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T Sloan Management Review

회사를 바꾸는 것은 미션보다 팀워크

Article at a Glance

흔히들 회사의 뚜렷한 미션, 목적의식이 직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런 목적의식이 아니라 개인 간 협업의 수준과 질이 직원 참여도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이 같은 적극적인 협업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1) 리더가 심리적 안전과 신뢰를 강화하고 2) 신뢰가 쌓이면 목적을 주입하고 3) 목적이 생기면 직원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단계적 프로세스를 밟아야 한다. 리더가 이렇게 안전과 신뢰를 확립하고, 목적의식을 고취하고, 활력을 창출하는 활동을 많이 할수록, 혹은 이런 활동을 하는 사람을 칭찬할수록 조직의 협업 수준은 향상될 수 있다.



편집자주
이 글은 MIT 슬론 매니지먼트 리뷰(SMR) 2020년 겨울 호에 실린 ‘A Noble Purpose Alone Won’t Transform Your Company’를 번역한 것입니다.

두 회사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첫 번째 회사는 전 세계에 수백 개 지점을 가진 소매 체인이다. 혁신적이지만 기본적으로는 판매 플랫폼에 속한다. 두 번째 회사는 인류를 위협하는 질병인 암을 치료하는 병원이다. 이 중 어떤 회사에 더 능동적인 직원이 많을까?

생명을 구한다는 가치에 비추어 후자를 택했다면, 그런 선택을 한 사람이 당신 혼자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필자들이 두 회사 모두에서 시간을 보낸 결과, 병원의 근무 환경은 생각과 달랐다. 실제로는 두려움으로 가득했고, 직원들의 사기가 낮았으며, 이직률도 높았다. 반면 소매 체인에는 분명한 동지애가 있었고, 직원들은 활기차고 열정적이었으며, 고객들은 서비스에 매우 만족했다. 얼추 봐도 소매 기업에 능동적인 직원들이 더 많았다.

기업체는 물론 많은 경영 관련 책과 기사들은 직원들의 능동적 참여를 이끄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목적의식’을 꼽는다. 최고의 인재를 영입하고 유지하는 데 관심 많은 리더 다수는 더 큰 선을 행하거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만큼 직원들에게 동기부여가 되는 건 없다고 믿는다. 이들은 회사의 미션, 일의 의미라는 더 숭고한 미덕을 찬양한다. 그러나 이는 흔한 오해다. 1

필자들이 지난 20년간 300여 개 기업과 과제를 수행하고, 특히 ONA(조직 네트워크 분석, Organizational Network Analysis)를 활용한 연구와 기업 임원 대상 인터뷰를 한 결과, 목적의식은 직원 참여를 이끄는 여러 요인 중 하나에 불과했다. 실제로 참여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개인 간 협업의 수준과 질인 것으로 나타났다.2 이 글은 협업이 왜 그런 효과를 갖고, 이를 촉진하려면 어떤 행동을 채택하고 실천해야 하는지 탐구할 것이다.







협업이 갖는 힘

그간의 모든 성공 이력에도 불구하고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둔 워크데이(Workday)가 ‘가장 고무적인 미션’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고 하면 좀 의구심이 들 수 있다. 이 회사는 재무관리, 인적자원, 기획 업무를 위한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솔루션을 개발하는 업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8억 달러 규모의 매출, 1만1000명의 직원을 보유한 이 회사에 막상 가보면 그런 의구심은 사라질 것이다. 워크데이는 필자들이 연구한 기업 중 능동적인 직원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최고위직 임원부터 최일선의 직원까지 다양한 직급의 직원들과 인터뷰한 결과, 이 회사에는 아주 고귀한 미션을 가진 다른 많은 기업에 없는 높은 활력과 열정이 있었으며 기업형 소프트웨어를 재창조하겠다는 일관되고 분명한 의지도 발견할 수 있었다.

워크데이의 리더들은 협업에 큰 가치를 부여한다. 이 회사에서 사람과 성과라는 가치 전도사 역할을 하는 그렉 프라이어(Greg Pryor) 전무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우리 회사가 직원을 고용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공감 능력이 뛰어나서 동료와 고객을 위한 서비스에 자신을 기꺼이 바칠 만한 사람들을 찾거든요.”

워크데이에서 직원들 간 협업을 끌어내려는 노력은 출근 첫날부터 시작된다. 이 회사에서는 새로 직원이 입사하면 워크메이트(workmate)라 불리는 베테랑 직원 한 명과 짝을 맺어준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기술적으로 관리된다. 워크메이트가 담당하는 임무 중 하나는 신입 직원이 ‘자기 부류를 찾을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즉 본인과 비슷한 가치와 관심사를 가진 다른 직원들을 찾아 연결해주는 식이다. 필자들의 연구는 네트워크를 연결하고, 사람들이 조직을 아우르며 연결되도록 돕는 이런 노력이 직원 보유 가능성을 상당히 높이는 요소라는 것을 보여준다.

협업을 높이기 위한 워크데이의 노력이 단지 신입 직원을 양성하는 기제만은 아니다. 이런 노력은 관리자를 비롯해 모든 직원의 근속기간 내내 이어진다. 워크데이의 리더십 개발 프로그램은 회사 전체적으로 연결망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촉진하고, 관계 네트워크를 육성하도록 고안돼 있다. 가령, 이 회사의 연례행사인 피플 리더십 서밋(People Leadership Summit)에서 임원들과 관리자들의 자리는 평상시 잘 만나지 못한 다른 부서원이나 다른 직급의 직원 옆으로 의도적으로 배정된다.


DBR mini box I
연구내용

1. 본 기사의 기반이 된 연구는 지난 10년간 선도 기업들이 구성한 두 개의 연구 공동체와 함께 두 단계로 나눠 진행됐다.

2. 첫 번째 단계에서는 ONA를 통해 협업 패턴을 분석하고 산업 전반의 글로벌 기업 수십 곳에서 관계를 이끄는 동인들을 파악했다. 필자들은 또 관계를 구축하고 직원들의 높은 참여도와 낮은 이직률을 이끄는 데 미치는 신뢰와 목적, 활력의 역할을 지도로 그렸다.

3. 두 번째 단계에서는 20개의 유명 기업에 소속된 200명의 리더(여성 100명, 남성 100명)와 인터뷰를 해서 대인관계에서 신뢰와 목적과 활력을 촉진하는 리더십 행동들을 확인했다.


협업에 집중한 워크데이의 이런 노력은 성과가 있었다. 이 회사의 직원 이탈률이 눈에 띄게 줄었고, 직원 95%가 자기 회사를 ‘일하기 좋은 직장’이라 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워크데이는 포천이 가장 최근에 발표한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100 Best Companies to Work For) 명단에서 당당히 4위를 차지하기도 했다.3 워크데이가 협업의 좋은 본보기인 것은 맞지만, 이런 회사가 워크데이 하나는 아니다. ONA를 이용해 집단 안팎의 관계를 지도로 그린 결과(DBR mini box Ⅱ‘협업의 가시화’ 참고.)를 직원 참여도와 만족도에 대한 인터뷰 및 설문, 직원 이탈률 데이터를 비교 분석했더니 직원 참여도는 리더가 대인 네트워크 및 협업 문화를 얼마나 잘 육성하는지에 달려 있었다. 이런 결과는 워크데이뿐 아니라 다양한 산업 및 기업에서 일관되게 도출됐다.

그럼 직원들의 적극적인 협업과 참여를 어떻게 이끌고 육성할 수 있을까? 이는 단계적 프로세스를 통해 가능하다. 첫째, 심리적 안전과 신뢰를 강화하는 리더십 행위가 무엇인지를 규명하고, 채택하고, 보상하는 탄탄한 기반을 마련하라. 이는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다. 일단 신뢰가 확립되면 목적의식을 심어줘야 한다. 즉 우리가 끝내야 하는 일의 의미와 영향력에 대한 확신을 심어줘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목적이 주입되면 직원들의 일상적인 열정인 활력을 창출해야 한다. (그림 1) 네트워크 분석에서 참여에 관한 응답들을 펼쳐 놓았더니 이런 단계들을 밟은 리더들이 그렇지 않은 리더들보다 훨씬 더 높은 직원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안전과 신뢰 확립하기

신뢰는 사람들로 하여금 위험을 감수하고 협업을 통해 원대한 목표를 추구하도록 자극한다.4 신뢰가 없으면 사람들은 머뭇거리게 된다. 하지만 신뢰가 있으면 의구심이 사라지고 정보가 자유롭게 흐른다. 사람들은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기꺼이 제시하며,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

리더가 심리적 안전감을 확립하면 직원들로 하여금 자신을 신뢰하도록 만드는 것은 물론, 직원들끼리도 더 쉽게 서로를 신뢰하도록 만들 수 있다. 심리적 안전감이란 사람들이 집단 안에서 반대, 거절당할 것이란 두려움 없이 건설적인 비판을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는 감정을 말한다. 심리학자인 프레데릭 허츠버그(Frederick Herzberg)는 이런 안전감을 위생 요인(hygiene factor)이라 명명했다.5 심리적 안전감이 있다고 해서 높은 수준의 협업이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6 그러나 심리적 안전감이 없다면 협업을 촉진하는 첫걸음 자체를 내디딜 수 없다.

다시 말해, 심리적 안전감을 형성하면 브레이크를 풀고 신뢰를 형성할 수 있다. 그렇다고 가속 페달을 밟아 사람들이 협업하도록 동기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조직 안에 목적과 활력을 생성해야 한다. 이는 2, 3단계에 해당되기 때문에 세부 내용은 아래에서 논의할 것이다.7


DBR mini box II
협업의 가시화

ONA는 조직의 경계, 위계 수준, 직무 안팎에서 그룹 멤버 사이에 영향력이 어떻게 분산돼 있는지 리더들에게 통찰력을 준다. 이는 일종의 MRI 같아서 협업이 건강하거나 병든 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런 상태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보여준다.

ONA로 다양한 유형의 협업 조력자들을 확인할 수 있다. 거기에는 사람들을 한데 연결하는 커넥터, 지식과 기술로 타인을 보조하는 전문가, 경계를 넘나들며 하위문화를 통합하는 브로커, 남에게 열정과 흥분을 불어넣는 에너자이저가 포함된다. 또 ONA를 활용하면 에너지 파괴자, 공포 통치자, 미묘한 방법으로 냉소를 퍼뜨리고 모멘텀의 속도를 늦추는 기타 훼방꾼 등 협업 파괴자들도 파악할 수 있다.


효과적인 협업을 위해서는 3가지 유형의 신뢰가 꼭 필요하다. 8

• 선의에 기반한 신뢰는 심리적 안전감, 그리고 리더와 동료들이 자신의 이익뿐 아니라 당신의 이익도 생각해서 행동할 것이라는 근본적인 믿음에서 비롯된다.

• 정직에 기반한 신뢰는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 역량에 기반한 신뢰는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전문 지식이 그들에게 실제로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리더들은 흔히 이런 신뢰를 쌓아야 할 필요성을 간과한다. 이는 보편적인 맹점 중 하나다. 지난 22년간 적게는 30명에서 많게는 450명까지 다양한 집단의 임원에게 신뢰를 쌓는 일, 목적을 심어주는 일, 활력을 창출하는 일 중 개인적으로 가장 습득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 물을 때 신뢰라고 말하는 응답자는 고작 전체의 2%에 불과했다. 그러나 리더들에 대한 360도 다면평가를 위해 설문 조사를 실시하면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리더에 대한 불만, 정보의 통제, 자기 잇속만 챙기는 행위 등 조직에 불신이 만연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불평이 전부 사실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직원은 리더에게 직접 맞서거나 그들의 의도를 해명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9 그렇게 신뢰는 더 훼손돼 나간다.

투자은행에 있는 한 고위 임원은 필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뢰를 빠르게 쌓는 데 도움이 되는 행위들을 보면, 저는 신뢰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거나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던 게 확실해 보였어요.” 그녀의 말이 맞고, 그런 임원이 그녀 혼자는 아니다.

신뢰를 확립하고 보조하는 리더십 행동은 아주 다양하다. 조직 안에 신뢰, 목적, 활력을 높이는 27가지 행동은 [표 1]에 정리돼 있다. 가령, 리더들이 자주 듣는 조언 중 신뢰를 쌓으려면 ‘말한 것을 실천하라’는 말이 있는데, ‘실천한 것을 말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선의와 정직에 기반한 신뢰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어떤 의도로 그 행동을 했는지를 명확하고 애매하지 않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리더가 말한 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직원들은 각종 추측을 하게 되고, 직장에서 추측은 종종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제약회사에 다니는 한 관리자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은 제가 하는 일을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오해할 수 있고, 제 의도를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의도에서 그런 일을 했는지 조금만 더 잘 알아도 그런 혼란은 덜 벌어질 겁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리더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역량에 기반한 신뢰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필자들이 인터뷰했던 고위 임원 한 명은 실적 호전이라는 임무를 위해 한 하이테크 기업에 영입됐다. 그는 처음 사업의 기술적 측면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그러던 임원은 어느 순간 기술적 전문성은 팀의 다른 직원들에게 맡기고, 자신만의 특출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전략과 팀워크 구축에 집중하는 게 더 타당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한편으로는 제 약점을 노출하고 들킬 위험이 있었지만 제가 잘 모르는 영역을 팀에 알렸더니 제 전문 영역과 관련해서는 그들이 저를 더 확실히 신뢰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신뢰받는 리더들은 직원들과 일대일 면담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워크데이에서 일하는 한 관리자는 이런 면담의 절반 이상을 업무 기한이나 실적과 아무 상관 없는 ‘업무 외’ 주제에 할당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들이 어떤 일에 관심이 있고, 어디를 가고 싶어 하는지를 알게 되면 그들의 업무를 개인의 의도에 맞춰 짤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도 그런 의도를 알게 돼 관리자인 저에 대한 벽을 허물게 됩니다.”

신뢰는 개인적인 연결을 통해 더욱 공고해 진다. 이에 워크데이는 아카펠라, 치즈, 가라오케, K팝, 페인트볼, 파워리프팅 등 회사가 후원하는 141개 동호회를 통해 관리자와 직원이 서로 더 연결될 수 있도록 장려한다. 또 이 회사는 직원들이 스포츠와 지역사회 활동에 참여해 서로 교류하도록 독려한다. 이런 업무 외 연결 활동은 신뢰와 동지애를 낳는다.

목적의식 고취하기

일단 사람들에게 신뢰가 생기면 리더들은 조리개를 넓혀 직원들이 하는 일이 조직과 바깥세상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훨씬 더 쉽게 보여줄 수 있다. 꼭 사람들에게 본질적으로 의미 있는 임무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의미 있는 협업이라는 맥락을 만들어내면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데이비드 실베스터(David Sylvester)는 바로 이 점을 발견했다. 그는 해병대와 여러 비영리 기업을 지휘했으며, 현재는 아마존웹서비스의 신입 직원 성공(new employee success) 담당 이사로 있다. 그는 매출 창출, 생산성 향상 속도, 정보와 결정의 흐름, 협업 과부하, 직원 참여 및 근속 등 사회적 네트워크와 관련된 예측 동인들을 파악하기 위해 다수의 ONA를 실시했다. 이런 작업은 선별적 인재 개발, 리더십 개발, 조직의 효율성 이니셔티브와 관련된 다양한 프로젝트를 낳았다. 그중 한 조직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질문으로 분석을 시작했다. “이 사람과 교류를 하면 그/그녀가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 더 큰 목적의식을 갖게 되는가?” 통계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도 파레토의 법칙이 작용한다. 조직 내 목적의식의 80%는 20%의 리더들이 심은 것이었으며, 이런 리더들은 직원 근속에 있어서도 다른 리더들보다 더 나은 실적을 보였다.

그다음으로는 이러한 리더들이 어떻게 직원들에게 더 강한 목적의식을 심어주는지를 살펴봤다. 실베스터는 “모든 게 행동과 관련이 있었고, 누구나 충분히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 회상했다. 그 조직은 실베스터의 표현을 빌리자면 “임무의 배경을 더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효과적인 리더의 역량 등 ONA 결과를 임원 및 직원들의 리더십 교육 프로그램에 포함시켰다.10



필자들은 한 유명 투자은행에서 “직장에서 교류한 사람 중에 당신에게 더 큰 목적의식을 느끼게 한 이는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상위 600명의 리더에게 던졌다. 목적의식을 고취한 주인공들을 파악하는 데 ONA 분석을 활용한 것이다. 그 결과 리더들 중 상위 4분의 1은 평균 16명 가까운 사람들에게 강한 목적의식을 불어넣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반해 하위 4분의 1은 목적의식을 고취한 사람이 평균 1명도 채 안 됐다. 게다가 상위 4분위에 속한 리더들은 더 유능한 직원들을 자기 산하로 끌어들였다. 직원들의 이탈률은 더 낮았고, 팀의 참여율은 더 높았다.

많은 리더십 행동이 팀이나 조직에 목적의식을 고취한다. 가령, 과제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이유’를 강조하는 리더들이 있다.11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 1944년 6월 디데이에 군부대를 대상으로 성명을 발표했을 때 그는 전사들이 “위대한 십자군이고, 전 세계의 눈이 제군들에게 집중돼 있으며, 세계 곳곳에서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희망과 기도가 제군들과 함께한다”라는 문맥을 강조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전사들이 수행할 행동이 왜 중요한지 그들 스스로 알기를 원했다. 군대에서는 이런 문맥 설정이 표준 행위다. 특히 군인들이 목숨을 건 위험에 처했을 때는 더욱 중요하다. 감수할 위험이 훨씬 낮은 일반 기업체에서는 이렇게 맥락을 설정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기업 관리자들도 이런 접근법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직원들이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를 확인하고, 의미 있는 일의 일부라고 느낄 수 있도록 맥락을 만드는 것이다. 단지 데드라인을 지키거나 예산을 지키는 것 이상의 일로 느끼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것은 ‘일하는 방식’의 적어도 한 측면이 목적의식을 고취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사실이다. 필자들은 연구를 통해 절반 이상의 직원들이 가진 목적의식과 영향력이 협업의 질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따라서 목적은 단지 그 업무를 수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업무를 함께 수행하는 방식에 내재돼 있다. 리더는 이런 사실을 직원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예컨대, 한 포천 500대 기업에서 일하는 C레벨 임원은 새로 팀을 짤 때마다 각 팀원에게 그들을 왜 그 프로젝트나 이니셔티브에 포함시켰는지 아주 명확히 밝힌다.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게 하면 서로를 인정하게 되고, 그들 중 누구 한 명이 혼자 할 때보다 모두가 협업했을 때 왜 성공 확률이 높아지는지 알게 됩니다.”

목적의식을 성공적으로 주입하는 리더들에게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행동은 또 있다. 그들은 초기에 권한을 분산해 멤버들이 처음부터 협업해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고 성취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또 다른 사람들의 성과를 공개적으로 인정한다. 필자들이 일했던 제약회사의 한 임원은 매주 금요일마다 한 시간을 정해 협업에 특히 크게 기여한 직원들에게 감사 e메일을 보낸다.

직원들에게 활력 불어넣기

신뢰와 목적이 단계별로 구축됐다면, 이제 리더들은 직원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쪽에 집중할 수 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일하고 동료들과 충분히 소통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연구 결과를 보면 활력은 수준 높은 업무 연결과 협업을 이끄는 핵심 자극제다.12

활력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리더는 직장에서 비교적 찾기 힘든 인재다. 그런 만큼 조직에 굉장히 소중한 존재다. 실제로 필자들의 연구만 봐도 활력을 북돋는 에너자이저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조직에서 최고 성과 등급을 받고 승진할 확률이 네 배 더 높았다. 이들이 경력 변화를 성공적으로 관리할 가능성도 두세 배 더 높았다. 또 보너스를 포함한 성과급도 평균적으로 20∼30% 더 많았다.

에너자이저들은 새로운 성과를 빠르게 만들어내고 지식의 전달 속도를 높이는 데 필요한 자극을 준다. 이런 점 때문에 그들은 매우 효과적인 변화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런 추진력은 조직이 내부 에너자이저의 존재를 알고 그들의 특별한 능력을 제대로 배치했을 때에만 전략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에너자이저라 하면 항상 팀에서 가장 카리스마가 넘치거나, 아주 재미있거나, 최고의 이야기꾼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들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가장 외향적인 사람들이 에너자이저일 것 같지만 그 반대일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에너자이저들은 다들 외향적일 것 같지만 내성적일 가능성도 높다. 에너자이저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그들은 자신을 과시해서 존재감을 발휘하기보다는 타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 네트워크 내 교류를 활성화해 정보, 기회, 더 나은 재능, 창의성이 조직 안에서 더 유동적으로 움직이게 함으로써 빛을 발한다.

에너자이저를 성격적 특징으로 파악하기 어렵다면 기업은 그들을 식별하는 다른 방법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ONA가 또 한 번 활약을 한다. MIT와 하버드가 만든 생의학 연구소인 브로드인스티튜트(Broad Institute)의 인력 분석 이사인 케이트 오브라이언(Kate O’Brien)은 ONA를 통해 두 그룹의 직원 중 에너자이저를 식별할 수 있었다. 전체 1500명 중 약 400명이 에너자이저로 판명됐다. 그들 중 상당수는 암 프로그램과 데이터 사이언스 플랫폼 그룹에 속한 과학자였다. 오브라이언은 이렇게 말했다. “커넥터, 즉 다른 과학자들의 허브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에너자이저에 속했습니다. 그들은 조직에 정말로 꼭 필요한 인재들이므로, 만약 그들이 이직을 결정하면 열정과 미션 중심의 협업 문화가 조직에서 떨어져 나간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오브라이언에 따르면 이런 분석 결과는 연구소의 고위 임원들에게도 놀라움을 줬다. 에너자이저 명단에는 연구 보조금을 받지 못하거나 기술 측면에서 슈퍼스타로 인식되지 않은 과학자들도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다른 귀중한 특징들이 있었다. 에너자이저들은 다른 사람을 ‘개인’으로 바라보는 성향이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시간을 내서 동료들과 대화를 하고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들은 과학자들이 그런 관심과 도움을 고마워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고, 그런 임무를 자진해서 떠맡았다. 이런 행동은 에너자이저에 해당하는 직원들에게서 발견되는 주요 리더십 특징 중 하나였다.

유머 감각도 활력을 만들어냈다. 많은 에너자이저는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거나 권위자와 교류할 때 발생하는 자연스런 위화감을 없애기 위해 자기비하적인 접근법을 사용한다. 그들은 직장에 가벼운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하고 다른 직원들도 그렇게 하도록 부추긴다. 한 제약회사의 임원은 팀원들에게 회의를 할 때마다 자신들과 무관한 업계나 회사 관련 웃긴 광고나 동영상을 보면서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지시의 골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상황을 너무 심각하게 여기지 않도록 한다는 데 있었다. 긴장을 풀고 웃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리더들은 종종 활력을 주는 행동의 힘을 과소평가한다. 하지만 필자들은 에너자이저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이들이 이룬 성공은 일을 성사시키는 능력 때문이 아니라 아이디어, 기회, 재능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능력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 기회, 재능 등이 우연한 만남을 통해 그들에게 유입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에너자이저가 성공이 유입되는 통로들을 열어 뒀기 때문에 가능했다.

리더들은 어떻게 전진해야 할까?

이런 결과를 리더 집단에 제시하면 모두가 궁금해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럼, 저희 조직의 협업 수준을 높이기 위해 제가 지금 바로 해야 할 행동은 무엇인가요?” 불행히도 이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은 없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필자들이 분석을 통해 발견한 27가지 행동의 효과는 조직의 역학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긴 해도 27가지 행동은 모두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고, 서로 결합했을 때 시너지를 낼 수 있다. 리더들이 이런 행동을 더 많이 보이고, 이런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을 많이 칭찬할수록 조직의 협업 수준은 향상될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27개 중 어떤 것이든 결핍된 행동이 있으면, 나머지 행동을 얼마나 많이 채택하든 그 간극으로 인해 직원들이 신뢰와 목적, 에너지를 확립하기 어려울 수 있다.

둘째, 이런 행동들을 보여주는 결합 방식과 수준은 리더마다 다르다. 이는 곧 협업 수준을 높이는 해법도 리더마다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묘책을 찾기보단 27개 행동 중 당신은 어떤 것들의 귀감이 되고, 또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은지에 주목해서 당신의 리더십 행동을 평가해 보라.13 그런 다음 신뢰의 환경을 조성하는 행동부터 시작해서 당신에게 현재 부족한 행동들을 채택하고 나머지 행동들도 계속 연마해 나가라. 이런 체계적인 접근법이 협업과 직원 참여를 효과적으로 이끄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


번역 |김성아 dazzlingkim@gmail.com

롭 크로스(Rob Cross)는 뱁슨칼리지(Babson College)에서 에드워드 A. 매든(Edward A. Madden)의 후원을 받는 글로벌 리더십 교수이자 글로벌 선도 기업 80개의 연구 공동체인 커넥티드 커먼스(Connected Commons)의 설립자다. 에이미 에드먼슨(Amy Edmondson)은 하버드경영대학원에서 노바티스(Novartis)의 후원을 받는 리더십과 경영학 분야의 교수로 있다. 웬디 머피(Wendy Murphy)는 뱁슨칼리지의 경영학과 부학장이자 교수다. 이 글에 의견이 있는 분은 http://sloanreview.mit.edu/x/61207에 접속해 남겨 주시기 바란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00호 Revisiting Case Studies 2020년 7월 Issue 1 목차보기


객관적 데이터 분석을 통한 고객의 행동 패턴 분석으로 고객의 니즈파악 및 올바른 대응


DBR Case Study: 전자책 시장 1위 리디북스의 데이터 경영

넷플릭스를 경쟁자 삼은 ‘책덕 플랫폼’
데이터 기반 비즈니스의 ‘모범 교과서’

Article at a Glance
창업 첫날부터 투자자나 업계 관계자로부터 ‘돈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비즈니스를 시작한 ‘전자책 서점’ 리디북스는 창업 10년 만에 기존 온·오프라인 서점 강자들과 대기업들을 제치고 전자책 1위 업체가 됐다. 리디북스는 기존 온·오프라인 서점이나 출판사를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IT 기반 벤처기업으로 정의하면서 ‘기술 중시’와 ‘고객 중심’ 전략을 펼쳤다. 특히 넷플릭스, IPTV, 유튜브, SNS 등 밤에 침대에 누워 즐기는 모든 엔터테인먼트 기업을 경쟁자로 생각하며 스스로를 ‘기술 기반 심야 엔터테인먼트업’으로 재정의했다. 리디북스는 대한민국의 대표적 ‘책덕’ 플랫폼이 됐고, 이제 데이터 분석을 기반으로 고객의 니즈에 맞는 자체 콘텐츠를 생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창업 첫날부터 ‘돈이 안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투자를 받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당신 회사가 매출 100억 원을 넘기면 손에 장을 지진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죽기 살기로 노력해 수년 만에 100억 원 매출을 만들었다. 그러자 또 다른 누군가는 ‘죽을 때까지 매출 500억 원을 못 넘길 것’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전망을 하기도 했다. 그 회사는 어떻게 됐을까?

2010년 2억7000만 원의 매출에서 시작해 8년도 되지 않은 2017년 665억4000만 원의 매출액을 달성했다. (그림 1) 바로 전자책 전문 서점이자 플랫폼인 리디북스 얘기다. 아마 ‘전자책 전문 서점’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인터넷 교보문고나 예스24, 알라딘 같은 온라인 서점이지만 ‘종이로 된 책’은 전혀 취급하지 않는 회사다. 오직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진 전자책(ebook)만을 판매한다. 2015년부터는 아마존의 킨들과 같은 자체 리더(reader)기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이렇게 설명을 써 놓고 나면 ‘정말 이게 돈이 될까’ ‘성장 가능성이 있을까’ ‘어려워지는 출판/서적시장에서 전자책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장을 지진다’고 저주에 가까운 전망을 하던 투자자들이 일견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리디북스는 급속도로 성장하며 업계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교보문고, 알라딘, 예스24 등 기존 온·오프라인 대형 서점은 물론 신세계와 삼성까지 뛰어들어 30여 개 업체가 경쟁하던 전자책 시장에서 벤처기업으로 단순히 살아남기만 한 것이 아니라 창업 10년도 채 되지 않아 1위에 올랐다. 그것도 압도적 1위다. 전체 전자책 시장에서 약 50%에 육박하는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1 나머지 절반을 교보문고와 ‘알라딘-예스24 등 기타 서점 연합’2 , 네이버북스 등이 차지하고 있다. 놀랍게도 가장 작은 기업이자 가장 역사가 짧은 리디북스가 홀로 절반의 시장을 장악했다. 한국출판콘텐츠에서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2016년 일반 단행본 전자책 시장 규모가 1400억 원 정도로 추정된다. 전자책 시장점유율이 40% 전후, 베스트셀러의 경우 50% 전후에 이른다는 리디북스의 설명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리디북스의 성장세는 ‘서점업의 위기’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다. 전자도서의 실제 구매를 뜻하는 도서 다운로드는 2017년에 1억1085만여 건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68.37% 성장했다. 2018년 현재 1분기에만 5200만 건 이상의 다운로드를 기록했고 연말까지 2억5000만 건의 다운로드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림 2, 표 1)



리디북스의 총 서비스 도서는 165만여 종에 이르며 등록된 리뷰 수만 87만 건이다. 2200개가 넘는 출판사와 제휴했고, 가입 회원 수는 2018년 3월 기준 277만 명에 육박한다.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큰 투자를 받아왔고 이르면 2018년, 늦어도 2019년에는 수익을 낼 것으로 보인다. 국내 최다 제휴 출판사와 최다 도서를 보유한 전자책 회사가 됐기에 전망도 밝다. ‘한국에서 전자책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선입견, ‘교보나 예스24도 어려워하는 시장’이라는 우려 속에서, 심지어 매해가 ‘단군 이래 최악’이라는 출판/서적시장에서 리디북스는 어떻게 이런 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DBR이 리디북스의 성공에 숨은 요인을 집중 분석했다. 



업의 재정의: 서점이 아닌 ‘IT 기반 심야 엔터테인먼트업’
“그냥 전자‘책’을 팔고 그 책을 읽을 앱을 제공하는 정도의 ‘온라인 서점’으로 스스로 생각했다면 이렇게 성공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스스로 IT 기반의 기술 서비스 기업으로 인식하고 비즈니스를 시작한 것이 주효했습니다.”

이동진 리디북스 CBO(Chief Business Officer)의 말이다. 이는 사실 리디북스 CEO인 배기식 대표가 몇 번의 미디어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기도 하다. 리디북스의 이런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업 당시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006년 삼성전자 벤처투자팀에 입사해 일하던 배 대표는 미국 실리콘밸리를 오가며 창업 생태계를 목격했고, 스마트폰 도입 전이었던 이때 이미 소프트웨어와 모바일 기술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 직감했다. 이후 실제로 아이폰이 등장하고 ‘앱 생태계’가 꾸려지면서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열렸는데, 이를 어느 정도 예측했다는 뜻이다. 배 대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던 바로 그해 나이 서른에 회사를 그만두고 이니셜커뮤니케이션스라는 이름의 회사를 창업한다. 사업 아이템도 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소프트웨어’와 ‘기술’이라는 화두만 갖고 나왔다. 처음 생각한 아이템은 웹툰이었다. 웹툰 작가를 50명 이상 만나며 시장 진출을 모색해봤다. 그러나 이미 국내 대형 포털이 완전히 장악한 시장이어서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에는 전자상거래 쪽에서 사업 기회를 찾아봤다. 역시나 기존 강자들이 시장을 독과점하는 구조였다. 웹툰과 전자상거래 그 중간쯤에 있는 전자책 시장이 보였다. 2008년 당시 ‘디지털화’가 가장 덜 돼 있는 분야였다. 사람들이 ‘전자책을 외면하는 이유, 혹은 관심조차 없는 이유’를 고민했고, 이를 ‘불편함’에서 찾았다. 종이책과 비슷한 느낌을 전혀 주지 못하고 눈만 아프고 읽기에 불편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외면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좋은 소프트웨어를 통해 제대로만 보여줄 수 있다면 분명 새로운 시장이 열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고민을 본격화하던 바로 그때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모바일 혁명, ‘아이폰’을 필두로 한 스마트폰 혁명의 물결이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1) 첨단 기술기반 플랫폼 비즈니스
2009년 11월, 스마트폰 혁명이 한국에서 본격화할 때 리디북스 서비스가 시작됐다. 국내 최초 ‘스마트폰 전용’ 전자책 서비스였다. 앞서 언급했듯 이미 IT 혁명의 파도가 지나간 PC 중심 인터넷에서는 치고 들어갈 틈이 안 보였지만 스마트폰/모바일 기기에서는 새롭게 디지털화될 비즈니스가 많아질 것으로 봤고 그중 하나로 ‘전자책’을 집어낸 것이다. ‘책’이라는 분류가 주는 편견이 자꾸 ‘출판’과 ‘서적 판매’를 중심으로 사고하게 만들었지만 리디(당시 이니셜커뮤니케이션스) 창업자들이 볼 때 전자책 비즈니스는 명백하게 ‘IT가 핵심’인 비즈니스였다. 이동진 CBO는 “애초에 리디는 스스로 경쟁 상대로 교보나 영풍 같은 기존 대형 서점이나 예스24와 알라딘 같은 기성 인터넷 서점 대신 IT 벤처 기업들, 즉 앱을 만들고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회사들을 경쟁 상대로 봤다”고 설명했다. PC에서 모바일 디바이스로 IT의 축이 이동할 때 ‘누가, 어떤 기술로, 어떤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고객들에게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냐’의 관점에서 비즈니스 모델을 고민했고, 그렇게 ‘전자책’ 서비스를 첨단 기술 기반 플랫폼 서비스로 인식하고 시작했다는 얘기다. 이 지점이 리디북스가 기존의 온·오프라인 대형 서점이나 대기업들과의 경쟁 속에서도 생존하고 심지어 1위로 올라설 수 있었던 차별화 포인트였다. 온·오프라인 대형 서점에 ‘전자책 판매’와 ‘전자책 서비스’ 전반은 ‘부수적인 비즈니스’에 불과했다. 그동안 종이책을 팔던 방식으로 전자책을 팔았고, 그들에게 전자책은 좀 더 적은 비용으로 저렴한 가격에 팔 수 있는 ‘주류가 될 수 없는 책’ 혹은 ‘책답지 않은 책’이었다. 따라서 기존 업체들은 전자책 판매 시스템과 유저 인터페이스, 전자책 앱과 리더기 개발 거의 대부분을 ‘외주’화했다. ‘부수적인 일’에 내부 인력과 자원을 투자하는 건 낭비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전혀 다른 업종에서 ‘미래 전망’ 하나만 보고 뛰어든 대기업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전자책 플랫폼 서비스’를 기술 기반 비즈니스로 생각했던 리디북스는 앱 개발과 편한 전자책 판매/독서/리뷰 플랫폼 구축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전자책은 디지털/모바일 비즈니스이기에 기술력에서 승패가 갈릴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존재했다. 2009년 말 국내 최초 스마트폰 전자책 서비스 출시 후 약 1년여 만인 2011년 1월 리디북스 아이패드 버전을 오픈했고, 석 달 뒤 기능을 업데이트하면서 ‘국내 최초 소셜 리딩’ 서비스를 제공했다. 소셜 리딩 서비스를 내놓은 이 시점은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급속히 확산되며 이른바 미디어의 ‘대세’가 돼 가던 시점이었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에서 리디북스 뷰어로 책을 읽다가 맘에 드는 글귀가 나오면 손으로 해당 부분을 간편하게 터치해 SNS로 내보내는 기능이었다. 이후 하나의 이미지로 소셜 계정에 공유할 수 있도록 업그레이드됐고, 현재는 감성적인 배경에 글귀가 공유되는 서비스로까지 발전했다. 물론 이 서비스 방식은 리디가 처음 시작한 이후 모든 교보 e북, 예스24와 알라딘의 전자책 서비스, 네이버 북스 등 모든 경쟁자들이 따라 했다.

글자 폰트 조정부터 쉽게 태블릿 화면 밝기를 자체적으로 조정하고, 크기를 줄였다 늘렸다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가독성을 높이고 편리하게 책을 읽을 수 있게 도와주는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고 이는 독자들의 만족감 상승으로 연결됐다. 앱의 기능은 끊임없이 업데이트됐고, 페이지나 내용을 ‘스크랩’해 클라우드상에 동기화하는 기능, 전자책을 선물하는 기능 등을 도입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2012년 2월에는 한국무선인터넷산업연합회 주최 ‘코리아모바일어워드’에서 베스트앱에 선정되기도 했다. 2015년에는 스스로 연구개발해 자체 리더기를 내놨다. 이미 교보문고 등 일부 대형 서점에서는 자체 리더기의 지속적 개발을 거의 포기 하다시피 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리디북스는 보란 듯이 2017년 말에 전용 단말기의 두 번째 버전을 출시했다. (표 2) 리디북스 관계자는 “전용 전자책 단말기 개발을 위해 주문 제작 공장이 있는 중국에 직원들이 1년 가까이 상주하다시피 했고 숙식비만 수억 원이 들었지만 결코 ‘비용’으로 치부할 수 없는 핵심 기술, 핵심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투자’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2)진정성과 데이터, 출판사 사장의 마음을 움직이다.
리디북스는 스스로를 IT 기반 디지털 서비스 기업으로 규정하고 ‘기술’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로 그들이 만들어낸 건 결국 출판사가 책을 공급하고, 회원이 책을 구입하고 봐야 하는 하나의 플랫폼이었다. 즉, 아무리 기술력이 뛰어나도 출판사를 설득해 책을 공급받지 않으면 가치 창출은 불가능했다.

이름도 없는 ‘전자책 전문 서점’에 오랜 세월 변하지 않는 비즈니스 모델을 갖고 있던 출판사들이 쉽게 공급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지난한 설득 과정이 이어졌다. 전자책 비즈니스를 하기로 결심한 2009년 초부터 배기식 대표는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출판사들을 말 그대로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그는 몇몇 인터뷰에서 “삼성전자 명함을 들고 다닐 땐 실리콘 밸리의 잘나가는 기업들도 함께할 수 있는 일이 없을지, 혹시 투자가 들어오진 않을지 하는 기대에서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해줬다”며 “그런데 막상 창업을 하고 나니 작은 출판사 사장님도 ‘잘 모르는 비즈니스’를 하는 ‘못 들어본 회사의 젊은 CEO’를 쉽게 만나주지 않았다”고 회고했다.4  

처음에는 몸으로 부딪혀서 한 명 한 명 설득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아직 모바일 기기와 스마트폰, 태블릿 등이 제대로 보급되거나 많이 확산되지 않았던 2009년, 2010년에는 ‘디지털화된 콘텐츠’에 대한 불신이 발목을 잡았다. 출판사 담당자 혹은 사장들은 “파일을 주면 공짜로 퍼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느냐, 그 정도 보안 시스템이 있긴 한 것이냐”며 고개를 저었다. 또 “판매량 점검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건 당신들이 100권을 팔고 10개만 팔았다고 하면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은가”라고 되묻기도 했다. 이런 회의적인 시선과 질문에 배 대표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데이터를 제공하겠다. 그게 바로 전자책 비즈니스의 장점이다”라며 “우리 같은 새로운 사업자를 통해 공급처를 확대해야 온·오프라인 대형 서점 의존도를 탈피하고 궁극적으로 출판사도 이득을 볼 수 있다”고 설득했다. 리디북스와 계약이 장기적으로 대형 서점 유통업체의 횡포를 줄일 수도 있다는 배 대표의 진지한 설명에 출판사 대표들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급 계약이 체결된 출판사에는 실제로 거의 실시간으로 판매 데이터를 제공했다. 출판계에 ‘저 회사는 실시간으로 판매량을 체크해서 알려준다’는 소문이 났고 업계 전반에 신뢰가 쌓이기 시작했다. 이후 리디북스가 회사 이름 그 자체로 신뢰의 상징이 된 이후에는 이런 서비스를 중단했지만 초기의 데이터 제공 서비스는 ‘신의 한 수’가 됐다. 특히 출판사 대표들이 걱정하던 가장 중요한 부분, 즉 전자책이 팔리면 종이책 판매량이 주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불식됐다. 저렴하게 혹은 거의 무료로 전자책을 다운로드해 보더라도 정말 괜찮은 책이면 오히려 종이책으로 한 권 더 사는 사람들이 있었고, 자신은 전자책으로 읽고 친구들에게 소개를 해 책을 소개받은 친구가 종이책을 사는 경우도 있었다. 전자책 판매량이 늘어나도 종이책 판매량은 줄지 않았고 오히려 늘어나는 일도 있었다. 출판사들은 리디북스가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전자책 판매량 데이터를 보며 이를 확인했다. 이동진 CBO는 “출판사 대표들은 지식인이고, 또 스스로 지식인이라는 자각과 자부심도 강한 편”이라며 “그렇기에 오히려 데이터로 무엇인가 입증이 되고 설명이 되면 더 잘 수긍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공급업체를 늘려가는 과정에서 2011년 마치 넷플릭스처럼 리디북스만의 오리지널 콘텐츠 ‘리더를 읽다’ 시리즈를 판매하면서 회원 수를 급격히 늘려갔고, 이렇게 회원 수가 늘고 한 번 가입한 회원들의 충성도가 높다는 걸 알리자 공급을 약속하는 출판사도 점점 주증가했다. (그림 3, 4) 공급자의 신뢰와 리디북스의 기술력, 리디북스 고객들의 충성도가 시너지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DBR minibox: ‘서점계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든 리디북스의 실험’ 참고.)



