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이다.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우리는 행복했을 때의 그 느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가치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나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며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을지 가치관을 세우려 노력한다. 사실 명예와 물질 보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삶이다.  

 

  우리의 선택은 아니였지만, 우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사회에 소속되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 그것을 원치 않는 사람은 (아마 불가능 할테지만) 사회의 약속, 의무, 사회 그 자체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자의반 타의반 사회에 소속된 사람들로 인간의 가장 절대적인 가치인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평등한 권리를 지닌 사회 내의 다른 구성원들의 의사도 반드시 존중하여야 한다. 어떤 사소한 방식으로든 타인의 행복을 방해하거나 박탈하는 것은 그들이 더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박탈하는 사형선고와도 다를 바가 없게되는 것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타인의 행복의 상처를 무시하는 일은 바람직한 사회 구성원의 일이 아니며 어른의 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아이이다. 여기까지가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 즉 소극적 행복의 조건이다.

 

 일본에 생활하면서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바라보다 내가 그들의 생활방식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후 그 충격은 나에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일본인들의 생활부터 말하고 싶다. 일본인들은 예의바르다.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의 입에서는 스미마센 이 파도를 이룬다. 자신의 행동이 남의 행복을 방해했을 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자각의 표시이자 사과의 표시이다. 사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보다는 그들의 DNA에 각인된 문화적 버릇이 주된 이유일 것이지만. 자신의 행동이 남의 행복에 "메이와쿠(민폐)" 를 끼친다는 생각이 깊어서 인지 그들은 소극적인 행복에 눌러 앉아버리기로 마음 먹은 것 같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들은 인간관계의 문을 닫고있는 느낌이 든다. 남에게 아예 신경을 쓰지 않으면 타인의 행복에 누를 끼치일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방안에만 틀여박혀 지내는 히키코모리는 그를 걱정하는 주의 사람들에게의 행복에는 누를 끼치지만 그 주의 사람들의 불행만 제외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불행을 끼치지 않는 문화시민이다. 누군가의 어깨를 치고 가고 무심결에 던진 말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지키지 못할 약속으로 상대를 찌푸리게 하는 활발한 사람들보다 오히려 타인의 행복을 덜 방해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소극적인 행복의 추구이다. 타인에게서 행복을 빼앗지 않는 것.

 

 필자도 지금까지 소극적인 행복 추구에만 머물렀었다. 아니, 그것밖에 없는  줄 알았다. 자신은 자신대로 행복을 누리는 동시에 사회에 소속된 몸이므로 타인의 행복을 빼앗지 않는 것. 그것이 인생을 사는 최고의 미덕인 줄 알았다. 타인의 행복을 빼앗지 않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에게 행복을 줄 수도 있다. 이것이 적극적인 행복의 추구이다. 타인의 행복을 빼앗는 일이 그들의 사형선고와 다를 바가 없다면, 타인에게 행복을 주는 일은 그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 넣는 것과 다름 없는 일이다. 소극적인 행복추구와 적극적인 행복추구의  조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또 그것이 진정으로 다함께 행복할 수 있는 멋진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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