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전개

인간의 궁극적 삶의 목적은 행복이다라고 줄곧 외쳐왔다.

그러던 나는, 인간이 영위해야할 최종적 목적이 행복이라면,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모르고서는 진정한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모두가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가슴 속에서, 오로지 그 속에서만 느껴질 수 있는 무엇인가를 언어로 정의할 수 있을까..

그 때 친하게 지내던 이모님 말씀이 머리에 스쳐갔다. 


 "하고싶은거 하면서 살어. 인생 그냥 자기 만족이야."


만족하면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사고가 수정되었다.

만족하면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은 행복 그 자체이다.

 

자기만족 = 행복 

 

두 단어 사이의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단어는 동의어다. 

 

2. 생각의 전개에 대한 반론

ⅰ.어떻게 하면 자기 만족을 할 것인가?

 누군가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외부적 내부적인 방법이 있지만, 결국 외부적인 원인도 내부적인 원인으로 형태가 바뀌어 자기만족을 취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애인에게 선물을 받아서 행복하다는 어느 남자가 있다고 할 때, 사실 그 남자가 행복한 이유는 선물자체의 이유가 아니라, 선물을 받은 것이 나의 기분을 좋게했기 때문에 행복해 진 것이다(기쁜 이유 :  상대로부터 나의 존재감 인정, 그 선물을 이용해 나의 만족을 느낄 것을 상상). 반대로 누가 봐도 귀한 선물을 받아도 선물을 받는 그의 마음이 편치않다면그는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자기만족에 직접적인 자극을 주는 것은 내부성이라는 단일적인 원인이다. 행복은 외부의 자극보다 스스로의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외부적인 자극은 전혀 무의미한 것인가. 아니다. 외부적인 자극이 자기 만족까지 실현되는 매커니즘에서 외부적인 자극은 시작이고 내부적인 자극은 끝이다. 시작이 없으면 끝도 없다. 나를 위해서 외부적인 자극을 시작해준 외재적 존재에게 감사해야하는 이유이다.

 

① <외부적 자극이 없을 경우>  


 (시작 -내부적 자극)     ---->    (끝 -내부적 자극)     ---->    (자기만족실현 =행복)

예) 외로움이 더이상 외롭지 않은 내가 대견스러웠다.


② <외부적 자극이 있을 경우>  



(시작 -외부적 자극)     ---->    (끝 -내부적 자극)     ---->    (자기만족실현 =행복)

예)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 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노을지는 풍경을 보고 그 풍경에 녹아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정리하면, 행복=자기만족의 메커니즘은 그 시작이 내부적이든 외부적이든 결과는 내부적 자극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①과 ②의 예를 고민하면서 느낀 점은 (특히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부족한 사람은) 내부적 자극으로 시작되는 자기만족은 외부적자극으로 시작되는 자기만족보다 현저하게 그 수가 적다는 것이다. 즉, 외부적 자극은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더욱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며 자기만족의 시작점에 있다는 점에서 내부적 자극만큼이나 중요하다.

 

시작이 어떠한 자극이든 내부적 자극이 어떻게 징검다리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서, 같은 외부적 자극도 자기만족으로 이어질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자기만족을 더 많이 느끼기 위한 긍정적인 내부적 자극은 어떠한 형태인가. 가장 간단한 내부적 자극의 형태는 긍정이다. 긍정은 우리를 손쉽게 만족하게 할 뿐만 아니라, 더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요인들' 포스트참고)

 

3. 반론

ⅰ.자기만족은 올바른 방향성이 존재하는가?

타인의 만족도 자신의 것만큼 중요하므로, 타인의 만족을 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자기 만족 실현이 이루어져야한다. 타인 뿐만 아니라 자기도 만족할 수 있는 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인간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부처의 칠시가 모두의 행복을 위한 생활 속의 간단한 가르침이다.


ⅱ. 자기만족과 행복은 필요충분조건인가?

오로지 자기만족만이 행복인가. 다른 어떤 감정이나 생각도 행복으로 이어 질 수는 없는가? 지금 까지의 생각으론 그렇다. 자기 만족과 행복은 필요충분 조건이다.

 

ⅲ. 왜 자기만족은 사람마다 다른가?

환경에 적응해온 생활권의 결과인 문화권 또 자라온 환경 또 선천적인 요인들까지 개인에 행복 기준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다양하다. 행복한 사회를 위한 교육의 역할은 균일적인 행복의 기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 긍정하고, 타인의 행복을 위해 존중할 줄 아는 것 이 두가지만 가르치면 된다.