리디북스가 출판사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원래 전자책으로 출판할 계획이 없던 잡스의 전기 『스티브 잡스』의 전자책 출판을 이끌어냈다는 건 업계에서도 꽤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 CBO에 따르면, 잡스가 세상을 떠난 뒤인 2011년 말 그의 전기가 한국어로 출판될 때 많은 전자책 업체가 그 책의 전자 출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전자책 탄생에 혹은 활성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사실 스티브 잡스였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 내 독점 출판사였던 민음사는 전자책 출판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가장 작은 규모에 속하던 리디북스의 배 대표가 민음사를 설득해 전자책이 출판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전자책 업계 관계자들은 스티브 잡스의 전기가 한국 전자책 시장에서 하나의 ‘전기’가 됐다고 말한다. 워낙 두꺼운 책이었기에 들고 다니며 읽기에 부담이 있었고, 스티브 잡스가 전자책 탄생에 기여한 인물이었기에 많은 독자가 그의 전기를 전자책으로 구매했기 때문이다.

[DBR mini box I] <서점계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든 리디북스의 실험>

넷플릭스의 비약적 성장에는 ‘하우스 오브 카드’와 같은 자체 제작 오리지널 콘텐츠가 기여한 바가 매우 컸다. 이러한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 실험을 한국의 전자책 비즈니스에서는 리디북스가 최초로 시도했고 성공을 거뒀다. 미국 등에서 전자책은 전체 독서 시장에서 20%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지만 201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에서는 1~2%대였다. 우선 많은 이가 전자책을 한 번이라도 접할 기회를 만들어주고 이 과정에서 리디북스에 가입하게 하는 게 회사 입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미션이었다. 이를 위해 가볍게 모바일 디바이스로 소화할 수 있는 콘텐츠가 필요했다. 그래서 시작한 최초의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 프로젝트가 바로 ‘리더를 읽다’였다. 2011년 9월부터 2012년 8월까지 약 1년간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국내 다양한 분야 리더들의 인터뷰 기반 자서전 출판 프로젝트였다. 총 52권과 특별판 4권이 발행됐고, 권당 분량은 20~30분이면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짧았다. 전자책 사용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리디북스 회원은 평소보다 30~40%가량 증가했다.

리디북스는 3년여가 지난 뒤, 2015년 12월부터 약 1년간 ‘헬로월드’ 시리즈를 발간했다. 세상의 여러 이슈나 꼭 필요한 지식을 깊이 있게 잘 정리해주는 전문 서적과 대중 미디어의 중간쯤에 위치한 콘텐츠였다. 즉, 북핵 위기가 고조되면 북한 전문가가 빠르게 이슈를 정리해 30분 정도면 읽을 수 있는 분량의 얇은 책을 곧바로 출판하는 방식이다.i

전자책이 가진 ‘빠른 출판-다운로드-쉬운 소유’ 기능을 적절히 활용한 프로젝트였다. 총 100권이 발행됐고, 역시 출퇴근길 20~30분 집중 독서로 완독이 가능한 내용과 길이였다. 즉, 200자 원고지 150~200장 분량이어서 일반적인 단행본 원고량의 5분의 1, 가격은 권당 900원에서 최고 2100원까지로 거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양이나 가격 측면에서 부담이 없었던 셈이다. 또 ‘50년 장기 대여’ 등 새로운 유형의 상품을 개발해 가격을 낮추기도 했다. 음성으로 읽어주는 서비스의 기능을 수정 보완해 어색하지 않게 잘 들리도록 해 소비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리디북스 관계자는 “회원 수가 많지 않았던 시절에 ‘리더를 읽다’ 시리즈는 신규 회원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유용하게 활용됐으며, ‘헬로월드’는 이미 확보한 회원들이 리디북스를 다시 보는 계기로 작용했다”며 “리디가 직접 책을 생산하되 기성 저널리즘과 출판의 장점만을 결합하는 형태로 혁신하는 방식이었기에 의미가 컸다”고 설명했다.




3) 고객 행동 패턴, 업의 본질을 알려주다.
가독성이 높고 이용하기가 편리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또 ‘리더를 읽다’ 시리즈 같은 오리지널 콘텐츠가 인기를 모으면서 리디북스 회원 수는 급격히 늘었고 충성도도 높아졌다. 배기식 대표를 비롯한 리디북스 초기 멤버들이 발로 뛴 덕분에 출판사 확보도 무리 없이 이뤄진 상황에서 리디북스는 점점 대한민국 최고의 ‘전자책 독서 플랫폼’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렇게 충성도 높은 회원이 계속 리디북스 앱 안에서 책을 읽고, 구매를 하고, 활동을 하니 양질의 데이터가 쌓이기 시작했고, 이렇게 쌓인 데이터는 ‘고객 행동 패턴’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해 알려주기 시작했다. 이런 데이터를 기반으로 마케팅 아이디어가 나왔고 프로모션 전략이 수립됐다. ‘감’이나 프레임워크에 기반한 마케팅과 프로모션은 설 자리가 없었다. 고객 행동 패턴에 기초한 프로모션과 마케팅 아이디어가 구체화된 걸 살펴보면 [표 3]과 같다.


‘123더블포인트’ 이벤트는 2012년 8월 처음 시작됐다. 매년 초 많은 이가 ‘독서 결심’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달 초가 되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수가 는다. 월말 쯤 ‘아, 내가 올해, 혹은 이번 달에 너무 책을 안 읽었구나’라고 생각하다가 ‘다음 달부터 평소 읽고 싶었던 분야의 책을 꼭 사서 읽자’는 결심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실제 리디북스의 구매 데이터상으로도 드러났다. 리디북스 관계자는 “보안상 이유로 패턴 전체를 공개할 수는 없지만 매월 초, 특히 1일부터 3일 사이에 판매량 상승이 눈에 띄었고 이를 더 끌어올리기 위해 아예 프로모션을 정기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며 “지금은 리디북스의 상징과 같은 행사가 됐다”고 말했다.

그다음에는 ‘눈비 이벤트’가 기획됐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 역시 눈이 오거나 비가 오는 날 전자책 판매량이 늘어나는 데이터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시작한 프로모션 기획이다. 눈이나 비가 오면 전자책 관련 카페나 커뮤니티에서는 리디북스 회원들이 ‘눈 옵니다’라거나 ‘오늘 선릉에 비 왔어요. 달립시다’라고 글을 올리며 일종의 게임처럼 이벤트에 참여하고 있다.

‘십오야 이벤트’는 독자들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3 더블포인트 이벤트’가 정착하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해당 이벤트를 놓쳤거나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 달 초까지 기다리기 지루한 독자들이 ‘월 중간, 15일 전후로 이벤트를 하나 기획해달라’고 요구했고 이를 리디가 받아들여 만든 프로모션이다. 독자들과의 피드백이 용이한 전자책 구매/리뷰 플랫폼을 가진 리디북스이기에 123 더블포인트 이벤트가 시작된 지 1년 만에 곧바로 아이디어를 만들어 실행할 수 있었다.



데이터와 독자 피드백은 단순히 프로모션 아이디어 도출이나 마케팅 전략 수립과 실행에만 도움을 준 게 아니다. 리디북스 회원들의 구매 패턴, 독서 패턴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 마케팅 전략, 프로모션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중요한 통찰 하나를 얻어냈다. 막연하게 ‘IT 기반 디즈털 비즈니스 기업’ 정도로 정의하고 있던 리디북스의 정체성이 ‘심야엔터테인먼트업’으로 완전히 재규정됐다. 이는 어느 정도 회원 수가 확보되고 다양한 프로모션과 정기 이벤트를 통해 충성고객이 늘어난 시점부터 하나의 재미난 패턴이 발견되면서 시작된 논의였다.

[그림 5]는 리디북스가 DBR에 공개한 특정 시점의 리디북스 앱과 사이트, 즉 리디북스 서점의 트래픽 추세 그래프다. 자세히 보면 저녁 6시 이후부터 자정까지 트래픽이 가파르게 올라가다가 새벽부터 급격히 떨어지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패턴은 매일매일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입자가 본격적으로 늘었던 2012년 이후 이러한 패턴이 나타났고, 리디북스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2014년 4월 전사 워크숍을 계기로 전 사원들과 트래픽 데이터 패턴을 보며 ‘심야엔터테인먼트’라는 개념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데이터가 말하는 진실을 기반으로 전 직원의 합의 속에 해당 개념을 리디북스의 업으로 정의했다. 큰 전략부터 세세한 기획과 실행도 많이 변했다. 온라인 서점, 전자책 서점의 가장 중요한 상징인 ‘메인화면’에 걸리는 추천 도서 목록을 오후 7시에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앱 푸시와 리디북스 알림센터의 추천알림/입고알림 역시 저녁시간대로 싹 바꿨다. 콘텐츠별, 장르별 프로모션 기획에도 반영돼 심야 한정 할인 이벤트 등 비정기적 이벤트도 만들어졌다.

이처럼 리디북스의 경쟁자는 넷플릭스와 같은 영상 콘텐츠 제공업체, 유튜브와 SNS 등 소셜미디어, 그리고 기존 TV와 IPTV 등 밤에 침대에 누워 자기 전에 보거나 즐기는 그 무엇들이었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리디북스가 경쟁해야 할 대상은 온·오프라인 대형 서점이 아닌 IT 기반의 기술력 강한 디지털 콘텐츠 제공 혹은 플랫폼 기업들이었다는 게 확인된 셈이다.



기술력에 집중하고 고객에 ‘올인’, 어느새 ‘책덕’ 플랫폼으로
서두에서부터 계속 강조해왔지만 리디북스는 다른 그 무엇보다 ‘기술경쟁력’을 우선으로 삼았다. 더 빠르고 편리하게 좀 더 종이책에 가깝게, 눈이 덜 아프게 전자책을 태블릿이나 스마트폰에서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모든 역량을 투입했다. 스스로 ‘서점’이라기보다 ‘IT벤처기업’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개밥먹기’라는 IT 기업 특유의 고객 불편 체험 방법을 활용하기도 했다. ‘개밥먹기’라는 단어는 리디북스에서 만든 건 아니다. IT 업계의 속어로 ‘직접 만든 프로그램을 스스로 이용해보는 것’을 의미한다. 리디북스 개발자들은 자신들이 개발한 전자책 뷰어 애플리케이션을 일상에서 적극 활용하면서 불편함을 찾아냈고, 2016년 11월부터는 개발자들이 자체적으로 ‘리디북스 앱’이나 ‘리디북스 리더기’로만 읽는 이른바 ‘개밥먹기 독서모임’을 운영하면서 실제 독서 상황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용자 경험’을 직접 경험하고 타사 리더기나 타사 앱과의 장단점 등을 비교하며 ‘고객의 소리’가 나오기 전 선제적으로 개선안을 마련하고 있다. ‘개밥먹기’가 실제 큰 사업 성과로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2013년 만화를 좋아하는 개발자들이 스스로 리디북스 앱으로 만화를 보던 중 화질에 불만을 느꼈고, ‘고화질 만화’를 보기위해 자발적으로 개발에 뛰어들었다. 이를 통해 리디북스는 국내 최초 고화질 만화 서비스 제공자가 됐다. 이러한 개발자들의 ‘개밥먹기’는 ‘기술 중시’ 문화와 ‘고객 중시’ 문화가 시너지를 낸 사례로 볼 수 있다.

1) 기술력과 고객 중시 전략의 선순환
한 대형 포털의 전자책 관련 카페에서 최근 진행한 ‘주력 전자책 서점 투표’에서 리디북스는 실제 전체 시장점유율보다 높은 55.2% 득표율을 얻어 23.2%를 차지한 A사를 더블스코어로 따돌렸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특히 전자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좀 더 인정을 받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리디북스가 고객들로부터 인정받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아침마다 진행하는 ‘TOC(Tears of Customers) 미팅’을 꼽는 이들이 많다. ‘고객의 눈물’을 의미하는 TOC는 2010년 창업 초기부터 시작됐다. 매주 금요일 오후 한 주간의 고객 피드백을 전 직원이 모여 리뷰하는 시간을 가졌던 게 그 시초다. 2012년부터 회원 수가 급증하고, 직원도 많아지고, 업무도 세분화되면서 효율적으로 TOC를 진행하기 위해 ‘월간 TOC’라는 전사 미팅을 진행하면서 고객 피드백은 물론 회사 성장 추이를 함께 짚어보는 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동시에 고객 응대 부서에서는 고객의 피드백을 메일 전체 임직원에게 전송했다. 지금은 ‘매일 고객한테 욕먹는다. 가끔 칭찬도 듣는다’는 컨셉으로 전 직원이 매일 TOC 미팅에 참여하고 있다. 적게는 1~2개, 많게는 3~4개의 대표적인 TOC를 뽑아 대표 한 명이 이를 낭독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역시나 고객 응대부서에서 선정해 보내준 것들이다. 전사 인원이 한자리에 모여서 진행하지는 않고 층별로 나눠서 진행한다. TOC 미팅에서 나온 수많은 고객 불만은 ‘누군가의 잘못’으로 책임을 떠넘기는 방식이 아니라 기술개발과 제도 개선, 시스템 구축으로 해결해왔다. 기술력이 강한 기업이라는 자존심과 그렇게 구축된 역량, 스타트업 특유의 유연성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또 ‘고객의 싫은 소리’가 ‘나한테 당장 큰 위협’이 되기보다 ‘개선의 방향’을 제시해준다고 생각하니 직원들도 TOC 미팅을 단순한 요식 행위나 ‘귀찮은 일’로 치부하지 않게 됐다.



이동진 CBO는 ‘이제는 고객 수도 굉장히 많고 TOC 미팅에서 나온 문제는 대부분 지엽적인 것이 많은 상황이다“며 ”그럼에도 아직 우리가 생각지 못한 뼈아픈 지적이 나올 때가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매일 고객의 목소리와 함께 일을 시작한다는 일종의 ’문화‘로서 이 미팅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기술과 플랫폼 관리에 기반해 늘 고민을 하고 개선을 하다 보니 리디북스에는 ‘책덕후(오타쿠의 한국적 표현)’들이 모여들었다. 사실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이래 가장 초기부터 등장한 덕후가 ‘책덕(후)’이었다. 또 과거에나 지금이나 여전히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되는 덕질’이 책에 집착하고 책을 수집하는 일이다. 일단 활자를 좋아해야 하고, 지식을 습득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거나 소설이나 시 등 다양한 ‘활자 엔터테인먼트’를 해독하고 즐길 수 있는 수준이 돼야 한다. ‘책덕’이 다른 덕후집단에 비해 유난히 프라이드가 강한 이유다. 더군다나 전자책은 여기에 ‘첨단’ 기술까지 들어가 있기에 이 플랫폼에서 활동하고 전자책을 즐기는 ‘(전자)책덕후’의 자존심과 섬세함은 상당한 수준이다. 실제로 리디북스의 책 리뷰 관련 변화를 보면 책덕들의 섬세함과 자부심 혹은 자존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소설 등에 관한 리뷰에는 ‘스포일러 여부’를 표시하도록 했다. 엄청난 기대감을 갖고 소설을 사는 사람들이 리뷰를 잘못 읽고 중요한 반전이나 결말 내용을 미리 알게 되는 일이 발생했고 이에 대해 항의를 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실제로 구매한 사람만이 리뷰를 남길 수 있는 곳과 아무나 리뷰를 남길 수 있는 곳도 따로 분리했다. 읽기는커녕 사지도 않고 제목만 보고 혹은 누구한테 들은 얘기만 갖고 엉터리 리뷰를 남기는 것을 걸러내기 위해서였다. 리뷰에 ‘좋아요/싫어요’를 나눠서 누를 수 있던 것 역시 고객들의 요청에 따라 ‘좋아요’만 남기고 없앴다. 자신이 정성스레 쓴 리뷰가 ‘비추(천)’당한다는 사실 자체가 책덕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덕후들의 요구가 적극 반영되고 이를 통해 플랫폼의 세세한 부분에서 개선이 이뤄지면서 책덕들의 충성도도 높아졌다.

2) 관찰, 통찰, 그리고 전략
리디북스의 고객 중시 전략과 문화는 단순히 ‘데이터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인사이트를 얻는 것’이 전부 가 아니다. 관찰과 인터뷰 등 정성적 방법을 통해서도 통찰을 얻는다. 대표적인 기획이 바로 ‘밝은 점 프로젝트’였다. ‘밝은 점’이란 칩 히스 등이 저술한 책 『스위치』에 나오는 개념으로 ‘장점’이나 ‘강점’의 의미로 사용할 수도 있고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게 해주는 숨은 어떤 것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 

리디북스는 자사 앱을 가장 많이 사용했고 가장 많이 책을 구매한 최우수 고객을 직접 찾아가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리디북스 입장에서 ‘밝은 점’에 해당하는 고객을 찾아 그들의 특성을 파악하고 ‘어두운 점’에 위치한 고객들을 ‘밝은 점’으로 끌어들일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2014년 3월부터 시작해 10월까지 총 10명의 고객을 만났다. 이듬해인 2015년에는 추가로 5명의 독자를 만났다. 고객 1명을 직원 2~3명이 찾아가는 방식이었고, 주로 카페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허락해주는 고객에 한해 아예 자택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고객 개개인의 라이프스타일과 취미 활동, 책 구매 성향과 독서 습관, 전자책 사용 습관 등을 묻고 관찰했다. 리디북스 사용 후기와 개선 요청사항을 모두 들었고 그 와중에 그들이 주로 활용하는 IT 기기, 집 방문이 허락된 경우 종이책의 구성 방식과 인테리어 취향 등 모든 것을 살폈다. 이를 통해 리디북스의 ‘헤비 유저’ 혹은 ‘핵심 고객’의 이미지가 완성됐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고객들이 ‘소장감’을 느끼기 위해 도서를 구매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고 특히 전자책의 장점이 ‘소장감’을 주지만 장소는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에 착안 50권에서 100권에 이르는 시리즈물을 판매, 장기 대여 등 다양한 형식으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특히 현재는 규제로 중단된 ‘50년 장기 대여 서비스’ 등은 저렴한 가격에 리디북스 ‘책덕’들이 향수를 갖고 있는 ‘고전’ 혹은 ‘명작’을 수십 권씩 부담 없이 소장할 수 있게 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3년 5월 로맨스 장르 독자들을 모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8회에 걸쳐 진행한 ‘독자 초청 좌담회’도 리디북스가 고객을 이해하는 중요한 장치였다. 장르별, 독자유형별로 나눠서 진행된 이 좌담회는 고객 6~8명을 초청해 전문 진행자 1명이 진행하는 형식이다. 리디북스 서비스는 물론이고 독서와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 리디북스를 이탈해 종이책만 읽는 독자로 돌아간 회원을 찾아내 그들을 따로 모으거나, 아직 리디북스를 쓰지 않고 있는 전자책 유저들을 모아서 진행한 적도 있다.

‘밝은 점 프로젝트’ ‘좌담회’ 등을 거치면서 리디북스는 전자책 사용자들의 유형을 분류할 수 있었다. 첫째 유형은 ‘진성 책덕’으로 책을 정말로 좋아하고 열심히 읽는 독자층이다.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책을 적극적으로 찾고 독서 욕구 자체가 매우 강한 특징이 있다. 두 번째 독자 유형은 텍스트나 콘텐츠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의 ‘힙 한 아이템’으로서 전자책이나 종이책을 인식하고 책을 살 때 함께 주는 굿즈, 책이 어떤 맥락하에 있는지, 즉 어떤 명사가 읽은 책인지, 유명한 드라마나 영화에 나온 것인지 등을 고려해 구매를 하는 ‘구매행위 자체를 즐기는’ 회원들이었다.

마지막 유형은 ‘장르 덕후’였다. 일반적으로 베스트셀러, ‘힙 하다고 소문난 책’, 고전이나 명작 혹은 평단의 호평을 받은 책 등은 카페나 지하철 등 오픈된 공간에서 자랑스럽게 읽는다. 그러나 다소 마니아 성향이 강한, 가벼운 로맨스 소설이나 남자 아이돌을 소재로 한 웹소설과 만화, 판타지 소설 등은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인터넷 등에서 모여 자체적으로 공유하고 비공식 출판 등을 통해 소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에게 ‘내가 보는 책’의 표지를 타인이 볼 수 없고 동시에 ‘소장감’도 느끼게 할 수 있는 전자책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커뮤니티에서만 통용되는 책이라 구하기 어렵다는 문제 역시 전자책으로는 해결 가능했다. 굳이 종이로 출판하지 않아도 되는 전자책 특성 덕분이었다.(DBR minibox: ‘생각보다 훨씬 큰 틈새, 로맨스, 그리고 장르문학’ 참고.)




[DBR mini box II] <‘생각보다 훨씬 큰 틈새, 로맨스와 판타지, 그리고 장르문학’>
리디북스는 장르문학 시장을 일찍 인지하고 로맨스 소설 마니아층부터 공략하기 시작했다. 본문에서도 언급했듯 로맨스 소설 같은 장르문학 등은 남에게 굳이 내가 뭘 읽고 있는지 보여주진 않되 소장감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전자책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실제로 일반 서적과 달리 종이책이 나오기 전 전자책으로 먼저 출판되는 경우가 많은 장르이기도 했다. 2012년 가을에는 사무실의 방 하나를 오직 ‘로맨스 소설 분야 강화 프로젝트 TF’로 꾸려놓고 8~9명의 직원이 상주하면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로맨스 소설 장르 독자들을 끌어모으고, 어떤 소설들을 어떻게 론칭하고, 배치하고 추천할지를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2013년 5월 첫 독자 초청 좌담회를 가졌다. 리디북스 사상 첫 독자 간담회가 ‘로맨스 소설 독자 대상 좌담회’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과정에서 리디북스만의 ‘로맨스 키워드 검색 기능’이 탄생해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독자들이 원하고 선호하는 스토리나 스타일의 로맨스 소설을 찾아주는 기능이었는데 현재 이 알고리즘은 다른 장르문학에까지 확장해 적용하고 있다. 다른 전자책 업체에서도 이후 이를 벤치마킹했다. 물론 ‘선점 효과’로 인해 리디북스가 독보적으로 많은 로맨스 소설 마니아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이들이 2012년, 그리고 2013년부터의 리디북스 급성장을 견인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말처럼 리디북스는 아예 2013년 7월부터 1년 6개월 이상 ‘리뷰의 여왕’이라는 이벤트를 진행해 리디북스 로맨스 소설에 리뷰를 남긴 고객을 대상으로 추첨을 통해 경품을 제공했고, 이는 타 회사에서 도저히 확보할 수 없는 양과 질의 리뷰를 리디북스 플랫폼에 쌓는 성과를 낳았다. 이런 성과를 토대로 현재 리디북스는 로맨스 소설 자체 출판사인 스튜디오디컴퍼니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장르문학의 가능성과 시장성을 확실하게 확인한 리디는 이후 판타지 소설, 만화, 팬픽(남자 아이돌 간의 사랑과 우정을 그리는 팬들의 픽션)만화와 웹소설 등의 장르문학으로 로맨스 장르의 성공 공식을 조금씩 변형해 적용해 나가고 있다. 교보나 예스24 등 기존의 온·오프라인 서점, 종이책을 출판하던 출판사들이 근엄함과 진지함을 내세우다가 놓쳐버린 시장을 스타트업 특유의 유연성과 민첩함으로 리디가 치고 들어간 셈이다.

리디북스는 앞서 제시한 다양한 방법의 정성적 접근을 통해서 고객과 관련해 데이터로만 확인할 수 없었던 통찰을 얻고, 고객 유형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고객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들을 만들기도 했다. 세 유형의 독자층을 각각 공략할 전략을 찾고 마케팅과 프로모션을 실행했다. 뛰어난 기술력에 기반해 설계된 리뷰, 실제 독서율 추적, 추천 시스템 등은 이 세 종류의 독자층을 모두를 만족시키는 플랫폼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특히 실제 독서율 추적은 독자들이 단순히 ‘구입(다운로드)을 얼마나 했는지’만을 갖고 책에 대한 선호와 인기를 파악하던 기존 서점업계나 출판업계의 관행을 완전히 깨는 방식이었다. 독자들이 구입한 책을 실제로 읽기 시작했는지, 읽기 시작했다면 얼마만큼 읽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췄는지를 추적할 수 있었기에 독자별 추천 시스템의 강화는 물론 ‘자체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에도 큰 도움이 됐다.



성공 요인 분석 및 시사점
세계 정보기술 시장은 이제 FANG(Facebook, Amazon, Netflix, Google) 시대로 불린다. 이들은 모두 정보 서비스 플랫폼으로 마치 20세기 초 전기, 철도, 전화 산업에서 몇몇 기업이 그랬듯 독점적 지위를 확보했다. 특히 영화와 드라마 콘텐츠를 유통하는 넷플릭스는 제작사로부터 콘텐츠 판권을 사서 온라인으로 서비스하는 데 월 1만 원으로 영화 9000여 편, TV프로그램 2000여 편을 볼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며 급성장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넷플릭스의 시가총액이 엔터테인먼트 및 미디어 업계의 최강자로 꼽히는 월트디즈니를 넘어서기도 했다.

카네기멜런대의 마이클 스미스와 라울 텔랑(Michael Smith & Rahul Telang) 교수는 그들의 저서 『Streaming, Sharing, Stealing』 6

에서 콘텐츠 유통의 미래를 전망하며 콘텐츠 소비자들이 온라인으로 옮겨가면서 이전과는 달리 데이터 분석에 기반한 새로운 사업모델이 출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방송사들이 오직 시청률만을 보고 있을 때 넷플릭스는 이미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온라인상에서 3000만 명 이상의 시청자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드라마 시청 패턴을 분석했다. 이를 통해 더 많은 시청자가 '몰아보기'나 '다시보기'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넷플릭스는 이런 고객 행동 정보를 활용해 콘텐츠 유통뿐 아니라 ‘하우스 오브 카드’와 같은 인기 드라마 시리즈를 시즌별로 통째로 제작하는 결정을 내렸다. 또한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시청자 그룹별로 서로 다른 예고편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렇게 데이터 활용을 잘하는 IT 기반 온라인 플랫폼이 오프라인 경쟁자들보다 약진하고 있는 양상은 콘텐츠 시장 전반에서 볼 수 있다. 기존 도서업계에서는 책의 판매만을 보고 있었다면 리디북스는 독서율 추적과 같이 어떤 책을 얼마나 빨리 읽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있었다. 즉, 전자책 시장에서도 누가, 어떤 책을, 어느 속도로 읽었는지를 알고 있는 리디북스와 같은 온라인 플랫폼이 성장 중이라는 얘기다.

서적, 음악, 영화의 오프라인 사업자 대비 인터넷 사업자 시장점유율이 완전히 역전되는 시점을 보면 미국에서도 음반산업은 이미 18년 전부터, 서적판매업은 5년 전부터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미국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 유통 플랫폼의 격차가 심각하게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표 4)



콘텐츠의 온라인 판매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고객에 대한 정보다. 어떤 고객이 얼마나 이 콘텐츠의 가치를 인정하고 만족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고 이에 기초해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느냐가 성공의 관건이다. 고객이 전자책을 사고 읽으면서 얻는 경험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IT를 기반으로 고객 서비스를 해야 한다. 전자책에 있어 기술은 사람들에게 효율적으로 콘텐츠를 소비하게 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전자책에 대한 다양한 수요와 책을 읽는 다양한 패턴에서 고객과 접점이 될 수 있는 모바일 앱과 단말기, 결제 프로세스 등은 고객의 미묘한 감정과 심리 상태를 잘 반영해야 한다. 무형의 자산을 유형의 돈을 주고 소비할 때 그에 걸맞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리디북스는 초기부터 사용자 경험을 강조하며 고객들이 효율적으로 시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도 개선하고 동시에 고객 서비스를 높여 불만을 해소했다. 특히 유료 구매자들의 소소한 불평을 그냥 넘기지 않고 시스템 개선의 피드백으로 활용하는 노력이 돋보였다.

책에 대한 선호는 개인별로 다르기에 완벽한 개인화 추천을 위해서는 책의 속성 분석 및 특성이 세분화돼야 한다. 리디북스는 여러 장르의 전자책과 소장용 상품들을 고객 요건에 맞게 적시에 제공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결국 개인화된 서비스를 통해 개별 사용자의 선호 콘텐츠를 제시한 것이다.

빅데이터 분석은 고객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사업 기회도 창출한다. 지금은 경영자의 감이나 유행 취향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기보다는 데이터 분석에 기초한 경영이 필요한 때다. 시장 주도적인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들은 고객에 대한 정보 확보 및 관리 측면에서 우월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영화 '머니볼'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은 신념과 편견으로 움직인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제거하고 데이터 기반의 의사결정을 한다면 명확한 이점이 있다." 어떤 분야에서 경험을 쌓을수록 사람들은 더욱 강한 신념과 편견을 갖게 되고 그게 바로 승리를 놓치는 약점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리디북스와 같은 온라인 콘텐츠 플랫폼은 기존 콘텐츠 사업자들의 영역을 더 위축시킬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기존 의사결정 방식이 데이터 기반으로 바뀌는 게 문화적으로 쉽지 않다. 경험과 '감'으로 의사결정하던 경영진이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시스템을 구축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둘째, 플랫폼이 고객 정보를 독점하고 있기에 나중에 참여한 기업은 정보량에 제한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데이터 기반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표 5]는 플랫폼 사업자들이 콘텐츠 제공자에게 얼마나 제한적으로 고객 정보를 제공하는지를 보여준다.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 중 애플 아이튠즈 및 아마존에서 일부 고객 정보와 고객 데이터가 콘텐츠 사업자에게 전달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플랫폼 사업자들은 콘텐츠 제공자들이 거래정보나 고객 데이터를 확보하는 것, 고객에게 직접 홍보를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고객 데이터를 더 많이 축적할수록 고객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다. 따라서 성장 잠재력이 높은 사업 영역을 파악해서 수직적 통합을 이룰 가능성이 커진다. 리디북스는 고객 정보를 기반으로 자체적으로 제작한 오리지널 콘텐츠 비중을 더 늘려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콘텐츠 가격전략 및 상품 번들링 등 데이터 분석을 기초로 지속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리디북스가 전자책 분야의 넷플릭스로 부상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필자 소개>
전성민 교수는 서울대에서 경제학 학사, 동 대학 경영대학원에서 경영정보 박사 학위를 받았다. IBM과 삼성에서 다수의 IT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서울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창업자로 일한 경력도 있다. 벤처회사 등과 관련한 데이터 분석을 통한 실증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P2P lending, 블록체인, 소셜커머스, 온라인 게임 등 새로운 사업 모델을 분석 중이다. 역서로 『페이스북 시대』가 있다.

<편집자 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김수진(성균관대 영상학과 4학년) 씨와 송연지(인하대 아태물류학부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불편함’이야말로 ‘창업의 어머니’다. 많은 스타트업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이 본질을 놓쳐서다. 화려한 기술 발전과 IT 디바이스 등에 매몰돼 ‘이걸 활용해 뭔가 비즈니스를 할 순 없을까’라는 고민에서 출발하고 소비자의 니즈 대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 흥미로운 것에 집착한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흥미롭기만 한 제품이나 서비스에 지갑을 잘 열지 않는다. 많은 IT/모바일의 스타트업 실패공식이다.
➡IT는 비즈니스를 효율적으로 성공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지 비즈니스 그 자체는 아니다. 문제를 해결한다는 본질 그 자체가 비즈니스 이다.

스타트업의 성공은 결국 ‘치명적 불편함’ 혹은 ‘문제’를 해소할 때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김 대표의 이 말은 마켓컬리의 철학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최근 ‘플랫폼 비즈니스’가 스타트업의 대세이자 새로운 성공 비즈니스 모델의 대표격이 됐지만 사실 유통업만큼 플랫폼 비즈니스의 본질에 가까운 것도 없다. 우선 양질의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공급자가 있어야 하고 소비자를 플랫폼 안으로 유인해 구매를 하게 만들어야 한다. 








DBR Case Study: 마켓컬리의 유통 혁신 전략

매일 아침 현관문 앞에 놓인 선물, 불편함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샛별’이 됐다

Article at a Glance

마켓컬리는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불편’을 비즈니스 기회로 바꿔냈다. 저온유통체계(콜드체인)와 물류창고까지 필요한 ‘신선식품 유통업’을 창업 아이템으로 잡고 2년여 만에 이를 궤도에 올렸다. 스스로 유통 ‘스타트업’이 아니라 ‘유통’ 스타트업이라 여기며 ‘유통’에 방점을 찍고 ‘유통의 본질’에 집중했다. 많은 벤처들이 화려한 디자인의 앱과 현란한 빅데이터/IT 활용에만 골몰할 때 이 모든 것들을 그저 ‘유통을 더 잘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했다.

 

성공요인과 시사점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고객의 잠재욕구를 제대로 찾아냈다.

2) 소비자의 가격민감도에 따른 적절한 가격을 제시했다.

3) 효율적 유통망 구축에 일단 성공했다. 이를 보완하고 혁신하는 게 향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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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현승준(가톨릭대 경영학과 3학년) 씨와 최원일(연세대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진짜 내일 아침에 배송이 와요? 이거 사기 아니에요? 업체 이름도 처음 들어봐요. 아무래도 이상한데….”

2015년 5월 말, 마켓컬리가 서비스를 시작하자 한 30대 여성은 의심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이렇게 따져 물었다. 유기농 채소를 소량으로 산지에서 직접 가져와 하루 만에 소비자의 집 현관문 앞까지 가져다준다는 발상은 이런 의심까지 불러일으켰다. 그들이 배달하는 채소보다 더 신선한 발상이었지만 현실에는 난관이 가득했다. 신선식품은 본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콜드체인(저온유통체계)’을 갖춰야 한다. 사소한 문제만 생겨도 식품의 질이나 안전성 논란이 생길 수 있다. 제법 규모가 큰 기업들에도 초기 투자 및 관리 비용이 많이 드는 어려운 비즈니스다.

그런데 이걸 경험과 노하우가 전무한 창업기업이 해냈다. 많은 이들의 부정적 전망에도 2년을 훌쩍 넘겨 비즈니스를 궤도에 올렸다. 2015년 5월부터 시작된 인터넷·모바일 식품유통 서비스 마켓컬리1 얘기다. 그들이 만들어낸 아침 7시 전 새벽배송 시스템은 이제 신선식품 배송체계의 대세가 됐다. 마켓컬리가 ‘샛별배송’이라는 명칭으로 시작한 이 서비스는 밤 11시까지 마켓컬리 사이트와 앱에서 신선식품 등 각종 상품을 주문하면 다음 날 아침 7시 이전에 집 앞까지 배달해준다. 9800원이라는 최소 주문 가격만 맞추면 배송료는 따로 내지 않아도 된다. 산지에서 냉장·냉동 상태로 이송돼 마켓컬리의 식품 전용 냉장·냉동 창고에 잠시 보관된 후 최대 12시간 보랭이 가능한 박스에 담겨 배송된다. 즉, 오늘 아침에 밭에서 딴 채소가 내일 아침 식탁에 오를 수 있다. (‘마켓컬리의 상징, 샛별배송’을 참고) 뒤늦게 신선식품 전문 유통 비즈니스에 뛰어든 유통 대기업들도 이제 당연히 새벽배송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는 상황이다.2


DBR mini box I
 
마켓컬리의 상징, 샛별배송

본문에서도 언급했듯이 마켓컬리의 초기 차별화 요소 중 하나는 바로 밤 11시 전까지 주문하면 다음 날 아침 7시 전에 물품을 받아볼 수 있는 새벽배송, 이른바 ‘샛별배송’ 서비스였다.

처음 이 아이디어를 생각하게 된 배경에는 다른 유통 플랫폼의 온라인 장보기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김슬아 대표가 겪었던 불편이 자리 잡고 있다. 주문을 해놓고 제때에 집에 가지 못하면 현관 앞에 놓인 채소가 시들어버리거나 정말 중요한 물건일 경우 일하던 중간에 나와서 받아야 하는 등의 여러 불편함을 겪으면서 ‘내가 항상 집에 있는 시간은 언제인가’를 고민했고 그게 바로 출근 전이라는 당연한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 발상의 전환은 매우 중요한데 심야시간대에 배송차량이 움직이면 우선 교통 체증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소비자는 본인이 주문한 물건이 새벽 4시에 도착했든, 아침 6시가 넘어서 도착했든 ‘눈 뜨자마자 받아보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랭만 신경써준다면 소비자는 잠옷 바람으로 현관에 나와 방금 배송된 식재료를 ‘선물’처럼 받아볼 수 있다는 얘기다. 당연히 ‘택배를 수령하기 위해 집에서 대기하는 시간’이라는 개념도 사라진다.

어차피 중간 유통단계가 없으니 이 방법을 사용하면 ‘농장에서 식탁까지’ 이르는 시간을 일관되게 관리하면서 ‘24시간 이내’라는 마켓컬리의 목표를 맞출 수 있었다.

현재 이 서비스는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만 이뤄지고 있다. 처음에는 서울 전역과 경기 지역 일부에서만 진행했으나 무리가 안 가는 선에서 조금씩 확장해 김포, 광주, 남양주 등 처음 서비스가 시작할 때에는 ‘커버’하지 않던 지역에도 샛별배송이 이뤄지고 있다. 2015년 말, 세종시에도 대전까지 대형 차량으로 배송해 주변 지역으로 재배송하는 방식의 샛별배송을 시도했으나 3개월 정도 시행 후 물량 대비 비용 이슈로 일단은 멈춘 상태다.

서울과 수도권 샛별배송을 위해서 2016년 7월부터 서울 송파구 장지동에 물류창고를 임대해 운영하고 있다. 그전에는 경기도 하남시의 물류창고를 임대해 활용했다. 처음 서비스를 론칭하던 때에는 3주 정도 장안농장의 도움을 받아 충주의 물류센터 일부를 임대해 활용하기도 했다. 자체 임대 물류센터, 즉 마켓컬리만의 물류창고가 없었던 이때에는 매일 밤 충주에서부터 고속도로를 타고 배송을 올라가야 했기에 마켓컬리 창업멤버들은 거의 밤잠을 자지 못했다. 폭우가 내리는 등 기상상황 악화 등이 발생하면 배송이 늦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상황을 주시하고 사고가 나면 대책을 마련해 ‘반드시 아침 7시 전에 물건을 갖다 놓는다’는 원칙이 지켜지도록 했다. 초기에 고객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동 창업 멤버 중 한 사람이 이전에 자신이 운영하던 콜드체인 업체에서 일하던 배송기사(지입차주)들을 끌어들였고, 현재는 다수의 지입사를 복수 선정해 130여 대의 배송차량이 운영되고 있다.



