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다른 곳에서 다른 생각을 하며 다른 사람들과 살아온 두 사람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서로의 공통된 부분에 대해 운명론적 의미를 두는 한편 서로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실망을 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보자면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서로 다른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둘 이유가 없다. 다른 것을 당연화하는 것이 맞다. 때문에 같은 점을 발견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기적적인 일이며 사소한 것에도 운명을 느껴야 한다.


그 자리에 그 시간에 나와 인연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가능했지만, 하필 당신이란 사람이 나의 상대가 된것 자체가 크나큰 인연이다.. 그리고 시간만이  그 운명을 증명할 수 있다.


서로 부딫혀 부서져 가는 것은 너무 상처만 남는다.

서로의 다른 굴곡을 그대로 두고 그 굴곡을 이해라는 진으로만 채우기에는 정신적으로 힘들다.

그나마 가장 나은 방법은 다른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부딫혀가며 진으로 그 사이를 매꾸는 것.


연리지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마치 하나가 되는 동안,

표피가 부서지기도 하는 동시에

송진을 뿜어 부서진 상처를 치료해주기도 하고, 부딫히기 전에 진으로 막기도 한다.

 

서로 맞춰가는 것

이해하는 것

쓸데없는 것 

심플한 것

복잡한 것.



한 사람의 입장에서 상대의 말이나 행동을 쓸데없다고 평가하는 것은 오만한 짓이다.

내가 생각치도 못한 상대의 입장에서 어떠한 행동이나 말을 하였을 수도 있다.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은 쓸데없는 것이 없다.

로맨스가 필요해 3

정희재 日 (회사 1년차 직장인)

"대학 성적 맞춰서 오라는 회사 와서 일하구. 꿈이라는 말을 들으면 속이 꽉막히는 기분이에요."

 

 꿈이라는 말을 듣자 나도 속이 꽉막혀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고 싶은 일이 없다. 아직. 찾지 못했다. 이대로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간다면 나도 회사에서 껍데기만 된채로 일하고 꿈이라는 단어가 귓가에 흘러갈때마다 꽉막히는 속을 억지로 현실로써 뚫어내고 그렇게 죄인아닌 죄인으로 살아 갈 거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되는건, 난 아직 어리고 대학생으로써 물리적인 시간도 주어졌다. 어쩌면 내가 자라왔던 환경 상 아직까지 꿈이 없는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해왔지 당연시 되었던 행동이나 말들에 왜 그래야하는지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까지는 꿈이 없었다. 왜냐고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꿈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에 관한 단어라고 정의될지도 모른다. 그들의 말대로 꿈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분화해서 '꿈'을 하고싶은 일이라는 의미에 초점을 둔 다면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산다는 건 어떤 삶을 살겠다는 의지이지 꿈이 될 수 없다. 하지만, 하루하루 행복하게 산다는 생각은 장기적으로 꿈도 만들 수 있는 것을 아닐까. 예를 들어, 하루에 세개의 면접이 있는데 한 개만 갈 수 있다고하자. 하나는 대기업, 다른 하나는 공무원, 다른 하나는 유니세프. 나는 그날도 행복하게 살기위한 선택을하여야 한다. 좀더 가치 있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면 나는 유니세프를 택할 것이다. 이러한 것처럼 하루의 행복에 대한 선택이 전반적인 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행복의 선택은 경험이 넓어질 수록, 즉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아질 수록 더 행복한 인생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따라서, 시간이 주어진 이 시점에 많은 경험을 위해 노력해야한다..

 인간의 삶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이다.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우리는 행복했을 때의 그 느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가치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나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며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을지 가치관을 세우려 노력한다. 사실 명예와 물질 보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삶이다.  

