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인 흐름, 정부의 단편적인 보조로 리쇼어링을 고민할게 아니라, 

전략적

   - 더 넓은 틀에서, 구조화를 통한 여러 변수와의 관계를 고려해서, 시간의 축에서,

선택적,집중적

   - 산업적 관점: 원산지 효과가 높은 산업군을 리쇼어

   - 기업적 관점: 벨류체인 중 부가가치가 높은 R&D는 리쇼어 대상, 단순한 제조,판매,AS등 은 아웃쇼어

으로 설계해야 한다.


취약점 드러낸 글로벌 공급망… 우리의 대응은?

리쇼어링은 탈출구가 아닌 ‘재편 모델’
유연하게 ‘넥스트 쇼어링’을 준비하자

303호 (2020년 8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코로나19 사태 이후 이미 일부 선진국은 리쇼어링 정책에 힘을 주고 있는데 전략적으로 맞춤형 정책을 추진 중이다. 미국은 제약, 복제약, 반도체 관련 업체에, 일본은 액정패널, 자동차 같은 전략•기반 산업 중심으로 성과를 내고 있다. 최근 몇 년간 해외에서 이뤄진 리쇼어링 전략들을 살펴보면 3가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1. 기업들의 리쇼어링 선택은 오프쇼어링 전략의 연장선상에 있다. 해외 생산보다 낮은 거래비용이 가능하거나 진출한 해외 시장의 확장성이 기대 이하일 때, 필요한 요소 자원이나 인적자원의 취득이 기대 이하인 경우 리쇼어링이 이뤄진다.

2. 리쇼어링 정책은 세금 감면, 부지 제공 등과 같은 일반적이고 일률적인 정책보다 전략적, 선택적, 집중적으로 설계돼야 한다.

3. 리쇼어링에는 나름의 전략적 목적과 명확한 타깃, 그에 따른 특화된 리쇼어링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파격적이면서 유연한, 그리고 목표가 명확한 리쇼어링 정책 없이는 자국 기업들을 유인하기 어렵다.



미•중 무역 갈등과 코로나19가 세계 시장을 덮치면서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과 함께 ‘리쇼어링(Reshoring)’ 전략이 새삼 부각되고 있다. 특히 최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 등지에서 생산 활동을 벌이고 있는 미국 기업들을 본국으로 귀환하려는 움직임을 노골화하면서 리쇼어링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트럼프 정부의 이런 움직임은 코로나19로 글로벌 공급망 체계가 무너질 경우 중국에 생산 의존도가 높은 미국이 감당해야 할 리스크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도다. 그동안 해외 직접 생산과 글로벌 소싱으로 자국 제조업이 입은 피해와 대외 무역 적자도 이참에 만회하겠다는 계산도 한몫하고 있다. 이 같은 미국의 리쇼어링 움직임에 일본, 유럽 등 주요 국가들도 빠르게 가세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정부 차원의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해외에서 활동 중인 우리 기업들을 귀환시킬 정책과 인센티브를 속속 발표하고 있으며 귀환을 고려 중인 기업도 생겨나고 있다. 한편에선 리쇼어링에 대한 실효성 논란도 커지고 있다. 불과 수개월 만에 해외 시장 선점 경쟁에서 자국 생산으로 전환되는 움직임에는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코로나19로 국경이 차단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대응 차원인지, 아니면 뉴노멀시대 글로벌 공급망 재편 중에 나타나는 현상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상황이 수습될 시점에 예전 상태로 원상 복귀되겠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글로벌 기업, 특히 우리 기업들의 글로벌 공급 체계를 재배치하는 계기로 삼아 리쇼어링을 포함한 다양한 옵션을 재고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현재 글로벌 공급망의 큰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유행처럼 번지는 리쇼어링에 편승하느라 급급하다면 상황이 바뀌었을 때 오히려 더 큰 비용을 치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리쇼어링이 뜨는 이유

리쇼어링이 학계의 연구 주제로 비교적 빈번하게 등장한 것은 2010년 초반 전후다. 제조업 경쟁력을 상실한 미국, 유럽은 해외의 생산 거점을 본국으로 회귀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글로벌 생산 트렌드의 일대 전환과 함께 리쇼어링에 주목했다.

제조관리자 혹은 공급사슬 최고책임자는 제조 거점을 지속적으로 재배치하며 생산의 효율성을 도모해야 한다. 카이누마 교수 등의 2019년 연구1 에 따르면 지난 30년간 주요 2700여 개의 미국 제조 기업의 경우, 회사의 핵심 역량이 아닌 영역이거나 낮은 인건비를 활용할 수 있는 업체를 확보했다면 과감히 외주(Outsourcing)를 주거나 점진적으로 인건비가 낮은 지역으로 이전하는 선택을 해왔다. (그림 1 왼쪽 하단 화살표 참고) 그러나 최근 미국 정부의 리쇼어링 정책이나 지난 수년간 미국 제조업체들의 생산지 재배치 과정을 살펴보면 지금까지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그림 1의 오른쪽 하단의 화살표 참고)

출처: Kainuma et al., 2019 2

특히 최근 미국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해외 진출 후 본국 회귀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업체들이 늘고 있다. 비용 절감의 이점이 사라지거나 적응에 실패할 경우 기대와 현실 간 괴리, 오프쇼어링의 미진한 효과, 경영 관리 방식의 변화 등 다양한 요인이 그 원인으로 꼽힌다.

2000∼2020년, 리쇼어링 현상의 특징과 변화

리쇼어링 현상은 이미 2010년 초반부터 글로벌 기업 차원에서 부각된 이슈다. 1990년대 이후 글로벌 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의 특징은 한마디로 실제 생산 위치와 최종 사용자 시장과의 물리적 거리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보다는 가치 창출의 전 과정을 최적의 주요 저비용국가(Low cost countries)에 위치시켜 생산비를 줄이고 적시(Just-In-Time) 공급이 가능하게 가치사슬을 설계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렇다 보니 공급망과 물류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러나 최근 10년간 이 같은 글로벌 제조업 공급망은 일대 변화를 맞았다. 무엇보다 글로벌 생산의 중심이었던 중국의 가파른 임금 상승, 해외 기업에 제공되던 인센티브 철회, 중국 특허 기준 준수를 강요하며 그동안 중국 현지 공장에서 누려오던 각종 혜택이 상당 부분 사라졌다. 보스턴컨설팅그룹 조사에 따르면 과거 20포인트 이상 차이 나던 미국과 중국의 생산비용이 2015년 현재 미국 100, 중국 96으로 4포인트 내외로 줄었다. 이에 미국 기업들은 미국에 생산기지를 세워 현지에서 바로 유통하는 편이 오히려 채산성이 높다고 판단했고, 유럽 및 한국 기업 역시 중국 현지 공장을 대체할 제2의 해외 생산기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불거지기 시작한 미•중 무역 갈등은 더 이상 기존의 글로벌 공급망(GVC, Gloval Value Chain)을 과거처럼 원활히 작동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갔다. 최근 코로나19로 국경이 봉쇄되고 글로벌 공급망이 완전 마비되자 이런 변화의 흐름은 더욱 가속화됐다. 자연스럽게 모든 생산 공급을 내재화하려는 리쇼어링 전략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리쇼어링이 더욱 쟁점이 된 이유는 미국, 일본, 독일, 영국 등 주요 국가들이 자국 기업 유턴을 위해 유례없던 정부 차원의 정책을 경쟁적으로 도입하면서부터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Insourcing American Jobs Forum’을 통해 해외 아웃소싱 기업의 국내 재배치를 추진했다. 2014년 영국 정부는 ‘Reshore UK’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본국으로 귀환하려는 제조업체들을 근접 지원하는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의 관심을 끌었던 독일의 ‘Industry 4.0’ 역시 내용 면에서는 강화된 금융 지원을 통해 해외의 독일 제조업체들을 귀환시키려는 정부의 유인책이나 다름없다. 프랑스의 ‘Industry Du Futur’, 이탈리아의 ‘Piano Industria 4.0’ 역시 자국 중소기업 귀환을 목적으로 세금 감면, 금융 지원, 플랫폼 개발 등의 지원을 하는 정부 주도의 리쇼어링 프로그램이다.

이 같은 노력에도 국가별로 리쇼어링 정책의 성과는 다소 평가가 엇갈린다. 미국은 1960년대 국내총생산의 25%를 차지할 만큼 제조업의 비중이 컸지만 2000년대 이 비중이 11%로 줄었다. 2010년 이후 총 3327개 기업이 본국으로 회귀했고 누적 일자리도 500만 개를 넘어섰지만 기대만큼의 성과는 아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영국, 독일 등 유럽 지역 역시 리쇼어링으로 제조업이 부활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최근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주요국 리쇼어링 정책이 다시금 힘을 받고 있다. 과거와 달리 코로나19로 인해 좀 더 선택적이고 전략적인 맞춤형 리쇼어링을 추진하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은 제약, 복제약, 반도체 등 R&D 업체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으며, 일본은 액정패널 업체(JDI)와 반도체 설비 업체(Rohm), 도요타, 혼다, 닛산 등 자동차 3사 등 전략 산업, 핵심 산업, 기반 산업 중심으로 성과를 내고 있다.

우리나라 리쇼어링 정책은 2013년 ‘유턴기업지원법’을 통해 시행됐다. 해외 투자 순유출 규모가 증가해 이를 막고자 제도가 도입됐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2010∼2017년 약 1922억 달러의 해외 투자 순유출이 발생해 보조금, 세금 감면, 인력 지원 등 지원책이 추가로 도입됐으나 국내 리턴을 체결한 기업은 같은 기간 중소기업 93개에 불과했다. 오히려 중소 수출기업들은 리쇼어링보다 해외 생산 확대를 고려하고 있다. 최근 들어 ‘리쇼어링 정책 2.0’을 통해 해외 우리 기업의 니즈를 파악해 맞춤형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일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생활가전을 만드는 삼성전자 광주사업장은 공급망 안정을 위해 해외보다는 국내 생산을 확대하기로 했다. 물류 부담을 줄이고 국내 업체와 협력하는 것이 시너지가 더 클 것으로 판단한 듯하다. 그러나 LG전자는 TV 생산라인 일부를 인도네시아로 이전한다고 발표해 정부의 리쇼어링 정책을 무색케 했다.



최근 국내 언론사 조사에 따르면 리쇼어링을 대하는 우리 기업의 속내는 우리 정부의 바람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저렴한 해외 생산라인을 포기하고 국내로 돌아오는 게 간단치 않다. 일부 산업에서는 생산 단가를 낮추지 않고서는 세계 기업과 경쟁하기 어렵고 국내의 높은 인건비와 세금 문제도 걸림돌이다. 이 조사에서 해외로 진출한 국내 기업 10곳 중 9곳은 리쇼어링 계획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국내 유턴을 주저하는 주된 이유는 인건비 상승과 규제, 특히 노동 규제다. 2010∼2018년간 주요 10개국 노동비용은 연평균 0.8% 하락한 반면 한국은 25% 상승했다. 경직된 주 52시간 근무제는 경영난을 악화시키고 있으며 임금 결정 유연성, 고용 해고 관행, 노조편향적 노동 정책, 수도권 입지 규제, 높은 법인세 등 기본적인 기업 환경이 여전히 어렵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세계적으로 리쇼어링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 가운데 우리는 정책의 목적과 내용, 도달하려는 지향점 등을 다시 한번 점검해야 한다. 기업들의 바람과는 달리 리쇼어링을 가로막는 규제는 여전히 즐비하다. 리쇼어링이 정말 우리가 처한 입장에 적합한 전략인지 그 실효성도 따져봐야 한다. 아직도 다수의 기업은 중국만 한 거대 내수 시장과 적당한 사회적 자본, 풍부한 노동력을 지닌 대체 시장을 찾지 못하고 있다. 각자도생을 꾀하는 것 또한 과연 자유무역과 글로벌 분업 덕분에 성장해온 우리 경제에 이득이 될지도 미지수다.

리쇼어링(Reshoring)에 관한 학계의 연구

리쇼어링 전략을 제대로 추진해 기대한 성과를 달성하려면 해외로 나간 기업들이 다시 돌아오려는 이유, 상황적 배경, 산업적 특성, 기업 성격, 효과적인 유인 정책과 사례, 사후평가 등 기본 사항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지난 10여 년간 진행된 학계의 연구들은 방대한 관련 사례들을 바탕으로 이 질문들을 탐구해 왔다. 리쇼어링이 비교적 최근 현상이다 보니 관련 사례가 많지 않고 주로 미국•서유럽 기업이 대상이어서 우리 상황과는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국가, 기업 간 행태에 동조화 현상이 발견되는 측면도 많다. 리쇼어링에 대한 학문적 시각은 크게 해외 시장에서 생산 활동에 실패했기 때문에 폐업 이후 본국으로 회귀하려 한다는 시각과 세계화 과정(Internationalization process)의 일부분으로 생산지역 재배치와 관련된 다양한 옵션 중 하나로 보는 시각이 공존한다. 전자의 경우 본국 회귀의 원인을 주로 해외 배치국(host country)의 변화 요소에서 찾으려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 그 원인을 본국의 환경 변화나 본사의 글로벌 전략에서 찾고 있다. 다만 두 관점 모두 의사결정자의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시도는 매우 미흡하다.

리쇼어링 현상은 오프쇼어링 현상을 설명하는 데 토대가 됐던 경제학의 국제무역이론(International trade theory), 국제경영 분야의 국제화이론(International process theory)과 절충이론(Eclectic paradigm), 경영전략 분야의 거래비용이론(Transaction costs theory)과 자원기반이론(Resource based view)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주로 경제적인 논거에 근거해 기업이 왜 지속적으로 지역 확장을 추구하는지 그 원인, 배경, 조건들을 오프쇼어링을 통해 설명하고 정반대의 선택을 리쇼어링으로 보고 있다. 국제무역이론에 따르면 국가 간 요소자원, 생산비용, 생산역량은 서로 차이가 발생하며 국제무역을 통해 필요 자원을 효율적으로 획득할 수 있게 된다. 국가 간 요소자원과 역량이 변화하면서 필요 자원 취득을 위한 무역관계 역시 변하는데 리쇼어링은 이 과정에서 발견되는 자원 획득 수단 중 하나로 보고 있다. 절충이론은 기업의 글로벌 확장을 필요 자원 획득, 시장 확보, 효율성 추구로 보고 직접 통제를 통해 소유권 확보, 지역적 이점, 내부화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실현되지 못할 때의 역선택으로 리쇼어링을 제시하고 있다. 거래비용이론은 기업이 생산 활동을 할 때 이를 내재화해야 하는지, 혹은 외부화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이론은 여기서 해당 활동이 가져오는 다양한 조정비용, 거래비용, 관리비용 등을 상호 비교해 합리적 선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디에서 생산 활동을 추진할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오프쇼어링과 리쇼어링을 비교해 합리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원기반이론은 기업의 전략적 선택이 귀중한 자원과 자산을 획득하는 과정으로 보고 해외에서 자산을 획득, 접근, 이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 리쇼어링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론들은 공통적으로 리쇼어링 같은 기업의 생산 입지 결정은 적합한 정보를 올바르게 수집하고 면밀히 조사해 변화하는 외부 조건에 합리적으로 반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론적 토대를 근거로 생산된 많은 실증연구는 대략 리쇼어링 전략을 누가(Who), 언제(When), 왜(Why), 어디로(Where), 어떤 활동(What)을, 어떻게(How) 추진해 왔는가로 분류할 수 있다. 각각의 연구 질문은 상호 독립적이라기보다 밀접한 연결성을 지니고 있다. 먼저 ‘누가(Who) 리쇼어링을 추진하는가’라는 질문은 리쇼어링 기업의 규모, 업종 등 해당 기업의 특성을 규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리쇼어링은 중소기업에서 글로벌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고른 전략적 선택지로 나타났으며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비해 리쇼어링을 더 신속하게 실행에 옮기는 편이었다. 노동집약적 기업보다는 맞춤화된 소규모 특화된 제조업체들이 리쇼어링에 더 관심을 보였으나 대체로 기업 특유 요소와 리쇼어링과의 상관관계는 희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언제(When) 리쇼어링을 추진하는가’라는 질문은 해외 생산 거점에서의 활동 기간과 본국으로의 이전 시점에 관심을 두고 있다. 표본의 한계가 있으나 대략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리쇼어링이 증가하기 시작해 2010년 이후 미국과 유럽 기업을 중심으로 크게 증가했다. 해외 생산 거점의 지속 기간은 유의미하게 특정하기는 어려우나 기업의 규모, 산업 종류, 진출 동기 및 진출 국가에서의 지배 구조 유형 등에 영향을 받고 있다. 미국 관리자의 경우 해외 진출 후 대략 5∼7년 사이에 리쇼어링을 고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왜(Why) 리쇼어링을 하는가’라는 질문은 리쇼어링 연구의 가장 많은 빈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본국으로 회귀하려는 동기와 배경을 주된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 해외 사례의 경우 오프쇼어링 실패에 따른 대응이 아닌 내외부 환경 변화에 따른 전략적 대응인 경우가 많았다. 특히 원산지 효과, 소비자 근접 대응 등 최근 부각되는 경영 이슈에 부응하기 위해 리쇼어링을 선택하고 있다. ‘어디(Where)로 리쇼어링을 추진하는가’라는 질문은 회귀 대상 국가의 지역적 동인 요소에 관심을 두고 있다. 본국의 생산 및 제조혁신이 진행될 때, 해외 생산거점의 저렴한 인건비가 노동시장의 경직성, 품질 관리 문제, 브랜드 가치 하락 등으로 더 이상 비교우위 요소가 되지 못할 때 리쇼어링을 단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엇(What)을 리쇼어링 하는가’라는 질문은 리쇼어링의 대상, 본국 회귀 형태나 구조에 관한 연구가 주를 이룬다. 가치사슬상 마케팅, 서비스보다는 초기 단계에 있는 R&D나 제조 부문이 리쇼어링의 주요 대상이 되고 있다. 리쇼어링 역시 본국 혹은 본국에 인접한 지역(Near country)으로 회귀하느냐에 따라 회귀 이후의 지배구조 형태(단독, 협력, 계약 등)가 어떻게 다른지 관심을 두고 있다. 전략적 목표에 따라 본국 회귀 후 해외 시장으로의 재진출을 노리는 유형, 본국에서 역량을 한층 업그레이드하려는 유형 등 역시 구조와 형태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주목하고 있다.

‘어떻게(How) 리쇼어링을 추진하는가’라는 질문은 리쇼어링을 선택하고 실천에 옮기기까지의 내부 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다. 생산 거점을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며 실행에 옮기는 것은 그 이상의 복잡한 내부 의사결정 체계를 거쳐야 한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리쇼어링 추진은 의사결정 프레임워크와 이행 프레임워크로 나눠 이뤄진다. 의사결정 프레임워크는 성과/역량 등을 점검하고 데이터분석 및 솔루션을 통해 조정, 결정 등 과정을 거쳐 리쇼어링 여부를 판단한다. 이행 프레임워크는 이전 위치에서의 해체, 새로운 위치로의 이전, 다른 가치 창출 활동과의 연계를 위한 재통합 등 3단계로 구성돼 있다. 해당 기업들은 리쇼어링을 제대로 완수하는 데 이 단계별 절차를 밟아야 하며 조직적인 준비성과 학습력, 데이터 분석, 의사결정상의 피드백 등이 충분히 지원돼야 함을 강조했다.



리쇼어링 전략의 시사점

지금까지 살펴본 리쇼어링 전략이 부각된 배경, 현황, 관련 연구를 종합해 보면 비록 다른 나라, 다른 기업 대상의 결과물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 먼저 기업들이 리쇼어링을 결정한 배경에는 오프쇼어링 전략의 실패 만회라기보다 오프쇼어링 전략의 연장선상에 있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 선택은 해외 생산보다 낮은 거래비용이 가능한 경우, 진출한 해외 시장의 확장성이 기대 이하인 경우, 로컬시장에서 예상치 못한 숨은 비용이 발생한 경우, 필요 요소 자원이나 인적 자원의 취득이 기대 이하인 경우 이뤄졌다.

그동안 기업의 가치사슬 활동은 각각이 분해되는 모듈화 추세를 보여왔다. 이는 다양한 현지 시장 적응을 원활하게 하고 기술이나 지식의 유출을 어렵게 하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가치사슬의 분해전략(Disintegration)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통제와 조절에 따른 거래비용이 증가하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기업은 오프쇼어링과 리쇼어링 사이에서 거래비용과 효율적 가치 창출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최적의 선택을 통해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적응하고 있다. 절대적으로 나은 조건과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다면 본국이라도 귀환을 선택하기 어렵다. 우리 기업의 해외 진출 동기가 대부분 저렴한 인건비와 낮은 생산 단가임을 고려하면 이를 리쇼어링으로 충분히 상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선택될 수 있을 것이다. 파격적인 지원을 약속받고 유턴한 우리 기업이 막상 지자체의 황당한 지원 조건에 발목 잡힌 사례가 뉴스로 나오기도 했다. 2013년 이후 유턴한 74개 기업 중 실제 가동 중인 곳은 40여 곳에 불과하고 일부 업체는 폐업 절차를 밟고 있다고 한다. 아직 리쇼어링 옵션이 선택받을 만한 우리의 사업 환경과 제도가 크게 미흡함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로 리쇼어링 정책은 세금 감면, 부지 제공 등과 같은 일반적이고 일률적인 정책보다 전략적, 선택적, 집중적으로 설계돼야 한다.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미국과 서유럽의 리쇼어링 정책은 훨씬 더 정교해지고 있다. 이들 국가는 이미 오래전부터 저비용 국가로, 신흥국으로 제조 거점을 이전해 온 기업들을 다시 본국으로 오게 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오랜 기간 해외에서 제조 기반을 다져온 업체라도 기술 근간이 굳건하거나 제조국 효과(Made-in-effect)가 가장 높은 산업군을 골라 맞춤형 리쇼어링 정책을 제공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중국, 동유럽으로 옮겨간 패션 산업을, 독일은 확실한 비교우위가 있는 기계 산업을 중심으로 특화된 리쇼어링 전략을 추진 중이다. 프랑스는 디지털 산업 육성을 목표로 해외로 진출한 자국 기업들을 귀국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가 리쇼어링으로 국가의 기술 수준과 역량을 강화하는 게 목표라면 미국과 영국은 직업 창출과 국내 생산 증가라는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공동화가 워낙 심해 리쇼어링 자체가 불가능한 제조 분야도 많아 특정 산업군에 집중하기보다 해외 거래 비용을 충분히 상쇄할 만큼의 파격적인 세금 혜택이나 사업 환경 조성에 역점을 두고 있다.

최근 사례만 보더라도 미국은 법인세율을 35%에서 21%로, 이전비용 20% 지원 등 파격적인 ‘당근책’을 제공하며 정착 환경을 개선해 왔다. 일본은 지방자치단체가 주체가 돼 어떤 기업을 유치할지 결정하고 중앙정부는 법인세, 규제 철폐, 경제특구로 환경 개선을 지원하고 있다. 최근 서플라이 체인 개혁을 보면 해외 생산 공장을 일부만 일본으로 옮겨도 대기업의 경우 비용 절반을, 중소기업에는 3분의 2를 보조해 주고 있다. 이는 결국 대기업이 복귀해야 중소기업도 복귀할 수 있다는 이치를 꿰뚫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귀환 기업을 위해 약 2조7000억 원의 특별 보조금 예산을 책정해 2015년 이후 매년 700∼800여 개의 기업 복귀에 쓰고 있다. 독일은 귀환 기업이 체감할 높은 인건비를 스마트 공장과 연구개발 보조금지급, 법인세 15.8%로 대응하고 있다. 규제가 하나 추가될 때마다 하나를 없애는 제도도 추진 중이다. 대만은 중국에 진출한 자국 기업을 집중적으로 귀국시키는 ‘대만 기업 리쇼어링 투자 액션플랜’을 지난해부터 시행하고 있다. 지정 공단에 입주하면 임대료 면제나 용적률 우대, 행정 절차 간소화 등의 혜택이 제공된다. 이렇듯 국가마다 리쇼어링 경쟁이 점화되면서 나름의 전략적 목적과 명확한 타깃, 그에 따른 특화된 리쇼어링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파격적이면서 유연한, 그리고 목표가 명확한 리쇼어링 정책 없이는 자국 기업들을 유인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리쇼어링이 우리 경제에 미칠 영향을 제대로 따져보고 나아가 글로벌 공급망을 어떻게 재편할지 고민할 시점에 와 있다. 우리 산업이 처한 입장을 고려할 때 맹목적인 리쇼어링은 지양해야 한다. 리쇼어링으로 국내 생산이 증가한다 해도 자동화, 디지털화가 대세인 지금 기대만큼의 일자리를 창출할지는 두고볼 일이다. 내수 시장이 큰 미국, 중국, 일본, 유럽 등은 자국 기업을 귀환시킬 만한 충분한 동기와 경제적 이득이 있으나 우리는 상황이 다르다. 내수 시장이 충분치 않아 리쇼어링으로 한계비용만 증가하고 장기적 성장은 오히려 더딜 수 있다.

우리 기업이 국내로 복귀한다는 것이 경제에 꼭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해외에서 국내로 생산을 재개해도 증가한 생산비용을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면 국가 전체로 봤을 때 생산비용은 증가하는 셈이다. 또한 국내로 이전 시 해외 거래처와 판매처를 잃을 수도 있다. 글로벌 공급망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기계, 화학 등 일반 제조업 분야에서 리쇼어링은 생산비용을 더 증가시킬 수 있다. 인공지능, ICT의 발전으로 해외 활동도 더 저렴해지고 있다. 따라서 리쇼어링 노력을 견지해야 하나 모든 산업에 다 적용할 수는 없음을 직시해야 한다.

시야를 넓혀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우리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결국 해외 시장에 진출해서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현지 소비자를 근접에서 지원해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비용을 낮출 수만 있다면 동남아 시장에도 직접 진출해 현지에서 생산 공급해야 한다. 어떤 리쇼어링 혜택도 물류비와 인건비를 완전히 상쇄하지는 못한다. 장기적으로는 리쇼어링 같은 내재화보다는 글로벌 공급망의 다각화를 모색해야 한다. 코로나19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한 향후 글로벌 공급망은 자국 중심의 내재화가 아닌 고도의 지역화로 전개될 것이며 기업의 해외 이전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최근 전경련이 국내 비금융업 매출 상위 10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조사를 보더라도 코로나19 이후 글로벌 공급망이 크게 재편될 것으로 기업들은 예상하고 있다. 또한 대응책으로 응답자의 약 42%가 공급지역 다변화와 해외 협력 강화로 꼽았다. 리쇼어링을 해결책으로 꼽은 기업은 3%가 채 안 됐다.

따라서 리쇼어링이 비효율적인 산업은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운송거리를 짧게 해 일부 국가에 집중된 글로벌 소싱 리스크에 대비해야 한다. 일부 학자는 이를 뉴노멀 시대에 걸맞은, 이른바 넥스트쇼어링(Next shoring)으로 지칭한다. 거리가 가까운 나라를 위주로 공급망을 분산하는 글로벌 물류의 지역화인 셈이다. 비용이 좀 들더라도 중국 같은 전통적인 해외 지역보다는 소비자 수요가 증가하는 동남아시아 등으로 공장을 옮겨 분산된 공급망을 이루는 것이 현지 소비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동시에 만약의 사태도 대비하는 리스크 관리인 셈이다. 넥스트쇼어링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글로컬 전략’임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글로벌 공급망의 일부는 주요 거점국(글로벌)에, 일부는 자국(로컬)에 배치하는 방안이다. 고부가가치의 기술 산업이나 전략 산업(통신장비, 자동차, 반도체부품, 소재 등)은 국내 거점에서 기반을 다지고 정부는 이를 연구개발(R&D) 지원, 교육, 법인세 인하로 지원해 국산화되도록 기업 환경 개선에 집중해야 한다. 동시에 단순 생산•공급•판매는 모듈화해서 기존의 일부 시장(중국이나 미국 등)에 편중되지 않은, 수요가 있고 비용 절감이 가능한 신흥 지역들로 다변화해 수출 시장도 확대하고 안정성도 확보하는 것이다.

현재의 글로벌 위기와 리쇼어링을 우리 산업에 기회로 인식해야 한다. ‘K-방역’으로 우리의 공급 역량은 코로나19 사태에도 중단 범위를 최소화해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 있음을 세계적으로 입증했다. (표 1) 한국은 글로벌 공급망의 중단을 우려하는 많은 글로벌 기업에 매력적인 시장이 아닐 수 없다. 안정적인 공급망 가동이 중요해진 만큼 우리나라가 글로벌 공급망의 새로운 거점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 같은 잠재력을 현실화할 수 있도록 품질 관리, 제도적인 부분이 뒷받침돼야 한다.



발상을 전환하라

순탄한 줄로만 알았던 글로벌 공급망 체계는 코로나19로 인해 거대한 취약점을 드러냈다. 중국 등 일부 국가에 집중된 체계는 한곳이 무너지면 연쇄적으로 인근 지역을 거쳐 모든 지역으로 파생되는 악순환을 일으켰다. 효율성과 적시 공급이 과거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이었다면 코로나19로 인해 안정성과 위기 관리의 중요성이 새로이 부각됐다. 리쇼어링은 이 같은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 과정에서 불거진 현상이다. 어떤 불상사가 발생해도 안정된 자체 공급이 가능하고 추가로 일자리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과도한 믿음에 편승해 우리 기업과 정부도 리쇼어링을 글로벌 공급망의 새로운 추진 과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리쇼어링에 적극적인 주요 국가와 달리 우리의 산업 구조와 시장 상황은 많이 다르다. 우리 기업의 해외 진출 동기를 살펴보면 리쇼어링에 대한 필요성이 크지 않다. 본국 회귀를 위한 어떤 조건들이 제시돼야 하는지 심도 있는 연구도 부족하며 차별화된 유인책도 미흡하다. 무엇보다 리쇼어링이 우리에게 더 많은 일자리와 투자를 증가시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만 팽배하다. 해외 진출이 늘어도 우리의 중간재 수출이 확대돼 일자리는 증가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의 위기를 리쇼어링으로 탈피하려 하기보다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 과정이라는 큰 틀에서 리쇼어링을 포함한 모든 가능한 대응 전략을 통합적으로 고려해 봐야 한다. 이에 해외 공급망의 다변화와 글로컬 전략을 추진하는 한편, 코로나 위기로 부상한 우리 시장을 글로벌 공급망의 주요 공급처로 육성하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류주한 한양대 국제학부 교수 jhryoo@hanyang.ac.kr
필자는 미국 뉴욕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대에서 석사(국제경영학), 런던정경대에서 박사(경영전략) 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United M&A, 삼성전자, 외교통상부에서 해외 M&A 및 투자 유치, 해외 직접투자 실무 및 IR, 정책 홍보 등의 업무를 수행한 바 있으며 국내외 학술저널 등에 기술 벤처, 해외 진출 전략, 전략적 제휴, PMI 관련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시장 신규참입】

1.목적확인

   - 고급 윤활기유 자체 생산을 통한 코스트 삭감

   - 일반 윤활기유 시장에서의 경쟁 회피

 

2.듀딜리전스

*시장조사

Market: 고급 윤활기유 시장

성장률/쉐어/이익률

      - 초기 진입하여 시장의 쉐어를 장악할 있는 가능성高(시장 선도자)

성장가능성

      - 시장 형성조차 제대로 되지 않음

      - 고급 윤활기유는  윤활유를 오래 쓸 수 있고 자동차의 엔진 마모를 더 효과적으로 줄여준다.

