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가 필요해 3

정희재 日 (회사 1년차 직장인)

"대학 성적 맞춰서 오라는 회사 와서 일하구. 꿈이라는 말을 들으면 속이 꽉막히는 기분이에요."

 

 꿈이라는 말을 듣자 나도 속이 꽉막혀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고 싶은 일이 없다. 아직. 찾지 못했다. 이대로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간다면 나도 회사에서 껍데기만 된채로 일하고 꿈이라는 단어가 귓가에 흘러갈때마다 꽉막히는 속을 억지로 현실로써 뚫어내고 그렇게 죄인아닌 죄인으로 살아 갈 거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되는건, 난 아직 어리고 대학생으로써 물리적인 시간도 주어졌다. 어쩌면 내가 자라왔던 환경 상 아직까지 꿈이 없는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해왔지 당연시 되었던 행동이나 말들에 왜 그래야하는지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까지는 꿈이 없었다. 왜냐고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꿈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에 관한 단어라고 정의될지도 모른다. 그들의 말대로 꿈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분화해서 '꿈'을 하고싶은 일이라는 의미에 초점을 둔 다면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산다는 건 어떤 삶을 살겠다는 의지이지 꿈이 될 수 없다. 하지만, 하루하루 행복하게 산다는 생각은 장기적으로 꿈도 만들 수 있는 것을 아닐까. 예를 들어, 하루에 세개의 면접이 있는데 한 개만 갈 수 있다고하자. 하나는 대기업, 다른 하나는 공무원, 다른 하나는 유니세프. 나는 그날도 행복하게 살기위한 선택을하여야 한다. 좀더 가치 있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면 나는 유니세프를 택할 것이다. 이러한 것처럼 하루의 행복에 대한 선택이 전반적인 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행복의 선택은 경험이 넓어질 수록, 즉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아질 수록 더 행복한 인생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따라서, 시간이 주어진 이 시점에 많은 경험을 위해 노력해야한다..

 인간의 삶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이다.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우리는 행복했을 때의 그 느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가치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나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며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을지 가치관을 세우려 노력한다. 사실 명예와 물질 보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삶이다.  

 

  우리의 선택은 아니였지만, 우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사회에 소속되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 그것을 원치 않는 사람은 (아마 불가능 할테지만) 사회의 약속, 의무, 사회 그 자체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자의반 타의반 사회에 소속된 사람들로 인간의 가장 절대적인 가치인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평등한 권리를 지닌 사회 내의 다른 구성원들의 의사도 반드시 존중하여야 한다. 어떤 사소한 방식으로든 타인의 행복을 방해하거나 박탈하는 것은 그들이 더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박탈하는 사형선고와도 다를 바가 없게되는 것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타인의 행복의 상처를 무시하는 일은 바람직한 사회 구성원의 일이 아니며 어른의 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아이이다. 여기까지가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 즉 소극적 행복의 조건이다.

 

 일본에 생활하면서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바라보다 내가 그들의 생활방식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후 그 충격은 나에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일본인들의 생활부터 말하고 싶다. 일본인들은 예의바르다.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의 입에서는 스미마센 이 파도를 이룬다. 자신의 행동이 남의 행복을 방해했을 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자각의 표시이자 사과의 표시이다. 사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보다는 그들의 DNA에 각인된 문화적 버릇이 주된 이유일 것이지만. 자신의 행동이 남의 행복에 "메이와쿠(민폐)" 를 끼친다는 생각이 깊어서 인지 그들은 소극적인 행복에 눌러 앉아버리기로 마음 먹은 것 같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들은 인간관계의 문을 닫고있는 느낌이 든다. 남에게 아예 신경을 쓰지 않으면 타인의 행복에 누를 끼치일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방안에만 틀여박혀 지내는 히키코모리는 그를 걱정하는 주의 사람들에게의 행복에는 누를 끼치지만 그 주의 사람들의 불행만 제외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불행을 끼치지 않는 문화시민이다. 누군가의 어깨를 치고 가고 무심결에 던진 말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지키지 못할 약속으로 상대를 찌푸리게 하는 활발한 사람들보다 오히려 타인의 행복을 덜 방해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소극적인 행복의 추구이다. 타인에게서 행복을 빼앗지 않는 것.