1. 여행의 준비단계 : 마음가짐

 어떤 것을 배운다거나 깨닿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에는 그로인한 부담감으로 여행이 퇴색될까 두렵다. 여행의 준비물은 설레임으로 충분하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그저 그렇게 일상에서 벗어난 것들을 보고 느끼다보면 어느새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짜증내는 상황에서 짜증을 내지 않는 다거나 복잡한 일들을 척척해내는 나를 보며 성장한 스스로를 발견하기도 하고, 이번 유럽여행과 같은 경우에서 처럼 한국 일본과는 너무나 다른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라이프 스타일 속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생각치도 않게 만나게 되는 좋은 사람들에게 좋을 말들을 듣기도 한다. 이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생각된다.


2. 제한된 시간과 여행

 앞으로 내가 마음껏 하고싶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될까. 대학교 졸업전 까지 딱 그때 까지일 가능성이 크다. 취업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봐서 알겠지만 막상 취업을 하면 야근에 일에 현실적인 면을 고려하느라 여행은 먼나라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른다. 대학 생활 때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경험하려고 노력한다면 지금은 역시나 무엇일지 모르지만 나의 생각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고 나의 인생을 바꿀 "좋은 것"들이 나를 찾아 올 것이다.


3. 향략여행과 고생여행

 유럽여행과 같은 타문화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경험하는 여행이 동남아 여행같은 향락여행과 다른 이유는 전자의 경우 1번과 같은 배울 점이 있기 때문이다. 배움이 있는 여행과 향락여행을 이분화 하는 것은 아니지만 향략여행은 몸이 편한 여행이기 때문에 그저 놀다오면 되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배우고 느낄 기회가 배움이 있는 여행에 비해서 적다. 예를 들어 티벳에 여행을 간 것과 발리로 여행을 간 것을 생각해보자. 실제로 겪은 일이 아닌 가정에 불과하지만 티벳 여행은 몸이 편하기 보다는 힘들 것이다. 위생이나 치안도 위험하고 먹을거리 입을거리도 내가 지금까지 경험하던 것과 다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새롭다.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은 행복한 감정보다는 고통의 감정이다. 왜 고통을 느꼈는지 분석하는데에서 큰 성장을 이룬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고생이 예상되는 곳의 여행은 고생만큼의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반면 발리 여행을 생각하본다면. 발리같은 유명 관광지는 모든 편의가 이미 준비되어 있다. 주변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관광지의 특성상 돈만 있다면 내가 사는 곳보다 더 높은 수준의 여가와 즐거움을 즐길 수 있다. 즐거움과 행복은 누리는 순간 만큼은 달콤한 것이지만 그것으로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4. 여행과 일상의 대립성

 우리는 일상에서 산다. 일상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준다. 안정감은 우리에게 기존에 자신의 해오던 것 이상의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한다. (이는 안정감이 우리의 인생에 줄 수 있는 큰 장점인데, 항상 긴장을 유지해야하는 여행은 기본적으로 소모되는 에너지가 많기때문에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는 에너지를 허락하지 않는다)그러나 일상에서는 배움을 찾고자했던 날카로운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대학생이다. 학교를 다닌다. 학교에서는 수업을 듣고 같은 학교의 학생들을 만나서 이야기한다. 수업은 들으면 그만이고 학생들과의 관계에서도 큰 위기를 찾기는 어렵다.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숱한 것들이 내 옆을 지나가도 틀에박힌 일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을 놓쳐버리기 쉽다.(가령, 구걸을 하는 사람을 보고 의문을 갖고 스스로에게 답을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어떤 가르침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거지가 구걸하는 모습은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여행은 내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부터의 장소적 탈출이다. 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지나며,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 발을 딛고 서며,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 중에 머릿속은 호기심으로 분주하다. 왜 이런 음식을 먹으며, 왜 이런 장소가 탄생한 것이며, 왜 이런 사회적 시스템을 갖추게 된것이며, 왜 이런 문화 속에 살고있는 것인지 너무 궁금하다. 또 그런 생각들은 새로운 생각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 아니라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신의 가치관과 연관된 질문이나 인간 심리의 핵심적인 부분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새로운 곳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이의 여행은 에너지낭비와 시간낭비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이에 니체의 말들을 이용해보고 싶다.


1.니체는 진정한 과제는 "삶"을 고양하기 위해서 사실들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괴테의 문장을 이용했다. "나는 나의 활동에 보탬이 되거나 직접적으로 활력을 부여하지 않고 단순히 나를 가르치기만 하는 모든 것을 싫어한다.


