸리 브랜드를 취급할 이유가 없었다. 김 대표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결국 김 대표는 직접 막걸리를 차에 싣고 지평막걸리를 소개하고 다녔다. 원래 법적으로 주류 제조사가 직접 술을 판매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 그러나 전통주는 예외다. 전통주 양조장들이 워낙 영세해 정부에서 예외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밤에는 막걸리를 만들고 낮에는 막걸리 배달을 다녔다. 매출액 2억 원짜리 소규모 양조장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힘든 시기였지만 김 대표는 이때부터 몇 가지 원칙을 세우고 이를 철저히 지킨다.


1.제대로 만들어 제값 받고 팔겠다.

첫 번째는 가격 경쟁이 아닌 품질로 승부하겠다는 원칙이다. 지평주조의 지평막걸리는 2010년 막걸리 붐 당시 서울시내 막걸리 바에서 병당 7000∼9000원에 팔렸다. 이는 일반 대중 막걸리에 비하면 2배 가까이 비싼 가격이다. 소매가 역시 장수막걸리 등 대형 막걸리 업체의 제품보다 비쌌다. 수도권 진입을 노리는 입장에서 막걸리 가격을 높게 가져가는 것이 부담일 수도 있다. 막걸리는 대표적으로 가격에 민감한 술이기 때문이다. 2010년 당시 막걸리 붐을 타고 고급 막걸리 바(Bar)도 생기고 프리미엄 막걸리들이 탄생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막걸리는 5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 허름한 식당에서 마시거나 동네 슈퍼에서 구입해 집에서 마시는 술이었다. 전대일 지평주조 경영전략본부장은 “이런 소비자 가운데는 막걸리 가격이 100원만 싸도 1㎞ 이상 먼 슈퍼마켓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 대표는 처음부터 장년층 소비자들은 지평주조의 주요 타깃 소비층이 아니라고 봤다. 그래서 초기부터 맛, 스토리, 브랜드에 만족하면 기꺼이 조금 비싼 가격도 지불할 수 있는 젊은 소비자들을 타깃으로 하고 이를 꾸준히 밀어붙였다. 사실 당시만 해도 전체 막걸리 시장에서 지평주조와 같은 가격으로 시장에 포지셔닝한 브랜드들은 많지 않았다. 이들이 전체 막걸리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 남짓에 불과했다. 당시로써는 매우 니치한 시장이었지만 지평주조는 꾸준히 준프리미엄 전략을 이어간다. 다행히 ‘저도주’ 열풍이 불고 ‘레트로 트렌드’가 인기를 얻으면서 지평주조가 타깃으로 했던 니치 마켓은 ‘리치 마켓(Rich market)’이 된다. 그리고 현재도 지평막걸리는 시장에서 준프리미엄 제품으로 구분돼 팔리고 있다. 일반 막걸리들과 경쟁하기 위해 가격을 낮추기보다는 맛과 품질을 높여 제 가격을 받고 팔겠다는 김 대표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다. (DBR Mini Box Ⅰ ‘막걸리 시장에서 지평주조가 갖는 브랜드적 위치는?’ 참고.)


DBR mini box I: 지평주조의 브랜드적 위치

현재 막걸리 시장은 4개 카테고리로 구분돼 있다. 첫 번째는 대규모 시설을 갖춘 막걸리 업체다. 수도권의 장수막걸리, 인천의 소성주, 대구의 불로막걸리, 부산의 생탁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업체는 가장 대중적인 시장에 맞춰 막걸리를 만드는 업체로 최선의 가성비를 내기 위해 노력한다. 한국 막걸리 시장의 9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두 번째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소규모 지역 막걸리다. 대표적으로 부산의 금정산성막걸리, 당진의 신평양조장, 고양시의 배다리막걸리, 그리고 지평주조다. 10년 전 막걸리의 다양성을 알리며 붐을 일으켰던 곳으로 지역의 맛과 멋, 무엇보다 다양한 스토리를 품은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국산 쌀로 술을 빚으며 한식 주점 등에서 일반 막걸리의 2배 전후 가격을 기꺼이 지불하고 마시는 막걸리다. 대규모 양조장의 경우 유통망이 촘촘해 관리가 편하지만 이러한 막걸리는 소량으로 유통이 안 되고 무엇보다 재고가 남는 경우 처리가 곤란했다. 서울에서 막걸리 몇 병 남았다고 재고가 필요한 부산에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희소성 및 지역의 가치를 인정하는 트렌드세터들은 다소 높은 가격을 기꺼이 지불했다. 일반적인 막걸리가 1000원대라면 이 막걸리의 소매가는 2000원이 넘는 경우가 많았으며 외식 업체에서는 주로 5000∼9000원에 판매됐다.

세 번째는 트렌드라는 옷을 입은 ‘크래프트 막걸리’ 등이다. 젊은 감성으로 무장한 크래프트 막걸리는 기존의 막걸리가 가진 전통적 권위를 버리고 새로운 디자인에 맛과 멋으로 무장한 제품이다. 디자인만 보면 막걸리라고 생각하기 어렵지만 만드는 방식은 오히려 옛날 방식을 고수하는 수제품으로 막걸리 자체의 가치에 중점을 둔다. 대표적으로는 단양의 도깨비 술, 서울의 나루생막걸리, 여주의 술아 핸드메이드 막걸리, 시뻘건 막걸리로 유명한 술 취한 원숭이, 복순도가 막걸리 등이 있다. 소비자 가격은 6000∼1만 5000원으로 외식업체에서는 1만∼3만 원가량에 팔리고 있다.

네 번째는 문화적, 기술적 가치를 뽐내고 싶은 고가 프리미엄 막걸리 라인이다. 병당 1만∼5만 원대의 막걸리로 원료를 아낌없이 사용하며 숙성 기간도 길게 가져간 제품이다. 지역의 햅쌀만을 고집하며 만드는 방식조차 전통적 문헌에 근거한 제품들이 많다. 트럼프 만찬주로 유명한 풍정사계 춘, 아세안 정상회의 건배주인 천비향, 아름다운 정원의 해창막걸리, 송도의 삼양춘, 안동의 별바당 등이다. 소비자 가격은 1만5000원이 넘으며 외식 업체에서는 2만∼7만 원 정도에 판매되고 있다.“이렇게 고급 막걸리가 시장이 있나”라는 의문이 있지만 의외로 많이 팔린다. 와인은 와인 바에서 5만 원이면 저가에 속하지만 막걸리는 같은 가격이면 최상급을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막걸리들을 판매하는 곳조차도 와인 바 이상의 좋은 인테리어를 갖춘 강남, 홍대 등의 핫 스폿에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지평막걸리는 두 번째 카테고리인 역사와 전통이 있는 지역의 소규모 양조장이었다. 그리고 이 시장은 원래 전체 막걸리 시장의 1% 정도의 틈새시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업계 1위를 위협할 정도의 기세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 뜻은 막걸리 시장 자체가 더이상은 가성비가 아닌 가치를 따지는 프리미엄 시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2.유통업계 관행을 바꾼 고마진 정책

또한 김 대표는 대리점과의 상생을 회사의 원칙으로 삼고 꾸준히 실천한다. 지평주조는 초기 대리점 대상 영업을 시작하면서 경쟁사 막걸리보다 높은 마진을 약속했다. 이런 고마진 정책이 가능한 이유는 크게 2가지 이유 덕분이다. 일단 앞서 언급한 대로 지평주조가 준프리미엄 제품으로 고객들에게 인식돼서 조금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 큰 역할을 했다. 막걸리 유통업계는 병당 100원, 50원 떼기의 초저가 이윤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다른 어떤 가치보다 낮은 가격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다. 하지만 김 대표는 처음부터 무리한 가격 경쟁 대신 지평막걸리를 준프리미엄급 막걸리로 포지셔닝하면서 대리점주들에게 돌아갈 몫을 늘렸다.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지평주조가 대리점에 판촉비 등을 전가하지 않고 공급 가격을 최대한 낮춰줬기 때문이다. 덕분에 도매상은 물건을 상대적으로 싸게 매입하게 되고 마진을 더 가져갈 수 있는 구조가 됐다.

그렇게 2010년부터 준프리미엄 가격 전략과 대리점 고마진 정책을 유지하자 대리점주들의 인식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얼마 남지도 않는 막걸리를 뭐 하러 거래선을 바꾸냐?”고 퉁명스럽던 대리점 사장들이 “지평막걸리 팔면 돈이 많이 남는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서서히 지평막걸리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처음엔 다른 막걸리 제품과 병행해서 취급을 하던 대리점들이 같은 양을 팔면 지평막걸리가 이윤이 많이 남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지평막걸리만을 취급하기 시작했다. 체계도 없고, 네트워크도 없었지만 스스로 세운 원칙을 지키며 꾸준히 발품을 판 덕분에 지평주조의 매출액은 2억 원에서 2014년 28억 원, 2015년 45억 원까지 늘었다. 이렇게 5년 사이 조금씩 시장을 늘려나간 지평주조는 2014년경에는 용인, 수원, 여주, 이천 등 수도권 동남부와 송파 등에 대리점을 갖게 됐다.



막걸리는 손맛? 막걸리는 과학이다!

열심히 발품을 팔며 지평막걸리를 알린 덕분에 매출액은 꾸준히 증가했다. 하지만 김 대표는 2014년경,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는 성장을 도모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일단 늘어나는 주문을 감당하기에는 기존 양조장은 너무 작았다. 지평주조 양조장은 1920년대에 지어진 목조 건물이었다. 이 건물에서 막걸리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밀 입국을 만들고 고두밥을 지어 이를 항아리에 넣고 발효시켜 술을 담그는 전통 방식으로 막걸리를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생산량을 크게 늘리기 어려웠다.

더 큰 문제는 막걸리 맛이 균일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양조장들은 대부분 수십 년 동안 막걸리를 담가 온 소위 ‘장인’들의 손맛에 따라 맛이 좌우된다. 문제는 사람의 손맛이 일정하지 않다는 점. 특히 막걸리는 같은 원재료와 물을 써도 온도 등 외부 변수에 의해 맛이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과거에는 막걸리 맛이 그때그때 다른 것이 막걸리의 매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국구 막걸리를 목표로 하는 막걸리 전문 제조업체가 소비자에게 “우리 막걸리는 그때그때 맛이 조금씩 다릅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이를 이해해 줄 소비자가 있을까? 소규모 양조장에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전국적으로 막걸리를 팔려면 맛의 표준화는 꼭 필요했다.

결국 맛을 좌우하는 변수들을 차단하려면 ‘자동화’가 답이었다. 지평막걸리가 가장 지평막걸리스러운 맛을 내는 원재료의 상태, 온도, 습도 등을 찾고, 100% 자동화는 어렵더라도 변수를 최대한 통제하려면 투자를 통해 생산 설비를 자동화해야 했다. 하지만 지역 양조장에 이런 시설투자비가 있을 리 만무했다. 당시 지평주조는 매출액 40억 원을 갓 넘긴 상황이었다.

결국, 지평주조는 2015년 기존 양조장 옆 부지를 활용해 생산 공장을 짓기 시작한다. 수도권 진출을 노리는 회사 입장에서 서울과 더 가까운 남양주 인근에 생산 공장을 옮길까 고민도 했지만 자금이 부족했다. 특히 생산지를 옮기면 술맛이 변할 수 있다는 것도 원래 양조장 옆 부지를 선택한 이유였다. 막걸리는 발효주기 때문에 물이 변하거나 누룩곰팡이가 변하면 술맛도 변한다. 그래서 술을 빚는 장소가 중요하다.

그러나 좁은 공간에서 자동화를 시도하다 보니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완전 자동화보다는 제한된 자동화를 시도했다. 이렇게 1공장을 지으며 제조 과정을 자동화하고 공장 내부에 온도 조절 장치를 설치하는 등의 노력을 펼쳤고 이를 통해 막걸리 맛의 균일화를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2016년부터 지평주조는 지평면 제1공장에서 막걸리 생산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 생산 시설은 태생부터 한계가 있었다. 지평 양조장이 위치한 곳은 공장 지대가 아니라 근린 생활 지대였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근린 생활 지역에는 생산 시설을 500㎡ 이상 지을 수 없다. 지평주조의 새 공장도 결국 기존 목조 건물 양조장에 인접하게 협소한 공간에 지어졌다.

이런 한계 때문에 지평주조의 제1공장은 가동 1년여 만에 생산을 중단했다. 제1공장 완공 당시 이 공장의 생산 능력은 월 150만 병 수준에 불과했는데, 이후 지평막걸리를 찾는 수요가 빠르게 늘면서 2017년에 이미 수요가 생산 능력을 초과하게 됐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지평면이 상수원 보호 대상 구역이다 보니 막걸리를 만들면서 발생한 오폐수 처리가 문제였다. 전 본부장은 “상수도 보호 구역에서는 특정 기간 내 내보낼 수 있는 오폐수의 양에 제한이 있어서 막걸리 생산을 늘리고 싶어도 지평면 주민들이 내보내는 생활 오폐수들을 줄이지 않는 한 생산량을 크게 늘리기 어려운 구조였다”라며 “결국 생산 거점을 옮기는 어려운 결정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공장을 옮기면 맛이 변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막걸리는 물이 중요한 술이다. 지평막걸리가 뛰어난 맛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도 지평 양조장 내 우물에서 나오는 지하수를 활용해 술을 빚었기 때문이다. 공장 부지를 옮기면 물맛이 변할 테고, 물이 변하면 술맛도 변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더 큰 문제는 효묘균이었다. 막걸리는 누룩을 만들 때 따로 첨가물을 넣지 않는다. 양조장 내부 누룩방에 누룩을 놓으면 그 공간에 오랜 기간 살고 있는 곰팡이들이 누룩에 달라붙어서 누룩을 발효시키며 막걸리의 독특한 맛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곳이 다르면 그 공간에 사는 곰팡이가 다르기 때문에 술맛이 달라진다.

결국 물맛과 효모균을 유지할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 일단 물맛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평과 같은 수원(水原)인 북한강을 끼고 있는 곳에 공장을 세워야 했다. 김 대표는 적당한 신공장 부지를 찾기 위해 무려 6개월 이상 북한강 지류를 따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강원도 춘천시 동산면 인근에 적당한 부지를 찾아낸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북한강을 수원으로 쓴다고 해도 춘천의 물은 지평면의 물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지평 양조장의 물은 양조장 내 우물에서 나오는 지하수였다. 그러나 춘천에 공장을 짓는다 해도 지하수를 끌어다 쓸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결국 상수를 써야 하는데, 상수는 지하수와는 성분이 완전히 다르다. 기본적으로 소독과 정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결국 공장 내 상수를 재정수해서 지하수와 비슷하게 만드는 설비를 설치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현재 지평주조 춘천 공장은 수돗물을 재정수해 지하수 물과 비슷한 성질의 물로 바꾸어 사용한다.

또한 막걸리 맛을 내는 효모균이 바뀌는 것을 막기 위해 지평주조는 기존 지평 양조장 기둥과 서까래 등에서 서식하는 효모균을 일일이 채취해 사용하고 있다. 또 춘천 공장 내 미생물 연구실에서 이를 그대로 배양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이 과정에서 지평주조는 중소 규모 양조장으로는 드물게 자체 미생물 연구실을 만들고 미생물을 전공한 전문가들을 채용했다. 이들은 지평막걸리의 맛을 유지하게 하는 효모균을 연구하고 배양하는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지평주조는 2018년 6월부터 춘천 공장 시대를 연다. 대지 8580㎡(약 2600평), 건물 면적 3300㎡(약 1000평)에 달하는 부지에 최첨단 자동화 설비와 품질관리 설비를 갖춘 신축 공장에서 생산을 시작하면서 지평주조는 월 500만 병 제조 능력을 갖춘 시설을 완비하게 된다. 이러한 생산량은 기존 양평 공장 생산량 대비 3배가량 늘어난 수준이다. 덕분에 2018년부터 지평주조는 그동안 지평막걸리를 팔고 싶다고 지속적으로 접촉을 해 왔지만 물량이 부족해 공급할 수 없었던 편의점과 SSM(Super supermarket, 기업형 슈퍼마켓) 등에 막걸리를 납품할 수 있게 된다.

업계 최초 전국 유통망 구축

이렇게 생산 기반이 보강되면서 지평주조는 성장세에 날개를 단다. 일단 막걸리 제조 공정 자동화에 성공했고 이 과정에서 ‘지평 생막걸리’ 도수를 5도로 리뉴얼해 출시했다. 이 막걸리가 젊은 고객들 사이에서 ‘맛이 부드럽고 머리가 아프지 않은 막걸리’로 자리매김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그 결과, 매출은 빠르게 늘었다. 하지만 여전히 김 대표는 부족함을 느꼈다. 밑바닥부터 하나하나 배워가며 막걸리 만드는 방법은 어느 정도 터득했지만 회사가 커지면서 스스로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 특히 회계, 인사, 세일즈, 마케팅 등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이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유능한 인재 영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특히 세일즈 전문가가 절실했다. 차에 막걸리를 싣고 돌아다니며 도매상을 찾는 발품식 방식으론 한계가 분명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배상면주가에서 영업본부장을 지낸 전대일 현 지평주조 경영전략본부장과 연이 닿게 된다. 전 본부장은 대학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했지만 커리어의 대부분을 주류 영업 분야에서 보낸 주류 유통 전문가다. 배상면주가 영업본부장 이전에는 웅진식품에서 음료 영업을 했다. 국내 주류 시장의 트렌드와 주요 대리점과의 네트워크 면에서 업계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으로 꼽혔다. 2016년 당시 전 본부장은 퇴사 후 개인사업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때 김 대표가 전 본부장에게 영입 제의를 했고 지평주조의 오랜 역사와 제품력, 젊은 사장의 열정에 끌려 결국 지평주조에 합류한다. 전 본부장은 “깨끗한 지하수와 신선한 쌀을 전통 주조법으로 빚어내는 지평주조의 제품력이 마음에 들었고 특히 옛 양조장에서 옛 전통 주조 방식을 고수한다는 점에서 ‘기본기가 탄탄한’ 제품이라 생각해 마음이 끌렸다”고 설명했다.

전 본부장이 지평주조에 오면서 지평주조의 대리점 수도 빠르게 늘었다. 특히 이전까지 서울과 수도권 동남부에 치우쳐 있던 대리점을 서울과 수도권 전역으로 확대한다. 비결은 예상외로 간단했다. 전 본부장이 수년간 닦아온 네트워크가 비결이었다. 전 본부장은 “대리점 리스트를 쭉 살펴보고 서울과 경기도 인근에 지평주조를 취급하지 않는 대리점에 전화를 돌렸다”며 “수년간 주류 업계에서 닦아온 네트워크에 지평막걸리에 대한 우호적인 소문들이 더해져 손쉽게 유통망을 확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지평주조의 빠른 성장이 2030세대를 대상으로 마케팅 활동을 잘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그러나 김 대표와 전 본부장은 이런 지적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보다는 앞서 설명한 맛과 품질에 대한 투자와 도매상과의 상생 전략이 주효했다는 것이 지평주조 측의 자체 분석이다.

실제 전대일 본부장 합류 후 2016년 수도권 영업망을 확대한 지평주조는 2017년부터 수도권을 넘어 강원, 부산, 경남, 충청, 전북 등 전국 유통망 확대를 추진한다. 이 과정에서 2010년 이후 줄기차게 지켜온 원칙이 힘을 발휘했다. 도매상과의 상생이 그것이다.

지평주조는 앞서 설명한 대로 도매상의 마진을 높여주기 위해 판매촉진비 등을 포기하고 그만큼 지평주조의 마진을 양보했다. 다른 막걸리 제조사들이 제조사 마진을 높게 가져가는 대신 판매촉진비 명목으로 리베이트를 나눠주는 방식으로 대리점들을 관리하던 관행을 깬 것. 판매촉진비 대신 제조사의 공급 가격을 낮춰주고 대리점주들이 낮아진 매입 가격 아래서 자유롭게 판매 가격 정책 및 프로모션 전략을 운영할 수 있게 하면서 대리점들과 동등한 관계를 맺고자 힘썼다. 또한 대리점을 현장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제조사의 파트너이자 현장 전문가로 인정하고 이들이 노하우를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노력이 시간이 지나 효과를 발휘하면서 대리점들은 자체적으로 판매촉진비를 투입해 스스로 시장을 개척하는 효과가 생겼고 입소문이 나면서 지평주조의 막걸리를 취급하려는 대리점들이 늘어났다. 덕분에 지평주조는 2019년 2월에 지평막걸리를 취급하는 75개 도매상을 구축, 전국 유통망을 완성했다. 현재는(2019년 말 기준) 도매상 수가 91개까지 늘었다. 이들 대리점은 대부분 지평막걸리만 취급하는 독점 도매상들이다. 이는 막걸리 업계 1위 업체인 서울탁주도 못한 일이다. 전 본부장은 “단일 브랜드로 지평막걸리처럼 전국적인 유통이 이뤄지고 높은 매출을 내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며 “대리점을 파트너로 보고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가격 전략을 짠 것이 성공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입소문의 영향으로 2016년부터는 대형마트로부터 러브콜을 받는다. 대형마트들은 각각 자체적으로 지정한 벤더사가 있고 이 벤더사를 통해 주류를 공급받는데 2016년부터 이들 벤더사에서 지평막걸리를 대형마트에 공급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온 것. 이어 2018년부터는 편의점 업체들이 ‘저도주 열풍’을 타고 지평막걸리 납품을 요청하면서 지평막걸리는 명실상부 전국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 ‘전국구 막걸리’가 된다. 전 본부장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회사의 성장세를 이어갈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전국 유통망 확보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특히 지역색이 뚜렷한 막걸리 시장에서 지방을 뚫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막걸리가 경쟁력이 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지평주조의 성장 비결

지평주조의 성장 스토리를 살펴보다 보면 치밀한 전략을 통해 성장했다는 느낌보다는 몇 가지 원칙을 정해두고 이를 철저히 지키면서 작은 회사답게 그때그때 그 원칙 아래서 유연성을 잘 발휘해왔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원칙의 대부분은 과거로부터 지켜온 전통과 관련이 깊었다. 과거로부터 전해져 온 막걸리 제조 방식을 활용해 고유의 맛을 지키고 양조장의 역사적 가치를 지킬 수 있는 방식으로 라벨 디자인을 바꾸고 마케팅을 진행했다. 역사와 전통의 가치를 지키려는 이런 노력이 최근의 레트로 트렌드와 맞물리면서 지평주조를 트렌디한 막걸리 브랜드로 만들어줬다. 덕분에 지평주조는 다른 막걸리 업체들은 잡지 못한 2030세대 취향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1. 맛과 품질이라는 본연의 가치에 집중

지평주조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지평주조는 막걸리의 도수를 낮추며 ‘저도주’ 경쟁에 불을 지핀 주인공이다. 2015년에 막걸리 업계에서는 최초로 5도짜리 지평 생 쌀막걸리를 내놓는다. 당시로써는 막걸리의 도수를 내린다는 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시도였다. 시장 점유율 1등인 장수막걸리가 6도인 상황에서 인지도가 떨어지는 지평주조가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기 때문. 알코올 도수 6도는 기존 막걸리 시장의 주요 소비자층인 고령층이 오랜 기간 마셔온 익숙한 맛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 대표는 도수를 내릴 때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경쟁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젊은 층과 여성 소비자에게 어필하기 위해 막걸리 도수를 낮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평주조가 5도짜리 지평 생 쌀막걸리를 시장에 내놓자 경쟁사들은 “젊은 소비자들을 타깃으로 도수를 낮춘 것”이라든지 “물을 더 타서 생산 원가를 절감하려는 시도”라는 소문들이 넓게 퍼졌다. 그러나 지평주조가 막걸리의 도수를 내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평 생막걸리는 5도일 때 가장 맛있다는 것을 수차례 시행착오 끝에 터득한 것. 전 본부장은 “가장 지평다운 맛을 살리고 품질을 균질하게 가져가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다 도수가 5도일 때 최적의 맛이 난다는 결과가 나와 이를 제품에 반영한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물을 탔다는 루머도 사실이 아니었다. 쌀 함량을 늘리고 쌀 자체의 단맛을 살리는 지평주조만의 방법을 개발했고 이 방식으로 도수를 낮출 수 있었다. 원재료의 단맛 덕분에 막걸리 특유의 누룩 냄새와 텁텁한 맛이 줄면서 젊은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깔끔한 맛의 막걸리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성장에 도움이 됐다.

의도와 상관없이 지평주조의 막걸리가 인기를 끌면서 이후 ‘저도주’가 하나의 트렌드가 된다. 덕분에 막걸리는 물론이고 소주 시장에서도 저도주들이 줄줄이 출시된다. 특히 업계 1위 장수막걸리도 5도짜리 막걸리 시장이 커지는 것을 보고 지난해 ‘인생막걸리’를 내놓으며 저도주 경쟁에 불을 지핀다. 지평주조는 지평 생막걸리가 가장 맛있는 도수를 찾아 맛을 지키자는 원칙에 충실했지만 본의 아니게 주류 시장에 저도주 바람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지평주조는 또 맛이라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경쟁사들은 잘 쓰지 않는 ‘밀 입국’을 여전히 사용한다. 1990년대 쌀 막걸리 허용 이후 대부분의 막걸리 업체들이 쌀로 만든 누룩을 쓰고 있다. 그러나 지평주조는 쌀 막걸리에도 여전히 밀 누룩을 활용한 전통적인 주조법을 고수하고 있다. 밀 입국은 밀 자체에 단백질 함량이 높아 고소하고 깊은 맛이 나는 특징이 있고 옛날 막걸리 맛에 가깝다. 또 옛날 막걸리의 향수를 가지고 있는 중장년층을 위해 지평 생 쌀막걸리 외 밀로 만든 ‘지평 생 옛막걸리’를 여전히 생산 중이다. 전 본부장은 “전체 매출에서 밀 막걸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10%도 되지 않지만 옛날 막걸리의 깊은 맛을 찾는 소비자들을 위해 꾸준히 밀 막걸리를 생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평주조는 최근 첫 제조공법을 살린 막걸리 신제품 ‘지평 일구이오’를 출시하기도 했다. 지평 일구이오는 1925년부터 막걸리를 빚어 온 지평주조의 오리지널 레서피로 재탄생한 제품으로, 오랜 역사를 지닌 지평막걸리만의 깊은 맛과 향을 되살린 것이 특징이다. 알코올 도수는 7도이며 지평막걸리만의 부드러운 풍미를 그대로 살려내 기존 제품보다 높아진 도수에도 깔끔한 목 넘김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변화하는 막걸리 시장에서도 지평주조만이 가진 고유성을 소비자들에게 각인하는 것이 지평 일구이오의 목적이다.