마켓컬리는 현재 눈부신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처음 서비스가 시작된 직후 직원과 지인들의 구매로 시작된 이 서비스는 이후 서울 강남지역에서 주부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회원 수가 빠르게 늘었다. 서비스 출시 1년 만인 2016년 6월 기준으로 가입자는 10만 명 이상이 됐고, 2년 만인 2017년 6월을 기준으로 28만 명을 넘어섰다. 월 매출액 역시 1년 만에 20억 원을 넘어섰고, 2년 만에 40억 원 규모가 됐다.3  마켓컬리가 제공한 최신 자료에 따르면 2017년 9월 초를 기준으로 누적 가입자 수는 33만 명이고 월 매출액은 약 50억 원이다. (그림 1, 2) 창업 후 두 달 뒤인 2015년 7월 말에 회원 3만 명 돌파 기념 이벤트가 진행된 것을 돌이켜보면4  2년 만에 가입자 수 기준 10배 성장이 이뤄진 셈이다. ‘샛별 배송’ 총 누적건수는 95만 회를 넘겼다. 첫 구매고객 중 재구매에 나서는 비율도 60%에 가까워 매우 높은 편이다. 상품 구색도 서비스 출시 당시 25개 품목에서 현재 1700개로 늘어났으며 자체상표(PB) 제품의 가짓수도 150여 개에 이른다. 창업 당시 투자금 50억 원을 모았고 2016년 겨울 다수의 투자회사로부터 총 170억 원의 투자를 받아 큰 화제가 됐다. 벤처투자자들로부터 지속적인 성장 가능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 같은 지난 2년간의 마켓컬리 성적표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마켓컬리가 ‘성공 궤도’에 올랐다는 사실에는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다. 다만 그 핵심 성공 요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업계와 학계 전문가들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르다. 혹자는 1∼2인 가구가 대세가 된 한국 사회의 인구구조 변화를 성공요인의 중심에 놓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마켓컬리가 ‘치밀한 O2O(Online to Offline)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냈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물류 시스템이나 IT 분석 시스템 등에 방점을 찍고 설명하기도 한다. 사실 어느 한두 개 요인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게 비즈니스의 성공과 실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 요인을 몇 개로 추리고 정리해 분석하는 일은 비즈니스 교훈과 시사점 도출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DBR은 이를 위해 마켓컬리에 대한 기존 성공요인 분석 기사와 아티클을 찾아 정리하고 김슬아 마켓컬리 대표(더파머스 대표) 등 회사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긴 이야기를 짧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불편함이 아이디어를 낳았고, 아이디어를 발로 뛰며 실행했으며, 그렇게 창업한 회사가 ‘업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관리하고 성장시켰다. 김 대표는 아직도 “성공한 게 아니다.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마켓컬리가 이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는 건 업계의 공통된 평가다.

유통 ‘스타트업’이 아닌 ‘유통’ 스타트업!

1. ‘불편함’은 ‘창업의 어머니’

글로벌 금융회사와 컨설팅 회사 등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아가던 김슬아 대표가 ‘식품’과 ‘식품 유통’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결혼 후 2년이 채 되지 않아서였다. 이미 결혼 전부터 자타가 공인하는 미식가였고 ‘식재료의 질’에 집착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랬던 그가 막상 맞벌이 주부로 살다보니 ‘장을 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임무가 됐다. 컨설턴트로 일하던 그의 남편도 시간이 없기는 마찬가지. 오픈마켓이나 대형 유통기업 사이트에서 주문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배송을 받는 시간에 맞춰 집에 있기도 어려웠고, 배송된 식재료의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례도 많았다. 낮에 주문해서 저녁때 받은 상품, 특히 신선 채소의 경우 시들해지기 일쑤였고 다른 신선식품들도 날이 더우면 혹시나 상할까 걱정되기도 했다. 더군다나 부부의 퇴근시간도 일정하지 않았고, 일하다 날을 넘겨서 들어오는 경우도 많았다.

온라인 매장의 구성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화면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상품이 나열돼 있었고, 마우스 스크롤을 내리다가 혹은 손으로 화면을 내려가다 어느 순간 ‘아, 모르겠다’며 창을 닫아버리는 일이 많았다. 지나치게 많은 선택지가 문제였다. 전자제품처럼 가격별로, 기종별로 분류해서 보는 것도 여의치 않은 신선식품과 식재료 쇼핑은 ‘잦은 포기’와 ‘빠른 포기’를 유발했다. 그러다 김 대표는 어느 날 깨달았다. 그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지금 겪고 있는 문제와 고민이 ‘지독한 불편함’이라는 사실을.

‘불편함’이야말로 ‘창업의 어머니’다. 많은 스타트업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이 본질을 놓쳐서다. 화려한 기술 발전과 IT 디바이스 등에 매몰돼 ‘이걸 활용해 뭔가 비즈니스를 할 순 없을까’라는 고민에서 출발하고 소비자의 니즈 대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 흥미로운 것에 집착한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흥미롭기만 한 제품이나 서비스에 지갑을 잘 열지 않는다. 많은 IT/모바일의 스타트업 실패공식이다.

스타트업의 성공은 결국 ‘치명적 불편함’ 혹은 ‘문제’를 해소할 때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문자 한 건마다 돈을 지불해야 하고, 단체로 대화하기 힘들다는 문제점과 불편함은 ‘카카오톡’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지는 ‘택시 잡기’의 문제를 해결한 ‘카카오택시’5 는 대표적인 O2O(Online to Offline) 성공 사례로 꼽힌다. 명함을 받아 사진 찍어 올리면 누군가 대신 입력해 내 주소록에 넣어주는 리멤버6 서비스의 (잠정적) 성공도 같은 맥락이다.

김 대표는 기존 유통업체들이 제공하지 못하는 가치에 대해 고민했고, 현재 많은 소비자들이 겪고 있는 치명적인 불편함을 해결하고 싶었다.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글로벌 컨설팅사를 그만두고 ‘창업’이라는 험난한 여정에 들어선 계기다.

2. 유통업, 플랫폼, 그리고 공급자

마켓컬리는 ‘유통’을 잘하고 싶었다. 마켓컬리를 O2O의 또 다른 성공 사례로 보는 전문가들이 있지만 마켓컬리 사람들은 O2O, 푸드테크(음식과 기술의 결합으로 만들어지는 다양한 비즈니스), 식재료/신선식품 큐레이션 서비스 등의 ‘현란한’ 단어는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유통’ 스타트업입니다. 방점이 유통에 있지, ‘스타트업’에 있지 않아요. 그저 좋은 유통 플랫폼이 되고 싶었고, 부동산 임대업에 가까운 한국 오프라인 유통업의 한계를 극복하고 싶었습니다. 그걸 잘하려고 돈이 적게 들고 소비자에게 접근성이 좋은 온라인 매장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김슬아 대표의 말이다. 김 대표의 이 말은 마켓컬리의 철학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최근 ‘플랫폼 비즈니스’가 스타트업의 대세이자 새로운 성공 비즈니스 모델의 대표격이 됐지만 사실 유통업만큼 플랫폼 비즈니스의 본질에 가까운 것도 없다. 우선 양질의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공급자가 있어야 하고 소비자를 플랫폼 안으로 유인해 구매를 하게 만들어야 한다. 섬세한 큐레이션과 프로모션, 그리고 마케팅은 일단 공급자를 확보한 이후에나 가능하다. 카카오택시가 무엇보다 택시회사와 기사들을 유인하는 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고, 최근 DBR에서 다룬 미국 실리콘밸리의 웹툰 플랫폼 기업 ‘타파스미디어’7 가 양질의 콘텐츠 생산자, 즉 작가 확보에 사활을 걸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마켓컬리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50억 원의 투자를 받고 비즈니스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사이트나 앱을 화려하게 만드는 데 돈을 쓰기보다 ‘좋은 상품’과 ‘좋은 공급자’를 확보하는 데 공을 들였다. 모바일 시대에 온라인 식품 마켓 비즈니스를 하는 곳이 모바일 앱을 비즈니스 시작 10개월 뒤인 2016년 3월에야 출시했다는 사실은 마켓컬리가 집중했던 포인트가 무엇이었는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소비자가 원하는 건 화려한 디자인의 앱이 아니라 신선하고 질 좋은 식품과 식재료라는 게 마켓컬리의 신념이었다. 서비스를 시작하기 전, 김 대표를 비롯한 마켓컬리 임직원들은 모두 배낭을 메고 전국 각지를 떠돌았다. 오직 ‘질 좋은 신선식품을 제공하는 공급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때 김 대표를 비롯한 창업초기 멤버8 가 간단히 끼니를 때우기 위해 먹은 김밥만 300줄이다.

처음에는 유기농 채소의 상징과도 같은 장안농장이 입점했다. 마켓컬리가 서비스를 개시하는 그날 처음 판매하기 시작한 30개의 품목 중 삼겹살과 더불어 가장 중점적으로 홍보했던 건 바로 이 장안농장의 쌈채소였다. 그리고 한 달 뒤 ‘미식가의 고기’ 본앤브래드가 입점했고, 이후에 ‘착한 커피’로 유명한 리브레, 줄서서 사는 빵집 오월의종 빵이 들어왔다. 초기 이런 유명 브랜드의 연이은 입점은 마켓컬리를 처음 알리고(장안농장), 입소문이 나게 만들어 성장시켰으며(본앤브레드), 가입자를 폭발시켰다(오월의종). 이 브랜드들의 입점과정을 보면, 마켓컬리가 어떤 비즈니스를 꿈꿨고 이를 어떻게 실행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 (‘마켓컬리 초기 성공의 견인차가 된 세 브랜드’ 참고.)

이처럼 ‘상징성’이 강한 제품군, ‘유기농’ ‘고품질’ ‘장인정신’과 ‘미식’으로 상징되는 아이템들을 연이어 입점시키면서 마켓컬리의 위상은 한껏 높아졌다. 그런데 자체 콜드체인 시스템과 서울 송파구 장지동에 위치한 자체 물류공장을 활용하고 중간상을 거치지 않는데다 적은 품목을 필요한 만큼만 매입해 판매하다 보니 가격 자체는 생각보다 높게 책정되지 않았다. 이건 또 다른 측면에서 입소문을 낳았다. 이미 어느 정도의 가격대를 각오하고 클릭하는 사람들에게 ‘예상보다 낮은 가격’은 고민 없이 구매하도록 만드는 데 일조했다. 김 대표가 처음 장안농장을 입점시키면서 ‘원하는 고객들에게 집 앞까지 배달해주면서도 기존 매장에서의 가격 수준 혹은 그 이하로 맞출 수 있다’고 했던 바가 유통과정 합리화로 실제 이뤄지고 있었던 셈이다.



DBR mini box II 

마켓컬리 초기 성공의 견인차가 된 세 브랜드

장안농장

장안농장은 2004년부터 유기농조합법인으로 등록해 쌈채소를 위주로 판매하는 ‘대한민국 대표 유기농 채소’ 브랜드다. 아이들 먹거리에 관심 많은 젊은 여성들, 본인과 가족의 건강을 생각하는 50대/중산층 이상 주부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장안농장의 쌈채소는 삼겹살 등과 더불어 마켓컬리가 처음 서비스를 개시할 때 판매했던 30개 품목 중 하나이자 사업 시작 때부터 일종의 ‘시그니처’ 품목이었다. 마켓컬리 역사상 첫 주문 역시 13종으로 구성된 장안농장 쌈채소였다. 장안농장은 김 대표가 이미 애용하던 곳이었지만 입점을 시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다행히 마켓컬리 초기 투자자 중 한 명이 장안농장 대표와 연을 맺고 있었서 다리를 놔 줬다. 마켓컬리 입장에서는 신선채소, 그것도 잘 시드는 ‘상추’와 쌈채소를 제대로 유통할 수 있다는 걸 소비자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장안농장 측도 마켓컬리의 비즈니스 모델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안농장도 사실 유기농 채소 분야에서는 선구자이자 혁신기업이었다. 채소를 택배로 판매한 것도 장안농장이 처음이었고, 우체국 쇼핑부터 모든 최신 유통 방법을 다 활용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신선채소 배송은 늘 해결되지 않는 과제였다. 그래서 결국 다 포기하고 대형 유통업체에 다시 의존하게 됐다. 그러나 대형 유통업체를 활용하면 이들의 콜드체인에 포함돼 함께 배송이 이뤄진 후 마트 내 큐레이션 작업을 거쳐 매대에 올라가기 때문에 소비자 판매까지 48시간이 걸린다는 게 문제였다. 이 중에서 시들어버린 절반 정도는 버려지는데 장안농장 측은 이를 매우 아쉬워했다. 그런데 채소를 딴 지 24시간 내에 물류와 재고를 책임지고 마켓컬리가 ‘매입’을 해서 콜드체인으로 배송을 해준다고 제안하자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물론 마켓컬리는 2030 소비자, 1∼2인 가구에 맞게 100g 정도로 소포장을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를 장안농장도 수용했다. 대다수 유통매장이나 오픈마켓처럼 ‘온오프라인의 한 장소를 빌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마켓컬리가 구매하는 방식이다 보니 진열비/유통비가 절감되고, 장안농장의 수익률은 유지하거나 오히려 높이면서도 소비자에게는 기존 가격보다 10∼20%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장안농장 유기농 채소는 마켓컬리의 대표상품이 됐다.

 

본앤브레드

본앤브레드는 마장동에서 2대째 ‘프리미엄 소고기 유통·판매’를 하는 매장으로 비싸지만 최고의 품질을 보증하는 곳이다. 본앤브레드를 주문해 먹는 사람은 그래서 최고의 ‘미식가’로 인정받는다. 마켓컬리 MD 중 본앤브레드 마니아가 한 명 있었다. 김 대표도 종종 사 먹었던 곳이었기에 ‘뚫기만 하면 대박’이라는 생각에 해당 MD를 격려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아직 사이트 개설도 안 된 ‘듣보잡’ 스타트업의 젊은이들이 ‘미식과 고급의 상징’인 본앤브레드 소고기를 공급해달라고 하는 상황이니 어쩌면 당연했다. 몇 번 설득하러 갔다가 여의치 않아 고기만 사 들고 나오는 경우도 많았다. 무엇보다 신뢰를 얻는 게 급선무였다.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아주 전통적인 방법을 활용했다. 꼭 본앤브레드를 입점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가진 담당 MD가 일주일에 몇 번씩 마장동으로 새벽에 출근해 새벽 발골 작업 후에 지저분해진 바닥을 청소했다. 7∼8번쯤 찾아가 바닥청소를 하고 나니 매장 담당 부장 한 명이 이를 눈여겨보고 본앤브레드 대표한테 그 ‘정성’에 대해 알렸다. “회사는 작은데 일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열정적이고 괜찮아 보인다. 한번 만나 보시라”는 이 말 한마디에 기회가 생겼다. 얘기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 난관이 있었다. 본앤브레드는 1㎏ 이상 단위로만 고기를 팔고 있었다. 등심 한 번 제대로 사려고 하면 10만 원이 넘는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김 대표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사서 먹어보고 그 맛을 ‘간증’하게 하려면 아무래도 200∼300g으로 소포장해서 팔아야 한다”고 본앤브레드 측을 설득했다. 이게 더 오래 걸렸다. 이미 마니아들 사이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상황에서 굳이 비용을 들여 소포장을 할 유인이 본앤브레드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설득했다. “이 좋은 고기를 가격 허들 때문에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너무 억울하지 않느냐”고 몇 번이고 간절히 얘기하니 본앤브레드도 결국 마음을 고쳐먹었다. 마켓컬리가 장안농장 쌈채소와 함께 서비스를 시작한 지 한 달 뒤인 6월에 벌어진 일이었다. 1㎏ 이상 단위로만 파는데다 어차피 구하기도 어려운 ‘미식의 상징’과도 같은 고기가 소포장으로 묶여 입점한다고 하니 주부들이 술렁거렸다. 마켓컬리가 주부들 사이에서 결정적으로 많이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됐다.

 

오월의종

마켓컬리 가입자 ‘대폭발’의 기폭제는 빵집 오월의종의 입점이었다. 이 오월의종은 본래 이태원의 유명한 빵집으로 식빵이나 바게트를 사기 위해서 한 시간씩 줄을 설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의 빵을 클릭이나 터치로 먹을 수 있다고 하니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가입하기 시작했다. 월 2000명대였던 가입자가 1만 명대로 올라갔다. 마켓컬리는 자체적으로 이를 ‘가입러시’의 기폭제로 여기지는 않고 있지만 오월의종 입점이 마켓컬리 가입의 계기였다고 고백하는 고객들을 주변에서 꽤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오월의종이 작은 온라인 유통 스타트업에 입점하게 된 사연은 2015년 7월부터 마켓컬리에서 판매되고 있는 리브레 커피로부터 시작된다. 공정무역을 통해 들어오는 ‘착한 커피’의 대명사인 리브레를 마켓컬리에서 판매했는데 이때 리브레 측은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매입해서 마켓컬리가 책임지고 파는 건 좋은데 5일 안에 팔아야 커피 본연의 향이 유지된다는 제품 특성이 걱정이었다. 즉, 마켓컬리가 리브레를 속여서 6일, 7일, 10일이 지난 커피를 판매할 경우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고민이 있었다는 것. 그러나 마켓컬리는 조금이라도 남으면 그대로 직원들이 나눠서 마시거나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판매기한을 반드시 지켰고 이는 리브레 측에 좋은 인상으로 남았다.

마침 리브레 대표는 오월의종 대표와 친분이 있었고 마켓컬리에 대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우리가 파는 식품의 판매기한을 어기는 일은 없는 믿음직한 사람들’이라고 소개해줬다. 오월의종도 고민 끝에 같은 해 8월부터 입점했다. 많이 팔려고 욕심내다가 다 못 파는 사태가 벌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수량을 철저히 조절했다. ‘품절’ 사태가 이어져 고객들이 불만을 표출해도 함부로 늘리지 않았다. ‘장인이 만든 빵’에 대한 예우를 최대한 지킨 셈이다. 2016년 5월부터는 애매한 법규 문제로 온라인 판매는 일단 그만하기로 한 상태지만 법적 문제만 해결되면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신뢰관계가 있기에 이를 기대하는 고객들도 있다.




3. 안전성과 품질에 대한 집착: 상품위원회

마켓컬리는 최근 회사가 성장하면서 내부적으로 창업 초기 멤버의 역할이 많이 바뀌었다. 김슬아 대표가 주로 관심을 갖고 관여하는 부분도 물론 조금씩 바뀌고 있다. 그런 김 대표가 창업 이후 단 한 번도 놓지 않은 역할이 바로 15명의 MD와 소통하는 ‘MD헤드’라는 자리다. 김 대표는 “마켓컬리의 상징과도 같은 샛별배송을 어떤 이유에서 안 하게 되더라도, 사업모델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마지막까지 놓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좋은 상품과 좋은 생산자에 대한 집착”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마켓컬리의 고집은 ‘상품위원회’라는 시스템에서 잘 드러난다. 마켓컬리에 들어오는 모든 상품은 이 위원회의 내부 검증 절차를 통과해야 한다. 김 대표도 MD헤드이자 마켓컬리의 대표로서 이 회의에 꼭 참석한다. MD들은 마켓컬리가 만들어 놓은 양식에 따라 사전 상품기획서를 제출한 뒤 상품을 들고 와서 매주 열리는 이 회의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한다. 지금은 내부에서 2년 동안 양성된 전문가들로 위원회가 구성돼 있지만 초기에는 푸드스타일리스트와 여러 식품 전문가들을 초빙해 위원회를 꾸렸고, 마켓컬리는 이 위원회를 일종의 학습장소로 삼았다. 김 대표는 “70여 개의 기준으로 심사가 이뤄지는데 다 밝힐 순 없지만 첫째는 일단 ‘안전성’”이라며 “안전성과 관련된 세밀한 기준만 20개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어떤 상품이냐, 어떤 카테고리냐에 따라 다르지만 가공식품류, 그중에서 과자 하나를 예로 들면, 그 과자에 들어 있는 모든 성분의 원산지는 다 알아야 하고, GMO 작물 포함 여부, 생산설비는 어떻게 돼 있는지 등을 모두 꼼꼼히 따져본다. 유아식의 경우 생산업체에 ‘이물탐지기’가 구비돼 있고 실제 활용되고 있는지 현장에서 점검한 내용이 없으면 탈락이다. 안전성 기준은 ‘Go or No Go’ 기준이다. 즉 여기서 통과하지 못하면 입점은 아예 불가능하다.

그다음에 6개의 범주에 따라 나머지 50여 가지 평가 기준이 있다. 콘텐츠 부합성, 즉 생산자가 나름의 브랜드 스토리를 갖고 있는지, 패키징 수준은 어떤지 등을 평가하고 오히려 다른 모든 조건이 좋은데 패키징이 ‘촌스럽다’ ‘투박하다’는 판단이 들면 마켓컬리에서 역으로 생산자에게 새로운 포장법을 제안하고 심지어 돕기도 한다. 마켓컬리에서 파는 ‘토종두부’가 대표적인 사례다. 안전성과 ‘장인의 정성’이라는 스토리까지 완벽했는데 포장이 거의 ‘판두부’ 수준이었다. 마켓컬리가 직접 업체로 가서 포장지를 디자인한 뒤에 입점시켰다. 상품위원회는 단순히 어떤 상품이 기준에 맞느냐, 아니냐를 판단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안전하고 스토리가 있는 상품일 경우 곧바로 ‘컨설팅위원회’로 변신하는 셈이다.

최근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프인 제이미 올리버의 파스타 소스를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안전성 기준을 통과한 이후에는 상품위원회에서 ‘콘텐츠 부합성’에서 최고점을 받았다. 제이미 올리버라는 이름이 만들어내는 스토리와 콘텐츠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4. “IT와 데이터는 거들 뿐”

앞서 살펴봤듯 젊은 주부/중산층 이상의 주부 고객들이 좋아하는 브랜드들이 마켓컬리라는 ‘듣도 보도 못한’ 온라인 매장에 입점하게 된 데에는 마켓컬리 MD(상품기획/구매담당)와 김슬아 대표의 피나는 노력이 주효했다.9 다른 측면, 특히 시스템 측면에서는 직접 구매해서 재고 부담을 마켓컬리가 떠안으며 책임지고 판매하는 ‘매입과 재고 책임관리 시스템’이 큰 역할을 했다. 물론 신선식품의 판매비중이 높은 마켓컬리에 이런 방식의 비즈니스 모델은 큰 부담이자 리스크다. 다른 어떤 업체보다 ‘데이터’에 집착하게 된 이유다. 수요 예측을 해서 정말 팔 수 있을 만큼만 상품을 사와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 적게 사와서 계속 품절사태가 벌어지면 소비자들의 불만이 커지고, 수요 예측을 잘못해 너무 많은 상품을 사오면 재고 부담으로 마켓컬리의 손해가 커진다. 그래서 기존 구매 데이터와 날씨 데이터 등 변수가 될 수 있는 데이터를 토대로 수요 예측 모델을 운영하고 있다. 이제는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데이터가 축적됐기 때문에 비교적 수월한 예측이 가능하지만 초기에는 데이터가 없어 거의 실시간으로 전화통화를 하면서 수요에 공급을 맞추기도 했다. 김 대표는 “초기에 채소를 팔 때는 장안농장 등 공급처에 직원이 한 명 나가 있고, 사무실에서는 컴퓨터로 고객들의 예약 상황을 보면서 전화로 채소를 얼마나 더 따야 할지 알려주는 주먹구구식 대응을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방식이 세련되지 못했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렇게 쌓인 데이터가 이제는 비교적 정확한 예측을 만들어주는 기반이 됐다.

맨 처음 비즈니스를 시작할 때 외부에서 구매해 온 유통 관련 데이터는 마켓컬리가 개척하는 시장과는 잘 맞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스스로 데이터를 쌓아 올릴 수밖에 없었다. 마켓컬리에 따르면 창업 1년 정도가 지난 뒤인 2016년 중반부터 데이터가 스스로 많은 정보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월 매출액이 15억 원 정도를 넘어서고 1년 정도의 데이터를 쌓고 나니 제대로 된 분석이 가능해졌다. 지금도 마켓컬리에서는 판매 예측, 실제 판매 등의 각종 수치를 대시보드를 통해 수시로 점검한다. 김 대표도 이를 주시하다 평소와 다른 패턴이나 특이한 숫자가 발견되면 그 이유를 묻고 반드시 따져본다. 이런 데이터 기반 경영에 ‘관찰기법’을 더했다. 유명 디자인컨설팅 기업 아이디오에서 쓰는 ‘고객 따라다니기’를 온라인에서 적용해 실행했다. 예를 들어 마켓컬리 고객인 게 확실한 인스타그램 유저를 팔로하면서 그 사람이 언제, 어디에서, 주로 무엇을 사서 먹고, 어떤 생활패턴을 가지며,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찍어 올리는 건 어떤 제품인지 등을 파악해 고객의 니즈에 접근했다.

대부분의 데이터 시스템은 무료/공개프로그램을 바탕으로 구축했고, 소비자를 따라다니는 것 역시 돈이 안 드는 인스타그램 팔로를 통해 실행했다. 중요한 건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하고, 이를 제대로 실행하는 것이지 어떤 프로그램을 쓰느냐가 아니라는 얘기다.

 

‘입소문’과 ‘충성도’: 기획하지 않은 기획

1. 어설픈 홍보와 마케팅 대신 세심한 상품과 서비스로 승부하다

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에서 ‘마켓컬리’라고 검색하면 1000여 건이 넘는 블로그 글이 뜬다. 대부분 샛별배송의 편리함과 좋은 품질을 칭찬하는 글이다. 혹시나 파워블로거들에게 혜택을 제공하고 글쓰기를 독려하지 않았을까, 블로그 마케팅과 바이럴을 기획하지 않았을까 의심이 들 정도다. (그림 3)

하지만 마켓컬리는 창업 초기부터 몇 달간 마케팅에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앞서 설명했던 몇 개의 유명 브랜드가 들어오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자체 홈페이지를 통해 마켓컬리를 알려나갔다. 좋은 공급자 확보, 세심한 상품 구성과 서비스가 유통에서는 가장 강력한 마케팅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앞서도 언급했던 장안농장, 본앤브레드, 커피리브레, 오월의종 등 입점한 상품의 구색 그 자체가 입소문을 만들어냈다. 마켓컬리에 대한 소문은 주부들의 모임에서, 블로그와 SNS를 통해 퍼져나갔다. 특히 김슬아 대표 본인 스스로 느꼈던 불편함을 바탕으로 상품 구색을 무리하게 늘리지 않았고 최대한 고객들이 편하게 고를 수 있게 배려했던 것이 큰 효과를 봤다. 과일이나 채소도 엄선한 한두 종류, 우유도 등급에 따라 두 개 정도로만 제한했고, 대형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각종 허브를 소량으로 팔았으며, 심지어 여성들이 다이어트 샐러드에 자주 넣어 먹는 아보카도는 그냥 1개씩 구매할 수 있게 했다. ‘끝없는 리스트에서 선택해야 하는 부담’을 없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뢰할 수 있는 양질의 제품을 공급했기에 블로그에 자연스럽게 ‘품질에 만족했다’는 글은 지속적으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마켓컬리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 중 하나인 ‘제주 목초우유’는 그들이 집중하고 있는 분야가 어디인지, 핵심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우유는 아침에 신선하게 배달받아서 먹고자 하는 니즈가 많은, 특히 마켓컬리 주 고객층인 30대 ‘육아맘’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아이템이다. 이런 우유가, 그것도 이제는 판매 1위 품목에 올라 있는 우유가 마켓컬리가 생긴 지 1년이 넘어서야 판매되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마켓컬리 MD들이 사전조사를 통해 정의한 ‘좋은 우유’의 기준이 매우 높았고, 그들 마음에 드는 우유는 좀처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농장, 저 농장을 찾아다니고, 관련자들을 만나고 다니던 중 제주도의 한 농장을 알게 됐다. 천혜의 환경을 가진 농장이었다. 1년 내내 소를 방목할 수 있는 환경이었고 환경오염이 전혀 없었다. 그 농장 옆에 있는 차밭에서 나는 차는 ‘무공해’ 인증을 받아 영국 왕실에 전량 납품하고 있을 정도였다. 문제는 농장주가 이미 목축업을 접은 상태였다는 것. 비싸고 힘들게 좋은 우유 만들어봤자 팔기도 어려운 유통 구조에 좌절하고 땅을 팔아버리기로 결심한 상황. 김 대표와 우유 담당 MD는 필사의 설득을 시작했다. 농장주 부인의 한마디가 결국 그의 마음을 바꿨다. “당신이 그렇게 자부심 갖고 만들던 우유, 제대로 공급해주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육지 사람들에게 한번 먹여보자. 우리나라에 이런 우유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느냐?” 그렇게 ‘제주 목초우유’가 마켓컬리에 입점했다. 마켓컬리는 가격을 합리적으로 책정하기 위해 유기농 인증 대신 무항생제 인증을 택한 배경을 고객들에게 설명했고, 소비자들은 마켓컬리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구매하기 시작했다. 맛있다는 소문, 믿을 만한 목장에서 믿을 만한 유통업체를 통해 나오는 우유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어느새 소비자들이 가장 많이 구매하는 상품이 됐다.10  현재는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유기농 인증까지 받은 우유도 출시할 계획을 세운 상태다.

이런 모든 것들이 ‘기획하지 않은 입소문 마케팅’의 중심에 있다. 세심한 서비스 관리 역시 고객들 사이에서는 종종 화제가 된다. 만약 시든 채소가 배송되면 환불이나 재배송 등의 조치가 취해진다. 그런데 고객의 항의 댓글이나 메일에 ‘손님 초대’ ‘아이’ 등의 단어가 발견되면 특별히 더 신경을 쓴다. 손님 초대를 앞두고 식재료를 주문했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퀵으로 다시 배송해주는 경우도 있다.



2. 인스타그램의 보랏빛 컬리, 팬, 그리고 충성고객

마켓컬리의 상징은 보라색이다. 이것도 아무렇게나 정한 건 아니다. 실제로 포장지에 여러 색의 마켓컬리 로고를 넣고 대형 식품 매장에 가서 사진을 찍어보며 푸른색 채소와 잘 어울리는 것을 전문가와 함께 판단해 정했다. 컬리라는 이름은 브로콜리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지만 마치 사람 이름처럼 ‘컬리’라고 쉽게 불릴 수 있도록 의도했다. 처음부터 돈 쓰는 마케팅과 광고를 기획하진 않았으나11  ‘브랜드 구축’에는 꽤나 신경을 썼다는 얘기다.12


이렇게 브랜드 구축을 하고 나니 SNS는 최고의 마케팅 툴이자 홍보도구가 됐다. 그중에서도 인스타그램은 마켓컬리 성장의 1등 공신이다. 보라색의 강렬하고 예쁜 색감의 로고와 음식, 식재료, 상품 사진을 최대한 예쁘게 찍어 올리면서 ‘보랏빛 컬리’는 ‘인스타의 스타’계정이 됐다.

‘먹스타그램’이라 불릴 정도로 인스타그램에는 예쁜 음식 사진이 많이 올라온다. 마켓컬리는 광고비를 지출하는 대신 음식 사진에 투자했다. 음식 전문 사진작가에게 촬영을 맡겨 정말 제대로 찍어 올렸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이렇게 찍고 싶다’며 공유하고 퍼가는 횟수가 늘었다. 자연히 마켓컬리도 홍보가 됐다. 이제는 사람들이 마켓컬리의 음식/식재료 촬영 스타일을 ‘컬리스타일’이라고 부르며 따라하고 있다. 김슬아 대표는 “이전까지는 유기농 채소, 건강한 식품이라고 하면 흙 묻은 채소 더미를 밀짚모자 쓴 농부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들고 있는 사진이 떠올랐던 게 사실”이라며 “그걸 세련되게 바꿔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현재 마켓컬리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사진 게시물마다 평균적인 좋아요 수는 최소 250개에서 500개에 이르며 팔로어 수는 51만5000명이 훌쩍 넘는다. 이렇게 인스타그램에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충성고객이 되기도 한다.

샛별배송이라는 혁신, 좋은 상품에 대한 집념과 세심한 서비스, 세련된 브랜드 이미지와 SNS 활동이 더해지자 인터넷 블로그와 SNS에 서비스의 우수성을 알리는 게시물을 올리는 충성고객이 확보됐다. 이러한 충성고객들은 위기의 마켓컬리를 전혀 엉뚱한 측면에서 본의 아니게 지원사격하는 일을 해내기도 했다. 한때 마켓컬리의 2차 투자 진행이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위기가 온 적이 있었다. 자신의 차를 갖고 마켓컬리에서 새벽배송을 해주는 기사들(마켓컬리는 이들을 매니저라 부른다)에게 회사의 어려운 상황을 김 대표가 직접 설명했다. 불안한 분들은 마음 편히 떠나셔도 좋다는 메시지였다. 당시 폭염 속에 냉장차에 대한 수요가 폭발하고 있었음에도 잠시 고민하던 매니저들 대부분은 마켓컬리와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김 대표도 놀랄 정도였다. 그때 한 매니저(기사)의 말에 답이 있었다. 그는 “배송일을 10년 넘게 했지만 새벽에 물건 놓으러 갔을 때 ‘배송기사님 고맙습니다. 이거 드시고 하세요’라고 쪽지를 적어놓고 음료수를 놓아주는 고객들은 처음 봤다”며 “이런 충성고객들이 많은 기업이라면 잘될 것 같다. 나도 보람 있다. 여기 남겠다”고 말했다.



DBR mini box III

고객정보 해킹

2017년 9월22일, 마켓컬리에 위기가 찾아왔다. 그전까지 종종 발생했던 작은 사고나 투자 지연 등과는 차원이 다른 위기였다. 홈페이지 해킹으로 34만 명의 고객정보가 유출된 것이다. 마켓컬리는 즉각 대처에 나서는 한편 곧바로 사과했다. 같은 날 홈페이지에 ‘고객 여러분께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라는 사과문을 게재하며 해킹으로 회원 아이디와 e메일, 휴대전화 번호 등 고객 개인정보가 유출됐음을 밝혔다. 마켓컬리는 사과문에서 “9월20일 3차에 걸친 해킹공격을 받아 1, 2차 해킹은 방어에 성공했지만 3차 해킹 시 고객들의 일부 정보가 유출된 사실을 발견했다”고 고백했다. 해킹으로 유출된 고객 정보는 회원 아이디, e메일, 전화번호·핸드폰 번호, 암호화될 비밀번호(식별 및 암호해독 불가능) 등이었다.

마켓컬리는 “사고발생 직후 해당 IP와 불법 접속경로를 차단하고 21일 0시에 웹 방화벽을 강화한 데 이어 무차별적 웹 로그인 시도를 막기 위해 캡차(CAPTCHA·자동계정생성방지)도 적용했다”고 밝혔다. 또 “개인정보 유출로 인한 피해는 접수되지 않았지만 혹시 있을지 모르는 피해 예방을 위해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에 자진 신고해 문제 해결을 위해 긴밀히 협조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사고는 온라인 기반의 플랫폼 서비스가 갖는 취약성을 드러냈고 마켓컬리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다만 대처 자체는 깔끔했고 사과도 진정성이 있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마켓컬리로서는 보안 이슈가 중요한 해결과제가 됐다.

마켓컬리는 “9월에 보안 수준이 높은 서버로의 이전을 완료했다”고 전했지만 보안사고 재발 방지는 마켓컬리의 큰 도전 중 하나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성공 요인 및 시사점


1. 고객의 잠재 욕구를 찾아내는 것이 성공의 첫 단추

불편함은 창업의 어머니지만 누구나 그 불편함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고객들이 나의 불편함은 이러할 때 저러하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나열할 만큼 자신의 불편함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인지하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편함은 잠재 욕구를 의미하는데 잠재욕구를 발견하고 정확한 표적시장에 맞춘 제품 및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느냐가 신규 브랜드의 초기 시장 진입의 성공 여부를 가리게 한다. 2011년 당시 안경은 시력보정을 위한 실용주의적 제품이라고만 생각하고, 또 그러한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지던 때 젠틀몬스터13 는 매일 자신의 기분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에 따라 남성들이 넥타이를 선택하듯이 ‘나의 선택권의 영역으로 안경을 끌어들이고 싶다’는 고객의 잠재욕구를 포착했다. 이는 ‘안경은 예술품이자 액세서리’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며 고객의 잠재적 욕구를 끌어내고 이에 부합하는 제품을 제공해 성공한 사례다. 반면 ‘강글리오’라는 녹용 성분이 들어간 고급 커피믹스를 출시했던 농심14 의 경우, 출시 전부터 커피믹스시장의 지각변동을 일으키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고객들로부터 외면받았다. 골프장에서 VIP에게 녹용커피나 홍삼커피를 제공했을 때 좋은 반응이 있음을 확인하고 강글리오라는 고급 믹스커피를 출시했으나 실패했다. ‘왜’ 그러한 커피를 좋아할지, ‘누가’ 그것을 좋아할지에 대한 욕구분석이 이뤄지지 않아 발생한 사례다. 마켓컬리의 성공요인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포착할 수 있겠지만 그 무엇보다 고객의 잠재욕구 포착이 성공의 첫 단추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박충환 교수15 가 제시한 ‘고객욕구의 틀’은 고객의 욕구를 빠짐없이 발굴하는 데 유용하게 쓰이는 도구인데 [그림 5]와 같이 고객욕구의 형태/발생원천/발생시점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 마켓컬리가 찾아낸 고객의 욕구를 이 도구를 이용해 분석해 보고자 한다.



고객욕구의 형태에 따라 혜택/잠재적 혜택/문제/잠재적 문제 욕구로 나뉘고 있다. 고객이 특정 혜택을 얻고자 하는 욕구가 혜택 욕구이고, 특정 불편함이 없어졌으면 하는 욕구가 문제 욕구다. 잠재적 욕구는 고객에게 분명 욕구가 존재하고 있으나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을 만큼 인지 가능한 수준의 욕구가 아니다.

기존 식료품 온라인몰을 이용하던 고객들은 낮은 가격대부터 높은 가격대까지 너무 다양한 제품들의 나열로 인해 선택의 어려움을 겪어 왔다. 비슷한 수준의 제품들만 나열돼 있어 빠른 선택이 가능할 수 있도록 상품들이 정리되길 바라는 ‘문제 욕구’가 있었다는 것이다.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채소와 같은 신선식품의 질이 들쑥날쑥하기 일쑤였고, 날씨가 더울 때는 풀이 다 죽은 채소들이 배달돼 오는 일도 다반사였다. 매번 제품의 질이 고르길 바라고 어느 계절에 주문하든 싱싱한 채소를 받기를 바라는 ‘혜택 욕구’가 존재했다는 뜻이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퇴근이 언제 가능할지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집 앞에 신선식품이 ‘배송완료됐다’는 문자를 받고 마음이 불편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출근하기 전에 신선한 제품을 받아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출근하고 싶은 욕구가 분명 존재함에도 이러한 불편함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여기며 참고 지내왔다. 신선한 제품을 출근 전에 받고 싶은, 또는 부재중에 제품이 배달돼 시들까 봐 걱정하는 것을 원치 않는 ‘잠재적 혜택/문제 욕구’가 존재했던 셈이다. 김슬아 마켓컬리 대표는 소비자들에게 발생하고 있는 잠재적 혜택/문제 욕구에 대해 스스로는 혜택/문제 욕구로 인지하고 있었기에 이 욕구를 창업 아이템으로 연결할 수 있었다.