 

 필자도 지금까지 소극적인 행복 추구에만 머물렀었다. 아니, 그것밖에 없는  줄 알았다. 자신은 자신대로 행복을 누리는 동시에 사회에 소속된 몸이므로 타인의 행복을 빼앗지 않는 것. 그것이 인생을 사는 최고의 미덕인 줄 알았다. 타인의 행복을 빼앗지 않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에게 행복을 줄 수도 있다. 이것이 적극적인 행복의 추구이다. 타인의 행복을 빼앗는 일이 그들의 사형선고와 다를 바가 없다면, 타인에게 행복을 주는 일은 그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 넣는 것과 다름 없는 일이다. 소극적인 행복추구와 적극적인 행복추구의  조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또 그것이 진정으로 다함께 행복할 수 있는 멋진 길이다.

 

 

 

 

 

 

 

우리는 친해졌고 가까워졌고 익숙해졌다. 

그리고 딱 그만큼 미안함은 사소해졌고 고마움은 흐릿해졌으며

엄마는 당연해졌다. 

 

..... 

 

세상 모든 관계는 익숙해지고 결국엔 당연해진다. 

 

선물의 가장 강력한 힘은 그 익숙하고도 당연한 관계를  

새삼 다시 설레고 감사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선물을 고르고 카드 문구를 고민하며 그에게 마음을 쓰는 사이

어느새 그 사람은 내게 다시금 새삼스럽게 된다.  

 

그리고 그 마음이란 반드시 전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익숙하고도 당연한 관계가 급기야 무뎌짐으로 퇴화돼 버린다면

이젠 그 어떤 선물도 뒤늦은 노력도 의미없다.  

 

아무 관심도 갖지 못하고 베란다 귀퉁이에서 바짝시들어 버린 난초에게

때늦은 물과 거름은 소용없는 일이다.  

 

관계가 시들기전에 서로가 무뎌지기 전에  선물해야 한다.

마음을 전해야한다.

 

-응답하라 1994 06화 선물학 개론 中 에서.

 이 세상의 만사는 인과응보다. 어떤 일이 생기게 된데에는 혹은 어떤 생각이 거기 까지 미치게 된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또 그 이유에는 이유가 있고 이러한 과정이 끝도 없이 맞물려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다. 

 

 나는 지금 그 왜에 대하여 또 왜라고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왜 우리는 왜에 대해서 사색해봐야 하는지.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검정 베일로 가득 둘러쌓여 있다. 특히나, 인과응보가 더 복잡하게 얽힌 현대는 더더욱 그렇다. 누구하나 나서서 왜 그런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속에 각인되어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짙다. 그러나, 사람이 어떠한 일을 할때에는 왜 그렇게 행동해야하는지 왜 그렇게 생각해야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유를 알아야 스스로의 이성에 가하는 납득이 확실하다. 논리적 이성으로 인과를 지배해야 이해가 확실하다. 이것이 곧 가치관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왜 그런지 모르고 하는 행동이나 생각은 속이 텅빈 갈대와 같아서 이리저리 흔들린다.

예를 들어 살인이라는 당연한 부정적인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고 하자. 이때 나는 왜 살인하면 안되는지 이성적으로 생각한다. 인간은 행복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존재이지만, 함께 어울려 사는 우리들은 우리의 행복과 동일하게 타인의 행복도 존중해야한다. 곧, 타인의 행복에 해를 끼치지 않는 행복을 우리는 누려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살아서 행복해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살인은 나쁜 것이다. 이는 우리의 행복만큼 중요한 타인의 행복은 앗아가는 것이므로 좋지 않다.