2. 옛 양조장의 가치를 살린 마케팅, 레트로 트렌드

김 대표는 지평주조 합류 전 홍보 전문 회사에서 일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꾸준히 지평주조의 브랜딩에 노력을 기울였다. 초기부터 양조장 한편에 지평주조 홍보관을 만들고 지평주조의 모습을 형상화한 로고와 영업 브로슈어를 제작하는 등 당시 회사의 상황이나 규모와는 맞지 않는 다양한 활동을 한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또 라벨 디자인에 공을 들였다. 지평주조는 2010년 이후 수차례 라벨 디자인을 수정한다. 특히 초기에는 오히려 현재 라벨 디자인보다 색깔도 화려하고 젊은 느낌이 드는 라벨을 선보이기도 했다. ‘지평 진선미 막걸리’가 대표적 예다. 그러나 이후 지평주조는 전략을 수정해 지평주조의 오랜 역사를 라벨에 담기 위해 노력한다. 일단 서체 디자인을 파격적으로 바꾼다. 옛날 방식인 세로쓰기에 왼쪽으로 행갈이를 하는 우종서(右縱書) 형태로 라벨을 바꾼다. 여기에 글씨체는 옛날 양조장 현판 글씨체를 사용했다. 또 ‘지평 생막걸리’라는 상표명 옆에는 지평 양조장 그림을 넣어 고전미를 더했다. 젊은 세대 소비자를 잡는다면서 디자인은 예스럽게 바꾼 것. 그런데 마침 레트로 열풍과 함께 ‘예스러운 것이 멋스러운 것’이라는 트렌드가 생겼고 지평막걸리의 병 디자인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예쁜 막걸리’로 인기를 끌었다. 전 본부장은 “지평막걸리 라벨 디자인은 공모전을 통해 인연을 맺은 대학생 작품”이라며 “고전적이면서도 젊은 감성이 담긴 라벨 덕분에 소비자들이 지평막걸리를 더 사랑해 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평주조는 최근에는 역사적 건물인 옛 양조장 건물을 체험형 공간으로 리모델링 중이다. 지평리의 양조장을 문화 체험 공간으로 변경, 지평주조의 100년 역사와 문화를 전파할 예정이다. 더불어 이 양조장에서 기존에 없었던 프리미엄 제품을 제조 및 판매할 예정이다. 다품종 소량 생산을 통해 소비자에게 막걸리가 가진 다양성과 부가가치를 보여줄 예정이다. 이러한 갤러리가 완공되면 주변 양평 관광지와 연결해 관광 문화 상품으로서의 부가가치를 키워나갈 예정이다.


3. SNS 마케팅 선도

지평주조는 막걸리 회사로는 드물게 젊은 소비자를 공략한 SNS 마케팅에 집중하고 있다. ‘세월을 이어가는 맛과 향’이라는 슬로건하에 운영 중인 지평주조 공식 SNS 채널은 1925년부터 막걸리를 빚어온 역사와 전통을 알리고 지평막걸리를 보다 다양하게 경험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 홈술·혼술이나 가심비, 소확행과 같이 적당히 맛있게 마시고 싶어 하는 2030세대의 주류 소비 트렌드에 맞춰 지평막걸리와 어울리는 이색 안주 조합이나 와인 잔, 칵테일 잔 등을 이용해 색다른 분위기 연출을 제안하는 등의 콘텐츠를 적극 활용하는 방식이다. 이는 다소 올드하게 느껴질 수 있는 막걸리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젊은 층을 공략하기 위함이다.

브랜드 고유의 차별화된 콘텐츠를 위해 고정 코너도 운영 중이다. 지평막걸리를 판매하는 맛집을 소개하는 코너 ‘지평미식회’는 지평막걸리와 어울리는 메뉴 소개는 물론 지평막걸리를 즐기는 색다른 방법을 발견하는 재미를 제공하고자 기획됐다. 지평주조 직원들의 이야기를 담은 ‘지평을 여는 사람들’ 코너는 지평주조의 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2020년 1월 말 기준 인스타그램에서 지평막걸리라는 해시태그(#)를 검색하면 약 3만7000건의 피드를 확인할 수 있다. 업계 1위인 장수막걸리 피드가 3만3000여 개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면 지평막걸리의 SNS 마케팅이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최민희 지평주조 마케팅팀장은 “인스타그램에서 지평막걸리가 가장 피드가 많은 이유는 SNS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젊은 소비자들이 지평막걸리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며 “이처럼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공유하는 콘텐츠가 많은 편이라서 공식 SNS 채널은 조금 느리더라도 지평이 가진 고유한 색깔을 확고히 하는 쪽으로 운영 방향을 설정해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에 지평주조는 젊은 소비자층에게 주력 제품인 ‘지평 생 쌀막걸리’를 알리기 위해 유튜브 크리에이터 ‘팀브라더스’와 협업을 진행, ‘다양한 음식의 모든 것’이라는 콘셉트로, 요리와 먹방, 제품 리뷰 등의 영상 콘텐츠를 업로드하며 좋은 반응을 끌어내고 있다.

한국의 기네스 꿈꾸는 지평주조

지난 10년간 무려 120배 가까운 성장을 한 지평주조. 그런 지평주조가 그리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전대인 본부장은 “우리는 한국의 기네스를 꿈꾸고 있다”라고 자신에 찬 어조로 답했다. 실제 기네스 맥주의 역사를 살펴보면 지평주조의 스토리와 닮은 점이 눈에 띈다. 일단 오랜 역사를 지녔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네스는 1759년 더블린에서 출발해 25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또한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시대에 발맞춰 제품을 혁신해 왔다. 기네스는 1893년 수학자와 과학자를 채용해 기네스 흑맥주가 최고의 맛을 내는 홉의 비율을 찾아냈다. 1959년에는 맥주에 질소를 넣어 기네스 특유의 부드러운 거품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기네스 캔맥주의 상징적 소리를 만들어 내는 ‘위젯(질소 가스가 담긴 공)’도 오랜 기간 연구한 혁신의 결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평조주는 기네스 맥주가 갖는 상징성에 주목하고 있다. 전 본부장은 “아일랜드를 찾은 여행객이라면 으레 더블린 시내에 있는 기네스 양조장을 방문해 그 역사를 배우고 오래되고 독특한 흑맥주 맛을 음미한다”며 “기네스는 흑맥주 하나로 아일랜드의 상징이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평주조가 한국 막걸리를 상징하는 브랜드가 됐으면 하는 희망을 내비쳤다.

“지평양조장은 1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데다 독특한 건축 양식을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594호로 지정돼 있다. 이런 문화유산들을 그냥 허비할 순 없지 않나? 우리는 이곳을 기반으로 지평주조만의 콘텐츠를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 지평양조장 건물을 활용해 양조장 견학, 술 빚기 체험, 시음, 문화 연계 행사, 지평 브랜드 행사 등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하면 막걸리에 관심 있는 국내외 관광객들을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노력들이 쌓이면 지평주조도 기네스 맥주처럼 한국과 양평을 대표하는 술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재웅 기자 jwoong04@donga.com


DBR mini box II : 김기환 지평주조 대표 인터뷰
“제조에서 문화로 외연 넓힐 것”

회사가 성장하고 조직이 빠르게 커지면서 겪게 되는 여러 어려움 중 최근 가장 고민이 되는 부분은?

아무래도 인재 양성이다. 회사가 성장하면서 과거에는 생각지 않았던 일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직원들의 업무가 과도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너무 업무에 치이게 되면 열정도 사라지고 역량 강화도 소홀히 하게 되지 않나. 함께 일하고 있는 직원들이 더 나은 인재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업무 환경 및 제도 개선, 직원 교육 등을 고민하고 있다.


지평주조가 약진을 거듭하면서 경쟁사들의 견제도 심해지는 듯하다. 이에 대한 생각과 향후 대응 방안은?

같은 업계에서 경쟁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업체들의 행보나 새로 내놓은 제품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매출 성장이나 점유율을 높이는 것이 지평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우리는 지평주조가 갖고 있는 목표와 가치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더 역량을 쏟고 있다. 앞으로도 지평의 생각과 색깔을 담은 제품을 선보이고 업계에서 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도를 함으로써 ‘제조’에서 ‘문화’로 외연을 넓혀나갈 예정이다.


매출액에 비해 직원 수(50여 명)가 적은 것이 눈에 띄는데, 이유가 있나?

작은 동네 양조장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생산성과 효율을 중시하는 경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가능하면 직원 수를 늘리기보단 함께 회사를 키워나가는 기존 직원들에 대한 보상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회사를 운영 중이다. 특히 젊은 직원들은 루틴(Routine)한 업무에 염증을 느낀다. 이런 업무를 줄일 수 있는 사무 자동화, 생산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하고 불필요한 업무나 보고를 과감히 줄여나가면서 기존 직원이 새로운 업무를 시도해 볼 수 있도록 업무 효율화에 신경 쓰고 있다. 직원 수가 많지 않아도 생산성과 효율을 높이면 직원에게 돌아가는 몫은 그만큼 끌어올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평주조는 중소기업임에도 직원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는데 어떤 혜택이 있고, 이런 제도를 운용하는 이유는?

회사의 미래는 회사 내 조직원들에게 달려 있다. 현재 직원들에 대한 대학교 및 대학원 등록금 지원, 외부 교육비 지원, 취미 활동비 지원, 대학생 자녀 학자금 지원 등의 제도가 있다. 아직 대단한 혜택이라고 말하기엔 부끄럽지만 회사 규모가 커질수록 실질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나씩 확대하고자 한다. 올해는 사내 도서관 운영 및 복지 포인트 제공도 계획돼 있다.


막걸리는 해외 진출이 어렵다고들 하는데 수출 계획은 어떻게 되나?

현재 해외에 수출되고 있는 대부분의 막걸리는 외국에 거주하는 교포들이 주 타깃 고객이다. 이런 식의 수출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수출인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지평주조는 현지인을 타깃으로 한, 그들의 입맛에 맞고 어필할 수 있는 제품을 수출하는 것이 진짜 수출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술뿐만 아니라 음식, 예술 등을 포함한 하나의 문화로 다가설 계획을 갖고 있다. K-Pop이나 K-Beauty가 좋은 롤모델이라고 생각한다.



DBR mini box III : 성공 요인 및 시사점
“바꿔라! 하지만 바꾸지 말아라!”


포르셰 철학과 같은 본질 집중 전략

막걸리 업계는 2010년을 전후해 일본발 막걸리 인기 덕에 외적으로 큰 성장을 한다. 하지만 눈앞의 이익에만 치중한 나머지 막걸리의 품격을 올려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향이 아닌 수출액 늘리기에만 급급하다 결국 2년 만에 실패를 경험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지평주조는 남들이 일본 수출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내수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바닥을 튼실하게 다진 후에 해외 진출을 한다는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수출용 살균 막걸리는 기존의 생막걸리와 맛이 달랐다. 한번 높은 온도로 멸균 처리를 한 만큼 생막걸리 특유의 신선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페트병에 넣게 되면 탄산도 사라졌다. 일부 업체들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냉장으로 생막걸리를 수출하기도 했지만 유통기한이 짧은 수출용 생막걸리는 맛이 변질될 리스크가 컸다. 짧게는 수익을 올릴 수 있으나 무리하게 진행했다가 오히려 후폭풍이 올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지평주조는 수출이라는 시장 대신 주변에 가까운 시장부터 돌파구를 찾았다. 지평리 및 양평 군내는 물론 본사와 가까운 수도권의 동남부인 이천, 용인, 수원, 그리고 송파 쪽부터 마케팅을 진행했다. 이처럼 단기적 이익 대신 브랜드 가치와 맛이라는 본질을 지킨 덕에 오히려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세계적인 자동차 브랜드인 포르셰의 디자인 철학은 단순하다. ‘Change it, But do not change it.’ 즉 ‘바꿔라, 하지만 바꾸지 말라’다. 이것은 본질에 집중하면서 진화해 나간다는 의미다. 지평주조는 막걸리 시장의 마이너 업체에서 메이저 업체로 성장하면서 이 원칙을 잘 지켜나갔다. 가장 기본인 품질 관리에 열정을 쏟았으며 수출보다는 내수에 집중했다. 맛은 바꿨지만 옛 맛은 살렸으며, 판매 대리점들과의 협업 및 상생으로 두터운 파트너십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기본을 지키는 노력 덕분에 품질과 맛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으며 전통은 지키되 트렌드에 따라 디자인이나 알코올 도수 등에 변화를 줘 시대를 아우르는 키워드 속에 지평막걸리가 늘 함께할 수 있었다.

소규모 막걸리 양조장의 가장 큰 과제는 대량 생산을 했을 때, 균질한 맛을 내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는 경험치가 부족해서고, 두 번째는 설비도 받쳐주질 않는다. 무엇보다 ‘어차피 저렴한 막걸리’라는 안일한 생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200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위생상의 문제가 있는 양조장이 많았다. 지평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 적극적인 품질 관리에 들어갔다. 일단 날씨 및 발효 컨디션이 안 좋아 맛이 조금이라도 변한 막걸리 원액, 그리고 유통기한이 임박한 제품은 모두 버렸다. 한마디로 술은 버려야 팔린다는 철학이었다. 물론 덤핑으로 팔 수 있었지만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평은 시장에서 하나씩 신뢰를 쌓아갔다.

고정된 룰을 깨는 과감한 혁신

지평막걸리의 가장 큰 변화는 막걸리의 도수를 낮춘 것이다. 기존의 6%인 막걸리의 도수를 5%로 낮췄다. 단순히 저도수가 대세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지평막걸리가 가장 맛있는 도수를 찾기 위한 노력이었고 이를 위해 회사의 연구진도 총동원됐다. 알코올 도수를 5%로 낮춤으로써 일단 막걸리의 누룩취가 확연히 적어졌다. 하지만 단순히 물을 더 넣어서 도수를 맞춘 것이 아니라 쌀 자체의 단맛을 살려 도수를 낮췄다. 발효공학을 통해 원료 비율을 그대로 가면서 맛에만 변화를 준 것이었다. 이렇게 낮은 도수의 막걸리는 맥주에 익숙한 2030세대의 입맛에 딱이었다. 맥주의 알코올 도수가 4∼5%이기 때문. 저도주로 바꾼 부분은 생각지 못한 홍보 효과를 거뒀다. 소주 등의 도수가 계속 낮아지면서 ‘저도수’ 술이 하나의 트렌드가 됐고 저도수 술로 지평막걸리가 자주 언급됐다.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홍보가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원칙을 지키며 브랜드 가치 창출

그렇다고 지평주조가 모든 것을 바꾼 건 아니다. 특히 절대 고수하는 원칙이 하나 있었다. 바로 옛날 방식으로 밀로 만든 누룩을 고수한 것이다. 밀 누룩(밀입국)은 1960년대부터 양조장에서 본격적으로 쓰였던 막걸리 발효제. 특히 1965년 양곡관리법으로 인해 쌀로 더 이상 술을 못 빚게 되면서 당시 모든 양조장이 이 밀 누룩(밀 입국)을 사용해 술을 빚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와서 쌀 막걸리가 허용되면서 이 밀 누룩으로 술을 빚는 양조장은 상당수 사라졌다. 많은 양조장이 쌀 누룩(쌀 입국)을 사용해 술을 빚게 된 것. 하지만 지평주조는 맛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 끝에 막걸리 맛의 본질은 밀 누룩에 있다고 보고 옛 막걸리 맛을 고수했다. 결과적으로 막걸리에 향수를 가진 5060 소비자층과 새롭게 신규로 진입한 2030세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게 됐다.

지평막걸리의 디자인에서도 연관된 기업 철학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바로 옛 방식인 세로쓰기인 종서(縱書)로 디자인이 돼 있는 것이다. 게다가 왼쪽으로 행갈이를 하는 우종서(右縱書) 형태로 돼 있다. 고전적인 디자인 형태를 그대로 가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디자인은 지평주조 자체 내에서 제작한 것이 아니고 디자인을 전공한 대학생의 작품이다. 즉, 고전적인 디자인이었지만 2030세대의 감성도 품은 디자인이다. 디자인은 소비자에게는 첫인상이다. 첫인상이 좋아야 그다음이 진전된다. 결국, 클래식과 트렌디를 품은 디자인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거부감 없이 다가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매출로 이어졌다.

지평주조의 모토는 이것 하나로 귀결된다. ‘바꾼다, 하지만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발전은 추구하지만, 결국 그 근본은 지켜나간다라는 의미다.


필자소개 명욱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 vegan_life@naver.com
필자는 일본 릿쿄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벤처캐피털리스트로 일하다 한국 전통주에 빠져 주류 전문가의 길을 가게 됐다. 현재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 과정 주임교수를 맡고 있으며 KBS1 라디오 김성완의 시사야, SBS 팟캐스트 말술남녀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 『말술남녀』가 있다.




DBR Case Study: 호시노 리조트 운영 전략 및 조직 문화

료칸시대 끝났다고 할 때 ‘사람’에 집중
멀티태스킹 능력 키워 일본 호텔업 선도

Article at a glance
효율적인 운영 시스템과 역량 있는 직원만 확보된다면 기업은 경제 불황은 물론 경영난을 극복하고 성장해 나갈 수 있다. 핵심은 운영 시스템과 인사제도가 선순환할 수 있는 ‘디자인’이다. 호시노리조트는 직원들이 고객 서비스의 a부터 z까지 담당하는 ‘멀티태스킹’을 도입해 업무 효율성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서비스 역량을 강화했다. 단순히 직원들에게 ‘일을 많이 하라’고 압박하지 않았다. 투명한 정보 공유, 공정하고 수평적인 인사 시스템, 직원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의사결정 구조 등을 통해 직원들이 일에 보람을 느끼고 충분히 보상받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회사 분위기를 정착시켰다. 그 결과 호시노리조트는 작은 료칸에서 시작해 국내외 37개 리조트를 운영하는 일본 호텔 대표 브랜드로 거듭날 수 있었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남정희(고려대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호시노 리조트는 1914년 일본 나고야현 가루이자와의 작은 마을에서 호시노 가문이 운영하는 작은 료칸에서 시작했다. 호시노 요시하루(星野佳啓) 4대 사장은 1991년 사업을 물려받아 ‘일본 료칸 사업은 망했다’는 세간의 평가를 뒤집고 20여 년 만에 일본 대표 리조트 브랜드를 만들었다. 료칸의 전통적인 매력과 서구식 호텔 서비스를 결합해 ‘일본식 호텔’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특별한 매력은 2017년 11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딸 이방카 트럼프가 일본을 방문하면서 다시금 주목받았다. 이방카를 극진히 대접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만찬장으로 호시노 리조트의 도쿄 중심가 호텔 ‘호시노야 도쿄(星のや東京)’를 낙점해 화제를 모은 것이다.

호시노 사장은 호텔 비즈니스의 핵심을 ‘사람’이라고 봤다. 값비싼 인테리어나 화려한 빌딩보다 좋은 인재가 중요하다고 믿었다. 뛰어난 직원을 충분히 확보하고, 이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사업의 성패를 가른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호시노 사장은 Great Operation(효율적인 운영 시스템 도입)과 Great People(직원 만족도 향상)이라는 두 가지 원칙에 집중해 호시노 리조트만의 독특한 운영 전략과 인사제도를 정착시켰다. 먼저 직원 개개인의 멀티태스킹 능력을 강화했다.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 누구나 고객 응대부터 청소, 설거지, 요리까지 거뜬히 해낼 수 있다. 서로 일을 떠넘기는 상황이 없어지고 고객들의 만족도도 높아졌다. 호시노 사장은 실력 위주의 수평적 조직 문화도 확립했다. 연공서열을 폐지하고 누구나 팀 리더가 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다. 능력과 의지만 있으면 언제든 관리자를 맡을 수 있어 직원들이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일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 결과 호시노 리조트는 일본 내 35개 리조트, 해외 2개 리조트를 가진 일본 대표 리조트 브랜드로 거듭났다. 2005년 142억 엔 수준에 머물렀던 총수입(Transaction Volume)은 2018년 509억 엔으로 뛰었다. 정규직 사원 수는 2014년 1910명에서 2018년 2509명까지 늘었다. 더 중요한 것은 우수한 인재들의 지원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는 점이다. 150여 명을 뽑는 정기 채용에 매년 2000여 명의 대학 졸업 예정자들이 지원서를 낸다. 젊은이들이 일하고 싶어 하는 직장이라는 얘기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직원들은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때마다 반발했다. “직원들을 설득하고 제도를 정착시키는 데만 10년이 걸렸다”는 게 호시노 사장의 설명이다. 그는 어떻게 수익성, 고객만족, 직원 성장이란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었을까? ‘리조트의 달인’ 호시노 사장과 직원들 인터뷰를 통해 호시노 리조트의 혁신적인 운영 전략과 인사제도를 집중 취재했다.


고객만족도와 수익성 동시 달성 추구
1990년대 초 일본 료칸 사업은 침체기를 맞았다. 버블 경제가 붕괴되면서 우후죽순 들어섰던 료칸 상당수가 경영난에 시달렸다. 일본 경제 전문가들은 수급 불균형 문제를 지적하며 ‘료칸 사업은 회생 불가’라고 평가했다. 일본 국내 여행 수요가 줄고, 그나마 여행을 다니는 일본인들은 대부분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진단이 뒤따랐다.

호시노 사장의 생각은 달랐다. 미국 코넬대에서 호텔경영 석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그는 대외적 상황이 아니라 료칸 자체의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호시노 사장이 자체 분석한 결과 일본 국내 관광시장은 연간 약 20조 엔 규모로 유지되고 있었다. 수요 자체가 급감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문제는 생산성이었다. 당시 미국과 비교해 일본의 서비스업 생산성은 약 76% 수준이었는데 료칸의 생산성은 23%에 불과했다. 결국 서비스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고객이 오지 않는 것이란 결론이 나왔다.

시대와 맞지 않는 낡은 료칸 서비스 스타일이 가장 큰 문제였다. 우선 사생활을 중시하는 젊은 일본인들의 니즈를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료칸 대부분은 단체 손님 방문이 많아 개인 손님들이 불편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손님이 방에 있는데도 직원들이 마음대로 들어와 청소를 하는 등 사생활을 제대로 보장해주지 않았다. 식사도 료칸이 정한 시간에, 료칸이 정한 메뉴로 먹어야 했다. 틀에 박힌 삶을 벗어나 여유롭게 쉬러 온 고객들이 되레 료칸이라는 틀에 자신을 맞춰야 했다. 고객들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근본적인 원인은 료칸 사장들의 잘못된 상황 인식이었다. 료칸 경영자 상당수는 고객 만족과 회사의 이익이 상충한다고 생각했다. 돈을 많이 들이면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지만 그만큼 수익률이 떨어져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고객의 불만이 나오기 직전 수준의 서비스만 제공하자’는 식의 응대가 주를 이뤘다.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기보다 인건비가 싼 동네 중년 여성을 고용하는 일이 보편화됐다. 좋은 식재료를 쓰거나 솜씨 좋은 주방장을 고용하는 대신 싼 재료에 적당한 레서피로 평범한 요리를 내놓는 경우도 많았다. 소비자들의 변화된 요구를 감지하고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호시노 사장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수익성과 고객만족의 관계부터 재정의했다. 수익성과 고객만족을 동시에 달성해야 할 목표로 봤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면 결국 직원들의 생산성을 향상시켜야 했다.

그는 직원의 성장과 만족을 기업의 성공과 동일 선상에 두자는 원칙을 세웠다. 단순히 직원들을 압박하고 업무 강도를 높이는 것은 답이 아니었다. 직원들이 일에 재미를 느끼고, 일을 통해 성장할 수 있고, 성과에 확실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새로운 피의 수혈도 필요했다. 실력 있는 젊은 인재들이 들어와야 근본적인 서비스 혁신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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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적으론 ‘젊은 인재들에게 매력적인 직장’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젊은 사람들이 회사를 더 친숙하고 현대적으로 받아들이도록 1995년 사명을 호시노 료칸에서 호시노 리조트로 바꿨다. 대내적으론 멀티태스킹제도와 수평적이고 공정한 인사제도를 도입해 직원들이 즐겁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나갔다.

호시노 사장은 “인재 확보를 위해선 높은 연봉, 충분한 휴가 등 직원복지제도가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직원들에게 ‘일하는 즐거움’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의 운영 시스템과 인사제도에는 이런 철학이 녹아 있다. 좋은 근로 환경과 일하고 싶은 근로 분위기가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면서 호시노 리조트를 발전시켰다”고 말했다.

직원은 사장의 잔소리보다 고객의 불만을 더 믿는다.
1994년 어느 날 아침, 고객들의 아침 식사 준비로 분주해야 할 호시노 리조트(당시 호시노 료칸)의 주방이 텅 비어 버렸다. 주방장은 물론 그 밑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단체로 료칸을 떠났다. 비상사태였다. 밥 한 그릇도 없었기 때문에 고객들이 아침을 굶어야 했다. 잇따르는 항의 속에 호시노 사장은 홀로 상황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사건의 발단은 호시노 사장의 ‘독설’이었다. 그는 주방장에게 ‘음식이 맛없다’고 혹평했다. 지역 전통 요리를 수십 년간 만들어온 50대 주방장은 자존심이 상했다. 이제 갓 부임한 젊은 호시노 사장이 전통요리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반박했다. 호시노 사장은 굴하지 않았다. 고객들은 그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주방장과 휘하의 요리사들은 폭발했다. 항의의 표시로 말도 없이 료칸을 떠나버렸다.