 

 

2.니체는 "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 - 하찮고 일상적인 경험- 을 잘 관리함으러써 그것을 경작 가능한 땅으로 만들어 1년에 세 번 열매를 맺게 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 - 그 숫자는 얼마나 많은지!- 은 운명의 솟구치는 파도에 휩쓸리거나 시대와 나라가 만들어내는 혼란스러운 물줄기 속으로 말려들어가면서도 늘 그 위에 코르크처럼 까닥거리며 떠있다. 이런 것을 관찰하다보면, 우리는 결국 인류를 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 즉 적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만드는 방법을 아는 소수(극소수), 와 많은 것을 가지고 적은 것을 만드는 방법을 아는 다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고 말했다.


-알랭드보통, 여행의 기술中


 이러한 여행의 특성을 일상 속에서도 제공받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책읽기와 공부이다. 이들은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질문과 마주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생각의 영역 정립 그리고 통념에 묻혔던 생각들의 재정립하도록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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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의 만사는 인과응보다. 어떤 일이 생기게 된데에는 혹은 어떤 생각이 거기 까지 미치게 된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또 그 이유에는 이유가 있고 이러한 과정이 끝도 없이 맞물려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다. 

 

 나는 지금 그 왜에 대하여 또 왜라고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왜 우리는 왜에 대해서 사색해봐야 하는지.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검정 베일로 가득 둘러쌓여 있다. 특히나, 인과응보가 더 복잡하게 얽힌 현대는 더더욱 그렇다. 누구하나 나서서 왜 그런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속에 각인되어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짙다. 그러나, 사람이 어떠한 일을 할때에는 왜 그렇게 행동해야하는지 왜 그렇게 생각해야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유를 알아야 스스로의 이성에 가하는 납득이 확실하다. 논리적 이성으로 인과를 지배해야 이해가 확실하다. 이것이 곧 가치관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왜 그런지 모르고 하는 행동이나 생각은 속이 텅빈 갈대와 같아서 이리저리 흔들린다.

예를 들어 살인이라는 당연한 부정적인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고 하자. 이때 나는 왜 살인하면 안되는지 이성적으로 생각한다. 인간은 행복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존재이지만, 함께 어울려 사는 우리들은 우리의 행복과 동일하게 타인의 행복도 존중해야한다. 곧, 타인의 행복에 해를 끼치지 않는 행복을 우리는 누려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살아서 행복해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살인은 나쁜 것이다. 이는 우리의 행복만큼 중요한 타인의 행복은 앗아가는 것이므로 좋지 않다.

 

이 세상 모든 것에 왜라고 질문하고 자타(自他)의 행복이 전제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으로 인과를 판단하라. 혹시 그것이 당연한 것일지라도.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왜'는 내가 가진 가장 큰 지적 재산이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20여분 떨어진 거리에 릉이 있다. 내가 살던 곳은 옛 어떤 왕국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었는데 릉은 왕릉과 왕비릉 이렇게 2개가 있고, 때때로 여기저기서 지금은 사라져 버린 옛사람들의 흔적이 종종 발견되고는 했다. 

  이 지역에 산지도 벌써 꾀나 되어가니, 우연찮게 릉과 마주치는 일이 수 십번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매번 그냥 그런 기분으로 아무생각 없이 그것들을 지나쳤을 뿐, 릉의 존재를 의식하고 한 번쯤 가서 사진이라도 찍어보고 싶다고 마음먹은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아마도 그런 기분이 문득 생긴 건 릉의 존재 자체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릉을 둘러쌓고 있는 소나무 방풍림에 먼저 끌려서였다. 릉을 둘러쌓고 있는 수백그루의 소나무는 겉보기에는 어두침침하고 침울한 색이었지만, 그 안의 공기는 신비해서 왠지모르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같은 것이 느껴졌다. 마치 신의 창조이래 한 번도 인간의 발길이 닿지않은 원시림의 자연이 울부지는 것처럼.

 3월의 날씨답지 않게 따듯한 날씨였다. 벌써부터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따금씩 내 피부를 스쳐가는 바람은 차갑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딱 체온만큼만 따듯했다. 그런 훈훈함 때문인지 혼자가는 산책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이른 봄바람을 맞으니, 머리속으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피부는 어머니의 배안에서 웅크리고 있었을 때의 따스함을 몸이 기억이라도 하는 듯했다.