User Experience Report

관중 동원 능력이 첼시보다 좋다고? 美축구팀, 아이디어로 충성고객을 낚다

Article at a Glance – 전략,혁신

 미국에서 축구는 그다지 인기 있는 종목이 아니다. 그런데 시애틀사운더스FC는 연간 4만 명이 넘는 관중을 동원하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 구단은 경기 시작 전부터 관중이 경기장 주변에서 해당 팀을 응원하며 들어갈 수 있도록 한다거나 시즌 티켓을 구매한 고객의 이름을 상징물로 설치하고 경기장 복도를 호텔 수준으로 고급화했다. 선수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경기장 바로 옆에 그라운드 스위트를 조성하고 경기 전후 선수들과 사진을 찍거나 잔디를 밟아볼 수 있도록 하는 등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를 분석해 제공했다. 경기장을 방문하는 고객이 어떤 경험을 하는지 동선을 따라 체계적으로 분석해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한 결과, 비인기종목이라는 굴레를 벗어 우수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2013/14시즌 미식프로축구 챔피언 팀을 배출한 시애틀에는 또 하나의 프로축구팀이 있는데 시애틀사운더스FC(Seattle Sounders FC)라는 축구(미식축구가 아닌 축구)팀이다. 이 팀의 2013년 평균 관중은 43124명으로 미국 프로축구(Major League Soccer) 전체 평균인 18701명보다 2배 이상 많다. 데이비드 베컴, 로이 킨, 렌던 도노반 등 스타 플레이어를 보유하며 2번째로 많은 관중 동원 능력을 보여준 LA 갤럭시보다 약 2만 명 많은 수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EPL(영국프로축구 1부 리그)의 인기 구단 첼시의 올 시즌 평균 관중 수인 41510명보다도 관중 수가 많다는 것이다(참고로 우리나라 K리그의 평균 관중 수는 약 7000명 수준이다). 미국에서 인기를 누리는 종목은 크게 네 가지다. 미식축구(NFL), 야구(MLB), 농구(NBA), 아이스하키(NFL)가 그것이다. 이들 4대 프로 스포츠가 폭넓게 고객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축구의 인기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이런 환경에서 시애틀사운더스FC는 어떻게 탁월한 성과를 만들어 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축구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하고 차별적인 경험을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 고객에게 독특하고 차별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먼저 경기장이라는 하드웨어를 경기장 외부, 복도, 운동장이 보이는 좌석이라는 3가지 공간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각각의 공간을 고객 경험이 발생하는 6가지 요소와 연결한다. (그림 2)

 

 

경기장 외부 공간은 경기장 방문 준비 및 경기장 도착 후 입장하기 전까지의 경험이 연결된다. 이 단계에서의 핵심 성공 요소는 경기장 방문 결정을 도와줄 수 있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과 경기 당일 경기장에 접근하면서 기대감을 키울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복도는 경기장 입장 후 고객이 자신의 좌석을 찾기까지의 과정을 겪는 공간이다. 과거에는 대부분 지나가는 공간으로 추가적인 가치 창출과 연관이 없었지만 이제는 복도에서 경험하는 서비스 그 자체가 경기장을 방문하는 목적으로 변하고 있을 만큼 다양한 경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다시 말해 경기를 관람하는 목적 외에 복도에서 새로운 서비스를 경험하는 것이 경기장을 방문하는 고객의 의사결정에서 주요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고객들이 경기시작 30분에서 1시간 전에 경기장에 도착하도록 하기 위한경기장 조기 활성화(Stadium Early Activation)’라는 목표를 세우고 경기장 운영체계를 바꾸려는 노력의 결과다. 이를 통해 구단은 추가 매출의 기회를 극대화할 수 있다. 새롭게 변화하는 복도 경험의 핵심 성공요소는 호텔 수준의 고급화와 환대(Hospitality).

 

마지막으로 운동장이 보이는 좌석은 3가지 경험과 연결된다. 먼저 좌석에서 경기장을 바라보고 응원을 하면서 느낄 수 있는 경험이다. 두 번째는 스카이 박스로 알려져 있는 고급화된 서비스다. 마지막으로 IT와 연계해 경기 관련 정보를 제공받으면서 느끼는 경험이다. 마지막 3가지 경험의 핵심 성공 요소는 선수들과의 만남, 잔디가 있는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는 경험, 경기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보 제공이다.

 

이와 같은 경기장의 3가지 공간과 고객의 6가지 경험 요소는경기 시작 전-진행 중-종료 후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경험을 고객이 움직이는 동선을 분석하는 기법인 고객 이동 분석(Customer Journey Analysis)으로 구체화해서 경험 프로그램과 연계할 수 있다. <그림 3>은 경기 시작 전 고객 이동을 분석한 사례며 <그림 4>는 경기장의 공간과 고객 이동 분석을 연계한 그림이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설계된 경험 프로그램은 고객 만족도와 요구 사항을 분석할 때도 세부 경험 요소와 연계해 질문한다. 예를 들어오늘 경기장 방문에서 불편한 사항은 무엇인가요?”가 아니라티켓을 구매할 때 불편한 사항은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하는 식이다. 이렇게 해야 구체적인 문제점을 도출하고 개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이제부터 고객 경험 분석을 통해 만들어진 시애틀사운더스FC의 주요 서비스를 소개한다. 시애틀사운더스FC의 팬들은 경기 시작 1시간 전 경기장에서 2블록 떨어진 공원에 모여서 마칭(marching) 밴드와 함께 길거리 응원전을 펼치며 경기 시작 30분 전에 경기장에 진입한다. (그림 5) 이 과정을 통해 고객들은 스포츠 이벤트에서 응원 참여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열정적인 분위기와 승리의 기분을 경기 시작 전부터 경험한다. 자연스럽게 많은 팬들이 경기 시작 전부터 경기장에 도착해 응원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처음 경기장을 찾은 또 다른 고객들도 열정적인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경기장에 도착한 고객은 외벽에 설치된 상징물(그림 6)을 발견한다. 창단년도 시즌 티켓(1년간 팀의 모든 경기를 볼 수 있는 입장권)을 구매한 고객의 이름을 모두 기록한 명패다. 시애틀사운더스FC가 응원할 때 사용하는 머플러 모양으로 만든 이 설치물은 구단의 고객 중심 운영을 보여준다. 시애틀사운더스FC는 시즌 티켓을 보유한 고객들의 투표를 통해 구단 단장의 연임 여부를 결정한다. 이와 같은 제도는 구단의 고객들로 하여금 소속감을 높여주고 주인 의식을 강하게 해서 지속적으로 구단을 응원하는 동기가 된다. 고객과 구단의 경계를 허물어 함께 미래를 만들어 간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구단 정책은 상징물을 통해 고객들에게 전달된다. 우리나라 K리그의 시민구단들은 창단 단계에서 시민주를 공모한 바 있지만 1∼2년 사이에 대부분 자본이 잠식되고 말았다. 시민주주들에게 체계적인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해 소속감과 주인 의식을 만들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애틀사운더스FC 사례를 볼 때 시민주주제도를 시즌 티켓 구매와 연계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만하다.

 

경기장 내부로 들어선 고객은 복도에서 호텔 이상의 고급스럽고 수준 높은 시설과 음식 서비스를 만난다. (그림 7) 고급화된 공간과 서비스는 고객들을 경기장에 일찍 도착하게 하는 유인책이 되며 스포츠 관람이 아니라도 다양한 사업적인 만남의 장소로 경기장을 활용하게 만들 수 있다. 고급화 서비스는 스포츠 시설 설계 전문 기업인 로제티에서 개발한 ROD(Return on Design)라는 개념을 통해 추진되고 있다. ROD는 경기장 좌석을 2만 석에서 18000석으로 축소하더라도 좌석 편의를 높이고 고급 시설과 서비스를 제공하면 시설 개선에 투자한 비용을 정해진 시간 내에 회수할 수 있다는 분석을 토대로 한다. 이는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로제티에서 일하는 한국인 정성훈 이사는경기장에서 차별적 경험을 만드는 과정에서 핵심 개념은 호텔 수준의 환대(Hospitality)”라며이를 통해 경기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머무르는 동기를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경기 당일 매출의 증가로 연결되는 운영체계를 보유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복도가 지니는 또 하나의 주요한 역할은 지역 사회와의 감성적인 연계가 가능하게 하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시애틀사운더스FC의 홈경기장인 센츄리링크 필드(CenturyLink Field)는 미식축구의 시애틀시호크스(Seattle Seahwaks)의 홈경기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미식축구 쪽에서 지역 사회와 연계된 시설을 갖춰 놓았다. 시애틀시호크스가 소속된 워싱턴 주에 있는 고등학교 미식축구팀의 헬멧을 모두 전시해 놓고미래의 시애틀시호크스 스타가 자라나고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설치물이 대표적이다. 이와 같은 시설을 통해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은 구단과의 연대감을 높이고우리라는 의식을 갖게 된다. 구단 관계자에 따르면 많은 고객들이 이 시설물 앞에서 자신의 출신학교를 찾아보고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복도를 지나 경기장 안으로 진입한 고객의 가장 큰 바람은 선수들을 가까이에서 만나는 것이며 경기장의 잔디를 직접 밟아보는 것이다. 이 같은 고객의 욕구를 경험프로그램으로 전환해 제공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경기 시작 전 베스트11과 사진을 찍는 프로그램이다. <그림 9>에서 후열 가장 우측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이 구단 관계자나 선수가 아닌 고객이다. 그리고 <그림 10>처럼 경기장 바로 옆에 좌석을 설치해 매우 가까이에서 경기를 볼 수 있는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이외에도 경기장에서 일반인이 출입하기 어려운 시설(라커룸, 방송시설 등)을 직접 방문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경기 후에도 선수들과 직접 만나서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을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경기장 내부에서 운영되는 경험 프로그램은 시즌 티켓을 보유한 고객이 경기장에서 음식이나 기념품을 구매할 경우 포인트를 적립해주고 그 포인트로 경험 프로그램을 구매할 수 있는 체계로 운영된다. 경험 프로그램을 시즌 티켓과 연결하는 것은 시즌 티켓의 가치를 높여 판매량을 증가시키고, 이를 통해 경기 당일에 많은 관중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며, 시즌 티켓을 구매하는 것으로 지출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경기장에서 계속해서 음료와 기념품을 구매하게 하는 동기를 제공하는 요소가 된다.

 

 

선수들의 활동을 가까이에서 보기 원하는 고객의 욕구를 고급 시설과 연계한 서비스도 제공한다. 우리에게는 스카이박스라는 표현으로 익숙한 럭셔리 스위트(Luxury Suite)는 대부분 1층과 2층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나 최근 경기장 시설을 개선하면서 운동장 바로 옆으로 위치를 옮겼다. 이름도 그라운드 스위트(Ground Suite)라고 불린다. (그림 11) 구단 관계자의 설명에 의하면 선수들이 골 세리머리로 자신이 득점한 공을 경기장 바로 옆에 위치한 럭셔리 스위트에 있는 고객들에게 전달하는 경우가 있다. 이 같은 서비스를 경험한 고객의 구단에 대한 충성도는 매우 높아질 수밖에 없다. 기존의 럭셔리 스위트와 다른 장소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경험은 고객들이 새로운 서비스를 구매하는 동기로 작용한다.

 

차별화된 경험 프로그램은 고객을 세분하고 다양한 고객 계층별로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요구사항을 철저하게 분석해야 제공할 수 있다. 시애틀사운더스FC는 고객 요구사항은 물론 현재 운영되는 서비스의 문제점을 분석하는 30여 명의 마케팅 및 영업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중 입장권 판매팀(Ticket Sales Team)의 역할은 경기 종료 후 경기장을 찾아 준 고객들에게 전화를 걸어 불편한 점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다음에 경기장을 찾으면 새로운 서비스를 경험하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재방문이 가능한지 물어보면서 지속적으로 고객 관련 정보를 얻고 새로 기획한 서비스가 다음 경기에 다시 한번 방문하게 할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프로그램인지 확인하며 문제가 있다면 개선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이 같은 AS 또한 고객들에게는 구단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결국 차별적인 경험 서비스는 단순히 경기를 관람하는 90분의 입장권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경기 전후 1시간 내외로 경기장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만들어진다. 다양한 경험 서비스들은 경기 시작 전 일찌감치 도착하게 해서 소비를 촉진하는 조기 활성화(Early Activation) 방안을 체계적으로 평가 분석한 결과에서 비롯됐다. 2013시즌 구단의 경영성과를 자체 분석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 구단은 경기장 조기 도착 관중 증가율과 조기 도착 고객의 소비 증가율 2가지의 KPI(Key Performance Index)를 통해 매년 성과를 측정하며 관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림 12)

 

이 같은 고객 서비스 제공은 미국 프로 스포츠 시장이 워낙 크고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다는 산업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애틀사운더스FC의 작년 매출은 480억 원 정도로 K리그 상위권에 있는 구단이 사용하는 비용과 많은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이는 구단의 운영 철학과 방향에 따라 우리나라에도 얼마든지 적용 가능하다는 통찰을 준다. 물론 가장 큰 시사점은 새롭고 독특한 경험을 제공할 때 새로운 고객이 늘고 기존 고객의 충성도를 높여 지속적인 매출 증가 및 성장이 가능하다는 점이며 이는 모든 기업들이 활용할 수 있다.

 

김정윤 웨슬리퀘스트 이사 jykim@wesleyquest.com

필자는 문화체육부의 4대 프로스포츠 경쟁력 강화 방안 컨설팅, K리그 30주년 기념 비전 프로젝트 및 8개 시민 구단의 비전과 발전 전략 및 관중 증가 방안 컨설팅의 PM을 담당했다. EPL의 아스날, MLS의 시애틀사운더스FC, LA 갤럭시, NBA의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등의 CEO, CMO와의 인터뷰를 통해 선진 프로스포츠의 성공 기법에 대한 벤치마킹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인수합병의 목적

 - 사업 다각화: 동원그룹의 주요 산업은 안정성이 낮은 반면, 동부 익스프레스는 성장률이 높지는 않지만 인프라 사업으로써 안정적 운용가능

 - 시너지효과 창출: 동원은 신선물류(콜드체인)운송에 강점

                  : 동부익스프레스는 폭넓은 육상/해상 운송 글로벌 원자재 취급

 - 해외진출의 교두보: 또한 항만 컨테이널 터미널 보유, 해외 지사 보유로 해외 진출 교두보



동부 익스프레스의 성장가능성

- 매출면 : 

   -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지분, 차량 운송면허, 고속사업 등

   - 신사업진출: 광의의 물류를 통해 협의의 물류에서 취급하지 않았던 영역 신규 참입(사업체 내부의 물류부분)

   - 적극적인 PMI(예: 보합제)를 통한 동부익스프레스 사원의 모티베이션 증가 


PE펀드와 사모펀드의 차이

사모펀드는 한국의 금융법령에 의해 정의된 개념으로, 적으로 집한 사람들끼리 돈을 모아서 만드는 펀드를 의미한다. 사모펀드 하나 당 투자자를 49인까지 모집할 수 있다고 한다. 그거보다 많아지면 사적인 모집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증권사나 은행에서 사는 펀드는 수천, 수만 명이 자유롭게 사거나 팔 수 있는 '공모펀드'다. 공모펀드는 금융당국이 까다롭게 감독한다. 사고라도 나면 피해자가 많기 때문이다. 반면 사모펀드는 '니들이 알아서 해라'는 식으로 감독을 느슨하게 한다. 정보공개도 잘 하지 않아도 된다. 그만큼 위험하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사모펀드에 돈을 넣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반인에게 권하는 사람도 없다. 사모펀드는 전문 투자가들끼리, 혹은 사업하는 사람들이 특정한 목적을 갖고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소 투자액도 몇 억이다.

Private Equity Fund를 흔히 사모펀드라고 잘못 번역하는 이유는 private이라는 단어를 보고 '아, 저게 사적이라는 뜻이구나' 이렇게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private이라는 단어는 그런 뜻으로 쓰인게 아니다. Private equity는 public equity에 대비되는 말로, 증권거래소에 공개되지 않은 주식, 즉 비상장 회사 주식을 의미한다. Private equity fund는 그런 비상장 주식에 투자하는 펀드다. 사모냐 공모냐는 중요하지 않다.



DBR Case Study: 동원그룹의 동부익스프레스 인수

저성장기에 수출입 물류 확장 돌파구! 과감한 M&A로 ‘글로벌 동원’ 날개 달다

Article at a Glance

동원그룹은 2017년 2월 물류회사 동부익스프레스를 인수했다. 물류산업이 침체된 와중에서도 인수 첫해 매출 7% 성장을 이뤄냈다. 이 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그룹 차원의 성장 & 리스크 포트폴리오 보완: 모회사인 동원산업의 참치 사업 의존도와 매출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물류사업 확장에 꾸준히 투자.
2) 재무 부담 최소화: 1차 공개입찰에 참여하지 않고 유찰되기까지 기다렸다가 재빠르게 단독 협상에 돌입해 가격을 낮춤. 인수 후에는 기존 사업 연관성이 적은 여객(고속버스, 렌터카) 부문을 신속하게 정리해 채무를 줄임.
3) 적극적 PMI: 모그룹 조직 문화에 빠르게 적응하기 위한 집체 교육, 온라인 교육, 독서클럽 등의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한편 포지티브 인센티브제를 도입해 노력에 대해 보상.




부산 감만동에 있는 동부익스프레스의 컨테이너 터미널. 고속도로 톨게이트처럼 생긴 세관 검색대 사이로 대형 트럭이 쉴 새 없이 오간다. 검색대 너머엔 넓은 컨테이너 야적장이 펼쳐져 있고 부두에는 20층 건물 높이의 거대한 크레인 일곱 기가 따뜻한 겨울 바다 위로 두 팔을 내밀고 있다. 월 100척의 컨테이너선과 8만 개의 컨테이너(TEU)를 처리할 수 있는 중형 부두다.

최근 몇 년간 세계 해운업계의 불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 컨테이너 터미널을 운영하는 물류기업 동부익스프레스는 2014년 경영권이 프라이빗에쿼티(PE)펀드에 넘어갔다. 특히 2015년 인수를 희망했던 현대백화점그룹과의 협상이 깨지면서 회사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컸다. 이런 상황에서 동원그룹이 나타났다. 동원은 인수협상에 들어간 지 두 달 만인 2016년 12월 동부익스프레스 인수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듬해 2월 경영권을 넘겨받고 컨테이너 터미널 등에 추가 투자가 이뤄졌다. 현장 직원들의 사기가 살아났다.

인수 후 재무 실적은 어떨까. M&A의 성공 혹은 실패를 논하기는 이른 시점이지만 동원그룹 합류 이후 동부익스프레스의 첫해 성적표는 나쁘지 않다. 2014년 이래 내림세였던 매출과 영업이익은 2017년 모두 회복세로 돌아섰다. 특히 주력 사업인 물류 부문은 이익뿐 아니라 매출도 7% 성장했다. (표 1) 시장 포화상태라는 물류산업에서 이뤄낸 성과라 더 뜻깊다.

동원그룹은 새로 가족이 된 동부익스프레스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수산, 식품포장재 사업이 주력인 동원그룹은 1990년대 후반부터 사업 포트폴리오 확장 차원에서 물류 사업의 비중을 꾸준히 늘려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주로 소비재 제품의 국내 유통물류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동부익스프레스가 보유한 항만과 해운, 육송, 철도 사업의 경쟁력을 더해 명실상부한 종합 물류업체로 업그레이드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실제로 2017년 모회사인 동원산업의 연결 매출과 연결 영업이익은 자회사인 동부익스프레스 덕에 큰 폭으로 상승했을 것으로 추산된다.1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도 기대가 크다. 물류 사업을 키워서 기존 사업과 균형을 맞추면 경기변동에 덜 노출된다는 계산이다. 동원산업이 집중해온 원양어업은 어획량과 어획물의 국제시세, 환율 변동에 큰 영향을 받는다. 운이 좋으면 수백억 원의 흑자가 나기도 하지만 반대로 큰 폭의 적자를 보는 것도 순식간이다. 반면 물류사업은 큰 이익을 보기는 힘들어도 매출의 대부분이 장기 계약이라 변동성이 작다. 수산업이 어려운 사이클이 올 때 물류업이 지지대 역할을 해줄 수 있다.

동원산업 물류담당 부사장을 맡다 2017년 2월 인수와 함께 동부익스프레스 CEO로 부임해온 김종성 대표이사는 이 점을 가장 강조한다. 그는 “물류사업은 낮은 투자수익률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모든 산업의 근간이 되고 포트폴리오 측면에서 상당히 안정적이고 성장 가능성이 높다”라며 “그래서 물류가 동원그룹의 효자 노릇을 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동원그룹의 동부익스프레스 인수는 과연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낼 수 있을까? 조직원들의 생각은 어떨까? 먼저 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고, 동원산업의 물류 비즈니스 역사의 맥락에서 이번 인수의 시사점을 분석한다.


딜(deal)의 기술, 2016년의 협상

동부익스프레스는 1971년 동부고속운수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전통 있는 물류/운송 업체다. 한때 계열사인 동부건설에 흡수된 적도 있었지만 2011년 물적분할돼 다시 독립했다. 고속버스 사업으로 시작해 육로 화물운송, 항만운영 등으로 사업을 확장해 종합 물류기업으로 성장했다. 동원그룹에 인수되기 전 2016년의 매출은 약 7073억 원, 영업이익은 369억 원이었다.

동부그룹은 재무 사정이 악화돼 2014년 5월 동부익스프레스를 금융투자가에게 매각했다. 매수자는 KTB프라이빗에쿼티와 큐캐피탈이 만든 특수목적회사(SPC) 디벡스홀딩스유한회사였고, 가격은 3100억 원이었다.

M&A 시장에서 활동하는 프라이빗에쿼티(PE) 투자자들은 일반적으로 매수한 기업을 최대한 빠른 시간에 되판다. 기업 활동을 통해 이익을 내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기업가치를 올려서 매각차익을 내는 것이 목적이다. 해가 갈수록 투자의 기회비용이 올라가므로 한 회사를 5∼10년 이상 계속 소유하는 경우는 드물다. 디벡스도 마찬가지였다. 2014년 12월, 동부건설이 기업 회생 절차에 들어가며 동부익스프레스를 재인수할 가능성이 없다고 확인되자마자 디벡스는 새로운 주인 찾기에 나섰다.

동부익스프레스는 물류사업도 튼튼했지만 알짜 자산들도 갖고 있었다. 먼저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의 지분 11.1%가 동부익스프레스의 소유였다. 당장 현금화하기는 어렵지만 장부가로만으로도 1300억 원에 달하는 든든한 재산이다. 또 차량 운송 면허도 있다. 한국에서는 택시 면허와 마찬가지로 화물트럭 역시 면허 숫자가 정부 규제에 의해 제한돼 있다. 2.5톤 트럭 기준으로 면허 1개당 약 3000만 원에 시가가 형성돼 있다는 게 업계 통설이다. 동부익스프레스가 보유한 면허트럭이 약 1000대이므로 그것만으로도 약 300억 원의 가치다.2  그리고 가장 오래된 사업인 고속버스(여객) 역시 캐시카우다. 동부는 주로 동해안권을 운행하는 노선을 갖고 있었다. 큰 수익이 나는 사업은 아니지만 거의 매년 흑자를 안겨주고 동시에 기업 브랜드 가치도 높여주기 때문에 매수 후보자들의 눈길을 받았다.

장이 열렸다. 입찰은 2015년 내내 진행됐다. 동부익스프레스는 당시 종합 물류업계 3위권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많은 기업이 관심을 보일 것으로 예상됐다. 물류사업을 신성장동력으로 키우고 있던 동원그룹 역시 후보 중 하나로 꼽
혔다.

동원그룹은 자체 식품사업의 유통물류로 시작한 물류사업을 1990년대부터 점차 확장해가며 다른 기업의 유통물류도 대행해주는 ‘3자 물류(3PL, 3rd party logistics)’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틈틈이 인수합병을 통한 사업 확장의 기회도 엿봤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에 사업을 접긴 했지만 2007년 KT로직스택배와 아주택배를 인수해 택배사업을 타진한 적도 있었다.

또 그룹 차원에서의 M&A 경험도 많았다. 2008년에는 세계 1위 참치캔 업체인 미국 스타키스트를 인수했고, 계열사인 동원시스템즈는 대한은박지(2012년), 한진피앤씨(2013), 테크팩솔루션(2014), TTP(2015), MVP(2015) 등 다양한 포장재 기업들을 인수했다. 또 식품회사인 동원F&B 역시 금천(2015), 더블유푸드마켓(2016) 등 업계 기업들을 인수한 바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M&A에 대한 그룹 차원의 노하우가 축적됐다.


즉 2015년 당시 매물로 나온 동부익스프레스를 인수할 만한 동기와 역량은 충분했다. 하지만 가격이 문제였다.

당시 동원산업의 물류담당 본부장(부사장)으로 근무하던 김종성 현 동부익스프레스 대표는 “(전 주주가) 홍보를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지 동부익스프레스의 실제 가치보다 많이 부풀려진 것 같았다. 최소 8000억 원에서 1조 원에 팔릴 거라는 얘기가 돌았다. 입찰에 들어가려면 아무리 낮게 잡아도 6000억 원 이상은 불러야 할 것 같았다. 그 정도면 투자금 회수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회상한다.

동원은 일단 입찰에서 발을 빼고 상황을 지켜봤다. 당시 동부익스프레스뿐 아니라 다른 물류 업체 A사도 인수 검토 대상이었으므로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A사 역시 PE펀드 소유였고 예상 가격은 동부익스프레스보다 낮았다.

이런 업계 분위기에서 동부익스프레스의 공개입찰은 흥행에 실패했다. 동원뿐 아니라 다른 잠재 후보들이 모두 높은 가격에 주저한 것이다. 오직 현대백화점그룹만이 2015년 9월 4700억 원을 제시하며 단독 입찰해 인수 우선협상대상자가 됐다. 하지만 동부익스프레스를 소유한 PE펀드와 현대백화점그룹의 협상은 두 달여 만에 종료됐다. 현대백화점 측은 11월 금융감독원 조회공시 답변으로 “가격 및 세부 조건에 대해 협의하였으나, 이견이 있어 인수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하였습니다”고 밝혔다.

현대백화점의 단독 입찰 및 협상 결렬은 동부익스프레스를 소유한 펀드와 임직원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소식이었지만 M&A 호가에 끼어 있던 거품을 제거해주는 계기가 됐다. 루머로 돌던 1조 원은커녕 그 절반 값에도 매수자가 나오지 않는 걸 본 경제신문들은 ‘업계 분위기를 볼 때 매각에 실패할 수도 있다’는 보도를 내기 시작했다. 상황은 매도자 우위 시장에서 매수자 우위 시장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매도자를 대표하는 KTB프라이빗에쿼티는 2016년 6월 대표까지 교체했다. 그만큼 시간에 쫓기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PE펀드는 자신들만의 돈으로 투자하는 게 아니라 은행, 보험사 등 ‘전주’들의 돈을 받아 투자하기 때문에 단기간에 실적을 보여줘야 했다.

그때 동원이 움직였다.

“4000억 원 후반대 금액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김 대표의 말이다. “동부익스프레스가 당시 매물로 나온 마지막 물류회사였는데, 이걸 하지 않으면 물류사업 확대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반드시 인수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다린 보람은 있었다. 현대백화점의 단독 입찰 덕분에 매수가가 4700억 원까지 내려갔으니 이제는 용기를 낼 만했다. 현대백화점이 제시한 가격을 기준으로, 다른 매수 희망자를 배제하는 배타적 협상이라는 조건으로 2016년 9월부터 딜이 시작됐다.

그런데 또 다른 이슈가 발생했다. 2016년 12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물류기업이었던 한진해운이 파산 절차에 들어갔다. 설마 했던 일이었다. 물류와 해운업계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기업인이 쇼크에 빠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 대통령 탄핵 등 정치적인 불안 요소도 커지고 있었다.

애초에 양측은 M&A 업계 관례에 따라 처음 제시했던 4700억 원에서 5%까지 가격을 조정할 수 있다고 합의했다. 따라서 하한 범위는 4465억 원이었다. 동원이 새롭게 제시한 4200억 원은 이 범위를 벗어났지만 디벡스 측은 결국 12월 중순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만큼 한진해운 파산의 충격이 컸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다시 해를 넘기거나 매각이 실패한다면 그때는 정말 매수자를 찾기 어렵겠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동부익스프레스는 동원그룹 식구가 됐다. 동부그룹을 떠난 지 2년 7개월 만이었다.

물론 매도자인 디벡스 입장에서도 손해 본 장사는 아니었다. 3100억 원을 투자해 약 1100억 원의 이익을 남겼다. 연간 기준으로 보면 약 11%의 이익률이다. PE 업계 기준에서는 높은 수익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본조달 비용, 리스크 비용, 법무와 기타 행정 비용 등을 고려하면 말이다. 하지만 매물인 동부익스프레스의 영업이익률이 5% 수준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또 해운업계가 전반적으로 침체된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그 정도 가격이면 선방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동부익스프레스 직원들 역시 동원그룹을 마다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어차피 PE펀드의 손에 오랫동안 남아 있지 않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고, 기왕이면 동원그룹처럼 장기적으로 물류 분야를 키우려는 계획이 있는 회사가 인수하는 것이 직원들에게도 반갑다면 반가운 소식이었다.

더군다나 1차 매각 실패 이후 회사의 미래에 대해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이었다. “펀드가 소유한 동안, 신문기사에 어느 회사가 우리를 살 거라는 말만 자꾸 나올 뿐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피로감이 높아졌고 붕 뜬 기분이었습니다. 인수가 결정되고 나니 그런 불확실성이 없어졌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HR팀 김태윤 대리의 기억이다.

노조와의 협상에 따라 직원 1인당 수백만 원, 합계 약 50억 원의 직원 위로금이 지급됐다. 이 돈은 매수자와 매도자가 함께 부담했다.



동원은 왜 물류회사를 샀을까

그렇다면 동원그룹은 왜 동부익스프레스를 샀을까. 다시 동부익스프레스 김 대표의 말을 빌린다. 그는 물류 분야 전문가다.

“크게 보면 기업이 M&A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일반적으로는 시너지를 본다. 두 개 회사를 합해 기존 사업에 도움이 돼야 한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시너지보다는 퍼즐 맞추기 같은 상호 보완 효과를 봤다. 동원의 기존 물류사업은 소비재 중심의 3PL 물류, 특히 국내 물류에 한정돼 있었다. 이에 비해 동부익스프레스는 항만 하역과 수출입 물류를 동시에 취급할 수 있고, 그것이 앞으로 국제적으로 진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동원은 콜드체인 물류가 강하니 동부익스프레스와 함께 냉동 컨테이너 물류를 한다면 신뢰성과 전문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서는 배경 설명이 좀 필요하다. 잘 알다시피 동원은 식품이 주력이다. 특히 참치가 유명하다. 2001년 설립된 지주회사 동원엔터프라이즈가 그룹의 정점에 있고 그 아래 상장기업인 동원산업(수산물과 물류), 동원F&B(가공식품), 동원시스템즈(식품 포장재) 등의 자회사가 있다. 한때 증권사를 인수하며 금융사업에도 발을 들였던 적이 있지만 금융 관련 사업은 2003년에 완전히 계열 분리됐다.3

그룹의 맏형 격인 동원산업만 놓고 보면 2017년 기준 참치 관련 사업이 매출의 약 60%를 차지한다.4  그 나머지 40% 정도가 물류사업이다. 식품사업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유통비용을 줄이고 물류를 잘할 수 있을까’를 꾸준히 고민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외부 물류까지 처리하는 사업으로 이어졌다.

동원 물류사업의 산증인이기도 한 김 대표와 물류운영팀장 김상협 부장의 설명을 통해 그 진행과정을 3단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990년대 초반 1차 물류혁신 어젠다: 상물(商物) 분리

IT 시스템과 통합 물류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의 식품회사들은 대리점(영업소)에 제품의 유통을 맡겼다. 각 영업대리점이 창고를 운영하고, 영업사원이 트럭에 물건을 싣고 돌아다니며 판매하고 수금하는 이른바 ‘루트 판매’ 형태였다. 보따리상이다. 동원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에는 참치통조림과 어묵, 게맛살, 냉동식품 등을 지역 영업사원들이 직접 배송했다. 매출이 커지고 영업활동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주문을 먼저 받고 물건을 나중에 배송하는 ‘프리세일(presale)’ 개념이 등장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영업사원이 판매와 수금, 물품 배송까지 함께 책임지는 구조라는 데는 차이가 없었다. 요즘도 우유 대리점 등 일부 산업은 이런 식으로 유통된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지역 영업거점 책임자의 권한과 권력이 막강하다. 영업현장에 밀착된다는 장점은 있지만 본사에서는 영업소 장부를 세밀히 들여다볼 수 없다. 들여다본다 하더라도 영업소에서 분기별 ‘밀어내기’ 등으로 영업하는 것을 적발할 수 없다. 중앙 차원에서의 물류관리, 재고관리도 어렵다. 한 지역에선 물건이 모자라고 옆 지역에서는 물건이 남아돌아도 서로 교환이 힘들다. 이렇게 낭비와 중복, 정보의 단절로 인한 비효율이 전사적으로 발생한다.

이런 비효율을 줄이기 위해 동원산업은 1992년부터 1995년 사이 ‘상물분리’ 작업을 진행했다. 돈의 흐름인 상류(商流)와 물건의 흐름인 물류(物流)의 분리라는 뜻이다. 지역 영업사원은 영업만 하고, 상품의 보관과 배송은 본사 물류부서에서 직접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반발이 많았다. 영업소 조직과 권한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동원산업 본사는 우선 지점별 재고조사를 시행했다. 예상했던 대로 지점마다 장부와 실제 재고물량 간에 차이가 많이 발생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관리 책임을 명확히 하기로 하고 독립적 물류 정책을 시행했다.

상물 분리 작업에 3년간 당시 돈으로 250억 원이 투입됐다. 그룹 전체 한 해 매출이 5000억 원에 못 미치던 시절이다. 막대한 투자 끝에 물류 전문 조직이 회사 내에 만들어졌고 35개였던 영업장이 10개로 광역화됐다. 각 영업지점 소속이었던 창고관리자, 배송기사들 수백 명이 본사 물류부서 직속으로 신분이 변경됐다. 냉장과 냉동식품을 보관, 배송하는 콜드체인 시스템이 갖춰졌으며 이 모든 것을 운영하는 전산 시스템도 완비됐다. 당시 식품뿐 아니라 소비재 업종 전체로 봐도 가장 선진적인 움직임이었다. 이런 노력이 인정받아 동원산업은 1995년 건설교통부가 제정한 제1회 물류대상을 수상했다.5

2. 1990년대 후반 2차 물류혁신 어젠다: 공동 물류

그다음 단계는 공동 물류였다. 1차 상물분리 작업을 통해 매출 대비 운송비를 6%대에서 4%대로 떨어뜨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더 이상의 비용절감 효과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여러 식품 및 생활용품 회사들의 물류를 한 번에 처리하는 공동 물류 사업의 진행을 추진했다. 어차피 같은 슈퍼마켓이나 대형마트로 배송한다면 10개 회사가 트럭 1대씩 보낼 것이 아니라 트럭 1대에 10개 회사 물량을 모아서 보내자는 것이다.

동원산업의 주도하에 삼양사, 애경산업, 대한통운, 그리고 일본 미쓰비시(IT 시스템과 물류센터 운영 파트너)가 참여해 컨소시엄이 만들어졌다. 합작법인 이름은 ‘Retail Support Korea’를 줄인 ‘레스코(Resko)’로 정해졌다. 설립 준비 과정에서 견학을 갔던 일본의 물류회사 이름이 RSI(Retail Support International)라는 데 착안했다. 레스코는 1998년 3월 경기도 양지에 1호 물류센터를 열었다. 1차 상물분리 혁신 때와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한국 소비재 업계에서 최초로 진행된 다자간 공동 물류 사업이었다. 지분은 동원이 34%로 가장 많이 가졌다. 주주총회에서 특별 결의사항을 막을 수 있는 3분의 1 이상의 지분을 확보한 것이다.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항상 현실이 사업가의 계획대로 움직여주지는 않는다. 제1 물류센터를 준비하는 동안 한국 경제에 대한 IMF의 관리체제가 시작됐다. 2호, 3호 물류센터를 지으려던 계획은 취소됐다. 주주사들 간의 입장 차이도 사업 확대에 걸림돌이 됐다. 1대 주주인 동원은 모든 물류기능을 레스코에 맡겼지만 다른 주주사들은 동원보다 조심스러웠다. 그들은 물류의 일부만을 레스코에 맡기고 나머지는 예전처럼 자사 내에서 처리했다. 그래서 A회사에서 레스코로 발령받아온 직원이 A회사에 가서 ‘제발 물량 좀 우리에게 달라’고 어제의 동료들에게 영업을 하는 일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결국 내외부적인 환경 변화로 인해 동원산업은 2006년 1월 파트너사들의 지분을 모두 자사의 주식과 교환하는 형태로 인수해 레스코를 흡수 합병했다.

3. 2000년대 3차 물류혁신 어젠다: 3자 물류

다자간 공동 물류 사업은 접었지만 레스코의 설립과 흡수 과정을 통해 동원산업은 자연스럽게 3자 물류산업에서 성장 기회를 잡게 됐다. 창립 초반에는 출자한 3개 사의 물류만을 처리하던 레스코는 2000년대 들어서부터 주주사들 외에도 다른 식품, 소비재 기업들의 제품도 유통해주기 시작했다. 2006년 레스코가 동원산업으로 흡수 합병된 후에도 자체적인 영업조직을 강화해 고객사를 늘려나갔다. 이른바 3자 물류 사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것이다. 레스코라는 사명은 사라졌지만 대신 로엑스(LOEX·logistics expert)라는 브랜드를 새로 만들었다.

2000년대 중반 글로벌 경제는 활황세였다. 로엑스의 매출도 꾸준히 커졌다. 이전에도 운송, 배송을 해주는 물류 전문 업체는 물론 많았다. 하지만 동원산업 로엑스는 창고 보관과 운송까지, 소비재 제조업체를 위한 토털 물류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런 3PL 사업모델은 한국 최초라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이는 2011년 또다시 국토해양부 주최 한국물류대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2017년 기준, 로엑스의 3PL 비중은 63%까지 커졌다. 나머지 37%만이 동원그룹 내부 물량이다. 고객사는 약 500여 곳에 달한다. 그중엔 진주햄, 한성기업 등 일부 품목에서 동원산업과 경쟁하는 기업들도 있었다. 판매에서는 경쟁 관계라도 물류 관리를 신속하고 투명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고객사의 신뢰를 얻었다는 설명이다. 또, 다루는 품목도 식품과 생활용품 위주에서 가전과 화장품까지 확대됐다. 물류 창고와 냉동 창고가 전국 곳곳에 신설됐다. 현재 3PL 사업에 있어 최대 경쟁자는 CJ그룹의 CJ대한통운이다. 단 저온물류에서는 경쟁자가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4. 2017년 이후 종합물류회사로

지금까지 보았듯 동원그룹의 물류사업은 자사의 제품을 유통하기 위해 시작했으나 점차 기능이 확대되며 3자 물류의 비중이 커졌다. 동부익스프레스 인수를 통해 소비재 제품의 국내 유통뿐만 아니라 항만과 해외 운송까지 포괄하는 종합물류기업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동원그룹의 큰 그림이다.


인수 후 조직 통합(PMI)

2016년 12월 마침내 동부익스프레스 인수 계약서에 서명하고 2017년 2월 초 새로운 경영진이 부임했다.

흔히 M&A의 성공 여부는 딜 자체가 아니라 딜 이후의 조직 통합 과정(PMI·post-merger integration)에서 갈린다고 말한다. 남녀 간의 결혼에 비유되기도 한다. M&A 경험이 많은 동원그룹도 어제까지 남이었던 사람들이 하나가 돼야 하는 PMI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 직원들 사이엔 3년 가까이 이어진 매각과정 동안 다소 지쳐버린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PE펀드 측이 신규 투자를 하지 않고 신사업도 추진하지 않는다는 불만도 있었다. 새 경영진은 이런 분위기를 추슬러야 했다.

“아무래도 조직문화가 어려웠다. 다른 문화에 속해 있던 직원들이 하나의 문화로 편입돼야 하니 PMI 과정에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이 김 대표의 말이다. 기본적으로 직원들의 능력은 우수하지만 3년 가까운 M&A 과정에서 겪은 불안정성과 투자의 부재로 인해 업무 추진력이 떨어졌다는 것, 그리고 사내 교육 시스템이 부족하다는 것의 그의 진단이었다.