호시노 사장은 요리사들을 찾아갔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사과를 하지 않았다. 그는 요리사들에게 고객들이 제출한 설문조사 결과를 내밀었다. ‘익숙하지 않은 불친절한 맛.’ 료칸 음식에 대한 고객들의 냉정한 평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정해진 요리만 매번 나와 단조롭다는 의견도 있었다.

사장의 말에는 콧방귀도 안 뀌던 요리사들이지만 고객의 말에는 눈빛이 달라졌다. 고객이 만족하지 못하는 요리를 그대로 내놓을 수는 없었다. 이들은 주방에 복귀해 메뉴를 개선하기 시작했다. 그해부터 호시노 리조트의 고객 설문조사(Customer Survey) 제도가 정착된 배경이다.



호시노 리조트는 고객이 리조트를 떠나면 e메일로 만족도 조사 설문지를 보낸다. (그림 2) 설문지는 총 30개 항목으로 구성됐다. 체크인, 체크아웃 서비스는 물론 온천의 청결도, 객실과 온천 내 비치된 어메니티에 대한 만족도까지 모두 설문 대상이다. 점수는 최고 3점에서 최저 -3점을 줄 수 있다. 추가로 리조트 서비스에 대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주관식 문항도 있었다. 호시노 직원들은 설문 항목 가운데 50%인 15개 이상에서 3점 만점을 받는 것을 목표로 한다. 0점에서 -3점은 5%가 넘지 않는 게 목표다. 응답률은 약 25% 정도다. 응답자에게 별도의 혜택을 제공하는 설문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수준이다.

DBR Mini Box 1 : 리츠칼튼과 힐튼을 대적할 ‘오모테나시’


서구식 호텔은 보통 고객과 직원이 ‘수직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직원은 고객이 요구하거나 지시하는 것들을 잘 해결해야 한다. 서비스 좋기로 유명한 리츠칼튼의 경우 고객의 개별적인 요구에 절대로 ‘노’라고 하지 않겠다는 서비스 정신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 종업원들에게는 2000달러의 자유 결재권이 제공되고 있다. 현장의 종업원이 급하게 고객의 요구에 대처해야 할 때 종업원들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고객이 중요한 회의 서류를 방에 두고 갔는데 리츠칼튼 종업원이 비행기를 타고 가 서류를 전달했다는 유명한 에피소드도 있다.

반면 료칸 문화는 료칸 측에서 구성한 스토리, 문화에 고객이 그대로 따르면서 만족을 제공하는 오모테나시(お持て成し)가 관행이었다. 오모테나시는 ‘방을 차린다’는 의미로 고객을 대접하기 위해 손수 공간을 만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고객과 대등한 관계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대접하는 일본 특유의 서비스 문화다. 료칸 주변 지역을 충분히 느끼고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도 이들의 역할이다.

2016년 도쿄 중심가에 문을 연 호시노야 도쿄는 현대식 고층 빌딩이다. 하지만 내부는 온천 료칸 시스템을 그대로 따랐다. 손님은 료칸에서 정해진 대로 현관에서 구두를 받고 일본식 간편 기모노인 ‘유카타’를 입고 관내를 돌아다니면서 일본 문화를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일반적인 료칸과 달리 시계를 설치하지 않았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한 휴양을 즐기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다. 호시노야 도쿄를 제외한 다른 호시노야 브랜드에는 TV조차 설치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식 료칸의 미적 감각과 휴양을 위해 일부러 조명도 어둡게 한다. 더 밝게 해 달라는 고객의 요구도 수용하지 않는다. 휴양과 일본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일본 특유의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

호시노 사장은 이러한 일본식 호텔 서비스가 고객에게 차별화된 경험을 선사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했을 때다. 미국에 있는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은 일본이 서구식 호텔을 짓는 것도, 내가 문화 행사에 민족의상 대신 양복을 입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있다고 봤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의 핵심 정체성을 지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호텔 서비스를 개발해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설문조사 결과를 활용하는 방법이다. 설문조사 데이터는 직원이나 사업부서의 성과를 평가하는 자료가 아니다. 현재 제공하는 서비스를 되돌아보고 개선할 방법을 찾아내는 기초 자료로 쓴다. 설문조사 데이터는 인터넷을 통해 직원들에게 여과 없이 공개한다. 이 시스템을 ‘CRM 키친(Customer Relations Management Kitchen)’이라고 한다. 시스템에 접속하면 지난주부터 10년 전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를 모두 열람할 수 있다. 주관식으로 고객들이 서술한 대답도 리조트 서비스별로 분류해 제공한다.

직원들은 ‘공기를 마시듯’ 수시로 시스템에 접속해 고객의 생각을 살핀다. 최고점인 3점이 나오지 않은 서비스 항목은 사업부서별로 회의를 통해 개선점을 찾는다. 호시노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의 개입은 없다. 직원들 스스로 문제의식을 느끼고 답을 찾는다. 작은 개선이든, 큰 개선이든 상관없다.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개선할 점을 고민한다는 게 중요하다.

호시노 사장은 “직원들은 사장이나 상사의 지시에 따르지만 그건 직원들이 그 지시나 생각에 동의해서가 아니다. 상사이기 때문에 듣는 척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직원들은 고객들의 이야기를 믿는다. 고객 설문조사 결과는 직원이나 사업부의 성적표가 아닌 자신의 서비스를 점검하고 개선해 나갈 수 있는 ‘건강 진단서’와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설문조사에 적힌 의견을 심도 깊게 고민해 큰 전환점을 만든 케이스도 있다. 일본 북부 홋카이도에 위치한 스키 리조트인 호시노 리조트 토마무(星野リゾート トマム, 이하 토마무)의 인기 상품 ‘운카이(雲海) 테라스’가 대표적이다.


리조트에 방문한 고객이 설문조사에서 ‘이른 아침에 즐기는 한 잔의 커피는 각별하니 보다 일찍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라운지를 오픈해 달라’고 요청했다. 단순히 생각하면 아침 식사 시간을 앞당겨 달라는 얘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직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는 기분’에 집중했다. 직원들은 이를 토대로 두 가지 기획을 내놨다. 하나는 숲속의 좋은 경치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게 하자’는 아이디어였다. 다른 하나는 새벽에 곤돌라를 타고 산 위로 올라가 산속에서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상품을 제안했다. 호시노 리조트는 후자의 아이디어에 집중해 서비스를 준비했다.

산속의 테라스는 이후 스키 시설에서 곤돌라 리프트를 관리하는 직원들의 아이디어로 토마무의 히트 상품 ‘운카이 테라스’라는 상품으로 업그레이드됐다. 곤돌라를 운영하는 한 직원이 산 정상에서 매일 보는 웅장한 운해에 집중해 아이디어를 냈다. 자신은 매일같이 보는 ‘당연한’ 장관이었지만 고객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 많은 고객이 이곳에서 운해를 보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운카이 테라스는 비수기인 여름에도 관광객들을 불러들이는 토마무의 최고 ‘히트 상품’이 됐다.

호시노 리조트는 고객 만족도 조사가 조직 스스로 개혁을 멈추지 않을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여긴다. 고객의 요구에 기민하게 반응하고 개선하면서 조직 전체가 진화한다. 호시노 사장은 “과학적인 기법을 활용해 고객 만족도를 높이고, 직원을 발전시키고, 나아가 회사를 성장시켜 나갔다”고 자평했다.

‘멀티태스킹’으로 업무 생산성 제고
호시노 리조트를 방문한 고객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일이 있다. 직원들이 금세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곳 직원들은 유독 손님의 이름과 얼굴을 빠르게 기억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주 마주치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음식 서빙을 하는 직원이 객실 청소도 해주고, 프런트 데스크에서 결제도 도와준다. 고객과의 접점이 많다 보니 직원들은 개개인에 대한 정보를 더 세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자연스레 서비스도 필요한 곳을 제때 긁어주는 ‘맞춤형’이 된다. 그래서 고객들은 호시노 리조트에서 세심한 배려와 친절한 서비스를 받고 있다고 느낀다. 숙박료가 상당히 비싼 편인데도 손님이 끊이지 않는 배경이다.

기저에는 호시노 사장이 2001년부터 도입한 ‘멀티태스킹’ 제도가 있다. 예를 들어 객실 서비스를 담당하는 직원들은 청소, 프런트 데스크, 음식 서빙, 간단한 조리 등 4가지 업무를 수행한다. 대부분의 호텔이 서비스 영역별로 직원을 구분해 ‘전문화’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처음 멀티태스팅을 도입한 취지는 분명했다. 업무 공백과 과부하를 줄여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호텔은 서비스의 특성상 특정 시간대에 일이 몰린다. 고객들이 체크인, 체크아웃하는 시간, 식사를 하는 시간 등이 대체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체크인, 체크아웃 시간에는 프런트 데스크에 일이 많다. 체크아웃과 체크인 사이 시간대엔 객실 청소 업무가 바쁘다. 식사 시간대에는 식당이 북적거린다.

이야기를 반대로 뒤집어 보면 일이 몰리는 시간이 아니면 각 서비스 담당자들이 일손을 놓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멀티태스킹을 도입하기 전 호시노 리조트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객실 청소를 담당하는 직원들은 12시부터 3시까지 바쁘고 그 외의 시간은 주로 ‘대기’하는 게 일이었다. 청소 도구를 관리하는 일을 제외하면 동료들과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허다했다.

호시노 사장은 멀티태스킹에서 답을 찾았다. 호시노 리조트의 서비스팀 직원이라면 고객 서비스와 관련된 모든 업무를 할 수 있도록 회사 방침을 정했다. 서비스팀 직원들의 스케줄은 이렇다. 아침 조는 새벽 5시30분에 출근해 오후 3시30분에 퇴근하고, 오후 팀은 오전 11시30분에 출근해 오후 10시30분에 퇴근한다. 아침 조는 출근하자마자 조식을 준비해 서빙한다. 9시부터는 프런트에서 고객들의 체크인, 체크아웃을 돕는다. 10시30분까지 체크아웃하는 고객을 배웅한 후 한 시간 정도 휴식한다. 11시30분부터는 객실 청소를 한 다음 오후 2시20분 회의에 참석하는 것으로 일과를 마친다. 회의에선 오후 출근자와 만나 고객 정보나 특이사항을 공유한다.

오후 출근자는 11시30분부터 2시30분까지 오전 출근자와 같은 스케줄로 움직인다. 오후 2시30분부터 프런트에서 체크인 업무를 담당한 후 오후 4시부터 1시간가량 쉰다. 오후 5시부터는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식사는 5시30분부터 9시30분까지다. 뒷정리를 한 후 10시30분에 퇴근한다. 늦은 밤과 새벽 시간에는 소수 직원들이 남아 비상상황에 대비한다.

물론 멀티태스킹 제도가 순탄하게 도입된 건 아니다. 처음엔 직원들의 반발이 거셌다. 특히 호텔 경영학과를 나왔거나 호텔 서비스에 대한 주관이 뚜렷한 직원들은 청소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서비스맨이 청소를 할 순 없다’고 강하게 맞섰다. 주방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왔다. 전문성 없는 일반 직원들이 칼을 잡고 불을 쓰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기 위한 술수 아니냐며 호시노 사장을 강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호시노 사장의 의지는 완고했다. 고객에게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수익성을 높이고, 직원의 역량까지 발전시킬 방법은 멀티태스킹뿐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1년만 멀티태스킹 방식을 해보고 다시 논의해 보자고 직원들을 설득했다. 끝까지 반발하며 리조트를 떠난 직원들도 있었지만 상당수 직원은 그를 믿고 동참했다.

어렵사리 제도를 도입하고 보니 직원들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고객 서비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해 보면서 전반적인 이해도가 확 높아졌다. 호텔리어로서 가져야 할 기본 덕목과 서비스 정신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객과 만나는 빈도가 늘면서 서비스 개선 의지도 높아지고, 아이디어도 더욱 다양해졌다. 여기에 규칙적인 교대 근무 시스템까지 자리를 잡으면서 업무 집중도가 올라가고 충분한 쉬는 시간도 확보됐다. 그렇게 멀티태스킹은 호시노 리조트를 대표하는 핵심 업무방식이 됐다. 현재 호시노 리조트에 신입으로 들어오는 직원들은 특별한 상황이 없는 한 서비스팀에서 커리어를 시작한다.

호시노 리조트의 멀티태스킹 제도는 도요타의 ‘다능공(多能工) 제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도요타 직원들은 한 공정만 맡지 않고 여러 공정을 두루 거치며 일한다. 일손이 모자랄 경우 서로 거들 수 있도록 만든 시스템이다. 여러 공정을 경험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필요할 때 어떤 생산라인에 투입해도 거뜬히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다양한 업무를 맡아보기 때문에 한곳에서 일할 때보다 동기부여 측면에서도 유리하다. 특히 직원들 모두가 생산공정 전체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더 날카롭고 현실적인 공정 개선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

멀티태스킹은 부수적인 효과도 만들어냈다. 서비스팀 업무 효율성이 확보되면서 서비스팀 외에 이벤트팀, 조리팀, 마케팅팀 등 전문성이 필요한 부서에 더 많은 인력을 투입할 수 있게 됐다. 서비스팀에서 업무를 익힌 신입 직원들은 자신의 커리어 계획과 선호도에 따라 다른 부서로 투입돼 역량을 발휘한다. 타 부서로 가는 과정도 투명하다. 공식적으로 부서 이동을 신청하고 각 부서 면접을 통해 이동 여부를 결정하는 식이다.

책임의 선을 긋고 남의 일을 나 몰라라 하는 일은 호시노 리조트에서 상상할 수 없다. 서비스팀뿐만 아니라 다른 부서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타 부서에 일손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현장으로 달려간다. 전 직원이 호텔의 기본 업무를 숙지하고 있기 때문에 부서 간 협업도 순조롭다.

2010년 호시노 리조트에 입사한 한국인 이근주 씨는 부서 간 적극적인 협업이 일상적인 일이라고 밝혔다. 그는 현재 토마무의 리테일 서비스 기획팀 관리자급인 유닛 디렉터(Unit Director, UD)로 일하고 있다.

이근주 씨가 웨딩 고객 서비스팀에서 일할 때였다. 레스토랑 팀과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었는데 당시 고객이 너무 많이 몰려와 레스토랑 내 일손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자 웨딩팀 직원들은 바로 레스토랑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주방에선 설거지, 홀에선 손님을 안내하며 일을 도왔다. 다른 팀에서 도움을 주기도 했다. 현재 이근주 씨가 관리하고 있는 편의점에 손님이 몰렸을 때에는 다른 팀 직원들이 고객 물건을 포장하거나 카운터 계산을 자발적으로 맡아줬다.

이근주 씨는 “멀티태스킹은 단순히 다양한 업무를 모두 할 수 있는 업무 스킬만을 가르치지 않는다. 멀티태스킹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가치는 고객을 편하고 즐겁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고객이 불편한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누구나 직원들을 서로 도와 업무의 연속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러한 마인드를 갖는 게 멀티태스킹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Mini Box 2. 호시노리조트의 재생사업



호시노 리조트는 호텔을 ‘운영’하는 기업이다. 토지를 소유하거나 건물을 소유하지 않는 게 호시노 리조트의 원칙이다. 호시노 사장은 1991년 가문의 료칸을 물려받은 직후부터 이 원칙을 실천했다. 집안이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은 모두 매각하고 료칸과 호텔 운영에만 집중했다. 고객 만족도, 수익, 직원 만족도 등 호텔 운영 혁신에 몰두했다. 실제로 호시노 리조트는 업무 프로세스 개선, 직원들의 일하는 방식 변화 등을 통해 수익성을 개선해나갔고, 꾸준히 성장했다. 일반 일본 료칸 가동률이 37% 정도였는데 호시노 리조트의 가동률은 73%에 달했다.

호시노 리조트가 일본 전역에 35개 리조트, 해외에 2개 리조트로 확장할 수 있었던 것도 호텔 운영에만 집중한 결과다. 확장할 수 있는 기회는 2005년에 찾아왔다. 글로벌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가 일본의 실적이 부진한 료칸과 온천을 사들여 새로운 관광레저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골드만삭스는 쉽게 사업을 진행하지 못했다. 가문의 전통과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료칸 주인들은 쉽게 경영권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료칸에 대한 지식이 없는 미국 회사가 무분별한 개발로 기존 자원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골드만삭스의 눈에 들어온 것은 호시노 사장이었다. 서구식 경영 스타일도 잘 이해하면서 료칸을 성공적으로 운영해 온 경험이 있어 함께 사업을 하기에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이들은 5대5 합작법인을 세우고 일본 료칸 ‘재생사업’에 뛰어들었다. 투자는 골드만삭스가 하고, 료칸 운영은 호시노 리조트에 위탁하는 형태였다.

호시노 사장은 지방 료칸 주인들을 직접 만나 료칸을 없애려는 게 아니라 살려 나가기 위한 사업을 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골드만삭스 직원들을 지역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던 료칸 사장들이 마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료칸과 주변 자연경관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과거 고객들의 니즈를 파악해 재생사업을 진행하자 단기간에 성과가 나왔다. 처음 인수한 곳은 ‘리조나레 야쓰가타케(リゾナ一レ八ヶ岳)’라는 고급 호텔이었다. 이 호텔은 온천이 없어 고객들이 찾지 않는 게 문제였다. 호시노 사장은 역으로 이것을 이용했다. 온천이 없는 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고객층을 파악했다. 아이를 동반한 고객들에게는 온천보다 아이와 함께 놀 수 있는 공간, 아이를 자유롭게 맡길 수 있는 서비스가 더욱 중요했다. 탁아소와 북카페를 설치했더니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이 호텔은 3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호시노 리조트 아오모리야(星野リゾート青森屋)는 2004년 파산한 온천 호텔이었다. 자연경관이 훌륭한 노천탕, 맛이 훌륭한 향토 음식을 내세워 재단장했고
5년 만에 흑자를 냈다.

위탁 운영 경험은 호시노 리조트에도 큰 자산이 됐다. 우선 일본 전역의 관광지와 료칸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큰 자본 투자 없이 안정적으로 사업도 확장할 수 있었다. 호시노 사장은 “우리가 잘하는 것에 집중한 결과다. 부동산 투자는 리스크가 크다. 천재지변, 경기 변동 등 내가 스스로 경영 활동을 통해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이 많다. 위험을 감수하고 부동산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그 대가를 가져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 부동산 소유와 호텔 운영을 분리했다”고 설명했다.

호시노 리조트는 2013년 골드만삭스와의 제휴를 종료했으며 이후에는 다른 투자회사의 투자를 받아 ‘호시노 리조트 리츠 투자법인’을 설립해 위탁 운영을 이어가고 있다.

매뉴얼화 된 업무 숙지와 권한 위임의 ‘조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직원들이 멀티태스킹을 통해 터득한 지식과 아이디어는 호시노 리조트의 핵심 경쟁력이다. 직원들은 아이디어와 노하우를 공유해 새로운 서비스나 이벤트로 발전시켜 나간다. 직원들 개개인이 자신의 업무를 바탕으로 신상품 개발자가 되는 것이다. 멀티태스킹 극대화가 낳은 긍정적인 효과다. 이를 위해 호시노 리조트가 반드시 지키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첫째, 철저한 교육으로 직원들이 매뉴얼화된 업무를 완전히 숙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기초 지식이 충분히 쌓여야 비로소 창의성도 발휘할 수 있다. 매뉴얼을 지키는 교육은 철저히 현장 실습 위주로 이뤄진다. 선배와 짝을 이뤄 청소, 프런트 데스크, 주방 업무 등을 1대1로 배운다. 객실 청소의 경우 청소의 순서, 이불을 개는 방법, 화장실 청소 등 세세한 방식 전부가 교육 대상이다. 주방 업무도 마찬가지다. 칼질하는 방법부터 재료를 손질하는 방법, 프라이팬에 계란을 요리하는 시간 등 사소한 영역까지 정해진 룰을 가르쳐 준다. 직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프런트 데스크 업무도 선배와 함께 시작한다. 전산 처리, 계산, 고객 응대 등 복잡한 일을 실수 없이 빠르게 처리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업무당 교육 기간은 약 한 달 정도. 객실 서비스 전체를 배우는 기간이 최소 넉 달이다.

빠른 업무 숙지를 돕기 위해 최근엔 동영상 교육 프로그램도 도입했다. 신입 직원들이 인터넷으로 1∼2분짜리 짧은 동영상을 보고 기본적인 업무 순서와 방법을 숙지한다. 새롭게 익혀야 할 내용이 있을 때도 동영상 자료를 업데이트한다. 지금까지 약 1900여 편의 동영상이 교육 자료로 활용됐다.

둘째, 자율성의 제도적 보장이다. 직원들이 직접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고 서비스를 개선할 수 있는 창구를 공식적으로 마련했다. ‘매력 회의’가 대표적인 예다. 매력 회의는 리조트별로 직원들이 각자의 의견을 자유롭게 펼치며 서비스 개선 방안을 논의하는 회의다. 한 달에 최소 한 번씩 여는 것이 원칙이지만 시즌 서비스를 개발하고 싶거나 시급한 개선점이 있을 때에는 직원들의 요청하에 수시로 열리기도 한다. 각 리조트의 마케팅팀 직원이 회의를 진행하고 조율하는 퍼실리테이터 역할을 맡는다. 희망하는 직원은 누구나 참석해 자기 생각을 개진할 수 있다. 고객들에게 전달받은 생생한 의견, 서비스를 하면서 느낀 개선점 등을 제시하며 자유롭게 토론한다. 자기 부서, 업무와 관련이 없더라도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누구나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아이디어를 강요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강제로 쥐어짜면 오히려 신선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게 이 회사의 철학이다. 자유로운 토론을 거쳐 직원들이 직접 좋은 아이디어를 선정하고 한 단계씩 발전시킨다.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것이나 발전 포인트를 찾는 것도 모두 직원들이 직접 한다. 리조트의 총지배인이나 부서장/팀장급인 UD들은 이 과정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조언만 한다. 이렇게 한층 업그레이드된 아이디어는 호시노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과 함께 치열한 토론을 거친 후 실제 서비스로 다시 태어난다.

토마무에서 진행하는 ‘토마 피크’는 매력 회의가 탄생시킨 대표적인 인기 상품이다. 일대에 자작나무가 많은 토마무리조트의 특성에 주목한 직원들이 스스로 이와 연계한 프로그램을 연구했다. 그 결과 자작나무 숲에 소풍을 가서 각종 디저트와 차를 즐길 수 있는 휴식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고객들의 큰 사랑을 받으며 지금은 토마무리조트의 상징이 됐다.

이근주 씨는 “매력 회의에서 아이디어를 내면 일 년에 두 번 UD와 평가 면담을 할 때 능동적 참여, 팀의 공헌도로 평가점수를 높일 수가 있다. 호시노 리조트의 직원 평가 시스템은 결과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하는 과정을 평가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능동적으로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직원일수록 높은 점수를 받게 된다”고 말했다.


호시노 사장은 “멀티태스킹 과정에서 직원들이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은 더 나은 서비스를 완성하는 원동력이 된다. 특히 모든 직원에게 회사에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권한을 주기 때문에 차원이 다른 주인의식이 생긴다. 자신이 직접 경영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직원들이 늘어날수록 고객 만족도가 높아지고 궁극적으로 회사가 성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Mini Box 3. 호시노 사장이 아버지를 해임한 까닭
호시노 사장의 행보는 파격의 연속이었다. 호텔 서비스팀 직원들에게 청소를 시키고, 연공서열을 폐지하는 등 일본 기업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방식으로 경영해왔다. 이 제도가 정착하기까지 직원들의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호시노 사장이 직원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스스로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는 호시노 리조트의 경영 정상화와 성장을 위해 당시 사장이었던 아버지를 해임했다. 호시노 가스케(星野嘉助) 전 사장은 친척들이나 지인에게 시중보다 더 비싼 가격에 물품을 납품하고, 더 많은 급여를 주는 등 방만한 경영을 해왔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이 사실을 알게 된 호시노 사장은 크게 반발했고, 그동안의 관행을 고쳐야 한다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하지만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호시노 사장은 아버지의 고집을 쉽게 꺾지 못했다. 화가 난 호시노 사장이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것을 포기하고 글로벌 금융회사에 취직해 일할 정도였다.

호시노 사장는 여기서 물러나지 않았다. 회사 경영 정상화를 위해 이사회 이사들을 설득하고 나섰다. 마침내 이사회를 열었고, 60%의 지지를 얻어 아버지를 해임하고 4대 사장이 됐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친족 특혜 타파’를 공식화한 것이었다. 기존 납품 업체도 바꾸고, 친족의 월급도 정상화했다. 불필요한 직함을 가지고 있는 가족들도 모두 회사에서 내보냈다. 친족과 아버지의 엄청난 반발이 있었지만 그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갔다.

직원들은 호시노 사장의 행보가 회사와 직원들을 위한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가 고집하는 경영방식이 다소 터무니없거나 어려워 보여도 직원들이 결국 설득당했던 이유다. 2013년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는 나중에 그의 성공을 지켜본 후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인정하고 지지했다고 한다.

직원들이 직접 뽑는 매니저 선출제
호시노 리조트에서는 나이, 성별, 경력, 국적에 관계없이 누구나 리더로 자원할 수 있다. 이제 막 입사한 신입 직원들도, 일본어가 서툰 외국인도 제한이 없다. 대신 자신이 UD가 되려는 곳의 업무를 어떻게 개선하고 발전시킬 것인가를 주제로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프레젠테이션 시간은 약 15분이며, 이후 10분간의 질의응답 시간을 갖는다.