 

이 세상 모든 것에 왜라고 질문하고 자타(自他)의 행복이 전제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으로 인과를 판단하라. 혹시 그것이 당연한 것일지라도.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왜'는 내가 가진 가장 큰 지적 재산이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20여분 떨어진 거리에 릉이 있다. 내가 살던 곳은 옛 어떤 왕국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었는데 릉은 왕릉과 왕비릉 이렇게 2개가 있고, 때때로 여기저기서 지금은 사라져 버린 옛사람들의 흔적이 종종 발견되고는 했다. 

  이 지역에 산지도 벌써 꾀나 되어가니, 우연찮게 릉과 마주치는 일이 수 십번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매번 그냥 그런 기분으로 아무생각 없이 그것들을 지나쳤을 뿐, 릉의 존재를 의식하고 한 번쯤 가서 사진이라도 찍어보고 싶다고 마음먹은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아마도 그런 기분이 문득 생긴 건 릉의 존재 자체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릉을 둘러쌓고 있는 소나무 방풍림에 먼저 끌려서였다. 릉을 둘러쌓고 있는 수백그루의 소나무는 겉보기에는 어두침침하고 침울한 색이었지만, 그 안의 공기는 신비해서 왠지모르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같은 것이 느껴졌다. 마치 신의 창조이래 한 번도 인간의 발길이 닿지않은 원시림의 자연이 울부지는 것처럼.

 3월의 날씨답지 않게 따듯한 날씨였다. 벌써부터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따금씩 내 피부를 스쳐가는 바람은 차갑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딱 체온만큼만 따듯했다. 그런 훈훈함 때문인지 혼자가는 산책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이른 봄바람을 맞으니, 머리속으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피부는 어머니의 배안에서 웅크리고 있었을 때의 따스함을 몸이 기억이라도 하는 듯했다.

 버스를 타고 릉으로 향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가는게 좋았다. 목적지는 필요 없었다. 때로는 목적지가 영원히 없었으면 하고 바랐다. (특히 버스 안에서 눈이 감겨올 때) 버스를 타고가면서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또 주위의 일상을 보면서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그것들에 무관심했었는지를 스스로 생각하면서 나는 점점 낯설었던 버스의 한 자리에 뿌리를 내렸다. 가끔씩은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버스는 중세시대의 창창한 바다를 나아가는 멋진 배고, 그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은 정처없이 바다를 떠도는 선원들이다. 그렇게 끝이 없는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순진하게도 기뻤다.

 버스는 운좋게도 목적지 바로 앞에 멈추어 섰다. 릉이 보였다. 맑은 날이었지만 하늘은 투명하지 않았다. 회색과 흰색의 중간 쯤의 색이었는데, 저런 하늘 아래 이런 맑은 해가 비칠 수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예의상" 릉에서 족히 100미터는 떨어진 거리에서 전체 스틸샷을 몇 장 찍고는 릉에 다가갔다. 말했듯이, 나는 이전에 릉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우선 내가 다가가고 잇는건 릉을 품고있는 소나무 숲이었다. 햇빛이 여기저기 비추었는데도 숲은 어두컴컴했다. 공기도 바깥과는 사뭇 달랐다. 소나무숲 주위에 보이지 않는 견고하고 투명한 벽이라도 쳐져 있는것처럼 그 안은 외부와 단절된 듯 조용했다. 릉은 담이라고 하기에는 윗부분이 넓고 높이는 낮은 돌담에 둘러쌓여 있었다. 그 돌담 밖에 있는 것이 소나무 숲이었다. 나는 돌담위에 올라갔다. 두 사람은 누울 수 있을 만큼 꽤나 넓었다. 다리쪽은 햇빛이 비췄고, 상체는 햇빛이 소나무에 가려 그늘져있었다. 나는 의외로 이런 감성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자연스레 가져온 핸드폰을 켜서는 10cm 의 '냄새나는 여자'를 들었다. 지금 내가 속한 그림과는 맞지 않는 가사였지만 멜로디는 풍경과 보기좋게 섞여 잘 어울렸다. 분위기에 취해 사진은 일찌감치 가방 속에 넣어버렸다. 사진으로 찍어 오래 기억해두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그냥 아무런 생각없이 전부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땅인 릉과 그것을 둘러싼 산자의 소나무 숲. 그 사이의 돌담. 그리고 그 돌담위에서 누워있는 나. 이런 생각을 하니 애매한 감정이 불쑥 느껴졌다.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그 돌담 위에서 나는 한가롭게 봄바람이나 만지면서 멜로디에 전율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이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죽음은 무언가에 의해서 단절된 상반된 것이 아니다. 소나무 숲의 일부가 돌담이기도 하고, 릉의 일부가 돌담이기도 한 것처럼 삶속에 죽음의 일부가 존재하는 것이고, 죽음 속에 삶의 일부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단절된 죽은 자의 땅이나 산자의 땅에 있는게 아니라, 그 사이 어딘가의 돌담위에서 위태롭지만 행복하려고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즉, 삶과 죽음은 함께 녹아있는 것이다. 완벽한 삶이나 죽음이란 애초부터 없다.