그렇다면 조직문화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랐을까? 대체로 물류는 남초 업계다. 일이 거칠고 문화가 보수적이라는 느낌이 있다. 같은 업종 사람들이라 전반적인 분위기는 비슷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회사 간 차별점이 있었다.

김 대표가 보기에 여객 사업에서 출발한 동부그룹은 안정 지향적이고 직원들 자율에 맡기는 문화가 있던 반면 동원그룹은 원양어업에서 출발했으니만큼 다른 물류기업들에 비해 목표 지향적, 성과 지향적인 문화가 있다. 뱃사람들에게는 보합제(步合制)라는 전통이 있다. 배가 항구로 돌아올 때마다 총수입에서 경비를 제한 순수입에서 일정한 비율을 떼어 선장부터 말단 선원까지 모든 선원들이 각자의 몫을 나눠가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제아무리 관리가 철저한 회사라 하더라도 배가 일단 바다로 출항하면 그다음부터는 선원들을 일일이 관리할 수가 없다. 선원들 스스로 열심히 고기를 잡게 독려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긴 제도가 보합제다.

동원그룹은 현재도 선원들에게는 보합제를 적용하고 있고, 일반 임직원들은 보합제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수입에 꽤 큰 차이를 가져오는 인센티브 제도를 운영 중이다. 따라서 동부익스프레스에도 이런 제도가 적용됐다. 모든 임직원은 각자 KPI(key performance index) 지표를 설정하고 그에 따른 평가를 받게 됐다. 임원은 매출, 이익, 인재 육성 방식 등 IPM(individual performance measure)이라는 정량적, 정성적 목표를 정하고 그에 따라 인센티브를 받는다. 보고서에도 목표 대비 실적 달성률을 쓰는 것이 기본이다. 직원들에게도 3등급 인센티브제가 적용됐다. 과거 동부 시절에는 없었던 제도다.

이렇게 회사가 성과 지향적인 경영을 강조하는 데 부담을 느끼는 직원들도 있었지만 [표 1]에서 보듯 실제로 회사의 매출과 영업이익이 늘어나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에 큰 불만은 나오지 않았다. “기업문화의 차이 때문이라기보다는 동원그룹에 들어와서 회사의 실적이 좋아지니까 그만큼 일도 늘어난다는 느낌이었다. 인센티브제가 생긴 것도 좋았다. 과거에는 이런 동기부여 제도가 없었다.” HR팀 김태윤 대리의 설명
이다.

실적과 성과를 중시하는 동원의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분단가’ 개념이다. (그림 2) 경영진은 사원들이 쓰는 인트라넷 초기 화면에 직원 각자가 자신의 시간당 인건비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메뉴를 띄웠다. 예를 들어 연봉이 5000만 원인 사람이라면 회사 입장에서 그 사람을 고용하는 데 드는 인건비는 사무실 임차료, 보험료, 퇴직금 등을 더해 약 2배인 1억 원이다. 그것을 52주 5일 근무로 나누면 하루 인건비가 38만4615원으로 계산된다. 시간당 단가는 약 
4만8000원, 분당 단가는 800원이다. ‘지금 네가 쓰는 1분, 1분마다 800원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셈이다. 임원이라면 각종 유지비가 더 들기 때문에 연간 인건비가 연봉의 3배가 돼 분단가 역시 그만큼 높다. 다른 조직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관행인데 이는 보합제라는 동원 특유의 인센티브 구조와 연계해서 생각해봐야 할 부분으로 보인다.


사기를 불어넣어주기 위해, 문화적 거부 반응을 줄이기 위해 여러 PMI 작업이 동시에 진행됐다. 우선 동부익스프레스 전 직원이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장호원에 있는 동원그룹 연수원 ‘리더스 아카데미’에 1박2일간 입소했다. 동원 정신과 동원 문화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이 이뤄졌다. ‘열성, 도전, 창조’라는 그룹의 슬로건과 ‘원칙을 철저히, 작은 것도 소중히, 새로운 것을 과감히’라는 행동 규범에 대한 강의도 했다. 저녁식사는 그룹의 상징인 참치회였다. 계열사인 동원홈푸드에서 전문 셰프가 연수원을 찾아와 현장에서 참치 해체를 보여주고 다 함께 나눠 먹음으로써 동원그룹의 구성원이 됐다는 자부심을 심어었다.





회사에 돌아와서는 동원그룹의 인재 교육, 관리 시스템을 이식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항상 학습하는 조직, 학습 결과를 공유하는 조직을 만든다는 목표를 세우고 관련 제도들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회계를 중시하는 동원그룹 분위기에 따라 전 사원이 의무적으로 온라인 재무회계 과정 교육을 수강했다.

독서클럽도 연 4회 의무적으로 진행됐다. 역시나 성과와 실적, 혁신을 중요시하는 책들이었다. 도서 리스트는 [그림 3]과 같다. 직원들이 동원그룹의 조직문화에 흡수되는 과정에서는 행운도 따랐다. 우연히도 동부익스프레스와 동원그룹의 연봉 수준이 비슷했다. 인센티브제를 도입한 것 외에는 큰 조정을 할 필요가 없었고 불필요한 마찰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 신입 대졸 사원들도 배치됐다. 동부그룹 소속일 때는 동부의 대졸공채에서 채용이 됐지만 PE가 운영하는 2년 반 동안은 기수 개념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2017년 동원그룹 대졸 신입사원 32기 중 동부익스프레스에 지원한 10명이 들어왔다. 지원자가 무려 1000명 이상이었다는 것이 물류운영팀 김상협 부장의 설명이다. 새로운 피가 들어오며 조직의 활기가 더해졌다. 사무실은 서울역을 떠나 동원그룹이 있는 서울 서초구 양재동으로 이전했다.

마지막 남은 이슈는 회사의 이름과 로고였다. 동부라는 이름이 물류 업계에 브랜드 파워를 갖고 있기에 일단 로고만 교체하고 사명은 그대로 남겨뒀다. 이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랄까, 두 회사의 로고 모양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명에 대해서 회사 측은 앞으로 몇 년 정도는 지켜보겠다는 계획이다.

조직구조 변경과 자산 매각

조직문화 차원의 PMI 활동이 진행되는 동안 비즈니스의 영역에서도 조직개편과 구조변경 작업이 동시에 진행됐다. 우선 8개였던 지역 지사를 6개로 통합했다. 국내 물류본부와 국제 물류본부를 하나의 본부로 통합했으며 팀 수도 
17개에서 13개로 줄였다. “그것이 비즈니스를 진행하는 데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쪼개면 쓸데없는 비용이나 분열 등이 생길 수 있다. 좀 더 넓게 보자고 했다. 또 지역보다는 기능 중심으로 지사 체계를 바꾸는 게 맞다고 봤다.” 김종성 대표의 말이다. 부산 컨테이너터미널의 경우처럼 추가 투자가 집행된 부분도 있다. (DBR mini box ‘컨테이너 항만 운영 효율화’ 참고.) 당장 이익은 나지 않지만 향후 성장성을 볼 때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DBR mini box 
컨테이너 항만 운영 효율화


부산항 옆 감만동에 있는 동부부산컨테이너터미널은 동부익스프레스의 자회사다. 2016년 말 기준 자산은 약 360억 원, 매출은 약 480억 원이며 약 17억 원의 적자를 냈다.

이 컨테이너터미널은 동부익스프레스가 지난 2000년 부산항만공사로부터 5석짜리 컨테이너터미널 30년 운영권을 획득하며 세운 자회사다. 대만의 에버그린해운과 손을 잡았다. 동부익스프레스가 65%, 에버그린이 35%의 지분을 갖는 조건이었다. 2016년의 적자는 해운산업 불황과 항만시설 간 경쟁 격화 때문이다.

이런 실정 때문에 처음 동원그룹이 동부익스프레스 인수를 타진할 때는 터미널 사업을 접는 것도 고려했지만 실사 이후 사업을 계속 유지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심지어 에버그린의 지분까지 사들여 100% 자회사로 만들었다. 운영 효율 향상을 위해서다.


이전까지는 컨테이너터미널의 관리부서와 회계부서 등을 동부익스프레스 부산지사와 별도로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에버그린의 지분 때문이었다. 이제는 두 조직을 함께 운영할 수 있게 됐다. 예를 들어 컨테이너터미널의 야적장과 동부익스프레스 육상운송 부문의 창고시설 등 물류 인프라를 두 법인이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공유할 수 있다. 인사조직 측면에서도 효율성 향상이 기대된다. 동원그룹 인수 이후 동부부산컨테이너터미널 대표이사직은 동부익스프레스의 부산지사장이 겸직하게 됐다. 동시에 항만 하역 장비에도 신규 투자를 늘리고 있다. PE펀드 경영 중에는 투자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아예 정리한 사업도 있다. 동원산업의 물류사업과 큰 관련이 없는 여객 고속버스 부문과 렌터카 부문이다. 이 중 렌터카 부문은 성장성이 제한적이라는 데 이견이 없어서 쉽게 매각을 결정했다. 사업 양도 방식으로 2017년 9월 일본의 오릭스캐피탈이 가져갔다.

고속버스 부문 매각은 조금 복잡했다. 고속버스는 1971년 동부익스프레스 설립 당시부터 쭉 해오던 사업이다. 상징성이 있다. 동원 하면 참치가 떠오르듯이 동부 하면 고속버스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게다가 많지는 않아도 이익이 꾸준히 나는 분야였다. 고속버스는 적자가 날 경우 정부에서 요금 인상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장 가능성이 제한적이라는 점에서는 렌터카 사업과 마찬가지였다.

또 동원그룹은 동부익스프레스 인수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재무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고속버스 부문의 매각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고속버스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만 했다. 이 부문은 동부고속이라는 별도 법인으로 분리해 팔기로 했다. 안정된 흑자 사업인지라 여러 매수자가 입찰했고 2017년 11월 가장 높은 금액을 써낸 키움증권과 코리아와이드의 컨소시엄이 인수해 갔다. 코리아와이드는 예전의 경북고속으로, 대구를 중심으로 한 고속버스 회사다. 이들은 버스기사를 포함해 동부고속 전 직원들을 데려갔다(버스기사를 제외한 사무직 직원의 수는 원래 많지 않았다).

연합인포맥스 등 언론 보도에 따르면 렌트카 매각은 397억 원, 동부고속 매각은 887억 원이었다. 결과적으로 동부익스프레스와 동원그룹은 두 건의 매각을 통해 1000억 원이 넘는 현금을 얻어 인수에 들어갔던 재무적 부담을 상당 부분 완화했다. 또 동부고속이라는 전통의 브랜드도 살아남게 됐고, 직원들도 일자리를 지켰다.6

신사업 전략

물류업계는 성장이 거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여겨지지만 김 대표는 2017년 2월 부임과 동시에 전년 대비 10.1%의 성장 목표를 잡았다.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10%이상의 목표를 설정하고 노력을 경주해야만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는 7.3%의 성장을 이뤘다. 2018년도는 목표가 더 높다. 13%다.

결국 그동안 하지 않았던 신사업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물류의 신사업모델’이라 하면 미국의 아마존과 같이 드론 등 첨단 기술을 이용한 택배 서비스나 무인 배송, 맞춤 배송 등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동부익스프레스는 정반대, 즉 생산자 쪽에서 기회를 찾고 있다.

예를 들어 2017년에는 신재생에너지 물류에서 가능성을 봤다. 정부 정책에 따라 화력발전을 줄이고 미세먼지 발생이 적은 다양한 바이오 에너지원을 찾는 과정에서 동해에 있는 영동화력발전소가 우드칩(나무조각) 발전으로 전환한다는 정보를 접했다. 동남아시아부터 부산이나 포항으로 선박 운송하고, 다시 철도를 통해 동해의 화력발전소 내부까지 들여오는 원스톱 물류 프로젝트였다. 동부익스프레스는 이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했다.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 관급 원스톱 물류 서비스 시장을 공략하는 데 자신감을 갖게 된 계기였다.

같은 측면에서, 대기업 생산물류 역시 이 회사가 관심을 갖는 분야다. 대기업의 유통물류 부문은 이미 포화된 시장이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유통망을 이미 구축해놓고 있다. 그러나 생산물류, 즉 공장이나 사업체 내의 물류 부문은 아직 미개척지라는 것이 김 대표의 생각이다. 규모가 큰 기업 안에서는 원자재와 기기 등을 이동시키는 데도 많은 비용이 드는데, 특히 이 일만을 위해 정규직 직원을 고용할 경우 고정비용 부담이 상당하다. 이런 부분을 아웃소싱 받는다면 클라이언트나 물류업체 모두에게 윈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분석과 시사점

동원그룹의 동부익스프레스 인수의 특징과 시사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저성장기 기업 성장의 돌파구로서 M&A를 선택

저성장기 기업 성장의 돌파구로서 M&A의 중요성이 확대되고 있다. 신규 수요가 감소하고 고객 쟁탈 경쟁이 심화되는 저성장기에는 어느 기업이든 본업 중심의 시장 장악력을 확대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경쟁기업보다 신속하게 M&A를 추진해 업계 재편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7  물류산업도 예외가 아니다. 물류업계의 주 수익원인 택배 부문만 살펴보더라도 온라인 및 모바일 쇼핑의 증가 등으로 물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나 단가는 하락하고 있으며 이에 반해 서비스에 대한 고객의 요구 수준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주요 물류기업들은 국내외에서 활발한 M&A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국내 물류기업들의 M&A는 주로 대기업이 주도하며 자산 위주라는 특징이 있다. 또 해외시장 확장을 고려하는 대기업이 네트워크 확대를 통한 물류 역량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례로 업계 수위를 달리고 있는 CJ대한통운은 2013년 CJ그룹의 택배물류회사인 CJ GLS가 대한통운을 합병해 탄생했다. 이 회사는 공격적인 M&A를 추진하고 있다. CJ대한통운은 2016년 이후 2년 만에 6개 업체(물류센터 포함)를 인수하는 등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국내 시장에서의 성장 한계 등을 감안해 해외 시장으로의 진출을 발 빠르게 모색하고 있다.

M&A를 활용한 시장지배력 확대, 효율적인 고객 확보를 노리는 것은 글로벌 물류기업도 마찬가지다. 2015년 기준으로 세계 물류기업들의 M&A 거래규모는 금액 기준으로 약 1740억 달러로 전년 870억 달러 대비 2배 가까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특히 신규 시장 진출 시 신규 법인 설립 및 투자보다는 기존 업체들의 인프라와 고객망을 직접 인수한다.8  2016년 5월 세계 2위 기업인 미국의 FedEx가 4위인 네덜란드의 TNT를, 세계 3위인 미국의 UPS가 2015년 8월 미국의 코요테로지스틱스(Coyote Logistics), 2017년 1월 영국의 프레이텍스(Freightex)를 인수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최종 고객 대상의 배송을 강조하는 라스트 마일 딜리버리(Last Mile Delivery), 4차 산업혁명 관련 물류기술(자율주행차, 드론, 사물인터넷 등)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IT 기반 물류 스타트업들이 다수 출현하고 있다. 향후 이런 스타트업들에 대한 M&A도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흐름 속에서 동원산업이 본업 중심의 시장 장악력 확대를 위해 자사의 기존 물류 부문을 보완할 수 있고 미국, 중국, 베트남, 인도 등 4개국에 해외 법인을 가지고 있는 동부익스프레스를 인수한 것은 일면 타당한 선택이다. 우선 동부익스프레스는 항만하역 및 육상운송 등에 강점을 보이고 있었고 동원산업이 식료품을 주로 취급한 반면에 동부익스프레스는 원자재를 취급하는 등 운송 품목의 다양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동원산업의 기존 물류 부문을 보완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동원산업의 주력사업이 수산업 및 이를 바탕으로 한 참치 가공, 유통업이다 보니 물류에 대한 투자도 주력사업의 확장과 더불어 진행돼 왔다. 특히 신선물류(Cold Chain, 콜드체인)에 특화된 투자가 이뤄져 왔다. 신선물류란 농·축·수산물을 비롯한 식료품, 화훼류, 의약품 등 온도 민감성 제품의 생산, 저장, 운송, 판매, 소비에 이르기까지 유통 전 과정에 걸쳐 일정 온도관리를 통해 제품의 품질과 안전을 보장하는 물류 시스템을 의미한다. 그 이름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이 신선물류와 일반 물류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유통 과정 중 상품을 냉장 또는 냉동 상태로 취급해야 하며, 이를 위해 기존 운송, 보관 장비가 아닌 특수한 시설 및 장비가 추가로 요구된다는 점이다. 이는 달리 이야기하면 3자 물류 기업이 신선물류 비즈니스를 고객사에 제공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투자와 더불어 노하우가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이 자체가 나름의 진입장벽이다.

그러나 신선물류 위주로는 업계 내 성장이 제한적이며 여전히 대부분의 수요는 일반 물류 품목에서 발생하기에 일반 육상운송에 강점을 지니고 있는 동부익스프레스의 인수는 동원산업의 부족한 부분을 일정 부분 보완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동부익스프레스는 항만하역을 위한 컨테이너 터미널을 보유하고 있다. 운송, 보관 기능에만 초점을 맞춰온 동원산업 입장에서는 퍼즐 맞추기와 같이 물류사업의 빠진 기능을 보완한다는 측면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물론 기존 식음료 중심의 신선물류와 원자재 중심의 일반 물류 및 항만하역은 그 성격과 대상 고객이 매우 상이하기에 직접적인 시너지를 조기에 발현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은 맞춰진 퍼즐을 이용해 향후 특화된 서비스를 찾아내거나 기존 경쟁력을 개선 및 강화시켜 나갈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시급하다. 국내 물류기업들은 성장 잠재력이 높은 중국, 베트남 등 동남아 지역으로 활발히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관련 4개국에 해외 법인을 가지고 있는 동부익스프레스의 인수는 중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다.

요약해보자. 동원그룹의 동부익스프레스 인수는 한진해운의 파산, 대통령 탄핵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불확실성이 커지는 시기에 이뤄졌다. 불확실성이 클 때는 기업들이 몸을 사리는 경우가 많으나 역으로 일부 기업들은 선제적인 투자에 나서기도 한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에도 2000년대 들어 0%대 성장률을 기록하며 ‘잃어버린 20년’으로 대변되는 시기를 보냈지만 일부 기업들은 새로운 활로를 뚫기 위한 수단으로 M&A를 활용하며 핵심 역량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아사히그룹은 정체된 주류시장에서 활로를 찾기보다는 음료, 식품 등 본업과 관련이 높은 기업들을 M&A하며 무리한 사업 다각화가 아닌 익숙하고 잘할 수 있는 분야로 진출했다.9  즉 불확실성이 크거나 저성장기에는 잘 알고,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의 M&A를 우선 검토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2. 제조 및 유통기업의 물류 아웃소싱 확대 트렌드를 겨냥

물류의 전통적인 개념은 재화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전달되기 위해 필요한 운송, 보관, 하역 활동을 총칭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개념이 확대됐다. 물류정책기본법에 따르면 물류의 정의는 아래와 같다.

“재화가 공급자로부터 조달 생산돼 수요자에게 전달되거나 소비자로부터 회수돼 폐기될 때까지 이뤄지는 운송, 보관, 하역 등과 이에 부가돼 가치를 창출하는 가공, 조립, 분류, 수리, 포장, 상표부착, 판매, 정보통신 등을 말함.” (출처: 물류정책기본법 제 2조)

물류의 정의가 넓어짐에 따라 영역도 확대돼 왔다. [그림 4]에서 볼 수 있듯이 최근에는 전문적인 역량을 갖춘 물류기업들이 늘어남에 따라 3자 물류를 이용하는 기업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특히 다양한 생필품들을 취급하는 유통업체(중대형 마트 등)나 식음료 프랜차이즈의 경우 수많은 상품 또는 식자재들을 복수의 제조(생산)업체들로부터 납품받게 되는데 이 경우 유통업체나 프랜차이즈 가맹점의 입장에서는 적시에 적량의 상품을 납품받을 수 있느냐가 재고 관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제조업체 입장에서도 여러 곳에 위치한 유통업체의 지점들 또는 프랜차이즈 가맹점들에 상품을 빈번히 납품하기 위해서는 비용적, 시간적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3자 물류를 활용하게 되면 유통업체와 제조업체 모두의 부담을 덜 수 있다.


동원그룹도 기존 유통물류 이외에 생산물류 등으로 사업영역의 확대를 꾀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 동부익스프레스의 관련 인프라 및 인력을 활용할 수 있다. 또한 동부익스프레스 인수를 통해 유통기업들에 대한 물류공동화 차원의 3자 물류 비즈니스를 확대하고, 기존 식료품 및 생필품 이외에 다양한 품목을 취급함으로써 새로운 고객사를 확보할 준비를 갖춰나가고 있다. 즉 동원산업의 동부익스프레스 인수는 최근의 제조 및 유통기업의 물류 아웃소싱 확대 트렌드를 겨냥해 기존 식료품 유통 위주의 3자 물류 비즈니스를 1) 취급 품목을 다양화하고 2) 공급사슬 상류로 물류사업의 범위를 확대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해외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FedEx, UPS 등 물류 전문기업들은 물류시장 자체의 저성장과 경쟁 심화로 인해 해외 및 신규 물류시장 진출을 위한 M&A를 적극 추진 중에 있으며 규모 확대를 위한 상호 M&A도 활발하다. 또한 급변하는 IT로 인해 아마존 등 테크 기업의 물류시장 진출이 가시화되면서 이를 견제하기 위해 물류에 접목할 수 있는 최신 IT에도 투자하고 있다. 또 UPS는 고객이 주문하는 제품(기계부품)을 3D프린터로 만들어서 아시아 주요 국가에 24시간 이내에 배송하기 위해 싱가포르에 3D프린팅 공장을 세웠다. 이런 분야도 광의의 물류업이라고 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도전 과제

동원산업의 동부익스프레스 인수는 앞서 언급한 대로 긍정적인 측면이 많은 의사결정이다. 장기적으로는 동원그룹의 신성장 동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동부익스프레스의 경우 택배사업이 없다. 경쟁 관계인 CJ대한통운, 한진, 롯데글로벌로지스 등이 택배사업을 중요한 사업영역 중 하나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해외사업도 마찬가지다. 동원 로엑스 시절부터 국내 시장에 초점을 맞춰오다 보니 현대글로비스나 판토스 등 해외 사업을 일찍부터 추진해 온 기업과의 경쟁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동부익스프레스의 기존 사업이 항만하역, 여객운송 등이었기에 인수를 통한 직접적인 시너지 획득은 쉽지 않을 것이다. 회사 경영진이 말하듯 시너지보다는 물류 사업군의 상호 보완 및 향후 해외 진출을 고려한 인수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해외 진출은 쉽지 않은 과제다. 동원산업의 기존 취급 품목이 주로 식품이다 보니 동원그룹과 연계한 해외 진출 등에는 통관체계, 운송체계 등과 관련해서 극복해야 할 많은 난제가 있다. 또 일반 품목의 경우에도 이미 CJ대한통운 등의 국내 주요 종합 물류기업들이 해외 현지 업체들에 대한 적극적인 M&A로 해외 시장 진출을 가속화하는 상황이라 동부익스프레스의 인수만으로는 실질적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두 회사는 주로 다뤄온 품목도 다르다. 국내 물류시장에서도 로엑스가 소비재 물류 중심이었다면 동부익스프레스는 원자재 중심이었다. 따라서 단기간 내 눈에 띄는 시너지 효과를 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동원산업의 동부익스프레스 인수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받기 위해서는 세 가지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두 회사의 상호 보완 차원을 벗어나 3자 물류 사업에 있어서 차별화된 역량을 구현할 수 있을지, 둘째, 해외 법인들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해외 시장 진출이 가능할지, 셋째, 지속적인 투자를 바탕으로 신성장 동력의 추가 확충이 뒤따를 것인지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작성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정하영(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경영학부 4학년) 씨와 허옥엽(성균관대 문헌정보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정호상 인하대 아태물류학부 교수 hjung@inha.ac.kr
조진서 기자 cjs@donga.com 




DBR Case Study: 디지털 콘텐츠 제작 스타트업 ‘플레이리스트’

‘에이틴’ 시리즈로 10대 사이 거대한 팬덤
“작게 실험해서 반응 보고 크게 키운다”

Article at a Glance

디지털 콘텐츠 제작 스타트업 플레이리스트가 고속 성장하고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1. 또래 문화에 민감한 10대를 타기팅해 몰입도 높은 팬덤을 구축하는 데 집중했다.
2. 분명한 목적(Object)과 구체적인 핵심 결과(Key Result)를 공격적으로 설정해 구성원을 정렬시키는 동시에 개개인의 능력치를 극대화했다.
3. 스토리를 중심으로 세계관을 구축해 캐릭터들의 현실성을 더함으로써 간접 광고와 브랜디드 콘텐츠의 효과를 배가했다.
4. 작품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마케팅, 비즈니스팀 등 비제작팀들이 참여해 IP의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5. IT 서비스 회사처럼 작게 실험해 소비자 반응을 테스트한 뒤 스케일업하는 방식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확장했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황지수(단국대 경영학과 4학년) 씨와 이지연(한양대 교육공학과 3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2020년 현재, 10대들의 대중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드라마는 무엇일까?

1990년대 말 ‘학교’ 시리즈, 2000년대 초 ‘반올림’ 시리즈가 인기를 끌었다면 2020년에는 웹드라마 ‘에이틴’ 시리즈를 빼놓고서 10대를 이야기할 수 없다. 파급력으로 치면 과거 TV 드라마에 비할 데가 아니다. 에이틴은 2018년, 2019년에 방영된 시즌 1, 2를 통틀어 4억8000만 뷰 수를 기록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시즌이 끝난 지 1년이 지난 현재도 10대들 사이에서 거대한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드라마 방영 직후 팬들의 성원으로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팬미팅이 열렸다. 또 드라마 주인공, OST 가수와 함께하는 페스티벌도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1

에이틴 주인공으로 얼굴을 처음 알린 신인 배우들은 10대들의 워너비로 등극, 현재 각종 광고와 지상파 방송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에이틴의 OST를 부른 아이돌 그룹 세븐틴은 2018년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즈(MAMA)에서 ‘베스트 OST’상을 수상했다. 드라마에 등장한 뷰티와 문구, 잡화 상품들도 불티나게 팔렸다. 10대 팬들은 드라마 속 캐릭터들의 표정과 말투 하나하나에 열광했다. 에이틴 제작사 플레이리스트의 박태원 대표는 “방영 당시 고등학교 교내 방송에서 에이틴 OST가 흘러나오고 학생들이 쉬는 시간마다 에이틴을 돌려 본다는 팬들의 얘기에 에이틴이 10대들의 대화 중심에 자리 잡았음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에이틴의 인기에 가려진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런 대박 작품을 제작한 회사가 업력이 길거나 인력과 자원이 풍부한 대형 제작사가 아닌, 설립된 지 2년이 채 안 된 신생 스타트업이라는 점이다. 플레이리스트는 네이버 자회사인 스노우 안에 있던 일개 팀이었다가 2017년 5월 네이버 웹툰과 스노우가 공동 출자해 별도 법인으로 독립시킨 스타트업이다. 에이틴은 현 박태원 대표가 2017년 말 CEO로 합류해 첫 도전한 대형 프로젝트였다. 당시만 해도 플레이리스트는 대학생들의 캠퍼스 라이프를 그린 웹드라마 ‘연애플레이리스트(이하 연플리)’ 첫 시즌으로 페이스북에서 20대 여성을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수준이었다. 전체 직원 수가 30명이 채 안 됐다. 에이틴 프로젝트는 모든 측면에서 새로운 도전이었다. 타깃 시청자 연령대는 20대에서 10대로, 메인 플랫폼은 페이스북에서 유튜브로 바꿨다. 스케일은 기존 8부작에서 24부작으로 대폭 커졌다. 이전 작품의 3배가 넘는 제작비 예산이 책정됐다. 보통 한 달 정도면 충분했던 제작 기간도 촬영 및 방영 포함 9개월이 걸릴 정도로 시간적인 투자도 컸다. 회사 인력의 절반 이상이 꼼짝없이 이 작품에만 매달렸다. 그렇게 제작된 에이틴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플레이리스트는 모바일 콘텐츠의 주 소비자인 10대를 사로잡은 디지털 기반 스튜디오로 거듭났다. B2B뿐 아니라 커머스 등 B2C로 IP 비즈니스 모델을 확장하는 데도 성공했다.

에이틴으로 이름을 날린 플레이리스트는 뒤이어 연플리(시즌 4), 엔딩 시리즈(이런 꽃 같은 엔딩, 최고의 엔딩, 또한번 엔딩) 같은 시즌제 웹드라마를 줄줄이 흥행시키면서 10대, 20대들이 가장 자주 찾는 웹드라마 채널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플레이리스트 유튜브 채널의 커뮤니티는 현재 휴방 기간인데도 불구하고 어서 빨리 ‘봄방학’이 끝나길 기다리는 팬들, 애칭 ‘러플리(러브 플레이리스트)’들의 댓글 반응이 뜨겁다. 최근에는 지상파 TV와 공동 제작해 동시 방영한 드라마 ‘엑스엑스(XX)’가 흥행하면서 20대뿐 아니라 30대 이상으로 시청자 외연을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 2년간 놀라운 성장세를 인정받아 지난해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VC) 알토스벤처스로부터 53억 원의 외부 투자도 유치했다. 현재 플레이리스트는 글로벌 누적 조회 13억 뷰, 전 세계 구독자 약 1000만 명을 확보하고 있다.

요즘 같은 디지털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플레이리스트는 어떻게 차별화된 입지를 구축하며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DBR(동아비즈니스리뷰)는 박태원 대표, 강명희 CMO 등과의 인터뷰를 통해 플레이리스트의 콘텐츠 차별화 전략과 그런 전략을 뒷받침한 OKR 중심의 일하는 방식을 분석했다.




DBR mini box I
플레이리스트는?



플레이리스트는 웹드라마를 제작하는 디지털 콘텐츠 스튜디오로 2017년 5월 네이버 자회사인 네이버 웹툰과 스노우가 공동 출자해 설립했다. 2017년 12월 구글코리아 출신의 박태원 대표가 선임됐다. 대표작으로는 ‘에이틴’ ‘연애플레이리스트’ ‘엔딩 시리즈’ ‘엑스엑스(XX)’ 등이 있다. 네이버TV,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SNS 채널을 운영하고 있으며 일부 작품은 TV에도 동시 방영했다. 주 수익원은 웹드라마를 통한 간접 광고(PPL)와 브랜디드 콘텐츠 제작, 작품 유통권 판매 등이 있으며 OST, 웹툰, 커머스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현재 직원 수는 90여 명이다.





1. 왜, 10대 팬덤인가?

2017년 12월 플레이리스트에 합류한 박 대표의 비전은 뚜렷했다. 그는 CNPD(Contents, Network, Platform, Device)로 요약되는 인터넷 비즈니스의 먹이사슬에서 콘텐츠의 주도권이 점점 더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구글 코리아와 유튜브 코리아에서 7년간 일하며 IT 대기업들의 치열한 플랫폼 전쟁을 직접 지켜본 그다. 특히 유튜브에서 다양한 분야의 크리에이터를 교육하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콘텐츠의 힘을 실감했다. 평소 디즈니와 마블 영화를 즐겨보던 그는 콘텐츠 중에서도 스토리 포맷의 확장성에 주목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꿈꿔온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구글을 뛰쳐나왔다. “외부 콘텐츠에 의존하는 플랫폼들은 결국 양질의 콘텐츠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게 된다. 그래서 IT 기업들 간 플랫폼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콘텐츠 비즈니스가 주도권을 갖고 성장할 수밖에 없다.” 박 대표는 ‘아시아의 디즈니’를 만들겠다는 담대한 꿈을 스타트업 플레이리스트에서 실현하기로 마음먹었다.

에이틴 프로젝트는 플레이리스트에 합류한 그가 새로운 비전을 향해 도약하고자 사활을 걸고 도전한 실험이었다. 그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가장 먼저 팀원들과 프로젝트의 분명한 목적(Object)을 공유한다. 에이틴 프로젝트의 목적은 바로 “우리나라 10대들의 대중문화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치는 작품을 만들자”였다.

콘텐츠의 핵심 타깃을 10대로 잡은 것은 당시 굉장히 중요한 의사결정이었다. 콘텐츠 비즈니스에 팬덤이 중요하며, 특히 다른 연령대 집단보다 10대를 타깃으로 하는 것이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10대들만이 가진 문화 코드는 바로 ‘또래 문화’다. 10대들은 일정한 시간을 학교라는 공간에서 공동 생활하는 환경에 놓여 있다. 그러다 보니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는 또래 집단이 많이 보거나 사용하는 것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향이 크다.

따라서 콘텐츠 제작자 입장에서 보면 10대들에게 사랑받는 캐릭터들을 성공적으로 론칭하면 빠른 시간 내에 10대들의 핵심 문화권에 진입할 수 있다. 에이틴은 캐릭터의 디테일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쓴 프로젝트였다. 제작팀은 캐릭터의 비주얼뿐 아니라 성격, 제스처, 습관 등에 관해 백문백답을 만들어 정리할 정도로 캐릭터의 특징을 구체화했다. 포커스그룹 인터뷰, 설문 조사,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 탐색 등 10대에 관한 온갖 리서치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10대 시청자들을 감동시키고 더 나아가 그들의 문화를 선도하려면 그들에게 익숙한 ‘공감’뿐 아니라 낯선 ‘동경’까지 이끌어 낼 수 있는, 즉 10대들이 따라하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필요했다. 플레이리스트가 추구하는 ‘공감’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이 콘텐츠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보여주는 모습에 자신의 모습을 쉽게 투영할 수 있게 만드는 수준 이상이었다. 시청자가 캐릭터를 동경하고 캐릭터가 느끼는 바를 마치 자신이 느끼는 것 같이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




에이틴의 여주인공 도하나의 캐릭터가 딱 그랬다. 똑 단발이지만 양말은 짝짝이로 신고, 겉으로는 도도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도하나의 모습은 평범한 고등학생이면서도 주변에 흔치 않는 매력을 발산했다. 팬들은 이런 도하나가 마치 실존 인물인 양 공감하고, 또 도하나가 되고 싶어 했다. 도하나의 스타일링과 행동, 말투를 따라 하는 ‘도하나병’이란 신조어가 유행하기도 했다. 마케팅팀은 에이틴이 방영하는 시기에 도하나 개인이 운영하는 SNS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면서 캐릭터의 현실성을 극대화했다.


강명희 CMO는 “팬들은 도하나란 캐릭터가 마치 실존 인물인 것처럼 살아 숨 쉬는 데 환호했다. 이런 채널들을 통해 팬들의 충성도가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10대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팬덤은 다른 세대로 확장시키기에도 유리하다. 이들 10대도 시간이 지나면 20대가 되고, 대학생이 된다. 한번 플레이리스트가 만든 세계관에 몰입하게 된 소비자들은 자연스럽게 플레이리스트의 20대 대학생용 콘텐츠로 유입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동시에 10대, 그중에서도 딸들과 소통을 많이 하는 사람이 어머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자연스럽게 40대, 50대로 시청자층이 확장된다. 실제로 플레이리스트는 덕질을 하는 고3 캐릭터와 현실 감각이 없는 딸에게 ‘팩트 폭격’을 하는 엄마가 티격태격하는 드라마 ‘인서울’을 만들어 콘텐츠의 세대 확장을 시도했다. 세대 확장을 위해 어설프게 40대, 50대용 콘텐츠를 만드는 것보다는 10대들이 해당 콘텐츠를 보면서 “엄마 같이 보자. 이거 재미있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작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2. 공격적인 OKR로 한계를 넘다

“우리나라 10대들의 대중문화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치는 작품을 만들자.”

박 대표가 사내 공유한 에이틴 프로젝트의 목적은 언뜻 보면 이상적이고도 무모한 도전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목표는 리더 개인의 치기 어린 욕심도, 허무맹랑한 이상도 아니었다. 목적(Object)은 구성원들이 함께 달성해야 할 핵심 결과(Key Result), 즉 ‘시청 시간’으로 구체화했다. 추상적인 목표를 손에 잡히는 수치로 현실화한 것이다. 박 대표는 “정성적 목표를 달성했는지 여부를 판단하려면 그에 걸맞은 정량적인 수치가 필요하다. 에이틴의 경우, 예컨대 중•고등학생 인구의 70% 이상은 시리즈 전체를 꾸준히 봤다는 가정이 성립해야 목표를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을 역산한 시청 시간을 우리가 달성해야 할 정량적 목표로 설정했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구글에서 일하면서 체화한 ‘OKR’ 중심의 일하는 방식을 플레이리스트에 이식했다. OKR는 목표(Object)와 핵심 결과(Key Result)의 약자로 기업과 팀, 혹은 개인이 목표를 달성하고 협력하기 위해 세우는 일종의 약속을 의미한다. 목표가 성취해야 할 대상이라면, 핵심 결과는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의미한다. OKR는 구성원들을 분명한 목표를 향해 정렬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려면 측정하고 검증할 수 있는 핵심 결과가 반드시 필요하다.



플레이리스트는 왜 하필 ‘시청 시간’에 초점을 맞췄을까? 2017년 말은 페이스북이 알고리즘을 바꾸면서 사용자들의 활동성이 줄어든 반면, 유튜브가 급성장하던 시기였다. 페이스북이 메인 플랫폼이었던 플레이리스트에도 유튜브 플랫폼에 맞는 전략의 변화가 필요했다. 유튜브에서 일했던 박 대표는 텍스트와 이미지 중심 플랫폼인 페이스북과 달리 영상 플랫폼 유튜브에서는 조회 수, 친구 공유보다 절대적인 누적 시청 시간을 늘리는 것이 알고리즘 기반 추천과 공유에 더 유리하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박 대표는 “조회 수보다 시청 시간 지표에 집중함으로써 영상 콘텐츠의 길이를 늘이고, 한 번 보기 시작한 사람이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영상을 보도록 영상 초반의 집중도를 높이면서 섬네일과 제목도 바이럴보다는 콘텐츠에 대한 흥미를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꿨다”고 설명했다.

핵심 결과는 구성원 모두에게 목적지로 나아가기 위한 이정표 역할을 한다. 플레이리스트에서 ‘시청 시간’은 프로젝트 기간 내내 중요한 의사결정 기준이 됐다. 구성원 각자의 전문성과 성향이 다를지라도 논의의 초점은 결국 “10대들이 진정 원하는 게 맞을까? 10대들이 여기에 열광할까? 10대들이 더 많이 보게 할 수 있을까?”로 모였다. 작가, 연출, PD뿐 아니라 디자인, 사업팀 등 관련 모든 팀원이 작품의 섬네일 디자인, 대사 톤 하나하나까지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OKR를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지를 찾아 나갔다. 30대 중반인 박 대표도 생활 패턴까지 바꿀 정도로 몰입했다. “출퇴근길, 틈날 때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최신 아이돌 음악을 일부러 찾아 들었다. 10대들, 특히 여성들이 즐겨 찾는 장소와 인터넷 사이트를 찾아다니면서 요즘 유행이 무엇인지 공부했다.”

OKR는 작품별 방영 시점과 인원과 예산을 정하는 기준이 된다. 에이틴 프로젝트에는 이전 시리즈의 3배에 달하는 8억 원의 예산이 책정됐다. 신생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큰 금액일지 몰라도 OKR에 비하면 과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하지만당시 플레이리스트 규모에 비하면 대중문화를 바꾸겠다는 OKR 자체가 너무 높은 수준은 아니었을까? 이에 대해 박 대표는 “OKR는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한다”면서도 구성원들과 협의해 “우리가 정말 최선을 다해야 겨우 달성할 수 있을 정도로 공격적으로 높게 설정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만 구성원 모두의 업무 몰입도가 높아지고, 구성원과 조직 모두 한계를 시험하면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표가 낮으면 구성원들은 안정적으로, 쉬운 선택지를 택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목표가 높으면 구성원들이 기존에 해오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을 도모하게 되고, 스스로 최소한의 리소스로 최대의 임팩트를 낼 방법을 찾아 나서게 된다.”