회사는 직원이 UD에 입후보하면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전문 강사나 선배 직원들은 자료 조사부터 발표 리허설까지 세심하게 도와준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리는 일본 특유의 문화적 특성을 극복하기 위한 회사의 배려이기도 하다. UD선출대회는 상·하반기에 한 번씩 일 년에 두 번 열리는데 총 100∼150여 명이 지원한다.

재미있는 것은 같이 일할 직원들이 UD 후보들의 프레젠테이션을 직접 평가한다는 점이다. 경영진이 관여하지 않으면서 인사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높였다. 직원들은 인터넷으로 실시간 중계되는 프레젠테이션을 꼼꼼히 따져본다. 평가 항목은 크게 3가지다. 첫째, 후보가 내세운 전략의 ‘질’이다. 얼마나 미래를 내다본 전략인지, 시장의 상황은 물론 고객의 니즈와 잘 맞는 전략인지를 중점적으로 판단한다. 두 번째는 조직 개발 측면이다. 지속 가능한 조직 문화를 조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조직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활동을 잘하고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중장기적으로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살핀다. 단기적인 성과, 재무적인 성과보다 고객 만족도가 평가의 최우선 기준이다. 호시노 리조트는 전 직원들의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최종 UD 풀을 선발한 후 각 부서에 배치한다.

부서 간의 장벽을 완전히 허물어 해당 부서 직원이 아니어도 UD 출마가 가능하다. 옆 부서의 일을 관찰하다 스스로 더 잘 관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 부서의 UD로 지원할 수 있다. 없는 부서를 만들어 출마하는 경우도 있다. 새로운 서비스나 사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새 부서가 왜 필요한지, 어떤 성과를 낼 건지를 위주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면 된다. 실제로 한 직원은 토마무의 콘도미니엄동 전담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스스로 팀을 만들어 UD 후보로 등록했다. 프레젠테이션 후 회사 전 직원들과 경영진의 의견을 반영해 신설된 부서의 UD로 배치됐다. 회사는 UD 선출 후 e메일로 새 부서의 팀원 지원자를 받았다.

UD의 정해진 임기는 없다. 성과가 좋고 부서나 팀 내의 직원들이 지지하면 계속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반대로 업무가 생각보다 잘 맞지 않거나, 성과가 예상보다 저조한 경우에는 언제든지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다. 직원이 스스로 결정할 수도 있고, 회사에서 판단해 부서를 재배치하는 경우도 있다.

UD 제도가 도입된 건 20여 년 전인 1995년이다. 호시노 리조트도 여느 일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경직된 조직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나이 많고 경력이 많은 사람이 승진을 하고 의사결정을 했다. 신입사원들은 주로 단순하고 귀찮은 일들을 도맡았다. 이런 구조는 젊은 직원들을 금방 지치게 했다. 애써 뽑은 신입들은 2∼3년을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뒀다.

호시노 사장은 나이나 직급에 상관없이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회사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처음엔 회사의 경직된 분위기를 전환하고 조직에 활력을 더하기 위해 능력 있는 직원 몇 명을 선정해 관리자로 승진하는 방법을 써봤다. 그런데 이 시도는 오히려 큰 부작용을 낳았다. 직원들은 ‘사장이 특정 직원을 편애한다’고 생각했다. 직원들이 승진한 젊은 매니저를 잘 따르지 않았다.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한 사내 정치만 더 늘어나는 모양새였다.

호시노 사장은 ‘직원들이 공감하고 인정할 수 있는 인사제도’라는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UD의 진입장벽을 없애버리고 직원들이 스스로 관리자를 뽑는 시스템을 생각해 냈다. UD가 되고 싶은 직원들은 어떠한 제한 없이 프레젠테이션만 잘 준비하면 된다. 직원들은 이들 중 함께 일하고 싶고 능력 있다고 생각되는 직원을 선택한다. 후보로 나오는 직원이나, 투표를 하는 직원이나 모두 자발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한 것이다. 상사의 평가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되고 직원들이 서로를 평가하니 직원들은 나이가 어리든 많든, 경력이 짧든 길든 선출된 UD를 존중하고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UD는 ‘팀 주장’과 같은 개념… 직원이 커리어 선택 주도
호시노 사장은 UD 선출제를 지탱하는 세부적인 시스템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상 체계, 조직문화, 커리어 관리 등 제도를 뒷받침하는 정교한 프로그램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UD의 역할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다. UD 선출 제도의 취지는 완벽한 ‘팀’이 돼라는 것이다. UD는 다른 직원들을 ‘통제’하는 위치가 아니다. 조직원을 다독이고 본인이 앞장서서 나아가는 팀의 주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 팀원들도 UD에게 모든 책임과 권한을 맡기고 따라만 다니지는 않는다. UD가 부족한 점이 있으면 자신들이 채워주고, 결과적으로 더 옳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 함께 노력한다. UD와 함께 일하는 팀원들을 ‘플레이어(Player)’라고 부르는 이유다.

UD는 ‘승진’이 아니라 직원들이 커리어를 개발하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UD는 관리자로 성장하고 싶은 직원의 선택이다. 관리자가 될 뜻이 없다면 굳이 UD에 도전하지 않아도 된다. 업무 전문성을 길러 ‘스페셜리스트’로 성장할 수 있다. 자신의 역량을 꾸준히 개발해 서비스팀, 조리팀, 이벤트사업팀 등 특정 부서에 특화된 능력을 발휘하면 스페셜리스트로 인정받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게 된다.

이근주 씨도 입사 4년 만에 토마무의 웨딩 고객서비스 예약팀 UD로 선발됐다. 그곳에서 5년 동안 일한 후 현재는 서비스리테일 UD로 활약하고 있다. 이근주 씨 팀에는 아빠뻘이 되는 직원들도 서너 명이나 있다. 이근주 씨의 아버지가 ‘네가 상사여도 연장자를 꼭 존중해야 한다’고 주의를 줄 정도다. 하지만 이근주 씨가 이런 신경을 쓸 이유가 전혀 없다. 이들의 관계는 상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장자라고 UD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지시에 불복하는 직원은 거의 없다. 젊은 UD는 연장자의 경험과 지식을 존중하고 배우면서 진취적으로 사업을 이끌어 나간다.

호시노 사장은 “모든 사람은 약점과 강점이 있다. 팀은 서로의 약점은 보완하고 강점은 더 살려줄 때 빛을 발한다. UD제도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는 여기에 있다. 궁극적으로 각 부서가 어떻게 성과를 낼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고 조화를 이뤄나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젊은 사람들의 입장도 많이 고려했다. 젊은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상사를 이해하지 못한다. 스스로 관리자가 되면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자발적으로 의욕이 있는 사람에게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량보다 더 중요한 것이 더 많은 책임과 일을 하겠다는 의지와 열정이기 때문이다”고 덧붙였다.

‘투명한 정보 공개’를 통해 호시노 리조트는 경영진과 직원들이 공유하는 경영 정보의 수준을 동일하게 만들었다. 회사에 중요한 사건이나 상황이 발생하면 경영진은 주저하지 않고 전 직원에게 알린다. 과거 매출, 수익, 직원 등 회사에 궁금한 경영 정보가 있으면 UD나 총지배인과 상담한 후 얼마든지 제공받을 수 있다. 이 같은 정보 공유는 직원들이 누구나 자신 있게 사업 부서를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또 회사를 신뢰하고 일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역할에 따라 월급을 줄일 수도, 늘릴 수도 있는 유연한 임금 체계를 눈여겨봐야 한다. 호시노 리조트는 UD에게 일반 직원들보다 훨씬 많은 보수를 제공한다.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UD는 승진의 개념이 아니지만 팀원을 이끄는 입장이다. 조직 관리, 직원 평가, 프로젝트 관리 등을 도맡는다. 같은 보수를 받으면서 더 많이 일하려는 직원은 없다. 그렇기에 직원들은 UD가 되면 플레이어들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긴다. 두 번째는 많은 직원이 UD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인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많은 보수를 받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이 UD에 도전하려 할 것이다. 그만큼 직원들은 스스로 자신의 역량을 강화하고 직원들과 좋은 팀워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실적이 안 좋은 UD들은 어떻게 될까. 회사에서 부서를 재배치해 팀원으로 복귀할 수도 있고,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날 수도 있다. 이때 보수도 팀원 수준으로 내려간다. 대신 회사는 배려 차원에서 3년의 ‘유예 기간’을 준다. 3단계를 거쳐 보수가 내려가는데 이 사이에 본인이 원하는 경우 다시 UD에 도전할 수 있다.

상대적 박탈감이 크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UD에서 물러나서 팀원으로 복귀하는 것이 이미 보편화돼 있기 때문에 직원 스스로 실패했다고 여기지 않는다. 퇴사를 결정하지 않는 한 정년까지 다시 UD에 도전할 기회도 주어진다. 그래서 급여가 깎이는 것도 큰 부담이 없다. 더 많은 기회를 직원들이 골고루 나눠 갖기 위한 선택이라고 여긴다.

호시노 사장은 “UD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UD에서 팀원으로 복귀할 경우 급여도 함께 깎는 것에 직원들이 동의했다는 점이다. 1990년대 후반 이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직원들과 수없이 토론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직원들이 반대했지만 도입한 후 직원들의 만족도가 예상보다 높았다. 연령이나 성별, 경력에 상관없이 더 많이 일하고 성과를 내는 직원에게 돈을 더 많이 줄 수 있는 시스템을 통해 서로를 존중하며 즐겁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Mini Box 4. 호시노리조트 브랜드가 4개인 이유

호시노 리조트는 현재 총 4개의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호시노야(Hoshinoya)’는 최고급 호텔 브랜드로 럭셔리 리조트를 지향한다. ‘카이(Kai)’는 지역의 전통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럭셔리 료칸이다. 주로 기존 료칸의 특성을 잘 살려 리모델링했다. 지역 특색이 강조된 다양한 활동과 체험을 즐길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리조나레(Risonare)’는 세련된 디자인의 서양식 리조트다. 온천이 꼭 포함되지 않는 대신 아이들을 위한 놀이 공간이나 가족들을 위한 여행 상품을 준비했다. 올해 개장한 오모(OMO)라는 브랜드는 실속형 도심 관광형 호텔이다. 고객들이 다른 브랜드에 비해 저렴한 가격으로 휴양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호시노 사장은 “기존 글로벌 호텔 브랜드들은 이름만 살짝 바꿔 한 도시에서 여러 호텔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고객들이 이 호텔들을 갔을 때 서비스의 차별점을 전혀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호시노는 전혀 다른 개성과 특징을 가진 브랜드를 론칭했다”고 밝혔다.

성공 요인 및 시사점
1) 권한 위임을 통한 자율성 확보
리더십과 조직 관리의 권위자인 켄 브랜차드 박사는 존 카를로스, 앨런 랜돌프와 함께 저술한 『Empowerment Takes More Than a Minute』를 통해 ‘사람들은 이미 지식과 동기를 통해 역량을 확보하고 있다. 권한 위임은 이 역량을 풀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즉 권한 위임은 개인의 잠재 능력을 끌어내 조직과 개인이 모두 발전할 수 있는 조직문화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권한 위임이 잘 이뤄지기 위해선 3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전 직원과 경영진이 정확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다. 책임감 있는 사람을 조직에 두기 위해선 그 사람을 경영진이 신뢰해야 한다.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기 어렵다. 회사의 재무정보, 신사업 동향, 경영진 활동 등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직원들도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호시노 리조트는 ‘경영진과 직원이 같은 수준의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워 실천하고 있다. 직원들에게 재무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사업 방향성 등을 모두 알려 직원들을 이해시킨다. 고객 설문조사 내용, 영업 현황도 필요한 경우 수시로 열람이 가능하다. 민감하다고 생각되는 과거 정보들도 직원이 요청하면 제공한다. 직원들은 이런 정보들을 토대로 회사의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회사에 대한 신뢰가 깊어지고 직원들은 보다 능동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된다.

둘째, 적절한 가이드라인을 통해 자율적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즉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와 목표를 명확히 해 직원들의 혼란을 막아야 한다. 강에 강둑이 없다면 흐름이 없는 하나의 물웅덩이에 불과하다.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직원들이 어느 정도의 자율권을 행사할지, 어떠한 능력을 개선해야 할지 그 기준을 세울 수 있다.

호시노 리조트는 고객 만족 극대화와 수익률 향상이라는 뚜렷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효율적으로 일하면서 고객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고민한다. 직원들이 개발한 토마무의 ‘운카이 테라스’는 이 두 가지 모두를 충족한 훌륭한 예다. 직원들은 고객이 아침에 더 일찍 커피 한 잔을 하고 싶다는 의견을 허투루 듣지 않고 한 층 더 업그레이드된 서비스를 개발했다. 운해를 보기 위해 비성수기인 여름에도 관광객들이 몰리면서 운카이 테라스는 토마무리조트의 가동률을 높이는 효자 상품이 됐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직원들은 회사의 목표, 비전과 자신의 업무가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직원들이 기본적인 업무에 대해 철저하게 습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권한을 위임하면 오히려 회사의 리스크만 더 커질 수 있다. 따라서 권한 위임과 함께 표준화된 업무에 대한 엄격한 교육과 관리도 실행돼야 한다. 호시노 리조트는 기본 업무를 숙지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과정으로 여긴다. 1대1 현장 학습뿐만 아니라 동영상 교육 프로그램을 배포해 기본 업무를 숙지시킨다. 누적된 매뉴얼 동영상이 1900여 개에 달할 만큼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셋째, 전통적인 위계질서를 대체하기 위한 자율 경영팀(Self-managed team)이 필요하다. 권한 위임이 이뤄지면 모든 사람이 책임과 결정 권한을 갖는다. 따라서 블랜차드 박사는 한 개인이 조직을 운영하는 것은 힘들기 때문에 팀으로 활동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자율 경영팀이 되기 위해선 리더가 아닌 팀이 주도해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누군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전통적인 관리자처럼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물론 팀을 이끄는 리더의 역할은 존재한다. 이 리더는 지시를 내리는 역할이 아니다. 주로 조언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적절한 순간 팀원들을 도와줘야 한다.

호시노 리조트는 연공서열을 탈피한 UD 선출제도를 통해 자율 경영팀을 운영하고 있다. 신입사원이든, 외국인이든 상관없이 리더가 되고 싶으면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직원들은 같이 일할 동료를 뽑는다. 특히 승진의 개념을 없애 직급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에 대한 편견을 없앤 조직문화를 형성했다. 공통된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성과도 함께 나눠 갖는다.

수평적인 조직 문화는 호칭을 영어로 바꾸고 상사 위주의 회식 문화를 제거한다고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직원들이 실질적인 권한을 가져야 하고 그 권한에 걸맞은 정보 공유, 영향력 등과 같은 시스템도 함께 구축돼야 한다. 무턱대고 수평적 문화를 도입하기보다 자국 내 사회 문화나 제도를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다. 호시노 리조트는 UD에서 내려오더라도 3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연봉을 단계별로 조정하며 페널티 없이 언제든 다시 UD에 도전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정년을 보장하는 일본식 기업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2) ‘멀티태스킹’을 통한 업무 생산성·직원 만족도 동시 달성
서비스 산업은 외부 변수가 많은 영향을 끼친다. 경기는 물론 사람들의 심리도 영향을 끼친다. 관광업은 더욱 심하다. 성수기와 비수기가 뚜렷하다. 경제 상황뿐만 아니라 메르스, 세월호 등과 같은 사회적 이슈에도 타격을 받는다. 따라서 상황에 맞게 인력을 운영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이런 이유로 많은 서비스업이 인력을 운영할 때 ‘수요추구전략(Chase Strategy)’을 적용한다. 시간대나 요일별 고객의 방문 패턴에 맞춰 인력을 고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할인마트의 경우 퇴근 시간대나 주말이나 공휴일 전날 직원을 더 많이 고용한다. 또한 고객 방문을 정확히 예측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시간이 임박해서야 직원들의 근무표가 확정된다. 기업이 보다 효율적으로 인력을 활용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오히려 직원들의 업무 생산성을 저하시키고 고객 서비스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 언제 일하게 될지, 언제 그만두게 될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직원들은 업무 몰입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시간대가 불규칙해 정규직 대신 파트타임 인력의 비중이 늘어나게 되면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직원들이 업무를 연속성 있게 진행할 수 없어 고객들을 응대하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회사가 예측한 고객의 패턴, 수요 예측이 빗나갈 경우에는 고객을 정상적으로 응대할 수 있는 없다는 것이다. 수요 추구 전략의 악순환이다.

제이넵 톤 MIT 경영대학원 교수는 『Good Job Strategy』를 통해 이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탈바꿈하는 방법이 멀티태스킹이라고 주장한다. 다양한 종류의 직무를 교육하는 교차 업무교육(cross training)을 통해 직원의 수를 조절하지 않아도 업무의 공백이나 과부화를 해결할 수 있다. 모든 직원의 ‘노는 손’을 제거해 노동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고, 직원 수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어 기업의 비용도 줄어든다.

호시노 리조트 직원들은 객실 청소, 고객 응대, 요리, 서빙 등 다양한 업무를 습득해 고객의 수요에 유연하게 대응했다. 회사는 서비스별로 고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시간대를 쪼개 그 상황에 맞게 직원의 시간표를 짰다. 고객의 수요에 맞게 직원 수를 조정하지 않아도, 성수기에 직원의 수를 늘리지 않아도 고객들은 대기 시간 없이 호텔 서비스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일각에선 멀티태스킹이 회사에 더 큰 손실을 끼칠 수 있을 것이란 반론을 제기한다. 직원을 교육하는 시간이 많이 들고, 직원들이 여러 가지 직무를 수행하면서 전문성이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멀티태스킹은 비용보다 이익이 더 큰 경우가 많다. 리처드 핵만과 그레그 올드햄이 저술한 『Work Redesign』에서 제시한 일을 의미 있게 만드는 조건은 세 가지다. 첫째, 다양한 업무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둘째, 업무의 처음과 끝을 모두 체험하고 파악한다. 셋째, 차이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멀티태스킹은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다. 특히 고객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서비스업에서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전체 서비스를 이해하면 고객의 불편함이나 요구를 잘 파악할 수 있고 이를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시노 리조트의 서비스팀도 네 가지 업무를 수행하면서 호텔 서비스의 처음과 끝을 모두 경험하고 고객과의 접점을 넓혀 나갔다. 이 과정을 통해 고객 서비스 개선과 새로운 상품 개발 등을 위한 작업을 직원들이 주도했다.

3) 철저한 경험 가치 추구
호시노 리조트의 혁신적인 운영 시스템과 치열한 경쟁을 유도하는 인사제도는 고객을 소중하게 여기고 남들과 다른 경험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 강화돼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경쟁력이 있는 경험가치라는 것은 고객에 대한 철저한 배려를 기반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만큼 새로운 아이디어나 창의적인 시도가 요구된다.

호시노 리조트 사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의미 있는 고객 경험가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최고경영자부터 열정을 가지고 종업원들과 함께 아이디어와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가야 한다. 단순히 1회성의 기획이 아니라 기업조직 자체가 끊임없이 경험 가치를 탐구하고 향상하려는 노력이 일상화되고 체질화돼야 하는 것이다.

호시노 리조트는 무엇보다 고객의 목소리를 중시했다. 호시노 사장이 주방장에게 음식의 맛을 바꾸라고 해도 전통 료칸에서 수십 년 동안 일해 온 전문가가 쉽게 수용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고객의 목소리를 객관적으로 보여주자 변화가 일어났다. 따라서 호시노그룹은 고객에 대한 설문 조사에 주력했다.

덕분에 ‘과거의 데이터로 보면 고객은 이럴 것이다’라는 식의 사고의 틀에서도 벗어났다. 기존 데이터에 없는 새로운 시각과 아이디어로 가설을 만들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때로는 기존 데이터에서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숨은 의미를 찾아야 한다. 호시노 사장의 경우 경험이나 감과 함께 철저한 토론 과정을 거쳐서 가설을 만들어 나가면서 독특한 아이디어에 기반한 고객 경험 가치를 설계했다.

필자소개 이미영 기자 mylee03@donga.com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 연구위원 jplee@lge.co.kr
이지평 수석 연구위원은 1963년 일본 도쿄에서 출생, 호세이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으로 건너와 1988년 고려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대통령 자문 기구인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의 남북 대외협력 전문위원회 위원, 산업자원부 제조업 공동화 대책회의 위원, 미래부 미래성장동력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 부문 수석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는 일본을 닮아가는가』 『일본식 파워경영』 『일본형 자본주의』 등이 있다.


DBR mini box I : 아마존의 끝없는 오프라인 확장 전략

온라인에선 방대한 데이터를, 오프라인에선 초정밀 데이터를 얻는다

아마존이 최근 아마존북스, 아마존 4스타, 홀푸즈마켓, 아마존고, 아마존 락커 등 오프라인 매장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존의 오프라인 매장은 크게 온라인 경험에서 출발해 오프라인과 연결하고 결합한 ‘아마존북스’와 ‘아마존 4스타’, 오프라인 경험을 온라인에 결합하려는 시도로 ‘홀푸즈마켓’과 ‘아마존고’, 온·오프라인으로 멤버십과 식료품 쇼핑을 결합하는 홀푸즈마켓과 ‘아마존프레시’의 사례로 나눠볼 수 있다.


1. 온라인 경험을 오프라인에 접목한 ‘아마존북스’

아마존북스는 아마존 고객의 온라인 경험을 오프라인에 그대로, 완벽하게 구현한 최초의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아마존북스에 전시된 모든 책에는 고객의 별점 평가가 달려 있다. 온라인 고객 평가를 오프라인에 옮겨 놓은 형태로, 평가에 대한 멘트나 별점도 수시로 바뀐다. 아마존북스 회원에 대한 할인율은 아마존 온라인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크다. 비회원 고객도 방문 뒤에는 반드시 가입을 해야 할인을 받을 수 있도록 차별화된 가격을 제시한다. 또 아마존의 성공 요소 중 하나인 ‘프라임’으로 결제 시에는 프라임 회원임을 밝히지 않아도 간편 결제에 등록돼 있으면 자동 할인을 해준다. 책과 영수증, 안내 보드 등 매장 곳곳에 프라임 고객을 대상으로 한 큰 폭의 할인율을 공지해 놓음으로써 비회원 관객이라면 할인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2. 오프라인 경험을 온라인에 접목한 ‘아마존고’

많은 사람이 4차 산업혁명의 대표 사례이자 그에 따른 대량 실직을 경고하기 위해 아마존고 사례를 많이 든다. 하지만 아마존은 계산원 인력 부담 때문에 아마존고를 설계하지 않았다. 아마존고 매장은 센서들의 총집합으로, 인공지능을 접목해 고객을 분석하고 자동화를 통해 고객에게 편리함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아마존고는 이미지 센서에 의한 딥러닝 기술, 센서융합기술, 버추얼카트 및 전자 영수증, 간편 결제 기술 등 미래 기술의 총 융합체다. 매장의 모든 고객과 상품에 대한 기본적인 센서와 이미지를 통한 딥러닝 결과를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하고, 클라우드에 저장하고 분석, 제공하는 ‘디지털 연결(Digital Thread)’의 시범장인 것이다. 아마존은 이를 통해 고객의 동선과 상품 구매 습성, 주기 및 구매 선호도, 결제 금액과 경제력 등 대단히 정교한 고객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 아마존고 역시 프라임 고객을 확보하고 그들에 대한 서비스를 개선하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한다. 아마존고에 입장하려면 기본적으로 프라임, 또는 등록 고객이어야 한다. 고객은 QR 코드를 가지고 매장에 입장해야 하고, 결제 수단이나 기본 정보가 사전에 등록이 돼 있어야 한다. 아마존은 아마존고를 활용해 이미 3억 명을 넘어선 프라임 고객을 확보하는 동시에 데이터를 활용해 서비스를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3. 아마존 멤버십에 온·오프라인 쇼핑을 결합한 ‘홀푸즈마켓’

아마존이 기존에 알려진 대로 홀푸즈마켓을 아마존 락커의 거점이자 식료품 니즈가 강한 프라임 고객에게 혜택을 주는 정도의 목적으로 홀푸즈마켓을 인수했다면 오판이다. 그 같은 서비스는 인수합병이 아닌 단순한 제휴로도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아마존이 홀푸즈마켓을 인수한 후 대대적인 할인에 돌입하고, 프라임 고객에 한해서 추가적인 할인 혜택을 부여한 것은 맞다. 이는 아마존북스와 마찬가지로 기존 프라임 고객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고 신규 고객을 확보하는 촉매제가 됐다. 홀푸즈마켓의 매장 도처에는 프라임 고객에 대한 할인 공지문이 붙어 있고, 영수증 등에도 “프라임 고객이면 많은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기저기 떠들고 있다.

일부 품목이기는 하지만 현재 아마존고에서 사과나 토마토, 바나나에 대한 구매가 이뤄지는 것을 보면 홀푸즈마켓의 새로운 기술 적용은 어느 정도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아직까지 홀푸즈마켓에 아마존고와 같은 기술적인 혁신이 적용된 부분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식료품이나 야채, 과일에 대한 고객들의 선입견으로 기술 적용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 수 있으며, 둘째, 이미지나 딥러닝, 센서에 대한 응용이 대단히 어려울 수 있다. 농수산물의 특성상 자주 교체되며 품질을 일정한 기준으로 기술적으로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향후 아마존고와 같은 시스템이 홀푸즈마켓에까지 적용된다면 지금까지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농수산물 쇼핑 형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존은 최고의 인공지능 쇼핑 기업으로 등극할 것이다.