      - 엔진 피로도가 높은 일본 시장이나 환경규제가 엄격한 유럽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였다.

진입장벽

      - 막대한 초기 투자자금

      - 일반 윤환기유라는 대체시장

 

*시장 외부조사

Alternative market

   - 일반 윤활기유가 시장을 장악

 

3.모기업과 시너지 조사

-기존의 연구성과, 연구시설, 연구인력, 공장설비 등의 활용가능

 

4.시장 진입 방법 설정

-자사진입

   -일반 윤활기유 생산을 과감히 포기하고 새로운 시장에 대비한 고급 윤활기유 생산에 집중해 맞춤형 생산 공정

   -파일럿 테스트등 외주를 활용한 탄력적 인풋 증대를 통해 연구와 공장개발 동시진행

   -요소기술(정유에서 고급기유를 뽑아내기 위한 촉매제) 개발

 

 

 

시장 수요 상승에 맞추어 공급확대】

-노동력증대

-생산 방법 개선

-신기술 도입

-생산라인 증대


                  JV 통한 공급확대 시나리오         

Volume     |   min(d, s)                                    

Price         |   P                                            

Revenue    |   min(d, s)*P

Cost         |   기존 cost + JV관련 비용 - 운송비

Profit        |   R-C


-아웃소싱

DBR Case Study: SK루브리컨츠의 글로벌 전략

실무진 판단 믿고 글로벌 시장 돌진,‘틈새시장’ 고급 윤활기유 최강자로 우뚝

238호 (2017년 12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SK루브리컨츠는 불과 20년 만에 내수용 윤활유 기업에서 글로벌 고급 윤활기유 시장 내 1등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SK루브리컨츠의 성공요인은 다음과 같다.

1) 이미 포화된 일반 윤활기유 시장에 진출하지 않고 향후 성장 가능성이 있는 고급 윤활기유 시장을 겨냥해 기술개발 역량과 투자를 집중했다.
2) 자사가 보유한 기술력과 마케팅 네트워크를 해외 주요 에너지회사의 잔사유(미전환유)·공장부지 등 생산역량과 결합한 합작법인(Joint Venture)을 통해 고급 윤활기유 시장 1위 자리를 굳건히 했다.
3) 글로벌 인력을 전체 인력의 60%까지 확대, 미국, 유럽, 인도 등 6개 해외 법인 설립 등 해외 시장에 적합한 인력 및 조직 배치를 통해 마케팅 역량을 키웠다.



SK루브리컨츠1 는 SK이노베이션 계열사 중 수익률이 좋은 알짜기업이다. 뛰어난 기술력과 차별화된 전략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 2조5358억 원, 영업이익 4683억 원을 기록했다. 업계에 따르면 올해 매출 3조1690억 원, 영업이익 5130억 원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SK루브리컨츠의 주력 상품은 ‘유베이스(Yubase)’라는 고급 윤활기유다. 사실 SK루브리컨츠제품 중 우리에게 익숙한 건 지크(ZIC)라는 윤활유 제품이다. 하지만 이 회사 전체 매출에서 지크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13%에 불과하다. 그것도 국내 시장에서 대부분 판매된다. 나머지 87%는 윤활유 제품의 원료인 유베이스가 담당하고 있다. BP(British Petroleum), 셸(Shell) 등 글로벌 정유사들도 프리미엄 윤활유 제품을 만들 때 유베이스를 원료로 사용하고 있다.

과거엔 이런 상황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SK루브리컨츠의 전신인 옛 유공의 윤활유 사업부는 해외에서 모든 원료를 납품받아 제조해 자신의 브랜드를 붙여 판매하는 역할만 담당했다. 윤활유 원료의 핵심인 윤활기유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국내 시장에만 집중해 글로벌 윤활유 업계에선 존재감이 미미했다.

하지만 1995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고급 윤활기유 대량 생산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더니 공격적으로 글로벌 시장을 개척했다. 이들이 주목한 건 틈새시장이었다. 현재 규모가 작더라도 성장 잠재력이 높기 때문에 세계 시장 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시장 규모가 컸지만 이미 포화상태인 일반 윤활기유 시장에 진출하는 대신 시장 가능성은 있지만 누구도 선뜻 적극적으로 공략하지 않았던 고급 윤활기유 개발에 집중한 이유다.



SK루브리컨츠의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생산 능력을 확대하고 글로벌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글로벌 기업들과의 동맹 체제도 구축했다. 인도네시아, 일본, 스페인 등 해외 유력 정유회사와 합작회사를 만든 것이다. SK루브리컨츠의 기술력에 협력사가 보유한 원료와 공장 부지 등 생산력을 더했다. SK루브리컨츠는 이들과 함께 만든 해외 생산기지를 포함해 유베이스를 하루에 총 6만800배럴 생산할 수 있게 됐다. 글로벌 고급 윤활기유 시장의 40% 수준이다. 당분간 어떤 경쟁사도 넘볼 수 없는 리딩 기업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2020년까지 고급 윤활기유 시장이 연평균 5∼8%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SK루브리컨츠의 전망은 더욱 밝다. SK이노베이션에서 분리된 자회사로는 최초로 기업공개(IPO)도 추진 중이다. SK루브리컨츠가 글로벌 시장의 메이저 플레이어로 환골탈태할 수 있었던 비결을 DBR이 분석했다.

 

소매상에서 글로벌 틈새시장 선도주자로

1. 세계 최초 고급 윤활기유 개발

SK루브리컨츠의 전신은 유공(현 SK이노베이션)의 윤활유 사업부다. 1990년대 초까지 이 사업부는 회사 내에서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윤활기유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어 제품을 만드는 핵심 원료를 글로벌 회사에서 수입해 만들었다. 국내 시장 규모도 다른 나라에 비해 작았기 때문에 ‘로컬 소매상’ 정도의 위상만 갖고 있었다.

독점적 지위 덕분에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되던 사업이 위기를 맞은 건 1990년대 초 산업자율화가 이뤄지면서다. 해외 기업들과 손잡고 국내 기업들이 윤활유 시장에 뛰어들었다. 차별화된 기술도, 가격 경쟁력도 없었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국내 시장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특히 윤활기유를 자체 생산할 수 있는 S-oil의 등장은 위협적이었다. 가격 경쟁력이 뒤져 자칫하면 시장 주도권을 빼앗길 상황이었다.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당시 유공 윤활유 사업부는 윤활유 제조에 필요한 핵심 기술을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윤활유의 핵심 원료를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면 생산비용이 크게 줄어든다. SK그룹은 1992년 3000억 원을 투자해 일반적으로 시장에 통용되고 있는 ‘일반 윤활기유’를 생산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생각보다 윤활기유 생산을 위한 투자금이 많이 들었고 윤활기유는 정유사업에 비해 우선순위에서도 밀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구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당초 예상액보다 적은 1200억 원을 투자해 이제껏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고급 윤활기유’ 대량 생산에 도전하겠다고 경영진을 설득했다. 일부 경영진은 반대했다. 당시 일반 윤활기유가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으며 고급 윤활기유 시장은 제대로 형성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굳이 글로벌 회사들도 뛰어들지 않는 사업에 도전하는 건 무모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반면 일각에서는 승산이 있는 게임이란 의견도 나왔다. 이미 글로벌 정유회사들이 장악한 일반 윤활기유 생산 대신 아직은 미미하지만 앞으로 성장성이 큰 고급 윤활기유 시장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는 기존 시장에서 후발 주자로 고전하기보다 새로운 영역에서 1등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게 전략적으로 더 바람직하다는 견해도 설득력을 얻었다.

결국 경영진은 연구진의 손을 들어줬다. 향후 고급 윤활기유에 대한 시장 수요가 늘어날 확률이 높고, 성장 잠재력이 높은 시장에서 선도자로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고급 윤활기유는 점도(Viscosity Index)가 높아 휘발성이 낮아져 윤활유를 오래 쓸 수 있고 자동차의 엔진 마모를 더 효과적으로 줄여준다. 만약 대량 생산이 가능하면 엔진 피로도가 높은 일본 시장이나 환경규제가 엄격한 유럽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였다. 경영진도 미래 시장에 승부를 걸어볼 만한 기술이라고 생각해 투자를 결정했다. 국내 시장의 규모가 미미하더라도 선도적인 투자로 전 세계 윤활기유 시장에서 1%의 점유율만 확보하더라도 무시할 수 없는 규모라고 판단한 것이다.

SK루브리컨츠는 1995년 고급 윤활기유 ‘유베이스’의 대량 생산에 성공했다. 유명 글로벌 정유회사도 도전했다가 경제성 등의 이유로 포기했던 고급 윤활기유 대량 생산에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SK루브리컨츠는 고급 윤활기유 맞춤형 생산 공정을 만들었다. 일반 윤활기유와 고급 윤활기유의 성질이 다르다. 일반 윤활기유는 ‘상압 잔사유’에 탈왁싱 과정을 거쳐 생산된다. 상압 잔사유는 원유를 상압식으로 증류해 휘발유, 경유 등을 생산하고 남은 원유를 뜻한다. 반면 고급 윤활기유는 여기에 공정을 한 단계 더 추가한 잔사유를 활용한다. 많은 정유사들은 상압 잔사유에서 휘발유와 경유를 추가로 생산하기 위해 수소화학분해 과정을 거치는데 이때 생산된 휘발유와 경유를 제외하고 남은 잔사유가 고급 윤활기유 생산에 쓰이는 것이다.

두 윤활기유의 성질이 다르지만 정유사들은 각각의 생산설비를 따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급 윤활기유를 생산할 때에는 일반 윤활기유를 생산할 수 없었다. 고급 윤활기유 수요가 현저히 적기 때문에 그 시간 동안 일반 윤활기유 생산을 하지 못하게 되면 기업 입장에선 큰 손해였다.

SK루브리컨츠는 원유 정제 과정에 윤활기유 정제 과정을 하나로 연결하는 통합 공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일반 윤활기유 생산을 과감히 포기하고 새로운 시장에 대비한 고급 윤활기유 생산에 집중해 맞춤형 생산 공정을 만든 것이다.

휘발유와 경유 등을 추가로 생산하는 공정과 고급 윤활기유를 생산하는 공정에 공통적으로 수소화학분해 공정이 들어가는 점에 착안했다. 일반 윤활기유를 생산하지 않고 고급 윤활기유 생산에 집중한다면 충분히 공정을 연결해 연료유와 고급 윤활기유를 동시에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공정 절차가 끝나더라도 다시 처음 공정으로 돌아갈 수 있는 순환 형태로 설계해 공정을 거친 후에도 남은 잔사유는 다시 연료유 제조 공정으로 돌아가 재활용할 수 있게 했다. SK루브리컨츠는 원유정제 공장이 있는 울산공장에 고급 윤활기유 생산 공정을 추가로 연결했다.이렇게 유베이스가 탄생했다.

윤활기유 생산에서 중요한 공정인 탈왁싱 과정도 다른 기업들과 차별화했다. 경쟁사들은 잔사유에 있는 왁스 성분을 용제(solvent)로 걸러내는 방식을 적용하는 반면 SK루브리컨츠는 촉매제를 이용해 왁스 성분을 다른 성질로 변화시켜 잔사유에서 걸러내지 않아도 됐다. 원료 손실이 적어지니 그만큼 수율이 더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SK루브리컨츠는 통합 공정을 통해 생산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수율도 크게 개선할 수 있었다. 투자비용은 당초 예상했던 1200억 원에서 800억 원으로 줄었다. 기존 1배럴의 고급 기유를 생산하기 위해선 94배럴의 원유가 필요했는데 통합 공정을 이용하면 23배럴의 원유로 충분했다. 이 공정은 23개국에서 특허로 인정받았다.

또한 연구개발과 공장 설비 구축을 한꺼번에 진행해 준비 기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었다. 촉매를 이용한 탈왁싱 공정과정을 실제로 적용하기 위해선 ‘파일럿 테스트(Pilot Test)’가 필요했다. 문제는 파일럿 테스트를 하기 위한 설비를 만드는 데만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SK는 이 과정을 과감하게 아웃소싱으로 돌려 시험 설비를 갖추고 있는 미국 회사에 위탁했다. 여기서 생산된 시제품을 활용해 윤활유 제품을 개발했으며 유베이스 본격 양산 전 고객사들을 다니며 마케팅 활동을 수행했다.

파일럿 테스트가 진행될 동안 울산 공장에는 고급 윤활기유를 만들기 위한 공장이 동시에 건설됐다. 파일럿 테스트와 설계, 조달 및 시공(Engineering, Procurement, Construction, EPC)을 한 번에 진행해 3년 만에 연구개발, 공장 건설을 모두 완료했다.

이후에도 관련 기술 개발은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2000년 고급기유 생산량이 1995년의 2배로 확대되자 SK는 2004년 울산 제2공장을 지었다. 제품라인도 다양화했고, 수율을 더 높일 수 있는 기술을 적용했다. 한때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맑아야 하는 윤활기유가 뿌옇게 된 것이다. 외국 메이저 업체에서 수입해 온 촉매제가 문제였다. SK루브리컨츠 연구진은 핵심 기술을 외부에 의존할 때 이런 리스크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절감했다. 생산공정뿐만 아니라 요소 기술도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정했다.

2004년부터 25명의 연구진, 460억 원의 예산이 투입돼 기약 없는 연구가 시작됐다. 촉매 관련 공정 기술은 전 세계를 통틀어 세 회사만이 가진 희소한 기술이었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불가피했다. 2005년 인도네시아, 스페인 등 해외 생산기지를 확보하면서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생산지에 따라 성질이 조금씩 다른 원유의 특성상 공정 원료와 과정을 세밀하게 변화시켜야 했다. 다양한 조건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보장하는 촉매 기술을 개발해야 했다. 그렇게 1000번도 넘는 실패가 반복됐다.

2011년 SK루브리컨츠는 촉매제 개발에 성공했다. 엑손모빌, 셰브런, 셸에 이어 세계적으로 윤활기유 촉매 기술을 보유한 4번째 회사로 이름을 올렸다.



2. 새로운 윤활기유 마케팅

고급 윤활기유를 개발했다고 장밋빛 미래가 펼쳐진 건 아니었다. 시장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일반 윤활기유로도 충분한데 굳이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하면서 고급 윤활기유를 살 필요가 없었다.

SK루브리컨츠는 우선 유럽시장 공략에 나섰다. 환경 규제에 민감하고 차량 엔진이 다른 국가 자동차보다 작으나 출력이 높아 가동될 때 엔진 마모가 클 수밖에 없는 유럽에선 고급 윤활기유가 먹힐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시장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유럽에선 국가와 기업 인지도 모두 낮았다. 윤활기유 해외 마케팅을 담당했던 한 직원은 ‘남한 출신이냐, 북한 출신이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유럽 시장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다. 같은 유럽연합(EU) 내 국가라도 각 나라의 규제, 문화 등이 다른데 그저 막연하게 같은 시장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한 것이다.

시장이 쉽게 열리지 않자 실무진은 새로운 방법을 고안했다. 유베이스를 활용해 윤활유를 제조할 수 있는 배합식을 같이 제공하는 게 해법이었다. 윤활기유를 생산하는 것만큼 이 원료를 윤활유 제품으로 만드는 데도 상당한 기술력이 필요하다. 어떤 첨가제를 써야 하고, 어떤 상태에서, 어떤 비율로 윤활기유와 결합해야 하는지는 그 회사만이 지닌 독점적 노하우이자 기술이기 때문이다. 적절한 배합식을 찾아내고, 그 배합식이 안전하다는 것을 여러 시험기관으로부터 인증도 받아야 한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원유의 상태, 공정 과정에 따라 배합식도 달라지기 때문에 고객사에 맞는 배합식을 제공하려면 수십, 수백 가지의 배합식을 개발해 인증을 받아야 한다. SK루브리컨츠의 비용 부담이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었다.

내부에선 논란이 제기됐다. 여러 가지 배합식을 개발할 때 드는 비용을 감수할 필요가 있느냐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다. 실제로 이 전략이 효과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경영진은 실무진의 판단을 믿었다. 실무진은 유럽 국가를 찾아다니며 배합식 비용을 줄인 만큼 전체 비용이 절감되니 유베이스를 써보자며 적극적인 마케팅에 나섰다.

결과는 놀라웠다. SK루브리컨츠는 1995년 가을, 일반 윤활기유보다 두 배인 배럴당 100달러로 벨기에 등 5개국 기업과 30만 배럴 공급 계약을 맺었다. 아주 적은 규모였지만 이 거래가 글로벌 시장 확대의 물꼬를 터줬다. 이듬해엔 일본과 미국에 진출했다. 3년간 총 180만 배럴을 수출할 수 있게 됐다. 이제는 BP, 셸, 엑손모빌 등 해외 메이저사 윤활유에도 유베이스가 들어간다.

SK루브리컨츠는 현재 300여 개가 넘는 윤활유 배합식을 보유하고 있다. 뒤늦게 고급 윤활기유 시장에 합류한 경쟁사들보다 압도적인 수치다. 일반 윤활기유에는 없었던 새로운 마케팅이었다. 배합식을 함께 제공하는 것은 이제 다른 경쟁사들도 벤치마킹해 적용하고 있다. 고급 윤활기유 시장의 새로운 ‘스탠더드’가 된 것이다.

조용래 SK이노베이션 윤활유기술 Lab장은 “우리가 새로운 기술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객사를 유인할 수 있는 매력적인 제안이 필요했다. 제품뿐만 아니라 기술까지 제공한다는 새로운 방식을 생각해냈다. 한마디로 기술을 마케팅한 것이다. 고객사들도 윤활기유 자체는 원유와 같이 거래하는 트레이딩 제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접근하는 방식을 매우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생소한 방식임에도 경영진이 실무진의 판단을 믿고 신속하게 결정을 내려준 것이 시장 개척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JV를 통한 글로벌 생산기지 확보

SK루브리컨츠는 고급 윤활기유 시장이 형성된 이후 시장 내에서 40%의 점유율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경쟁사들이 2019년 이후 당분간 고급 윤활기유 생산 설비를 확대하기 어렵다. 시장은 계속 성장하고 있는데 경쟁사들이 단기간에 생산 설비를 확충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반면 SK루브리컨츠는 2006년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2∼3년꼴로 해외에 생산기지를 공격적으로 확대했다.



쉬운 여정은 아니었다. 미미했던 윤활기유 내 고급 윤활기유 시장점유율은 2010년엔 10%까지 성장했다. 글로벌 시장 조사업체인 클라인(Kline)이 2016년에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까지 고급 윤활기유 수요는 전체 윤활기유 시장의 20%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고급 윤활기유 시장의 잠재력이 확인되자 경쟁사들도 본격적으로 이 시장에 진입했다.





SK루브리컨츠는 새로운 고민에 봉착했다. 만약 늘어나는 수요에 맞춰 공급을 하지 못한다면 어렵게 확보한 고급 윤활기유 시장의 주도권을 다른 경쟁사에 빼앗길 수도 있다는 우려가 생긴 것이다. 경쟁사들이 본격적으로 시장에 진입하기 전에 생산량을 늘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당장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2005년을 기점으로 울산 제 1, 2공장은 이미 생산 능력을 꽉 채우고 있었고 SK루브리컨츠가 확보할 수 있는 잔사유도 한계에 달했다. SK에너지가 휘발유와 경유 등을 생산하고 남은 잔사유를 주로 사용했는데 이 양으로는 세계 시장 수요를 충당하기 어려웠다.



SK루브리컨츠는 해외 글로벌 기업과의 합작투자(Joint Venture)로 눈을 돌렸다. 해외 정유사가 제공하는 공장부지와 잔사유를 활용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해외에 생산기지를 확보할 경우 운송비를 줄이는 것은 물론 해외 판매 경로를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각 회사가 서로가 가진 자원을 결합한 일종의 동맹체제를 구축해 고급 윤활기유 시장 내 강력한 연합군 체제를 만든 셈이다.

글로벌 생산기지 확보 움직임은 2006년부터 공격적으로 이뤄졌다. 첫 파트너는 인도네시아 국영 석유회사인 페르타미나(Pertamina)였다. 두 회사가 2008년 인도네시아 두마이에 세운 공장에서 하루 약 9000배럴의 고급 윤활기유가 생산됐다. 2011년 일본 JXTG(구 JX)와 손잡고 울산에 증설한 제3공장에선 2012년부터 하루 2만6000배럴, 2012년 스페인 렙솔(Repsol)과 협력해 스페인 카르타헤나에 지은 공장에선 2014년부터 하루 1만3300배럴의 고급 윤활기유가 생산되고 있다. 기존 울산공장에서 생산한 윤활기유를 유럽 암스테르담 판매소까지 보내는 데 30일이 걸렸지만 카르테헤나 공장이 생기면서 저렴한 비용으로 빠른 운송이 가능해졌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 낸 파트너십이었다. 무엇보다 이해관계가 맞는 업체를 찾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었다. 지역마다 생산되는 원유의 특질이 다 다르기 때문에 실제로 SK루브리컨츠의 공정 과정을 적용해 윤활기유 생산이 가능한지, 어떤 배합식을 사용해야 하는지 등을 따져봐야 했다. 조건에 맞는 해외 기업을 추려 협력 의사를 타진하는 데만 2년의 시간이 걸렸다. 파트너사를 확보한 이후에도 난관은 남아 있었다. 파트너사들과 ‘누가 사업의 주도권을 갖는가’를 두고 치열한 협상이 펼쳐졌다. 특히 대부분 SK루브리컨츠보다 덩치가 큰 글로벌 기업들이었기 때문에 쉽게 사업 주도권을 빼앗기려 하지 않았다.

SK루브리컨츠는 끈질기게 설득하며 사업 주도권을 얻어냈다. 크게 3가지 점을 들며 협력사들을 설득했다. 시장이 계속 성장하는 만큼 확실하게 수익성을 보장할 수 있고, 자사가 보유한 독자적인 기술이 있기 때문에 공정상 리스크도 최소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미 구축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마케팅 역량도 갖춰 협력사가 큰 노력이나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강하게 어필했다.

집요한 협상 끝에 SK루브리컨츠는 대부분의 협력사 지분 70% 정도를 확보해 지배주주가 될 수 있었다. SK루브리컨츠가 사업의 핵심 요소를 갖추고 있었던 만큼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점했기 때문이다. 파트너사 입장에서도 고급 윤활기유 사업의 전망이 밝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한걸음 양보할 수 있었다.

SK루브리컨츠는 협력사와의 신뢰를 구축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스페인 렙솔과의 파트너십이 대표적 예다. SK루브리컨츠가 렙솔과의 합작회사 설립을 결정한 것은 2010년 무렵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스페인을 비롯한 남유럽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때였다. 다른 해외 기업들이 투자를 철회할 때 SK루브리컨츠는 파트너와의 약속을 묵묵히 지켰다. 현지 언론에서 SK루브리컨츠는 스페인이 어려울 때 배신하지 않은 고마운 기업으로 소개됐다.

SK루브리컨츠는 일본 내 최대 에너지 기업인 JXTG와도 합작 법인 설립을 추진했다. 2012년 이 두 기업은 울산에 제3 윤활기유 공장을 설립했다. 일본과의 합작회사는 일본이 아닌 한국에 세웠는데 이는 세 가지 이유에서다. 일단 일본 내에는 지진 위험 때문에 공장이 소규모로 여러 곳에 산재돼 있어 대규모 윤활기유 공장을 만들기 어렵다. 게다가 JXTG는 SK이노베이션의 또 다른 자회사인 SK화학과 이미 합작투자해 울산에 공장을 가동하고 있었다. 인력 관리, 생산 관리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울산에 공장을 세우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또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워 미전환유를 운송하는 데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들어 굳이 일본 현지에 공장을 설립할 필요가 없었다.

공장 설립 이후에도 SK에너지와 JXTG는 위기 상황에서 서로를 지원하며 신뢰 관계를 공고히 했다. 2012년 동일본 지진으로 JXTG가 공장 가동이 중단되면서 위기를 겪었다. 그때 흔쾌히 SK루브리컨츠가 나서서 이들을 도왔다. JX에너지가 비축했던 원유를 SK루브리컨츠가 대신 보관해줬다. JX에너지가 생산이 중단돼 거래처에 제품을 납품하기 어렵게 되자 대신 제품을 공급했다.

이외에도 SK루브리컨츠는 파트너 회사와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하고 인적 교류를 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방침도 마련했다. 합작 법인의 대표이사는 2∼3년마다 번갈아가면서 맡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각 공장의 재무와 엔지니어를 담당하는 직원은 SK루브리컨츠에서 파견해 현지 직원들과 업무를 조율한다. 또한 마케팅, 생산, 연구(Marketing, Production, Research, MPR) 관련 미팅도 합작사와 함께 매년 11월마다 3일간 진행하고 있다. 매년 합작회사 직원들이 서로의 회사를 방문하는 ‘간친회’를 열기도 한다. 간친회에는 핵심 경영진과 실무진이 함께 모여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다.

서상혁 SK루브리컨츠 윤활기유팀 부장은 “협력사와의 관계가 사업을 지속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익보다 협력사가 우리와 협력했을 때 어떠한 이득을 취할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고 접근했다. 또한 핵심 기술, 마케팅 노하우 등 우리가 이 프로젝트에서 확실하게 협력사에 줄 수 있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지분율 등의 문제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협상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수년간 협력사와 인적 교류를 진행했고, 투명하게 의사소통을 하다 보니 차츰 신뢰가 쌓였다. 이제는 협력사가 우리가 겪는 어려움을 알고 먼저 우리에게 해결책을 제시하고 도와주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한때 부침도 있었다. 2011년 말 SK루브리컨츠가 울산 제3공장 가동을 시작했을 때였다. 경쟁사들의 고급 윤활기유 생산이 크게 늘어나면서 윤활기유 스프레드(윤활기유 재료와 제품 사이의 가격 차)가 크게 떨어진 것이다. 공급 과잉 현상으로 전체 공장 가동률도 떨어졌다. 자연스럽게 SK루브리컨츠 실적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회사 안팎에서 공격적인 투자에 대한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SK루브리컨츠 임직원들은 마음을 다잡고 때를 기다렸다. 분명히 시장이 성장할 것이라고 믿었다. 영업이익은 줄었지만 고급 윤활기유 매출은 예상 범위 안에서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4년 완공 예정이었던 스페인 공장도 차질 없이 추진된 이유다.

2013년 말부터 고급 윤활기유 시장이 회복되더니 2014년부터 성장세를 기록했다. 개발도상국의 자동차 소비가 늘어나고 윤활기유 거래가격이 회복된 덕분이다. 이미 생산 역량을 확충했던 SK루브리컨츠는 빠르게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글로벌 DNA를 심다

생산량을 확보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제품을 잘 판매하는 것이다. 해외 매출이 절대적인 비율을 차지하는 만큼 SK루브리컨츠는 해외 마케팅을 위한 인프라 구축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3개 국가에 5개 공장 외에 중국 베이징을 시작으로 러시아 모스크바, 미국 휴스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일본 도쿄, 인도 뉴델리 등 6개 지역에 현지 판매 법인을 세웠다.

글로벌 네트워크에 걸맞게 인력도 구성됐다. SK루브리컨츠에는 국내 인력보다 해외 인력이 더 많다. 전체 659명 중 391명이 해외 인력이다. 게다가 과장 직급 이상의 절반은 해외에서 3년 이상 체류하며 윤활기유와 윤활유 사업을 직접 경험했다. 직접 마케팅을 해외에서 해봤기 때문에 관리자가 됐을 때에도 현장에 나가 있는 실무진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현지 시장 공략에 도움을 주는 방안을 고민할 수 있다.

SK루브리컨츠는 현지 인력을 중시한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선진국 시장과 제도나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현지 시장의 고유한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SK루브리컨츠가 현지 시장에 익숙한 인력을 채용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다. 그중에서도 영업을 담당하는 현지 인력에겐 최대한 자율권을 부여한다. 본사에서 파견된 한국 직원을 보조하는 수준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자신의 영업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현지 법인의 기술 담당 매니저들은 매해 본사가 주재하는 글로벌기술위원회(Global Technical Committee)에 참여한다. 본사 연구개발(R&D)센터와 함께 글로벌 기술 트렌드와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SK루브리컨츠는 2009년 SK이노베이션에서 자회사로 분리되면서 글로벌 마케팅 역량을 더욱 확충할 수 있었다. 보다 빠르고 신속한 의사결정과 투자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유연한 조직 문화 구축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 환경 변화에 맞춰 새로운 시도를 할 때 담당자의 의사결정 권한을 최대한 존중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영진이 빠른 결정을 내려줬다. 조용래 Lab장은 “윤활기유 사업 자체는 불확실성이 매우 높아 새로운 방법을 항상 시도해야 했다”며 “그럴 때마다 내부 반발이 많았지만 회사에선 담당자의 말을 먼저 듣고 존중해줬다”고 말했다.




보고를 위한 보고, 회의를 위한 회의가 없어진 지도 오래됐다. 해외 현장 위주로 비즈니스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본사 관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한다고 해서 좋은 사업 전략이 나오기 어려운 구조라는 판단에서다. 실무자들이 현장에서 경험을 쌓고 그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시도를 하나라도 더 해보는 것이 훨씬 보탬이 된다. 지금도 대리, 과장급 실무진이 해외에 파견을 나가 경험을 쌓고 해외 마케팅을 주도한다.

서상혁 SK루브리컨츠 기유사업팀 부장은 “우리는 마이너에서 성장했고, 그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직원들끼리 그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며 “적극적으로 시장 확대를 위한 방안을 고민하고 우리가 뒤처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성공 요인 및 시사점

최근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BREXIT),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무역주의, 한중 간 사드 갈등으로 우리 기업들의 대외 사업 여건이 악화되고 있다. 국내 시장 역시 일부 주력 분야를 제외하곤 회복이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고, 소비심리 역시 호전되지 않고 있다.

많은 한국 기업들의 관심사는 대외환경의 불확실성을 타개할 다변화된 글로벌 전략 수립에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기업들이 수출일변도의 글로벌 전략을 고도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계 시장 진출 의지는 강하지만 경험 부족과 실패에 따른 리스크 감내가 만만치 않은 과제다. SK루브리컨츠의 해외 시장 진출 사례는 비슷한 길을 걸어야 할 많은 다른 기업들에 참고할 만한 표본을 제시했다는 데 의미가 크다.