 버스를 타고 릉으로 향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가는게 좋았다. 목적지는 필요 없었다. 때로는 목적지가 영원히 없었으면 하고 바랐다. (특히 버스 안에서 눈이 감겨올 때) 버스를 타고가면서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또 주위의 일상을 보면서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그것들에 무관심했었는지를 스스로 생각하면서 나는 점점 낯설었던 버스의 한 자리에 뿌리를 내렸다. 가끔씩은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버스는 중세시대의 창창한 바다를 나아가는 멋진 배고, 그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은 정처없이 바다를 떠도는 선원들이다. 그렇게 끝이 없는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순진하게도 기뻤다.

 버스는 운좋게도 목적지 바로 앞에 멈추어 섰다. 릉이 보였다. 맑은 날이었지만 하늘은 투명하지 않았다. 회색과 흰색의 중간 쯤의 색이었는데, 저런 하늘 아래 이런 맑은 해가 비칠 수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예의상" 릉에서 족히 100미터는 떨어진 거리에서 전체 스틸샷을 몇 장 찍고는 릉에 다가갔다. 말했듯이, 나는 이전에 릉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우선 내가 다가가고 잇는건 릉을 품고있는 소나무 숲이었다. 햇빛이 여기저기 비추었는데도 숲은 어두컴컴했다. 공기도 바깥과는 사뭇 달랐다. 소나무숲 주위에 보이지 않는 견고하고 투명한 벽이라도 쳐져 있는것처럼 그 안은 외부와 단절된 듯 조용했다. 릉은 담이라고 하기에는 윗부분이 넓고 높이는 낮은 돌담에 둘러쌓여 있었다. 그 돌담 밖에 있는 것이 소나무 숲이었다. 나는 돌담위에 올라갔다. 두 사람은 누울 수 있을 만큼 꽤나 넓었다. 다리쪽은 햇빛이 비췄고, 상체는 햇빛이 소나무에 가려 그늘져있었다. 나는 의외로 이런 감성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자연스레 가져온 핸드폰을 켜서는 10cm 의 '냄새나는 여자'를 들었다. 지금 내가 속한 그림과는 맞지 않는 가사였지만 멜로디는 풍경과 보기좋게 섞여 잘 어울렸다. 분위기에 취해 사진은 일찌감치 가방 속에 넣어버렸다. 사진으로 찍어 오래 기억해두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그냥 아무런 생각없이 전부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땅인 릉과 그것을 둘러싼 산자의 소나무 숲. 그 사이의 돌담. 그리고 그 돌담위에서 누워있는 나. 이런 생각을 하니 애매한 감정이 불쑥 느껴졌다.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그 돌담 위에서 나는 한가롭게 봄바람이나 만지면서 멜로디에 전율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이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죽음은 무언가에 의해서 단절된 상반된 것이 아니다. 소나무 숲의 일부가 돌담이기도 하고, 릉의 일부가 돌담이기도 한 것처럼 삶속에 죽음의 일부가 존재하는 것이고, 죽음 속에 삶의 일부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단절된 죽은 자의 땅이나 산자의 땅에 있는게 아니라, 그 사이 어딘가의 돌담위에서 위태롭지만 행복하려고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즉, 삶과 죽음은 함께 녹아있는 것이다. 완벽한 삶이나 죽음이란 애초부터 없다.

 

 "학생 거기 누워 있으면 안돼! 내려와 얼른"

 

 집으로 향하면서 생각했다. "봄은 의외로 가을만큼의 사색의 계절이다."

 

 

 

 

 