4. 음성인식 인공지능 쇼핑의 미래

아마존 오프라인 매장은 공통적으로 아마존 제품의 전시장 역할을 하고 있다. 아마존북스, 아마존 4스타, 하물며 홀푸즈마켓에서도 아마존 TV와 에코, 아마존 홈 서비스 단말들을 판매한다. 이 같은 전시장은 아마존이 최근 축소하고 있는 팝업스토어를 대체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아마존 락커로도 활용된다. 아마존은 오프라인 매장을 전시장이자 유통 물류의 거점으로 활용하면서 고객에게는 편리함을, 아마존에는 비용 절감과 효율성의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

더 나아가 아마존의 오프라인 거점들은 온라인 고객이든, 오프라인 고객이든 수많은 센서를 통해 산출되는 고객의 쇼핑 특성 정보를 활용해 고객 맞춤형 인공지능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토대로 봐야 한다. 1994년 설립 이후부터 아마존의 변함 없는 경영 목적은 바로 ‘쇼핑’이다. 특히 음성인식 인공지능 비서를 통한 쇼핑은 지금까지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형태로 기업에 최고의 성장 기회를 가져다줄 가능성이 있는 비전 아이템이다. 음성인식 쇼핑이 확대된다면 어린아이와 노인 가릴 것 없이 구매계층이 확대될 뿐 아니라 반복적인 자동 구매가 늘어날 것이다. 이 같은 미래를 선점하기 위해 기업들은 더 작고 빠르고, 고객 맞춤형이고 분산된 민감 데이터를 확보하고자 할 것이다. 그동안 아마존이 온라인으로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생성하고, 또 모바일을 통해서 질적으로 정교한 데이터로 정제했다면 앞으로 오프라인 고객으로부터 초정밀 데이터를 걸러내고자 할 것이다.


필자소개 최재홍 강릉원주대 멀티미디어공학과 교수 smart_phone@daum.net
필자는 e-삼성 Japan 사업 고문, NHN Japan 사업 고문을 지냈으며, 현재 카카오의 사외이사이자 강릉원주대 과학기술대학 멀티미디어공학과 교수이다.


SR4. 인기 끄는 프리미엄 식음료 오프라인 매장의 핵심

디지털 솔루션 + 아날로그적 감성
“거기 가봤어?” 색다른 경험을 녹여야

Article at a Glance
쉐이크쉑, 블루보틀 같은 F&B 브랜드의 성공적인 국내 진출, 배스킨라빈스 심슨 매장의 인기, 세포라의 O4O 혁신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오프라인 스토어의 성공 비결은 다음과 같다.

1. 고급 품질의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합리적인 가격대를 제시함으로써 고급스러움과 실용적인 가치 사이에서 차별화된 브랜드 경험을 만들었다.

2. 알록달록한 버거, 섬세한 커피 향기, 예뻐 보이는 얼굴 등 고객이 느끼고 싶고,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은 브랜드 경험을 공간에 녹였다.

3. 최신 디지털 솔루션을 활용하면서도 오프라인의 본질적 존재 의미, 인간적인 아날로그적 감성과 고객의 자율성을 공간에 반영했다.

딜리버리, 당일 배송, 익일 새벽 배송, 푸드테크 발전 등으로 외식 산업에서도 e-커머스 시장의 확대와 기술의 발전이 가속화되고 있다. 손가락 하나로 샐러드에서 삼겹살까지 모든 종류의 음식을 언제, 어디서나 쉽게 주문할 수 있고 빅데이터와 커스터마이제이션(customization) 데이터를 통해 식료품 배송이 몇 시간 내로 단축됐다. 필자도 사라진 집 앞 대형 슈퍼를 대신해 ‘기가 지니(KT의 AI 스피커)’를 이용해 음성으로 롯데마트에서 장을 본다. 음성과 손가락 몇 번으로 식료품을 주문하고 4시간 안에 집 앞 현관에서 신선한 식재료를 받아 보고 있다.

이 같은 e-커머스 시장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고객이 F&B의 오프라인 매장을 찾고 있다. 외식 사업에서 오프라인 레스토랑은 고객이 느끼고 싶어 하는 모든 브랜드 경험을 담아내는 일종의 놀이공원, 또는 멋진 무대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장소로서의 공간적 의미 또한 아직 e-커머스 시장이 대체할 수 없는 점이다. 쉐이크쉑은 레스토랑을 ‘쉑(Shack, 판잣집)’이라고 부른다. 오두막, 음식 카트 같은 정겨운 의미를 담아 지역 주민들이 가장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공간 인테리어, 오픈 주방, 공감각적인 브랜드 경험을 녹여낸다.

쉐이크쉑과 아날로그 감성

파인 다이닝, 미슐랭가이드, 셰프 중심 외식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 국내에서 ‘파인 캐주얼’이라는 외식 분야는 미국 버거 브랜드 ‘쉐이크쉑’의 진출과 더불어 본격화됐다. 미국에서 십 년 앞서 시작된 ‘파인 캐주얼’은 셰프(chef) 주도의 파인 다이닝급 고급 외식 품질에 간편한 서비스와 합리적인 가격 포지셔닝을 더한 개념이다. 맛있고 건강한 메뉴를 비교적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브랜드를 말한다. ‘파인 캐주얼’이라는 표현은 ‘파인 다이닝’과 ‘패스트 캐주얼’이라는 말의 조합이기도 하다. 셰프의 리더십하에 만들어지는 고급 레스토랑급 고품질 메뉴에 빠른 서비스와 품질 대비 합리적인 가격대를 제공한다는 의미다.

국내에 처음 도입된 ‘파인 캐주얼’ 브랜드가 바로 ‘쉐이크쉑 버거’다. 고급 스테이크에 들어가는 앵거스 비프를 그대로 패티로 다져 주문 즉시 바로 철판 위에서 육즙 가득한 패티로 구워내 준다. 셰프의 주도로 메뉴를 구성하고 새로운 메뉴를 소개한다. 한국에서도 매년 오픈 기념일에 맞춰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 ‘밍글스’의 강민구 오너 셰프, 미슐랭 1스타 ‘제로컴플렉스’의 이충후 오너 셰프 등과 협업해 한정판 버거 메뉴를 소개하기도 한다. 쉐이크쉑이 국내 소비자들에게 크게 어필한 이유 중 하나는 고급 품질과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합리적인 가격대를 제시하는 ‘파인 캐주얼’ 문화의 유행과도 연결돼 있다. 쉐이크쉑은 고급스러움과 실용적인 가치 사이에서 국내 소비자들에게 차별화된 브랜드 경험을 제공하는 데 성공했다.

2016년 7월 한국에 첫 오픈한 쉐이크쉑 코리아 강남점의 첫 고객은 전날 밤 10시부터 줄을 선 지방 거주 남자 고등학생이었다. 폭염 속에서 오픈했던 첫날부터 몇 달 내내, 매일 하루에 몇 시간씩 줄을 서면서까지 쉐이크쉑을 찾은 고객 4000∼4500명은 쉽게 깨질 수 없는 기록이 됐다. 첫날 카운트다운을 함께 외쳐줬던 고객들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기대감, 행복함, 기다림, 그런 표정들을 지켜보면서 얼떨떨해하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었던 직원들의 표정도 잊을 수 없다.

필자는 SPC 쉐이크쉑 마케팅 팀장으로 관련 사업에 약 3년간 참여하면서 쉐이크쉑의 국내 진출 마케팅을 진행했다. 쉐이크쉑은 미국에서 워낙 인기 있는 브랜드이기 때문에 국내에서의 성공 또한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쉐이크쉑이 특히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비결은 성공적인 로컬라이제이션에 있다고 생각한다. 뉴욕의 맛과 품질을 그대로 구현하고, 쉐이크쉑 브랜드의 문화를 그대로 한국에 적용하면서도, 유행이 빠르게 변하는 국내 시장에서 다양한 경험을 원하는 한국 고객들에게 브랜드를 전달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

뉴욕에서 시작된 프리미엄 버거인 쉐이크쉑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면서 가장 주안점을 뒀던 부분은 디지털 솔루션을 과하게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브랜드 본연의 아날로그적인 디자인 자산과 브랜드 정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한국과 싱가포르에서 쉐이크쉑을 운영하고 있는 SPC그룹은 이미 배스킨라빈스, 파리바게뜨, 던킨도너츠 등에서 디지털 메뉴 보드, 해피오더 등을 업계 선두주자로 적용해 왔다. 하지만 쉐이크쉑은 야외 공원에 있는 듯한 나무 벤치의자를 설치하고 그와 연결되도록 나무와 마그넷으로 메뉴보드를 만드는 등 뉴욕 본점 매장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그대로 살렸다. 그리고 본점과 마찬가지로 코팅된 메뉴판을 줄 서서 기다리는 고객들에게 나눠 주면서 메뉴를 설명하거나 간단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친근한 소통이 시작되도록 했다. 대기 시간이 길어질 때는 햇빛과 비를 피하기 위한 큰 우산과 시원한 물을 나눠줬다. 겨울에는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검은색 담요와 귀마개를 나눠 주기도 했다. 오래 대기하는 고객들의 컨디션이 나빠질까 염려돼 실제 남자 간호사를 고용하기도 했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마치 놀이동산에서 줄을 섰던 유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매장 밖에서부터 메뉴를 고민하고, 매장 안으로 들어와 메뉴를 주문하고 음식을 즐기면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특히 쉐이크쉑은 SNS에 적극적인 국내 소비자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했다. 쉐이크쉑은 사람들이 스스로 공간과 버거 사진을 찍고 싶도록 고급 인테리어와 오픈 주방의 활기를 연출하는 데 많은 투자를 한다. 쉐이크쉑의 글로벌 헤드 셰프인 마크 로사티가 버거 제조를 시연하면서 버거 하나하나에 ‘마이 베이비’를 외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쉐이크쉑의 버거는 먹기 전부터 이미 눈으로도 맛있어 보이고 사진 찍기 좋도록 번, 양상추, 토마토, 고기 패티, 치즈 등의 색감이 예쁘게 어울리게 쌓여 있다. 버거를 받아 든 고객들은 너도나도 먹기 전에 자발적으로 사진을 찍고 수백만 개의 포스팅을 올렸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면 회사 차원에서 어떤 혜택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자발적이다. 직원들은 고객들이 스스로 찍고 싶은 것을 연출하고, 찍고 싶은 환경을 마련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고객 스스로 체감하고 공감한 브랜드 경험을 온전히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게끔 만든 것이다.

고객은 공간의 물리적 증거(Physical evidence)에 민감하다. 물리적 증거는 고객이 물리적으로 보고, 듣고, 만지고 하는 모든 요소로, 매장 간판이나 입구 사이니지, 팸플릿, 인테리어, 택배 포장, 모바일 앱 디자인 등 모든 물리적인 접촉 요소를 말한다. 쉐이크쉑 1호점 강남점 오픈 후 수많은 후기와 리뷰, 댓글들 중에서도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사소한 후기가 있다. 바로 화장실에 비치된 다이슨 핸드 드라이어가 좋다는 평, 그 핸드 드라이어로 손을 말리면 손이 잘 마르고 금세 보송보송한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기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 또한 단박에 마르는 그 핸드 드라이어가 좋았기 때문에 그 리뷰가 기억이 났다. 당시에는 다이슨 헤어드라이어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마케팅하기 전이어서 다이슨이 지금보다 알려지기 전이었는데 화장실에 달린 핸드 드라이어 하나로 브랜드 전체를 좋게 기억해준 고객이 있었다.

블루보틀과 커뮤니케이션

회사를 그만두고 잠시 쉬고 있던 2018년, 당시 국내 론칭을 준비하고 있던 블루보틀커피 코리아의 첫 직원이 됐다. 블루보틀커피 코리아가 조용히 국내에 유한법인을 세우고 마케팅 전략을 세우고 실행할 사람을 찾을 때였다. 당시에는 한국 직원이 없었고 미국과 일본에서 비정기적으로 출장을 나와 매장 입지를 알아보고 일을 추진하던 시기였다. 마침 그 시기에 추천을 받았다. 쉐이크쉑과 마찬가지로 블루보틀커피도 해외에서 유명한 브랜드였고 한국 론칭 과정에서 비슷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블루보틀커피 코리아에서는 마케팅이라는 단어를 안 쓰고 대신 브랜드 경험(Brand Experience)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전반적인 브랜드 경험의 설계를 강조했다. 블루보틀커피 코리아의 브랜드 전략과 마케팅 전략을 맡으며 제일 처음 한 일은 한국 마케팅팀의 이름을 정하는 것이었다. 마케팅팀의 이름을 정하는 것은 블루보틀커피가 지향하는 비전을 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업무의 범위는 론칭 전략을 세우고, 브랜드 경험을 섬세하게 설계하고, 미디어 및 소셜미디어 홍보 전략을 짜고, 중·장기적인 e-커머스 전략을 세우는 것까지 비교적 넓고 다양했다. 논의 끝에 한국 마케팅팀의 이름을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부서로 정했다. 당시 상사가 일본 총괄 디렉터이자 미국의 마케팅 총괄이었는데 마케팅 전략을 짤 때 필자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을 보고 “부서 이름이 ‘커뮤니케이션’이면 좋겠다”고 역으로 제안했다. 그래서 필자도 마케팅이 아닌 ‘커뮤니케이션 디렉터’라는 직함으로 일하게 됐다.

여기서 커뮤니케이션은 브랜드 경험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홍보가 아니라 다양한 접점에서의 전반적인 ‘소통’을 의미했다. 매장의 위치, 주변 상권과의 어우러짐, 브랜드 로고, 주문대의 높이, 커피 향기, 바리스타의 움직임, 의자의 배치, 조명의 각도,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사진, 브랜드 북 등 모든 것이 소통이고 브랜드 경험을 완성시키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커피에서는 블루보틀커피, 스텀프타운커피, 인텔리젠시아커피를 필두로 ‘스페셜티’라는 시장이 확대되고 있는데 외식 업계에서 파인 캐주얼 콘셉트와 비슷한 맥락이다. 스페셜티 커피는 커피 원두의 생산 공정부터 거래, 로스팅, 추출, 핸드드립 서비스 과정에서 까다로운 기준과 원칙을 거친다. 블루보틀커피의 경우 원두 특성마다 가장 커피의 향과 맛이 좋은 ‘피크 플레이버’를 찾기 위해서 매일 커피를 시음하고 그 기록을 축적해왔다. 초반에는 로스팅 후 48시간 이내에 커피를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48시간이란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원두마다 가진 특성을 고려해 가장 커피 풍미가 좋은 기일 안에 커피를 제공한다는 원칙으로 운영하고 있다. 국내 소비자들은 일반 카페와 비슷한 가격대에, 최고급 커피 맛을 즐길 수 있다는 메리트에 크게 열광했다. 블루보틀 또한 합리적인 가격대에 사치에 가깝다고 느낄 정도의 세심한 브랜드 경험을 제공하는 데 집중했다.

일례로, 블루보틀은 고객이 커피 향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바리스타나 매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가급적 개인적인 향수를 쓰지 않도록 권했다. 커피 향기에 다른 강한 향이 섞이면 고객이 맛을 느끼고 즐거운 후각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싱그러운 커피 향을 기대하며 카페에 첫발을 내디딘 고객이 바리스타의 섬세한 움직임을 보며 커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볼 때 커피 향에 미세하게 바리스타의 향수나 진한 화장품 향이 섞이길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커피의 경험은 미각이 아니라 후각과 시각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전반적인 접점에서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을 섬세하게 설계하는 것이 바로 마케팅의 일이다. 작은 곳에서부터 옅은 청각, 미세한 후각, 섬세한 촉각을 배려해 고객 스스로 느끼는 공감각이 확장되고 브랜드 경험이 긍정적으로 선순환되도록 일종의 시나리오를 설계하는 게 마케터의 역할이다.


배스킨라빈스 심슨 매장 키오스크의 실험

변화가 빠른 국내 시장에서 프리미엄 마케팅을 하며 디지털 솔루션과 리테일 혁명의 변화를 멀리하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가장 먼저 새로운 디지털 솔루션을 리테일 매장에 소개해도 모자랄 판이다. 늘 앞서나가는 디지털 리테일 솔루션과 아날로그 감성을 동시에 지켜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2019년 7월 말 분당 서현에 오픈한 배스킨라빈스 심슨 매장은 그 두 가지가 자연스럽게 배치되면 고객들에게 더욱 즐거운 브랜드 경험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고객이 혼자서 주문할 수 있는 키오스크 POS(판매시점정보관리 시스템)는 보통 메탈 소재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곳 심슨 매장의 키오스크는 배스킨라빈스의 핑크색과 심슨 가족 캐릭터로 둘러싸여 있다. 메뉴를 고르는 화면에도 심슨의 애니메이션이 담겨 있다. 디지털 메뉴 보드 주변에는 입체적인 분홍색 액자 프레임을 입히고 오래된 TV 채널처럼 ‘지지직’ 하는 화면이 지나간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아이스크림 메뉴를 심슨 캐릭터와 함께 소개했다. 이 매장에는 심슨 MD 상품들이 디즈니랜드처럼 전시돼 있고 매장 안쪽에는 노란색 미끄럼틀과 무심하게 붙여 둔 심슨 포스터, 천장에 달린 스케이트보드까지 마치 심슨이 사는 집에 놀러 온 기분이 든다. 스태프들의 출입문과 매장 밖 유리 벽면까지 빠짐없이 심슨 감성을 개연성 있게 꾸며놓았다. 심슨 가족 캐릭터를 좋아하는 고객, 어린 가족이 있는 고객, 젊은 고객 모두 사진 찍고 놀고 머물다 가고 싶어 하는 매장이 됐다.

디지털, 기술에 집중하게 되면 왕왕 오프라인 매장의 본질적 의미를 잊기 쉽다. 그 디지털 미디어와 솔루션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은 사람을 위한 인간 중심적 콘텐츠와 편의 제공이다. 예컨대, 성수동에 생긴 ‘로봇X’라는 카페에서 로봇 바리스타가 근무하는 공간이 아이러니하게도 낡은 창고 콘셉트라는 점이 흥미롭다. 여러 사람의 손을 대신하는 로봇 엑스는 미국 3대 스페셜티 커피인 인테레젠시아 커피를 내려준다. 이곳에서도 기술이 중심이 되지 않고 카페라는 공간에서 가장 기본적인 따뜻함을 놓치지 않기 위해 몇 가지 신경 쓴 점이 돋보인다. 우선, 넓은 공간임에도 나무 질감에 단순한 디자인의 의자와 탁자를 빼곡히가 아닌 드문드문 배치했다. 그리고 사람의 동작에 따라 반응하는 대형 미디어월 내부의 홍학은 사람을 따라 함께 움직이고 따라오기도 한다. 정기적으로 달라지는 미디어월 안의 영상 콘텐츠가 의외로 지극히 아날로그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디지털과 매장 경험, 온라인과 오프라인, 기술과 고객 중심 사이에서 접점을 찾으려는 고민이 바탕이 됐기 때문일 것이다.


세포라의 O4O(Online for Offline) 전략

세포라는 뷰티 제품 마니아가 아니라도 디지털 옴니 채널 전략에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눈여겨봐야 하는 브랜드다. 한국에는 2019년 10월24일 국내 1호 파르나스몰점 오프라인 매장과 함께 온라인 스토어를 동시 오픈했다. 세포라의 옴니 채널(Omni-channel)은 온·오프라인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고객이 원하는 시점과 채널에서 세포라의 제품과 서비스를 경험할 수 있으며, 최신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솔루션들이 매장 경험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필자가 국내 매장이 오픈하기 전에도 미국 출장 중에 꼭 들렀던 매장 중 하나가 바로 세포라였다. 세포라야말로 리테일 매장에서 디지털 솔루션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가장 앞서 나간 방식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화장품을 이용하는 고객들의 핵심 니즈는 내가 예뻐 보이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남에게 내가 예뻐 보이는 제품’을 편리하고 합리적으로 구매하는 것이다. 정확한 목적을 둔 구매가 아니어도 ‘어때? 예뻐? 별로야?’ 친구와 자유롭게 소통하며 놀 수 있는 놀이터가 되는 셈이다. 매장에서 눈치 보거나 간섭 없이 마음껏 고르고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율적 공간 활용이 리테일 매장의 디지털 솔루션을 기획할 때 제일 중요한 점이다.

미국 세포라 매장에 들른 나의 발목을 길게 잡아 뒀던 세포라의 가장 강력한 디지털 솔루션은 바로 ‘가상 아티스트(Virtual Artist)’ 앱이다. 스탠퍼드대에서 최초 개발한 가상현실(AR) 기술을 활용해 모디 페이스(Modi Face)와 협업해 만든 앱으로, 얼굴을 트래킹하고, AR로 이미지를 시각화함으로써 얼굴을 예쁘게 표현해주는 솔루션이다. 아직 한국 매장에는 적용되기 전이지만 세포라 해외 매장에서는 고객이 직원 도움 없이 손쉽게 이 앱을 활용할 수 있다. 즉, 매장에서 얼굴을 촬영한 다음 다양한 색상의 색조 화장품을 AR을 통해 본인 얼굴 위에 연출해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진 이미지를 바로 친구들에게 공유해 그들의 의견을 받을 수 있다. 세포라는 이 AR 앱으로 수천 개의 립스틱, 아이섀도, 블러셔, 인조 속눈썹까지 모두 쉽게 테스트해 볼 수 있도록 했다. 고객은 매장에서 나에게 어떤 색이 어울릴지 테스트하기 위해서 매장 직원의 팔목에 바른 색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아침에 애써 했던 화장을 지울 필요가 없다. 그리고 민망하게 직원에게 다가가 “죄송한데, 저에게 어떤 색이 어울리는지 좀 봐주실래요?”라고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


또 세포라의 디지털 혁신을 앞당긴 일등 공신은 핵심 고객의 편의성에 맞춘 개인 맞춤형 정보 제공이다. 예를 들어, 매장에 설치된 컬러아이큐(Color IQ)라는 단말기를 통해 즉석에서 사진을 찍고 개개인의 피부톤에 맞는 색상을 정확하게 찾아주는 것이다. ‘팬톤’사와 협업해 개발한 컬러 매칭 기능은 고객이 피부톤에 맞는 색상 음영을 찾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인종이나 피부 상태, 나이에 따라 개인적 특성에 맞게 정확한 컬러를 추천해 줄 수 있다. 같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시즌별 피부 상태나 태닝 상태에 따라 피부톤이 미세하게 달라질 수 있는데 컬러아이큐를 통해서는 시즌별로 미세하게 달라지는 피부톤까지도 잡아낼 수 있다.

세포라 매장 사례처럼 오프라인 매장에서 쇼핑을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온라인(모바일) 서비스를 일컫는 O4O(Online for Offline)가 중요해지고 있다. 우리가 오프라인 매장에서 앱을 열고 포인트를 적립하거나 쓰는 로열티 프로그램도 쉽게는 O4O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AR, VR 환경을 오프라인 매장에 구현함으로써 고객이 즉각적으로 디지털과 초연결되는 리테일 환경의 변화를 포용하는 개념이다. 유통과 리테일 혁신의 핵심은 바로 O4O를 어떻게 구현하느냐에 달려 있다.

세포라는 화장품 유통 브랜드이지만 디지털 혁신에 가장 힘을 쏟는, 즉 디지털 리더십이 강한 회사다. 모바일 플랫폼이 2010년에야 구축돼 디지털 혁신 자체는 비교적 늦게 시작했지만 그 후 진취적으로 디지털 혁신을 조직적으로 실행해 왔다. 2013년부터 디지털마케팅 부서를 설립하고 마케팅 임원인 CMO를 CDO(Chief Digital Officer) 겸임으로 뒀다. 그 후 오프라인 매장 팀과 디지털 팀을 아예 병합해 ‘옴니 리테일’ 부서로 바꿨다. 2015년에는 이노베이션 랩(혁신 연구소)을 설립해 고객의 온·오프라인을 통합한 360도 브랜드 경험을 연구하고 많은 것을 시도해왔다. 실리콘밸리가 속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이노베이션 랩을 중심으로 RFID, 증강현실, 인공지능, 로봇 등을 일찍이 화장품 오프라인 매장에 접목해왔다. 세포라 코리아 또한 가상 아티스트(Virtual Artist)나 온라인에서 주문 후 오프라인에서 제품을 수령할 수 있는 클릭 앤드 콜렉트(Click and collect) 같은 옴니 채널 서비스를 통해 색다른 차원의 브랜드 경험을 선사할지 기대된다.


필자소개 최연미 SPC삼립 신사업부문 마케팅팀장(부장) scandilife@naver.com
필자는 2015년부터 SPC그룹에서 마케팅 팀장으로 근무하며 쉐이크쉑 국내 론칭과 로컬라이제이션 마케팅을 진행했다. 매일 수천여 명의 대기 고객이 있었던 쉐이크쉑 강남점과 청담점 오픈 전 공공미술로서 호딩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SPC그룹 마케팅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그 후 블루보틀커피코리아의 1호 직원으로 마케팅을 담당하며 블루보틀 국내 브랜딩, 론칭, e-커머스 전략 수립을 담당했다. 현재는 다시 SPC그룹 내 SPC삼립 신사업부문에서 마케팅팀을 이끌고 있다. ㈜두산그룹 전략실과 두산매거진 GQ, Allure 브랜드 매니저 등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탐나는 프리미엄 마케팅』 『서른셋 싱글 내집 마련』 『학교에서 배운 경제 직장에서 배운 경제 시장에서 배운 경제』가 있으며 브런치 칼럼과 강의를 통해 프리미엄 마케팅 경험을 전파하고 있다. 고려대에서 스페인어문학을 전공하고 미국 버지니아주립대에서 MBA 과정을 졸업했다.


point1 : 극단적 오프라인 채널의 성장 전략 - 취향, 가치제안, 경험, 공간, 맥락.


point2 : 왜 구태여 오프라인 매장에 가서 사야할까?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SR3.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스트롤’ 스토리

남과 다른 것을 팔 수 없으면
같은 것을 다르게 팔아야

Article at a Glance
경기도 광교에 위치한 남성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스트롤’은 상점 주인의 오랜 경험과 라이프스타일, 영감을 담은 신개념 콘셉트 스토어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 국내 PR 회사 프레인글로벌의 창업자인 여준영 대표가 본인의 열정과 비전을 담아 틈새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스트롤’이 구현하는 콘셉트 스토어의 존재 가치는 다음과 같다.