플레이리스트가 OKR에 따라 일하는 방식은 에이틴뿐 아니라 다른 모든 작품에도 적용된다. OKR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핵심 결과를 통한 목표 달성률도 높아지고 있다. 플레이리스트는 예산, 편성 시기, 장르적 성격, 플랫폼 특성 등 자체적으로 설정한 10여 개 변수를 고려해 달성해야 할 ‘시청 시간’의 정량적 수치를 계산하고 있다. 박 대표는 “그간 작품별 OKR 중심으로 일한 경험이 축적되면서 이제 내부적으로 정성적인 목표가 설정되면 그것을 수치화하는 작업은 공식을 통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작품의 OKR가 확정되면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팀별 OKR와 개인별 OKR가 뒤따라 정해지는 시스템이다. 제작팀을 제외한 마케팅팀, 디자인팀, 비즈니스팀, 경영지원팀 등의 OKR 역시 크게는 각자 맡은 작품의 OKR, 즉 시청 시간을 따라가는 한편, 팀별 역할에 필요한 OKR도 세부적으로 설정한다. 예컨대, 마케팅팀의 경우 에이틴의 시청 시간 OKR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브랜딩 PPL 같은 세부 전략을 짜는 동시에 작품과 별도로 플레이리스트 전체 브랜딩에 필요한 OKR, 예컨대 SNS 채널별 소통 전략도 함께 세운다. 제작팀의 OKR는 작품별로 6개월∼1년 단위로 범위가 유동적이지만 다른 팀은 연간, 분기별 OKR를 별도로 설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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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R란?

OKR는 목표(Objective)와 핵심 결과(Key Results)의 약자로 목표와 핵심 결과를 구체적으로 설정함으로써 성과를 관리하는 프레임워크를 말한다. ‘OKR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앤디 그로브(Andy Grove) 전 인텔 CEO는 피터 드러커의 목표 관리(MBO) 이론을 보완한 iMBO(intel Management By Objectives) 시스템을 구축해 인텔에 적용했다. 1970년대 인텔 엔지니어로 일했던 존 도어(Joan Doerr)가 그로브로부터 이를 직접 배우고 iMBO의 핵심 원칙을 OKR로 정의했다. 이후 글로벌 벤처 투자 기업인 클라이너퍼킨스(Kleiner Perkins)로 옮긴 존 도어 현 클라이너퍼킨스 회장은 1999년 당시 스타트업이었던 구글에 투자하면서 OKR 운영 방식도 함께 전수했다. OKR를 기업 문화로 실천한 구글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OKR은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뿐 아니라 대기업, 비영리 단체로까지 널리 확산됐다. 래리 페이지 구글 창업자는 “존 도어는 오랜 기간에 걸쳐 우리가 열 배 성장에 도전하도록 자극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겠다는 우리의 목표를 성취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줬다”고 말했다.

존 도어는 본인이 쓴 책 『전설적인 벤처투자자가 구글에 전해준 성공 방식, OKR(Measure What Matters)』에서 OKR 프레임워크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존 도어에 따르면 OKR는 구체적이고 행동 지향적으로 정의된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3∼5개의 핵심 결과로 구성된다. 핵심 결과는 반드시 측정과 검증이 가능해야 한다. 핵심 결과를 모두 달성했다면 목표는 당연히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OKR를 애초에 잘못 설계한 것이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해놓은 기간이 끝나면 구성원들은 핵심 결과를 달성했는지 여부로 성과를 평가한다. OKR 문화는 구성원들을 구체적인 목표에 전념시키고, 목표와 핵심 결과로 팀과 개인의 노력을 정렬시키는 동시에 협력을 촉진함으로써 어려운 목표도 달성 가능하게 만든다.


이렇게 팀별, 개인별로 정렬된 OKR의 가장 큰 특징은 하향식이 아니라 상향식으로, 구성원들이 직접 자율적으로 정한다는 점이다. 박 대표는 “OKR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율성과 책임에 크게 의존한다”며 “전체 OKR로 큰 방향이 설정되면 팀과 개인 레벨에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자율적으로 세부 OKR를 설정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특성은 일반 기업에서 쓰는 핵심 성과지표(KPI)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KPI가 제시하는 세세한 업무 단위의 정량적 목표가 상위 레벨에서 직원들을 마이크로매니지먼트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OKR에서 제시하는 상위 레벨의 숫자는 전략적 방향성을 보여주는 역할에 그친다.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실질적인 세세한 업무 내용은 직원들의 자율에 맡겨진다. 그래서 플레이리스트의 작업 방식은 작품별로 다 다르다. 다시 말해, 콘텐츠 제작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성공 공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공통의 방향성과 목표 아래 각자의 방식으로 주도적으로 일할 뿐이다.

플레이리스트에서는 작품 단위별로 매주 ‘위클리’ 회의가 열리는데 이 자리에서 개별, 팀별로 업무 진행 상황을 공유하고 전체 OKR를 달성하는 데 수정하거나 필요한 내용이 무엇인지 서로 피드백한다. 이런 자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OKR를 중심으로 서로 협력하는 조직문화가 형성됐다. 구성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율적으로 공통의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고, 그런 모습이 존중받는다. “작품별, 팀별로 지향하는 목표가 분명하게 정렬돼 있기 때문에 중간에 직원 한두 명이 퇴사해 업무에 공백이 생기더라도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다.”(박 대표)



3. 영속적인 세계관의 구축

플레이리스트 작품들의 가장 큰 특징은 누가 연출 혹은 작가인지와 상관없이 작품들이 하나의 세계관으로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플레이리스트 작품에는 에이틴의 배경인 서연고등학교, 연플리의 배경인 서연대학교, 이들 주인공이 자주 찾는 카페 리필 등이 교차 등장한다. 에이틴의 주인공들이 서연대 진학을 지망하고, 이들이 방과 후 즐겨 찾는 카페 리필에서는 연플리 주인공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식이다. 플레이리스트 드라마의 팬이라면 에이틴, 연플리, 엔딩 시리즈 등 주요 작품 속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일명 ‘플레이리스트 유니버스(Playlist Universe)’ 지도를 마음속에 그릴 수 있다. 한번 팬이 된 시청자는 자연스럽게 다른 시리즈에도 관심을 갖고 꾸준히 구독하게 된다. 한 작품의 주인공이었던 캐릭터가 다른 작품에도 조연 혹은 카메오로 등장하면서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플레이리스트 세계관 안에서 한번 등장한 캐릭터는 계속 살아 숨 쉬면서 다른 작품에도 등장해서 팬들로 하여금 마치 실제 인물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래서 한 시리즈가 성공하면 다른 시리즈도 덩달아 인기를 얻는다. 개별 작품이 아닌 플레이리스트란 회사를 향한 대규모 팬덤, 애칭 ‘러플리’가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

플레이리스트는 유튜브와 같은 SNS 채널들에서 쏟아지는, 개인 크리에이터들이 만들어내는 콘텐츠와 어떻게 스스로를 차별화할 수 있었을까? 플레이리스트가 내세운 차별화 포인트는 바로 ‘하이퍼 리얼리티 세상, 즉 실재(實在)보다 더욱 실재같이 느껴지는, 가상의 세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안에서, 시청자들은 끊임없이 플레이리스트가 만든 캐릭터들에 몰입함으로써 팬덤을 키워간다.

이런 가상의 세계관을 통한 팬덤 구축은 플레이리스트의 가장 주요한 수익원인 PPL이나 브렌디드 콘텐츠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도 유리하다. 최근 로맨틱 코미디의 대가 김은숙 작가의 신작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는 지나친 브랜드 간접 광고(PPL) 장면들 때문에 ‘이게 드라마를 보는 건지, 홈쇼핑을 보는 건지 모르겠다’는 시청자들의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PPL은 중요한 수익원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극의 흐름을 파괴하는 수준의 PPL은 전체 콘텐츠 자체의 완성도에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또 이로 인해 시청률이 하락할 경우 수익에 오히려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더 킹:영원의 군주’의 사례가 잘 보여준다.


결국 PPL은 PPL이 콘텐츠 자체로 보이거나 시청자가 해당 PPL 관련 콘텐츠를 억지로 보기보다는 자발적으로 찾아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플레이리스트는 세계관을 만들고, 그 안의 캐릭터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살아 숨 쉬는 인물들로 드러날 때 내부의 스토리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PPL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봤다. 즉, 시청자가 플레이리스트의 세계관에 몰입한다면 실제 그 세계관에서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의 고등학생인 캐릭터가 살아 숨 쉬는, 실존하는 인물처럼 느끼게 될 것이고, 이 캐릭터가 운영하는 SNS 채널들에도 방문하게 될 것이다. 또 해당 캐릭터가 어떤 옷을 구매하고, 어떤 향수를 뿌리고, 어떤 식당에 가는지를 해당 캐릭터가 운영하는 SNS 채널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보여준다면 PPL 혹은 브랜디드 콘텐츠 형태의 광고 콘텐츠더라도 캐릭터가 등장하는 스토리의 극 흐름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 플레이리스트는 연애플레이리스트의 메인 캐릭터인 정푸름이 직접 운영하는 브이로그(Vlog) 형태의 ‘정풂 TV’를 유튜브 채널 안에서 운영하면서 다양한 브랜디드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또 인스타그램에서 ‘Playlist_Fashion’이란 독립 계정을 통해서 플레이리스트의 주요 캐릭터가 콘텐츠 안에서 입고 있는 패션 아이템들을 지속적으로 소개하는 브랜디드 콘텐츠들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플레이리스트는 견고한 세계관을 형성하고, 그 안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가 실존 인물처럼 살아 숨 쉬며 성장하게 만들면서 비즈니스 모델 또한 확장시키는 미래형 콘텐츠 비즈니스 모델을 실험하고 있다.

4. 작품 간, 팀 간 경계를 허무는 스토리

플레이리스트의 세계관이 작품별로 꾸준히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비결은 작품뿐 아니라 해당 작품을 맡은 제작팀들도 끈끈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플레이리스트가 제작 인력의 80% 이상을 내부화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 대표는 “작품의 고퀄러티를 유지할 뿐 아니라 작품 배경과 캐릭터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새로운 작품에 녹여내려면 회사 내부 인력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플레이리스트 제작 과정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마케팅팀과 비즈니스팀 등 비제작팀들이 작품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참여해 스토리 혹은 캐릭터를 구체화하는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점이다. 대본을 쓰는 단계에서부터 작가, 마케팅, 비즈니스팀이 협의해 스토리와 가장 어울리는 브랜드가 어디일지를 고민하고, 브랜드에 직접 PPL을 제안하기도 한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브랜드 특성에 맞춰 스토리를 구성하기 때문에 PPL 단가도 높게 책정하는 편이다. PPL이 스토리를 훼손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웹드라마 스토리의 영향력을 오프라인으로까지 자연스럽게 확장시킬 수 있는 비결이다. 실제로 스토리에 녹아든 PPL은 단순 노출에 그치지 않고 캐릭터와 시너지를 발휘하면서 실제 상품 매출의 증대로 이어지고 있다. 콘텐츠 애청자가 상품 구매자로 연결되는 선순환이 이뤄지는 것이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연플리 시즌4에서 진행한 파리바게뜨와의 컬래버레이션을 들 수 있다. 플레이리스트와 파리바게뜨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드라마 톤앤드매너에 맞춰 제품을 개발해서 PPL과 브랜디드 콘텐츠를 드라마에 노출하고, SNS 이벤트와 오프라인 프로모션까지 함께하는 ‘올인원(all in one)’ 마케팅 컬래버를 진행했다. 박 대표는 “대학생들의 데이트 장소로서 공간적 배경이 중요한데 누구나 격식 없이 만나서 얘기할 수 있는 곳, 동시에 선물을 주거나 간식을 먹을 수 있는 곳 중 어디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파리바게뜨에 컬래버를 제안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대중적이지만 Z세대 인지도는 약한 파리바게뜨는 1020세대에 ‘데이트 장소로도 파리바게뜨가 좋다’는 인식을 심을 수 있길 원했다. 이에 플레이리스트는 캠퍼스 커플의 핑크빛 로맨스를 대표하는 연플리의 톤앤드매너에 맞춰 ‘썸 탈 때 먹는 빙수=썸빙수’ 등 ‘핑크테마’ 기획 상품의 출시를 파리바게뜨에 제안했고, 드라마에서 연애코드가 나올 때마다 상품을 지속적으로 노출했다. 드라마를 통해 대학 생활, 핑크빛 로맨스, 달달한 디저트, 데이트 장소 하면 자연스럽게 파리바게뜨가 연상되도록 만드는 장치였다. 또 브랜디드 콘텐츠인 ‘파리바게뜨 X 연애플레이리스트 특별편’에서는 여자 친구에게 잘 보이고픈 연플리의 20대 대학생 커플뿐 아니라 에이틴의 10대 고등학생 커플까지 등장시켜 콘텐츠 타깃을 확대했다. 이 영상은 유튜브, 페이스북, 네이버 TV 등에서 총 300만 뷰를 기록하며 대규모 바이럴에 성공했다. 플레이리스트도 이번 컬래버를 통해 전국 파리바게뜨 매장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연플리 IP를 알릴 수 있었다. 오프라인으로 영향력을 확장시킨 것이다.

작품 엑스엑스(XX)는 아예 스토리와 함께 신규 커머스 상품을 직접 기획해 성공을 거둔 사례다. 플레이리스트는 2020년 1월 엑스엑스(XX) 작품의 종영과 동시에 향수 브랜드 ‘니어리스트 벗 로스트(Nearest but lost, 이하 니어리스트)’를 출시했다. 플레이리스트가 외부 브랜드와 협력 없이, 자체적으로 커머스 상품을 기획 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향수 커머스 아이디어는 1년 전 워크숍 회식 자리에서 누군가 우연히 꺼낸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향수는 사람들의 상상을 자극하고 궁금증을 자아낸다. “웹드라마를 본 팬들이 오프라인에서 실제 향을 맡아보면서 자연스럽게 드라마 속 캐릭터를 떠올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향수는 영상에서 보고 듣는 이상의 후각적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매력적인 카테고리였다.”







당시 엑스엑스(XX)는 메인인 여성 주인공 캐릭터는 정해지고, 남자 주인공은 여주인공의 ‘남사친(남자 사람 친구)’으로 섬세한 성격이라는 정도의 콘셉트만 결정된 상태였다. 비즈니스팀과 작가팀은 향수 커머스를 염두에 두고 이 남자 주인공의 직업을 조향사로 설정했다. 그리고 향도 드라마 주인공 캐릭터 4명에 맞춰 4가지 타입을 개발했다. 향수병, 로고 디자인 등 브랜드의 톤앤드매너와 정체성도 엑스엑스(XX)의 대본 작업과 더불어 구체화했다. 예컨대, ‘니어리스트 벗 로스트’란 브랜드명에도 ‘가장 가깝지만(가까웠지만) 잃어버린 것’이란 뜻으로 과거에 가까운 사이였지만 이제는 떠나간 사랑을 다루는 드라마의 함축적 스토리를 담았다. 이렇게 엑스엑스(XX) 시청자들은 남자 주인공 왕정든이 향수 공방을 운영하면서 드라마 속에서 만든 향수 상품을 현실에서도 만날 수 있게 됐다. 왕정든 역을 맡은 배우가 직접 프로모션에 나서면서 의미를 더했다. 이 상품은 올리브영에서 ‘2020 신상품 TOP 5’ 부문 1위에 선정됐다. 드라마 속 왕정든이란 캐릭터의 힘을 오프라인 커머스로까지 확장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제작팀, 작가팀뿐 아니라 디자인, 마케팅, 비즈니스팀이 팀 간 경계를 허물고 공통의 목표 아래 정렬돼 각자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다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5. IT 스타트업처럼 실험, 또 실험

플레이리스트는 콘텐츠 제작 회사지만 IT 스타트업처럼 끊임없이 작은 실험을 하고, 그 결과물을 가지고 스케일업을 하는 방식으로 작은 성공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초기 제작비가 많이 드는 콘텐츠 산업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기존 IT 기업이 서비스를 테스트하듯이 가볍게 파일럿 형태로 론칭, 소비자 반응을 보고 스케일업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분야로 확장하길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례로, 플레이리스트는 IT 웹드라마를 만드는 게 주 사업이지만 일부 캐릭터를 가지고 웹툰을 만들기도 했다. 2019년 에이틴 시즌 1과 시즌 2 사이에 시즌 1.5로 웹툰을 시도한 사례를 토대로 2020년 방영한 웹드라마 ‘또한번 엔딩’은 드라마와 웹툰을 별도 제작, 동시 공개해 인기를 쌍끌이했다.

또 2018년 에이틴 시즌 1 방영 당시 무료로 진행했던 팬미팅은 2019년 시즌 2가 끝나고 유료 팬미팅으로 규모를 키웠다. 웹드라마가 팬미팅을, 그것도 유료로 개최하는 것은 이례적인 이벤트였다. 티켓값이 5만5000원인데 과연 1500석을 채울 수 있을까 우려도 컸지만, 그런 우려가 무색하게 예매 당일 오전 8시에 예매 사이트에 2만여 명이 접속하면서 1분이 채 안 돼 팬미팅은 매진됐다. 팬미팅의 성공 경험을 토대로 최근 대규모 플레이리스트 페스티벌을 기획하기도 했다. 비록 코로나 위기 때문에 취소됐지만 페스티벌 역시 블라인드 티켓 사전 판매가 1분이 채 안 돼 매진되면서 팬덤의 힘을 보여줬다.



플레이리스트는 모든 작품이 끝날 때마다 그 작품이 실패했든, 성공했든 반드시 전체 인원이 모여 리뷰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이 자리에서 팀별로 업무가 OKR 달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어떤 부분은 잘됐으며, 어떤 부분은 미진했는지를 발표하고 토론한다. 박 대표는 “회의는 누군가를 벌을 주거나 평가하기 위한 자리가 절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작품의 결과가 기대에 못 미쳤다고 할지라도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분석, 토론하면서 새로운 교훈을 얻는 것으로 늘 회의를 마무리한다.

실제로 플레이리스트가 제작한 작품들이 전부 흥행한 것은 아니다. 시리즈별로도 반응이 다 다를 뿐 아니라 아예 전체 시리즈가 실패한 사례도 있다. ‘연애포차’는 그중에서도 가장 아픈 손가락이다. 2017년 하반기에 2부작 파일럿으로 편성됐다가 시청자 반응이 좋아 정규 편성된 연애포차는 높은 관심 속에서 출발했지만 끝이 좋지 않았다. 파일럿 편 스토리가 본편에서 제대로 이어지지 않은데다 파일럿 때 출연했던 배우들이 전부 교체되면서 연기력 논란까지 불거졌다. PPL이 과도해 몰입도를 떨어뜨린다는 비판까지 나왔다. 파일럿 성공을 이끌었던 내부 인력이 출산 및 육아 휴직을 떠나 부재한 상황에서 충분한 준비 기간 없이 본편 제작을 무리하게 진행한 탓이 컸다. 박 대표는 “준비 기간이 짧았고 외부 작가와 협업하면서 충분한 내부 소통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쉬움만큼이나 깨달음도 컸다. 작품을 시작할 때 제작만큼이나 충분한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는 점과 내부 전문 인력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이때의 실패를 계기로 플레이리스트는 한 작품 내 PPL 브랜드 숫자를 최대 3∼4개로 제한하기로 했다.

올해 플레이리스트는 SNS 채널에 최적화된 숏폼을 넘어서 TV 같은 전통 미디어에서도 소화될 수 있는 미드폼 드라마에 본격 도전한다. 2020년 1월 플레이리스트 최초로 지상파와 공동 제작, 동시 방영한 작품 엑스엑스(XX)는 처음으로 작품 전편의 러닝타임을 20분으로 제작한 미드폼 드라마다. 플레이리스트는 5∼7분에서 10∼15분으로 러닝타임을 늘려왔으며 연플리 시즌 4의 일부 에피소드에서 처음으로 20분의 미드폼 에피소드를 실험했다. 그리고 올해 엑스엑스(XX)를 시작으로 미드폼 형태로 TV와 동시 제작하는 드라마를 본격적으로 방영할 예정이다. 10대들을 위한 웹드라마 제작사라는 한계를 스스로 깨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플레이리스트의 2020년 OKR에는 시청 시간뿐 아니라 시청률, 화제성 지수, 매출 같은 지표가 새로 추가됐다. 올해 목표는 뉴미디어와 전통 미디어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장기적으로 OTT(Over The Top) 서비스 회사로 진화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미드폼 드라마와 TV 진출은 플레이리스트가 콘텐츠 비즈니스를 한 단계 더 스케일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전망이다. 그동안 플레이리스트의 B2B 주 수익원은 PPL이나 브랜디드 콘텐츠 뿐 아니라 OTT나 IPTV 같은 다른 채널에 작품 유통권을 선공개 형식으로 제공하거나 종영한 작품에 대한 유통권을 판매하는 것이었다. 플레이리스트 IP가 1020 시청자 팬덤을 보장하는 대표 IP로 자리 잡으면서 유료 플랫폼들도 플레이리스트 IP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TV 진출은 플레이리스트가 뉴미디어와 전통 미디어의 경계를 허물고 디지털 세대뿐 아니라 30대 이상의 TV 시청자들 또한 공략해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그렇게 되면 IP를 통해 파생되는 비즈니스 규모 자체가 훨씬 더 커질 수 있다. ‘아시아의 디즈니’를 꿈꾸는 박 대표의 가슴 속에는 디지털 스튜디오의 한계를 뛰어넘는 더 큰 플라이휠(Fly Wheel)2

이 돌아가고 있다. 박 대표는 “웹드라마뿐 아니라 TV 미드폼 드라마에서도 인정받는 우수한 IP로 시청자들의 트래픽과 화제성을 집중시키고, 그것을 다시 매출로 연결해 회사를 성장시키고 인재를 모아 더 우수한 IP를 개발하는 선순환을 이끌겠다”고 말했다.

6.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플레이리스트는 견고한 세계관을 형성하고, 그 안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실존 인물처럼 느끼는 ‘러플리 팬덤’을 구축함으로써 브랜드 자체의 인지도뿐 아니라 10대와 20대 중심의 확고한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플레이리스트의 비즈니스 모델이 장기적으로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러플리 팬덤’을 잘 관리할 뿐 아니라 확장시키는 게 중요하다.

특히 팬덤은 ‘양날의 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덕질을 하는 팬들이 많아질수록 해당 콘텐츠에 대해서 팬들이 원하는 바, 눈높이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팬들과 좀 더 깊이 있는 수준으로 소통해서 팬들이 자신이 이 세계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보다 적극적으로 플레이리스트 세계관에서 팬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들이 반영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플레이리스트는 플레이리스트 세계관에서 중요한 캐릭터들의 인기가 높아지고, 이를 실존 인물로까지 느끼게끔 하면서 팬덤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세계관을 해칠 수 있는 위기는 언제든 닥칠 수 있다. 해당 캐릭터를 연기하는 연기자가 세계관에 맞지 않는 형태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높은 인기로 인한 출연료 인상으로 출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캐리 언니’로 유명한 콘텐츠 미디어 업체 캐리소프트는 1대 캐리인 ‘강혜진’ 씨가 하차하면서 구독자들의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다. 이처럼 세계관에서 캐릭터를 실존 인물처럼 느끼게 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해당 캐릭터를 연기하는 사람들의 인기가 하락하거나 연기자들이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는 사건 등에 연루될 경우 어떤 방식으로 세계관에 영향을 주지 않게 할지를 늘 고민해야 한다.

플레이리스트와 영역은 다르지만 플레이리스트처럼 세계관을 기반으로 비즈니스를 하는 콘텐츠 기업들이 어떤 방향으로 팬덤을 확장시켜나가는지를 참고하는 것도 좋겠다. 게임회사 넥슨은 팬들을 위해서 일명 ‘네코제’라고 불리는 넥슨 콘텐츠 페스티벌(Nexon Contents Festival)을 운영하고 있다. 넥슨의 다양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을 좋아하는 팬들이 중심이 돼서 만드는 넥슨 콘텐츠 축제라고 할 수 있다. 게임 캐릭터를 중심으로 하는 굿즈와 팬아트 등이 전시 판매되고, 게임 캐릭터의 코스튬 행사, 게임 OST 콘텐츠 행사 등이 열린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넥슨이 철저하게 넥슨의 게임 유저 팬들이 게임의 지식재산권(IP)을 개방하고, 팬들이 직접 2차 창작물을 만들어 전시하고 판매하도록 장려했다는 점이다. 2015년부터 시작된 이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가한 유저 아티스트 숫자가 무려 1500명이 넘는다. 그리고 이들이 기획하고 만들어서 판매한 액세서리, 피규어, 인형 같은 창작물 개수도 수십만 가지에 달한다. 플레이리스트도 앞으로 더 깊이 있는 수준의 세계관, 그리고 그 세계관에 더 깊이 있는 수준의 팬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그들의 팬을 보다 생산적인 팬덤 집단으로 유도하는 방식을 고민해야겠다. 


비즈니스모델의 혁신

자유여행 투어의 결합이라는 가치창조

서비스 공급(가이드)을 먼저 공략

플랫폼 사업은 이용자와 컨텐트를 충분히 모은 후 특이점이 지나면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그렇게 모은 데이터는 절대적인 진입장벽이 된다.




DBR Case Study: ‘마이리얼트립’의 플랫폼 전략

“짜증나는 강제 쇼핑 패키지여행 그만”
고객-가이드 직접 연결해 ‘여행 작품’ 만들다

Article at a Glance

가이드와 여행객을 중개하는 온라인 플랫폼 ‘마이리얼트립(My Real Trip)’이 경쟁이 치열한 여행 업계에서 지난해 한 해 동안 가입자 80만 명을 모으며 급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1. 복잡했던 여행상품의 유통 구조를 가이드-여행객으로 단순화하고 거래구조를 투명화해 가격 거품을 없애고 쇼핑 등 불필요한 여행 옵션을 제거했다.
2. 플랫폼 전면에 내세운 가이드들이 다양하고 독특한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여행지에서 독특한 체험을 원하는 자유여행객의 니즈를 충족했다.
3. 티켓·숙박·항공권으로 서비스를 확대해 여행 종합 플랫폼으로 거듭났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구창원(연세대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여행 시장은 빠르게 성장했다. 2013년 1485만 명이었던 해외 출국자 수는 2015년 1931만 명, 2017년 2650만 명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이 기간 해외여행 지출액도 23조2000억 원에서 25조4000억 원, 29조5000억 원으로 크게 뛰었다. 한 번 갔던 곳을 또 찾는 여행객이 많아졌고 현지에서의 소비도 예전보다 크게 늘어났다.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개별 자유여행 추이다. 2013년 해외여행 행태에서 자유여행의 비중은 52.4%로 패키지여행(38.4%)을 넘어섰다. 이후에도 자유여행의 비중은 2014년 56.9%, 2016년 68.0%, 2017년 67.7%로 크게 늘었다. 반면 2017년 패키지여행의 비중은 25.3%까지 쪼그라들었다. 대형 여행사의 패키지상품 성장률이 유럽을 제외하고 대부분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이 같은 추세가 반영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급성장한 기업이 있다. 바로 마이리얼트립이다. 이 업체는 투어 가이드와 여행객을 온라인으로 연결해준다. 2016년까지만 해도 마이리얼트립의 월 거래액은 10억 원대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2017년 61억 원으로 늘더니 지난해 170억 원까지 증가했다. 2012∼2017년 6년간 가입자(68만 명)보다 지난해 한 해 가입자(80만 명)가 더 많다. 마이리얼트립은 현재 국내 여행사 중 가장 많은 1만8220개(투어·액티비티, 티켓·패스, 항공권, 숙소 등, 2월 말 현재)의 상품을 보유하고 있다. 가입자만 180만 명이 넘는다. 대형 여행사들도 무시하지 못하는 업체가 됐다.



2012년 7월 설립된 마이리얼트립은 복잡했던 여행상품의 유통 구조를 혁신해 성공을 거뒀다. 기존 패키지 여행상품들은 ‘여행객-여행대리점-여행사-현지 여행사(랜드사)-현지 가이드’로 유통구조가 복잡했다. 마진을 남기려면 쇼핑 같은 불필요한 옵션들을 끼워 넣을 수밖에 없었다. 유통과정에 참여하는 중개인들은 수익을 내기 위해 수수료를 붙였고, 결국 최종 가격에 거품이 끼게 됐다.

마이리얼트립은 이 같은 전통적인 여행 비즈니스 모델을 혁신했다. 여행상품의 유통구조를 ‘여행객-현지 가이드’로 단순화했다. 거래 내용과 구조는 IT를 기반으로 투명하게 만들었다. 현지 가이드를 전면에 내세워 박물관, 미술관 투어부터 현지 체험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상품을 내놓게 했고, 이를 여행지를 제대로 체험하고 싶어 하는 자유여행객들의 구매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이 플랫폼을 토대로 교통 티켓, 관광지의 공연, 박물관 입장권 등 티켓 시장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이후 숙박, 항공까지 비즈니스 영역을 넓히며 급성장했다. DBR은 여행 종합 플랫폼으로 거듭난 마이리얼트립의 성공 비결을 심층 분석했다.


DBR mini box I: 마이리얼트립은?
마이리얼트립은 해외여행을 가는 한국 여행객과 해외에 체류 중인 가이드를 연결해주는 온라인 P2P 중개 플랫폼이다. 현지 가이드가 투어나 액티비티 일정을 짜서 금액과 함께 올리면 여행자가 상품을 골라 결제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마이리얼트립은 가격의 20%를 수수료로 받는다. 투어를 주요 비즈니스 모델로 삼았던 마이리얼트립은 티켓·패스 상품부터 숙박, 항공까지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현재 마이리얼트립에 등록된 상품 수는 1만8220개이며, 리뷰 수만 45만1960개에 달한다. 파리에서 10년 산 현지 가이드의 ‘진짜 파리 맛집 투어’, 미술품 거래상이 동행하는 ‘소더비 경매 참가 투어’, 미대생이 함께하는 ‘스케치 투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강점이다. 가이드와 여행객이 조율해 맞춤형 코스를 짤 수도 있다. 2012년 7월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여행객 총 430만5220명이 마이리얼트립을 통해 680개의 도시를 여행했다.




여행시장 변화 놓친 대형 여행사들
2012년만 해도 국내 여행시장은 대형 여행사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업계 1, 2위인 하나투어와 모두투어가 전체 여행시장에서 차지한 비중이 30%에 가까웠다. 항공사들이 여행사가 항공권을 판매하면 지급했던 7∼9%대 수수료를 2010년부터 중단하면서 중소 여행사들의 경영 환경이 위축됐다. 반대로 수수료 의존도가 약했던 대형 여행사는 규모의 경제로 시장점유율을 높이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그런데 이 무렵 여행시장의 성격이 바뀌고 있었다. 2012년 출국자는 1300만 명이었고, 1인당 평균 여행 횟수는 연 1.25회였다. 가치 소비와 여가가 주목받고 여행·레저 등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여행 산업이 막 커지고 있었는데 특히 자유여행의 비중이 꾸준하게 늘어났다. 2013년 한국관광공사 보고서에 따르면 개별 자유여행은 전체 여행 건수 중 39.3%로 패키지여행(38.4%)을 앞질렀다. 여행자의 니즈가 변하고 있었다.



대형 여행사들의 주력 비즈니스모델은 여전히 패키지여행이었다. 자유여행객을 대상으로 한 상품은 항공이나 호텔 정도였다. 여기에는 익스피디아, 호텔스닷컴 등 글로벌 업체들이 이미 진출해 국내 업체들과 최저가 경쟁을 벌이는 등 시장이 성숙해질 만큼 성숙해져 있었다. 일부 패키지여행 시장에서의 견제도 있었다. 노랑풍선, 참좋은여행 등 직판 여행사들이 온라인 마켓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면서 치고 올라왔다.

정리하자면 당시 여행시장은 대형 여행사들이 패키지여행을 중심으로 강세를 보이는 가운데 10곳 이상의 경쟁자들이 온라인 마케팅을 강화하면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항공이나 호텔은 최저가 경쟁으로 마진을 남기기가 쉽지 않은 구조였다. 여행시장이 계속 커지고 있었고 누구나 성장 여력이 있다는 것을 예상하면서도 ‘레드오션’으로 취급하며 쉽게 사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플레이어들의 경쟁은 치열했지만 여행객들은 만족하지 못했다. 먼저 패키지상품에 대한 불만이 가장 컸다. 각종 패키지상품은 여러 관광지를 빠른 속도로 훑어보고 중간에 쇼핑센터를 들르는 방식으로 짜여 있었다. 식당도 문제로 꼽혔다. 단체 관광객 다수의 눈높이를 맞추기가 어려웠다. 여행사는 단가를 맞추기 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음식점을 잡을 수밖에 없었고 여기서 실망한 여행객들도 적지 않았다.

패키지상품은 왜 여행객들을 만족시키지 못했을까. 답은 여행상품의 유통 구조에 있었다.

패키지상품은 여행자→여행 대리점→한국 여행사→현지 여행사(랜드사)→현지 가이드의 구조로 이뤄져 있다. 1 예를 들어, 서울 광진구에 있는 A 여행사 대리점에서 한 여행객에게 일본 패키지여행 상품을 팔았다고 가정하자. A 대리점은 이를 여행사에 보고하고, 여행사는 현지 에이전시(랜드사)에 언제, 몇 명이 갈 예정이니 가이드를 찾아달라고 요청한다. 랜드사는 상품에 맞춰 숙박이나 식사, 각종 티켓, 가이드 등을 준비한다.

대부분의 패키지여행 상품은 이 ‘랜드사’로 불리는 현지 여행사가 기획한다. 상품에 가이드를 끼워 한국 여행사에 납품하는 방식이다. 한국 여행사는 인터넷과 대리점을 통해 여행객을 모집한다. 서로 다른 여행사에서 비슷한 상품이 보이는 이유는 같은 랜드사에서 여러 곳에 상품을 납품하기 때문이다.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고객을 유치하는 대형 여행사가 ‘갑’의 지위에 있고 랜드사가 ‘을’의 역할을 한다.

보통 여행사가 요구하는 가격에 맞춰 랜드사가 상품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랜드사가 고용하는 가이드는 어떨까. 사실상 ‘병’의 위치에 있다. 랜드사와 가이드는 유통 비용을 상쇄하고 마진을 남기기 위해 여러 곳의 쇼핑센터에 가는 등의 옵션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2014년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여행사의 해외여행 패키지상품 만족률은 57.2%로 전체 해외여행 만족도(68.4%)에 비해 낮았다.

‘정보의 비대칭’ 문제도 있다. 가이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안내를 해주는지 품질을 미리 알 수 없다. 현지 안내를 받을 때도 이것이 가이드의 서비스인지, 영업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즉, 여행객은 자신에게 맞는 여행사와 여행상품을 찾는 데 드는 ‘탐색비용(시간)’, 유통과정에 따른 ‘계약비용(가격)’, 가이드가 약정한 대로 이행하는지 확인하는 데 필요한 ‘감시비용(서비스인지 영업인지 확인)’ 모두 높게 지불하는 구조인 셈이다. 여행객이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뿐만 아니라 타이트한 스케줄이나 정해진 코스를 단체로 돌아야 하는 패키지상품의 특성 자체를 원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남은 선택지는 자유여행이었지만 이 역시 여행객들을 완전히 만족시키진 못했다. 패키지여행 상품에 대한 불만은 자연스럽게 자유여행으로 옮겨갔지만 막상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현지 정보를 얻는 것이 쉽지 않았고 충분하게 경험하지 못하고 돌아와 아쉬움을 느낀 여행객도 많았다. 2012년 한국관광공사의 국민여행실태조사에 따르면 해외여행 시 가족여행(44.3%), 개인여행(32.7%) 모두 주로 참고하는 정보원 1순위로 여행사를 꼽았다.

“여행사가 주는 정보는 날씨나 교통, 주요 관광지, 축제 등 기본적이고 실제적인 것들인데 여행객들이 원하는 건 현지를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감성적인 것들이었다.” (이동건 마이리얼트립 대표)



현지 경험 특화된 자유여행 플랫폼 ‘마이리얼트립’
이동건 대표는 자유여행과 패키지여행의 장점만 결합하기로 했다. 개인이 여행을 기획하면서도 일정 시간은 현지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도록 가이드를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존 패키지상품의 문제였던 유통구조를 혁신했다. 가이드와 고객을 직접 연결해 유통비용을 줄이면서 여행상품의 질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렇게 나온 여행 P2P 중개 플랫폼이 ‘마이리얼트립’이다.

사실 가이드-여행객 직거래로 ‘진짜 여행’을 제공해보자는 아이디어는 이동건 대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액셀러레이터 ‘프라이머’의 이택경, 권도균 대표의 아이디어였다.

2010년 이동건 대표는 친구와 함께 크라우드 펀딩 회사인 ‘콘크리에이트’를 차렸다. 첫 창업이었다. 인디밴드를 위해 자금을 모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생각보다 잘됐다. 12번 중 절반을 성공해 1800만 원을 거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펀딩 수수료를 책정하지 않았던 것. 1원 한 푼 건지지 못했다. “다른 펀딩 업체와 차별화를 고민하다 수수료를 안 받는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진정성이 부족했고 사업에 대해 너무 몰랐던 것 같다.” 이동건 대표의 말이다.

다시 창업을 결심한 그는 연세대에서 열린 창업 관련 강연을 찾았다. 그곳에서 프라이머의 두 대표를 만났다. 강연이 끝나고 그는 대표들을 따라가 명함을 받아냈다. 그리고 나선 약속까지 잡았다. 사업 아이디어도 없었지만 일단은 가보자고 생각했다. 그때 추천받은 것이 가이드 투어 사업이었다. 이동건 대표는 “나중에 대표님께 ‘저한테 왜 아이디어를 주셨느냐’고 여쭸더니 ‘여럿에게 제안했는데 이 대표만 진짜 도전하더라’라는 답이 돌아왔다”며 “사실 저한테 무슨 비범함이 보여서 주신 줄 알았다”며 웃었다.

사업은 아이디어로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여행시장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각종 수치와 기사만 가지고 사업 전략을 짜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벤치마킹할 해외 업체부터 찾았다. 여행시장에는 비슷한 모델이 없어서 플랫폼 사업을 하는 ‘에어비앤비’를 참고했다. “에어비앤비는 집이라는 ‘공간’을 빌려주는 것이고, 우리는 가이드 투어라는 ‘경험’을 판매하는 개념이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사이트를 구석구석 살펴보고 약관이나 정책도 꼼꼼하게 확인했다.” 이동건 대표의 말이다.

처음 만든 인터넷 홈페이지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창업 당시 개발자가 없다 보니 홈페이지 제작을 외주에 맡겼는데 안 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먼저 결제가 바로 안 됐다. 고객이 예약하기를 누르면 계좌번호를 문자나 e메일로 통보해야 했다. 가이드와 고객이 시간 등을 조율할 수 있는 채팅 기능도 없었다. 무엇보다 홈페이지 디자인이 여행상품을 판매하는 회사보다는 개인 블로그에 가까워 보였다. “아웃소싱이란 게 부족한 것이 뭔지 알고 요청해야 제대로 된 품질이 나오는데 초기에는 아는 것이 부족하다 보니 착오가 많았다. 1년 후에는 개발자를 뽑아 이런 착오들을 수정해 직접 만들었다.”(이동건 대표)

2012년 7월2일 오후 2시, 3달 만에 제대로 된 예약이 들어왔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를 찾은 공무원 세 명이 생태투어 상품을 구매한 것이다. 친구나 지인이 아닌 생면부지 사람들이 상품을 산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들은 현지 일정을 끝내고 남은 몇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마이리얼트립을 발견했다고 했다. 이후 한 달에 한두 건씩 예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동건 대표는 “플랫폼에 부족한 면이 많았는데 판매가 이뤄지는 것을 보고 여행자들의 니즈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가이드 앞세워 진짜 여행 제공하다
마이리얼트립은 사업 시작부터 투어가이드를 전면에 내세우는 전략을 썼다. 고객보다는 가이드를 모으는 데 주력했다. 사실 고객이 먼저냐, 서비스가 먼저냐는 플랫폼 비즈니스 사업자들의 공통된 고민이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문제다. 이동건 대표는 백화점을 예로 들었다. 백화점에는 다양한 업체가 입점해 고객들에게 물건을 팔고 수수료를 백화점에 지불한다. 그렇다면 고객이 백화점에 들어섰을 때 최악은 무엇일까. 입점한 업체들이 하나도 없고 휑하게 비어 있는 곳일 것이다. 그래서 좋은 가이드들을 많이, 다양하게 모으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했다.