국제경영 분야에서 해외 사업의 성공을 설명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틀은 [그림 1]로 표현될 수 있다. 즉 해당 기업이 처한 국제 환경 또는 목표로 삼고 있는 시장이나 산업의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이를 반영한 경쟁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그 후에는 최적의 기업 아키텍처(조직, 통제, 문화, 프로세스, 사람 관리 등)를 수립해 실행에 옮길 운영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이른바 시장상황, 전략, 운영이 서로 일관되고 적합하게 맞물려야 한다는 전략적 적합성(Strategic fit)을 성공적인 국제경영의 전제조건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시장 상황이 변함에 따라 전략과 운영 역시 새로운 현실에 지속적으로 맞춰가야 한다.


매우 당연한 듯 보이지만 실상은 대부분의 기업들이 제시한 각 꼭짓점의 항목들이 전체적으로 서로 적합하지 않아 기대에 못 미치는 실적을 내거나 시장에서 사라지고 있다.

첫 단계는 시장의 상황을 명확히 파악하고 이에 따른 5개 항목의 최적안을 도출하는 것인데 이 과정부터가 순탄치 않다. SK루브리컨츠는 불확실성과 시장성이 혼재된 고급 윤활기유시장에 사활을 걸었다. 기술력을 앞세운 시장 선점 전략을 세우고 조직구조를 유연하게 재구성했다. 아울러 기술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사람과 기술에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고 태생적 글로벌 기업의 리더십을 발휘해 기술마케팅이라는 분야를 개척했다.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과감한 현지인 핵심 인력 등용, 신뢰에 기반한 파트너사와의 협력 시스템 등 5개 항목이 서로 적합하게 조화를 이뤄냈다.

이러한 관점에서 SK루브리컨츠의 괄목할 만한 성과는 크게 네 가지 측면에서 짚어볼 수 있다.

먼저 SK루브리컨츠의 빠른 판단과 과감하고 일관된 추진력을 들 수 있다. 윤활기유 산업은 반도체·패널·조선·화학산업 등과 함께 대규모 투자가 요구되는 기간산업이다. 이 산업들의 특징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생산역량 확보가 사업성패의 핵심 요소이다. 이렇다 보니 업체 간 증설 경쟁이 빈번하고 공급량과 시장의 수요가 맞물리면서 수급이 늘 오르락내리락하는 비즈니스 사이클을 형성한다. 따라서 이를 사전에 예측하고 적절한(Timely) 생산량, 투자, 기술혁신 등이 선제적으로 감행될 경우 선발자로서의 이익을 크게 누릴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할 경우 시장에서 완전히 뒤처져버리는 승자독식의 산업구조를 띠고 있다.

1990년대 당시의 고급 윤활기유 시장은 산업생명주기(Industry Life Cycle)상 태동기에 있었다. 브랜드 충성도, 제품의 완성도가 완전한 기업이 없었다. 따라서 기술지식과 혁신을 바탕으로 선점자 우위(First mover advantage) 전략을 제대로 실현한다면 고성장과 고수익이 가능한 블루오션 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 SK루브리컨츠가 고급 윤활기유 시장에서 독자기술로 해외 시장을 우선적으로 공략하겠다는 결단은 선점자 우위전략 측면에서 매우 유효하고 시의적절한 판단이었다.

두 번째, SK루브리컨츠는 ‘태생적 글로벌 기업’의 독특한 마케팅 역량을 발휘했다. 태생적 글로벌 기업은 축적된 내재적 역량과 기술을 바탕으로 시장 진입 초기 단계부터 해외 시장을 우선적으로 공략해 경쟁우위를 확보하려는 기술집약적 중소기업을 지칭한다.

최근 북유럽 태생적 글로벌 기업의 글로벌 전략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해당 시장을 세분화해 자신만의 브랜드로 차별화된 가격정책, 홍보전략, 현지화전략을 공격적으로 구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시장 진입 초기부터 빠른 침투(Speed-to-Market)를 가능케 하는 핵심 요소다.

SK루브리컨츠의 해외 시장 침투전략 역시 태생적 글로벌 기업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SK루브리컨츠는 중소기업은 아니지만 단순히 원자재를 수입해서 재판매하는 기존 사업을 과감히 접고 자체 기술로 개발한 고급 윤활기유를 통해 해외 시장을 우선적으로 공략하려는 전략적 포지셔닝을 취했다. 브랜드 인지도가 전무한 유럽을 상대로 고객사의 기호에 맞는 배합식을 개발해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는 ‘제품이 아닌 기술을 제공한다’는 이 회사만의 독특한 기술마케팅이 불모지와 다름없는 해외 시장에 빠르게 침투해 확장할 수 있게 한 비결이 됐다.

세 번째, SK루브리컨츠 글로벌 사업 전략의 백미는 해외 시장에서 선발자 이익을 공고히 하고 진입장벽을 쌓기 위해 해외 기업과의 JV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대규모 장치산업 특성상 타 기업과 협력을 통해 진입장벽을 쌓는 방안은 투자비용과 리스크를 경감하는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전략적 옵션은 아니다. 부작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글로벌 파트너링을 통한 해외 사업 수행 시 가장 근본이 되는 핵심 성패요소는 협력 회사 간에 가치사슬상 어떠한 부분을 서로 연결해야 상호보완이 가능하고 시너지 창출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다. 그 외에도 파트너 선택의 판단 기준은 무엇인지, 파트너와 지분 구성과 관리 방식 등 협력구조는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 신뢰는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지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래서 최근 들어 전략적 제휴나 합작투자를 얼마나 잘 이행해내는가 하는 협력역량(Alliance capability)이 기업의 주요 핵심 역량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협력에 대한 경험과 노하우도 없었던 SK루브리컨츠가 해외 합작사업을 추진하면서 초점을 뒀던 것도 앞서 언급한 핵심 사항들이다. 글로벌 운영을 효율화하기 위한 최적의 파트너를 입지우위(Locational advantage)에 기반한 국가의 최고 기업들과 적극적으로 협력관계를 수립했다. 기술, 마케팅, 재무는 SK루브리컨츠가, 생산은 파트너기업이 주도하는 분담방식을 선택했다. 파트너와의 신뢰형성은 태스크포스팀과 같은 실무자 수준에서의 긴밀한 상시소통, 번갈아 관리를 맡는 순환관리(Rotating management)를 통해 상호불신을 해소했다. 무엇보다 갈등을 최소화하고 신뢰를 형성할 수 있는 토대는 기존 연구들이 이미 제시한 대로 서로 무엇을 얻을지를 명확히 한 데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SK루브리컨츠의 유연한 조직구조는 불확실한 시장상황에서 빠른 의사결정, 과감한 전략적 선택과 실행을 가능케 한 토대가 됐다. 유연한 조직구조란 실무자들에게 의사결정 권한을 위임해 책임경영을 할 수 있게 하는 조직구조다. 이 관리 방식을 통해 시장 상황이 불확실하거나 기업이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분산적 조직으로 전환해 소비자의 요구에 빠르게 대응하고 현장 중심의 빠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SK루브리컨츠 경영진은 공정혁신, 시장개척, 기술마케팅 등 가보지 않았던 길은 선택함에 있어 연구진, 실무진의 판단을 신뢰하고 인내하는 묘미를 발휘했다. 해외 파트너와의 원활한 소통, 현지인들의 적극적인 고용과 전권을 위임해 업무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하려는 노력 역시 유연한 조직 구조가 아니면 쉽게 실천할 수 없는 사안이다.



DBR mini box I

SK루브리컨츠 연혁

SK루브리컨츠의 전신은 1962년 대한석유공사 윤활유 사업부다. SK그룹(구 선경)은 1980년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해 유공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1998년 유공은 SK주식회사로 사명이 바뀐 후 2007년엔 SK주식회사에서 SK에너지로 기업 분할됐다. 2009년 SK에너지 윤활유 사업부는 SK루브리컨츠라는 이름으로 독립 경영을 시작했다. 2010년부터 SK에너지(정유사업 부문), SK종합화학(화학사업)과 함께 SK이노베이션 자회사로 있다. 업계에 따르면 현재 SK이노베이션 100% 자회사인 SK루브리컨츠는 내년 상반기 증시 상장을 추진한다.
 



DBR mini box II

윤활기유와 윤활유

우리에게 익숙한 건 자동차 엔진 마모를 줄이기 위해 넣는 윤활유다. 그런데 윤활유의 품질을 결정하는 주원료는 윤활기유다. 윤활기유는 원유를 정제해 휘발유와 경유 등의 제품을 생산하고 남은 원유로 만든다. 이때 쓰는 원유를 잔사유 혹은 미전환유라고 부른다. 윤활기유 80%에 첨가제 20%를 넣으면 윤활유 제품이 완성된다.

윤활기유는 통상 그룹1, 그룹2, 그룹3, 그룹4, 그룹5 등 5개 그룹으로 구성된다. 그룹을 나누는 기준은 황 함량과 탄화수소다. 이 성분이 많을수록 점도지수(Viscosity Index)가 높아 더 높은 그룹의 고급 윤활기유로 분류된다. 가장 많이 쓰이는 윤활기유는 그룹 1과 2에 해당하는 일반기유다. 그룹 3이 고급 자동차 등에 쓰이는 고급 윤활기유에 속한다. 그룹4와 5는 산업이나 특수 목적의 윤활유를 만들 때 쓰인다. 이 기사에선 그룹3 윤활기유를 ‘고급 윤활기유’로 통칭한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정하영(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경영학부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이미영 기자 mylee03@donga.com   류주한 한양대 국제학부 교수 jhryoo@hanyang.ac.kr

류주한 교수는 미국 뉴욕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대에서 석사(국제경영학), 런던정경대에서 박사(경영전략) 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United M&A, 삼성전자, 외교통상부에서 해외 M&A 및 투자유치, 해외직접투자실무 및 IR, 정책홍보 등의 업무를 수행한 바 있으며 국내외 학술저널 등에 기술벤처, 해외진출 전략, 전략적 제휴, PMI 관련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SR1. 현대자동차의 대형 SUV ‘팰리세이드’

넓고 럭셔리한데 가성비까지
밀레니얼 대디들이 지갑을 열다

287호 (2019년 1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2019년 SUV 돌풍을 일으킨 현대차 팰리세이드의 성공 비결은 다음과 같다.

1. SUV를 군용차에서 패밀리카로 재정의함으로써 주 타깃층인 밀레니얼 대디들의 개성과 욕구를 충족시켰다.

2. 가성비를 높임으로써 소비자들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SUV시장의 저변을 확대했다.

3. BTS를 활용한 스토리텔링으로 SUV가 중장년층 혹은 다세대 가족을 위한 차량이라는 편견을 깨고 다양한 형태의 가족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차량이라는 점을 어필했다.

“가족을 정의하는 것은 무엇입니까(What defines a family)?”

말끔하게 차려입은 7명의 방탄소년단(BTS) 멤버들은 흑백 톤의 영상에서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우리는 서로 매우 다르지만 함께 있을 때 강하다는 것을 느껴요. 그게 바로 가족이죠.” 2018년 11월 28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LA 모터쇼’의 현대자동차 전시관에서 상영된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팰리세이드의 첫 홍보 영상이다. 방탄소년단은 신차를 보여주는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1분37초 분량의 이 영상에서 신차의 모습이 제대로 나오는 장면은 불과 4초에 불과하다. 방탄소년단이 영상 말미에 “팰리세이드”라고 한 번 외치지 않았다면 신차의 이름을 알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현대차는 방탄소년단의 입을 빌려 신차를 소개하는 대신에 팰리세이드에 탈 수 있는 가족의 새로운 정의를 제시했다. 가족이 많든 적든 팰리세이드의 넓은 공간을 맘껏 활용해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이 시대의 새로운 ‘패밀리카’가 대형 SUV라는 새로운 공식을 방탄소년단의 입을 빌려 각인한 것이다. 현대차가 방탄소년단과 함께 가족 등을 키워드로 공개한 팰리세이드 영상 9편은 총 320만 건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하며 북미 지역에서 큰 화제가 됐다.


현대차가 국내에서 가장 큰 SUV 모델로 선보인 팰리세이드는 2019년 10월 누적 기준 국내 시장에서 4만2794대가 팔렸다. 한 해가 2개월 남은 상황에서 현대차는 팰리세이드만으로 지난해 연간 대형 SUV 전체 판매량 2만8186대를 훌쩍 넘겼다. 한때는 대기 물량만 3만5000대에 달해 소비자들이 주문한 뒤 10개월가량을 기다려야만 했다. 기다리다 지친 고객들의 사전 계약 취소 물량만 2만1000대를 넘어서는 이례적인 기록도 남겼다. 팰리세이드는 국내 시장을 넘어 대형 SUV 차량 경쟁이 가장 치열한 북미 지역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팰리세이드는 올해 6월 미국 출시 뒤 월평균 4000대 이상 팔리며 10월까지 1만7814대의 판매량을 달성했다. 경기 불황과 공유경제 확산으로 차량 수요가 갈수록 줄고 있는 가운데 팰리세이드는 국산 완성차가 한국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

현대차가 팰리세이드로 대형 SUV 열풍을 일으키자 다른 완성차 업체도 대응에 나섰다. 한국GM은 미국 공장에서 생산된 차량을 국내 시장에 수입하는 형태로 올해 9월 쉐보레의 대형 SUV ‘트래버스’를 출시했다. 기아차는 같은 달 대형 SUV ‘모하비’의 두 번째 부분 변경 모델을 3년 만에 선보였다. 팰리세이드를 계기로 대형 SUV는 완성차 업체들이 필수적으로 판매해야 하는 차종이 됐다.

군용차에서 패밀리카로, SUV의 환골탈태

SUV는 국내 완성차 시장에서 대세로 자리 잡았다. SUV의 국내 승용차 시장에서 판매 비중은 지난해 기준으로 47%에 이른다. 2010년대 이전에는 SUV 판매 비중이 20% 수준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성장세를 이어왔다. 특히 올해는 SUV 판매 비중이 절반을 훌쩍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국내 완성차 시장에서 SUV의 인기가 일시적인 트렌드가 아닌 대세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사실 SUV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군용차로 개발했다. 산이나 사막 등 차량 주행이 어려운 악조건에서도 튼튼하게 전장을 누빌 수 있는 차량이 SUV다. 초기 SUV가 어떤 형태였는지는 현대차의 ‘1세대 갤로퍼(1991년 출시)’를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다. 군인처럼 ‘각(角)’이 잡혀 어떠한 환경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을 것 같은 이미지가 직선적인 외관 디자인으로 표현됐다. 갤로퍼는 차량의 뼈대 격인 프레임 위에 엔진 등을 장착해 차체를 올린 이른바 ‘프레임 보디’ 형태로 설계됐다. 프레임 보디는 튼튼하고 힘이 좋지만 차량의 무게가 올라가 연료 효율성이 떨어지는 구조로 평가됐다. 군용차의 느낌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후 싼타페(2000년)와 투싼(2004년) 등 준중형 SUV 출시를 통해 노하우를 쌓은 현대차는 차량을 가벼운 상자 형태로 만든 뒤 엔진 등을 얹어 제작하는 ‘모노코크 보디’ 기법을 도입했다. 모노코크 보디는 항공기를 제조할 때 적용하는 방식으로 차량의 무게를 가볍게 할 수 있어 프레임 보디보다 연료 효율성이 높다. 팰리세이드의 복합 연비는 2.2 디젤 엔진 모델 기준으로 리터당 9.6㎞까지 나온다. SUV 모델의 복합 연비가 리터당 10㎞를 한참 밑돌았던 2000년대 초반과 비교해 상당한 발전을 이뤄낸 것이다.

연비 걱정이 해결되면서 SUV는 단순히 험준한 도로를 달리기 위한 차량이 아니라 도심에서도 안정적으로 주행할 수 있는 차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차량 높이가 세단보다 높은 SUV가 운전자의 시야를 더 트여준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과 교수는 “과거에는 운전자들이 외부에 보여주기 위해 품위 있는 느낌의 세단을 선호했다면 이제는 삶의 무게중심을 일보다 여가에 두는 문화가 확산하면서 가족 모두가 차량 내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실용적인 형태의 SUV를 더 선호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갤로퍼의 등장 이후 27년이 지난 2018년 말 출시된 팰리세이드는 현대차 SUV의 완성형 모델에 가깝다. 외부 디자인부터 그물망 형태의 정면 라디에이터(냉각기) 대형 그릴의 무늬를 키우며 강인한 인상을 주는 동시에 곡선과 직선이 어우러진 측면이 갤로퍼와 큰 차이를 보인다. 젊은 세대가 좋아할 만한 세련미를 갖춘 셈이다. 구민철 현대차 외장디자인실장은 “가족을 지켜주는 대형 SUV라는 인상을 정면 라디에이터 등을 통해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밀레니얼 대디, 넓은 공간에 반하다

그렇다면 왜 소비자들은 SUV 중에서도 대형 모델인 팰리세이드에 열광했을까. 가장 큰 이유로 여유로운 공간을 꼽을 수 있다. 팰리세이드의 차량 길이는 약 5m(전장 4980㎜)로 최대 8인까지 탈 수 있다. 현대차가 보유한 SUV 중 가장 크다. 이광국 현대차 국내영업본부장 부사장은 “현대인들은 나만의 공간을 의미하는 ‘케렌시아(스트레스와 피로를 풀며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영역)’를 원하고 있다”면서 “팰리세이드는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삶에 가치를 더하는 ‘당신만의 영역’을 제공한다”고 강조했다. 팰리세이드에 1명이 타든, 7명이 타든 각자의 좌석(영역)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차량으로 설계했다는 의미다.

팰리세이드 개발팀은 2015년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사전 조사를 진행하면서 공간이 넓은 대형 SUV를 원하는 소비층이 ‘밀레니얼 대디’라는 점을 발견했다. 밀레니얼 대디는 1980, 1990년대 태어난, 30대부터 40대 초반까지의 젊은 아빠를 지칭한다. 밀레니얼 대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다. 비싼 집을 못 사는 대신 차에 투자하고, 돈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해외여행을 가는 것 또한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육아에도 적극적이다. 쉬는 날에는 차를 몰고 아이들과 함께 놀러 가는 것이 밀레니얼 대디의 중요한 일과다. 유모차 등 유아용품을 넣거나 골프백, 캠핑 장비 등 여가활동에 필요한 도구를 충분히 넣을 수 있는 대형 SUV는 밀레니얼 대디에게 필수품이다.

팰리세이드는 3열 좌석을 접으면 트렁크 화물 적재 용량이 1297리터, 2열까지 접으면 최대 2447리터가 된다. 좌석을 접는 것도 버튼 하나만으로 가능하도록 설계해 승객의 편의성을 높였다. 아이들과 아내를 태우고 나서 각종 여가활동 도구를 넣어도 넉넉할 정도로 넓은 공간을 자랑한다.

현대차 팰리세이드 개발팀은 팰리세이드의 적재 용량에 초점을 맞추면서 특히 더 많은 가족이 탈 경우를 대비해 차량을 설계했다. 대형 SUV에서 승차감이 가장 나쁜 자리인 3열 좌석까지도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는 작업에 주력한 것이다. 3열까지 좌석 곳곳에 컵 받침대를 16개나 설치하고 스마트 기기를 충전할 수 있는 범용직렬버스(USB) 포트를 6개 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은 지난해 8월 완성 단계의 팰리세이드를 시승해보고 공간이 넓어진 데다 모든 좌석의 안정감이 높아진 점에 대해 만족감을 보였다고 한다.

실제로 밀레니얼 대디를 공략하는 현대차의 전략은 적중했다. 현대차가 지난해 11월29일부터 8일간 팰리세이드 사전 계약 물량 2만506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남성 비중이 85.2%로 싼타페나 베라크루즈보다 5%포인트 높았다. 또 30, 40대 비중은 58.1%로 집계됐다. 렉스턴이나 모하비 등 기존 국산 대형 SUV가 30, 40대 구매 비중이 50%를 밑돌고 50대의 선택을 상대적으로 더 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구매 연령대가 꽤 낮아진 것이다.


매버릭 패밀리를 위한 기술 차별화

팰리세이드가 지향한 또 다른 핵심 가치는 ‘럭셔리’다. 미국의 유명 자동차 전문가 댄 닐(Dan Neil)은 올해 8월 월스트리트저널의 연재 칼럼에서 팰리세이드의 첨단 운전자 지원 시스템과 편의 기능을 거론하며 “실내는 말끔하고 정숙하며 최고급 사양까지 가득 품고 있으니 럭셔리 SUV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극찬했다. 미국의 유명 자동차 전문지 카앤드라이버 역시 현지에 출시된 7, 8인승 SUV 5종(기아차 텔루라이드, 마쓰다 CX-9, 포드 익스플로러, 뷰익 엔클레이브)을 비교 평가하며 팰리세이드를 두고 “고객이 원하는 모든 기능을 담았다”며 “넉넉한 공간과 고급스러운 실내 디자인, 준수한 주행 성능이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팰리세이드에는 실제 각종 첨단 운전자 지원 시스템(ADAS)과 정보통신기술(ICT)이 탑재됐다. 고속도로뿐만 아니라 일반 도로에서도 차로 중앙으로 주행하도록 도와주는 ‘차로 유지 보조(LFA)’부터 전면 주차 차량이 빠져나올 때 후방 상황을 감지해 경고하고 제동하는 ‘후방 교차 충돌 방지 보조(RCCA)’가 대표적이다. 또 운전자가 좌우 방향 지시등을 켜면 후측 방향 영상을 대시보드 가운데 표시해주는 기능과 고속도로 내 곡선 구간 통과 시 일시적으로 자동 감속하거나 가속을 제한하는 시스템도 들어갔다. 이 외에도 전방 충돌 방지 보조 및 경고, 차로 이탈 방지 보조 및 경고, 운전자 주의 경고 등의 주행 보조 시스템이 적용됐다. 자동차 업계 최초로 차량 내 에어컨 바람이 승객에게 직접 쐬지 않도록 조절할 수 있는 ‘확산형 천장 송풍구(루프 에어벤트)’와 실내 소음을 줄이는 ‘액티브 노이즈 컨트롤’ 등도 팰리세이드가 가진 특별한 편의 기능으로 꼽힌다.

SUV의 대중화를 추구하면서도 모랫길, 진흙길, 눈길 등을 달릴 때 선택하는 험로 주행 기능(터레인 모드)같이 고급 SUV를 상징하는 기능도 빼놓지 않았다. 송군호 현대차 차량시스템개발실장은 “팰리세이드가 가족을 위한 차량이지만 모험심 강한 젊은 아빠의 성향에 맞게 거친 길도 달릴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 사항을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한 가족이지만 구성원 개개인의 개성 또한 중시하는, 이른바 ‘매버릭(Maverick, 개성이 강한) 패밀리’의 니즈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팰리세이드는 내부 디자인도 기존 SUV와 차이가 있다. 현대차는 다른 SUV 모델과 달리 막대기형의 기어 노브(자동변속기)를 과감하게 없애고 전자식 버튼 형태로 바꿨다. 주차(P)부터 중립(N), 후진(R), 주행(D) 등을 운전자가 버튼을 눌러 조작하도록 했다. 주로 슈퍼카 브랜드에 활용되던 방식을 팰리세이드에 적용해 고급화를 꾀한 것이다. 정 수석부회장 역시 팰리세이드의 고급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내장재의 촉감을 더 부드럽게 바꾸고 내부 조명의 색조를 조정해달라고 개발팀에 직접 주문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고 한다.


공격적인 가성비로 날개를 달다

차량이 아무리 좋아도 이른바 ‘가격 대비 성능 비율(가성비)’이 떨어진다면 소비자들은 쉽게 지갑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차가 지난해
11월 팰리세이드의 실물을 처음 공개하자 국내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는 ‘팰’리세이드와 함께 표기가 비슷한 ‘펠’리세이드가 나란히 상위권을 차지했다. 신차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소비자들이 급하게 내용을 검색하려다가 잘못된 이름을 포털 사이트에 입력하면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이 외에도 기사 댓글과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그래서 신차의 가격은 도대체 가격은 얼마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팰리세이드의 가격은 3475만∼4408만 원으로 책정됐다. 경쟁 차종으로 언급되는 포드 익스플로러(2018년형)가 5460만∼5710만 원, 혼다 파일럿(2019년형)이 5490만∼5950만 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가장 높은 트림(선택 사양에 따른 등급)을 기준으로 봐도 가격이 1500만 원가량 저렴한 것이다. 모든 선택 사양을 다 담아도 가격은 4900만 원 안팎으로 5000만 원을 넘지 않는다. 팰리세이드의 가격이 공개되자 SUV 애호가들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착한 가격’이라거나 ‘가성비의 끝판왕’이라는 표현을 쓰며 환호했다. 5000만 원을 가뿐히 넘어설 것이라는 업계와 전문가들의 예측은 빗나갔다. 미국에서도 가격 범위가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 시장에서는 팰리세이드가 3개 트림으로 출시됐는데 가격대가 3만1550만∼4만4700달러다. 환율 1160원을 기준으로 약 3660만∼5185만 원이다.

현대차는 어떻게 팰리세이드의 가격을 예상보다 낮게 책정할 수 있었을까. 우선 엔진을 기존 제품으로 활용했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 엔진은 차량 부품 중에서 가장 높은 가격 비중을 차지한다. 신차를 만들기 위해 새로 엔진을 개발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반면 팰리세이드는 2.2L 디젤 엔진을 동생 격인 싼타페와 공유한다. 3.8L 가솔린 엔진도 제네시스 브랜드에 장착되는 제품을 쓴다. 또 사륜구동(4WD) 및 운전자 보조 시스템 등을 자체 기술로 해결해 추가 비용이 들어가지 않아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유다. 팰리세이드의 가격이 낮아진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현대차는 팰리세이드의 가격을 소비자들의 예상보다 확 낮춰 국내에서 싹트기 시작한 대형 SUV 시장을 선점하고자 했다. 전략적으로 팰리세이드의 가격을 낮게 책정해 소비자들이 쉽게 구매에 나서도록 유도했다는 뜻이다.

현대차는 가격 경쟁력을 갖춘 대형 SUV를 출시하면 수요가 쏠릴 것으로 기대했다. 팰리세이드가 대형 SUV의 문턱을 낮추는 역할을 하고, 뒤이어 내놓을 고급 차 브랜드 제네시스의 ‘GV80’으로 기세를 이어가겠다고 판단했다. 올해 11월 공개된 제네시스의 첫 SUV GV80은 길이가 4945㎜로 팰리세이드와 큰 차이는 없다. 다만 팰리세이드를 뛰어넘는 운전자 지원 시스템과 한층 더 고급스러운 디자인으로 공개 이후 자동차 업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가격은 6000만 원 초반부터 시작해 팰리세이드와 차별화를 뒀다. GV80까지 본격적으로 판매가 이뤄지면 현대차는 완성차 시장의 최대 비중을 차지하는 SUV 분야에서 소형부터 준중형, 대형, 고급 모델까지 체계적인 라인업을 완성하게 된다.

최영석 선문대 스마트자동차공학부 겸임 교수는 “팰리세이드 구매에 5000만 원을 쓸 수 있다고 판단한 고객이라면 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면서 최첨단 사양을 갖춘 GV80을 보면 1500만 원을 추가로 내더라도 언젠가 사려고 할 것이다. 앞으로 국산 대형·고급 SUV가 시장의 대세로 안착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패밀리카의 스토리 마케팅

절벽 아래로 보이는 태평양,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시원하게 파도를 타는 서핑족과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태양,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 산맥을 끼고 자리 잡은 고급 주택 지구 퍼시픽 팰리세이즈(Pacific Palisades)에서 만날 수 있는 멋진 광경이다. 현대차는 바로 ‘퍼시픽 팰리세이즈’에서 신차의 이름을 따왔다.

현대차는 2000년 ‘싼타페’를 처음 출시한 후 줄곧 SUV 차량의 명칭을 미국 지역에서 가져와 썼다. 싼타페는 뉴멕시코주의 주도 산타페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고 싼타페의 동생 격인 투싼은 애리조나주의 도시 이름이다. 코나 역시 세계 3대 커피 생산지로 꼽히는 하와이주의 한 지역 이름이다.

더 나아가 팰리세이드란 이름에는 패밀리카를 새롭게 정의하겠다는 현대차의 의지가 담겨 있다. 현대차는 프로젝트명 ‘LX2’라는 이름으로 팰리세이드 개발에 착수할 때부터 코나, 투싼, 싼타페에 이어 SUV 제품군의 가장 최상급 모델이 될 새로운 대형 SUV의 이름에 다른 모델보다 더 특별한 스토리를 담고자 했다. SUV를 상징하는 실용성과 대형 차량으로서의 고급스러움, 이 2가지 이점을 함께 잡기 위해 선택한 지역이 바로 퍼시픽 팰리세이즈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의 많은 예술가는 퍼시픽 팰리세이즈가 품은 대자연을 담아낼 건축물을 고민했다. 이에 대한 해답이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형태의 ‘미드 센추리 모던’ 양식이었다. 1950, 1960년대 미국의 대표적인 건축가 리처드 노이트라 등이 미드 센추리 모던 양식을 반영해 실용적이면서도 고풍스러운 주택들을 퍼시픽 팰리세이즈에 대거 지었다. 이후 대형 공원과 자전거 도로, 고급 골프장까지 들어서면서 퍼시픽 팰리세이즈는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휴식을 즐기고 싶은 현대인들의 욕구를 그대로 반영한 지역으로 유명해졌다.

현대차는 퍼시픽 팰리세이즈의 이런 특징에 주목했다. 고급스럽지만 사치스럽지 않고, 실용적이면서 삶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차량. 밀레니얼 대디가 가족들과 어디든 편안하게 떠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스토리를 신차 이름에 고스란히 녹인 것이다.

이런 형태의 스토리는 사전 광고(티저)로도 이어진다. 현대차는 팰리세이드의 사전 광고 대표 문구를 ‘당신만의 영역을 찾아서’로 내걸고 밀레니얼 대디가 어린 딸을 데리고 로켓 발사 장면을 지켜보러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이는 아빠가 운전하는 팰리세이드 안에서 편안하게 잠든다. 아빠의 어릴 적 꿈과 어린 딸의 꿈이 모두 팰리세이드를 통해 실현된다는 스토리다. 모델이나 차량 분위기보다는 밀레니얼 대디가 가족과 공유하는 감정이 따뜻한 시선으로 전달된다. 현대차가 팰리세이드를 통해 새롭게 정의하려는 패밀리카의 모습을 한 편의 광고에 압축적으로 담았다.