1. 매장은 상점이 아니라 ‘미디어’가 돼야 한다. 손님이 물건을 사지 않아도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2. 희귀하거나 로망에 가까운, 하나를 갖고 있어도 오래 만족할 수 있는 가치를 제안해야 한다.

3. 상품에 스토리를 담거나 디자인이나 용도를 변형시키는 등 다른 매장에서는 찾을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상품을 제안해야 한다.



“미친 거 아냐?”

2018년 초, 부동산 디벨로퍼인 네오밸류(NeoValue)의 손지호 대표1

로부터 남성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을, 그것도 광교에 열어달라는 요청을 받고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다. 여성 소비자들의 주도로 도심과 온라인 중심의 소비가 주를 이루는 시대에 그 정반대 편에 있는 세 가지 요소, ‘오프라인, 비(非)서울 지역, 남자’를 묶어서 오프라인 매장을 열어 보라는 주문이었다.

어려운 숙제를 받은 후 몇 달간 여러 도시의 리테일 매장을 돌아다녔는데 잘되는 곳이 거의 없었다. 가로수길에서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는 매장은 애플 숍과 메종키츠네(Maison Kitsune) 카페, 딱 두 곳뿐이었다. 후자가 F&B를 같이하는 곳임을 감안하면 애플 같은 대형 브랜드 숍 말고 사람을 끌어모은 순수 리테일 숍은 한 곳도 없었다. 서울시내도 이런 마당에 광교에서 남성 라이프스타일 편집 매장이 잘될 리가 없었다. 손 대표에게 거절하고 또 거절했으나 긴 설득에 넘어갔다. 결과적으로는 1년여간의 고민 끝에 ‘스트롤(STROL)’을 열었다. 나중에 꺼내 들 이 말 한마디 가슴에 품고.

“거봐,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

필자는 ‘내가 운영하는 오프라인 매장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남자인 나는 중독에 가깝게 이것저것을 사 모으는 자칭 소비의 왕이다. 나의 소비 경험을 감안했을 때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이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가치는 ‘경험’과 ‘공간’이다. 그간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치는 ‘맥락 있는 취향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험, 취향, 맥락, 제안, 공간 이 5가지 요소를 매장의 여러 활동, 즉 상품 소싱, 디스플레이, 스태프의 태도 등 고객에게 다가가는 방식뿐 아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기준으로 정했다. 예컨대, 브랜드에 입점을 제안할 때도 흔히 쓰는 파워포인트 제안서 대신 우리의 가치를 녹인 레트로 뷰어를 해외에서 주문 제작해 브랜드들에 보냈다. 브랜드 담당자들은 레트로 뷰어와 필름 슬라이드로 스트롤의 정체성을 느끼는 새로운 ‘경험’을 신선하게 여겼고 대부분 우리의 제안에 흔쾌히 호응했다. 가장 어려운 것이 좋은 브랜드를 유치하는 일이었는데 덕분에 수월하게 해결했다.

온라인에서 상품이 저렴한 이유는 매장 유지비용이 없고 인건비 등 제품 단위당 제비용이 싸기 때문이다. 최근 배송비 부담이 커지긴 했지만 공급자 입장에서 절약되는 부분이 분명하다. 그래서 오프라인은 온라인보다 비싼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공급자 입장에서 말이다.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전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매장까지 걸어가면 시간이, 차를 타고 가면 기름과 시간이, 어떻게 가든 이런저런 수고가 드는데, 어렵게 가서 사면서 더 비싸게 사는 건 어이없는 일이다. 사는 쪽 입장에선 오프라인이 더 싸야 맞는 것이다. 아니라면 다른 반대급부가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오프라인에만 한정적(exclusive)인 상품을 팔거나, 매장을 둘러보는 즐거움이 있거나, 서비스가 인상적이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온라인으로 클릭 결제하면 더 저렴한 데도 불구하고 오프라인 매장을 가야 하는 ‘어떤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오프라인 매장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그 이유를 잘 준비하는 것이 매장 론칭의 목표가 됐다. 매장 이름을 고를 때 여러 후보 중에 스트롤(STROL), 즉, ‘산책(stroll)’이란 이름을 정한 것도 ‘우리는 오프라인만이 줄 수 있는 가치를 제공할 것’이라고 선언하기 위해서였다. 산책은 오프라인의 특권이다. 온라인 스토어는 아예 열지 않기로 하고 홈페이지 첫 화면에서부터 배수진을 쳤다.

“우리는 오프라인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회사라서 이곳에선 물건을 팔지 않습니다.”

2019년 5월 광교 앨리웨이에 오픈한 스트롤은 남자들을 위한 아지트 공간이자, 다른 어디에도 없는, 하나를 사도 후회가 남지 않을 제품을 선별해 제안하겠다는 필자의 취향과 의지가 담긴 편집숍이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콘셉트의 오프라인 매장을 만들기까지 필자의 고민과 여정을 본격적으로 공유한다.


1. 취향: 매장이 곧 미디어

벤치마킹할 만한 남성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을 찾아다니면서 두 가지 질문에 맞닥뜨렸다. 첫 번째 질문은 “왜 라이프스타일은 없고 패션만 있는가?”였다. 패션이 라이프스타일의 일부는 맞지만 라이프스타일이 곧 패션은 아니다. 라이프스타일은 말 그대로 살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한다.

두 번째 질문은 “(큐레이션을 통해 좋은 물건을 모아놓은) 셀렉트 매장을 방문해도 왜 여전히 선택하는 것은 어려울까?”였다. 아이템별로 상품 종류가 많다 보니 그 안에서 소비자는 뭘 살지를 또 고민해야 한다. 필자가 생각한 대안은 패션의 비중을 줄이고, 카테고리별로 엄선한 단 하나의 제품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런 원칙에 따라 편집숍에 테넌트(입주할 브랜드)를 입점시키는 방식을 모델링했다. 면세점처럼 브랜드 단위로 초대해 섹션을 구성하는 방식과 좋은 제품을 하나하나 선별하는 방식 중 어느 쪽을 선택할지도 중요한 결정이었다. 전자는 편한 반면 개성이 없고, 후자는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 두 방식을 양극으로 놓고 그 사이에 놓인 여러 방식을 시뮬레이션해 나갔다.

최종적으로 스트롤의 정체성을 숍이 아닌 ‘미디어’로 정의했다. 지면이나 화면이 아니라 실제 공간을 활용하는 미디어란 뜻이다. 그냥 상점이라면 손님이 오래 둘러보고 나가면 김이 새겠지만 미디어로서의 숍은 손님이 오래 둘러보는 행위 자체가 고마운 일이 된다. 상점에서 컵을 팔면 손님이 그 컵을 사는 것으로 관계가 일단락된다. 하지만 미디어로 존재하면 손님이 컵을 사고 나면 컵이 있던 그 자리에 또 다른 어떤 것이 놓이게 될지 기대하게 된다. 제품을 소개하는 방식을 매거진과 전시회의 중간쯤으로 설정함으로써 남다름을 추구하고 싶었다. 매거진처럼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가 하면, 전시회처럼 하나의 작품과 깊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길 바랐다. 스트롤이 특별한 미디어로 취향이 맞는 소비자들에게 인정받게 된다면 매출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또 브랜드들이 ‘우리도 스트롤에서 저런 방식으로 다뤄줬으면 좋겠다’고 찾아오게 될 것을 기대했다.

DBR mini box I: 매장 스태프는 ‘과묵한 도슨트’

스트롤의 매장 직원은 친절하지 않아도 된다. ‘수동적인 도슨트’가 돼야 한다. 필자는 쇼핑할 때 내가 먼저 묻기 전에 와서 도와주거나 추천해줘서 부담스러울 때가 많았다. 입어보면 맘에 안 들어도 고생시킨 게 미안해서 사는 편이다. 자유롭게 보고 싶은데 직원이 말을 걸면 ‘둘러보기’가 편치 않다. 그냥 빨리 뭔가를 사야 한다는 압박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어떨 때는 언제라도 내가 부르면 올 준비 태세로 나를 보는 그 시선조차 부담이 된다. 직원들이 으레 묻는 “특별히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라는 말도 그 의도와 달리 천천히 구경하려는 손님에겐 매우 불편한 말이다. 모든 사람이 필자 같지는 않겠지만 나 같은 사람이 편하게 쇼핑하게 하고 싶어서 ‘과묵한 도슨트’ ‘수동적인 도슨트’를 스트롤 매장 직원들의 아이덴티티로 못 박고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묻기 전엔 네가 없는 것처럼 있어라. 하지만 물어보면 도슨트 수준의 엄청난 설명을 하라. 그러기 위해 공부하라”고 주문했다.

오픈 첫날, 직원들은 매장 한가운데에 서서 손님을 정성껏 맞이하겠다는 밝은 표정으로 대기했다. 하지만 제발 그러지 말고, 누가 오든 상관 말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고 요청했다. 직원들이 충분히 ‘수동적’일 수 있도록 두 가지 장치를 했다. 먼저, 손님들이 구태여 직원들을 부르지 않아도 될 만큼의 설명을 상품 곁에 적어 두고 고객들이 직원이 아닌 ‘제품’과 대화하도록 했다. 그런데도 일단 누군가 직원을 부른다면 최대한 잘 설명하라고 했다. 단골에게는 쿠폰도 주고 필요시 할인도 해주는 권한을 필자의 허락 없이도 자유롭게 발휘하라고 주문했다. 스트롤 제품에 설명이 많은 이유는 필자가 이같이 직원의 역할을 정의했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신기하게도 매장 직원들이 친절하다는 칭찬을 종종 받는다. 과묵하고, 수줍고, 수동적인 사람이 친절하긴 어려운데, 친절하다는 얘기를 들으니 놀랍다.



2. 가치 제안: 하나를 사도 오래 지속되는

필자는 수많은 소비 실패를 경험했다. 무얼 살까 고민한 다음 물건을 사더라도 금세 질리거나, 고장 나거나, 더 좋은 것이 눈에 들어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후회를 하고 새로운 물건을 또 사야 할지 고민한다. 그렇다면 이미 산 물건은 어떻게 해야 할지 또 고민한다. 결국 새 물건을 산다. 하지만 취향과 철학이 있는 사람들의 소비 프로세스는 다르다. 이들은 물건을 사고, 오랫동안 행복하게 사용한다. 거기서 끝이다. 필자는 수많은 소비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남자들에게 아주 오랜 시간 쓸 수 있는 상품을 제안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소비자들에게 제안하고 싶은 가치를 아래와 같은 카테고리로 구체화하고 MD들에게 그 카테고리에 하나라도 해당하지 않는 상품이라면 아무리 인기가 높아도 들이지 말라고 주문했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물건’을 가져다 놓는 대신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물건’을 가져다 놓는 것은 굉장한 모험이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가치는 좋은 것이 아니라 희귀한 것(rarity)으로부터

일본의 어느 유명한 중고 숍에서 상품 태그에 출시 가격과 중고 판매 가격을 같이 적어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몇십 년 된 에르메스와 루이비통 상품이 출시 가격의 반 정도의 가격에 팔리고 있었다. 저렇게 낡았는데도 불구하고 몇십 년이 지난 후에도 절반의 가치가 살아 남아 있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옆에 걸려 있던 슈프림(Supreme) 후드 셔츠에는 ‘출시 가격: 40만 원, 중고 판매 가격: 150만 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희귀한 상품은 희귀함 그 자체에서 존재 이유를 갖고 가치를 높인다. 스트롤도 희소성이라는 가치를 제안하기 위해 수시로 작가들과 협업하고 그들의 작업을 상품화해서 선보이고 있다. 오픈 작가로 선전된 옥승철 작가는 부조와 조각 등 그가 한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작품을 스트롤에 선보였다. 1965년부터 2대에 걸쳐 빈티지 시계를 제작하는 ‘용정’의 컬렉션 또한 용정 본점 외에 스트롤에서만 볼 수 있는 아이템이다. 뉴욕에서 소싱한 핸드메이드 슈즈 브랜드 ‘파이트(FEIT)’는 친환경 공법과 소재로 장인들이 직접 손으로 만드는 상품으로 유명하지만 이들의 진정한 가치는 모델당 단 60개만 한정으로 만든다는 점에 있다.


싼 쪽에서 조금 더 꿈 쪽으로: 리처블 로망

생각해보면 살면서 같은 카테고리에서 두 개 이상 필요한 물건은 별로 없다. 하나만 있어도 괜찮다면 내 기준에서 제일 좋은 것보다 실제 조금 더 좋은 물건을 사야 한다. 이런 물건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과 도저히 갖기 힘든 로망 사이에 놓여 있다. 많은 사람이 로망을 포기하고 쉽게 살 수 있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우리가 그저 그런 물건을 사고 후회하는 이유 중 하나다. 조금 무리하더라도 로망에 가까운 지점에서 상품을 선택해 오래 곁에 두길 바라고, 그 지점을 ‘리처블 로망(reachable roman)’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카메라는 라이카(Leica), 자전거는 브롬톤(Brompton), 오디오는 오드(ODE) 컬렉션을 각각의 카테고리에서 유일한 선택지로 입점시켰다. 이보다 저렴하고 합리적인 브랜드 제품들은 당연히 많다. 하지만 경험상 당장 살 수 있는 카메라, 자전거, 오디오를 사서 끝내 만족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분명 후회하거나 업그레이드를 하게 되는데 그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제안을 하기로 했다. 물론 우리가 선택한 것들보다 더 하이엔드 제품들도 있지만 그 로망에 가기 전까지 그에 가깝게(reachable) 다가가라고 제안한 것이다.


환경에 도움이 되는 것들

예전에 방문한 스칸디나비아 친환경 숍에는 플라스틱 물품이 놓여 있었다. 왜 플라스틱이 친환경이냐고 묻자 점원이 말했다. “우리는 이 제품을 정말 ‘잘’ 만들었습니다. 당신이 이걸 사면 버리고 다시 살 일이 없어요. 평생 이 제품으로 인한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친환경은 무엇으로 만드는지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오래 쓸 수 있으면 그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든 쓰레기로 가지 않으니 환경에 비교적 도움이 된다는 얘기였다. 스트롤도 오래 쓸 수 없는 상품은 최대한 배제하기로 했다. 포틀랜드의 친환경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나우(Nau)와 함께 페트병에서 추출한 재생 소재로 만든 스웨트셔츠는 옷에 달린 태그에 이와 같이 ‘지속가능성’에 대한 두 브랜드의 생각을 텍스트로 넣었다. 그리고 보통 구매 후 떼어서 버리고 마는 태그를 재활용할 수 있게 디자인했다. 소비자는 이 태그를 뗀 뒤 북마크 등으로 활용할 수 있다.


새것이어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새것과 사용한 이후의 가치에 큰 차이가 있다면 새것을 사는 게 맞다. 예컨대, 휴대폰은 새것이 가장 좋은데, 낡으면 느려지고 배터리 문제도 있다. 하지만 가죽점퍼, 과일 접시, 금팔찌, 시계, 가구 등처럼 그렇지 않은 것도 많다. 물론 ‘잘 만든’ 상품이어야 하겠지만 가치 퇴행이 느린 상품들은 새것보다 빈티지가 나을 때도 많다. 스트롤은 임스(Eames), 놀(Knoll), 핀율(Finn Juhl), 프리츠한센(Fritz Hansen), 한스베그너(Hans Wegner)같이 오래됐지만 지금 만든 것보다 더 완벽하게 가치를 유지하는 빈티지 가구들을 계속 업데이트하고 있다.


오늘 살 때가 가장 싼 것

가전제품은 나오자마자 제일 비싸고 점점 가격이 내려간다. 하지만 소유가 곧 ‘재테크’라고 불릴 정도로 사용하는 동안에 가치가 올라가는 것들, 즉 내일 사려면 더 비싸지는 것들도 있다. 예컨대, 세르주무이(Serge Mouille)는 연간 2000개 이내만 생산되는 프랑스 조명인데 현재도 경매에서 50년대에 만들어진 모델이 10배 이상의 가격으로 되팔릴 정도로 그 가치를 자랑하고 있다.


사이즈가 중요하다

집안 가득한 옷들을 정리 처분할 때 결국 끝에 남는 옷들은 브랜드도, 가격도 컬러도 아닌 몸에 잘 맞는 옷들이다. 맞지 않는 것은 아무리 좋아도 사면 안 된다. 스트롤은 여러 제약 조건에도 불구하고 슈트와 비즈니스 셔츠 등은 비스포크 라인으로 준비했다. 여기에 ‘로컬’ 개념을 더해 이 동네 주민, 즉 단골손님이 한 번 사이즈를 잰 다음부터는 슈트는 물론 다른 옷을 살 때도 몸에 꼭 맞는 옷을 고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 중이다.


3. 경험: 독점적이거나 비틀거나(Exclusive or Twist)

‘오프라인에서 무엇을 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는 ‘왜 소비자가 직접 사러 가야 하는가?’란 질문을 같이 던져야 한다. 구태여 왜 거기를 직접 가야 하는지 말이다.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남과 다른 것을 팔면 된다. 나이키 컬래버레이션 발매일 당일 매장 앞, 백화점 세일 상품 매대 앞에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는 이유다. 그런데 어디서도 살 수 없는 것이 우리 매장에만 공급될 일은 만무하다. 따라서 스트롤은 남다른 것(Exclusive)을 파는 것뿐 아니라 같은 것을 다르게 판매한다(Twist)는 원칙을 세웠다. 다르게 판매한다는 것은 제품에다가 앞서 얘기한 상위 가치 5개, 경험, 취향, 맥락, 제안, 공간을 더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세계적인 디자인 스튜디오인 클라우드앤코(Cloudandco)의 유영규 디렉터가 디자인한 제품은 뉴욕의 현대미술관 모마(MOMA)에서 판매되는데, 한국에서는 스트롤에서만 독점적으로 만날 수 있다. 앞으로도 그가 디자인한 제품들은 스트롤에서 단독 소개하고 판매할 예정이다.

스트롤이 암스테르담의 반고흐박물관에서 수입한 립스틱 케이스는 뒤틀기(Twist)의 좋은 사례이다. 2018년 1월 유럽 여행 중 반고흐박물관에서 판매하는 립스틱 케이스를 발견하자마자 동전 케이스로 쓰기 너무 좋겠단 생각을 하고 반고흐박물관으로부터 그 케이스를 수입했다. 필자의 경험을 설명하며 매장에 전시했고, 수많은 여행객이 그 제품을 사기 위해 매장을 찾았다.



이미 히트 상품인 로우로우(RAWROW) 트렁크를 입점시키면서도 “이걸 구태여 왜 여기까지 와서 사야 하지?”란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다른 어느 판매점에서도 하지 않는 형태로 래핑을 했다. 래핑 디자인은 디자인 스튜디오 슈퍼픽션(SUPERFICTION)과 ‘광교’의 로컬 정체성을 모티브로 협업, 제작했다. 트렁크 래핑은 단순한 데코레이션이 아니라 ‘트렁크는 집에 산다’는 해석을 담은 결정이다. 사람들은 트렁크를 여행 갈 때 쓰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내 생각엔 트렁크가 가장 오래 있는 곳은 ‘집’이고 사람들은 그 큰 트렁크를 어디다 둘지 곤란해 하곤 한다. 그러니 원하는 디자인으로 꾸며 평소에도 잘 보이게 놓으라는 새로운 제안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스트롤은 구매하는 거의 모든 제품에 이름을 새길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나가고 있다. 현재는 레이저 각인기를 주로 사용하는데 제품 소재에 따라 실크스크린, 자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니셜을 새겨주려고 한다.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 ‘이름을 새기는 행위’가 제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아이디어는 2019년 어느 겨울 강남역 횡단보도에서 내 앞을 걷고 있던 4명의 군인을 보면서 떠올랐다. 넷 중 단 한 명만 태극기 자수 밑에 본인의 이름을 새겨 넣고 있었는데, 내게 그날의 장면은 ‘HJ CHO와 세 명의 검은 가방을 멘 군인’으로 기억됐다. 이름을 새기는 것이야말로 나를 남과 구분해주는, 즉 커스터마이징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다.



4. 공간: 상품을 사지 않아도 머물고 싶은

스트롤의 공간은 ‘프로덕트 퍼스트(Product First)’라는 모토하에 인테리어를 최소화하는 한편, 다음의 3가지 포인트에 집중했다. 입구에는 구매 고객이 아니어도 누구든 쉴 수 있는 계단, 수시로 변형할 수 있는 모듈 가구, 천장에는 언제나 파티션으로 나눌 수 있는 레일 시스템을 적용했다. 입구 계단은 앨리웨이 광장에서 벌어지는 버스킹을 관람하는 사람이 매장과 광장의 중간지대에서 즐길 수 있도록 마련했다. 레일 시스템은 매장에 언제든지 작은 전시 공간을 조성할 수 있는 도구다. 하나의 브랜드를 돋보이게 만들고 싶을 때 레일에 파티션을 달아 매장 어느 곳에나 특정 제품에 집중할 수 있는 밀폐된 방을 만들 수 있다.

온라인과 달리 오프라인 매장에는 머물 공간이 필요하다. 물건을 사는 것 외에 방문해야 할 다른 이유 한 가지를 더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 고민의 결과로 매장의 절반을 털어 ‘스펜서룸’이 라는 이름으로 VIP들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공간을 꾸몄다. 심지어 VIP의 경우 스트롤 매장이 문을 닫은 심야에도 카드 키로 별도의 출입문을 이용해 드나들 수 있고, 또 이 공간을 개인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겠다는 극단적인 계획도 세웠다. 멤버들은 이 공간에서 편하게 음악을 들으며 쉴 수도 있고, 원하는 술을 따라 마실 수 있고, 원하면 앉아 일을 할 수도 있다. 처음에는 쇼핑에 관심이 없는 남자들이 가족들이 쇼핑할 동안 쉬는 곳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출발했는데 그 휴식을 좀 알차게 하라는 제안이자 남자들이 늘 꿈꾸는 ‘아지트’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컨시어지와 리퀴르 서비스도 준비하고 있다. 컨시어지는 주민들이 수리할 물건을 맡겼다 찾아가고, 미리 등록한 신체 사이즈로 별도의 수고 없이 맞춤 양복을 구입하고, 쓰지 않는 중고물품을 위탁하고, 가끔 쓰는 제품을 빌리고, 매장에 들여놓았으면 하는 제품을 구입 요청할 수 있는 창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리퀴르 코너 역시 필자의 경험에서 아이디어가 나왔다. 혼자 와인을 따면 반병도 채 먹지 못할 때가 많다. 그리곤 코르크로 막아 놓으면 결국 상해서 버리게 되곤 했다. 필자 같은 처지의 주민(손님)들을 위해 와인과 좋은 싱글몰트 같은 주류를 각자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병에 담아 집에 가져갈 수 있는 코너를 만들었다.이런 서비스를 준비하기 위해 비싼 기계도 사고, 면허도 두 개나 받아야 했다. 병도 아무거나 사용하고 싶지 않아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공병 제조사에 의뢰해 주문 제작했다.



5. 맥락: 스트롤만의 스토리를 입히다

상품을 맥락 있게 제안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디오 매장에 음반을 놓는 것은 맥락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남성 고객에게 ‘클래식을 들으라’고 제안하고 싶다면, 그에 필요한 기기와 콘텐츠를 놓는 것이 맥락이다. 남성 고객에게 요리를 권하고 싶으면 앞치마를 소싱한다. 제안의 대상도 맥락에 포함돼 있다. 예컨대, 야구글러브를 스포츠용품 코너가 아니라 아이용품 코너에 놓았다는 것은 ‘게임보다는 밖에 나가 놀게 하라’는 제안을 담은 행위다. 맥락은 스트롤이 고객을 구분하는 방식에도 반영돼 있다. 스트롤은 고객을 아동, 청년, 중년 이런 숫자로 대표되는 연령이 아니라 영화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에 나오는 재키, 토니, 빌리 엘리어트의 캐릭터에 착안해 분류했다. 아버지를 위한 제안을 할 때는 재키, 청년을 위한 제안을 할 때는 일과 사랑을 중시하는 토니, 아동을 위한 제안을 할 때는 꿈 많은 빌리를 떠올리자고 제안했다.

스트롤이 선택한 제품들에는 ‘Every brand comes with a story’라는 모토에 따라 스트롤만의 스토리를 담았다. 스트롤의 모든 제품 옆에는 스토리가 함께 소개돼 있다. 예컨대, 에어론 체어(Aeron Chair)에는 필자가 과거에 창업을 하던 당시, 이 의자를 구입했던 경험을 적었다. 당시 임원들 의자만 에어론 체어로 사고 나머지는 보통의 사무실 의자를 구입했는데 10년이 지나고 난 후 새것처럼 남아 있던 것은 오로지 하나, 에어론 체어였다. 매일 최고 20시간까지 앉아 일하는 필자가 현재 쓰고 있는 의자도 에어론 체어다.

세르주무이에는 필자가 세르주무이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지인인 구재상 케이클라비스(KCLAVIS) 대표의 사진과 그의 스토리를 적었다. 세르즈무이 조명을 켜고 끄는 ‘딸깍’ 소리는 1950년대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준다.


6. 산책은 계속된다

지난 8개월간 스트롤을 운영하면서 가장 기뻤던 점은 필자가 매장에 담고자 했던, 제안이라기보다 교육에 가까웠던 소비 철학, 즉 하나를 사도 무리해서 좋은 걸 사는 게 아끼는 것이라는 원칙이 소비자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는 점이다. 매장을 방문한 많은 사람은 인스타그램에 자발적으로 후기를 남기면서 우리 공간과 그에 담긴 필자의 취향에 열렬한 지지를 표시했다. 일례로 옥승철 작가의 그림을 새긴 쇼핑백은 고객들의 요청으로 액자 서비스까지 시작했다.