이 과정에서도 판단 착오가 있었다. 이동건 대표는 각국의 주요 도시를 백화점의 층수라고 생각하고 도쿄, 파리, 런던, 샌프란시스코 등 여러 도시의 상품을 한 번에 준비했다. 그런데 막상 준비하다 보니 가이드를 모으는 작업에 속도가 붙질 않았다. 어렵게 주요 도시에 1∼2명의 가이드를 준비했을 때는 ‘상품이 다양하지 않다’는 고객의 불만이 나왔다. 생각해보니 도쿄에 가려는 여행객에게는 런던에 있는 가이드가 50명이어도 의미가 없었다. 도시마다 충분한 가이드 숫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전략을 한 도시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처음에는 지역을 파리로 제한하고, 잘한다고 소문난 가이드들부터 접촉했다. 대부분이 차가운 반응이었다. 새로 생긴 작은 업체에 관심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두 가지 방안을 생각해냈다. 첫 번째는 현지에 살고 있지만 가이드가 본업이 아닌 사람들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한국 여행객들을 만나 소통하고 싶어 하는 현지인, 용돈 벌이를 하고 싶어 하는 유학생 등이 떠올랐다. 이들에게는 어떻게 접촉했을까. 교민 커뮤니티를 활용했다. 이동건 대표는 독일 교환학생 시절 유학생이나 교민이 교민 커뮤니티를 통해 통역, 가이드 등의 구인구직을 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베를린리포트’ ‘프랑스존’ ‘04UK’ 등 각국 주요 커뮤니티에 가이드를 구한다는 글을 올렸다. 두 번째는 자질은 훌륭하지만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인지도가 낮은 가이드를 섭외하는 것이었다. 가이드들 역시 한 곳이라도 채널을 넓히고자 하는 니즈가 있었다.

각국 주요 도시를 돌며 가이드 설명회도 열었다. 한국무역협회를 통해 교민들을 초대하고 페이스북으로 타기팅 광고를 진행했다. 예를 들어, 파리에 사는, 언어를 한국어로 설정한 30∼60대를 대상으로 설명회를 홍보한 것이다. 그렇게 설명회를 찾은 잠재 가이드들에게 마이리얼트립의 장점과 비전, 수익성 등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당시 우리에게는 비행기 타고 가는 것도 엄청 큰 경비였다. 노트북을 챙겨가 그 자리에서 가입시킬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우리의 적극성을 보면서 가입한 분도 꽤 많았다.”(이동건 대표) 현재까지 30회가량 열린 설명회에는 약 2000명(누적)의 가이드가 참석했다. 설명회에서 마이리얼트립의 가이드로 전환한 비율은 80%가 넘는다.


DBR mini boxII: ’마이리얼트립’에 빠진 벤처캐피털(VC) 3인 인터뷰

마이리얼트립은 올해 초 170억 원을 투자받는 데 성공했다. 이번이 여섯 번째 투자 유치였다. 현재까지 누적 투자금은 300억 원 정도. 일부 VC는 사업 초창기부터 연속적으로 투자에 참여했다. 성과가 미진한 시절에도 마이리얼트립에 자금을 부은 것이다. VC들은 왜 마이리얼트립에 빠졌을까. 알토스벤처스와 스마일게이트인베스트먼트, IMM인베스트먼트의 투자 담당자들에게 이유를 물었다.

빈틈과 시장 선점
알토스벤처스는 2014년 시리즈A를 시작으로 최근 라운드까지 투자에 모두 참여했다. 총 150억 원이 투입됐다. 박희은 알토스벤처스 수석은 “당시 자유여행시장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가능성이 충분한 ‘시장의 빈틈’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가처분소득이 늘어나면 여행에 대한 소비도 증가하는데 한국이 자유여행 중심으로 시장이 바뀌고 있었다. 여기에 주목했다”고 투자의 이유를 밝혔다. 그는 스물다섯 살에 소셜데이팅서비스 ‘이음’을 창업했던 전 이음소시어스 대표다.

해외에서는 이미 온라인을 중심으로 여행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고, 국내에서도 항공이나 숙박은 잘하는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그런데 가이드 시장은 사실상 공백 상태나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인 여행객과 한국인 가이드를 연결하는 것은 해외 사업자가 쉽게 도전할 영역도 아니었다. “잘될 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너무 빠르게 진입해 길만 닦아 놓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정도였다.” (박희은 수석)

백인수 스마일게이트인베스트먼트 이사도 ‘시장선점’을 이유로 꼽았다. 이 VC는 마이리얼트립에 4회에 걸쳐 총 52억 원을 투자했다. 초기 ‘가이드 시장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지적이 내부에서 나오는 등 호의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여행시장의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봤고, 여기서 리드 플레이어가 되면 성공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아웃바운드 시장이 계속 커지면서 마이리얼트립도 성장했지만 지금부터 더 잘해야 된다.” 백인수 이사의 말이다.


대표의 됨됨이
아이디어보다 ‘대표’ 자체에 무게를 두고 투자한 곳도 있었다. 총 30억 원을 투자한 IMM인베스트먼트의 김홍찬 투자팀장은 “전통적인 대형 여행사의 패키지 중심 여행시장에서 자유여행 추세에 맞게 만들어진 플랫폼이라고 생각했다”며 “시장 규모에 대한 의심이 있었지만 대표의 역량과 열정을 보고 투자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스타트업에 투자할 때 대표의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VC가 경험이 많아도 2년 후 시장을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시간이 지나면 시장도 변하는데 그 이후는 결국 대표의 영역인 것 같다. 대표가 어떻게 시장 변화에 맞춰 대응하고 잘하는지에 따라 사업의 성패가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김홍찬 팀장의 말이다.

보통 스타트업계에서 VC들은 ‘시어머니’로 불린다. 각종 사업 현황을 매달 공유해야 하고, 때때로 간섭받는 일도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VC들은 이동건 대표가 이를 ‘즐기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김홍찬 팀장은 “대표님은 업계 동향부터 타 업종에 대한 것까지 본인이 질문을 더 많이 한다. 절반은 답변을 못한 걸로 기억한다”며 웃었다. 다른 VC들도 이동건 대표의 열정과 역량이 투자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이렇게 모인 가이드들은 직접 여행 코스를 짜서 플랫폼에 올리기 시작했다. 입소문을 타고 온 고객들이 마이리얼트립에서 마음에 드는 상품을 골라 구매했다. 한 명, 한 명의 가이드가 곧 여행상품이 된 셈이다. 이 같은 직거래 방식은 가이드들을 하청 구조에서 벗어나게 만들었고, 가이드는 약속된 수수료를 제외한 나머지를 수익으로 챙길 수 있었다. 일부 가이드는 고객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특색 있는 상품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가이드들 사이에서 마이리얼트립이 잘된다는 소문이 돌자 처음 섭외하지 못했던 유명 가이드들도 하나둘씩 플랫폼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지역에서 투어를 하다 보면 가이드들끼리 동선이 겹치기 때문에 어느 곳이 잘되는지 금방 안다. 이때부터 가이드 숫자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김도아 마이리얼트립 이사의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가이드에 대한 고객 불만이 쏟아진 것이다. 특히 가이드를 본업으로 하지 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문제가 계속 발생했다. 가장 많은 지적은 ‘지각’이었다. 이는 여행객한테는 큰 문제였다. 서울 강남에서 약속시간에 10분 늦는 것과 해외의 생소한 여행지에서 10분 지각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2012년에는 지금처럼 해외 로밍이 활발한 시절도 아니었다. 가이드의 서비스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여행객을 고객으로 생각하지 않고 친구나 지인처럼 대했다가 컴플레인이 발생한 것이다.

해법을 찾아야 했다. 일단 환불 조건을 강화했다. 15분 이상 지각하면 결제가 자동으로 취소되도록 만들어 가이드에게 경각심을 일으켰다. 이와 함께 가이드용 블로그를 만들어 자료를 공유하는 등 교육도 강화했다. 근본적인 변화도 가져갔다. 애초에 가이드를 최대한 까다롭게 뽑기로 한 것이다.

먼저, 간단한 소개를 시작으로 4페이지에 걸친 질문지를 꼼꼼하게 채워 넣게 만들었다. 문항 수를 많게 구성해 일종의 의지를 테스트하는 것이다. 두 번째 관문인 ‘화상 인터뷰’는 통과하기가 더 어렵다. 인터뷰에서 가이드의 역량을 체크한다. 실제 투어라고 생각하고 가이드를 진행하는 ‘시뮬레이션 테스트’를 거쳐야 하는데 서비스 마인드가 있는지 세부적으로 체크한다. 이후 현지에 있는 사람을 통해 자격증 등 필요한 서류들을 확인한다.

이 같은 절차를 마련하고 가이드 합격률이 30%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그만큼 고객 컴플레인이 줄어들어 상품의 품질이 좋아졌다. “처음 참고한 에어비앤비도 나쁜 호스트를 걸러내고 호스트-투숙객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우리도 좋은 가이드를 선별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됐다.”(이동건 대표) 마이리얼트립은 가이드와 고객이 분쟁을 일으켰을 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중재센터도 만들었다.

마이리얼트립이 중재자 역할에 심혈을 기울이는 사이, 가이드들은 다른 가이드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좋은 상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과거 대형 여행사로부터 단순히 패키지상품을 받아 온 가이드들도 여행객의 선택을 직접 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덕분에 거래구조는 투명해졌고 쇼핑 등 옵션이 사라졌다.

이 심플해 보이는 직거래 비즈니스 모델은 생각보다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가이드들이 고객의 니즈를 고민하게 되면서 특색 있는 상품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현직 요리사가 안내하는 ‘로마 쿠킹 클래스’, 아티스트가 추천하는 ‘뉴욕 박물관 투어’, 미국 마이너리그 출신 야구 선수의 ‘LA 다저스 경기 관람’ 등 기존 패키지상품에선 만나볼 수 없었던 여행 코스가 생겨났다. 덕분에 마이리얼트립은 다양한 상품을 갖출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마이리얼트립 직원들도 특색 있는 상품들에 당황했다. ‘과연 팔릴까’라며 반신반의하기도 했다. 그래서 직원들이 모여서 어떻게 해야 할지 회의했다. ‘우리가 그 지역의 전문가가 아니고, 고객이 어떤 것을 원하는지 세세하게 알 수 없으니 판단을 우리가 하지 말자’는 결론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이 특색 있는 상품은 마이리얼트립의 ‘트레이드마크’가 됐고, 회사가 급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유튜브가 모두의 창의성을 보장해주는 플랫폼을 만들자 새로운 콘텐츠들이 등장해 고객들이 열광한 것과 비슷하다.

소비자도 다수의 여행상품 중에서 자신이 체험하고 싶은 것을 낮은 가격에 구매할 수 있게 됐다. 여행지에서 무엇을, 어떻게 체험할지에 대한 고민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여러 상품을 체크하다 보면 해당 지역의 명소나 특징 같은 정보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자유여행에서 패키지여행의 장점만 확보한 셈이다. 마이리얼트립은 플랫폼의 상품마다 리뷰를 달 수 있게 해놨는데 고객들은 이를 통해 상품의 품질을 체크했다.



“고객들이 리뷰를 참고해 상품을 고르다 보니 가이드는 좋은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피드백(리뷰)을 통해 특색을 강화하면서 자신의 브랜드를 강화하는 장점도 생겨났다.” (김도아 마이리얼트립 이사)


DBR mini box III: 도전적이고 자유로운 조직문화
마이리얼트립은 최근 급성장하면서 직원 수를 크게 늘렸다. 100명 중 절반 이상이 지난해 뽑힌 인원이다. 이동건 대표는 “본질은 ‘여행’에 있지만 플랫폼 업그레이드나 데이터 분석 등 주된 업무가 IT 업체와 비슷하다. 그래서 이공계 위주로 채용했다. 직원을 뽑을 때는 도전적이고 자유로운 스타트업 분위기를 강조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마이리얼트립은 직원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일단 시도하고 보라는 것이다.

이는 이동건 대표와 김도아 이사의 과거 경험에서 비롯했다. 이들은 실패하더라도 다양하게 시도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이 지금의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2013년 시도했던 숙박권 판매는 반응이 없자 빨리 접었다. 프리미엄 패키지 상품도 판매했었는데 노하우가 부족해 마진이 거의 남지 않자 판매를 중단했다. 개별 고객을 만족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2015년에는 중국인 여행객을 대상으로 한국 여행 서비스를 제공했다. 아웃바운드에서 인바운드로 사업을 확장한 것이다. 한창 한국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이 많을 때였다. 플랫폼이 있으니 중국어 서비스만 제공하면 사업이 가능하겠다 싶었다. 먼저 중국인에게 인기가 많은 제주도 지역을 대상으로 삼았다. 일정 시간 동안 관광버스로 제주도를 도는 가이드 상품이었다. 버스에 ‘뚜뚜버스’라는 이름까지 래핑했다. 그런데 매출이 기대를 밑돌았다. 당시 요우커들은 관광보다 쇼핑이나 의료에 관심이 많았다. “실패하더라도 무엇을 남기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실패를 통해 얻은 아이디어도 많았다. 대신 실패를 빠르게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김도아 이사)

마이리얼트립은 업무 분위기도 자유롭다. 직급을 세분화하지 않고 팀장 한 명씩을 제외하고는 다 매니저로 구성했다. 팀장도 프로젝트에 들어가서 매니저와 똑같이 일을 한다. 전 직원이 실무에 참여하기 때문에 일과 관련해 소통에 문제가 생길 이유가 없다. 근무시간도 자유롭다. 오전 10시 반부터 오후 12시, 오후 1시부터 오후 4시까지 공동 근무시간을 제외하고는 출퇴근을 자유롭게 하도록 했다.

이보다 더 활성화돼 있는 것은 재택근무제도다. 3일 전에 신청만 하면 집에서 일할 수 있다. 팀당 최소 1명씩 내근하면 된다. “처음 사람을 뽑을 때 월급을 많이 줄 수가 없어서 좋은 근무 환경을 제공해 뛰어난 직원을 뽑아보자는 계획으로 시작했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바꾸지 않은 이유는 근무 여건을 개선하니 일에 방해되는 요소들이 줄어들었고 결과물도 좋아 바꿀 필요가 없었다.” (이동건 대표)

마이리얼트립은 복지도 좋은 편이다. 가족 생일에 사용할 수 있는 반차를 연 4회 제공한다. 연 1회 건강검진을 지원하고, 직무와 관련된 교육이나 콘퍼런스에 참가할 때 비용의 80%를 내준다. 또 한 달에 15만 원을 자기계발이나 문화생활에 쓰도록 지급하고 있다. 마이리얼트립 이용 쿠폰을 1년에 100만 원까지 제공한다.

‘재택근무’에 ‘꿀복지’까지 자칫 직원들이 나태해지진 않을까. 이 때문에 이동건 대표는 채용에 공을 많이 들인다. 레퍼런스를 여러 곳에서 체크하고 면접도 충실하게 진행한 뒤에 뽑는다. “본인과 회사가 모두 ‘윈윈’할 수 있도록 성장 욕구나 도전 욕구가 강한 사람을 선호한다. 나이, 연차, 직급 모두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대신 직원들에게 ‘프로페셔널’이라는 단어를 항상 강조한다.” (이동건 대표)





티켓·숙박·항공 등으로 서비스 확대
마이리얼트립은 한 달에 한 번 상품 구매를 많이 한 고객을 대상으로 2시간씩 인터뷰했다. 플랫폼의 불편사항이나 니즈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고객들은 교통권이나 미술관, 박물관 입장권 같은 티켓을 판매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마이리얼트립은 티켓 판매가 ‘여행 경험을 파는 회사’라는 회사 가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고 서비스를 확대하기로 했다. 좋은 가이드 상품을 많이 팔기 위한 ‘미끼 상품’도 필요했다.

다만 어떤 티켓을 판매할지, 티켓을 판매하면 구매가 많이 일어날지 등을 충분히 고려했다. 2013년 숙박을 판매했다가 금세 접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다시 인터뷰를 진행했다. 여행자들의 상품 구매 패턴도 참고했다. 이 결과 일본처럼 가까운 나라에서는 가이드 상품 판매보다 교통권이나 입장권 등의 티켓 판매가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유럽에서도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 입장권 판매가 활발했다.

2016년부터 교통권, 전망대·박물관·미술관 입장권 등 티켓 판매를 시작했다. 티켓 판매를 위해 국내에서 해외 티켓들을 판매하는 판매처들과 접촉했다. 이 업체들의 상품을 마이리얼트립 플랫폼에서 판매하는 제휴를 맺었다. 마이리얼트립은 티켓 판매처로부터 평균 9.7%를 수수료로 받았다. 일부 물량은 박물관, 미술관 등에서 티켓을 직매입하는 방식으로 판매했다.

마이리얼트립은 티켓을 팔면서 주요 구매층이 가격에 민감한 20, 30대 젊은 층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2017년부터 ‘최저가 보장제’를 시작했다. 다른 곳에서 마이리얼트립보다 낮은 가격으로 상품을 판매하면 환불해주는 식이다. 이후 여행객들 사이에서 ‘티켓은 마이리얼트립이 가장 싸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마이리얼트립은 티켓 중 대부분(81%)을 실물이 아닌 온라인 예약 티켓으로 준비해 편의성을 높였다.

티켓 판매는 생각보다 파급력이 컸다. 티켓 구매자는 여행 일정이 잡혀 있는 잠재 고객이다. 이들 중 다수는 티켓뿐만 아니라 마이리얼트립의 투어·액티비티 상품까지 구매하는 특성을 보였다. 일종의 크로스셀링이 이뤄진 것이다. 무엇보다 티켓이 최저가를 보장하고도 가이드 상품 못지않게 마진이 많이 남았다. 이는 마이리얼트립이 숙박과 항공으로까지 서비스를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물론 서비스를 확장하면서 고비도 있었다. 무엇보다 가이드 상품 판매에만 맞춰져 있는 시스템이 문제였다. 이때만 해도 홈페이지나 애플리케이션이 가이드 상품에 최적화돼 있었다. 처음 티켓 판매를 시작할 때는 가이드 상품만 판매되던 기존 시스템에서 강제로 티켓을 팔았다. 그래서 고객들에게 잘못된 안내창이 뜨는 일이 다반사였다. 예를 들어, 고객이 유니버설스튜디오재팬 입장권을 구매하면 ‘티켓을 오후 2시에 만나세요’ 같은 황당한 문구가 안내됐다.

이후 마이리얼트립은 플랫폼의 UI를 꾸준히 수정 보완했다. “이렇게 오류가 뜨는 데도 고객들이 구매하는 것을 보고 가이드 이외의 서비스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시스템을 보완하면서 숙박이나 항공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이동건 대표의 말이다.

숙박 서비스는 2017년 시작했다. 부킹닷컴, 호텔스컴바인 등 호텔 플랫폼 업체와 손을 잡아 단숨에 많은 양의 호텔 상품을 확보했다. 해당 업체들과 호텔 중개에 따른 수익은 5대5로 배분했다. 인기가 있는 숙박 업체는 직접 계약을 맺기도 했다. 이와 함께 직계약으로 소싱해 온 한인민박도 계속해서 물량을 확대해 나갔다. 현재 마이리얼트립은 국내에서 두 번째로 많은 한인민박 물량을 확보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항공권 판매 서비스도 시작했다. 글로벌 항공 예약 업체(GDS)인 아마데우스와 제휴를 맺어 해당 업체의 항공권을 판매했다. 마이리얼트립은 항공권 판매를 최근 고객 트래픽 증가의 가장 큰 요인으로 보고 있다.

숙박과 항공권 서비스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됐다. 티켓 서비스를 준비할 때는 제휴를 맺기 위해 작은 규모의 업체들을 일일이 설득해야 했다. 물량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 제휴 업체를 계속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 마이리얼트립과 수익을 배분해야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곳도 있었다. 마이리얼트립은 판매처 증대로 추가 수익이 발생한다는 점과 마케팅 효과가 일어날 것이라는 부분을 앞세워 설득했다.

반면 숙박, 항공권은 많은 물량을 쥐고 있는 대형 업체들과의 제휴로 서비스를 빠르게 준비할 수 있었다. 그동안 마이리얼트립이 크게 성장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오히려 숙박, 항공 서비스 업체들이 마이리얼트립과의 제휴로 마케팅 효과를 기대했다.

마이리얼트립은 다른 곳보다 숙박과 항공권을 최대한 싸게 판매해 마진을 크게 남기지 않는 ‘박리다매’ 형식을 취했다. 이익을 남기는 것보다 많은 고객을 유입시키는 데 집중했다. 대신 항공권이나 숙소를 보러 온 고객들이 투어 상품에도 관심을 갖도록 전략을 짰다. 먼저 플랫폼 UI를 고쳤다. 앱 첫 화면의 정중앙에 ‘투어&티켓’ ‘항공권’ ‘숙소’ ‘에어텔’ 메뉴를 달아 고객이 원하는 종류의 상품을 쉽게 고를 수 있도록 배치하면서도 메뉴 바로 아래에 투어 상품들이 함께 보이도록 만들었다.

‘추천 시점 최적화’ ‘개인별 최적화’ ‘교차 구매 할인’ 등의 전략도 통했다. 여행객들의 예약 패턴을 분석한 결과 평균적으로 항공권은 여행일로부터 59일 전, 호텔·민박은 21일 전, 투어는 9일 전, 티켓은 5일 전에 상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확인하고, 스케줄을 고려해 상품을 추천했다. 고객이 항공권을 구매하면 기다렸다가 21일 전에는 호텔을, 9일 전에는 투어 상품을 추천하는 방식이다.

여행 목적도 고려했다. 항공권 구매 내역을 통해 혼자 여행을 가는지, 가족과 함께 가는지, 아이를 동반하는지 등을 확인하고 여행 목적에 맞는 상품을 보여줬다. 이와 함께 호텔+투어, 호텔+티켓 등 교차 구매를 하면 일정 금액을 할인해주는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지난해 말 현재 항공권 구매자 중 숙박·투어·티켓·보험 상품을 하나 이상 추가 구매한 여행자 비율은 31%에 달한다.

마이리얼트립이 서비스를 다양화하고 저렴한 상품을 내놓으면서 여행객들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동안 여행객들은 티켓은 A 업체, 호텔은 B 업체가 저렴하다고 생각하고 개별 업체에서 상품을 구매해왔다. 그러다가 마이리얼트립 한 곳에서 다양한 상품을 저렴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마이리얼트립은 투어, 항공권, 숙박 상품을 특가로 판매하는 ‘핫딜’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는데 2017년 5월 론칭 이후 14개월 만에 월 거래액 10억 원을 달성했다.



상품 수와 고객이 크게 증가하고 일정 규모의 ‘임계점’을 넘어서면서 마이리얼트립은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마이리얼트립의 월 거래액은 2016년 11억 원에서 2017년 61억 원, 지난해 170억 원으로 껑충 뛰었다. 이는 플랫폼 비즈니스 모델의 특성이기도 하다. 플랫폼 사업을 위해서는 사람을 모으고, 아이템(상품 수)을 축적한 뒤 발전시켜야 한다. 플랫폼 비즈니스 모델은 이용자가 몰릴수록 이용자가 더 증가하는 특성을 보인다. 상품과 이용자가 늘다 보면 임계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지점을 넘어서면 큰 반응이 일어난다. 페이스북도 임계점을 넘은 후에야 눈에 띄는 성장세를 보였다.


마이리얼트립의 강점은 ‘독점 콘텐츠’와 ‘리뷰’
마이리얼트립은 고전 끝에 가이드와 티켓, 숙박, 항공권 등의 상품을 모으는 데 성공했고, 좋은 상품들이 많은 고객을 유인했다. 플랫폼이 성장하는 사이 가이드들은 경쟁 속에서 독점 콘텐츠를 생산했다.

마이리얼트립의 상품 카테고리는 근교 투어, 시티투어, 로컬투어, 야경투어, 국립공원, 박물관·미술관, 이색체험, 스포츠, 테마파크, 크루즈·요트, 자전거, 픽업·샌딩, 맛집·카페, 쇼핑, 쇼·뮤지컬, 캠핑, 와이너리, 클래스, 통역·비즈니스 등 19개에 달한다. 특색 있는 상품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셰프와 함께하는 보케리아 시장 투어와 빠에야 만들기’, 미국 보스턴의 ‘하버드 대학생과 함께하는 하버드대 캠퍼스 투어’, 프랑스 파리의 ‘미술사 전공한 파리지엔이 소개하는 루브르&오르세 박물관 투어’ 등이 대표적이다.

사실 2017년부터 투어·액티비티 시장에서 경쟁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후발주자들이 등장한 이 시기부터 마이리얼트립은 오히려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그동안 쌓아놨던 독점 콘텐츠와 리뷰가 일종의 진입장벽 역할을 했다. “좋은 상품과 제품의 품질을 확인할 수 있는 리뷰를 많이 보유한 상태였다. 충성 고객이 많았고, 이들의 소개로 신규 고객이 계속 유입됐다.” (이동건 대표)

특히 45만 개가 넘는 리뷰가 강점으로 꼽힌다. 가이드투어는 ‘무형의 재화’이기 때문에 상품의 가격이 합리적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미리 구매해본 사람들의 평가(리뷰)를 체크하는 것이다. 평가가 많으면 많을수록 가격이 적정한가를 판단하기가 쉽다. 실제로 마이리얼트립은 리뷰가 많을수록 상품 판매가 더 잘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이리얼트립은 별점과 리뷰를 통해 사람들이 상품을 평가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인기 있는 상품들은 1000건이 넘는 리뷰가 달렸다. 마이리얼트립은 어떻게 양질의 리뷰를 모을 수 있었을까.

먼저, 리뷰를 많이 모으기 위해 여행객에게 5000포인트(5000원)를 지급하는 유인책을 썼다. 고객은 다음 상품 구매 시 이 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다. 사실 5000포인트가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쇼핑몰 포인트만큼의 파급력을 발휘하긴 쉽지 않았다. 고객이 한 번 여행을 다녀오면 다음 여행을 가기까지의 공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이리얼트립은 포인트보다는 가이드의 노력이 리뷰를 달게 만든 힘이라고 강조했다. “고객들이 왜 후기를 쓰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토론한 적이 있다. 결론은 지불한 금액 이상의 좋은 서비스를 받았다고 생각한 고객이 가이드를 위해 선의로 리뷰를 단다는 것이었다. 가이드의 노력에 따라 리뷰 숫자가 달라지는 이유다.” 이동건 대표의 말이다.

홍보 등의 의도를 가진 리뷰는 어떻게 걸러냈을까. 마이리얼트립은 상품을 구매한 사람만 후기를 달 수 있게 했다. 가이드 지인 등이 상품 홍보 목적으로 리뷰를 달 가능성을 차단한 것이다. 마이리얼트립은 불순한 목적을 가진 누군가가 몇만 원을 주고 상품을 구매한 뒤 좋은 내용의 리뷰를 단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이라고 설명한다. 같은 상품을 구매한 여행객들이 이를 부정하는 평가들을 달 것이고, 오히려 신뢰를 잃는 계기가 돼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다. 마이리얼트립은 특정 IP 주소에서 연속적으로 리뷰가 올라오는지도 체크하고 있다.

이렇게 쌓인 리뷰는 여러 가지 선순환 작용을 일으켰다. 불친절하거나 품질이 낮은 가이드는 시장에서 선택(좋은 리뷰)을 받지 못하게 돼 자연스럽게 도태됐다. 이 때문에 가이드는 품질 향상을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자동으로 품질 관리가 되는 셈이다. 대신 열심히 하면 그만큼 자신의 상품을 돋보이게 만들 수 있다. 이미 여러 가이드가 자신의 이름과 이력을 걸고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한 명의 가이드가 하나의 브랜드가 됐다. “마이리얼트립의 하루 예약 건수가 4000건 정도인데 재이용률이 20%가 넘는다. 그만큼 충성고객이 많다는 것이다.” (김도아 이사)


빅데이터 분석으로 최적화된 상품 추천
마이리얼트립은 고객들의 상품 구매와 리뷰를 빅데이터 분석에 활용하고 있다. 여행객의 개별 니즈를 예측하고, 이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다.

보통 고객의 개인정보나 행동 패턴, 소비 내역 등의 데이터를 분석하면 고객이 다음에 어떤 것을 구매할지 예측할 수 있다. 이미 많은 기업이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이 같은 예측을 개인화된 추천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정 상품, 서비스를 구매할 확률이 높은 고객을 예상해 해당 고객에게 이 상품이나 서비스를 추천하는 것이다. 고객에게 개인화 서비스를 제공해 상품을 탐색하는 시간을 줄이는 대신 기업은 지속적인 구매를 유도할 수 있다.

개인화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고객 데이터와 상품 모두 많아야 한다. 고객 취향을 알려면 데이터가 충분히 축적돼 있어야 하고, 각각에 맞는 상품을 추천하려면 상품이 충분해야 한다. 마이리얼트립은 고객 정보와 상품이 충분하게 모여 있기에 기술만 바탕이 된다면 개인화 서비스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이를 위해 IT 전공자를 중심으로 조직을 구성하고 내부 교육을 강화했다. 마이리얼트립 직원 100명 중 절반 이상이 이공계 출신이다. “데이터 전문가로 꼽히는 분들을 소개에 소개를 통해 힘들게 한 명씩 늘려나갔다. 그렇게 한 분이 들어올 때마다 회사의 데이터 역량이 크게 점프했던 것 같다. IT 전문가는 지금도 끊임없이 찾고 있다.” 이동건 대표의 말이다.

IT 전공자가 어느 정도 늘어난 뒤 마이리얼트립은 내부에 ‘그로스팀’을 만들었다. 그로스팀은 데이터 분석을 통해 서비스 향상을 위한 핵심 지표를 정의한다. 그리고 이를 주기적으로 모니터링한다. 크로스셀 활성화 전략도 여기서 짠다. 항공권을 산 고객이 투어나 호텔 구매로 이어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마이리얼트립은 데이터 기반으로 전략을 짤 수 있도록 전사 차원에서 ‘SQL(데이터베이스 언어)’ 교육도 진행하고 있다. “여행업계에서 이공계 출신이 절반 이상이고, 데이터로 의사결정을 하는 곳은 우리밖에 없다. VC들이 우리를 주목하는 이유도 일정 부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김도아 이사의 말이다.



마이리얼트립은 현재 플랫폼 전체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앱의 속도를 향상하고, 상품들을 데이터화해 구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오사카 주유패스’는 1. 종이로 된 티켓패스이며, 2. 현지 교통 관련 상품으로 3. 젊은 여행자, 4. ‘뚜벅이’들이 이용하는 상품이다. 이렇게 데이터들을 쪼개서 분류하면 다양한 정보가 쏟아진다. 마이리얼트립은 이를 걸러내는 ‘다이내믹 필터’를 만들고 있다.

이 작업이 완성되면 개인화 서비스의 주요 기법 중 하나인 ‘협업 필터링(collaborative filtering)’이 가능해진다. 고객들의 구매나 검색 등에서 유사한 행동이나 평가 정보를 뽑아내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러 고객의 선호 정보를 바탕으로 상품을 구매할 만한 사람을 찾아내 상품이나 서비스를 자동으로 추천한다. 넷플릭스의 영화 추천 엔진인 ‘시네매치’가 그 예다. A 영화와 B 영화를 재밌게 본 고객이 C를 좋아했다면 A, B를 본 고객에게 C를 추천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평점이다. 재밌게 봤는지를 평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마이리얼트립도 45만1960개의 리뷰를 활용하는 방법을 고심 중이다. 자연어를 분석하는 컨설팅 회사에 이 후기들을 맡겨보기도 했다. ‘만족’ ‘일정’ ‘친절’ 등 단순 분류부터 ‘사진을 잘 찍는’ ‘유머러스한’ ‘너무 많이 걷는다’ 등 수백여 개의 유의미한 분석을 얻어냈다.

도쿄로 떠나는 예산이 충분한 5인 가족 여행객을 대상 고객으로 가정하면 지금은 대한항공 비즈니스석과 5성급 호텔, 프라이빗 밴 투어, 도쿄 긴자 코스 요리 등을 추천할 수 있다. 앞으로는 비행기 좌석(통로나 창가 어디를 선호하는지)이나 호텔 위치(역 근처인지, 주요 관광지 근처인지), 가이드 성격 등까지 참고해 상품을 추천해줄 수 있다.

해외에서도 개인화 서비스를 내놓기 위해 연구를 활발하게 하고 있다. 미국의 산업 리서치업체인 포커스라이트의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여행 업체 가운데 65%가 데이터 분석팀을 두고 있거나 관련 투자를 늘리고 있다. 이들이 진행한 데이터 연구 중 80% 이상이 실제 매출 증대로 이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마이리얼트립은 이를 기반으로 2021년 월 거래액 700억 원, 연 거래액 8500억 원을 달성한다는 것이 목표다. 매출 비중은 투어·액티비티 22%, 티켓·패스 32%, 숙박 30%, 항공권 12%, 핫딜 5% 정도로 예상한다. 이를 달성하면 톱3 온라인 여행사(OTA)에 진입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동건 대표는 ‘시장 변화’와 ‘가치 창출’을 강조했다. 여행시장의 트렌드에 맞춰 대형 여행사들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시장과 고객의 니즈는 항상 변한다. 가치 창출은 고객을 얼마나 만족시키느냐에 따라 달려 있는 것이고, 이를 위한 것이 개인화 서비스다. 변화에 맞춰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회사의 목표는 고객을 만족시키면 저절로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동건 대표)


성공 요인 분석 및 시사점
마이리얼트립이 여행 P2P 플랫폼으로 성공적으로 성장한 것은 플랫폼 전략, 소셜 시스템, 관련 다각화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마이리얼트립은 소비자의 여행 경험이 심화하면서 자유여행 수요가 커지고 있는 시장 변화를 감지했으며, 이를 위해 회사 이름이 지향하는 바와 같이 내실 있는 현지 여행 가이드를 직접 발굴해 임계점 이상의 소비자를 확보했다. 이를 활용해 마이리얼트립 플랫폼에 참여하도록 하는 효율적인 양면시장을 구축했다.

여기에 플랫폼 전략을 확장하고, 공동구매 등의 장점을 살려 여행사업을 효과적으로 넓혀 나갔다. 소셜 시스템을 통해 현지 여행 가이드의 평판(reputation)에 기초한 평가 모델이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1. 플랫폼 전략의 구현
여행 P2P 플랫폼은 고전적 이론인 양면시장(Two-sided market)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양면시장은 판매자가 플랫폼에 제공하는 제품 및 서비스가 플랫폼이 구매자에게 제공하는 제품 및 서비스와 같지 않거나 또는 구매자가 플랫폼에 제공하는 대가와 플랫폼이 판매자에게 제공하는 대가가 다를 때 나타난다(최병삼 등, 2014).

기존 여행사 패키지의 플랫폼에서는 현지 가이드와 여행자들의 직접적인 매칭이 이뤄지지 않고 패키지를 파는 여행사가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 그 결과 국내 여행사들은 고객접근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현지 가이드들과 수요자 및 서비스 공급자의 관계, 다시 말해 일종의 갑을 관계를 갖게 된다. 현지 가이드 입장에서는 일정 수의 여행객을 확보하는 것이 비즈니스에 주요한 요소가 되는데 충분한 여행객 수를 확보한 국내 여행사에 일정 부분 보조금을 제공하는 교차 네트워크 효과가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마이리얼트립의 경우에는 P2P 플랫폼을 구축하면서 여행객 정보와 현지 여행의 요구사항을 쉽게 소통하도록 하면서 이런 교차 네트워크의 비용을 절감했다. 기존 패키지에서는 현지 가이드들의 교차 네트워크 비용이 커서 일정 규모 이상의 여행객 수를 확보하고 지정된 식당, 쇼핑을 통해 수익을 확보해야 했기에 정작 여행객의 요구사항은 뒷전이었다. 하지만 P2P 여행 플랫폼을 통해 현지 가이드들의 차별화된 서비스들이 경쟁적으로 제공되면서 다양한 여행 수요에 대응하면서 가격 메커니즘이 작동되며 제값을 받게 된 것이다.

2. 플랫폼 흡수 전략
플랫폼 흡수(platform envelopment)는 자신의 기존 플랫폼을 기반으로 외부의 플랫폼을 흡수 및 통합함으로써 다른 플랫폼이 장악하고 있는 시장에 진출하는 전략이다(Eisenmann et al., 2006, 2011). 플랫폼 흡수의 장점은 1) 복수 플랫폼 제공으로 다른 플랫폼 소비자 수요를 흡수하고, 2) 기존 플랫폼에 있던 자원을 활용해 효율성 개선, 3) 협상력 및 자원 동원 능력을 강화해 단독 플랫폼에 비해 경쟁우위 확보(Eisenmann et al., 2011)를 들 수 있다.

이런 플랫폼 흡수의 예는 여러 산업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온라인 게임 개발회사가 출시한 온라인 게임이 충분한 수의 고객을 확보할 경우 개발회사가 퍼블러셔로 전환해 자신들이 개발한 게임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의 게임도 유통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쿠팡, 티켓몬스터, 위메이크프라이스 같은 소셜커머스 회사들은 식당과 이벤트의 할인 쿠폰을 팔아 고객을 끌어들였지만 일단 충분한 수의 고객을 확보한 이후에는 전자상거래 회사로 전환해 일반 상품을 판매하는 방식으로 플랫폼을 확장했다.

마이리얼트립도 자유여행을 하는 고객들이 확보되면서 현지 여행사와의 매칭뿐만 아니라 자유여행을 하는 고객들이 필요로 하는 티켓, 항공권, 호텔 예약 서비스를 추가하며 플랫폼의 보완재 흡수를 통한 확장을 이뤄냈다.

3. 소셜 평판 평가 모델
보통 온라인 여행 상품 예약은 모니터나 스마트폰을 통해 얻게 된 상품 정보를 가지고 구매 결정을 내린다. 이런 경우 다른 구매 고객들이 남긴 평점과 댓글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판단할 만한 충분한 정보가 없을 때 다른 사람의 결정에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마치 낯선 곳에서 식사할 곳을 찾을 때 많은 사람이 줄서서 기다리는 식당은 의례 맛집이라고 판단하는 것과 같다.

마이리얼트립의 경우, 소셜네트워크의 평판을 십분 활용하는 평가 모델을 이용하고 있다. 현지 여행사나 먼저 그 여행을 다녀온 고객의 소셜네트워크 플로그인을 활용해 진정성 있는 리뷰 정보를 제공하고자 노력한다. 아무래도 소셜네트워크상에서 신원을 밝힌 사람들의 의견을 좀 더 존중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의 경영학 연구에 따르면, 온라인 평가와 매출과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일부 연구는 평점이 좋을 경우 매출이 늘어날 것이라고 보지만 다른 연구에서는 매출은 평점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평점 결과가 좋은 점수들과 좋지 않은 점수들이 모아지는 형태이거나 또는 양분된 양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즉, 최종 평점은 평균을 표시하기 때문에 양극화된다면 평균 그 자체는 의미를 잃을 수 있어서다.

요컨대, 마이리얼트립은 P2P 소셜플랫폼을 활용해 전통적인 여행산업을 혁신하고자 하는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소셜플랫폼의 특성상 플랫폼 참여자들에 대한 서비스 품질 관리 실패 가능성, 또 오랫동안 쌓아 올린 평판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위험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1. 이동원 (2015). “모바일 소셜 플랫폼의 진화 – 카카오”, Asan Enterpreneurship Review
2. 최병삼, 김창욱, 조원영 (2014). 플랫폼, 경영을 바꾸다, 삼성경제연구소.
3. Eisenmann, T., G. Parker, and M. Van Alstyne (2006). “Strategies for Two-Sided Markets,” Harvard Business Review, 84(10), 92-101.