 

 "학생 거기 누워 있으면 안돼! 내려와 얼른"

 

 집으로 향하면서 생각했다. "봄은 의외로 가을만큼의 사색의 계절이다."

 

 

 

 

 

데카르트를 어떠한 방법보다 확실하게 설명하는 방법은 코기토 철학이다. 이는 데카르트 자신도 인정하는 바인데, 그의 저서 방법서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ego cogito, ergo sum)’라는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회의론자들이 제기하는 가당치 않은 억측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주목하고서, 이것을 내가 찾고 있는 제일원리로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방법서설 중에서]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이후, 절대 진리로만 여겨졌던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그 지위가 흔들리게 된다. 신학에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해결책을 제시해주던 교황청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상처를 입게 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마저 르네상스 시대에 알려지기 시작한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 위협받는다. 이것이 도그마의 위기이다. 절대적 진리인 도그마는 근대 이전까지 줄곧 사람들의 머리 속에 절대적인 진리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르네상스 이 후 도그마의 위기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기에 충분했다. 모든 것이 신으로 귀결되었던 때에 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은 정신적 카오스로 밖에 표현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도그마를 대신하기 위한 다른 진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때 데카르트가 들고 나온 것이 바로 자아 이다. 현재와 다르게 당시는 자아의 의식의 존재가 부정되지도 않았지만 인정되지도 않았다. 도그마의 붕괴 이전까지는 신이 모든 부족함과 궁금증을 대신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개인이 자아를 인식하고 자아의 자율성이 널리 인정받기 위해서는 자아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필요했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라는 도구를 이용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증명하고 그리고 제외하며, 다음과 방식으로 자아를 증명했다. 먼저, 우리는 보고 느낌으로써 자아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말이다. 가령, 어떤 여인과 사랑에 빠진 이는 그 여인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인식할지 모르지만, 그러지 않은 이는 그 여인이 세상에서 가장 이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또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이 현실이 실제로는 현실이 아니라 꿈 속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지각으로 자아를 인식하려는 노력은 절대적인 자아를 찾는데 적절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지각이 아닌 머릿속의 정신적 이성으로 자아를 찾으려는 노력은 자아를 인식하는데 적절한 것인가? 이것 마저도 그렇지 않다. 천천히 눈을 감고 2+3 = 5 라는 수학적 공식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정신적 이성은 꿈에서든 현실에서든 항상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 신체와 머릿속은 형태만 있는 껍데기일 뿐이고, 전지전능한 악마가 우리의 생각을 조정할 수 있다면 정신적 이성마저도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보자.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하더라도, 꿈을 꾸고 있는 나는 존재한다. 내가 지금 전능한 악마에서 철저히 속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속임을 당하는 나는 반드시 존재한다. 이런 의심을 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의심을 하는 나는 존재한다. 나는 의심한다,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보통 코기토라고 불리는 바로 이것이 회의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데카르트가 찾아낸 절대 확실한 철학적 진리다. 그런데 코기토에 등장하는 는 무엇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 내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데 있어 나의 물질적인 부분, 즉 신체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다. 오로지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내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영향을 주었을 뿐이다. 결국 코기토에 등장하는 는 사유하는 무엇 혹은 정신적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나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금껏 살펴본 대로, 데카르트는 기독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라는 두 도그마가 위기에 처한 시대에 새로운 도그마, 즉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절대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진리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탄생한 자아는 개개인에게 신으로부터 독립적인 의미를 주게 되었다.