물론 필자의 생각은 현실에서 다르게 흘러가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스트롤이 제안한 상품 사진들을 자발적으로 찍어 SNS에 올리면서 ‘다 사고 싶다’ ‘돈 벌면 사고 싶다’ ‘주머니 열릴 뻔했는데 참았다’라고 올렸다. 상품은 마음에 들지만 구입의 문턱은 높다는 얘기다. 또 광교라는 입지 핸디캡도 분명했다. 매장을 오픈한 뒤 SNS 등 공개적으로 가장 많이 받은 피드백이 “서울에도 내주세요” “부산에도 내주세요” “광교로 이사 가고 싶어요”였다. 이 얘기는 바꿔 말하면 “광교에서 안 살아서 가기 어려워요”였다.

그래서 최근 오픈 당시의 철학을 조금 양보해 VIP들을 위한 온라인 사이트(strol.co.kr)를 열었다. 또 내 경험에 비춰 남성들에게 쉴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매장 내 스펜서룸을 만들었는데 현실적으로 한국 남자들은 퇴근 후 동네 매장에서 어슬렁거릴 여유가 없었다. 오히려 남성보다 여성 고객들이 이런 공간에 열광했고 고객도 여성이 월등히 많다. 매일 자주 방문하는 로컬 고객에 집중하다 보니 매장을 자주 바꿔야 해서 비용 대비 효율이 떨어지는 문제도 여전히 고민거리이다. 그렇다고 매일 바뀌는 뜨내기 고객에게 초점을 맞추다 보면 로컬 고객이 심드렁해질 것이다. 역시 오프라인 매장의 가장 큰 도전은 비용이라는 점을 매번 확인하고 있다.


이 같은 문제들은 스트롤이 오프라인 로컬 매장으로서 해결해 나가야 할 숙명이다. 온라인은 버그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수고가 들긴 하지만 하나의 솔루션으로 수백만 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오프라인 매장은 한 가지 문제를 수정해도 고객 만족에 기여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방문 고객을 위해 매일 미세한 조정을 해나가야 한다. 특히 주변의 한 사람이 여러 번 방문하길 기대하는 로컬 숍의 경우 더욱 그렇다.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이 달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점은 ‘잘 팔리는 것을 둘 것인가’ ‘우리가 팔고 싶은 것을 둘 것인가’에 대한 필자의 답은 아직까지 후자라는 것이다. 오프라인 숍이 남들과 같아지는 순간 그저 개성이 없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의 의미가 없어진다는 게 스트롤의 철썩 같은 믿음이다. 스트롤 매장의 미션은 좋은 물건을 가져다 파는 것이 아니라 ‘Back to Offline’, 구태여 그곳에 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 가는 산책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필자는 이런 재무적인 미션을 매장 책임자에게 전했다. “고정비에 관해서는 10원이 늘더라도 벌벌 떨어라. 하지만 매장을 매력적으로 바꾸기 위해 투자해야 할 비용이 있거든 1억 원도 아끼지 말아라.”


DBR mini box II: 2020년에도 스트롤의 실험은 계속된다

2020년에는 스트롤이 경험한 한계들을 극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새 방침을 정했다. 먼저, ‘연역적 소싱’을 지향한다. 연역적 소싱이란 필자가 편의상 이름을 붙인 개념으로 어떤 구체적인 아이템을 소싱할지 먼저 정하고 그 아이템 중 최고의 제품을 찾아 나서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MD가 주민들에게 앵클부츠 하나씩은 꼭 장만하라고 제안하고 싶다면 앵클부츠를 진열할 자리를 미리 비워 두고 어느 브랜드의 앵클부츠가 가장 좋은지 찾아내 입점을 시키는 식이다. 여의치 않으면 직접 제작이라도 한다. 일반적으로 구두 브랜드를 입점시키면 그 안에 평균적인 품질의 다양한 종류의 부츠가 패키지로 들어온다. 그런 기존 방식보다는 고단하더라도 하나하나 우리가 꼭 제안하고 싶은 수준의 제품들로 채울 생각이다. 그렇게 선택한 제품은 위탁이 아닌 사입 방식을 고수해 판매를 온전히 책임질 계획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어디서도 팔지 않는 브랜드를 발굴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이미 알려진 브랜드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우리의 취향을 담아 선택하는 일을 더 늘려나갈 생각이다. 말 그대로 우리의 취향을 판매하는 것이다.

해외에 있는 인재들과 MD 파트너십을 맺고 그 리소스를 이용해 그 도시의 특색 있는 로컬 브랜드와 콘텐츠를 스트롤에 소개하는 해외 MD 시스템을 활용할 예정이다.

또 오프라인은 온라인보다 단골손님의 기여가 큰 영역인 만큼 단골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VIP에게 마진을 최대한 낮춘 가격을 제안하는 온라인 카탈로그도 만들었다. 다른 지역으로 매장도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기업 직원이나 고객들에게 크고 작은 선물을 할 때 솔루션을 제시하는 서비스도 준비 중이다. 고객의 목적에 맞게 선물을 커스터마이즈하고 필요하면 선물에 동봉될 편지까지 작성해주는 B2B가 아닌 일명 ‘Shop to B’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필자소개 
여준영 스트롤 대표 hunt@prain.com
여준영 대표는 2000년 PR 회사 프레인글로벌을 창업해 연예기획사인 프레인TPC를 포함해 9개 계열사를 갖춘 컨설팅 종합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2018년 남성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스트롤(STROL)을 열면서 처음으로 리테일 비즈니스에 뛰어들었다. 공연제작자가 매일 그날의 공연이 끝날 때마다 리뷰 노트를 작성하듯이 매장 현장을 리뷰하면서 하루하루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정리=배미정 기자 soya1116@donga.com


SR2. Interview: 글로벌 스포츠 업체 데카트론의 토니 레옹 CTO

구매 공간이 아닌 경험 공유 커뮤니티로
e-커머스가 할 수 없는 것에 집중

Article at a Glance
e-커머스의 습격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오프라인 매장을 확대하고 있는 글로벌 스포츠 업체 데카트론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모바일 체크아웃 시스템, 로봇 탈리 등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서 오프라인 매장 직원들의 고객 응대 역량을 강화했다.

2. 가성비와 커뮤니티 전략을 결합해 제품 생산 단계에서부터 고객 경험을 반영하는 구매 여정을 설계했다.


3. 매장 직원들이 직접 실험을 통해 혁신 경험을 다른 매장에 전파하도록 함으로써 변화를 안착시켰다. CTO가 경영진과 이사회를 교육하고 설득해 이 같은 변화에 추진력을 더했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이성근(동국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2019년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마켓스트리트에 위치한 ‘데카트론 랩(Decathlon lab)’ 매장. 매장 문을 열고 들어서니 키가 170㎝쯤 돼 보이는 막대 로봇 탈리(Tally)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로봇은 혼자서 매일 770㎡ 남짓 되는 매장을 돌아다니며 80여 개 종목의 스포츠용품 재고 수십만 개를 체크한다. 매장 직원 6명이 하루 종일 매달려야 마칠 수 있는 작업을 로봇 한 대가 거뜬히 해내고 있는 셈이다. 매장 중앙에 디귿(ㄷ) 모양의 워크스테이션 4대가 있고, 여기엔 ‘체크아웃(Checkout)’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장바구니가 설치돼 있다. 이 바구니에 매장에서 고른 RFID(무선 주파수 인식 시스템)가 부착된 제품을 담고 QR코드를 찍으면 데카트론 애플리케이션을 탑재한 스마트폰에서 결제까지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 바퀴가 달린 워크스테이션은 일종의 움직이는 계산대로 어디든지 이동할 수 있다. 고객은 스마트폰으로 1분이 채 안 걸려 결제를 마칠 수 있다. 회사 입장에서는 계산대에 직원을 배치할 필요가 없고, 고객들은 계산하기 위해 줄 서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서 이득이 ‘실험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곳 매장은 데카트론이 최근 야심 차게 도입한 디지털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었다. 토니 레옹 데카트론 미국의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이제 매장 직원들은 계산대를 지키거나 재고 관리를 하는 대신 매장을 돌아다니며 고객을 직접 응대하고 불편 사항을 해결한다”고 말했다.

글로벌 스포츠 스토어 데카트론은 아마존을 필두로 e-커머스가 급성장한 지난 5년 동안 견고한 성과를 내면서 대형 유통업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매출도 2015년 91억 유로(11조7114억 원)에서 2018년 113억 유로로 약 24% 성장했다.1

디지털과 오프라인을 연결하는 옴니 채널 전략을 펼침으로써 오프라인 매장에서 온라인 몰이 따라올 수 없는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DBR(동아비즈니스리뷰)이 토니 레옹 CTO를 샌프란시스코 데카트론 랩 매장에서 만나 데카트론의 혁신 노하우를 들었다.



토니 레옹(Tony Leon) CTO는 프랑스 렌공과대(IUT GEII de Rennes)에서 전기, 전자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고 프랑스 ESEO 대학원에서 정보기술 전자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6년 데카트론에 입사해 다양한 프로젝트의 엔지니어를 이끌었으며, 2012년 데카트론 인도(Decathlon Sports India)의 CTO로 승진해 인도 시장 개척을 위한 정보 시스템을 구축했다. 2020년 현재 데카트론 미국(Decathlon USA)의 CTO로 온·오프라인 채널을 연결하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전략을 총괄하고 있다.


디지털 기반 유통업체들이 오프라인 매장에 기반한 유통업체들을 위협하고 있다. 데카트론은 이 위기를 어떻게 평가하고, 대처했나?

아마존 같은 거대한 전자상거래 업체들이 소비자의 쇼핑 습관을 바꿔놓았다. 이제 소비자들은 직접 매장에 가지 않아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제품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또 온라인에서 모여서 저렴하게 공동 구매하는 소셜쇼핑(Social Shopping)까지 확산되고 있다. 이런 변화는 데카트론처럼 오프라인 매장을 중심으로 비즈니스를 확대해 온 전통 유통기업에는 큰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다음의 3가지 질문을 던지고 현실을 파악했다. 첫째, 우리가 여전히 고객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나? 둘째, 우리 제품의 접근성은 여전히 좋은 편인가? 셋째, 고객과의 소통이 잘 이뤄지고 있는가? 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면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해야 하는지 등을 고민했다. 그 결과가 데카트론의 새로운 ‘비전’이 됐다.


데카트론이 새롭게 세운 비전은 무엇인가?

오프라인 매장의 사회적(social)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다. 우선, 고객과 직원의 관계부터 재설정했다. 과거 오프라인 매장의 기능은 재고를 보관하는 장소였다. 소비자는 매장에 진열된 제품을 보고 그 물건을 구매해 집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현재 오프라인 매장의 기능은 다르다. 소비자들은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매장을 방문하기 때문이다. 매장 직원들의 역할은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고 상담해주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데카트론 샌프란시스코 지점에 시범적으로 탈리 로봇이나 무인 계산대를 설치하는 등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것도 직원들이 계산이나 재고 관리 같은 업무에서 벗어나 고객들과 함께 소통하고 제품을 설명해주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더 나아가 지역 사회와 연계해 매장의 커뮤니티 기능을 강화했다. 오프라인 매장은 더 이상 구매를 위한 공간이 아니다. 고객들이 제품이나 서비스를 경험하고 그 경험을 공유하는 생활 공간으로 기능이 바뀌고 있다. 데카트론은 기존 스포츠용품 매장을 스포츠를 체험하고 배우고, 이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커뮤니티’로 바꿔나가고 있다.

DBR mini box I



데카트론은 1976년 프랑스 릴(Lille)시에 첫 매장을 열었다. 스포츠 애호가인 미셸 레크락(Michel Leclercq)이 동료들과 함께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스포츠(Make sports more accessible to everyone)’라는 기치 아래 창업했다. 창업 목표는 ‘양질의 스포츠 기구와 용품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겠다’였다. 1986년 자체 제작한 브랜드의 제품을 내놓기 시작하면서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했다. 현재는 육상, 수영, 요가, 스키, 사냥 등 수십여 가지의 스포츠 종목에 필요한 제품을 24개 자체 브랜드로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 2019년 4월 기준 데카트론은 전 세계 54개국 870개 도시에 1520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전 직원 수는 약 9만여 명 정도다. 2018년 매출은 128억 달러(약 14조8500억 원)를 기록했다. 한국에는 2019년 9월 인천 송도에 첫 매장을 열었으며 하남 스타필드 등 2개 매장이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커뮤니티 기능을 강화하고 있나?

고객들이 운동을 실제로 즐기고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매장을 활용하는 것이다. 배드민턴 경기장을 만들어 배드민턴을 칠 수 있도록 하고, 매장 밖에 축구장을 마련해 고객들이 친구들과 함께 축구를 즐길 수 있도록 한다. 그뿐만 아니라 처음 스포츠를 접하는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운동에 접근할 수 있도록 전문가들이 가르쳐주는 프로그램도 도입했다. 이 과정에서 고객들은 스포츠 제품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운동을 함께하는 동네 친구도 만들 수 있다. 사람들 간의 교류, 공감이라는 무형적 요소를 매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심기 위해 노력했다. 2019년 한국에 처음 연 인천 송도 매장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누구나 무료로 참여할 수 있는 요가, 조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매장 밖에 농구나 축구를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커뮤니티 기능이 데카트론의 성장에 어떻게 도움이 될까?

많은 사람이 데카트론을 이케아에 빗대어 설명한다. 수십만 가지의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느낄 것이다. 실제로 데카트론은 수십 년간 가격에 초점을 맞춰왔다. 하지만 우리처럼 다양한 물건을 판매하는 회사일수록 고객이 ‘경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케아가 모든 매장을 실제 집과 같은 공간으로 꾸밈으로써 고객들이 이케아 제품을 사용했을 때 실제 자신의 집이나 방이 어떻게 변하는지 체험해볼 수 있게 만든 것처럼 말이다.

데카트론도 마찬가지다. 실제 우리 제품을 경험할 수 있는 스포츠 공간을 마련해 우리 제품을 제대로 알고 활용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렇게 경험해 본 운동에서 재미를 느낀 고객은 또다시 우리 매장을 찾을 것이다. 정기적으로 운동을 즐기게 되면 자연스럽게 스포츠용품이 추가로 필요하게 되고 다시 데카트론을 찾게 된다. 고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그것을 통해 파생되는 판매 기회를 기대한다.

데카트론 인도 지점에서 실제 이런 실험의 효과를 증명했다. 인도는 아직 스포츠 활동이 많이 보급되지 않은 곳이다. 인기 종목도 제한적이다. 데카트론 내부에서 어떤 스포츠용품을 시도해 볼까 고민하다가 ‘롤러스케이트’로 타깃을 정했다. 내부에선 반대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롤러스케이트를 탈 줄 아는 사람이 적은데다 도로가 울퉁불퉁해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공간도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우선 시험해보기로 했다. 매장 앞에 아이들이 롤러스케이트를 무료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는데 반응이 예상외로 좋았다. 아이들이 매일같이 롤러스케이트를 타러 왔고, 그 숫자도 점차 불어났다. 자연스럽게 롤러스케이트 관련 제품의 판매가 늘어났다.


커뮤니티 기능에 투자하다 보면 데카트론의 가성비 전략이 약화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가성비 전략은 데카트론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이고, 계속해서 유지해야 하는 경쟁력이다. 데카트론은 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항상 다른 유명 스포츠 브랜드에서 출시한 같은 품목의 제품 가격과 비교해 화제가 됐다. 예를 들어, 나이키 레깅스를 구매할 돈으로 데카트론에서는 레깅스와 스포츠브라와 셔츠, 가방, 매트까지도 구매할 수 있다고 비교한다. 이런 마케팅 방식과 가성비 높은 제품들에 고객들이 열광하고 있다.

이런 가성비 전략은 고객 데이터를 활용했을 때 지금보다 훨씬 더 강화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상품에 결함이 있을 때 그 결함을 고객과의 직접적인 소통으로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다면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제품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고객 정보나 의견을 활용해 실제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개발해 판매할 수도 있다. 이를 위해서 데카트론은 온라인 멤버십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고객들에게 멤버십 가입을 독려한다. 고객들이 이런 멤버십 가입을 싫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는 기업이 고객 정보를 이용해 이득을 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데카트론은 고객 정보를 습득하면 지금보다 더 질 좋은 상품을 더 낮은 가격에 판매하는 데 활용할 것임을 충분히 설명한다. 또 구매한 상품을 7일 동안 집에서 체험할 수 있고, 반품 기한을 1년으로 늘려주는 혜택도 제공한다.

무인 계산대나 탈리 로봇도 고객을 좀 더 자세하게 파악하는 데 활용한다. 고객이 스마트폰을 통해 구매하면 이 고객 데이터는 고스란히 데카트론 데이터로 확보된다. 재고 관리를 통해 언제, 어떤 고객들이 방문했는지도 알 수 있다. 확보된 고객 데이터를 분석해 제품 구성, 제품 개발을 보다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은 궁극적으로 좋은 제품을 생산하고 가격을 낮추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다.

커뮤니티 기능은 데카트론의 설립 취지, 즉 모든 사람이 쉽게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하자는 비전과도 맞닿아 있다. 과거에는 소비자가 가성비 하나 때문에 구매했다면 현재는 저렴한 가격과 경험을 결합해 새로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결합하면 데카트론만의 구독 서비스도 계획해볼 수 있을 것이다. 넷플릭스처럼 매월 일정 금액을 내면 다양한 스포츠용품을 사용해보고 스포츠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예컨대, 수영을 처음 배우는 사람은 앱에서 데카트론의 수영 코치를 찾아 입문자에게 필요한 수영용품과 레슨을 추천받을 수 있다. 축구를 하고 싶은 고객은 앱에서 데카트론 멤버들이 꾸린 축구클럽을 찾아 가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구독 서비스는 글로벌 단위로 확대될 수도 있다. 최근 1∼2달 장기 여행자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들은 해외 각 지역에서 특색 있는 스포츠를 즐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잠깐 스포츠를 즐기기 위해 비싼 스포츠 장비를 사기는 매우 부담스럽다. 이때 멤버십만 있으면 데카트론 매장에 들어가 필요한 스포츠용품을 빌려서 쓰고 반납할 수 있다. 데카트론은 제품과 커뮤니티, 글로벌 네트워크를 결합함으로써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다른 글로벌 브랜드도 비슷한 서비스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데카트론의 시스템은 다른 경쟁사에서 쫓아오기 힘들 것이다. 데카트론은 모든 매장이 하나의 매장으로 연결돼 있고, 같은 정책을 적용한다. 이로써 데카트론 고객은 세계 어떤 지점에서든 똑같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고객이 한국 지점에서 운동화를 샀더라도 이 운동화를 들고 프랑스 파리 매장에 가져가서 환불받을 수 있다.

또 데카트론은 고객 맞춤형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나이키, 아디다스 같은 글로벌 브랜드들은 본사가 기획하고 개발한 제품만을 내놓는다. 아무리 고객이 원하더라도 그 브랜드가 관련 종목 스포츠용품을 팔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하지만 데카트론은 현재 판매하는 제품이 아니더라도 고객의 요청이 있으면 새로운 제품을 개발해 내놓는다. 고객을 그만큼 더 이해하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구독 서비스는 브랜드 영향력이나 인지도가 전부가 아니다. 고객과 좋은 관계를 맺고 이들을 잘 파악하는 기업이 성공할 수 있다.


데카트론이 다른 리테일 기업보다 좀 더 신속하게 변화를 이뤄낼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데카트론은 매우 혁신적인 기업이다. 우리는 스스로 수십만 가지 제품을 기획해서 개발하고 생산하는 역량을 갖고 있다. 고객 의견을 반영해 데카트론만의 특허 제품을 내놓을 수 있었던 배경이다. (DBR minibox Ⅱ ‘데카트론이 개발한 인기 제품 베스트 3’ 참고). 빠르게 고객 의견을 반영하고 이를 실행하는 조직문화가 오래전부터 데카트론 내에 자리 잡고 있다. 2014년부터 시행한 오픈 이노베이션 플랫폼 ‘데카트론 크리에이션(Creation)’이 대표적인 예다. 데카트론 제품을 사용해본 적이 없어도, 스포츠 전문가가 아니어도 누구든지 이 온라인 플랫폼에 신제품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 있다. 아이디어는 30일 동안 노출되며 데카트론 직원들을 포함해 이 플랫폼에 참여하는 사람 누구나 아이디어에 의견을 내고 투표할 수 있다. 100개 이상의 찬성 의견을 받은 아이디어는 채택이 되고 아이디어 제안자는 데카트론 제품개발 담당 직원들과 화상회의에 참여하게 된다. 아이디어 제안자는 이후 제품 디자인, 기술적 보완 사항, 가격 책정 등 제품 개발 과정 전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다.

데카트론은 처음부터 완벽한 제품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고객이 가치를 느낀다면 불완전해도 도전하고 그것을 완성해 나가는 유연성을 지니고 있다. 오랜 기간 학습한 조직문화가 최근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다.

DBR mini box II: 데카트론이 개발한 인기 제품 베스트 3

데카트론이 고객 의견을 반영해 자체 연구 개발, 생산한 제품 중 가장 인기 있는 대표 제품 3가지를 소개한다.




1. The Easy Breath Mask
기존 스노클링 제품은 입으로만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불편을 호소하는 고객들이 많았다. 데카트론 디자인팀은 물속에서 코로도 숨을 쉬면서 스노클링을 즐길 수 있는 마스크를 개발했다. 물안경과 튜브를 별도로 착용할 필요 없이 간편하게 마스크만 착용하면 된다.

2.The Two Second Pop-up Tent
접힌 텐트를 펼치기만 하면 2초 만에 완성되는 제품이다. 텐트의 부품이 모두 일체형으로 부착돼 있기 때문에 일일이 조립할 필요가 없다. 텐트를 철수할 때도 바로 접어서 가방에 넣기만 하면 된다. 간편함과 가벼움 덕분에 많은 캠핑 애호가가 구매했다.

3.Quechua Backpack
10리터 용량의 3.99달러짜리 산행용 백팩이다. 가방에 들어가는 소재와 부품을 최소화하는 디자인을 고안해 초저가 백팩을 개발했다.



기존 업무 수행 방식에 익숙했던 직원들이 변화를 거부하거나 외면하진 않나?

별로 없었다. 그 이유는 데카트론이 훌륭해서도, 다른 회사보다 뛰어나서도 아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단위의 변화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전사적으로 디지털화를 실행하거나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는다. 각 매장은 자율적으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혁신을 시도한다. 그리고 새로운 시도가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졌을 때 다른 지점으로 이를 확산한다. 그래서 새로운 기술이나 서비스가 도입되더라도 매장 직원들의 저항이 적은 편이다. 데카트론 직원들은 한 매장이나 지역에 머물지 않는다. 회사 차원에서 계속해서 다른 지역과 매장을 경험하길 권장한다. 직원들이 경험한 것을 그들이 동료직원들에게 직접 이야기할 때 가장 설득력이 높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안톤이라는 샌프란시스코 매장 매니저는 프랑스 파리에서 파견된 친구인데, 매장의 무인 계산대 서비스를 관리하고 있다. 그가 이 새로운 시도를 효과적이라고 판단한다면 다시 파리로 돌아갔을 때 이 서비스를 도입하자고 제안할 것이다. 처음엔 다들 생소하겠지만 안톤이 직접 경험한 것을 들으면 변화를 수용하기 쉬워질 것이다. 직원들에게 절대 새로운 시도나 변화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경험을 토대로 ‘설득’하면서 점진적인 방식으로 변화를 이뤄나가야 한다.


실제 디지털화를 추진하는 조직은 어떻게 이뤄져 있는지 궁금하다.

경영기획 부문과 IT 부문 인력이 하나의 팀으로 활동하고 있다. 과거에는 전략기획 부서 직원들이 중간에서 IT 부서와 매장 실무진을 중개하는 역할을 했다. 기획팀 직원들이 실무진 이야기를 들으면 이를 IT 부서에 전달해 시스템에 반영하는 구조였다. IT 부서가 의견을 주면 다시 이 의견을 기획부서가 실무진에게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흘려 버리게 되는 정보나 이야기들이 있었다. 실무진끼리 제대로 된 소통이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결과가 나왔다. 현재는 이 장벽을 허물고 프로덕트 매니저(PM) 중심으로 모두 한 팀으로 일한다. 예를 들어, 고객을 위한 앱을 만드는 PM은 매장 근무 직원, 마케팅 부서 직원, IT 엔지니어 등과 언제나 허물없이 직접 이야기할 수 있다. 직원들을 위한 앱을 만드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 이 앱을 만드는 PM들끼리도 소통해 각기 다른 앱이 서로 효율적으로 구동할 수 있도록 협의한다. 이용자 중심의 간편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조직을 개편한 것이다.


데카트론의 혁신 과정에서 CTO는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

CTO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경영진과 실무진을 연결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영진을 교육하는 것은 CTO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다. 사실 새로운 혁신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기 위해선 경영진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이들이 디지털 기술과 디지털 혁신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데카트론에서는 경영진과 이사회가 디지털 기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제공하고 있다. 이사회 멤버·경영진을 초청해 스타트업들을 직접 만나고 이들이 업무를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지 경험하는 자리를 정기적으로 마련한다. 이를 통해 현재 우리의 잠재적 경쟁자들이 얼마나 빠르게 제품을 기획하고, 개발하고, 제품화하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그리고 데카트론 실무진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새로운 혁신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샌프란시스코=이미영 기자 mylee03@donga.com
동아비즈니스리뷰 298호 Future Mobility 2020년 6월 Issue 1 목차보기


SR1. re:Store (리:스토어): 지속가능한 오프라인 채널 전략

“여기서 신어 보고 온라인으로 주문하세요”
매장의 정체성을 재정의하

Article at a Glance
리테일 아포칼립스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오프라인 중심 리테일러들의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오프라인 채널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미래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다만 오프라인 채널의 존재 이유는 과거와 달라져야 한다.