마치며: 성공 요인 분석 및 제언

그동안 한국 7, 8인승 SUV 시장은 포드 익스플로러가 주도했다. 포드 익스플로러는 광고에서 기본적으로 모험적인 이미지를 앞세운다. 광고에는 각양각색의 광활한 자연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차량이 산길, 눈길, 강가 등 어느 도로든 잘 달릴 수 있다는 점을 자세히 보여주며 거친 면모를 부각한다. 차량에 탄 가족은 보조적 역할로 등장한다. 또 7명이 다 타도 차량 공간이 굉장히 넉넉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최근까지는 이런 마케팅이 성공을 거뒀다고 볼 수 있다. 실제 포드 익스플로러는 지난해 6908대의 판매량으로 2017년에 이어 전체 수입 차 SUV 차종 중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막강한 경쟁 모델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팰리세이드는 대형 SUV 시장에서 차별화를 시도하며 새로운 포지셔닝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포드 익스플로러의 ‘탐험’이라는 콘셉트와 대비되는 ‘패밀리’를 내세운 것이다. 포드 익스플로러 역시 전 세계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차량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여러 광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포드 익스플로러는 특별한 길을 가야 하는 사람들이 탈법한 차량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족들이 일상적인 도로를 달릴 때 필요한 차량인가 의구심을 갖게 한다.

반면 팰리세이드는 ‘매버릭 패밀리’가 타는 차량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여기서 말하는 매버릭 패밀리는 밀레니얼 부부를 중심으로 한 여러 형태의 가족 구성을 의미한다. 이때 가족은 단순히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나
4인 핵가족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예컨대, 아빠와 아이가 단둘이 캠핑을 갈 때도 팰리세이드는 꼭 필요한 차량이다. 팰리세이드의 마케팅에서 ‘몇 명이 타는 차량’이라는 점은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특히 한 지붕에 모여 사는 가족이라도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삶을 지향하는 밀레니얼 부부에게 방탄소년단의 메시지는 더 큰 울림을 전했다. 방탄소년단은 지난해 9월 유엔(UN) 총회 연설에서 “당신이 누구든, 어디에서 왔든, 피부색이나 성 정체성이 무엇이든, 그냥 나를 말하라”는 연설로 전 세계인을 감동시켰다.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외침을 이어왔던 방탄소년단이 이번엔 팰리세이드를 통해 새로운 가족의 정의를 이야기했다. 대중들은 그들의 메시지를 더 묵직하고 진정성 있게 받아들였다.

현대차 마케팅전략실장 출신인 최명화 CMO캠퍼스 대표는 “그동안 차량이 크면 중장년층만 탈 수 있다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팰리세이드는 앞으로 대형 SUV가 다양한 생활방식을 가진 소비자들이 자유롭고 편하게 탈 수 있는 차량이라는 것을 새롭게 보여주면서 시장에서 열풍을 일으켰다”고 분석했다.

물론 포지셔닝에 성공한 일등공신으로 가격을 빼놓을 수 없다. 현대차는 이번에 예상외로 공격적인 가격 정책을 펼쳤다. 팰리세이드의 핵심 소비층으로 설정한 30대, 40대 초반의 밀레니얼 부부가 아직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단계라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이들은 소득이 점점 늘고 있지만 내 집 마련과 육아 등으로 돈을 쓸 여력이 크진 않다. 이들을 대형 SUV 시장에 본격적으로 끌어들이려면 인기 차종의 가격을 높여 수익을 올리는 형태의 전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팰리세이드에 현대차의 고급 브랜드인 제네시스 차량 수준의 가격이 매겨졌다면 밀레니얼세대가 이 정도로 관심을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팰리세이드의 경쟁 차량인 포드 익스플로러와 혼다 파일럿 등은 가장 높은 트림(선택 사양에 따른 등급) 기준으로도 1500만 원 정도 비싼 탓에 주요 고객층이 40대 후반, 50대로 분포돼 있다.

대신 현대차에서 가장 비싸고 고급스러운 SUV의 이미지는 제네시스 GV80이 담당한다. 현대차가 애초부터 팰리세이드의 뒤를 이어 출시될 GV80에 고급화 전략을 집중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팰리세이드에는 의도적으로 낮은 가격을 매겼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국산 대형 SUV를 처음 접하는 밀레니얼 세대를 상대로 높은 진입 문턱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수요 예측에 실패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현대차는 팰리세이드를 처음 출시하면서 노동조합과 올해 국내 시장에서의 연간 판매량을 2만5000대로 예상했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판매량은 5만 대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초기 수요 예측이 완전히 어긋났다. 사전 계약 취소 물량만 2만1000대를 넘어섰다고 한다.

물론 ‘없어서 못 파는 차량’이라는 ‘노이즈 마케팅’이 단기적으로 소비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소비자들이 “6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할 정도면 얼마나 대단한 신차를 내놓은 것이냐”며 팰리세이드에 더 큰 흥미를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회사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면서 소비자가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특히 폴크스바겐, GM, 도요타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와 다르게 현대차는 노조와 합의를 거쳐야 신차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비자들의 불만은 더 커졌다. 노사가 올해 7월 가까스로 팰리세이드 증산에 합의하면서 급한 불은 껐지만 앞으로 GV80 등 새로 출시하는 인기 차종에서 비슷한 문제가 또 불거질 가능성은 여전하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번 팰리세이드 물량 부족 사태를 계기로 현대차가 신차의 수요 예측과 노사 협의를 더 정교하게 진행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 단기적으로 노이즈 마케팅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소비자들이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도록 해야 신뢰도 제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필자소개 지민구 동아일보 산업1부 기자 warum@donga.com
필자는 2012년 서울경제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국회, 증권업계, 정보기술(IT) 업계 등을 출입했다. 일명 ‘청담동 주식부자 사건’을 취재해 2016년 8월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했다. 2019년 동아일보에 합류해 산업1부에서 자동차 업계를 담당하고 있다.


SR3. Interview : ‘카페 어니언’을 만든 ‘패브리커’

“폐공간을 소생시킨 비결?
로컬 특성 살리며 ‘善한 생태계’에 집중”

281호 (2019년 9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변두리 상권을 일으킨 이들이 있다. 건축·디자인 듀오 ‘패브리커(Fabrikr)’다. 패브리커의 디자이너 김동규, 김성조 씨는 2016년부터 버려진 공장과 우체국의 안 쓰는 공간, 쓰임새가 여러 번 바뀌어 원래 모습을 감춘 한옥 등을 잇달아 카페 ‘어니언(ONION)’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폐공간들은 모두 주요 상권이 아닌 곳에 위치해 있었지만 현재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카페 성지’로 거듭났다. 패브리커는 크게는 동네를, 작게는 거리를 살린다는 계획을 가지고 움직인다. 목표는 ‘지역의 자부심을 만드는 것’이다. 어니언 프로젝트는 이 일환이다. 사람들이 패브리커를 진정한 로컬 크리에이터로 꼽는 이유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송지은(숙명여대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공간에 의미를 부여한다. 누구와 있었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따라 기억의 선명도에 차이가 날 뿐이다. 좋은 사람과 보낸 기억은 추억이 되고, 때로는 당시의 감정이 생생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그 추억의 중심에 있는 것이 공간이다. 과거만 그러할까. 내가 지금 딛고 서 있는 곳도, 앞으로 내디딜 곳도 공간이다. 그래서 공간은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일종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그만큼 공간의 의미는 강렬하다.

건축·디자인 듀오 ‘패브리커(Fabrikr)’ 역시 공간에 주목했다. 그런데 이들이 관심을 가진 건 ‘잊혀가는 공간’이었다. 패브리커의 디자이너 김동규와 김성조 씨는 2015년 서울 종로구 계동의 한 목욕탕을 선글라스 브랜드인 ‘젠틀몬스터’의 쇼룸으로 꾸몄다. 문 연 지 50년 된,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었다. 두 디자이너는 빨간 벽돌로 이뤄진 벽과 목욕탕 특유의 파란색 타일 등을 살리면서 새로운 공간을 창조했다.

패브리커는 이 쇼룸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정점은 카페 ‘어니언(ONION)’이었다. 2016년부터 버려진 공장과 우체국의 안 쓰는 공간, 쓰임새가 여러 번 바뀌어 원래 모습을 감춘 한옥 등을 잇달아 카페로 탈바꿈시켰다. 이 카페 3곳은 젊은이들의 ‘카페 성지’로 손꼽힌다. 최근에 서울 종로구 계동길에 문을 연 어니언 안국은 하루 1000명 이상이 찾고 있을 정도로 인기다. 페브리커는 현재 카페 어니언의 아트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이들은 기존 방식과 다르게 공간에 접근한다. 보통 상업 공간은 상권, 유동인구, 접근성 등을 따진 뒤 장소에 맞춰 디자인을 한다. 패브리커의 방식은 조금 다르다. 디자인에 맞는 공간을 먼저 찾는다. 이미 잘 알려진 상권은 피한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공간에 주목한다. 결과적으로 카페 어니언이 생기면서 해당 지역은 상권이 살아났다. 사람이 모였고, 지역에 생동감이 넘쳐났다. 사람들이 “카페 어니언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든다”고 말하는 이유다. 로컬 상권을 중심으로 카페를 만들고, 라이프 스타일을 소개하는 사업자들은 많다. 하지만 이 듀오를 많은 전문가가 망설임 없이 ‘로컬 크리에이터’라 꼽는 이유는 로컬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면서 해당 지역 주민들과 해당 지역이 새로운 상업시설과 함께 더불어 성장할 수 있는 ‘선한 생태계’를 설립 초기부터 고민했다는 점이다. 최근 어니언 안국에서 이들을 만나 ‘카페 어니언’과 로컬 비즈니스의 철학에 대해 물었다.


‘카페 어니언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됐나.

김성조 | 2016년 초 평소 알고 지내던 유주형 온라인 쇼핑몰 피피비스튜디오스 대표(현 어니언 대표)님한테 연락이 왔다. 성수동 회사 사무실 옆에 폐공장이 있는데 카페로 만들어보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직접 가 봤더니 철거될 건물이어서 그런지 쓰레기로 가득 차 있었다. 덩굴식물들이 창문 안팎을 덮고 있었고, 문틀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위치도 좋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성수동이 지금처럼 ‘핫’하지 않았고, 조금 알려진 곳은 대림창고 갤러리가 있는 큰길 건너편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곳에 묘하게 매력을 느꼈다.



폐공장에서 어떤 매력을 느꼈나. 당시 그 주변은 상권도 없었는데.

김동규 | 그냥 보기에는 폐허였는데 건물이 가지고 있는 구조와 역사가 재밌었다. 1970년대 지어진 이 건물은 슈퍼, 식당, 가정집, 정비소를 거쳤다. 마지막이 공장이었다. 변형되는 과정에서 필요 없는 부분은 없어졌고, 더해야 할 부분은 증축됐다. 바닥이나 벽에 묻은 페인트 자국이나 덧댄 벽돌들 하나하나가 너무 재밌었다. 우린 흔적을 살리면서 과거 공간을 재생시켜보자고 생각했다. 벽에 스티커나 얼룩도 그대로 뒀다. 사실 공사 기간 10개월 중에 절반 이상은 둘이 동네를 돌아보고 공장에 앉아 생각하는 데 할애했다.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빼야 할지를 고민했다. 결과적으로 돌아보니 과거의 성수동을 살리면서 미래의 성수동을 만드는 작업을 한 것 같다. 사실 비즈니스 측면에서, 장사가 잘될까란 걱정을 우리도 하긴 했다.


원래 공장 밀집 지역이었던 성수동이란 공간의 지역 특성을 잘 살린 것 같다.

김동규 | 사람들이 성수동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유가 멋진 새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공장지대의 문화를 좋아하는 것. 즉, 원래 성수동이 가지고 있는 시간의 흔적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원래 것을 잘 살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외부에서는 원래 모습을 지키려고 했고, 내부에서는 현대적인 것과 미래적인 느낌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유주형 어니언 대표는 미국 브루클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들었다. 브루클린과 성수동은 지역성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브루클린에서 다리를 건너면 맨해튼인데 성수동도 다리를 건너면 압구정, 강남이고 지하철 2호선이 지나간다. 브루클린 역시 낡은 공장지대였는데 지금은 수많은 IT 기업이 있고 커머스 기업도 생겨났다. 우리는 성수동에서 브루클린과 같은 성공 가능성을 봤다.


처음에는 어떻게 보면 공장 그대로의 모습을 더럽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일부라도 폐허의 공간을 그대로 둔다는 것에 대해 우려는 없었나.

김성조 | 그런 걱정도 있긴 했지만 고객들이 어디까지 이 콘셉트를 허용해줄지 짐작하기는 참 어려운 것 같다. 우리가 느낀 감정들 가운에 가장 좋았던 것을 담아내고자 했다. 많은 분이 결과적으로 그 감성을 이해해주셨고 공감해주셨다. 그래서 천장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썼다. 천장 전체에 바리솔 조명을 1 썼다. 천장이 하나의 면이면서 조명인 셈이다. 낮에 갔을 때는 잘 못 느낄 텐데 해가 떨어질수록 조명이 힘을 발휘한다. 조명이 공간에 세련된 느낌을 부여한다. 조명에 가장 신경을 많이 썼다.


어니언 성수점은 거칠면서도 편안하다.

김동규 | 우리가 의도한 그대로다. 성수동이란 거친 공간을 담아내면서 휴식하는 공간으로도 만들려고 했다. 성수점은 외부와 차단된 느낌이 있다. 안에 들어오면 실내 공간을 보게 되는데 내부에 정원도 있다. 투명한 창으로 외부를 볼 수 있지만 불투명한 유리로 막힌 공간도 많다. 서로 떨어진 공간 속에서 영감을 얻고 편안하게 휴식하길 바랐다. 다른 지점보다 조밀한 느낌이 있다. 정원이 있어서 자연이 주는 느낌도 있다. 식물들도 원래 있던 것들을 그대로 둔 것이다.



2호점도 범상치 않다. 미아동에, 그것도 우체국 안에 문을 열었다.

김성조 | 성수에서 예상한 것보다 훨씬 큰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어니언을 어떻게 브랜드로 성장시킬지 내부에서 여러 번 회의를 거쳤다. 특히 우리가 지향하는 바가 과연 무엇인가, 이런 부분에 대한 논의가 많았다. ‘우리만의 길을 가자’라는 뻔한 결론이 나왔는데 사실 이게 실천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망원이나 합정, 홍대, 강남 이런 상권을 제외하고 커피 문화가 소외된 곳을 공략하는 것이 비즈니스적으로는 도발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반년 넘게 조사를 진행했는데 미아동이 생각보다 젊은 층이 많이 사는 곳이더라. 반면 좋은 커피나 빵을 파는 곳은 많지 않았다. 그렇게 지역을 탐색하다가 우체국을 발견했다. 서울강북우체국이 일부 공간을 임대한다는 것이었다. 우체국이 정보를 모으고 분산하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우리도 문화적으로 이런 부분을 표현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그래서 미아에서는 커피를 제공하는 방식이 성수, 안국점과 완전히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김동규 | 성수, 안국점은 우리를 대표할 수 있는 좋은 원두 한두 개를 지정해 제공한다. 반면 미아점에서는 선택지를 많이 줬다. 고객들이 케냐, 온두라스, 코스타리카, 브라질 등 8∼9가지의 커피를 만날 수 있게 했다. 커피 가격도 다른 지점의 반값이다. 좋은 커피를 저렴하게 즐길 수 있게 했다. 우체국에 있는 카페에서 세계 각국의 커피를 맛볼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지 않나. 물론 공간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이 우체국 건물이 상당히 큰 건물인데 철거하면서 보니까 그 구조물들이 엄청 힘이 있더라. 골조가 보이는 게 되게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어떻게 잘 보여줄까 고민하다가 창에서 들어오는 빛과 조명을 살려서 공간에 빛을 가득 채웠다. 햇볕과는 다른 느낌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우체국이라는 공간에 들어섰지만 색다른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벽 쪽에 좌석을 배치하고 가운데 공간은 넓게 뒀다. 카페 문화를 즐기면서도 ‘쉼’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실제로 ‘미술관을 둘러보고 여운을 즐기는 휴게실 같다’고 이야기하신 고객도 있었다.



성수, 미아점도 사랑을 받았지만 안국점이 대박이 났다.

김성조 | 3호점에 대한 고민이 많이 있었다. 가만히 어니언을 돌이켜 봤는데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주요 상권이 아닌데 어떻게 알고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점이다. 내부적으로 ‘한국을 대변하는 카페가 있나’라는 물음이 나왔고, 도전해보자는 결론을 냈다. 처음에는 이 부분을 대변할 공간을 찾았다. 서울의 중심인 종로, 동대문, 인사동 등의 지역들을 살폈다. 그렇게 반년을 돌아다니다가 북촌에서 임대 플래카드가 걸린 것을 봤다. 예전부터 지나다니다가 한번씩 본 곳이었다. 직접 안으로 들어가 봤는데 건물이 너무 멋졌다. 이렇게 크고 멋진 한옥이 서울 한복판에, 그것도 빌딩들 사이에 있는 것이 신기했다.

김동규 | 우리가 보는 ‘땅의 가치’가 있다. 부동산이 보는 것과는 좀 다르다. 처음 기획한 것처럼 이미 상권이 조성된 곳이 아니지만 가능성을 지닌 곳. 우리가 표현했을 때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여기가 그랬다. 여긴 북촌에서 외국인들이 찾는 메인 거리는 아니었지만 메인 거리와 가까운 편이었다. 주로 현대건설 직원들이 출퇴근길이나 밥 먹으러 오가는 길이었다. 주말이 되면 상가들도 문을 닫았으니까.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멋진 한옥이 있고, 변두리 상권이라는 점이 끌렸다. 한국을 대표하는 카페로 만들자고 의기투합했다.


안국점 터가 역사가 깊은 곳이라고 들었다.

김동규 | 100년이 넘은 고택이다. 한의원, 요정, 한정식집 등 다양한 이력을 가진 곳이다. 마지막으로 쓰인 이 공간의 용도는 한정식 식당이었는데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중정(건물 안이나 안채와 바깥채 사이의 뜰)을 막아서 실내 공간으로 썼다. 한옥 처마선, 기둥 모두 벽지나 시설물로 가려져 있었고 멋스러운 천장도 벽으로 막혀 있었다. 내부에 들어가면 한옥인지 모를 정도였다. 철거를 하면서 손을 많이 댔다. 그래서 건물주를 설득하는 과정도 필요했다. 다행히 건물주도 이 공간을 가치 있게 쓰이는 것에 공감해주셨다.



변두리 상권임에도 북촌의 자태를 잘 살렸다. 원래 한옥에 대해 잘 알았나.

김성조 | 공사 기간이 6개월 정도 걸렸다. 건물이 한옥인데 한옥은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물과 같은 것 아니냐.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옥의 원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옥에서 사람들이 본래 느끼는 감정과 행동들을 고스란히 살리고 싶었다. 공부가 필요했다. 그래서 장소가 결정된 다음, 둘이서 전통 한옥이 잘 보존돼 있는 곳들을 찾아다녔다. 문화재들도 보러 다녔고. 특히 안동 한옥 마을이나 병산서원, 영주 부석사는 정말 인상 깊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란 책도 읽었다. 한국의 멋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마음가짐이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외국인이 많이 찾아올 게 뻔한데 ‘한국의 미’를 잘못 보여주면 안 되니까. 한옥을 통해 자연을 바라봤다. 조상들이 자연을 어떤 식으로 한옥에 안착시켰는지 등도 배우게 됐다.



이를 어떻게 카페 어니언으로 구현해냈나.

김동규 | 좌식문화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보면 알겠지만 카페 어니언을 찾는 고객들은 대부분 멋쟁이다. 신발을 패션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하이힐을 신고 오는 분도 많다. 이들에게서 신발을 벗길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있었다.(웃음) 그래도 좌식 공간을 포기할 순 없었다. 100년 전 지어진 이 한옥은 좌식으로 설계된 공간이다. 바닥에 앉아야 건축가가 의도했던 시선의 높이가 완성된다. 앉았을 때 비로소 시선과 천장, 서까래와의 거리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또 전체를 좌식 공간으로 하면 상업 공간으로 매력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 공간의 낮췄다. 테이블 석은 바닥을 60∼70㎝가량 바닥을 낮춰서 의자에 앉았을 때 시선의 높이가 맞게 만들었다. 빵들이 놓인 곳이나 커피 주문하는 선반 등의 높이도 다 의도된 것이다. 성수점이 ‘빛의 묘미’가 있다면 안국점은 ‘시선의 묘미’가 있는 곳이다.


사실 어니언의 흥행에는 빵도 한몫했다.‘카페가 아니라 빵집’이란 평가도 있다.

김성조 | 처음 어니언을 준비할 때 커피 이외의 즐길거리를 많이 고민했다. 맥주도 생각했었다. 셰프부터 시작해 정말 다양한 사람을 만났던 것 같다. 그러다가 ‘브레드05’의 대표인 강원재 셰프를 만나게 됐는데 ‘아, 이제 누굴 더 만나볼 필요가 없겠다’ 싶었다. 강 셰프는 한국에 앙버터를 소개하고 팡도르를 유행시켰다. 30년 넘게 빵만 생각해온 분이다. 어니언에서 이분의 빵을 즐길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다. 처음에는 걱정도 있었다. 보통 10년 넘게 무언가를 해오고 ‘달인’처럼 여겨지는 분은 자신만의 철학이나 규칙 이런 게 엄격하지 않나. 빵에 대해 모르는 우리와 맞춰나갈 수 있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우리가 바랐던 부분들을 대부분 맞춰주셨다. 덕분에 어니언만의 빵도 탄생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팡도르가 그냥 놓여 있으니 디자인 측면에서 좀 심심했다. 그래서 슈가파우더를 눈처럼 소복소복 쌓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다른 빵들도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탄생했다. 안국점에서는 감태와 매생이가 들어간 빵이 시그니처가 돼서 인기다. 모든 빵은 각 지점에서 직접 굽는다. 또 그날 빵은 그날 다 팔거나 폐기한다. 이건 강 셰프의 철학이고 우리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어니언은 과거의 흔적, 동네의 정취를 그대로 담고 있다. 비즈니스적으로도 성공했는데 비결은?

김동규 | 우린 디자이너지만 ‘사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를 정말 많이 생각한다. 아무리 멋져도 사랑받지 못하면 그만 아닌가. 생각날 때 찾는 기분 좋은 곳이 되려고 한다. 먼저 특정 지역에 사는 사람이나 그곳에 주로 머무는 사람들의 성향을 많이 본다. 또 이들의 동선도 본다. 출퇴근이 될 수도 있고,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일지 고민한다. 그러다 보면 지역의 정취에서 너무 크게 벗어나선 안 된다. 그들과, 그 지역과 묻어나야 한다. 그러다 보니 지점마다 디자인이 전부 다르지만 ‘어니언스럽다’는 평가를 받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변두리 상권을 공략하는 만큼 메인 거리의 흐름을 이쪽으로 바꿀 수 있을지를 여러 번 상상한다. 그런 시뮬레이션을 가장 많이 한 것 같다. 성수동에서 어니언이 생기기 전에는 사람들이 주로 큰길 건너편 대림창고 쪽을 찾았다. 그 길을 건너게 하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1호 성수점이 생긴 지 3년이 흘렀다.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나.

김성조 | 어니언이 생기기 전후 성수, 미아, 그리고 안국점에서 공통된 현상이 있었다. 지역 주민들의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유동인구가 없는 곳에 사람이 몰리니 지역 주민들이 되게 좋아했다. 지역을 선정할 때 동네나 거리를 살린다는 계획을 가지고 움직이는데 이렇게 호응이 좋으면 힘이 솟는다. 최근 안국점 근처에 사시는 분이 SNS에서 연락을 해왔다. 어머니가 근처에서 음식점을 한다고 하더라. ‘어니언이 들어온 이후 거리에 활기가 생겼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해왔다. 오히려 우리가 더 고마웠다.

김동규 | 실제로 우리가 만든 공간을 기점으로 동네가 변화하는 모습을 경험했다. 안국점이 있는 거리에 3, 4평 규모의 가게들이 10개 정도 있다. 거리에 있는 상가들은 일요일에 원래 문을 대부분 닫았다. 바로 앞에 있는 현대건설 직원들이 출근을 안 하니까. 그런데 어니언이 오픈한 뒤 일요일에 문을 여는 곳이 많아졌다. 우리가 도움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앞으로도 이런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브랜드가 되고 싶다.


어니언의 정체성은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앞으로도 어니언은 ‘로컬 크리에이터’의 역할을 할 계획인가.

김동규 | 어니언은 한국을 대표하는 커피 브랜드를 꿈꾼다. 젊은 친구들이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커피 문화를 다루는 브랜드가 되고 싶다. 미국 커피 전문점 블루보틀이 한국에 들어온다고 했을 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감성을 지닌 커피 브랜드가 있을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한국 커피 시장이 세계 6위이고, 카페 시장으로는 3위다. 정말 대단하지 않나. 블루보틀이 일본에 이어 한국을 3번째로 지정한 것도 이런 시장 규모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 작은 땅에서 엄청난 소비가 이뤄지고 있는데 딱 떠오르는, 대표 브랜드가 없는 건 아쉽다. 우리가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

김성조 | 로컬 크리에이터라는 게 되게 조심스럽다. 많은 상권이 곳곳에 생기기도 했지만 그만큼 많은 상권이 변질되기도 한다. 고유의 색을 잃게 되는 경우도 많고. 그래서 항상 어느 지역에서 무언가를 할 때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다짐을 많이 한다. 우리가 내부적으로 더 단단해지고 추구하는 가치가 명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 보여줘야 할 것들이 많다. 어니언 이외에도 많은 사람이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을 곳곳에 만들고 싶다. 왜 ‘우리 동네에는 이런 게 있어’ 하는 장소가 다들 있지 않나. 지역의 자부심이 되는 곳들을 만들고 싶다. 로컬 크리에이터라고 불리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


일의 ‘뉴패러다임’ 기대했지만
부동산 임대사업 한계 못 넘어

287호 (2019년 1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애덤 뉴먼이 이끄는 위워크는 뉴욕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공유 오피스를 확장하며 주목을 받았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을 비롯한 투자자들이 위워크를 높게 평가했던 이유는 이 회사가 프리랜서나 작은 스타트업 종사자들에게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며 ‘일’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아날로그적인 부동산 임대 사업이라는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다. 기업가치 폭락 후, 뉴먼은 자신이 가진 경영권을 소프트뱅크에 넘기는 조건으로 10억 달러 이상을 챙겨가며 악당 이미지를 굳혔다.




위워크1 의 추락이라는 비극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2명이다. 한 명은 위워크의 공동 창업자이자 전 CEO인 애덤 뉴먼(Adam Neumann)이고 다른 한 명은 위워크의 가장 큰 투자자인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다. 둘은 죽이 잘 맞는 사이였다. 손 회장은 ‘기업의 잠재력은 창업자의 야망의 크기보다 클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공격적이고 대담한 창업자를 좋아한다. 뉴먼은 손 회장이 좋아하는 바로 그런 류의 창업자였다. 하지만 무모할 정도로 너무 대담하고 꿈이 커서 문제였다.

창업자가 1000만 달러를 투자해 달라고 하면 손 회장은 “그럼 10억 달러를 주면 어떻게 할 수 있는데”라고 물어보는 사람이다. 그럼 창업자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큰돈은 상상해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뉴먼은 달랐다. 그는 손 회장에게 “10억 달러가 아니라 100억 달러를 주면 별을 따올 수 있다”고 말하는 그런 창업자였다. 이렇게 잘 맞는 투자자와 창업자 관계를 찾기도 힘들지 않을까.

이런 두 사람의 합작으로 한때 기업가치가 470억 달러까지 올랐던 위워크는 2019년 말 파산할지도 모르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올해 스타트업 기업공개(IPO) 계획 중 큰 주목을 받았던 위워크의 IPO는 물 건너간 지 오래다. 기업 가치 평가는 잘나가던 때의 6분의 1 수준인 80억 달러로 떨어졌고 11월 말 전체 인력의 약 19%인 2400명을 감원한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위워크의 이런 추락은 근래에 보기 드문 최악의 스타트업 실패 사례로 불리고 있다.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출한 뉴먼은 회사에서 쫓겨났다. 그 와중에도 10억 달러를 넘게 챙겨서 나갔다. 위워크가 자신의 다음 알리바바라고2 공언하면서 위워크의 가치를 혼자서 견인하다시피 한 손 회장의 평판에는 흠이 갔다. 올해 초만 해도 실리콘밸리 최고의 실력자로 불렸던 그다.

이렇게 위워크가 추락하게 된 데는 뉴먼 창업자의 잘못이 가장 클 터이다. 뉴먼은 기업 적자가 쌓여가는 가운데서도 개인 이득을 챙기는 데 몰두했다. 하지만 손 회장의 잘못된 판단도 한몫했다. 손 회장은 어쩌면 단순한 부동산 기업에 지나지 않는 위워크의 가치를 너무 높게 책정하면서 거품을 만들었다. 기업에 천문학적인 투자를 하면서 성장 외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 창업자를 응석받이로 만들었다는 비판도 받는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차례대로 살펴보겠다.


개인 이득 챙기기에 바빴던 애덤 뉴먼

2019년 여름 위워크가 IPO(기업공개) 준비로 한창 바쁠 때였다. 뉴먼은 한가로이 몰디브에서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뉴욕 본사의 임원이 몰디브로 전화를 했다. 투자자들에게 공개할 회사 관련 문서에 관해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전화로 논의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몰디브에서의 휴가를 끝내기 싫었던 뉴먼은 뉴욕으로 돌아가는 대신 자신에게 브리핑할 임원 한 명을 몰디브로 불렀다.

뉴먼은 자신을 큰 부자로 만들어 주고 회사의 숨통을 틔워줄 IPO를 앞두고도 한가하게 휴가를 즐기는 그런 CEO였다. 회삿돈 6000만 달러를 들여 자가용 비행기를 이용했고 비행기 안에서는 대마초를 피워 댔다. 6000만 달러면 적자에 허덕이는 위워크가 2주에 잃는 돈과 맞먹는 금액이다. 자신의 뉴욕 사무실에는 사우나와 함께 냉탕을 구비해 놓았다.