헤겔 법철학에서 그가 가장 기저의 전제로 두고 있는 것도 절대적 진리인 자아의 존재이다. 그의 저서에서 그는 자유의지를 사회의 법 이전에 존재하는 진리로 정의한다. 그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법의 지반은 도대체가 정신적인 것이며 또한 그것의 더욱 엄밀한 장소와 출발점은 의지이면서도 더욱이 자유로운 의지이다. 결국 이 자유야말로 법의 실체 및 규정을 이루는가 하면 또한 법의 체계는 실현된 자유의 왕국이며 더 나아가 정신자체로부터 산출된 제2의 자연으로서의 정신의 세계이다."(4)

이상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의미 내용을 분석할 수 있다. 첫째로 법의 토대와 출발점이 정신으로서의 자유 의지라는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자유 의지가 법의 본성으로서 그것은 자신을 현실 세계에 실현하려는 목적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법철학에서 줄곧 견지하고 있는 자유의지는 자유의지라는 형태 이전에 자아에 대한 완벽한 인식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하다. 신에게서 독립된 절대적인 나의 존재(자아)가 있어야, 자유도 의지도 자유의지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와 헤겔의 법철학의 연관성

1. 일의 중요성.

 

   인간에게 있어서, 일을 함이란 자기 자신의 다른 표현이다. 지나 가는 옆집 아저씨에 불과한 사람도 그의 화실에 들어서면 멋진 화가가 된다. 그 화가는 옆집 아저씨에 불과한 일반성에서 화가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특수하게 만든다. 아랫집에 사는 젊은이는 그저 젊은이일지 모르나, 그의 일터로 돌아가면 그는 유능한 자동차 정비사가 된다. 일의 실현을 통해 무의미하게 대명사로 불리는 아저씨와 젊은이에서 화가와 자동차 정비공으로 재탄생 되는 순간이다. 일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의미를 발현한다.

 일의 본질적 의미를 생각해보기 위해 주의해야할 요소가 2가지 있다. 먼저는 사회가 개개인의 의미를 정해주는 것 같은 관점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일이란 사회에 보여주기 위해, 사회에 공헌하기 위해 선택하기 이전에 조금더 개인적인 면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다. 사회와 마주한 인간의 일의 의미가 하는 자신의 일이 아닌, 자기스스로와 마주하는 일. 이러한 관점으로 볼때, 인간에서 있어서 진정한 일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진정한 본질적 의미의 일은 생계에 억압되어서는 안된다. 원래 자신의 꿈은 화가인데, 생계가 걱정되어 회사에 취직했다 라는 모씨의 이야기를 들으면 위 주장이 쉽게 이해 갈 것이다. 즉, 사회가 자신의 일을 바라보는 눈, 생계에서 해방된 상황에서 일이라는 것을 조명하면 본질적인 일의 의미를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자기 혼자 뿐이다. 게다가 먹을 것도 평생 놀고 먹을 만큼 넘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에겐 일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그리고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어느 순간 만큼은 일하지 않고 놀고 먹고 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을지 모른다. 그가 행복하다면 그게 맞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이 만든 인간이라면 필시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답답할 것이다. 몸이 근질근질 할 것이다. 뭔가를 하고 싶을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것, 그것을 했을 때 행복한 것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리고 그일에는 그의 강한 염원과 소망이 담겨 일자체가 그를 대변할 만큼 그의 정신적 표현을 나타내게 된다. 이것이 곧 자아의 표현이자 실현이다. 일을 성취하고 얻는 성취감은 이차적인 것이다. 일차적인 것은 그가 그가 생각만해도 가슴이 뜨거운 일을 할때에, 그 일을 하는 자체에서 얻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기쁨과 행복이다. 이것이 일이가진 진정한 의미다.