 

  우리의 선택은 아니였지만, 우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사회에 소속되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 그것을 원치 않는 사람은 (아마 불가능 할테지만) 사회의 약속, 의무, 사회 그 자체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자의반 타의반 사회에 소속된 사람들로 인간의 가장 절대적인 가치인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평등한 권리를 지닌 사회 내의 다른 구성원들의 의사도 반드시 존중하여야 한다. 어떤 사소한 방식으로든 타인의 행복을 방해하거나 박탈하는 것은 그들이 더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박탈하는 사형선고와도 다를 바가 없게되는 것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타인의 행복의 상처를 무시하는 일은 바람직한 사회 구성원의 일이 아니며 어른의 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아이이다. 여기까지가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 즉 소극적 행복의 조건이다.

 

 일본에 생활하면서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바라보다 내가 그들의 생활방식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후 그 충격은 나에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일본인들의 생활부터 말하고 싶다. 일본인들은 예의바르다.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의 입에서는 스미마센 이 파도를 이룬다. 자신의 행동이 남의 행복을 방해했을 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자각의 표시이자 사과의 표시이다. 사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보다는 그들의 DNA에 각인된 문화적 버릇이 주된 이유일 것이지만. 자신의 행동이 남의 행복에 "메이와쿠(민폐)" 를 끼친다는 생각이 깊어서 인지 그들은 소극적인 행복에 눌러 앉아버리기로 마음 먹은 것 같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들은 인간관계의 문을 닫고있는 느낌이 든다. 남에게 아예 신경을 쓰지 않으면 타인의 행복에 누를 끼치일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방안에만 틀여박혀 지내는 히키코모리는 그를 걱정하는 주의 사람들에게의 행복에는 누를 끼치지만 그 주의 사람들의 불행만 제외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불행을 끼치지 않는 문화시민이다. 누군가의 어깨를 치고 가고 무심결에 던진 말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지키지 못할 약속으로 상대를 찌푸리게 하는 활발한 사람들보다 오히려 타인의 행복을 덜 방해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소극적인 행복의 추구이다. 타인에게서 행복을 빼앗지 않는 것.

 

 필자도 지금까지 소극적인 행복 추구에만 머물렀었다. 아니, 그것밖에 없는  줄 알았다. 자신은 자신대로 행복을 누리는 동시에 사회에 소속된 몸이므로 타인의 행복을 빼앗지 않는 것. 그것이 인생을 사는 최고의 미덕인 줄 알았다. 타인의 행복을 빼앗지 않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에게 행복을 줄 수도 있다. 이것이 적극적인 행복의 추구이다. 타인의 행복을 빼앗는 일이 그들의 사형선고와 다를 바가 없다면, 타인에게 행복을 주는 일은 그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 넣는 것과 다름 없는 일이다. 소극적인 행복추구와 적극적인 행복추구의  조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또 그것이 진정으로 다함께 행복할 수 있는 멋진 길이다.

 

 

 

 

 

 

 

우리는 친해졌고 가까워졌고 익숙해졌다. 

그리고 딱 그만큼 미안함은 사소해졌고 고마움은 흐릿해졌으며

엄마는 당연해졌다. 

 

..... 

 

세상 모든 관계는 익숙해지고 결국엔 당연해진다. 

 

선물의 가장 강력한 힘은 그 익숙하고도 당연한 관계를  

새삼 다시 설레고 감사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선물을 고르고 카드 문구를 고민하며 그에게 마음을 쓰는 사이

어느새 그 사람은 내게 다시금 새삼스럽게 된다.  

 

그리고 그 마음이란 반드시 전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익숙하고도 당연한 관계가 급기야 무뎌짐으로 퇴화돼 버린다면

이젠 그 어떤 선물도 뒤늦은 노력도 의미없다.  

 

아무 관심도 갖지 못하고 베란다 귀퉁이에서 바짝시들어 버린 난초에게

때늦은 물과 거름은 소용없는 일이다.  

 

관계가 시들기전에 서로가 무뎌지기 전에  선물해야 한다.

마음을 전해야한다.

 

-응답하라 1994 06화 선물학 개론 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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