그런데 이런 사치는 사실 그가 저지른 다른 행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뉴먼은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을 위워크에 임대해 1200만 달러를 벌었다. 엄청난 이해상충이다. 부인을 위그로(WeGrow)3 의 CEO로 앉혔으며 위워크의 ‘We’가 자신의 아이디어라며 트레이드마크로 만들어서 590만 달러를 받고 회사에 팔았다. 그리고 어쩌면 위워크의 추락을 예견했는지 뉴먼은 올 7월 주식 매각과 주식 담보 대출을 통해 7억 달러가 넘는 현금을 확보한 것으로 나타났다. 창업자가 상장을 앞두고 주식을 판 것 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금액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러한 기행들은 위워크가 상장을 위해 8월 제출한 기본 비즈니스 및 재무정보가 담긴 S-1 서류에서 드러났고 위워크가 결국 IPO를 철회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이쯤 되면 어떻게 이런 사람이 한때 최고의 스타트업으로 불렸던 위워크를 공동 창업하고 CEO까지 했는지 의아해질 수밖에 없다. 그는 단순히 자신과 기업을 과대 포장하는 데 능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천재적인 비즈니스맨인데 모랄헤저드에 빠진 것이었을까.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뉴먼은 1979년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이스라엘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한때 이스라엘 키부츠4 에서 살았는데 당시의 공동체 생활이 비즈니스에 공동체적인 의미를 불어넣는 비전을 가진 위워크를 창업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한다. 위워크 전에는 유아복을 만드는 크라울러(Krawlers)라는 기업을 창업한 적이 있다. 기어 다니는 아기들 무릎 아프지 말라고 무릎 보호대를 넣은 옷을 만드는 기업이었다. 이후 위워크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린데스크를 미겔 맥켈비와 함께 창업한다. 그린데스크는 지속가능성에 중점을 둔 사무실 공유 기업. 이들 둘이 함께 그린데스크를 팔고 2010년에 창업한 기업이 바로 위워크다.

뉴먼은 슈퍼스타로 불리는 CEO였다. 키는 196㎝에 이르고 머리는 치렁치렁 길게 길렀으며 엄청난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무대에 오르면 청중을 휘어잡는 사람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잘 읽었고 그들의 충성심을 얻을 줄 알았다. 이러한 성격은 ‘물리적인 소셜네트워크’라고 불리는 비즈니스 공동체 위워크의 비전을 파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외모와 카리스마가 전부는 아니었다. 뉴먼이 주목을 받은 또 다른 이유는 인류가 일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인류가 일하는 방식은 지난 100여 년 동안 바뀐 게 없다. 사람들은 도시에 모여 살며 한곳으로 출근해 각자 맡은 일을 하다가 일정한 시간이 되면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삶을 반복해 왔다. 기업은 이들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각종 편의시설을 제공하기도 했고, 공짜 점심을 주기 시작했다, 마사지사를 상주시키기도 하며 회사 안에 세탁소나 탁아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보다 큰 뭔가를 원했다. 성취감을 느꼈으면 했다. 자신도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을 갖기를 바랐다. 하지만 긱이코노미5 의 도래로 인해 소속감을 갖는 건 더욱 어려워지는 듯싶었다.

그때 나타난 기업이 위워크였다. 위워크는 공짜 커피와 맥주를 구비해 놓고 TGIM6 을 외치면서 하나의 공동체에 소속된 느낌을 주도록 만들어진 곳이었고, 이웃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과 네트워킹을 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해줬다. 와이파이가 공짜인 커피숍을 찾아다니며 일하고 창고를 빌려 회의를 하는 프리랜서와 작은 기업 창업자들에게 위워크는 크나큰 매력을 가진 공간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위워크는 전 세계 110개 도시에서 52만여 명의 회원을 가진 공유 사무실 서비스 기업으로 거듭났다. 런던과 뉴욕, 워싱턴 DC에서는 가장 많은 사무실을 보유한 기업이 됐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사무실을 대규모로 장기 임대한 뒤 개인이나 기업에 단기 재임대를 하는 공간 공유 서비스 기업은 무자비할 정도로 비용을 관리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전기와 수도를 비롯한 관리비는 물론 보험과 보안 설비, 회원에겐 공짜인 간식과 커피, 맥주, 와이파이까지 모든 게 비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워크는 누구나 일하고 싶은 근사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위워크를 ‘룸서비스가 공짜인 호텔’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런 위워크에 엄청난 투자를 하면서 뉴먼의 비전에 날개를 달아준 사람이 바로 손 회장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날개를 얻은 위워크는 현실감각을 잃어버렸다.



위워크의 가치를 오판한 손정의

영화 ‘스타워즈’의 제다이 마스터 ‘요다’로 불리는 손 회장은 많은 부분 감으로 투자를 결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의 투자에는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1995년 알리바바의 마윈 전 회장을 만난 지 5분 만에 투자를 결정하기도 했다. 뉴먼을 만났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2017년 손 회장이 뉴먼과 함께 12분 동안 뉴욕의 위워크 본사를 둘러본 뒤 44억 달러짜리 수표를 끊어 준 사례다.

손 회장의 위워크에 대한 투자는 많은 이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 게 사실이다. 손 회장은 위워크에 여러 경로로 지금까지 모두 120억 달러를 넘게 투자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위워크는 계속 돈을 잃기만 했다. 그런 위워크의 실적에 대해 손 회장은 현재를 보지 말고 미래를 봐달라고 얘기하곤 했다. 위워크를 공간 플랫폼으로 보고 미래 가치를 높게 쳐준 것이다. 하지만 손 회장의 위워크에 대한 투자는 두 가지 부분에서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는 위워크가 그렇게 가치가 높은 기업인지에 대한 의구심이고 다른 하나는 위워크의 성장에 집착한 나머지 기본적인 경영 활동에 대한 체크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선 위워크의 가치에 대해 알아보자. 올해 1월 소프트뱅크 주가가 갑자기 6% 오른 적이 있었다. 위워크에 대한 손 회장의 투자 금액이 160억 달러로 알려졌다가 그의 8분의 1 수준인 20억 달러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이미 손 회장의 위워크에 대한 투자가 너무 과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위워크에 대해서는 애초에 전통적인 산업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을 만큼 혁명적인 기업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다. 기술을 통해 생활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테크 기업이 아니라 전통적인 부동산 임대업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저 일하는 방식에 변화를 가져다주는 정도의 기업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혁신적일 수는 있지만 혁명적일 정도는 아니라는 얘기다.

비제이 고빈다라잔(Vijay Govindarajan) 다트머스대 터크경영대학원 석좌교수와 아눕 스리바스타바(Anup Srivastava) 캐나다리서치 회장은 최근 HBR(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쓴 기고문에서 위워크는 테크 기업이 아니며 기업 가치에 대한 조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7 이들에 따르면 테크 기업은 변동비용과 자본 투자 비용이 낮고, 많은 고객 데이터를 가지고 있으며, 네트워크 효과가 크고, 다른 서비스로의 확장이 용이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위워크는 이런 특징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일단 위워크 모델은 자잘한 운영비용과 사무실을 임대하고 꾸미기 위한 투자비용이 많이 든다. 공유 공간 안에서 고객 데이터를 수집할 수는 있지만 사생활 침해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네트워크가 커질수록 기업 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테크 기업과 달리 위워크에서는 동일한 사무실이 아닌 다음에야 고객이 새로 가입한다고 해서 기존 고객에게 새로운 가치를 주지는 못한다. 또 위워크가 다른 부동산 분야에 진출하는 확장을 시도할 수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 막대한 비용이 든다. 한마디로 위워크는 테크 기업이 아니라 오히려 아날로그적인 성격이 매우 강한 기업이다. 하지만 손 회장이 혼자서 견인하다시피 한 470억 달러에 이르는 위워크의 가치는 이런 점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듯 지나치게 높게 책정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IWG8 라는 사무실 공유 기업과 위워크를 비교하면 쉽게 답이 나온다. 연 5억 달러의 수익을 올린 IWG의 기업 가치는 37억 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위워크는 연 19억 달러의 적자를 봤지만 기업 가치는 470억 달러에 이른다. IWG는
3000곳에서 250만 명의 고객으로부터 연 34억 달러의 매출을 올린다. 위워크는 528곳에서 50만 명의 고객으로부터 연 18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두 기업은 임대 공간 사이즈만 비슷할 뿐 모든 부분에서 IWG의 규모가 훨씬 큰데 기업 가치는 위워크가 10배가 넘게 높다. 이런 상황은 IWG CEO 마크 딕슨(Mark Dixon)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위워크와 다른 부분이 무엇인지 열심히 찾아봤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두 번째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손 회장이 투자 기업의 창업자에게 아무런 구속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손 회장은 자신이 투자한 돈을 잘 이용해서 기업을 발전시키고 수익을 내라고 종용한 게 아니라 단지 미친 듯이 빠르게 성장할 것을 요구했다. 창업자가 쉽게 모럴헤저드나 독선에 빠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 이는 위워크뿐 아니라 손 회장이 많은 투자를 한 우버에도 해당되는 얘기다.

이로 인해 위워크는 성장하는 데만 신경을 쓴 나머지 기업의 본질인 경영 자체를 등한시했다. 스타트업뿐 아니라 모든 기업은 부침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을 겪으면서 배우고, 성장하고, 살아남는다. 하지만 초기에 거액을 투자받으면 그런 경영 전반에 대한 고민을 덜 할 수밖에 없다. MIT 슬론경영대학원 빌 올렛 교수는 “배고픈 개들이 사냥을 잘하는 법”이라며 거액의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들은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손 회장의 잘못된 판단은 결국 소프트뱅크에도 피해를 안겼다. 소프트뱅크는 올해 4∼9월 156억 엔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1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위워크의 미래

9월17일 IPO가 연기됐고 같은 달 24일 뉴먼은 쫓겨나듯이 사퇴했다. 그리고 소프트뱅크는 약 100억 달러 규모의 구제 금융을 제공하면서 위워크의 지분 80%를 가진 최대주주가 됐다. 뉴먼이 친 사고 수습을 손 회장이 맡은 셈이다. 손 회장은 이후 10월에 있었던 비전펀드 투자자들과의 콘퍼런스콜에서 뉴먼을 너무 믿은 부분에 대해 사과를 했다. 한 기자회견에서는 위워크에 투자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뉴먼의 사퇴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은 회사에 엄청난 손해를 입힌 뉴먼의 퇴직 패키지가 1억8500만 달러 상당의 컨설팅비를 포함해 모두 10억 달러(1조 원)가 넘는다는 점이다. 위워크가 공개한 상장 심사 서류에 따르면 뉴먼은 자신의 지분과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위워크의 지배구조를 만들어 놓은 뒤 전권을 쥐고 흔들었다. 손 회장은 뉴먼을 내보내면서 그가 가졌던 위워크 의결권을 갖기 위해 어쩔 수 없이 10억 달러를 주고 그가 보유한 주식을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뉴먼 이후 새롭게 공동 CEO가 된 아티 민슨(Artie Minson)과 세바스찬 거닝햄(Sebastian Gunningham)의 주도로 위워크는 체질 개선을 서두르고 있다. 공유 오피스라는 핵심 사업 이외에 모든 사업에서 철수하고 그간 인수합병했던 스타트업도 모두 처분할 계획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직원 2400명을 정리해고하기로 했다. 그동안 현금이 없어서 직원을 내보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로 상황은 좋지 않다. 적자도 계속되고 있다. 올해 3분기의 순손실은 25억 2000만 달러로, 1년 전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났다. 현금보유고는 10억 달러 이상 줄어들었다. 조만간 보유한 현금이 모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예측도 나온다.

그렇게도 잘나가는 것처럼 보였던 위워크가 무너지는 데는 3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손 회장이 끌어올린 거품 낀 기업 가치와 뉴먼의 기행은 위워크가 처할 운명을 예고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뉴먼이 CEO에서 물러난 이후 사우나와 냉탕이 있던 그의 뉴욕 사무실은 회의실로 바뀌었고 그가 걸어놓았던 자신이 서핑하는 사진들은 모두 내려졌다. 그가 타던 자가용 비행기는 팔았다. 외람되게도 한때 세계 최초의 조(兆)만장자가 되고 영원히 살며 위워크를 화성까지 확장하고 세상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던 그다. 그 꿈은 이제 물 건너간 듯하다.

필자소개 김선우 경영 칼럼니스트 sunwoo_k@hotmail.com
필자는 브리티시컬럼비아대에서 인문 지리학을 전공했고 워싱턴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12년 동안 동아일보와 DBR에서 기자로 일했다. 미국 워싱턴주에 거주하면서 네이버 비즈니스판, IT 전문 매체 아웃스탠딩 등에 미국 IT 기업 관련 글을 쓰고 있다.


철조망이 쳐진 깡촌에서 ‘서핑족의 성지’로
도시에선 꿈도 못 꿀 경험에 집중하라

281호 (2019년 9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로컬 비즈니스가 실패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강원도 양양을 젊은 서핑족의 성지이자 동해안의 핫플레이스로 만든 주역인 박준규 서피비치 대표는 과거 강원도 고성의 알프스스키장과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일하면서 로컬 비즈니스의 A부터 Z까지를 배웠다. 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공간 비즈니스가 성공하려면 특정 레저와 같은 콘텐츠에 지나치게 의존하기보다는 플랫폼에 집중해야 하며 트렌드를 선도하는 2030 타깃 고객층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에 따라 ‘100% 청춘을 위한 바다’를 만들겠다는 포부로 동해안에 국내 최초의 서핑 전용 해변을 ‘창조’했다. 박 대표가 해변을 운영하면서 정립한 로컬 비즈니스의 세 가지 성공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타깃 고객이 도시에서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로컬에서 기대하는 콘텐츠를 제공해야 한다. 둘째, 오래 돌아가더라도 원주민과 대립해서는 안 되며 주변 지역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끼쳐야 한다. 셋째, 로컬은 도시보다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운 만큼 동료들을 귀하게 여기고 근무 만족도에 신경 써야 한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이승빈·송지은(숙명여대 경영학부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양양, 홍천, 횡성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강원도 산골짜기 안에서도 ‘끼인 동네’의 대표주자라는 점이다. 강릉과 속초 사이에 낀 양양, 속초와 춘천 사이에 낀 홍천, 춘천과 원주 사이에 낀 횡성. 주위 도시의 그늘에 가려 관광객의 발길이 유독 뜸하고 여름 한 철 장사도 쉽지 않다 보니 이곳 주민들의 마음속엔 설움이 많다. 텃세가 심하다는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외지인을 배척한다고 보기엔 애당초 포용을 학습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중에서도 강원도 양양의 인구는 지난해 기준 약 2만7000명, 지난 20년간 강원도 18개 시·군 가운데 인구 규모 16위 하위권을 지켜 왔다. 면적은 629.32㎢로 속초의 3배에 달하지만 약 7000표만 얻으면 군수에 당선될 정도로 작은 커뮤니티다. 표 하나, 사람 한 명이 귀하디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최근 이 인적 드문 깡촌에 믿기 힘든 변화가 생겼다. 전체 인구의 20%이상이 65세가 넘던 초고령 동네가 지난 몇 년 동안 대한민국 2030 청춘들의 집결지로 급부상한 것이다.

2015년까지만 해도 허가 없이는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고 군사용 철조망만 덩그러니 쳐 있던 해변을 구릿빛 피부의 젊은 서퍼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낮의 백사장에는 여성들이 비키니를 입고 돌아다니고, 해먹이나 비치 베드에 한가로이 드러누운 사람들은 코로나 맥주와 수제 버거를 즐긴다. 평화로운 해변은 밤이 되면 180도 다른 얼굴로 변신한다. 클럽 DJ의 선곡과 파도 소리가 한데 어우러진 페스티벌과 댄스파티의 향연이 펼쳐지면서 광란의 밤이 시작된다. 동남아 보라카이나 발리의 해변, 스페인 이비사섬에나 등장할 법한 이색 풍경을 강원도 양양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양양이 동해안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비결은 무엇일까. 이런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있기까지는 몇 가지 중요한 변곡점이 있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양양을 잇는 고속도로가 개통된 것이 그중 하나다. 원래 서울에서 5시간은 족히 걸려야 도착했던 양양을 교통 체증이 없는 경우 1시간40분이면 갈 수 있게 되면서 동해안의 바다가 도시 생활에 지친 이들을 빨아들일 길이 뚫렸다.

그러나 단지 교통만으로 양양이 속초, 강릉 등 쟁쟁한 주변 휴양지들을 제치고 동해안의 명소로 떠오른 배경을 설명할 수는 없다. 특히 2018년 삼척에서 고성에 이르는 강원도 바다 6개 해수욕장의 하루 평균 피서객이 전년보다 30% 감소했다는 수치를 보면 더더욱 그렇다. 양양이 이런 동해안 바다의 불황마저 피해갈 수 있었던 차별점은 뭐니 뭐니 해도 바로 ‘서핑’에 있다.

양양의 해변을 ‘서핑족의 성지’로 만든 주역이자 모든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박준규 서피비치(라온서피리조트) 대표를 DBR이 만났다. 박 대표는 허허벌판이던 800m 길이의 군사작전 지역을 임대해 처음으로 ‘서핑 전용 해변’이란 이름을 붙이고, 바닷가에 컨테이너 달랑 두 대 놓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개장한 서피비치는 불과 4년 만에 연간 55만 명이 찾고 인스타그램에 매일 1000건이 넘는 인증샷이 올라오는 양양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강원도에서 태어나 도시로 진출했다가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박 대표로부터 그동안의 로컬 비즈니스 경험에서 배운 교훈, 그리고 양양의 ‘로컬 크리에이터(local creator)’가 될 수 있었던 성공 비결을 들어봤다.


로컬 비즈니스 실패의 원인
1. 스키장의 경험 - 리조트가 망하는 이유
박준규 대표는 평창군 진부면에서 태어난 강원도 토박이다. 강원도에서 나고 자란 그는 강원대 재학 시절이던 1996년, 국내 2호 스키장이었던 고성 알프스리조트에서 스노보드 강사 1기로 시작해 장장 8년간 스노보드를 가르쳤다. 10살 때부터 스키를 탔다는 그는 알프스리조트가 대한민국 스키의 성지이던 시절부터 경영 악화로 2006년 문을 닫기까지 흥망성쇠를 두 눈으로 생생하게 지켜봤다. 물론 수도권과 접근성이 좋은 다른 스키장이 생겨서였기도 하지만 알프스리조트가 망한 가장 큰 이유는 겨울 한 철 장사인 스키와 스노보드의 인기가 식어서였다. 평창의 용평스키장은 물론이고 전국 스키장의 경기가 전반적으로 다 기울고 있는 이유다.

박 대표는 리조트의 쇠락을 지켜보면서 스키나 스노보드 같은 특정 ‘콘텐츠’에만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면 이 레저가 더는 멋있어 보이지 않을 때, 더는 ‘핫’해 보이지 않을 때 사업이 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젊은이들이 레저를 즐기면서 스스로 더 멋있어지는 듯한, 트렌드를 앞서나가는 듯한 기분과 우월감을 느끼고 주변에 자랑할 수 있어야 하는데 스키나 스노보드는 이미 너무 흔해져 버린 것이다. 오히려 과거에는 체험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고 즐거웠다면, 어느 순간 스키를 잘 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상대적으로 못 타는 사람들은 위축되고 처음부터 배우기를 부끄러워하는 초보자들이 많아졌다. 여기에 가격도 싸지 않고 중국인 관광객까지 붐비다 보니 국내의 젊은 휴양객들이 등을 돌렸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어린 나이에 레저 산업에 몸담으면서 그가 얻은 교훈은 특정 ‘콘텐츠’보다는 리조트라는 ‘플랫폼’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스키장에서 반드시 스키와 스노보드만 타야 할 이유는 없었다. 드넓은 설원과 광장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나 많은데 공간이 가진 좋은 가치를 백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마음마저 들었다. 숙박이나 식음료 사업 기회도 더 잘 살릴 여지가 있어 보였다. 박 대표는 “가령 스키장 정상에 요가원을 지을 수도 있지 않나. 산꼭대기에 유리로 된 요가원을 지어놓으면 해가 뜨는 절경을 바라보며 요가를 하는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제공할 수도 있다. 외국에는 이미 꽤 많다는데 해보면 정말 기분이 짜릿하다고 한다. 이런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스키장을 떠난 박 대표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외국 생활과 비즈니스에 대한 호기심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마케팅을 공부하다가 1년 만에 중도 포기했다. 서울에서는 광고대행사를 차렸다가 3년 만에 쫄딱 망했다. 그러나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 ‘공간 비즈니스’에 대한 그의 신념은 더 굳어졌다. 반짝이는 아이템, 기발한 콘텐츠로 승부를 봐야 하는 사업은 신생 회사가 자본과 인력이 많은 곳을 따라갈 수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특히 사업 실패로 서울 생활에서 호되게 당한 경험은 그가 ‘로컬 비즈니스’로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다음에 사업을 한다면 정말 콘텐츠가 아니라 플랫폼에 주력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공간은 누구나 철학을 가진 사람이 만들 수가 있고, 일단 공간을 만들어놓기만 하면 그 철학에 공감한 아이템이 모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공간을 찾아온 사람에게 만족감을 주고 사랑받을 수만 있다면 그곳에서 빛이 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박 대표의 말이다.


2. 해운대해수욕장의 경험 ― 바다가 망하는 이유
이렇듯 박 대표의 막연한 구상에 숨을 불어 넣는 기회가 찾아왔다. 광고대행사 시절 친분이 있던 카드사와의 인연으로 BC카드에 취업해 일하던 때였다. 2011년 BC 모바일카드 광고 프로모션 때문에 해운대해수욕장을 방문했던 그는 당시 해운대에서 막 시작한 스마트 비치(smart beach) 사업에 한눈에 꽂혔다. 바다라는 매력적인 공간에 대해 배울 절호의 기회였다. 당시 초기 단계였던 스마트 비치 사업은 해수욕장의 파라솔이나 튜브 이용료, 식음료 등을 현금 결제 방식에서 카드나 손목 밴드를 충전해 결제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현대화 프로젝트였다.

사업 자체는 아직 체계도 없고 엉망이었다. 그러나 박 대표는 해운대가 백사장을 관리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만약 백사장을 삥 둘러싼 7000여 개의 리조트와 호텔 및 모텔 객실, 금수복국을 포함한 500개의 식음료(F&B) 매장 등을 하나로 묶어 스마트 결제가 가능한 온라인 플랫폼으로 만든다면 그가 원하던 공간 비즈니스를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 대표는 일을 배우기 위해 인력을 구하지도 않던 해운대해수욕장에 대뜸 이력서와 기획안을 들고 찾아갔다. 광고대행사 창업 경험이 있으니 광고주들을 해운대로 불러 모으겠다는 기존에 없던 역할까지 만들어 관리인을 설득했다. 해수욕장의 경우 광고주들이 지역 이장이나 계장 등을 찾아다니며 계약을 맺어야 하고 소통창구가 일원화돼 있지 않으니 행정상의 불편 사항들을 해결해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광고 수익 구조를 만들어주겠다며 3번을 끈질기게 찾아간 끝에 그는 결국 일자리를 얻어냈다.

박 대표가 2011∼2013년 해운대에서 일하면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은 바로 ‘2030 청춘’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광고주를 설득하고 캐시카우를 만들어내는 게 주된 업무였던 박 대표는 해운대에 광고, 협찬을 유치하는 게 녹록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워낙 해운대 관련 기사나 사진이 많으니 광고주들이 한 번쯤은 관심을 가지고 현장을 찾았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대다수가 한 번 둘러본 뒤 발길을 끊었다. “해운대는 바다의 ‘포지셔닝(positioning)’이 잘못돼 있었다. 바다가 망하는 이유는 어린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거나, 나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다. 대표 사례가 해운대였다.”

실제로 해운대 백사장에는 유치원, 초등학생들이 뛰어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밤만 되면 짧은 치마를 입고 진하게 화장한 중고생들이 이벤트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정작 광고주들이 원하는 타깃 고객층, 트렌드를 선도하고 구매력이 있는 소비계층은 어린이나 노인들이 많은 곳을 피했다. 겨우 광고 부스를 설치해도 금세 아기 이유식 주는 부스, 아이들이 에어컨 쐬러 오는 부스로 변해 버리기 일쑤였고 주변 편의점들만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는 결국 광고주가 떠나는 원인, 바다의 수익 기반이 약해지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해운대에서의 3년은 박 대표에게 바다를 가르쳐준 시간이었다. 그는 백사장에 시설물을 세우기 위해서는 건축 허가를 받기 전 해변을 임대하는 ‘공유수면허가’부터 먼저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곳에서 배웠다. 허가를 따내기 위한 각종 절차와 법령, 지역 주민들을 설득하고 각종 민원에 대응하는 요령도 터득했다. 연간 1000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고, 야간에 파티나 콘서트도 끊이지 않으며, 해안가를 따라 늘어선 수많은 건물주와 모텔, 식당 주인들을 상대해야 하는 해운대는 전국에서 가장 사업하기 까다로운 바다였다.

박 대표는 “해운대에서는 해변에서 사업하는 사장님 한 분 한 분이 모두 지역 유지이자 보통 힘든 분들이 아니었다. 패배감을 느끼는 순간도 많았다. 3년 정도 지나자 백사장에서 배울 수 있는 경험은 최대치로 쌓았으니 이제는 고향의 바다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라고 말했다. 이에 2013년 3월 박 대표는 부산을 떠나 다시 강원도로 향했다.


로컬 비즈니스 성공의 조건
박 대표는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강원도 동해안 바다에 사람들이 모이게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강원도 지역성을 살리고 싶다 해서 감자나 옥수수만 팔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촌이라고 오징어 축제만 하란 법도 없었다. 파라솔과 튜브, 횟집만 즐비한 바다도 따분하긴 마찬가지였다. 로컬은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지칠 대로 지친 이들이 훌쩍 떠나고 싶을 만한 완전히 낯선 공간이어야 했다. 이에 박 대표는 해변의 가치를 극대화해 전 세계 휴양객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기고 있는 동남아를 벤치마킹 모델로 삼았다. 사람들이 동남아 비치클럽에서 날밤을 새우며 뛰놀듯이 한 공간에 주간과 야간 콘텐츠가 다 있어야 했다. 핵심은 오직 ‘바다를 빛나게 하는 것’에 있었다. 박 대표는 “콘텐츠는 바뀔 수 있지만 진짜 아름다운 해변을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2013년부터 강원도 해안가를 따라 답사를 하며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광고 PT나 기획서 작성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1년여에 걸쳐 틈틈이 사업을 구상했다. 그가 원하는 조건은 세 가지였다. 첫째, 밤에 음악을 크게 틀고 파티를 해야 할 수도 있으니 민가에서 최소한 500m 이상 떨어진 해변이어야 했다. 둘째, 외국 휴양지에 온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국내에서 보기 힘든 일(一)자 해변이어야 했다. 해운대를 비롯해 90%의 대한민국 해변이 깊게 파인 만 형태의 유(U)자인 데 비해 대부분의 동남아 보라카이 휴양지 해변은 일자로 돼 있다는 점에서 착안했다. 셋째, 백사장의 너비가 50m 이상이어야 했다. 그래야 드넓게 펼쳐진 백사장의 광경을 연출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 같은 세 가지 조건에 맞아떨어지는 지역이 바로 양양이었다.

2014년 10월 수심이 얕고 파도가 고운 모래에 부딪히는 양양의 해변에 시선을 빼앗긴 박 대표는 이곳에서 사업을 하기로 했다. 기획안의 제목은 ‘양양 보라카이’였다. 그다음 해운대에서의 경험을 살려 사람 한 명 없고 철조망까지 쳐져 있던 군사 작전 지역에 공유수면허가를 신청했다. 그리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해변을 임대하고 약 10평 남짓 공간에 컨테이너 두 대로 된 사무소를 차렸다.

애초에 서핑은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비즈니스에 대한 의욕이 충만했던 박 대표에게 서핑이 수익성 측면에서 그리 매력적인 콘텐츠가 아니었다. 100m 바다에 튜브는 1000∼2000개씩 띄울 수 있지만 서핑보드는 100개만 띄워도 꽉 차 수용 인원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해변은 해수욕장이 아니라 구명 장비가 있어야 입수가 가능한 구역이었고, 서핑보드가 정식으로 등록된 구명 장비의 일종으로 튜브를 대체할 수 있다는 점이 박 대표의 눈길을 끌었다. 게다가 2010년 이후 스노보드 1세대들이 양양 죽도해변으로 건너와 스노보드와 유사한 서핑 숍을 하나둘 차리기 시작하던 상황이었다. 같은 1세대인 박 대표도 새로이 떠오르는 콘텐츠를 고려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긴 고민 끝에 박 대표는 해변에서 서핑 강습을 운영해보기로 했다. 새로운 플랫폼의 수익구조를 크게 네 가지, 서핑, 식음료(F&B), 기업 광고/파티, 숙박으로 나눠 기획했다. 그리고 이름 없던 해변에 ‘서핑 전용 해변’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붙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서핑 전용 해변을 만든 것이다. 박 대표가 경험을 통해 배운 로컬 비즈니스의 성공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고객에게 사랑받는 비즈니스
“도시가 줄 수 없는 것, 고객이 로컬에 기대하는 것을 줘라”
2030에 집중해야 바다가 건강해진다는 확신이 있었던 박 대표는 구체적으로 28세에서 38세까지의 구매력 있는 고객을 타깃으로 잡았다. 그리고 ‘100% 대한민국 청춘의 소유물’인 바다를 만들기로 했다. 처음에는 셔틀버스나 게스트하우스도 운영했지만 어린 학생들이 주로 필요로 하는 콘텐츠라고 판단해 과감히 중단했다. 돈을 내고 즐길 준비가 돼 있는 고객이라면 주로 자가용을 이용하고, 잠만 자는 곳인 게스트하우스보다는 펍과 라운지, 호텔, 리조트 등을 찾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 대표가 본 밀레니얼세대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최선을 다해 놀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서울의 ‘루프톱 신드롬’이 단적인 예다. 루프톱 임대료가 1층 건물과 맞먹을 정도로 인기를 끄는 것도 결국 평소와 다른 색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어 하는 열망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였다. 이들은 힘든 일상생활과의 ‘단절’을 원했다. 로컬은 그 열망을 가장 잘 충족할 수 있는 곳이었고, 고객이 원하는 경험을 제공해주는 것이 중요했다. 가령,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다고 해서 카페를 차려봤자 서울의 힙한 카페의 맛과 세련미를 따라가기는 힘들다. 공급자 중심 접근의 한계였다. 2030을 잡으려면 철저히 고객 중심으로,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동을 줘야 했다. 바다든, 산이든 고객들이 로컬에서 기대하는 기본적인 감정을 녹여내는 게 핵심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로컬은 도시보다 확실하게 저렴해야 했다.

그렇게 박 대표가 바다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서핑이었다. 사실 서핑은 1년에 한두 번 배워서는 잘하기 어렵고, 이듬해 휴가철 즈음이면 또다시 처음부터 배워야 할 정도로 몸에 익히기 어려운 레저다. 그는 이 때문에 서핑강습이 사실상 가르친다는 의미의 ‘강습’보다는 ‘체험’에 가깝다고 생각했고, 일회성 체험이라면 가격이 더 저렴해질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인근 해변에서 알음알음 서핑숍을 운영하던 로컬 서퍼들이 통상 1인당 8만∼10만 원까지 받던 강습료(보드 렌털 포함)를 6만 원으로 낮췄다. 처음엔 주변의 반발이 너무 심해 우선 7만5000원을 받았지만 다른 서퍼들에게 1년의 유예기간을 가지고 가격 인하의 효과를 지켜보자며 설득했다. 다행히 서핑의 인기가 올라가고 손님이 늘어나면서 주변에서도 가격 인하에 동조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렇게 가격은 지금의 6만 원이 됐다.