 그러나 요즘 세상은 어떤가. 자신의 눈이 아닌 사회의 눈에 이끌려, 생계에 이끌려 (생계에 어쩔수 없이 이끌리는 경우는 일단은 먹고 살아야하기에 어쩔 수 없다고 하겠지만,,)일을 즐기지 않고 그저 하고 있는 것에 그치고 있는 세상이다.

 

1. 목표란 무엇일까?


 먼 곳을 보고 겁먹지마라. 그저 묵묵히 하루하루를 열심히 계획한대로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곳에 닿아있는게 순리이다.

 그렇다면, '목표'를 정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위해 열심히 달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인가?

 목표란 절대적인 도달점이 아니다. 목표에는 방향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루하루 열심히 꾸준히 가더라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만 간다면 어디론가 닿긴하겠지만, 내가 원하던 그곳은 아닐 것이다

 목표를 설정하여 방향을 잡되, 그 목표만 바라본채 자신을 혹사시키지 말라. 바다 한 복판의 비바람치는 어둠 속에 어렴풋이 등대를 보고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어렴풋이 라는 애매한 단어의 의미를 마음 속에 이해가 가능한 형태로 설명하기 위해 아래의 예를 들어보자. 비바람이 일고 집채만한 파도가 술렁이는 파도에서 등대에 닿기 위해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등대를 보지 않고 자신이 가고 싶은 길만 가겠는가? 아니면 오로지 등대를 바라보며 항해를 계속할 것인가? 사실 두가지 모두 답이 될  수 없다. 등대를 보지도 않고 가다보면 망망대해에서 헤매다 결국은 바다 위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등대만 바라보고 가다보면 지금 당장 덮쳐오는 집채만한 파도를 이길 겨를이 없다. 영리한 항해사는 머릿속으로 등대의 방향을 기억하고 사나운 파도를 하나하나 넘는데에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다.

 인생에서 목표의 의미도 딱 그정도이다. 목표만 바라보며 살아갈 수 없다. 목표는 머릿속 혹은 마음속 에딘가에 어렴풋이 남겨두고 현재를 열심히,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도록 사는 것이 현명한 인생살이 일 것이다. 등대의 불빛은 분명 존재하고 자신이 지금 그 등대를 향하여 얼마만큼 빨리 가고 있는지는 느끼지 못하지만, 천천히.. 꾸준히.. 가다보면 어느새 그 곳에 다다라 있을 것이다.


2. 미래의 정의

 미래는 정해지지 않아, 앞으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무슨일이 발생할지 예상된 상태의 미래는 미래라고 할 수 있는가? 미래의 성질이 결여된 미래는 미래라고 할 수 있는가? 가령 일주일 뒤에 무슨일이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시험일이 일주일 뒤로 정해졌다면 시험을 치는 그 시간만큼은 미래라고 할 수 있는가?

 일주일 뒤가 시험일이라면 그 날은 어쨌든 미래이지만 시험이란 사건만큼은 미래가 아니다. 따라서, 현재에 충실한다는 논리는 일주일 뒤의 시험에게도 적용된다. 정해진 사건은 더이상 미래의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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