1. 오프라인 채널은 RaaS 모델을 진화시켜 소비자들에게 다양한 기술이 접목된 색다른 소비 경험과 브랜드의 큐레이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2. 고급화된 인더스트리얼 스타일에 스토리와 역사를 담아 고객에게 ‘힙’한 경험을 선사해야 한다.


3. 매장의 쇼룸화로 운영 비용을 줄이는 동시에 고객 편의성을 높여야 한다.


첨단 기술이 리테일 영역에 들어오면서 오프라인 리테일의 종말을 의미하는 ‘리테일 아포칼립스(Retail Apocalypse)’라는 표현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만큼 오프라인 중심의 리테일러들의 위기감이 커졌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간과하고 있는 사실 중 하나는 오프라인 채널은 현재도, 미래에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이다. 본 글에서는 오프라인 매장의 위기, 역할, 그리고 새롭게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전략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Chapter 1은 끝났다

지난 몇 세기 동안 리테일은 ‘빅 박스 스토어(Big Box Stores)’로 대변됐다. 빅 박스 스토어란 매장 외형이 큰 박스형인 대형 리테일러를 일컫는 표현으로, 대규모 상품 셀렉션이 구비돼 있어 원스톱 쇼핑이 가능한 월마트의 비즈니스 모델이 리테일의 바이블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오프라인 매장의 심각한 위기설이 대두되며 지금까지의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의문이 제시되는 한편 새로운 전략적 접근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미국에서는 2017년부터 2018년 초까지 토이저러스(Toys “R” Us)와 130년 역사를 가진 시어스(Sears)백화점 등이 파산하는 등 1만5000여 개의 매장이 문을 닫았다. 1

2019년에도 1977년 창업 이후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시장까지 진출한 슈퍼 프리미엄 그로서리 딘 앤 델루카(Dean & Deluca)나 글로벌 패션 브랜드 포에버21(Forever 21)이 파산을 신고했다. 비즈니스 인사이더에 따르면 2019년에 무려 9300여 개 매장이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된다. 2

이런 상황은 크게 아마존을 중심으로 하는 온라인과 모바일 리테일의 성장, 이탈리(Eataly) 같은 트렌디한 푸드홀 중심 마켓의 확산, 알디와 트레이더 조 같은 하드 디스카운트(Hard discount)의 확장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다. 더구나 고객들의 요구는 더욱더 까다로워졌고, 밀레니얼과 Z세대 같은 젊은 소비자들의 브랜드 충성도는 이전 세대들보다 훨씬 낮다는 특성을 지닌다. 한국에서도 신선식품의 새벽배송 전쟁은 물론이고 참치 캔 하나, 음료수 한 개 등 초소량도 배달해주는 배달의민족의 B마트까지, 사방에서 오프라인 매장의 영역을 침범해오는 온라인과 모바일, 그리고 플랫폼 비즈니스가 경쟁을 심화시키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굵직굵직한 브랜드들, 특히 오프라인 중심 기업의 고민이 커졌다. 결국 미국도 한국도 향후 10년을 책임질 새로운 패러다임, 그중에서도 오프라인 중심의 브랜드가 취해야 할 전략이 절실해진 것이다.


오프라인은 현재도, 미래에도 여전히 중요한 채널

오프라인 중심의 브랜드들이 위기에 처한 것은 사실이지만 리테일에서 오프라인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중요한 채널로 존재할 것이다. 국가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80∼90%의 매출이 오프라인에서 나온다. 미국의 경우 전체 리테일의 12% 정도를 온라인이 차지하고, 그 온라인 중의 40%를 아마존이 차지한다. 한편 아마존을 포함해 다양한 온라인 리테일러가 오프라인 매장을 열거나 매장 수를 늘리고 있다. 아마존은 오프라인 서점(아마존 북스), 4-스타 큐레이션(별점 5점 중 4점 이상만 받은 상품들로 구성된 큐레이션 매장), 홀푸즈마켓 인수 이외에도 2020년 상반기에 아마존 자체 슈퍼마켓을 오픈할 예정이다. 무인 매장 아마존고는 2022년까지 2000여 개를 넘길 계획이다. 그런가 하면 안경의 와비파커(Warby Parker), 매트리스의 캐스퍼(Casper), 남성복의 보노보스(Bonobos) 등 온라인 기반 스타트업들도 오프라인 소매업을 적극적으로 확대하는 추세다. 스타벅스가 온라인에서 커피와 머그, 텀블러 같은 굿즈 판매를 중단한 것도 오프라인 소매 매장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고객 측면에서도 오프라인의 역할은 더 중요해질 것이다.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밀레니얼 소비자들은 대기업 브랜드보다 로컬 색을 지닌 브랜드를 선호하고, 특히 Z세대도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 쇼핑을 즐겨한다고 한다.3 물론 그들이 하는 오프라인 쇼핑은 이전 세대들의 쇼핑과 다르다. 이전 세대들이 습관적으로 오프라인 매장을 찾는 반면, Z세대는 쇼핑 자체에 몰입해서 물건을 경험해보고 동행과 사회적 교류(socialize)를 하기 위해 매장을 찾는다. 어떤 면에서는 디지털 디톡스(detox)의 목적으로 매장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한국의 Z세대들은 성수동처럼 공장을 개조해 낡고 거친 느낌의 인더스트리얼 스타일 매장처럼 ‘본인에게’ ‘힙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이전 세대들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종합해보면, 오프라인이 위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리테일 비즈니스의 특성상 또한 인구·소비 세대의 변화를 고려할 때도 오프라인 매장은 앞으로도 중요한 쇼핑 채널로 존재할 것이다.


“그럼 오프라인 매장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필자의 저서 『리테일의 미래』가 출간되고 기업 강연과 인터뷰 중에서 들었던 질문 중에 가장 마음에 걸렸던 말이다. 그런데 비슷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마음 한편에 답답함이 느껴졌다. 우리나라 오프라인 매장의 특성상 백화점·일반 매장 상관없이 좁은 매장 공간에서 오프라인 특성을 차별화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만큼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문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현재의 위기가 꼭 오프라인 중심의 브랜드들이 변화와 혁신을 안 해서 생긴 것일까? 사실 다양한 양상으로 오프라인 매장들이 많은 투자와 혁신을 시도했고, 또 시도하는 중이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오프라인 매장들에게 닥친 위기감이 리테일 아포칼립스를 대변하는 것처럼 심각한 상황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이유는 몇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로는 붉은 여왕 이론(Red Queen’s Theory)4 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붉은 여왕 이론 또는 붉은 여왕 효과로 불리는 이 이론은 어떤 대상이 변화하더라도 주변의 환경이나 경쟁 대상도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뒤처지거나 제자리에 머물고 마는 현상을 말한다. 리테일 문맥에 적용하면 온·오프라인 리테일러 모두 변하고 있는데 오프라인 매장들의 변화가 온라인과 소비자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다. 즉, 지금까지 한번도 마주하지 못한 리테일 생태계의 격변 속에서 치열한 경쟁에서의 변화의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늦기 때문에 파생된 결과가 지금 오프라인 매장들이 겪고 있는 위기가 아닐까. 또 혁신의 양상에서도 소비자들에게 매장을 찾아야 하는, 굳이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 매장을 방문해야 할 관련성과 이유를 제시하는 데 부족했던 건 아닐까. 바로 지금, 오프라인 매장들은 하루라도 빨리 전략적으로 소비자의 경험 측면에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오프라인 비즈니스의 생존 전략

전통적으로 오프라인 매장들은 다음의 몇 가지 혜택을 제공한다. 오프라인 매장은 상품을 직접 만져보고, 구입한 상품을 바로 가져갈 수 있고(instant gratification), 직원과의 상호 작용(interaction)이 가능하고, 지인들과 사회적 교류(socialize)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지금까지의 매장에 대한 시각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바라봐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리:스토어’해야 한다. 오프라인 매장에 방문해야 하는 이유들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고객들에게 온라인과는 차별화된 어떤 ‘가치(Value)’를 제공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전략이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크게 3가지 정도로 살펴보겠다.


1.맥킨지가 오프라인 매장을 오픈했다? Retail as a Service(RaaS)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RaaS란 용어는 리테일 업계에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앞으로는 어떤 식의 RaaS로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는 매장을 만들어야 할까? 필자는 이제 단순히 공간을 제조사들의 전시장으로 이용하는 식의 RaaS보다 진화한 다양한 기술이 접목된 소비 경험을 제공해 소비자들을 매장으로 유입시키는 모델, 반면 브랜드는 고객 행동 데이터에 중점을 두고 브랜드의 큐레이션까지 담당하는 비즈니스로 진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예로 맥킨지(McKinsey & Co)의 오프라인 매장을 살펴보자. 너무나 의아한 일이겠지만 포천지5 에 따르면 맥킨지는 2019년 9월 미국 미네소타에 있는 몰 오브 아메리카(Mall of America)에 오프라인 매장을 오픈했다. 이 매장의 이름은 모던 리테일 컬렉티브(Modern Retail Collective)이다. 약 3000평방피트(약 70평) 규모의 매장에서는 주얼리 브랜드 켄드라스콧(Kendra Scott), 속옷 브랜드 서드러브(Third Love), 엘레베코스메틱(Elevè Cosmetics) 등 다양한 브랜드의 제품이 갖춰져 있다.

맥킨지가 왜 이 매장을 론칭했을까? 맥킨지는 이 매장을 각종 기술과 브랜드 상품을 경험할 수 있는 리테일 랩(lab)으로 이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디지털 기반의 스타트업과 소형 브랜드 중심으로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다양한 기술을 쇼핑에 접목했다. 켄드라스콧 주얼리의 경우 원석에 무선인식(RFID)칩이 심어져 있어 소비자들이 직접 다양한 원석과 프레임 중 원하는 디자인의 조합으로 맞춤형 팔찌를 선택하고, 증강 현실(AR)로 완성된 팔찌 모습을 구현할 수 있다.

천연 화장품 엘레베의 성분을 알기 위해서는 스마트폰으로 NFC(근거리 무선통신) 패드를 터치하면 된다. 이런 기술들은 리테일넥스트(RetailNext), 지브라테크놀로지(Zebra Technologies),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같은 16개 테크 회사와의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운영되며, 입점 브랜드와 인테리어도 3∼4개월에 한 번씩 변화를 줄 예정이다. 즉, 매장에서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소비자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데이터로 수집할 뿐 아니라 챗봇으로 소비자의 구입 동기 또는 왜 구입하지 않고 매장을 떠났는지 등 소비자 쇼핑 경험에 대한 정교한 통찰을 얻고 이를 쇼핑 경험을 개선하기 위해 이용할 계획이다.

맥킨지의 접근 방법은 RaaS와 흡사하지만 리테일러뿐 아니라 컨설팅 회사처럼 소비자 인사이트를 얻기 위한 공간으로도 이용될 수 있다.

사실 RaaS의 시조라고 볼 수 있는 매장은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는 b8ta(베타)라는 리테일러다. 보통 기술의 시험 버전을 베타 버전이라고 부른 것에 착안해 지은 베타(b8ta) 매장에 가보면 스타트업들이 개발한 신기한 상품들을 만날 수 있다. 필자 역시 뉴욕 메이시스백화점에 입점한 베타 매장을 방문해 보니 작은 공간 안에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신기한 상품들이 많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한 경험이 있다. 이들이 시도한 비즈니스 모델이 바로 공간을 제조사들이 개발한 상품들을 전시하고 소비자들이 구경하게 함으로써 매장을 1) 소비자들에게는 신기한 테크 제품들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 2) 스타트업들에는 얻기 힘든 상품 전시 공간 등 두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장소로 이용한 것이다. RaaS의 전형적인 사례다.


RaaS는 미국 대형 전자제품 리테일러 베스트바이(Best Buy)가 인터넷의 성장과 쇼루밍(Showrooming)으로 인한 위기를 극복하는 전략의 근간이 되기도 했다. 쇼루밍이란 소비자들이 오프라인 매장을 인터넷에서 구경한 상품들을 실제로 확인해 보는 전시장으로 이용한 후 실제 구입은 저렴한 가격을 찾아 온라인, 특히 아마존에서 구입하는 행동을 말한다. 이로 인해 베스트바이 같은 리테일러의 매출은 큰 타격을 입게 됐다. 고심하던 베스트바이 경영진은 그들의 대형 매장 내에 애플과 삼성 등의 주요 제조사들에 제품을 전시하는 공간을 제공하고, 제조사들에는 공간 사용에 대한 수수료를 받는 모델을 고안해 냈다. 미국 전역에 1026개의 매장에 6 자사 브랜드의 제품을 자유롭게 전시할 수 있으니 제조사들에도 이익이고, 베스트바이는 판매뿐 아니라 공간 사용료까지 받을 수 있고, 소비자들은 다른 전자제품 리테일러보다 다양한 제품을 볼 수 있는, 1석3조의 모델이 된 것이다. 이후 스마트홈 기기 등의 다양한 영역으로 RaaS도 확대했을 뿐 아니라 아마존 같은 온라인 리테일러 가격에 매치해준다는 프라이스매치(price match)로 소비자들에게 가격에 대한 위험 부담을 줄였다. 또 베스트바이의 기술 서비스 프로그램인 긱스쿼드(Geek Squad)를 인 홈 어드바이저(In-Home Advisor) 프로그램으로 확대하면서 소비자와의 관계 확립에 중점을 두는 다양한 전략으로 소비자들에게 환영을 받았고 이후 매출 상승으로 이어졌다.7 베스트바이가 ‘아마존 시대에 살아남는 법’의 예로 많은 기사에서 인용이 되는 이유다.

결국 공간의 사용에 대해, 특히 대형 매장 중심의 리테일러들은 RaaS를 보다 더 신선하게 적용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맥킨지처럼 소형 사이즈의 랩 같은 콘셉트로 자사의 타깃 고객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은 후, 향상된 소비 경험을 제시하는 것도 한 방안이 될 수 있겠다.


2. ‘힙’한 느낌 강화하기

샌프란시스코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식사 후 커피와 디저트 장소를 찾던 중 단델리온 초콜릿(Dandelion Chocolate)이 눈에 띄었다. 들어가 보니 매장의 3분의 2가 마치 초콜릿 공장처럼 꾸며져 있고 실제 초콜릿이 그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테이블이 몇 개밖에 없어서 약간은 당황했는데 초콜릿 음료와 디저트를 주문한 후 기다리는 동안 그 공정을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인더스트리얼(Industrial)’ 스타일 특유의 낡고 거친 느낌을 힙하게 변신시키는 힘을 느꼈다고나 할까. 상당히 인상적인 경험이라 나중에 찾아 보니 단델리온은 2010년에 샌프란시스코 실리콘밸리의 한 창고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성공한 많은 스타트업이 창고에서 시작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단델리온은 부티크 초콜릿 브랜드라는 콘셉트로 창업하면서 오픈형 공장으로 고객들에게 초콜릿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인더스트리얼 스타일로 인기를 끌었다. 얼마 전에는 대형 매장으로 확장하면서 오픈형 매장의 대대적인 확장뿐 아니라 테이스팅 룸과 상품 판매 공간까지 확보했다고 한다. 8 


인더스트리얼 스타일은 19∼20세기 초반 미국과 유럽에서 유래한다. 산업이라는 인더스트리(Industry)라는 단어에서 짐작 가능하듯 근대 산업과 공업 느낌이 강조되면서 미국 대공황 시 버려지거나 방치된 건물들을 주거 공간으로 바꾸면서, 또는 예술가들이 작업실로 이용하면서 거친 느낌의 인테리어가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도 몇 년 전부터 성수동을 중심으로 인더스트리얼 스타일이 ‘힙’한 스타일로 떠오르다가 뉴트로 콘셉트의 확산과 함께 붐을 이뤘다. 얼마 전 방문한 성수동 카페에서도 젊은이들이 이리저리 열이 안 맞는 좁은 테이블과 의자, 심지어 난간 같은 데에 앉아서 커피와 함께 ‘앙버터(버터 한 조각을 앙꼬와 함께 올려낸 빵)’를 먹고 있는 모습을 너무나 쉽게 볼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이 뜨게 된 것일까? 그리고 앞으로도 대세의 한 흐름으로 자리 잡을까? 필자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의 핵심은 단순하면서도 기능에 충실한 낡고 거친 느낌이다. 공장에 있는 듯한 철근과 파이프들, 세월의 흔적을 담은 거친 느낌의 콘크리트벽과 벽돌 등의 요소를 노출해 인더스트리얼 스타일을 구성한다.

그런데 앞으로 오프라인 매장에 도입돼야 할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은 조금은 더 고급화된 디자인이어야 한다.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는 예가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Starbucks Reserve Roastery)다. 필자는 시애틀, 뉴욕, 샌프란시스코의 리저브 매장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큰 리저브 매장이었던 상하이 매장까지 연구차 방문했다. 상하이 리저브 매장에서는 커피 원두가 볶아지는 모습, 볶아진 원두가 원형 파이프를 타고 이동해 패키지에 담기는 모습은 물론 AR로 커피 원두의 역사도 볼 수 있다. 또 고급화된 커피 샘플, 증류 커피 등을 고객의 눈앞에서 ‘제조’해준다. 와인과 칵테일, 다양한 차, 빵과 샌드위치 등의 요깃거리까지 있고, 곳곳을 돌아다니는 직원들에게 커피에 관해 질문을 하면 열정과 전문성이 느껴지는 답변들을 들을 수 있다. 한 번 들어가면 2, 3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는 요술 같은 커피 공장이었다. 2019년 11월, 미국 시카고에 무려
5층짜리 리저브 매장이 세워지며 상하이 매장이 지녔던 세계 1위 타이틀은 시카고로 넘어갔다.


시카고 매장에선 전체 건물을 관통하는 오렌지색의 철제관이 매일 볶아지는 500파운드 이상의 커피 원두를 보관한다. 다양한 커피 바에서 커피 장인의 열정을 담은 커피 한 잔의 경험을 제공하도록 디자인돼 있고, 층마다 커피 바리스타, 서비스 직원, 다양한 호기심에 가득한 소비자들로 에너지가 넘친다. 특별 컨베이어벨트도 설치해 인더스트리얼 스타일을 강조한다. 전체 3만5000평방피트 규모의 매장에서 강조하는 것이 ‘오감을 감싸 몰입시키는 고객 경험(Immersive Customer Experience)’이라고 한다. 9

많은 이가 리저브 매장을 매장의 고급화로 보지만 필자는 그것을 매장의 고급화된 공장화, 즉 고급화된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으로 무장한 ‘힙’한 느낌의 매장이라고 생각한다. 커피의 역사와 최첨단 기술, 나만을 위한 독특한 수제 커피 한 잔을 인더스트리얼 공간에 잘 녹여낸 매장 말이다. 이렇게 스토리와 역사, 고급화된 인더스트리얼 스타일로 매장을 힙하게 만드는 전략은 젊은 소비자들뿐 아니라 다양한 소비자군에 어필할 수 있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단순히 콘크리트 벽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브랜드에 대한 스토리, 독특한 상품에 대한 경험이 중심이 돼야 하고, 여기에 세련된 인더스트리얼 스타일을 입혀 힙한 느낌을 더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 α’로서 이용해야 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힙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의하자.


3. 매장의 쇼룸화로 운영 비용 줄이고 편의성 향상하기

중저가 패션 브랜드 에버레인(Everlane) 매장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신발을 구경하다가 직원한테 필자의 사이즈 신발을 가져다줄 것을 부탁하면서 다른 컬러도 있는지 물었다. 직원은 지금 매장에 있는 것은 화이트밖에 없는데 검정과 네이비 등 다양한 색은 온라인에서 볼 수 있다며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사이즈는 여기서 테스트해보시고 구입은 원하는 색으로 온라인에서 하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아니, 고객이 실제로 매장을 방문해서 신발을 신어보겠다는데 구입은 온라인에서 하세요 라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에버레인이 매장을 보는 시각이 굉장히 유연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장 그 매장의 매출에 연연하는 게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소비자가 브랜드 제품을 구입하게끔 유도하는 것. 소비자들과 만나는 접점에서 최고일 뿐 아니라 유연한 서비스로 브랜드에 호감을 느끼게 하고 자유로운 경험 쇼핑을 도와주는 것. 즉 매장을 소비자들과 만나는 접점이자 상품을 테스트하는 용도의 ‘쇼룸’으로 이용하는 시각이었다.

로시스(Rothy’s)도 비슷하게 매장을 이용한다. 로시스는 2012년에 창업해 2016년 재활용 페트병을 활용한 신발을 론칭하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된 브랜드다. 샌프란시스코 매장을 방문해 보니 매장 규모가 약 23㎡(7평) 정도에 불과했다. 살인적인 렌트비 때문일 수도 있지만 운영 방식이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우선 그 작은 매장에 서너 명의 고객들만 입장시키기에 매장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줄을 서야 했다. 의도적으로 약간의 불편함을 특별함으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둘째, 소비자 한 명당 한 명씩 1대1로 배정되는 직원은 한 사람이 대여섯 개 모델을 신어본다고 해도 생긋 웃는 얼굴로 고객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셋째, 에버레인처럼 온라인에 있는 모델 중 하나의 컬러만 대표적으로 전시해 놓았는데, 사이즈별로 신발의 느낌을 매장에서 테스트해보고 실제 구입은 원하는 컬러로 인터넷으로 하는 것을 추천하기도 한다. 직원들이 매장에서 태블릿으로 주문해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오랜 역사를 가진 프랑스 스포츠 브랜드 데카트론(Decathlon)의 미국 매장은 더 재미난 모델을 가지고 있다. 2018년 약 770㎡ 규모의 테스트 매장을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 오픈했다.10 이 매장을 방문해 보니 매장 내에 다양한 스포츠 기어와 직원들이 소비자들의 상품 설명과 테스트를 도와줌에도 매장 입구에는 온라인 시스템에서 소비자들이 원하는 상품을 온라인에서 편하게 주문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놓았다. 태블릿 화면에서 원하는 상품을 선택하면 상품 스펙과 비디오뿐 아니라 QR코드로 스캔해 스마트폰으로 바로 주문할 수 있게 한 것이다.11

왜 이런 모델이 점점 많아지는 것일까? 필자가 책과 강연에서 남성복 브랜드 보노보스를 언급할 때 설명하는 요소들이 있는데 바로 1) 매장을 쇼룸화하기 때문에 재고의 부담이 줄어들고 2) 매장 인력 절약이 되고 3) 소비자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이 세 가지가 핵심이다. 리테일러들에게는 재고 부담과 인력 절약처럼 중요한 이점이 없다. 물론 상품을 직접 그 자리에서 구입해야 직성이 풀리는 소비자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매장에서 상품을 착용해보고 구입한 상품이 집으로 배송되면 무거운 쇼핑백들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편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사실 앞으로의 리테일에서 매장을 기존 역할에 한정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매장에서 직원이 자꾸 착용과 구입을 권유하는 것, 마치 집사처럼 따라다니는 직원들 때문에 오프라인 매장을 찾기 싫다는 조사 결과가 있을 정도니 말이다.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비대면(untact) 서비스를 원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나는 것도 현실이다. 12 즉, 매장을 보는 시각을 좀 유연하게 가지고 오히려 자신 있게 쇼룸화하는 것이 한 방안이 될 수 있다. 매장 운영 면에서도 이익이 될 뿐 아니라 소비자들도 구입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덜 느낄 수 있는 반면 쇼핑 경험 자체에 집중할 수 있고 그런 쇼핑 환경을 편리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 그래서 오히려 브랜드에 대한 이미지가 높아질 수 있음에 주목해 보자.


마치며

비즈니스 환경이 너무나도 빨리 변하고 있고 위기감이 팽배해 있는데 리테일러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작업은 고객의 쇼핑에 대한 기대감이 바뀌었고 그들의 인식 자체가 달라졌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쿠팡과 마켓컬리면 충분하다는 소비자들을 직접 매장으로 불러오기 위해서 어떤 가치를 제공할 것인가? 이를 결정하고 실행시키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고객의 시각에서 브랜드를 바라보고 고객 경험의 디자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그들을 알아야 온라인을 제치고 매장을 찾을 이유가, 다양한 테크 제품을 실제로 경험(RaaS)하는 것이든, 인더스트리얼 스타일을 통해 전달되는 경험 자체의 ‘힙’함이든, 구입에 대한 부담 없이 편하게 상품을 사용해볼 수 있는 편리함이든 말이다. 구체적인 구현 양상은 달라도 결국은 소비자들이 매장에 들어가고 싶고, 찾아가게 하는 동력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2020년에 들어서며 더 심해질 경쟁에서 오프라인 중심의 리테일러들이 ‘리:스토어’를 통해 붉은 여왕의 영향에서 벗어나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필자소개 황지영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마케팅 전공 교수 jiyoung.hwang.retail@gmail.com
황지영 교수는 최신 글로벌 마케팅과 유통 트렌드의 흐름을 생생하게 포착하는 연구와 대중 강의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마케팅 교수 중 한 사람이다. 한양대 의류학과를 졸업하고 국내 의류 브랜드에서 상품 기획 및 마케팅을 담당하다가 글로벌 리테일 비즈니스를 배우기 위해 유학을 떠났다.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국제유통학으로 석사,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소비자유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UNCG) 마케팅 전공 교수이며 2017-2018 UNCG 우수 강의, 2017 우수연구자 강의상 등을 받았다. 미국 리테일 체인을 대표하는 H마트뿐 아니라 국내 대형 유통기업을 대상으로 연수와 자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최근 『리테일의 미래(2019)』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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