“스키장에서 일할 때 느꼈지만 보통 이런 리조트에 오는 분들은 1년에 한두 번 정말 어렵게 휴가를 내서 온다. 그런데 지역에 있으면 그 마음을 알기가 쉽지 않다. 한 철에 바짝 장사해 벌어야 하다 보니 조급하고 손님들 마음까지 헤아릴 여유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을 돈벌이로 보는 순간 동네도 망하고, 서핑도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박 대표의 말이다.

다행히 2015년부터 젊은이들 사이에서 점점 서핑 붐이 일면서 입소문만으로 방문자가 늘기 시작했다. 이런 호조 속에서 박 대표가 서핑 다음으로 떠올린 건 바로 코로나 맥주였다. 맥주의 왕인 코로나를 빼놓고 바다를 논할 수는 없었다. 이에 서피비치는 사업 초기부터 3년간 코로나 맥주와 계약을 맺기 위해 공을 들였다. 마침 코로나는 ‘코로나 선셋(corona sunset)’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전 세계 유명 해변을 선정해 프로모션을 진행 중이었고, 한국에서도 적당한 곳을 찾고 있었다.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박 대표는 연일 본사 담당자를 귀찮게 굴면서 양양을 방문해달라고 요청했다. 사실 ‘선셋’, 즉 일몰에 더 어울리는 바다는 당연히 동해안보다는 서해안이었다. 그러나 서피비치의 끈질긴 연락을 끝내 이기지 못한 코로나 담당자는 양양을 찾아왔고, 이날 하늘도 그를 도왔다. 좀처럼 보기 힘든 황홀하고 아름다운 석양이 양양의 바다를 물들인 것이다. 설악산 백두대간 넘어 양양의 노을은 코로나 담당자에게 감동을 안겨줬고 2016년 서피비치는 코로나와 계약을 따냈다.



2017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코로나 선셋 페스티벌’은 양양 서피비치가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고 급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스페인 이비사 등 유럽의 해변에서 주로 볼 수 있었던 세계적인 바다의 축제가 한국에서 열린다는 사실만으로 엄청난 화제를 모았고, 2017년 8월 마지막 주 열린 이 행사엔 1만∼1만1000명의 참가자가 몰렸다. 장당 4만5000원의 입장권이 아깝지 않고, 이런 축제를 찾기 위해 해외로 나갔다면 지불했어야 했을 비행기 푯값 아꼈다는 후기가 관련 기사 베스트 댓글에 올랐을 정도로 축제는 대성공이었다. 이후 ‘코로나 선셋 페스티벌이 열린 곳’이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더 많은 인파가 밀려들기 시작했고, 서피비치는 해변 파티의 메카로 떠올랐다. 서핑이라는 주간 콘텐츠와 음악과 춤이라는 야간 콘텐츠를 모두 잡게 된 것이다. 박 대표는 “바다에서 젊은 사람들이 가장 원하고 기대하는 것을 줘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옛날 해안가에 돗자리 깔고 밤새 통기타 치던 문화가 이제는 클럽 DJ의 음악이 있는 축제 문화로 바뀌었을 뿐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힘들게 유치한 코로나라도 서울시내 바에서 마시는 것보다 저렴해야 한다는 원칙엔 변함이 없었다. 이에 서피비치는 서울에서 병당 약 8000∼1만 원에 파는 코로나 가격을 6000원 이하로 낮추기 위해 ‘5+1’ 행사를 진행했다. 코로나를 5900원 선에 즐길 수 있게 하는 파격적인 연중 프로모션을 추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서울 클럽에서 약 40만 원에 파는 모엣샹동 샴페인은 14만9000원에 팔기 시작했다.

서피비치는 또 이국적인 해먹과 비치 베드, 그늘막 등 시설 이용권과 코로나 맥주 한 병이 포함된 일일 패스를 1만 원에 제공하기로 했다. 맥주 1병 가격인 7000원을 제하면 사실상 3000원에 불과한 가격이다. 행인이 자리를 독차지하거나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요금을 받는다는 게 박 대표의 설명이다. “1인당 3000원이면 1만 명이 이용해봤자 3000만 원인데 이 돈 벌자고 요금을 받는 것은 아니다. 유료로 운영하는 것은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관리 차원이다. 어차피 서핑 강습을 듣고, 맥주를 마시고, 이용권을 구매하는 유료 손님은 전체의 10%에 불과하다. 90%는 공짜 손님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 90%가 우리의 해변을 SNS에 올리고 광고해주는 사람들이고, 서핑을 통해 만족감을 얻어가는 10% 외에도 90%가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박 대표의 말이다.


2. 주변 지역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비즈니스
“도시는 경쟁 때문에 망하고, 로컬은 ‘싸가지’때문에 망한다”
아무리 고향이라도 강원도로 돌아왔을 때 맨땅에서 사업을 시작하기가 말처럼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일단 바다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허가를 받는 것부터 일이었다. 해변을 임대하는 공유수면허가부터 레저 인가, 음식점 허가, 사설 건축물 허가, 구조물 축조 허가 등 받아야 할 허가가 18종에 달했다. 갑자기 나타난 외지인이 듣도 보도 못한 허가를 자꾸 신청하자 군청 공무원들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공연장 허가 같은 경우 강원도 전역에서 민간인이 신청한 첫 사례였다. 박 대표는 진입장벽을 뚫기 위해 매일 기획안을 들고 군청을 순회하면서 공무원들을 설득했다. 아주 작게라도 허가를 따낸 뒤 차근차근 범위를 늘리고 기간을 연장하며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하지만 허가가 끝이 아니었다. 외지에서 온 낯선 청년이 바다에서 전례 없는 일을 하기 시작하자 경계하는 지역 주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사업할 때는 경쟁이 너무 치열해 서로 무리해서 몸집을 키우는 게 문제였다. 반면 로컬은 경쟁은 없었지만 주위 시선이 따가웠다.



2016년 건물이 지어지고 맥주와 버거 등을 파는 식음료(F&B) 사업이 본격화하자 ‘치킨 팔지 말아라’ ‘상한 햄버거를 파는 것 같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민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키니를 입고 까맣게 태닝한 채 인근 상점을 활보하는 젊은이들이 지역 어른들 눈에는 풍기문란으로 비칠 뿐이었다. 민가에서 한참 떨어진 해변에서 공연장 허가를 받고 음악을 트는 데도 경찰까지 대동해 항의하는 동네 어른들도 있었다.

그러나 워낙 작은 커뮤니티에 군수, 군의원까지 서로 다 안면이 있기에 이런 민원 하나하나 모른 척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특히 공유수면허가 등 대부분의 허가가 3년 단위로 갱신된다는 점에서 군청이 서피비치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엄청 많은 민원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정말 억울했다. 적법하게 사업하고 잘못한 게 없는데 경찰까지 왔다 간 날에는 억울한 마음에 밤새 술을 진탕 먹기도 했다. 그런데 다음날 문득 ‘누군가 나를 이토록 싫어한다면 뭔가 내 잘못도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지역 주민들이 오래도록 살던 터전을 갑자기 바꿔놓았는데 이 변화가 이분들이 원하는 방향과 다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자 처음엔 상식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던 반응들에도 좀 너그러워지고 어르신들을 존중하는 마음도 생겼다. 경쟁이 없는 곳에서 사업하고, 내 것이 아닌 바다에서 돈을 벌고 있으니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박 대표의 말이다.

이에 박 대표는 오래 돌아가더라도 지역과 대립각을 세워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많은 시간을 할애해 사업을 하는 이유와 철학에 대해 지속적으로 알리기로 했다. 매년 두 차례씩 관광버스를 빌려서 주변 상권의 어르신들 30∼40명씩과 함께 여행을 다니고, 해마다 세 번씩 마을 잔치도 열었다. 또 지역 환원을 위해 번 돈의 일정 비율은 마을 발전 기금이나 장학금 등으로 기부했다. 인근 군부대를 대상으로는 무료 서핑 강습까지 진행했다. 허가를 받을 때마다 주변 동의서에 서명을 구하는 일도 점점 일상이 됐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도 점점 경계를 누그러뜨리고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상권이 살아날수록 인심도 넉넉해졌다. 처음에는 서핑을 위해 찾아온 젊은이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주민들도 청춘들이 점점 양양의 바다를 찾아오고 지갑을 열자 바다가 본인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강원도 지자체 차원에서 운영 기간을 45일로 제한하는 해수욕장과 달리 서핑은 연중 운영에 제한이 없어 자연히 주변 펜션 등 숙박업소나 식당 매출도 올라갔다. 최소한 날씨가 허락하는 5월부터 10월까지 6개월은 수요가 꾸준했다. 평당 70만∼80만 원이던 인근 땅값은 2000만 원으로 올랐고, 이제는 오히려 젠트리피케이션 1 을 걱정해야 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양양 죽도해변에 자리 잡았던 초기 서퍼들은 임대료가 싼 곳을 찾아 인구해변 등 주변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제는 김장철이면 동네 분들이 박 대표에게 보낸 김치가 70통에 달할 정도로 서피비치는 로컬의 일부가 됐다.

“도시에서는 경쟁 때문에 망하는데 로컬에서는 ‘싸가지’ 때문에 망한다. 지역에는 기존에 일하던 분들이 있고, 새로운 로컬 비즈니스는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이들의 생활방식에 소음을 일으킨다. 기존 상인이나 거주민 중에는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도,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동네 분들은 화가 나면 마을 진입로를 경운기로 막아 버리고 군청에다 민원을 넣어 허가를 못 내게 방해하기도 한다. 조금 잘나간다고 이런 지역 민심을 간과하거나 소위 ‘싸가지’ 없게 굴었다가 한순간에 망한 사업도 많다. 이처럼 동네 분들의 미움을 사면 절대 사업할 수 없다. 원주민들을 공경할 마음의 준비 없이 로컬 비즈니스를 시작해선 안 된다.” (박 대표)


3. 동료들이 힘들지 않은 비즈니스
“로컬은 도시보다 사람이 귀한 곳, 사람을 중히 여겨야”
로컬 비즈니스가 힘든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사람을 구하기가 정말 어렵다는 점이다. 서핑과 파티가 끊이지 않는 이국적인 해변이 관광객들에게는 천국일지 몰라도 직원들에게는 아니었다. 서피비치 자체는 아름답게 가꿀 수 있지만 서피비치를 벗어나면 영락없는 강원도 시골이기 때문이다. 연고도 없는 곳에서 열악한 주변 인프라, 쉴 때 영화 한 편 보기 힘든 삶을 견딜 수 있는 젊은 직원들은 많지 않았다. 동료들 외에는 지방에 친구도, 가족도 없는 경우가 많다 보니 ‘퇴근 후의 삶’ ‘워라밸(워크 앤드 라이프 밸런스)’도 다른 세상 얘기였다. 처음에는 서울 생활에 질려서 도망치듯 지방으로 온 직원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서울에 있는 또래와 처우를 비교하고 뒤처지는 느낌에 초조해했다. 1∼2년 정도는 괜찮다가도 3년이 고비였다. 20대의 젊은 혈기와 열정으로 뛰어들었다가 배우자를 찾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야 하는 30대에 접어들면 도시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다고 양양 출신을 찾기엔 도시 생활을 경험해 본 사람들만큼의 전문성과 경험을 가진 인력이 드물었다.

시골살이 못지않게 힘든 것은 바로 불안정성이었다. 레저 산업 종사자들은 주로 시즌에만 바짝 수입이 있는 비정규직이고, 시즌이 지나면 벌이가 끊기는 경우가 많았다. 비수기와 성수기의 편차가 너무 큰 탓이다. 서피비치도 지금은 꾸준히 고객이 유입되고 있지만 사업 초반 방문객이 별로 없을 때는 극심한 보릿고개를 겪었다. 개장하고 첫 여름이 지난 직후인 2015년 8월엔 불확실한 미래를 견디지 못한 직원들이 단체로 그만두는 일도 있었다.




이에 박 대표는 보릿고개를 넘고 수익이 나기 시작하자 레저 업계에도 1년 내내 연봉을 받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수입 구조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성수기 기준 100명에 달하는 직원을 모두 정규직으로 채용할 여력은 없지만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기로 한 것이다. 곧바로 직원 20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9개월 근무한 뒤 3개월은 100% 유급 휴가로 운영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한여름에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인내심의 한계에 이르더라도 남은

3개월 휴가를 바라보며 동기 부여할 수 있게끔 만든 것이다. 작년에는 직원들과 다 함께 발리로 휴가를 떠나기도 했다. 물론 이런 혜택을 준다고 직원들이 이탈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유급 휴가가 지나고 영영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박 대표는 지금의 방식이 정답은 아닐지라도 사람을 중히 여겨야 성공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동료들을 정말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 사람들이 떠나면 비슷한 정도의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 와서 빈자리를 메우기까지 오래 걸리고, 결국 불편을 겪는 건 고객들이다. 3개월 유급 휴가를 도입한 것도 최소한 1년의 4분의 1은 직원들이 온전히 회사 소속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라는 의미였다. 회사가 직원의 행복을 만들어줄 수는 없고, 떠나는 것을 말릴 수도 없다. 그러나 일하는 동안만큼은 최대한 덜 힘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올해는 서피비치와 조금 떨어진 몇몇 지역에 직원들의 사택을 마련해 일과 삶을 분리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지속가능한 로컬 비즈니스

현재 서피비치의 주요 수익 모델은 기업 광고다. 바다를 찾는 청춘에게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경험을 제공하고, 공간에 대한 고객들의 사랑을 기반으로 광고를 유치하자는 게 서피비치의 전략이다. 실제로 젊은이들이 양양의 바다로 모여들자 광고주들도 관심을 가지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작년 한 해 서피비치에서 촬영한 TV CF만 18편에 달한다. 박 대표에 따르면 다양한 브랜드 제휴와 광고 프로모션을 기반으로 매출은 2015년부터 매년 3배씩 늘고 있다. “우리의 목표는 손님 1인당 서피비치에서 10만 원 이상 쓰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 손님이 기분 좋게 도시로 돌아가고, 다시 찾아오기 때문이다. 서피비치란 이름도 의도적으로 홍보나 브랜딩을 하지 않는다. 바다 그 자체로 빛나야 오래 생명력을 유지하는 명소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가령, 서피비치에 맥심 ‘카누’ 팝업스토어(임시 매장)를 운영하며 해변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공짜 아이스커피를 나눠주는 것도 단기적으로 서피비치의 커피 매출 손실을 가져다주지만 고객 경험을 극대화해 장기적으로는 더 도움이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올해 한시적으로 운영한 이 스토어는 ‘인생 사진’을 남길 수 있는 인스타그램 포토존으로 떠오르며 더 많은 고객을 양양으로 끌어당겼다.



박 대표는 서피비치를 ‘해변을 운영하는 회사’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양양의 바다에 ‘세련됨’의 이미지를 붙인 것을 지금까지 회사의 가장 큰 성과로 꼽았다. 그렇다면 박 대표가 꿈꾸는 로컬 비즈니스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바로 양양의 해변을 ‘100년 가는 관광지’로 만드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계속해서 2030 고객의 사랑을 받고, 지역 사회에 도움을 주고, 동료들이 떠나지 않아야만 가능한 목표다. 청춘이 바다에 기대하는 것, 2030세대가 도시에서 해소하지 못했던 열망을 채워주기 위해 노력하면 로컬 비즈니스가 글로벌 무대에서도 먹힐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2018 남북정상회담 당시 방한한 CNN 등 외신 기자들이 ‘한국에 철조망 쳐진 곳에서 서핑하는 곳이 있다’며 우르르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 아름다운 해변에 감탄하고 갔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철조망이 지금은 걷혀 아쉽긴 하지만 10년 안에 서피비치가 CNN이 발표하는 세계 10대 해변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콘텐츠는 바뀔지도 모른다. 해변에 풀빌라 리조트를 만들 수도 있고, 스시 한 점을 1000원에 파는 스시 바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은 동남아에서 배울 것도 많다. 그러나 강원도의 바다가 훨씬 깨끗하고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바다를 오래도록 사랑받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박 대표의 말이다.

양양 = 김윤진 기자 truth311@donga.com





DBR Case Study: 신선 식품 새벽 배송 업계의 흑자 기업 ‘오아시스마켓’

온•오프 시너지 효과 ‘재고 폐기율 0%’
유기농 산지와 10년 신뢰가 고객 신뢰로

302호 (2020년 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극심한 출혈 경쟁이 한창인 신선 식품 새벽 배송 시장에서 오아시스마켓이 ‘업계 유일의 흑자’ 기업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1. IT와 유통에 두루 정통한 창업자가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저비용 고효율’ 물류 시스템을 구축했다. 식품의 발주부터 입고, 선별, 포장, 배송에 이르는 전 공정을 모바일 소프트웨어로 연동하고 현장 인력의 최단 동선을 구현해 물류비를 절감했다.

2.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넘나드는 옴니채널 전략을 활용해 새벽 배송 ‘재고 폐기율 0%’를 달성했다. 직영 매장 기반의 오프라인 물류 흐름 중간에 온라인 새벽 배송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재고 관리비를 줄이고 수요 변동에 유연하게 대처했다.

3. 국내에서 유기농 재배를 처음 시작한 산지들과 10년 넘게 쌓아 온 탄탄한 네트워크, 색소와 첨가물을 뺀 깐깐한 상품 소싱 역량을 바탕으로 ‘유기농 식품을 일반 식품보다 싸게 판다’는 생협의 포지셔닝을 온라인에 그대로 이전, 충성고객을 확보했다.



‘업계 유일의 흑자 기업.’

신선 식품 새벽 배송 업체 ‘오아시스’에 따라붙는 수식어다. 쿠팡, 마켓컬리, 헬로네이처 등 초기 시장 개척자들이 격전을 벌이고, 신세계 SSG닷컴, 롯데온, 현대백화점 등 유통 공룡들이 가세한 ‘새벽 배송 춘추전국시대’에 상대적으로 영세한 축에 속하는 이 기업이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코로나19 사태로 국내 새벽 배송 비즈니스의 성장세가 가팔라지면서 1조 원 규모의 시장이 됐지만 막상 업체들은 물류 인프라 구축과 시스템 고도화를 위해 막대한 출혈을 감수하고 있다. ‘새벽 배송=적자’ 공식이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다. 쿠팡의 지난해 영업적자는 7205억 원에 달하며, 마켓컬리와 SSG닷컴도 각각 986억 원, 818억 원의 적자를 견디며 몸집을 불리는 중이다. BGF리테일에 인수된 헬로네이처도 155억 원 영업손실을 기록해 모회사에 시름을 더하고 있다.1 팔면 팔수록 손실이 불어나는 구조지만 일단 고객을 모으고 덩치부터 키워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자는 게 이들의 전략이다.



이렇게 거대 자본을 등에 업고 공격적으로 팽창 중인 업체들과 비교하면 오아시스는 ‘흙수저’ 신세나 다름이 없다. 올해 초 한국투자파트너스로부터 126억 원을 유치하기 전까지는 2013년 창업 이후 줄곧 무차입 경영을 고수해 왔고, 수차례 대형 투자 제의를 고사하면서 빚 없이 독자 생존의 길을 걸었다. 그러던 오아시스가 쟁쟁한 경쟁사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경계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바로 지난해 실적이 발표되면서다. 2019년 매출액 1424억, 영업이익 10억 원으로 적자 일변도의 레드오션에서 유일하게 흑자를 거둔 것이다. 새벽 배송이 ‘지속가능한 사업’이 될 수 있다는 걸 시장에 증명한 셈이다. 2018년 8월, 새벽 배송에 뛰어든 지 2년 만에 온라인 누적 회원 수가 올해 4월 기준 33만 명을 넘어섰고, 온라인 월 매출은 100억 원을 돌파하는 등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광고 한번 없이 오직 입소문만으로 거둔 성과다. “외형 성장보다 내실을 다지면서 가려 한다. 올해 첫 투자 유치도 자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성장성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하고 주주와 고객에 믿음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안준형 오아시스 재무기획 이사의 말이다. (DBR minibox I ‘오아시스 회사 소개’ 참고.)


DBR mini box I
오아시스 회사 소개


우리생협 출신들이 2011년 10월 설립한 오아시스는 조합원 중심으로 운영되던 생협 제도의 한계를 뛰어넘어 ‘유기농의 대중화’를 표방한다. 현재 대치/서초/잠실/분당서현/위례 등 서울•경기권 중심부에 유기농 식품 직영 매장을 운영하면서 24시간 주간 배송 서비스를 시행 중이며, 2018년 5월 온라인 몰 ‘오아시스마켓’을 오픈하며 새벽 배송 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다. 총 576명의 임직원이 물류배송, MD(구매/기획), 매장 관리, 재무기획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고, 경기도 성남에 제1, 2 물류센터를 두고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사인 지어소프트가 오아시스마켓 지분 79.43%를 보유한 모회사로 있다.






본격적인 사업 확장과 광고 마케팅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는 오아시스의 노련한 흑자 경영 비결은 무엇일까. 회사의 경쟁력은 오아시스의 창업자이자 모회사 지어소프트의 대주주인 김영준 오아시스그룹 의장의 이력에서 엿볼 수 있다. 김 의장은 삼성코닝, (구)LG실트론 등의 반도체 시스템을 설계하던 엔지니어 출신이자 우리생협(우리소비자생활협동조합)의 창립 멤버로 IT 개발과 유통업계 밑바닥부터 시작해 내공을 다져 온 인물이다. 산전수전을 겪은 창업자의 IT 개발 및 유통 노하우의 집약체가 오아시스인 셈이다. 친환경 유기농에 대한 오랜 고집과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효율적인 물류 시스템이 만나 신선 식품 새벽 배송의 새 활로를 열고 있는 오아시스의 성장 전략을 DBR(동아비즈니스리뷰)가 분석했다.

‘유기농 1세대’ 장인들의 온라인 진출

최상위 품질의 친환경 유기농 신선 식품을, 산지 직송으로,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한다는 오아시스의 사업 목표와 타깃 고객은 언뜻 보기에도 업계 선두주자인 마켓컬리와 겹친다. 생산자가 중간 유통 없이 상품을 바로 물류 창고로 직배송해 ‘농장에서 식탁까지(Farm to Table)’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고 가격 거품을 없앤다는 철학도 일치한다. 그런데 두 업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샛별 배송’을 앞세워 태생부터 온라인 플랫폼으로 출발한 마켓컬리와 달리 오아시스는 2018년 5월 온라인 사업을 본격화하기 훨씬 전부터 우리생협 출신 창업자와 경영진이 주축이 돼 2011년 10월부터 오프라인에서 차근차근 키워 온 회사라는 점이다. 오프라인 직영점만 37곳에 달한다. (그림 3)



한살림, 자연드림, 초록마을 등으로 잘 알려진 생협 모델은 중간 유통 과정을 건너뛴 생산자-소비자 직거래로 마진을 없애 친환경 유기농 농•수•축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한다. 가입비를 낸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고품질의 국산 먹거리를 파는 게 특징이다. 이들은 도매상을 거치는 대형마트나 슈퍼마켓, 전통 시장보다 수급 상황이나 가격이 안정적이라는 장점을 바탕으로 배추, 마늘, 양파 파동 등 신선 식품의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때마다 상대적인 가격 경쟁력을 입증해 왔고, 장바구니 물가에 민감한 주부들을 조합원으로 끌어들였다. 어린 자녀나 건강에 신경 쓰는 부모 등 온 가족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식자재를 싸게 판다는 점을 앞세워 대기업 유통 계열사들 틈바구니에서 충성고객을 확보해온 것이다.

오아시스를 창업한 김영준 오아시스그룹 의장은 1999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국내에 유기농 시장의 씨앗을 뿌리고 토양을 일군 ‘생협 1세대’다. 독일의 진공 장비 업체 레이볼트의 IT 엔지니어였던 김 의장은 삼성, LG 등 고객사를 상대로 반도체 시스템 설계를 자문해주다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회사의 합병 과정에서 시스템 사업부를 가지고 나와 독자적인 사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내 대기업들의 견제로 사업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자 수출입 면허 하나만 들고 새로운 아이템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당시 유통업계에서 일하던 친구의 권유로 뛰어든 사업이 바로 숯 생활용품 생산 및 유통이었다. 강원도의 숯가마를 인수하며 생활재 유통업에 처음 발을 들였다.

사업이 한창이던 어느 날, 한 제주도 감귤 농장에서 숯을 생산할 때 나오는 목초액을 대거 사가겠다고 연락이 왔다. 목초액을 유기농 귤 재배에 사용하고 싶다는 뜻밖의 제안이었다. 이 우연한 계기로 김 의장은 농약의 대체재로서 목초액이 가지는 가치에 눈을 뜨게 됐고, 일본 등 해외 논문을 참고해가며 우유, 감자, 채소 등의 재배에 필요한 목초액의 적정 비율을 연구했다. 목초액을 판매하면서 유기농법을 채택하는 농•수•축산물 생산자들과 자연스레 가까워졌고, 국내 최초의 생협인 정농생협과 아이쿱생협 등과도 숯 생활용품들을 납품하면서 친분을 쌓았다. 이렇게 만난 인연들과 의기투합해 2009년 우리생협을 발족, 초기 투자자금을 대고 발기인 대표가 됐다.

이처럼 국내에서 유기농 식품을 처음 생산한 1세대 장인들과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바른 먹거리를 제공하는 생협의 정신을 온라인에 구현한 게 바로 오아시스마켓이다. 여기에 김 의장이 대주주로 있는 IT 서비스 기업 지어소프트가 오아시스 지분 79.4%를 보유한 모회사로서 자회사의 온라인 영토 확장을 전방위적으로 돕고 있다.

김 의장은 대형 유통 채널의 틈바구니에서 생협 매장이 충성고객층을 공고히 했듯 온라인에도 틈새시장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2018년 오아시스마켓을 출범했다. 비영리법인이라는 한계, 조합원만을 상대하는 폐쇄성을 벗고 ‘고품질 신선 식품을 최저가로 판다’는 생협의 포지셔닝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봤다. 특히 대형 유통 채널의 경우 일반 식품 수요가 잠식당하지 않으려면 유기농 식품을 프리미엄 가격에 판매할 수밖에 없다는 약점도 간파했다. 유기농 식품을 이들 채널의 일반 식품과 비슷하게, 혹은 더 싸게 취급한다면 확실한 가격 우위가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림 4)



1. 최소 10년간 쌓은 탄탄한 산지 네트워크

오프라인에서 쌓아 올린 자산은 온라인에 고스란히 이식됐다. 생협 출신인 오아시스 주요 경영진을 포함한 10명 남짓의 오아시스마켓 MD(구매/기획 담당)들은 유기농 농•수•축산물 생산자들과 부대끼고 현장에서 부딪쳐가면서 함께 성장해 온 이들이었다. 1000여 곳에 달하는 오아시스마켓 공급사들의 70∼80%가 2009년 우리생협 출범 시점, 혹은 그 이전부터 최소 10년 이상 거래해 온 업체들이다. 한두 해 이어온 인연이 아니다 보니 마켓컬리, SSG닷컴 등 경쟁사들이 훨씬 비싸게 사가겠다고 구애해도 쉽사리 넘어가지 않는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덩치가 큰 업체들에 납품하는 게 고객 확보 측면에서 더 유리할 수 있음에도 생산자들이 오아시스와 관계를 이어 나가는 이유는 오랜 상생의 이력 때문이다. 최우식 대표는 “오아시스와 다른 유통사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생산자들의 이탈이 없다는 점이다. 회사가 계속해서 성장해 오기도 했고, 결제 조건을 생산자들에게 유리하게 맞춰주면서 10여 년간 큰 잡음 한번 없이 같이 커왔기 때문에 다른 곳들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다”고 말했다. 공급업체 이탈이 잦은 경쟁사들의 경우 친환경 유기농 식품의 조달이 끊기거나 불안정해지면 기준에 못 미치는 일반 식품으로 대체하기도 하는데 오아시스마켓은 이런 문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실제로 B2B(기업 대 기업) 상거래의 경우 물건을 납품하고 세금계산서를 보낸 뒤 한두 달 있다가 대금을 결제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오아시스의 경우 생산자들의 사정을 고려해 짧으면 1주일, 길면 보름마다 입금을 해왔다. 생산자가 원하면 선지급도 해줬다. 영세한 1차 산업 종사자들에겐 상품을 비싸게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금 회전이 빠른 게 더 중요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다 보니 생산자들도 오아시스를 물심양면 돕고 프로모션 등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이렇게 쌓인 신뢰야말로 오아시스가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산지 직송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배추 흉년이었던 작년 가을처럼 수급이 불안할 때조차 차질 없이 물량을 소싱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세상에 없는 가격’으로 불리는 파격적인 반값 할인도 이런 산지와의 직거래가 뒷받침하기에 가능한 행사다. 특히 전체 매출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PB(자사 상표) 상품의 경우 가격 혜택이 두드러진다. 오아시스와 생산자가 독점적으로 거래하면서 출시 단계에서부터 공동 기획해 구매가를 확 낮추기 때문이다. PB 상품은 공급업체가 경쟁 유통사에 납품하지 않아 1) 소비자가격 산정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2) 매달 일정량의 주문을 보장해주는 만큼 가격 협상력이 있다는 게 특징이다.

이에 따라 오아시스마켓의 초록색 앱 화면을 켜면 어김없이 뜨는 2800원짜리 계란(완전방사 동물복지 유정란 10구), 1500원짜리 우유(제주청정우유 900ml), 800원짜리 콩나물(무농약 제주콩 콩나물 300g) 등의 ‘킬러 콘텐츠’들은 다른 곳에선 찾아볼 수 없는 가격을 자랑한다. 사재기를 막기 위해 ‘본 상품은 2개까지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는 제한을 뒀을 정도다. 한번 방문한 고객들이 다시 찾고 재구매율이 90%에 육박하는 이유도 “이게 가능하다고?”를 외치게 되는 가격 때문이다. 회사의 자체 분석 결과, 하루 평균 3만3000명이 다녀가는 이곳의 평균 구매 건수 6000건 중 약 90%가 기존 고객들의 주문이다.



2. 색소, 첨가물 없는 깐깐한 상품 소싱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식료품 비즈니스의 핵심은 최고의 ‘상품성’이다. 상품성 유지를 위해 빼곡하게 채워진 오아시스마켓의 상품 취급원칙(SPEC)표는 식품에 관한 회사의 철학을 반영하는 동시에 이 플랫폼에 입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짐작하게 한다. 생협 기준에 맞추다 보니 진입 문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표 1) 표에는 과일/채소, 곡식, 수산, 축산, 가공식품, 생활용품 등 카테고리별로 취급 원칙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예를 들어, 축산물은 닭, 돼지, 소 등 종류 불문 항생제 검사를 통과한 ‘무항생제’ 제품이어야 하고, 채소와 곡식, 수산물은 ‘무농약 인증’ 이상이어야 한다. 단, 일부 과일에 대해서만 예외적으로 무농약이 아닌 저농약 인증을 요구한다. 유기농 사과, 배처럼 1개당 가격이 1만 원이 넘어 저농약 제품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는 품목이 이런 예외다.