필자소개
김성모 기자 mo@donga.com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과 교수 smjeon@gachon.ac.kr
전성민 교수는 서울대에서 경제학 학사를 마치고 동 대학 경영대학원에서 경영정보 박사 학위를 받았다. IBM과 삼성에서 다수의 IT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서울 및 미국 산호세에서 창업자로 일한 경력도 갖고 있다. 벤처회사들의 실증 데이터 분석을 통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P2P lending, 소셜커머스 등 신규 사업 모델을 분석 중이다. 역서에 『페이스북 시대』가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299호 Rethinking Governance 2020년 6월 Issue 2 목차보기



DBR Case Study: 오디오 플랫폼 ‘스푼라디오’의 성장 전략

“연결되고 싶지만 노출되고 싶진 않아”
목소리로 토닥토닥, Z세대 사로잡다

Article at a Glance
오디오 플랫폼 스푼라디오는 2016년 서비스를 시작해 3년 만에 누적 다운로드 수 800만 건, 월 이용자 수(MAU) 130만 명에 달하는 기록을 세우며 Z세대들의 두터운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 디지털 네이티브로 불리며 양방형 커뮤니케이션을 즐기는 Z세대를 겨냥해 이들의 입맛에 맞는 기능들을 선보이면서 많은 사용자를 끌어들인 결과다. 스푼라디오의 성공 요인은 다음과 같다.

1. Z세대향 비즈니스 마인드
최첨단 기술에 능숙하면서도 정서적 결핍에 예민한 Z세대에게 음성으로 소통하는 플랫폼을 선보여 감성에 어필
2. 사용자 행동 데이터를 토대로 한 실험주의
유저들의 행동 데이터를 꼼꼼히 분석해 무의식을 포착하고 그 결과를 끊임없이 경영에반영하는 실험주의 정신
3. 초자율시대에 걸맞은 임파워먼트 경영
판을 깔고 스스로 진화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자율과 권한을 부여해 창의를 꽃피우는 방임적 리더십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홍지선(경희대 호텔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사례 1 2019년 5월의 어느 잠이 오지 않는 밤 11시, 앱을 켰다. 그 시각 개설된 방은 모두 3000여 개. 그중 ‘매력적인 목소리’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방에 들어갔다. “초롱초롱 님, 어서 오세요∼” 들어가자마자 BJ가 내 닉네임을 부르며 환영했다. BJ는 그날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소개하면서 방에 모인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올리는 댓글을 하나하나 읽으며 반응하고, 신청곡을 받아 틀어주며, 틈틈이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반겼다. ‘목소리가 너무 예뻐요∼’ 하고 글을 올렸더니 BJ는 바로 “초롱초롱 님, 감사합니다”라며 웃었다. 방에 모인 사람은 200명이 넘었지만 BJ와 일대일로 소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사례 2 2017년 12월 어느 날, 서울 중구 을지로에 위치한 스푼라디오 사무실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1년간 활발히 활동한 BJ 가운데 인기 BJ를 선정해 시상하는 자리가 마련된 것. 스푼라디오 직원들은 하트나 스푼을 많이 받은 BJ 20명을 선정해 상금을 수여하기로 하고 플래카드를 걸고 다과 등을 준비했다. 하지만 행사시간이 한참 넘도록 현장에 도착한 BJ는 서너 명에 불과했다. 일부 BJ들은 대리 수령자를 보내기도 했다. 현장에는 스푼라디오 직원들만 가득했다. 나중에 이유를 물으니 다수의 BJ는 시상식을 통해 얼굴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청취자들의 상상력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연결되고 싶지만 노출되고 싶지는 않은 Z세대의 심리를 잘 간파해 이들 세대의 두터운 지지를 얻고 있는 오디오 플랫폼이 있다. 2016년 서비스를 시작해 3년 만에 누적 다운로드 수 800만 건, 월 이용자 수(MAU) 130만 명에 달하는 스푼라디오가 그 주인공이다. 매일 개설되는 방 개수는 3만 개. 피크타임인 밤 10시에서 새벽 2시 사이에는 3000∼4000개의 방이 열린다. 방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만 명 단위의 사람들이 모여 BJ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일상을 나눈다.

비디오 시대가 열리며 라디오는 더 이상 설 곳이 없을 것이라고 전망되던 시절이 있었다. 예상을 뒤엎고 라디오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주파수를 맞추고 DJ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팟캐스트나 팟빵처럼 특정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오디오들이 가득한 플랫폼도 성업 중이다. 다만 디지털 네이티브로 불리며 양방형 커뮤니케이션을 즐기는 Z세대는 한층 진화된 형태로 라디오 방송을 소비하고 있다. ‘오디오계의 유튜브’로 불리는 스푼라디오를 통해서다.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방송에 만족하지 못하는 Z세대 청취자들은 스푼라디오라는 쌍방향 플랫폼을 통해 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즐기는 라디오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DBR이 스푼라디오의 성장 스토리를 취재했다.

목소리로 위로받는 플랫폼 만들다

스푼라디오를 운영하는 마이쿤(Mykoon) 최혁재 대표가 처음 시도한 창업 아이템은 ‘스마트폰 배터리 충전 및 교환 서비스’였다. 스마트폰 보급이 확산되고 스마트폰을 한시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들이 늘면서 배터리 잔량이 얼마 남았는지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런 수요를 노려 최 대표는 외출 중 배터리를 어디서 충전할 수 있는지 가능한 좌표를 공유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나아가 주요 지역에 위치한 가맹점에서 누구나 쉽게 전력이 다 소모된 자신의 것을 반납하고 100% 충전된 같은 기종의 배터리로 교환해 갈 수 있는 서비스를 내놨다. 최 대표는 서비스 홍보를 위해 홍대나 강남역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지역을 돌며 전단지를 뿌리기도 하고, 리어카에 기종별 배터리를 수천 개씩 담고 다니며 직접 교환해 주기도 했다. 최 대표의 열정과 사업의 발전 가능성을 인정받아 국내외 투자자들로부터 적지 않은 금액을 투자받았다.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에 수십 개씩 교환소를 두고 있을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다. 하지만 배터리가 분리되지 않는 일체형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주류로 자리 잡으면서 사업은 순식간에 몰락했고 빚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사무실에서 라면만 먹으며 버티는 날들이 이어졌다.

할 일 없이 출근만 하고 있던 어느 날, 마이쿤 창업을 함께했던 멤버 중 한 명이 오디오 플랫폼 아이디어를 냈다. 망한 처지가 되다 보니 지인들로부터 이런저런 격려와 위로의 말들을 듣는데 딱딱한 활자보다는 따뜻한 목소리에서 받는 위안이 더 크더라며 상심하거나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 서로 목소리로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던 멤버들에게 와 닿는 아이디어였다. 당시 비디오 시장은 이미 레드오션이었다. 오디오는 상대적으로 플레이어가 적고, 서버의 유지 및 관리 비용 면에서 부담이 적었다. 최 대표를 비롯한 창업 멤버들은 오디오 플랫폼을 개설해 운영해보기로 하고 개발에 착수했다. “플랫폼 비즈니스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선점이 중요하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오디오 플랫폼이 없으므로 일단 단순하게라도 서비스를 시작하고 이후 계속해서 업데이트해 나가자고 생각했다.” 최 대표의 말이다. 이들은 간단한 버전을 만들어 2016년 3월 서비스를 시작했다.

1. 실시간 라이브 방송 통해 사용자 폭발적 증가

처음에는 음성 녹음을 올려 공유할 수 있는 형태의 플랫폼이었다. 예컨대 누군가 ‘이러저러한 고민이 있다’고 녹음해 올리면 다른 사용자들이 그것을 듣고 위로하거나 공감하는 내용의 댓글을 목소리로 달아주는 식이었다. 처음부터 ‘라디오’와 같은 형식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월○일, ○○의 ○○라디오’라고 제목을 붙여 올리거나, ‘○○라디오 지금 시작합니다∼’로 녹음을 시작하거나, 전날 녹음에 달린 댓글을 듣고 그것을 소개하는 내용을 녹음해 다시 올리는 사용자들이 늘었다. 사용자들이 플랫폼을 활용해 자연스럽게 라디오 방송을 하고 있더라는 것. 그뿐만 아니라 앱스토어 등의 사용자 리뷰 란에도 ‘라이브 방송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글이 지속적으로 올라왔다. 최 대표를 비롯한 개발자들은 라이브 기능을 추가하기로 하고 약 3개월 동안 밤낮없이 몰두해 현재 스푼라디오의 핵심 기능인 ‘라이브’를 개설했다.

라이브 기능이 추가되면서 사용자층 증가에 한층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1020세대의 가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누구보다도 온라인을 통해 소통하는 일에 익숙한 세대였다. 특히 유튜브나 아프리카TV 등을 통해 자기 채널을 운영하며 구독자를 늘려가고 싶은 욕구를 가진 이들에게 비주얼에 신경 쓰지 않고 목소리로만 방송을 진행할 수 있는 스푼라디오는 매력적인 대체재였다. 노래에 자신 있는 이는 신청곡을 받아 노래를 부르는 음악 방송을, 고민 상담에 자신 있는 이는 고민을 받아 그것에 대한 의견을 들려주는 방송을, 일상 공유에 관심 있는 이는 소통을 키워드로 유저들과 대화하는 방송을 진행하며 청취자를 불려나갔다. 이를 통해 진행자와 유저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됐고, 모이는 사람들이 늘면서 스푼라디오는 목소리만으로 소통할 수 있는 쌍방향 플랫폼으로 이름을 얻어갔다.


2. “재미만큼 후원” 유저 니즈 맞춰 ‘스푼 결제’ 추가

이어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는 BJ에게 금전적으로 선물을 할 수 있는 ‘스푼 후원하기’ 기능이 더해졌다. 플랫폼에서 스푼을 구매한 후 방송 중 BJ에게 쏘는 방식이다. 아프리카TV에서 BJ에게 별풍선을 쏘는 것과 같다. 그러면 BJ는 이를 현금으로 교환해 수익을 취할 수 있다. 스푼라디오에서 통용되는 화폐 단위인 스푼(=100원)을 구입해 1000원에서 33만 원까지 가격대가 다양한 스티커를 구입하고 이를 BJ에게 선물로 보내는 구조다. 유저들이 BJ에게 보낸 스푼 금액은 스푼라디오와 BJ가 사전에 정해진 비율대로 나눠 갖는다. 10대, 20대들이 몇천 원씩 결제하는 것이 무슨 수익 모델이냐, 라디오 듣다가 결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는 의구심이 안팎에 적지 않았지만 최 대표는 도입을 망설이지 않았다. 이유는 한 가지다. 유저들의 니즈다. 최 대표는 “Z세대는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자신이 잘 활용하는 서비스에는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BJ가 나를 즐겁게 해주고 내가 그 방송을 통해 재미를 얻고 있으니 그에게 ‘뭔가 해주고 싶다’ 내지는 ‘당연히 뭔가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거금을 들여 스푼을 쐈을 때 같은 방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감탄하며 환호하는 것을 즐긴다. 그것이 그들의 문화다.” 최 대표의 말이다. 결제 서비스가 시작된 첫 달, 유저들의 스푼 결제를 통해 200만 원의 매출이 기록됐다. 이후 결제 금액은 지속적으로 늘어나 지금은 매일 약 1억 원씩 결제가 일어난다. 한 달에 수백만, 수천만 원씩 스푼을 결제하는 20대들도 적지 않다. 2018년 연매출 230억 원이 여기서 나왔다.


스푼으로 후원받는 기능이 추가되자 이에 연동해 BJ들의 수입도 늘기 시작했다. 현재 톱10 안에 들어가는 BJ들은 연간 억 단위 규모의 돈을 번다. 지난해 가장 많이 번 BJ는 4억 원의 수입을 거뒀다. 이렇게 되자 전문적으로 BJ를 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목소리만으로 진행되는 방송인데도 매일 아이디어를 내서 구성을 달리하고 자신만의 개성 있는 진행 방식을 고민해 팬덤을 불려나간다. 스푼라디오에서 진행하는 정규 방송 외에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등을 통해 추가적으로 팬들을 관리하며 자체적으로 대규모 팬미팅을 기획하기도 한다. BJ들끼리 커뮤니티를 조성해 공동으로 행사를 진행하는 이들도 있다. BJ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스푼라디오에서 제작에 참여하는 사용자 비율은 전체 사용자의 10%대로 올라섰다. 유튜브 등 비디오 플랫폼에서 단순 공유나 시청이 아닌 직접 제작에 참여하는 비율이 2%대에 불과한 것을 고려하면 스푼라디오에 대한 유저들의 참여도가 얼마나 높은지 짐작할 수 있다.

데이터, 데이터, 데이터…

라이브 기능과 스푼 결제 등을 포함해 서비스 출시 이후 1년 동안 총 54회의 업데이트가 있었다. 거의 일주일에 한 번꼴로 업데이트를 한 셈이다. 이는 최 대표의 경영 철학과 통한다. 최 대표는 뭐든 일단 해보고 이후 보완해가자는 주의다. 그는 “업데이트 54번 중에 성과를 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라이브와 스푼 결제가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다소 박한 자평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당연히 잘 활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유저들로부터 외면당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대부분이 그렇다고 했다. “실패가 디폴트(default)다. 성공이 특이 케이스다. 원래 실패하는 게 당연하다고 가정해놓고 어떻게 하면 가급적 실패를 줄일 수 있을까를 열심히 연구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최 대표의 말이다.


DBR mini box I: 스푼라디오의 주요 기능

라이브(Live): 전체 방송 중 90% 이상을 차지한다. 매일 밤 4000개에 육박하는 방들이 만들어진다. 누구나 버튼 하나만 누르면 라이브 방송을 진행할 수 있다. 방에 참여하면 오픈채팅을 통해 BJ와 대화할 수 있다. 대화 중 스푼을 쏘면 BJ에게 금전적인 수익을 안겨줄 수 있다.

캐스트(Cast): 무엇이든 녹음해서 올려놓을 수 있다. 노래를 불러 음성파일을 올리기도 하고 특정인의 생일 축하 메시지를 릴레이로 녹음해서 올려두기도 한다.

톡(Talk): 드라마나 영화 대사, 노래의 한 단락 등 지정된 문구를 짧게 녹음해 올리는 코너다. 릴레이처럼 전 사람에 이어 다음 사람이 짤막한 자신의 음성 녹음을 올린다. 각 방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해당 문구를 읽어 올린 녹음을 연달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데이터를 가장 신뢰한다. ‘데이터 말고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씩 데이터를 보면서 전략을 다듬고 수정한다. 기본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앱스토어 등에 올라오는 사용자 리뷰다. 운영팀에서 매주 취합해 주제별로 분류한 후 내부에 공유한다. 개발팀이나 마케팅팀과 협의해 운영에 반영한다. 유료 데이터 분석 툴도 많이 쓴다. 툴 값으로만 매달 수천만 원씩 나간다. 플랫폼을 통해 얻는 여러 수치를 다양한 잣대로 분석하고 파악해, 보고 또 본다.

여러 데이터를 비교 분석해가며 최 대표가 찾는 것은 ‘골든 넘버(golden number)’다. 예컨대, 트위터는 사용자가 팔로잉을 20명 이상 하면 탈퇴하지 않고 계속 사용하더라, 페이스북은 5명 이상의 친구와 연결되면 사용이 유지되더라는 식의 사용자 행태 분석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특이점이다. 스푼라디오도 여러 가지 골든 넘버를 갖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새로 가입한 사용자가 방송을 5개 이상 들으면 앱을 삭제하지 않고 계속 사용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결과다. 무수히 많은 데이터(raw data)를 돌리고 분석해 얻어낸 숫자다. 이를 반영해 스푼라디오는 가입자가 앱을 설치한 후 끄기 전까지 최소 5개의 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너지(nudge)를 설치했다. 처음 들어온 사람에게 채팅 형식으로 말을 걸어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거나 인기 있는 방송 리스트를 전면에 노출해 흥미를 유발하는 식이다.

AB 테스트도 매일 한다. 최 대표의 표현에 따르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미친 듯이 한다’. 대체로 다음과 같은 프로세스를 따른다. 새롭게 적용하고 싶은 기능의 A버전과 B버전을 사용자 중 일부에게 먼저 도입해본다. 이 중 더 좋은 반응을 얻은 버전과 C버전을 또 사용해보도록 한다. 이런 과정을 수십 차례 반복해 마침내 살아남은 최종 버전을 전체 사용자에게 적용한다. 마치 이상형 월드컵을 진행하듯 일대일로 여러 버전을 붙여 최종 살아남는 버전을 가려내는 식이다. 최 대표는 “직원들에게도 말로 설명하지 말고 숫자를 가져오라고 많이 요구한다. 사용자들의 행동과 특성, 결제 방식, 재미를 느끼는 포인트는 물론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가 모두 데이터에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 스푼라디오 유저 중 70% 이상이 18∼25세다. 스푼라디오가 진행하는 디지털 마케팅과 제공하는 기능들은 대부분 이 연령대를 타기팅한다. 처음부터 10대와 20대를 타기팅한 것은 아니었다. 초반에는 3040을 위한 시사 또는 지식 콘텐츠도 있었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세바시)’과 협력을 맺고 세바시에서 제작하는 콘텐츠를 끌어와 음성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인기 웹툰 ‘우리 집에 사는 남자’와 ‘동네변호사 조들호’ 등을 각색해 전문 성우가 목소리로 연기해 올려두는 ‘오디오툰’ 코너도 있었다. 책을 귀로 들을 수 있는 오디오북과 비슷한 기능인 셈이다. 하지만 10∼20대가 라이브를 통해 일상을 공유하는 용도로 스푼라디오를 많이 찾으면서 이들 위주로 기능이 재편됐고 지금은 시사 콘텐츠 제공은 물론 오디오툰 기능이 모두 종료된 상태다. 이 역시 신규 유저 추이, 앱 삭제 추이, 재방문율, 유저별 기능 활용률과 머무는 시간 추이 등 여러 가지 숫자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내린 결정이다. 최 대표는 “연령에 제한을 두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서비스를 가장 활발하게 즐기며 소비하는 세대가 10∼20대로 나타난 만큼 그 결과에 맞춰 점차 이들을 주요 타깃으로 보며 서비스를 운영하게 됐다”며 “스푼라디오가 나아가는 전략적 방향을 결정하는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사용자들”이라고 말했다.


마케팅팀에 최대한의 자율과 권한 부여

창업 초기, 최 대표는 서비스를 주로 이용하는 10∼20대 유저들을 이해하기 위해 이들이 많이 모이는 방에 자주 들어갔다. 직접 방을 만들어 운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방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깔깔거리며 웃을 때 자신은 하나도 웃기지 않거나 사람들이 왜 웃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 빈발했다. 개설한 방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을 때도 많았다. 이런 상황은 마케팅팀과의 회의에서도 자주 발생했다. 전원 20대로 구성된 마케팅팀은 각자 아이디어를 내고 문구를 작성해 마케팅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일한다. 이들과 같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다들 깔깔거리며 박장대소하는 상황에 최 대표 혼자 웃지 못한다거나 팀원들이 이른바 ‘급식체’를 사용해 작성한 문구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지금은 유저들의 대화 또는 마케팅팀에서 작성한 문구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저들은 저렇게 즐기는구나, 저들은 저런 상황에 지갑을 여는구나를 알아갈 뿐이다. “과거 우리 아버지 세대가 서태지 노래를 좋아하는 우리를 보고 이런 노래를 도대체 왜 좋아하냐, 이게 노래냐고 했던 것처럼 서로 다른 세대를 일부러 노력해서 머리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저 그들의 특성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파악해 그에 맞는 서비스를 구현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래서 더더욱 데이터를 많이 활용한다.” 최 대표의 말이다.

마케팅을 직접 컨트롤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표는 예산 배정만 결정할 뿐 마케팅의 A부터 Z까지 마케팅 팀원들이 개인별로 결정하고 진행한다. 스푼라디오의 지난해 마케팅 비용은 120억 원. 연 매출이 230억 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공격적인 마케팅이다. 올해는 더욱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펼칠 계획이다. 플랫폼 비즈니스의 성패는 사용자층의 압도적인 확보에 달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주요 사용자층을 대상으로 마케팅 메시지를 지겨울 정도로 반복 노출해 그들의 머릿속에 스푼라디오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하고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 목표다. 사용자들이 원해서 추가한 ‘스푼 후원하기’ 기능 외에 별다른 수익 모델을 시도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직 충분한 사용자층이 확보되지 않았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상황에 광고 등 다른 수익 모델을 섣부르게 추가했다가는 사용자들의 이탈이나 관심 저하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지금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용자층을 두텁게 확보하는 데 집중해야 할 때라는 게 최 대표의 생각이다.

마케팅에 개입하지 않는 대신 마케팅 팀원들을 구성하는 데 상당히 공을 들인다. 경력이나 학력은 보지 않는다. 오로지 열정만 본다. 스타트업인 데다 새롭게 시도해야 하는 일들이 많은 만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우선으로 본다. 뽑힌 마케팅 직원들은 3개월간 수습 기간을 거친다. 하루에 몇만 원 정도의 예산을 받아 직접 디지털 마케팅을 시도해보도록 한다. 각자 맡는 플랫폼은 정해져 있지만 마케팅 문구나 형식, 기간 등은 스스로 정할 수 있다. 디지털 마케팅의 특성상 해당 마케팅을 통한 사용자 수 증감이나 스푼 결제 내역 등이 바로바로 체크된다. 실시간으로 성적표를 받아보는 셈이다. 그 결과에 따라 개인별 마케팅 예산의 증감이 달라진다. 예컨대 같은 10만 원의 예산을 받아 A는 20만 원을 벌었고, B는 5만 원밖에 벌지 못했다면 A에게는 활용할 수 있는 예산을 늘려주고 B에게 배정된 예산은 삭감하는 식이다. 3개월 수습 기간 동안 성과를 내지 못한 팀원은 정직원으로 채용하지 않는다.

정직원이 된 마케팅팀 직원들에게는 보다 넓은 범위의 권한이 주어진다. 유튜브, 페이스북 등 개인별로 맡는 채널만 정해져 있을 뿐 들어가는 문구와 노출 방식, 노출 기간, 타깃 설정, 수정 여부 및 방법 등은 모두 자율적으로 결정한다. 다만 성과에 따라 배정받는 예산 규모가 달라질 뿐 아니라 성과급의 유무 및 금액도 달라지므로 상당한 책임과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초기에는 광고 문구를 검토해 달라며 대표에게 들고 오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절차가 없다. 오직 결과를 놓고 평가받을 뿐이다. 최 대표는 “광고 문구라고 들고 오는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때로는 지나치게 오글거린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뭐든 일단 해보라고 한다”며 “가급적 다양한 방식으로 광고를 시도해보고 그중 좋은 성과를 낸 광고에 예산을 추가 배정하는 것만 내 몫”이라고 말했다.



DBR mini box II: 스푼라디오 광고 문구들

늘 혼자인 게 좋다고 말했다. 늘 혼자인 게 편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도 가끔은 누군가와 소통하길 바란다.


편하게 들으면서 주무시면 돼요. 제가 재워드릴게요.


내 개취는 라디오를 타고


어른들은 모르는 우리들만의 라디오


너의 숨은 재능을 스푼에서 보여줘


잠이 안 올 땐 스푼라디오(듣다 주무셔도 좋습니다)



창업부터 해외 진출 염두… 동남아, 일본, 중동으로

최 대표는 창업 초기부터 해외 시장 진출을 염두에 뒀다. 비디오와 달리 라디오는 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기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봤기 때문. “국내 지상파 3사 라디오를 합쳐도 총 3000억 원이 안 되는 시장이다. 물론 기존 시장으로 단정하면 안 되겠지만 참고할 만한 수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국내가 100억 원 규모밖에 안 된다고 해도 이를 병렬식으로 펼쳐 세계에서 50개, 100개 시장을 키우면 될 것 아닌가.” 최 대표의 말이다.

처음 진출한 국가는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이었다. 동남아시아는 전체 인구가 많고 그중에서도 젊은 인구 비중이 높다. 또한 SNS 사용이 매우 활발하다. 동남아시아 지역 사람들은 모바일을 활용해 하루 평균 3.6시간 인터넷을 쓰는데 이는 중국(3시간), 영국(2시간), 일본(1시간)보다 많다. 필리핀과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주요국들의 하루 인터넷 사용시간 및 소셜미디어 사용시간은 세계 상위권이다. 1

인건비가 저렴해 운영비가 적게 든다는 점도 동남아시아 선정의 이유가 됐다. 스푼라디오는 국내에서 서비스를 출시한 지 1년 만에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도 동일한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리고 다운로드나 가입자 수를 꾸준히 불려나갔다. 하지만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하는 매출 성장은 더뎠다. 스푼 후원하기가 생각보다 활발하지 않았다. 결제 단위도 한국에 비해 훨씬 작았다. 최 대표는 “인간에게 필요한 의식주휴락(衣食住休樂) 중 스푼라디오 서비스는 휴(休)와 락(樂)에 해당하는데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희와 락에 소비되는 금액이 적을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다음 지역은 무조건 소비 수준이 높은 곳을 택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 진출 지역은 일본이었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이다. 그다음은 오일머니가 풍부한 사우디아라비아였다. 인구는 한국보다 적지만 소비력이 강한 덕분에 인당 인앱(In-App) 결제 금액이 세계 톱 수준이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얻은 교훈을 적용한 후발 지역에서의 매출 성장은 가파른 편이다. 일본과 중동 모두 유저 숫자는 물론 스푼 결제 금액이 빠르게 늘고 있다.

해외에서도 마케팅 원칙은 동일하다. 팀원들 각자가 최대한 많은 권한을 가지고 문구와 기간, 방식 등을 결정한다. 현지인의 감성을 이해하고 제대로 파고들기 위해 스푼라디오는 처음부터 해외 지역의 담당자들을 모두 현지인으로 뽑았다. 지사를 설립해 아예 현지에서 인력을 채용하는 동남아시아 지역을 제외하고 일본과 중동 지역의 경우 한국에 살고 있는 현지인을 뽑아 함께 일하고 있다. 한국에서 현지인을 채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기업 아닌 스타트업에서, 기존에 없는 낯선 서비스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직군으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최 대표는 반드시 현지인으로 팀을 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케팅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규모를 더욱 키워나가겠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다. “아무리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이라도 ‘갑분싸’ ‘TMI’ ‘인싸’와 같은 말을 이해하고 적절히 사용하기는 쉽지 않다. 1020세대를 겨냥하는 마케터 일을 하려면 반드시 현지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 대표의 말이다.

최 대표는 여기서도 권한 위임 방식을 적극 활용했다. 지역별로 팀장을 공들여 뽑고 팀원들의 채용 및 관리를 팀장에게 일임하는 방식이다. 팀장의 경우 어느 지역 출신이나 영어를 잘해 최 대표와 막힘없는 소통이 가능하다. 팀장들이 각 팀으로 돌아가서는 팀원들과 현지어로 소통하며 일을 진행한다.

마이쿤을 창업한 지 올해로 6년 차, 스푼라디오 서비스를 시작한 지는 만 3년이 됐다. 지금은 앱의 누적 다운로드 숫자가 800만에 육박할 만큼 인기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지만 그동안 겪은 어려움도 작지 않았다. 사업 초기에는 유저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대표 스스로 신조어를 찾아 공부하기도 하고 매일 밤 인기 있는 BJ 방을 찾아 들어가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관찰도 많이 했다. 그러나 한계가 분명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되지 않는 점들이 너무 많았다. 지금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그들의 행태와 심리를 반영한 데이터를 파고들 뿐이다. “여성 속옷을 만드는 회사의 남자 CEO가 자사 제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경영을 잘할 수 없을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내 경우가 그렇다. 나는 Z세대가 아니고 그들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할 수 없지만 그들이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재미와 편리를 고안해 한 번이라도 더 찾는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최 대표의 말이다.

유저 수가 단시간에 급증하면서 서버가 다운되거나 서비스가 원활하지 않은 적도 수차례 발생했다. BJ를 하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보니 CS센터를 통한 항의는 물론 회사를 찾아와 삿대질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020세대의 눈높이에 맞춰 제작한 광고를 공격적으로 내보내다 보니 문구가 너무 느끼하다거나 지나치게 반복돼 거슬린다는 항의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무수히 많은 데이터를 통해 잘 먹힐 것이라고 예상하고 출시한 기능이 유저들의 외면을 받는 경우다. 애청하는 BJ의 방송이 시작됐다는 것을 알려주는 알람 기능이나 자동으로 방송을 틀어줘 아침 기상 알람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 등이 있으면 좋겠다는 유저들의 의견을 듣고 수십 차례의 AB 테스트를 거쳐 출시했지만 막상 적용한 후에는 잘 사용되지 않아 폐기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유저들도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지 못할 때가 많고 설문에서는 Yes라고 답해놓고 실제로는 No인 경우가 너무 많다. 계속 실험하고 시도하면서 수치로 나타나는 실제 사용률을 리뷰해보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최 대표의 말이다.


최한나 기자 han@donga.com


DBR mini box III : ‘스푼라디오’의 성공 비결
초자율시대… 판만 깔아주고 스스로 진화하게

스푼라디오의 성공은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율을 기반으로 스스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에 어디로 갈지,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쉽게 예측이 어려울 정도다. 강한 실험정신을 가지고, 사용자 데이터를 중심으로 미지의 세계에서 묘수를 찾아가는 도전이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즐거운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스푼라디오 사례는 미래 기업의 생존을 위한 다양한 키워드를 제공한다. 현생 인류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하지만 미래 생존을 위해 기업에 가장 중요한 Z세대와 함께 진화하고 있는 브랜드라서 그렇다. ‘젊게, 빠르게, 가볍게, 다양하게’라는 키워드를 ‘Z세대 지향 비즈니스’와 연결하며 그 시사점을 찾아보자.


Z세대향 비즈니스 마인드
많은 사람에게 미래는 불확실하다. 너무도 빨리 변해가는 기술 환경에 허덕이는 사람일수록 미래는 두렵게 느껴진다. 디지털 네이티브, 즉 태어날 때부터 첨단 기술과 함께 자라며 짧은 동영상 한 편으로 필요한 지식을 간단히 습득해버리는 신인류에게 미래는 어떻게 보일까? 불확실성을 일상으로 받아들여 지내온 Z세대에게는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만한 변화일지 모른다. Z세대는 조용히 진화하면서 미래 환경에 스스로를 가장 잘 최적화하는 세대다. 미래를 대비하는 기업이라면 반드시 Z세대 중심의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가장 진화된 소비자를 상대해야 오랫동안 영업을 할 수 있고, 가장 진화한 직원들과 함께 일해야 지속가능한 기업이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스푼라디오는 내·외부적으로 업의 중심을 Z세대에게 맞춰 미래지향형으로 진화해가는 기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 따뜻한 말 한마디의 힘
TV를 넘어 AR, VR과 함께 AI 시대로 가고 있는 현시점에 라디오라니, 놀랄 일이다. 그것도 가장 디지털화한 Z세대가 사용자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라디오 플랫폼이라니,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의 환경적, 심리적 특성을 깊이 있게 조망해보면 이 같은 의외의 역발상이 통하는 한 수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 내려진다. 화려한 영상에 지친 그들에게 목소리는 위안이 된다. 저성장의 그늘 아래 최고 수준의 경쟁에 내몰리며 ‘실패’의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그들은 항상 위로에 목마르다. 감성은 아날로그적으로 전달될 때 그 효과가 최고로 치닫는다. ‘위로 결핍 세대’에게 따뜻한 감성적 말 한마디는 자기 확신성을 끌어올리며 공감대를 극대화한다.

스푼라디오는 BJ, 청취자를 가릴 것 없이 남 앞에 설 수 있는 자신감을 충족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비주얼에 신경 쓰지 않고 진솔하게 소통하면서 존재감을 찾아갈 수 있는 통로다. 영상 만능 시대, 능력 배틀 시대에 ‘나와 다르지 않구나, 나 혼자가 아니구나, 문제없다’는 느낌을 주는 따뜻한 목소리는 큰 힘을 가진다. 가장 첨단의 세대인 Z세대가 가지는 이러한 결핍과 그를 채우는 충족의 키워드는 세대를 뛰어넘어 미래를 겨냥하는 비즈니스에 핵심이 될 것이다.


2. 자유롭게 그러나 공정하게
스푼라디오의 마케팅팀은 주된 소비자층과 같은 Z세대로 구성돼 있다. 진화하는 소비자를 상대해야 하는 마케팅 인적자원의 채용과 관리는 기업의 명운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경영의 다른 영역에 비해 관리보다 창의가 우선인 마케팅의 성격상 젊은 세대, 특히 Z세대를 적극 기용하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다. 마케팅은 이미 검증된 경력직을 뽑는다는 관행에 갇혀 있으면 안 된다. 관리 시대가 아니라 파괴 시대로 불리는 현대에 안정된 관리의 달인보다는 파괴를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젊은 세대를 주축으로 세워야 한다. 최근 부활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구찌 등의 기업이 이런 구조를 앞세워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Z세대는 전 세대에 걸쳐 가장 공정성에 민감한 세대다. 자유는 얻되 성과로 보상받는다는 의식이 강하다. 가장 합리적이며 실용적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예외나 관행, 인정주의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 만큼 처벌받거나 보상받는 것을 중요시하는 공정성 세대다. 그렇다 보니 이런 성향의 직원들은 자율과 성과라는 플랫폼에서 자아실현을 해 나간다. 스푼라디오의 마케팅팀은 매출의 절반이 넘는 예산을 가지고 무엇이든 자유롭게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에 따른 처벌과 보상은 명확하다. 미래로 갈수록 더 파괴하고 더 공개하는 비즈니스 환경이 펼쳐질 것이다. 자유롭게, 그러나 공정하게 실행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과학과 예술의 조화
마케팅은 과학과 예술의 조화라고들 말한다. 딱딱한 과학만 있어서는 안 된다. 지나치게 감에 의존하는 상상만 있어서도 안 된다. 스푼라디오 성공의 이면에는 데이터 중심의 과학적 접근과 예술 같은 실험주의적 접근이 공존한다. 머리는 차갑되 가슴은 따뜻해야 그 조화 속에서 그동안 없던 차별적 결과물이 나온다.

1. 사용자 행동 데이터 중심의 전략 수립
기업이 직관에만 의존하면 한두 번은 성공할 수 있으나 지속성을 보장받기 힘들다. 결국 마케팅의 핵심은 사용자이며 사용자의 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사용자가 보이는 행동, 그것에서 비롯된 데이터다. 데이터는 사실 기반이다. 과거의 정보 비대칭, 비공개 시대에는 감에 의존하는 주먹구구식 마케팅이 통했다. 하지만 초연결, 초공개, 초저장 시대에 인간의 행동 데이터는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저장, 추출되고 분석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과 함께 초데이터 시대로 가고 있는 만큼 마케터에게 데이터의 자유도는 무한으로 이어지면서 기회의 장이 펼쳐지고 있다. 누가 데이터를 잘 다루느냐가 경쟁의 핵심인 시대다. 마치 요리사가 글로벌 시대에 무한히 널려 있는 식재료 중 어떤 것을 선택해 어떤 레서피로 요리하느냐에 따라 평가받는 것과 같다. 감으로 마케팅하는 시대는 저물고 데이터 기반의 사실 마케팅이 통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데이터 시대를 살았고 팩트 기반의 결정에 익숙한 공정성 세대에게는 더욱 중요한 가치다.

여기서 하나 주의할 것은 말과 행동의 구분이다. 의식적 상황에서 표출되는 말은 사실 기반이라고 보기 힘들다. 얼마든지 자기 의지로 만들어내고 왜곡할 수 있다. 의식적 상황에서 행하는 설문조사나 인터뷰를 데이터라고는 할 수 있지만 사실 기반의 완전 데이터라고는 보기 힘든 이유다. 이 때문에 이런 자료들에 전적으로 의지해서는 안 되며 보조적 자료로만 활용해야 한다. 행동은 좀 다르다. 대부분의 말은 의식에서 오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행동은 무의식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행동 데이터는 무의식적으로 흘린 인간 본연의 흔적이며 진실의 순간(The Moment of Truth)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마케팅학자들 사이에도 의식 상황에서 행하는 설문조사와 인터뷰에 의구심을 갖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세계 유수 저널에서는 필드에서의 행동 데이터 증명을 거의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기술 발전과 지식의 공개 및 공유로 인해 이제는 행동 데이터 분석도 학자의 영역에서 실무자 영역으로 넓혀지는 추세다. 앞서는 기업이라면 데이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케터가 많아야 한다. 마케팅이 크리에이티브와 동일시됐던 것이 과거라면 이제는 행동 데이터가 기반이며 그 위에 크리에이티브가 더해지는 시대로 가고 있다.


2. 실패를 당연시하는 예술적 실험주의 정신
스푼라디오 사례를 보면 대단한 실험주의적 정신을 접하게 된다. ‘일단 시도해보자’는 앞으로 더욱 요구되는 가치일 것이다. 시도해보면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덤을 얻는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만들어 나가려는 주의는 옛날식 접근이다. 젊게, 빠르게, 가볍게, 다양하게 가야 살아남는 환경에는 실험주의 접근이 중요하다. 주야장천으로 지긋이 오래가는 시대는 저물었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일상이 된 시대, 팝업적 시도가 비즈니스의 핵심이 돼야 한다.

실험주의를 위해서는 예술적 접근이 필요하다. 하나의 예술 작품이 나오기까지는 무수히 많은 습작이 필요하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예술적 정신은 비즈니스 세계에도 요구된다. 기왕이면 남들이 하지 않는 혁명적 시도, 즉 아방가르드한 성격의 것이면 더욱 좋다. 신인류, 미래 인류에게 각광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살펴본 사용자 행동 데이터 중심의 실험이어야 한다. 행동 데이터를 기반으로 지속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실험에 옮기면서 끊임없는 테스트와 도전 정신으로 진화해가는 것이 미래에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다.



초자율시대에 대비한 믿음과 과감한 임파워먼트
많은 기업에 이런 말을 던지고 싶다. ‘잘 모르면 맡기는 것이 최선이다. 이해가 안 되면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냥 묵묵히 지켜보는 것이 좋다.’ 스푼라디오가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직원들의 업무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고 과감히 맡긴 데서 찾을 수 있다.

초자율시대다. 모바일 인터넷 환경의 도래와 함께 사람은 이미 자율시대에 최적화돼 가고 있다. 혼자 생활하는 사람이 늘고 혼자 소비하는 비중이 커진 것은 자율시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다. 사물인터넷을 비롯한 4차 산업혁명은 사물의 자율시대를 앞당기고 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알아서 움직이는 시대라는 의미다.

판을 깔고 스스로 진화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최선이다. 조직 관리 차원에서 이 점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Z세대를 비롯한 젊은 세대가 주역이 되고 있는 상황에 뒷방 늙은이, 이른바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권한을 과감히 이양하고 다른 유효한 역할을 찾아 나서야 한다. 통제와 관리의 시대는 끝났다. 자율과 창의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기업의 시스템과 의사결정 과정, 조직 운영 등 모든 분야에 임파워먼트가 일상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이제는 각각의 조직원이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시대다. 모두 다 프로페셔널이다. 자체 조달이 어려우면 외부에서 얼마든지 조달해 전문가 수준의 과업을 해낼 수 있다. 맡겨놓으면 알아서 다 할 수 있는 시대라는 의미다. 믿고 맡겨보라. 처음에는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겠으나 진화하고 발전해서 분명 궤도에 올라올 것이다. 젊은 세대일수록 회복탄력성이 높다. 과감하게 믿는 경영, 믿고 맡기는 경영이 차별화의 핵심이 될 것이다. 이런 경영으로 조직을 이끌 수 있는 리더십 또한 중요한 요소다.

여준상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 marnia@dg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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