MSG와 발색제 등 각종 식품 첨가물도 허용하지 않는다. 첨가물이 몸에 직접적인 해를 가하진 않더라도 MSG 등을 사용하면 신선도가 떨어지는 제품의 결함을 감출 수 있어 최고의 상품성 유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다. 가령, 냉동 김치찜에 MSG를 넣으면 김치 품질이 안 좋아도 표시가 안 난다는 얘기다. 이처럼 오아시스마켓은 깐깐한 기준에 못 미치는 상품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아무리 인지도 있는 유명 식품 브랜드가 납품 제의를 하더라도 이런 기준을 통과하지 않으면 거부한다. 단기적으로 상품 품목 가짓수(SKU, Stock Keeping Unit)를 늘리는 것보다 ‘국산 친환경 유기농’이라는 명확한 기준을 유지하고 정체성을 지키는 게 장기적으로는 회사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최 대표는 “현재 6700가지 정도의 품목이 있는데 다른 곳과 비교해 적어 보일 수도 있지만 SKU를 늘리는 게 무조건 능사는 아니다. 여러 브랜드를 두지 않고 입점 기준을 통과한 제품만 엄선해서 그렇지 카테고리별로 ‘있을 건 다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기준은 오아시스마켓 전용 PB 상품을 만들 때도 그대로 적용된다. PB 상품을 기획할 때는 오아시스 브랜드 로고가 새겨지는 만큼 아예 처음부터 맞춤형 스펙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PB 상품에 대해서는 한층 더 깐깐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표 2) 한 예로, 오아시스의 ‘우리밀 비빔냉면’을 기획할 때는 MSG 등 첨가물을 빼기 위해 제품을 수정하고, 테스트하고, 돌려보내는 데 장장 6개월이 걸렸다. 상품기획 절차가 까다롭다 보니 때때론 조미료 없이 맛을 살릴 수 없다며 오아시스마켓 납품을 포기하는 업체들도 있다. 첨가물을 빼면서도 기존의 맛을 자연적으로 유지하는 게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라는 의미다. 이렇게 PB 상품 하나가 탄생하려면 김영준 의장, 최우식 대표 등 최고경영진이 총출동한 품질심의위원회를 거쳐야 한다. B2C 사업은 품질이 생명이기 때문에 경영진이 하나부터 열까지 체크한다.


탄탄한 산지 네트워크 덕분에 10명밖에 안 되는 MD로도 상품을 원활히 확보할 수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물론 신규 생산자도 계속 발굴하지만 기존 생산자가 안정적으로 물량을 뒷받침하고 있어 현 인력으로도 소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신생 공급사를 선정할 때는 먼저 제안해 오는 업체들을 상품 취급원칙표에 부합하는지를 기준으로 일반 직원들이 1차 스크리닝한다. 최초 스크리닝으로 기준에 안 맞는 90% 이상의 상품을 거르고, 1차 견적을 받은 상태에서 2∼3명의 신입 MD를 거치면 전체의 5% 미만만 남는다. 이렇게 통과된 상품만 베테랑 MD 전원이 참여하는 품질심의위원회에 올라가 최종 심사 대상이 된다. 오랫동안 유기농 신선 식품을 취급한 MD들의 입맛과 기준이 민감하고 까다롭다는 것은 품질로 승부를 보는 식료품 업계에선 강점이다. 온라인 식료품 비즈니스에 있어 가치가 떨어지는 상품의 입고야말로 최악의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다 보니 소수 MD의 경험치나 개인기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시스템적으로도 입점 가이드라인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명시해 심의의 통일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흑자 경영의 비결

그렇다면 이렇게 고품질 신선 식품을 저가에 팔면서도 오아시스가 흑자인 비결은 무엇일까? 흔히들 새벽 배송 적자의 원흉으로 경쟁 과열에 따른 과도한 마케팅을 꼽는다. 쿠팡과 마켓컬리가 지난해 광고비를 각각 1571억 원, 148억 원 사용하는 등 공격적으로 지출을 늘리고 유명 광고 모델을 기용하면서 수익성이 나빠졌다는 지적도 있다. 오아시스마켓이 광고 없이 강남, 동탄 등의 온라인 맘카페 커뮤니티와 오프라인 직영 매장에서의 입소문만으로 컸다는 점에서 이런 시각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이 같은 차이가 흑자와 적자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적자의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배송 서비스 자체에 수반되는 배송비, 포장비, 인건비, 창고 운영비 등 판매관리비에 있다. 물류 시스템 운영 및 재고 관리에 드는 비용을 최대한 줄이는 게 핵심이라는 얘기다. 오아시스는 판관비 절감에 온 힘을 쏟았다. 이 회사의 흑자 경영은 발주부터 입고, 선별, 포장, 배송까지 전 공정을 아우르는 ‘심리스(Seamless, 끊김 없이 매끄러운)’ 물류 시스템을 구축, 철저한 ‘비용 다이어트’에 성공한 결과다. 이 과정에서 모회사와의 시너지, 온•오프라인 시너지도 큰 몫을 했다.


오아시스의 성남 물류센터 전경

1. 모회사 시너지
- 물류 시스템 혁신해 ‘최단 동선’ 구현

새벽 배송이 만년 적자를 못 벗어나는 이유는 공격적인 물류센터 증설과 로봇 자동화에 드는 막대한 비용 때문이다. 알려졌다시피 쿠팡, 마켓컬리, SSG닷컴, 롯데온 등은 새벽 배송을 위해 수백억∼수천억 원을 들여 공격적으로 물류센터를 확장하고 있다. 전국 24개 지역에 물류센터를 보유한 쿠팡은 내년까지 대구, 고양 등으로 그 숫자를 2배 늘린다는 계획이고, 마켓컬리도 물류센터를 현재 장지, 죽전, 화도, 김포터미널 등 5개에서 더 확대하려 하고 있다. SSG닷컴도 지난해 말 문을 연 네오(NEO) 물류센터 3호점을 안정화해 하루 배송 물량을 최대 2만 건까지 처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들 센터는 모두 미국 아마존, 영국 오카도(Ocado) 등의 최신 로봇 자동화 시스템을 고가에 수입해 구축한 인프라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반면 오아시스마켓은 물류센터를 짓는 데 고작 20억∼30억 원을 투자하고, 자체 개발한 국산 자동화 시스템을 운영하면서도 하루 배송 물량을 경쟁사들과 별 차이 없이 소화하고 있다. 현재 성남물류센터만으로도 일 배송 물량을 최대 7만 건까지 감당할 수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회사에 따르면 다른 채널들이 일 배송 물량 1만 건을 소화하기 위해 약 600∼700명의 인력을 동원하고 있는 데 반해 오아시스마켓은 단 50명으로도 같은 양을 처리할 수 있다.

실제로 오아시스마켓 물류센터에서 교대 근무 중인 작업 인력은 다 합해서 185명에 불과하고, 일용직 없이 전부 정직원이다. 쿠팡 플렉스 등 구인 플랫폼을 만들어 공유 인력 관리로 혁신을 도모하는 곳들과 달리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되 개개인의 충성도와 숙련도를 최대한 끌어올려 업무 효율을 높이자는 게 회사 방침이다. 많은 회사가 ‘물류 인력’을 단순 근로 인력으로 치부해 아르바이트로 대체하지만 이들을 정규직 형태로 고용해 전문성을 가진 인력으로 키워내겠다는 게 오아시스만의 경영 철학이다. 향후 주문 건수 급증으로 도저히 물류 수요를 소화할 수 없게 되면 다른 형태의 채용을 고려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검토 대상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최근 코로나19로 새벽 배송 물류센터에서 확진자가 등장했을 때 오아시스의 방역이 상대적으로 수월했던 것도 이렇게 ‘스쳐 지나가는’ 일용직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아시스가 이처럼 적은 인력으로 효율적인 시스템을 운영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기계와 사람의 유기적인 협업에 있다. 컨베이어 벨트 등 공장 자동화 설비를 제어하는 PLC(Programmable Logic Controller) 기계와 모바일 앱/웹으로 전 공정을 미세 조종하면서 현장 인력의 불편을 최소화하고 가장 짧은 동선을 만들어내고 있다. 반도체 엔지니어 출신의 김 의장이 직접 국내외 물류센터를 탐방하고 공부하면서 하드웨어 제어 및 소프트웨어 개발을 진두지휘한 결과다. 창업자가 IT 시스템과 물류를 모두 이해하고 있다는 게 회사의 경쟁력이다. 실제로 회사는 일 배송 물량이 1000건 정도일 때까지 물류의 전 공정을 100% 수작업으로 진행하면서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편리하고 쉬운 방식이 무엇인지를 계속 고민했다. 이렇게 소위 ‘노가다 작업’에서 얻은 교훈을 소프트웨어 개발에 반영하고, 꼭 필요한 하드웨어만 구매한 결과가 오늘날 오아시스마켓의 ‘저비용 고효율’ 물류 시스템이다.


오아시스가 자체 개발한 물류 관리 앱 ‘루트(ROUTE)’

1. 소프트웨어

무엇보다 오아시스의 최대 경쟁력은 소프트웨어 기반의 ‘모바일 자동화’다.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새벽 배송의 물류 흐름을 알아야 한다. 새벽 배송 업체 물류센터에서 시간과 비용이 가장 많이 드는 작업은 소비자가 주문한 제품들을 보관 장소에서 꺼내는 ‘선별(Picking)’, 그리고 포장재에 넣는 ‘포장(Packing)’이다. 쉽게 말하면, 소비자들을 대신해 장을 봐주는 픽앤 패킹(Pick&Packing) 과정이 필요하다. 이 작업에선 얼마나 신속 정확하게, 실수 없이 주문 제품을 장바구니에 싣고, 다시 포장재에 옮겨 담느냐가 관건이다. 문제는 업체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이 품목의 가짓수가 수십만∼수천만 가지가 넘어간다는 점이다. 직원들이 일일이 바코드(RF) 인식기를 들고 일련번호를 찍으면서 제품을 찾아다니다 보면 동선이 하염없이 길어지고, 사람의 손을 거치다 보니 실수도 생긴다. 작업자가 헤매지 않도록 헤드셋을 끼면 담아야 할 제품 일련번호를 알려주는 ‘AI 음성 안내 시스템’을 도입한 업체도 있지만 이 역시 소음이 많은 물류센터의 현실과는 잘 맞지 않는다. 아마존 물류센터 직원이 온종일 이동하는 거리가 50∼70㎞에 달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형 업체들이 값비싼 최신 로봇들을 동원하고 있지만 현재 기술 수준으로 자동화할 수 있는 작업 물량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100% 자동화는 아직 허상에 가깝다는 의미다. 아무리 대형 유통업체들이라 할지라도 수십만∼수천만 가지 품목마다 개별적으로 로봇을 두는 데 요구되는 비용과 공간을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없고, 한 로봇이 여러 품목을 선별하다 보면 이곳저곳 불려 다니다가 작업 동선이 꼬일 수밖에 없다. 결국, 로봇이 대체할 수 있는 업무는 기껏해야 500∼600가지 품목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전부 수작업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현재 새벽 배송 업체들은 작업자 동선을 줄이기 위해 물류센터를 여러 개로 쪼개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냉동, 냉장, 상온 등 최적 보관 온도에 따라 물품들을 구분하고, 각각의 전용 물류센터에서 개별적으로 픽앤패킹을 진행하는 식이다. 통상적으로 소비자가 냉동, 냉장, 상온 제품을 동시에 주문했을 때 아침 문 앞에 박스가 3개씩 도착하는 것도 물류센터가 달라서다. 이렇게 냉동, 냉장, 상온 센터별로 각기 다른 장소에 다른 인력이 배치되다 보니 인건비, 포장비도 배로 들고 배송을 위해 합치는(합포장) 절차까지 추가된다.


반면 오아시스마켓은 같은 문제를 모바일 소프트웨어로 해결했다. 우선, 자체 개발한 스마트폰 앱 ‘루트(ROUTE)’로 제품의 발주, 입고, 보관부터 선별, 포장, 배송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모바일로 연동했다. 이는 180도 다른 물류센터의 풍경을 연출한다. 스마트폰을 들고 출입하는 것조차 금지된 타사 물류센터들과 달리 오아시스마켓 물류센터에서는 전 직원이 스마트폰 앱을 깔고 액정 화면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보면서 움직인다. 바코드 인식기 대신 스마트폰으로 상품주문서의 QR 코드를 찍으면 소비자들의 주문 내용과 상품 위치가 화면 창에 뜨고, 시키는 대로만 따라가면 최적 동선과 순서로 움직이면서 장을 볼 수 있다. 장바구니 15개가 실린 대형 트레이에 고객이 원하는 상품을 모두 담는 데 10분이면 된다. 무엇을 담아야 할지부터 제품의 여정이 화면에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바코드 일련번호만 찍을 때보다 직관적이고 실수도 적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고기처럼 상하기 쉬운 민감 상품의 경우 사진도 찍어 첨부해 기록을 남기도록 했다.

초보도 금세 익힐 수 있을 정도로 UX/UI도 간단하다. 필요하면 물품 보관 장소를 옮긴 뒤 손쉽게 앱에서 위치를 변경하면 되고, 재고가 곧 떨어질 것 같으면 ‘결품’ 버튼을, 실수로 빠뜨린 게 있으면 ‘누락’ 버튼을, 제품에 이상이 있으면 ‘훼손’ 버튼을 눌러가며 재고를 요청하거나 입고 예정인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유기적으로 연동된 시스템을 바탕으로 오아시스마켓은 작업자들의 ‘장보기 공간(Picking Zone)’을 획기적으로 좁혔다. 냉동, 냉장, 상온 물류센터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도 평균/최대 주문량을 고려해 많이 팔리는 제품 위주로 배치한 뒤, 부족한 재고나 적게 팔리는 제품을 요청할 때마다 바로바로 채워주는 인력을 뒀다. 모바일로 작업자들 간 실시간 소통과 호출, 수시 응대가 가능한 만큼 30분에 한 번이든, 1시간에 한 번이든 떨어지는 물량을 장보기 공간 안에 채워 넣어줄 수 있다. 이로 인해 직원들은 모든 제품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고 소비자들은 냉동, 냉장, 상온 제품들을 한 박스 안에 받아볼 수 있다.

이 밖에도 발주, 입고, 배송, 고객센터, 직원 성과 평가 등까지 모두 모바일로 이뤄진다. 가령, 배송 완료 후 앱에서 ‘도착’ 버튼 하나만 누르면 고객한테 문자가 발송된다. 또 고객센터에서 삼겹살에 비계가 많다는 등의 불만이 접수되면 곧장 앱에 표시가 되고, 픽앤패킹을 맡은 물류센터 담당자에 전달된다. 담당자는 이상 여부를 확인한 뒤 다른 상품에 비슷한 문제가 발견되면 ‘출고 정지’ 버튼을 누른다. 출고 정지되는 즉시 문제가 MD에게 보고된다. 이렇게 모든 과정이 모바일로 연동되다 보니 문제점을 파악하기도 쉽고 실수 하나하나가 빠짐없이 기록돼 직원 성과 평가도 정량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2. 하드웨어

공장 자동화 시스템을 컨트롤하는 PLC 기계를 현장 인력의 편의에 따라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도 오아시스의 강점이다. 가령, 효율적인 공간 활용을 위해 재고의 보관 위치나 높이를 바꿔야 하거나 컨베이어 벨트의 이동 속도를 늦춰야 할 때 바로바로 수정하고 응급 처치할 수 있다는 얘기다. 김 의장은 과거 반도체 자동화 라인의 온도를 몇 도로 유지해야 할지, 설비를 몇 m/s 단위로 움직여야 할지 등을 미세 조종했던 PLC 작업 노하우를 물류센터에 고스란히 적용했다. 그 결과, 포장용 박스를 어느 방향으로 이동시킬지, 모터를 언제 멈출지, 어느 구역의 선반에서 물건을 빼 올지 등 물류센터 하드웨어의 디테일 하나하나에 그의 손길이 닿아 있다.

통상적으로 다른 유통사들에서는 독일 지멘스, 미국 AB, 일본 미쓰비시와 파나소닉 등의 외국산 PLC 기계를 수입해 단순 운영만 하다 보니 국내 엔지니어들이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어렵다. 기계를 들여오는 데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투입될 뿐만 아니라 소스파일 등이 특허로 보호받는 기밀이라 뭐 하나 수리하거나 조작하려면 해외 기술자를 불러야 한다. 더욱이 쿠팡, 마켓컬리 등에서 근무하는 수백∼수천 명의 전산 개발자들도 코딩에는 능숙하지만 실물을 다루고 기계의 손발을 움직이는 PLC 제어에 특화된 인력들은 아니다.

오아시스마켓의 차별점은 바로 국내 현실에 맞는 유연한 시스템 설계가 가능하다는 데 있다. 가령, 현재 외국 물류 시스템들의 경우 생산자들이 보낸 박스에서 제품을 꺼내어 플라스틱 박스에 정리하고, 그 플라스틱 박스에서 제품을 꺼내어 또다시 포장하는 작업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과일, 야채 등 신선 식품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손을 타는 순간 신선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이렇게 중복 과정을 거치다 보면 품질이 훼손된다는 문제가 있다. 오아시스는 1차 생산자들이 최적의 형태로 포장한 박스를 굳이 뜯어서 플라스틱 박스에 정리하는 과정 자체가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이라고 판단, 이 과정을 생략하도록 시스템을 손질했다. 제품을 플라스틱 박스로 옮기지 않고 생산자로부터 배송된 처음 상태 그대로 보관하게끔 한 것이다. 이런 시스템 변경이 가능했던 것도 제품 보관 장소를 자유자재로 변경, 추적하고, 빈 박스를 자동 회수하는 등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한 기계 제어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2. 온•오프라인 시너지
- 직영 매장 활용해 ‘재고 폐기율 0%’ 구현


오아시스는 온•오프라인 시너지를 바탕으로 재고 비용도 절감하고 있다. 사실 신선 식품 배송의 치명적인 약점은 ‘음식이 상한다’는 데 있다. 신선도 유지를 위해 매일 엄청난 양의 재고를 폐기해야 한다는 의미다. 온라인 식료품 비즈니스가 적자가 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새벽 배송 업체들이 빅데이터와 AI 기술을 동원해 수요 조사와 판매량 예측에 사활을 거는 것도 이 같은 재고 폐기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특히 온라인 비즈니스의 경우 입고, 보관, 배송 등 기간을 고려해 통상적으로 판매기한을 유통기한보다 짧게 잡는다. 충분한 여유를 두지 않으면 고객의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자칫 유통기한이 지나거나 임박해 소비자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판매기한을 지나면 과감히 버려야 하기에 주문량 예측 오차는 매출 손실과 직결된다.

그렇다고 무조건 보수적으로 수요예측을 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재고가 부족하면 출고를 못 해 손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재고를 넉넉히 확보해두지 않으면 폭발적인 수요 증가에 유동적으로 대응하기도 어렵다. 마켓컬리가 데이터농장팀을 별도로 두고 주당 258만 건의 소비자 데이터 분석을 전담하게 하는 것도 결국 이 주문량 예측 정확도를 높여 폐기율을 낮추기 위해서다.

그런데 폐기율 1∼2%를 다투는 업체들 틈에서 오아시스마켓은 ‘재고 폐기율 0%’를 달성하고 있다. 매출액이 1000억 원이고 원가가 75%라 가정할 때 1%의 폐기율 차이는 연간 7억5000원의 비용을 아끼는 재무적 효과를 가져온다. 불가능해 보이는 0%의 배경에는 바로 온•오프라인 시너지가 있다. 대치, 서초, 잠실 등 접근성이 좋은 서울 시내 곳곳에 37개 직영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장점이 여기에서 발휘된다. 통상 오프라인에서는 오늘 오후∼저녁에 물류센터에 입고된 물품을 보관해뒀다가 다음 날 새벽 일괄적으로 직영 매장에 배송해 진열한다. 그런데 오늘 온라인에서 신선 식품 주문을 받으면 다음 날 온라인 새벽 배송을 마치고 남은 재고를 그대로 직영 매장에 넘기면 된다. 간단히 말해, 오프라인 물류 흐름 중간에 온라인 새벽 배송을 ‘끼워 넣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론적으로 온라인 비즈니스에서 재고가 남지 않는다.

물론 오프라인에선 여전히 재고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오프라인은 소비자가 물건을 직접 보고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온라인보다 재고를 소진하는 데 유리하다. 유통기한이 얼마 안 남았더라도 겉보기에 멀쩡하고 신선하다는 게 눈으로 확인되면 소비자들이 얼마든지 사가기 때문이다. 땡처리식 판매도 가능한 만큼 온라인에서보다는 판매기한과 가격을 유동적으로 조율하면서 재고를 털 수 있다. 온라인에서는 배송하지 못하고 곧장 폐기해야 할 물량이 오프라인에서는 ‘떨이 판매’로 소화될 수 있단 얘기다. 아울러 최근 오아시스가 자체 반찬 공장을 만들어 오프라인 매장 원재료로 직접 반찬을 당일 제조, 배송하는 서비스를 개시하면서 재고를 남김없이 활용할 수 있는 경로도 생겼다.

또한 초과 수요가 발생해 온라인 재고가 부족할 때도 이 같은 옴니채널의 시너지는 빛을 발한다. 온라인 주문 폭증으로 재고가 품절이 되더라도 오프라인 매장에서 곧장 상품을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직영 매장들은 부족한 새벽 배송 재고를 보충해주는 동시에 온라인 24시간 주간 배송까지 가능케 하는 ‘제2의 물류센터’ 역할을 한다. (그림 5)


철저한 고객 지향성

온라인 식료품 비즈니스는 소비자를 직접 상대하고 식생활과 관련이 있는 만큼 품질 관련 피드백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부정적인 후기 하나에 기업이 휘청이기도 한다. 이에 오아시스마켓 역시 ‘고객을 믿고, 제품을 의심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고객 만족에 사활을 걸고 있다. 가령, 과일이 맛이 없다는 불만이 접수되면 해당 생산자가 납품하는 과일은 매일매일 무작위 추출해 대표를 포함한 모든 MD가 직접 맛을 본 뒤 거래 지속 여부를 판단할 만큼 문제가 시정되는지를 철저하게 모니터링한다.

고객이 항상 옳다는 회사의 신념을 바탕으로 ‘셀프 환불 서비스’도 도입했다. 고객이 상품에 불만이 있거나 하자를 발견했을 때 직접 소비자가격과 환불 비율을 100%, 90%, 80% 등 10% 단위로 입력한 뒤 돈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소비자가 느끼기에 50점짜리 상품이 배송 왔다면 50% 환불을 요청하고, 10점짜리라면 90% 환불을 요청하면 된다. 딸기를 시켰을 때 일부가 물렀다면 딸기를 반납하지 않고도 그 일부에 해당하는 금액을 환불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제품은 매몰비용으로 간주하고 그냥 고객에게 준다. 물론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하긴 하지만 특별한 결격 사유가 확인되지 않는 한 고객의 환불 요청을 있는 그대로 승인하고 있다.


안 이사는 “처음에 셀프 환불 서비스를 도입할 때는 내부적으로도 사람들이 제도를 남용하면 어떡할지에 대한 염려가 컸다”며 “그러나 생각보다 악의적인 소비자들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지각 있게 상품에 대한 솔직한 피드백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블랙컨슈머가 별로 없는 까닭은 기존 고객의 재구매가 전체 구매의 90%에 달할 정도로 충성고객이 많은 플랫폼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물론 향후 회사 규모가 커지면 악성 고객이 지금보다 많아지는 것은 불가피하겠지만 일단은 ‘신뢰’를 전제로 서비스를 운영하면서 악성 고객까지도 충성고객으로 전환하겠다는 게 회사의 포부다.

오프라인 직영 매장에서 사후 관리(AS)를 빠르게 받을 수 있다는 것도 강점이다. 온라인 주문 상품에 하자가 있거나 불만족했을 때 근처 직영 매장에 가면 빠르게 교환을 받을 수 있다. 또 오배송이 발생하더라도 인근 매장의 오프라인 배송 기사들이 출동해 상품을 회수해 가거나 바꿔준다. 현재는 온•오프라인 매출 비중이 비슷하지만 향후 온라인 비중이 훨씬 커지면 오프라인 직영 매장은 마치 ‘애플스토어’처럼 점점 AS 센터의 성격을 띨 것이라는 게 회사의 설명이다.

고객 우선주의는 포장 방식에도 반영됐다. 한 박스 안에 모든 제품을 담아줄 뿐만 아니라 100% 종이 포장을 처음 시작한 것도 오아시스다. 사실 쿠팡, 마켓컬리가 나오기 전 국내에서 새벽 배송을 처음 시도한 것은 생협들이었다. 비록 시장을 형성하지 못해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이 과정에서 주부 고객들이 스티로폼이나 과잉 포장을 꺼린다는 점을 깨닫고 당시 얻은 교훈을 서비스에 녹였다. 이에 오아시스마켓은 새벽 배송에 다시 뛰어들면서 종이 포장재를 선택하고 보냉재 대신 얼린 생수를 사용하는 등 공급자가 아닌 제품을 받는 소비자 관점에서 생각했다.

오아시스는 미국 아마존, 일본 오케이마트 등 다양한 유통사의 물류센터를 직접 탐방하거나 유튜브에 올라온 촬영 영상을 보면서 연구했지만 이들 기업의 인프라를 단순히 모방하는 대신 독자적인 물류센터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히려 다른 기업의 시스템을 반면교사로 삼아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하드웨어를 최소화하고 소프트웨어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기존 물류의 비효율을 제거했다. 회사는 이렇게 다진 체력을 바탕으로 올해 말부터 오프라인 직영 매장 수를 늘리고, 모회사의 광고기획력의 도움을 받아 온라인 마케팅에도 힘을 싣는다는 계획이다. 고객 지향성 같은 경영 철학은 유지하되 플랫폼은 새벽 배송에서 오픈마켓으로,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신선 식품에서 생활재로 계속해서 넓혀나가겠다는 것이다. 다만 올해 2월 코로나 사태 확산 이후 하루 주문 건수가 갑자기 폭증하면서 업무 마비로 새벽 배송이 잠시 중단된 적이 있듯이 오아시스의 ‘저비용 고효율’ 물류 시스템이 언택트 소비 트렌드에 따른 규모의 팽창을 얼마나 뒷받침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02호 About Work 2020년 8월 Issue 1 목차보기




SR3. 출시 160일 만에 2억 병 판매한 ‘테라’

새로움 위해 하이트 꼬리표도 뗐다
혼술-홈술족 마음까지 사로잡아

287호 (2019년 1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하이트진로가 2019년 3월 출시한 테라는 그동안 신제품 기근에 시달리던 국내 맥주 시장에 정말 오랜만에 등장한 초대형 히트 상품이다. 신제품에 목마른 소비자를 ‘새로움’을 강조하며 공략했고, 과거의 영광 ‘하이트’라는 상위 브랜드를 철저히 떼어버림으로써 오히려 참신함을 키웠다. 또한 집에서 마시는 ‘홈술’과 혼자 마시는 ‘혼술’ 트렌드에 제대로 올라탔다. 특히 저관여 상품군에서 쉽게 자극되는 ‘다양성 추구 성향’과 그에 따른 ‘브랜드 이탈’을 잘 활용했고, 마케팅 4P 차원에서는 제품(product)과 촉진(promotion) 영역에서 상호보완적 시너지를 일으키며 성공했다.


테슬라(?)의 쾌속 질주

2019년 전국 주점에서 가장 많이 쏟아진 주문은 바로 “여기 테슬라 주세요”일 것이다. 하이트진로의 맥주 ‘테라’와 소주 ‘참이슬’을 일컫는 이 신종 단어는 불과 작년까지 소맥(소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의 고유명사로 불렸던 ‘카스처럼(오비맥주 카스와 롯데주류의 처음처럼)’을 밀어내고 새로운 한국 주류문화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이트진로가 ‘청정라거’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내걸고 올해 3월21일 출시한 테라는 그동안 신제품 기근에 시달리던 국내 맥주시장에 정말 오랜만에 등장한 초대형 히트상품이다.

제조사인 하이트진로에 따르면 테라는 출시 39일 만에 100만 상자가 팔려 맥주 브랜드 가운데 출시 초기 가장 빠른 판매 속도를 기록했다. ‘하이트’ ‘맥스’ ‘드라이피니시d’ 등 과거 이 회사 제품의 출시 첫 달 판매량이 20만∼30만 상자 수준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보다 최고 5배 많은 수치다.


이후 가속도가 붙으며 약 100일 만에 1억 병을 거쳐 맥주 성수기인 7∼8월 두 달간 300만 상자(한 상자당 10리터)를 판매해 출시 160일 만인 8월27일 기준으로 누적 판매량 667만 상자, 2억204만 병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는 초당 14.6병 판매된 것으로 병을 누이면 지구를 한 바퀴(4만2411.5㎞) 돌릴 수 있는 길이(4만6500㎞)다. 출시 101일 만에 1억 병을 판매한 후 그 절반밖에 안 되는 기간인 59일 만에 다시 1억 병을 더 판 셈이다.



지난 9월에는 세계적인 미식가이드 미슐랭 가이드 서울(Michelin Guide Seoul)이 국내 맥주 브랜드 최초로 테라를 공식 파트너로 선정했다.

‘주류시장의 최전선’으로 꼽히는 핵심 상권 내 식당에서 테라는 이미 1위 맥주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9월 메리츠종금증권 리서치센터가 강남, 여의도, 홍대 등 서울 주요 지역 식당 80곳을 상대로 맥주와 소주 점유율에 대한 설문 조사를 진행한 결과 테라 점유율은 61%로 경쟁사인 오비맥주의 카스(39%)를 압도했다. (그림 1)



지역별로는 여의도에서 74%의 점유율을 보여 가장 높았고 강남과 홍대에서는 각각 55%를 기록했다.

소매 채널에서 테라의 영향력은 실제 주요 개별 유통업체들의 판매 데이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유통업체들은 제조사들과의 관계를 의식해 특정 카테고리에서의 브랜드별 판매 실적을 공개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유통사 이름은 익명으로 처리했다.



A 대형마트에서 조사한 국내 맥주 카테고리 내 브랜드별 매출 비중을 살펴보면 지난해에는 오비(카스, 53.5%), 하이트(35.3%), 롯데(클라우드·피츠, 11.2%) 순이었다. 하지만 올해 10월 말 기준으로는 오비(50.6%), 하이트(24.4%), 테라(18.7%), 롯데(6.3%)로 바뀌었다. 카스와 하이트의 1·2위 구도는 유지됐지만 브랜드별 점유율을 새롭게 등장한 테라가 흡수한 것이다. (그림 2)

최근 맥주의 핵심 소매창구로 떠오른 편의점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올해 B 편의점의 국산 맥주 판매 순위 중 테라 500㎖ 캔의 순위를 살펴본 결과 출시 직후인 4월 9위로 시작해 5월에 4위로 올라선 후 8월부터 10월까지 3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테라의 성공 덕에 이 편의점에서 하이트는 오비의 아성을 조금씩 위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1분기 78대22였던 오비와 하이트의 매출 점유율은 2분기 74대26, 3분기 72대28에서 지난 10월에는 71대29로 조정됐다.

판매 순위를 국산·수입 맥주 통틀어 집계한 C 편의점에서는 한때 테라가 2위까지 올라간 것으로 조사됐다. 이 편의점이 취급하는 98종의 500㎖ 캔 가운데 테라는 지난 4월 15위에서 출발해 7월에 9위를 거쳐 8월에 2위를 차지했다. 이후 9∼10월에는 4위를 유지하고 있다.(그림3) 테라의 성공은 전체 국산 맥주의 매출 신장까지 견인한다는 평가다. 한 대형마트에서 테라가 출시된 올해 3월부터 10월 말까지 국산과 수입 맥주 매출을 전년 동기와 비교해보니 수입 맥주는 5% 줄어든 반면 국산 맥주는 2.8%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테라는 단순한 맥주 신상품을 넘어 올해 국내 주류시장을 강타한 메가 히트 제품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물론, 한때 맥주명가로 불렸던 하이트진로가 과거의 영광을 다시 넘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까지 불어넣고 있다. 추후 성공 요인 분석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겠지만 이 같은 테라의 성공 요인으로는 저관여상품인 맥주 소비자의 다양성 추구 성향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과거 도요타의 렉서스 출시 때와 같은 독립 브랜드 전략을 편 것, 혼술 트렌드에 맞춰 소매시장을 적극 공략한 것, 제품과 촉진을 영리하게 결합한 4P 보완 전략이 주효한 것을 꼽을 수 있다.


테라가 국산 맥주 다크호스로 떠오른 이유
1.신제품에 목마른 소비자…새로움 강조한 테라에 꽂혔다

테라의 알코올 도수는 4.6도다. 경쟁 제품인 카스나 하이트진로 주력 제품인 하이트의 4.5도와 비교하면 오히려 더 높아 최근 틈새상품으로 각광받는 저도주 라인과는 거리가 먼 ‘정통’ 맥주로 분류된다. 정통 라인의 국산 맥주가 새롭게 출시된 것은 지난 2014년 롯데의 클라우드 이후 5년, 젊은 층을 겨냥한 신상품인 롯데 피츠 출시 이후 2년 만이다.

기존 제품과는 확연히 다른 새로운 맥주 브랜드는 카스와 하이트가 양분해왔던 맥주 시장에 피로감을 느껴온 소비자를 빠르게 흡수할 수 있었다. 현재 국내 맥주 시장은 카스를 앞세운 오비맥주가 최대 60%, 하이트 등 하이트진로가 30% 내외를 점유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리뉴얼은 있었지만 카스 출시가 1994년, 하이트는 1993년 출시인 것을 감안하면 20년 넘게 같은 맥주 브랜드의 독주가 이어진 셈이다. (DBR minibox: ‘국산 맥주 숙명의 라이벌, 오비와 하이트진로’ 참고.)

그간 오래된 국산 맥주 브랜드에 피로감을 느낀 소비자들은 다양성 추구 성향을 수백여 종에 달하는 수입 맥주를 마시며 해소했다. 하지만 테라 출시 시기와 맞물려 잇따라 터진 수입 맥주 관련 부정적인 이벤트는 ‘새로운 국산 맥주’에 소비자들이 눈을 돌리게 한 계기가 됐다. 한 대형마트 주류 MD는 “청정맥주를 표방해 출시했는데 때마침 당시 수입 맥주의 발암물질 이슈가 발생하며 반사이익을 거둔 측면도 있다”며 “여기에 7월 일본 맥주 불매운동 이후 판매가 급신장하며 베스트 상품으로 자리매김했다”고 덧붙였다.

실제 테라가 출시된 지 한 달째인 지난 4월 온라인을 중심으로 일부 수입 맥주에 농약 성분이 들어 있다는 소문이 확산됐다. 미국에서 유통되는 맥주 15종과 와인 5종에서 농약 성분이자 2급 발암추정물질인 글리포세이트가 검출됐다는 내용이 담긴 미국 소비자단체 US PIRG의 2월 보고서가 알려지며 급기야 ‘농약맥주’ 리스트까지 만들어졌다. 결국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총 41종의 수입 맥주·와인에 대한 조사에 나섰고 최종적으로 ‘문제없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이 사건은 출시 초기 테라가 시장에서 자리를 잡는 데 큰 도움이 된 중요한 이벤트로 평가된다.

여기에 지난 7월 일본이 수출 규제와 이에 따른 한일 관계 경색으로 강력한 라이벌이던 일본 맥주가 시장에서 사실상 퇴출되는 호재도 생겼다. 8월부터 일본 맥주의 주요 소매 채널인 편의점들이 ‘4캔에 1만 원’식의 할인행사에서 일본 맥주를 제외하며 주요 편의점의 일본 맥주 매출은 행사를 할 때와 비교하면 10%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그 결과 최근 10년간 국내 수입 맥주 시장점유율 1위였던 일본 맥주는 지난 7월 3위로 밀려난 데 이어 8월, 9월에는 각각 13위, 27위로 계속 떨어졌다. 일본 재무성이 발표한 자료에서도 지난 9월 일본의 한국에 대한 맥주 수출액은 59만 엔(약 630만 원)으로 전년 동기 7억8500만 엔(약 84억 원)보다 100% 감소했다.

새로운 맥주를 찾는 소비자들이 안전 이슈와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라는 외부 요인 때문에 수입 맥주를 대체재로 고를 수 없어 국내 맥주 소비로 눈을 돌린 시기를 ‘신제품’ 테라가 잘 파고든 것이다.


2. 과거의 영광 ‘하이트’의 꼬리표를 떼라

그간 하이트진로는 완전한 신제품 출시보다는 하이트 브랜드에 기대거나 기존 제품을 리뉴얼하는 데 더 집중해 왔다. 송상연 동덕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가 2015년 한국콘텐츠학회지에 기고한 ‘모기업 연상이 브랜드 포트폴리오 평가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하이트진로가 보유한 맥스, 스타우트, 드라이피니시d 등의 개별 브랜드에 대해 다수의 소비자는 이 브랜드들이 하이트사에서 나온 상품임을 인지하고 있고 이를 구매 의사 결정에 반영하고 있었다. 2016년에 내놓은 하이트 엑스트라 콜드는 맥주 원료인 홉 비중을 높이고 기존 4.3%였던 알코올 도수도 4.5%로 올렸지만 시장에 안착하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테라는 출시 당시부터 패키지, 프로모션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철저히 하이트의 존재를 숨겼다. 실제 테라 패키지에서는 제조사인 ‘하이트진로’를 찾아보기 힘들다. 제품 이름 ‘TERRA’와 함께 원재료인 호주 청정 맥아를 떠올리게 하는 ‘AUSTRALIAN GOLDEN TRIANGLE MALT’와 ‘MADE FROM PURE AGT MALT’라는 영문 표현만 앞뒤로 크게 배치돼 얼핏 보면 수입 맥주로 착각하게 만든다. 하이트진로라는 이름은 제품 옆에 원재료와 제조사 등을 필수로 적어야 하는 부분에 아주 작게 인쇄돼 있어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렵다. 광고도 마찬가지다. 포스터뿐 아니라 배우 공유가 출연하는 테라의 영상 광고에는 하이트진로라는 표현이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테라의 이 같은 전략은 앞서 언급했듯 도요타가 렉서스를 론칭할 때 썼던 전략과 동일하다. 1989년 도요타는 미국의 고급 대형 승용차 시장을 겨냥한 새 럭셔리 브랜드 렉서스를 내놓으며 철저히 기존 브랜드와 분리했다. 미국에서 도요타는 품질은 좋지만 싸구려라는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기존 도요타 이미지가 렉서스에 투영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요타는 사내에 렉서스 사업부를 완전한 독립 사업부로 만들고 판매망과 서비스망까지도 기존 도요타 라인과 분리했다. 모 브랜드를 숨긴 전략 덕택에 렉서스는 출시 2년 만에 메르세데스-벤츠를 제치고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수입 브랜드 고급 차가 됐다. 렉서스와 같은 전략을 통해 테라는 ‘하이트’ 브랜드가 가진 핸디캡을 피해 가는 영리한 스탠스를 취해 ‘제2의 렉서스’급 성공을 거둔 셈이다.


DBR mini box: 국산 맥주 숙명의 라이벌, 오비와 하이트진로

테라의 성공은 경쟁사 오비맥주와의 경쟁에서 밀려 벼랑 끝에 서 있던 하이트진로가 과거의 영광을 다시 넘볼 수 있을 만큼 기사회생하는 발판이 됐다.

1930년대 탄생한 조선맥주(현 하이트진로)와 동양맥주(현 오비맥주)는 70년간 피 튀기는 맥주 전쟁을 벌여왔다. 초기에는 조선맥주의 크라운맥주가 오비맥주를 근소한 차로 이기다 1980년 이후 오비맥주가 시장을 독식, 90년대 초까지 1위를 고수한다.

하지만 1993년 하이트진로가 신제품 하이트를 출시하면서 판도가 바뀐다. 테라와 마찬가지로 당시 원료인 ‘지하 암반수’를 강조하며 깨끗함을 내세운 덕택에 1996년에 국내 맥주 시장 1위를 탈환한 것이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1999년 진로쿠어스를 인수한 오비맥주는 진로의 맥주 카스를 자사의 대표 맥주 브랜드로 내걸고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해 결국 2012년 다시 선두를 차지한다.

추락 속도는 빨랐다. 2014년 시작된 하이트진로의 맥주 사업 적자는 5년 연속 계속돼 누적 손실이 900억 원까지 치솟았다. 한때 60%까지 올랐던 주류 시장점유율도 지난해 25% 수준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테라 출시 후 분위기는 반전됐다. 닐슨코리아가 조사한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식품산업통계정보에 따르면 지난 2분기 오비맥주, 하이트진로, 롯데주류, 롯데아사히주류IMP 등 주류기업 4사가 편의점, 슈퍼 등 소매점에서 판매한 맥주의 총매출액은 6506억 원. 이 중 하이트진로는 1593억 원을 차지해 소매점 시장에서의 매출이 전 분기보다 무려 35.6%(418억 원) 늘었다.

특히 점유율에서 오비맥주는 62.6%로 전 분기 대비 1.9%포인트 감소한 반면 하이트진로는 같은 기간 24.5%로 전 분기 대비 3.5%포인트 올라 격차를 좁혔다. 롯데아사히주류IMP와 롯데주류의 점유율도 각각 7%, 5.8%로 0.4%포인트, 1.2%포인트 하락했다.

테라 효과는 하이트진로 실적 호조로 이어졌다. 하이트진로의 반기 보고서에 따르면 수출을 제외한 하이트진로의 2분기 맥주 매출액(별도 기준)은 1862억 원으로 전년 동기(1762억 원) 대비 100억 원 늘어나며 5.7% 증가했다. 맥주 부문의 하락세를 멈추고 반등에 성공한 것이다. 이 같은 성과에 힘입어 최근에는 하이트진로 주식의 시가총액은 3년6개월 만에 2조 원을 돌파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11월1일 하이트진로 주가는 장 중 2만9450원으로 52주 신고가를 기록했다. 이날 종가는 2만9350원, 시총은 2조584억 원을 찍었다. 하이트진로의 시가총액이 마지막으로 2조 원을 기록한 것은 종가 기준으로 2만8600원을 기록한 2016년 4월26일이다. 아직 하이트진로의 선두 탈환을 점치기에는 점유율 차이가 상당하지만 오비맥주를 긴장시키기엔 충분했다는 후문이다.



3.‘홈술’ 트렌드 공략으로 소매 시장 점령… 선택과 집중으로 테라 밀어주기 전략도

한국 주류 시장 트렌드는 과거와 같은 주점 내 회식 중심이 아니라 집에서 가볍게 즐기는 ‘홈술’ 위주로 탈바꿈했다. 닐슨코리아가 2019년 초 공개한 ‘국내 가구 주류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국내 가구의 연간 주류 구매량은 3억4535만5000리터로 전년 대비 17.8% 늘었다. 1980년 1인당 14.8리터에 달했던 대한민국 국민의 연간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이 2015년 10.9리터를 거쳐 2016년에는 8.9리터까지 줄어든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인 일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국내 가구 연간 주류 구매액은 한 가구당 8만4500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5% 증가했다. 가구당 연간 구매량은 21.5리터로 13.9% 성장했다. 가구당 회당 구매액도 7% 상승했다.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청탁금지법 시행, 최저 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로제를 통한 근무시간 단축 같은 규제 이슈, ‘1코노미’가 표방하는 개인주의 확산과 워라밸 등 삶의 질에 더 관심을 가지는 문화·사회적인 변화 등이 홈술 트렌드를 견인하는 배경으로 지목된다. 이런 홈술 문화를 주도하는 것은 테라가 포함된 맥주 카테고리로 나타났다. 가구 내 주종별 구매 경험률을 분석한 결과 맥주가 60.5%로 가장 높았다. 이 중 국산 맥주는 45.2%로 수입 맥주 40.9%를 앞질러 전체 주류 가운데 1위를 기록했다. 올해 수입 맥주 인기를 주도한 일본 맥주가 일본 상품 불매운동의 영향으로 판매가 급감한 것을 감안하면 올해는 국산과 수입 맥주 사이의 경험률 격차가 더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닐슨코리아 조사에서 국산 맥주를 음용하는 장소는 이미 주점이나 식당(38%)보다는 집(54%)이 선호됐다. 이는 수입 맥주를 집에서 즐긴다는 비율인 71%보다 낮지만 소주(48%)보다는 높다. 3개월 내 주류를 구매한 적이 있는 가구 패널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응답자의 57%가 ‘집에서 마신다’고 답했으며, 31.4%가 ‘가족과 함께 마시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에서 주류를 소비하는 응답자를 연령별로 분석해본 결과, 30대 남성이 61.3%로 가장 많았고 40대 여성이 60.4%, 40대 남성이 60.0%, 30대 여성이 58.7%으로 나타나 주로 3040 세대가 남녀에 상관없이 ‘가볍게 한잔하기’ 위해 홈술을 즐기고 있었다.

맥주 선택 시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로 수입 맥주는 판촉행사를 꼽은 반면 국산 맥주는 ‘브랜드’를 고른 것도 눈에 띈다. 실제 수입 맥주의 판매에는 ‘4캔에 1만 원’으로 대표되는 할인행사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일본 맥주의 몰락이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 같은 홈술 트렌드를 겨냥해 테라는 주요 핵심 소매 채널을 적극 공략하는 전략을 펼쳤다. B 편의점 주류 MD는 “테라는 편의점 맥주 카테고리에서 판매량이 가장 많은 주력 용량대인 500㎖ 캔 상품부터 제일 먼저 출시했다”며 “기존 하이트의 오래된 느낌을 테라를 통해 새로운 이미지로 전환하면서 맥주의 격전지인 편의점에서 적극적으로 판촉에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D마트 주류 MD는 “맥주 신상품이 전국 단위로 바로 납품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테라는 출시 직후 전국 주류 판매매장에 바로 입고가 됐다”며 “출시와 동시에 전국 소비자에게 상품을 선보이고 TV 광고도 띄우면서 접근성을 높였고 이후 맛이 괜찮다는 평이 퍼지기 시작하며 더욱 호평을 받게 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하이트진로가 과거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 소매 채널에 테라를 우선 공급하는 ‘선택과 집중’ 방식의 판촉 전략을 쓴 것도 성공에 일조했다는 평이다.

B 대형마트 주류 MD는 “하이트진로의 맥스는 맥아 비율이 좋아 출시 당시부터 시장에서 반응이 조금씩 나타나 업계에서는 9부 능선만 넘으면 시장에 안착할 수 있다고 전망했던 제품”이라며 “하지만 갑자기 하이트진로가 d를 출시하면서 맥스의 위치가 애매해졌다”고 설명했다. ‘끝 맛이 좋은 맥주’를 내걸고 나온 d였지만 맥스를 뛰어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소비자들이 기존 하이트와 헷갈려 하는 경우도 많았다. 맥스와 d로 마케팅과 판매 역량이 양분하면서 두 제품 모두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찰나에 경쟁사인 오비가 골든라거를 출시하고 회사의 모든 지원을 이 제품에 집중하면서 결국 시장의 승기가 오비로 넘어갔다. 이 MD는 “그때의 실패를 교훈 삼아 요즘 하이트진로는 판매 매대에 테라만 가득 채워 확실히 밀어주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A 대형마트 주류 바이어는 경쟁사와는 달랐던 하이트진로의 가격 정책을 성공 요인 중 하나로 들었다. 그는 “주세법 개정으로 내년부터 국산 맥주 가격을 1.8% 낮출 여력이 생기자 소비자들 사이에서 값을 내려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며 “경쟁사인 오비와 롯데는 이를 감안해 올해 4월 미리 맥주 가격을 인상했지만 하이트진로는 그때가 테라 출시 직후라 가격 인상 시기를 놓쳤다”고 설명했다. 기업의 수익 측면에서는 실수라 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테라 열풍을 더욱 부추긴 요인이 된 셈이다.

오히려 최근 테라의 인기에 놀란 오비맥주는 지난 10월21일 카스 전 제품 출고 가격을 평균 4.7% 내렸다. 오비맥주의 가격 변동은 올해만 벌써 네 번째인데 업계에서는 사실상 이 네 차례의 가격 조정 모두 테라 견제용인 것으로 보고 있다.


4. ‘지하 암반수’에 이은 ‘청정라거’ 콘셉트로 깨끗함 원하는 소비심리 저격

하이트진로가 과거 오비맥주의 독주를 깨고 국산 맥주 1위 자리를 되찾은 일등공신은 당시 신제품 ‘하이트’였다. ‘지하 암반수’로 만들었음을 강조하며 깨끗함을 내세우는 전략이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테라 역시 이 같은 하이트의 성공 전략을 다시 적용한 상품이다. 김진국 하이트진로 연구소장은 “테라는 국내 맥주의 메인 시장인 라거 시장에서 정면 승부할 수 있는 제품으로 기획했다”며 “추상적인 콘셉트에 머물지 않도록 제품력이 뒷받침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청정라거’ 콘셉트에 맞게 원료, 주질, 패키지 디자인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하이트진로 R&D팀과 구매팀은 지난 5년간 세계 각국에서 발품을 팔았고 그중 전 세계 공기질 부문 1위를 차지한 호주 내 보리 재배 지역을 발굴했다. 호주 컨설팅 업체를 통해 정보를 모으고 맥아 성분 분석과 주질 테스트까지 진행한 끝에 비옥한 검은 토양과 보리 생육에 최적인 일조량 및 강수량으로 유명한 골든트라이앵글 지역의 맥아를 100%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라틴어로 흙, 대지, 지구를 뜻하는 ‘테라’라는 브랜드네임 역시 청정 지역의 이미지와 자연주의를 온전히 반영해 탄생했다.

발효 공정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리얼 탄산만을 100% 담은 것도 특징이다. 이를 위해 하이트진로는 리얼 탄산을 별도로 저장하는 기술과 장비를 새롭게 도입했다. 100% 리얼 탄산 공법은 라거 특유의 청량감이 강화되고, 거품이 조밀하고 탄산이 오래 유지된다는 강점이 있다. 소맥용 맥주로 테라가 각광받는 것도 하이트진로가 테라의 맥주 품질 그 자체에 집중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A 대형마트 주류 바이어는 “소맥을 만들 때 가장 좋은 ‘황금비율’이 있지만 테라는 소주를 한 방울 타든, 많이 타든 관계없이 맛이 좋다는 게 중론”이라며 “소주가 들어가기만 하면 맥아향이 확 퍼지면서 좋은 맛을 느낄 수 있는데 맥아가 좋지 않으면 이런 효과가 없다”고 말했다.

패키지도 기존 브랜드와 차별화했다. 오성택 하이트진로 마케팅실장은 “국산 레귤러 맥주 중 녹색 병을 적용한 것은 테라가 최초인데 이제는 테라의 시그니처 컬러로 인식되고 있다”라며 “병목에 토네이도 모양의 양음각 패턴을 적용해 맛의 청정함뿐 아니라 시각적인 청정함을 위한 과감한 선택을 했다”고 설명했다.

광고로는 특히 기존 맥주와는 다르게 40대 남성 배우인 공유를 모델로 기용하는 파격을 시도했다. 이는 롯데주류의 피츠 등 동 시간대에 방영되는 경쟁사 맥주 제품뿐 아니라 열광하는 젊은이의 모습으로 어필했던 하이트진로의 기존 제품 드라이피니시d 광고와도 차별화된다. 올해 나온 총 4편의 테라 광고는 제품의 특징인 ‘맥아’와 ‘탄산’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진행됐다. 지난 10월 론칭한 4번째 광고는 ‘이 맛이 청정라거다! 청정라거-테라’ 슬로건 아래 도심 속 빌딩 숲에 있는 모델 공유가 테라를 마시는 순간 광활하고 청정한 보리밭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순간 보리밭에 거대한 회오리가 일면서 그대로 테라 병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오성택 실장은 “보통의 맥주 광고는 시원한 이미지와 함께 즐겁게 마시는 모습을 전달했지만 테라는 광고에 제품 자체를 담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성공 요인 및 시사점
1. 정체된 시장에서는 소비자의 다양성 추구 성향을 자극하라

소비자가 브랜드를 선택할 때 과거 구매가 현재 구매에 미치는 영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직전에 A 브랜드 제품을 샀으면 현재도 A 브랜드 제품의 재구매 확률이 높아지는 관성(inertia) 성향, 두 번째는 반대로 과거에 A 브랜드 제품을 구입한 경험이 현재 구매 시점에서 오히려 같은 브랜드 제품의 재구매 확률을 낮추는 다양성 추구(variety-seeking) 성향이다. 주목할 점은 한 소비자가 이 관성과 다양성 추구 성향을 경우에 따라 혼합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의 이론적 틀을 제공한 대니얼 벌린 토론토대 교수는 어떤 자극에 대한 흥미로움은 그에 대해 적당히 친숙해 졌을 때 절정에 달하고, 반대로 동일한 자극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권태를 느껴 매력도가 떨어진다고 설명한다.



이를 마케팅적으로 해석한 김동훈 연세대 교수에 따르면 브랜드에 대한 친숙도가 증가하면 소비자는 타성 상태(브랜드를 선택하는 상태)에 들어가지만 친숙도가 매우 높아지면 브랜드 매력도가 감소해 다른 자극(브랜드)을 찾게 된다고 봤다. 이는 곧 x축을 동일 브랜드 제품의 연속 구매 수, y축을 브랜드의 매력도로 봤을 때 뒤집어진 U자 모양의 그래프로 나타난다. (그림 4) 즉, 아무리 브랜드 자산(brand equity)이 높게 형성된 상표라고 해도 시장에서 흔들림 없는 애호도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다만 이 효과는 브랜드 및 상품의 특성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난다. 우선 고관여제품의 경우 관성 성향이 다양성 추구 성향을 압도할 수 있다. 제품을 연속적으로 구입하는 것이 그 제품의 매력도를 지속적으로 향상시키기만 한다는 것이다. 고가 차량과 명품 등이 대표적으로, 고관여제품을 구입한 소비자는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라고 여기며 특별한 불만족 요인이 없는 한 기존 브랜드 구매 행태를 유지한다. 한 번 정한 선택이 오랫동안 유지되기 때문에 고관여제품의 구매에는 다양한 상품을 비교분석해 ‘잘못된 선택’의 리스크를 줄이는 노력도 따라붙는다. 반대로 저관여제품의 구매행동에는 1차로는 관성이, 2차로는 다양성 추구 성향이 발현된다.

테라가 속한 맥주라는 상품은 대표적인 저관여 상품으로 꼽힌다. 고관여 상품과는 반대로 딱히 제품 자체에 불만족할 만한 요인이 없어도 싫증을 느끼면 다른 브랜드로 이탈하기 쉽다. 카스와 하이트라는 기존 브랜드에 질린 소비자들이 2014년 출시된 클라우드에 몰렸고, 그마저도 출시 5년이 지나며 올드해지자 다시 새로운 테라에 열광하는 중요한 이유다.

관여도가 낮은 다른 제품처럼 맥주는 단가 자체가 저렴한 만큼 잘못된 선택에 따른 리스크가 작다. 고관여제품처럼 굳이 다른 동종 제품군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분석하지 않고 쉽게 새로운 제품을 시도해볼 가능성이 크다. 지인 혹은 주점에서 업주가 추천하는 상품을 별 고민 없이 주문하는 것이다.


2. 상위 브랜드 이점 과감히 포기한 독립 브랜드 전략

하이트진로 같은 주류회사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강력한 브랜드를 보유한 기업들이 신제품을 출시할 때 주로 활용하는 전략은 브랜드 확장, 직접 하위 브랜드 출시, 간접 하위 브랜드 출시, 독립 브랜드 출시로 나뉜다. 브랜드 확장은 기존에 구축한 브랜드의 정체성을 활용해 전략적으로 범위 변화를 유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삼성전자의 갤럭시9, 갤럭시노트10처럼 사이즈나 기능 차이가 있을 때 새로운 넘버를 붙인 신제품을 내놓는 것이 대표적으로, 기존에 모태가 되는 브랜드와 상품에서 크게 바뀌지 않는다.



직접 하위는 기존 모(母)브랜드를 앞에 붙이고 뒤에 새로운 서브 브랜드를 붙여 출시하는 전략이다. 신상품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기존 브랜드의 인지도와 신뢰도에 의존하는 것으로, 모브랜드가 유명할수록 쉽게 시장에 침투가 가능한 것이 장점이다. 하지만 이 장점은 조건이 바뀌면 그 자체로 치명적인 단점이 된다. 모 브랜드에 소비자들이 싫증을 느끼면 새 브랜드에도 같은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기존 하이트 리뉴얼 상품들이 성공하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간접 하위는 이와 같은 직접 하위 전략의 취약점을 피하기 위해 모브랜드의 노출을 최대한 줄이는 전략을 말한다. 동서식품의 ‘카누’는 인스턴트 원두커피로서의 정체성을 소비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기존 대표 브랜드 ‘맥심’의 노출을 줄였다. 대표 상품 아메리카노 패키지 전면에는 카누의 영문 이미지를 부각하면서 맥심이라는 브랜드 네임은 하단에 작게 넣는 방식으로 맥심의 인지도는 취하면서도 맥심 하면 떠오르는 ‘믹스커피’의 이미지가 카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방지한 것이다.

이 중 테라는 독립 브랜드 전략을 적극 활용했다. 맥주 시장을 양분하는 독보적인 모브랜드 ‘하이트’의 인지도를 포기하는 대신 중장년층에게 더 잘 맞는 ‘낡은’ 이미지와 거리를 둔 것이다.


3. 4P 간 상호보완성 극대화 전략… 자발적 입소문 효과도 주목

테라는 4P 전략(Product(제품), Price(가격), Place(유통), Promotion(촉진)) 가운데 제품과 촉진 영역에서 상호보완적으로 시너지를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전개됐다.

우선 제품 측면에서는 재료와 공정 모두 기존 국산 맥주와 차별화하는 데 주력했다. 구체적으로는 기획과 개발 과정에서 초미세먼지 경보가 일상화돼 청정, 자연, 친환경 등에 대한 갈망이 커지고 있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해 소비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맛을 실현해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중점을 뒀다. 또한 청정라거 콘셉트를 가장 잘 표현하는 ‘그린’을 브랜드 컬러로 결정하고 모든 패키지에 적용했다.

이런 제품의 콘셉트는 촉진 영역인 광고에도 적용했다. 타깃층을 20·30대로 한정 짓지 않고 폭넓은 연령대의 팬층을 보유한 배우 공유를 광고 모델로 기용, ‘대한민국 대표 맥주’의 콘셉트에 맞게 다양한 연령층에 소구하는 전략이다.

테라 하면 떠오르는 단어인 ‘테슬라’는 곧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만든 폭탄주용으로 테라가 각광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소맥용으로 안성맞춤’이라는 테슬라 입소문 효과도 테라의 성공 요인 중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하이트진로에서는 “회사 차원에서의 테슬라 마케팅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오성택 실장은 “테라는 맥주 자체의 경쟁력을 높이려고 노력했고 소맥용으로 개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테슬라를 스스로 알리거나 바이럴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소비자들이 섞어 먹을 때 만족감이 높다 보니 자연스럽게 참이슬과 함께 마시는 문화가 퍼졌다”고 설명했다. 즉, 제품을 경험한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입소문을 퍼뜨리는 구전효과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외부 마케팅 유무와 상관없이 제품의 특·장점에 집중한 것이 자연스럽게 입소문을 몰고 왔다는 평이다.


4. 소비자의 다양성 추구 성향은 테라에 기회이자 위기

테라 성공의 1등 공신으로 꼽히는 소비자의 다양성 추구 성향은 거꾸로 보면 타사에서 테라급의 맥주 신제품을 내놓을 경우 소비자가 새 제품으로 이탈할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현재 테라의 판매 호조가 하이트진로 전체의 맥주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고 있지만 기존 하이트 브랜드 판매를 테라가 잠식하는 카니벌라이제이션도 우려된다.

이와 관련, 하이트진로는 테라의 SWOT 분석에 있어 강점(Strength)은 청정맥아·100% 리얼 탄산을 강조해 기존 맥주와 차별화한 점, 기회(Opportunities)는 신제품에 목마른 국내 맥주 소비 시장을 꼽은 반면, 약점(Weakness)과 위협(Threats)은 소비자의 트렌드 변화라고 분석했다.

이승연 홍익대 경영대학 교수는 “오비맥주 등 경쟁 회사의 충성도 높은 고객을 대상으로 판촉을 집중해 이들의 다양성 추구 성향이 발동하도록 마케팅 전략을 펴야 한다”며 “테라의 신제품 효과가 유효할 때 최대한 충성고객을 확보해야 또 다른 신제품으로 인한 충격을 줄이고 롱런하는 제품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필자소개 김태성 매일경제 유통경제부 기자 kts@mk.co.kr
필자는 2008년 기자 생활을 시작해 매일경제신문에서 부동산, 금융, 중소기업부를 거쳐 현재 백화점과 온라인몰 등 유통산업 분야를 취재하고 있다. 빠르게 바뀌는 유통산업 트렌드를 소비자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는 기사에 관심이 많다. 소비생활에서 생기는 독자들의 궁금증을 심층적으로 분석해 풀어내는 ‘알아봤습니다’ 코너를 연재하고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01호 Subscription Business 2020년 7월 Issue 2 목차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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