데카르트를 어떠한 방법보다 확실하게 설명하는 방법은 코기토 철학이다. 이는 데카르트 자신도 인정하는 바인데, 그의 저서 방법서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ego cogito, ergo sum)’라는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회의론자들이 제기하는 가당치 않은 억측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주목하고서, 이것을 내가 찾고 있는 제일원리로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방법서설 중에서]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이후, 절대 진리로만 여겨졌던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그 지위가 흔들리게 된다. 신학에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해결책을 제시해주던 교황청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상처를 입게 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마저 르네상스 시대에 알려지기 시작한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 위협받는다. 이것이 도그마의 위기이다. 절대적 진리인 도그마는 근대 이전까지 줄곧 사람들의 머리 속에 절대적인 진리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르네상스 이 후 도그마의 위기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기에 충분했다. 모든 것이 신으로 귀결되었던 때에 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은 정신적 카오스로 밖에 표현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도그마를 대신하기 위한 다른 진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때 데카르트가 들고 나온 것이 바로 자아 이다. 현재와 다르게 당시는 자아의 의식의 존재가 부정되지도 않았지만 인정되지도 않았다. 도그마의 붕괴 이전까지는 신이 모든 부족함과 궁금증을 대신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개인이 자아를 인식하고 자아의 자율성이 널리 인정받기 위해서는 자아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필요했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라는 도구를 이용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증명하고 그리고 제외하며, 다음과 방식으로 자아를 증명했다. 먼저, 우리는 보고 느낌으로써 자아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말이다. 가령, 어떤 여인과 사랑에 빠진 이는 그 여인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인식할지 모르지만, 그러지 않은 이는 그 여인이 세상에서 가장 이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또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이 현실이 실제로는 현실이 아니라 꿈 속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지각으로 자아를 인식하려는 노력은 절대적인 자아를 찾는데 적절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지각이 아닌 머릿속의 정신적 이성으로 자아를 찾으려는 노력은 자아를 인식하는데 적절한 것인가? 이것 마저도 그렇지 않다. 천천히 눈을 감고 2+3 = 5 라는 수학적 공식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정신적 이성은 꿈에서든 현실에서든 항상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 신체와 머릿속은 형태만 있는 껍데기일 뿐이고, 전지전능한 악마가 우리의 생각을 조정할 수 있다면 정신적 이성마저도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보자.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하더라도, 꿈을 꾸고 있는 나는 존재한다. 내가 지금 전능한 악마에서 철저히 속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속임을 당하는 나는 반드시 존재한다. 이런 의심을 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의심을 하는 나는 존재한다. 나는 의심한다,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보통 코기토라고 불리는 바로 이것이 회의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데카르트가 찾아낸 절대 확실한 철학적 진리다. 그런데 코기토에 등장하는 는 무엇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 내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데 있어 나의 물질적인 부분, 즉 신체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다. 오로지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내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영향을 주었을 뿐이다. 결국 코기토에 등장하는 는 사유하는 무엇 혹은 정신적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나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금껏 살펴본 대로, 데카르트는 기독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라는 두 도그마가 위기에 처한 시대에 새로운 도그마, 즉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절대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진리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탄생한 자아는 개개인에게 신으로부터 독립적인 의미를 주게 되었다.

헤겔 법철학에서 그가 가장 기저의 전제로 두고 있는 것도 절대적 진리인 자아의 존재이다. 그의 저서에서 그는 자유의지를 사회의 법 이전에 존재하는 진리로 정의한다. 그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법의 지반은 도대체가 정신적인 것이며 또한 그것의 더욱 엄밀한 장소와 출발점은 의지이면서도 더욱이 자유로운 의지이다. 결국 이 자유야말로 법의 실체 및 규정을 이루는가 하면 또한 법의 체계는 실현된 자유의 왕국이며 더 나아가 정신자체로부터 산출된 제2의 자연으로서의 정신의 세계이다."(4)

이상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의미 내용을 분석할 수 있다. 첫째로 법의 토대와 출발점이 정신으로서의 자유 의지라는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자유 의지가 법의 본성으로서 그것은 자신을 현실 세계에 실현하려는 목적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법철학에서 줄곧 견지하고 있는 자유의지는 자유의지라는 형태 이전에 자아에 대한 완벽한 인식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하다. 신에게서 독립된 절대적인 나의 존재(자아)가 있어야, 자유도 의지도 자유의지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와 헤겔의 법철학의 연관성

1. 일의 중요성.

 

   인간에게 있어서, 일을 함이란 자기 자신의 다른 표현이다. 지나 가는 옆집 아저씨에 불과한 사람도 그의 화실에 들어서면 멋진 화가가 된다. 그 화가는 옆집 아저씨에 불과한 일반성에서 화가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특수하게 만든다. 아랫집에 사는 젊은이는 그저 젊은이일지 모르나, 그의 일터로 돌아가면 그는 유능한 자동차 정비사가 된다. 일의 실현을 통해 무의미하게 대명사로 불리는 아저씨와 젊은이에서 화가와 자동차 정비공으로 재탄생 되는 순간이다. 일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의미를 발현한다.

 일의 본질적 의미를 생각해보기 위해 주의해야할 요소가 2가지 있다. 먼저는 사회가 개개인의 의미를 정해주는 것 같은 관점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일이란 사회에 보여주기 위해, 사회에 공헌하기 위해 선택하기 이전에 조금더 개인적인 면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다. 사회와 마주한 인간의 일의 의미가 하는 자신의 일이 아닌, 자기스스로와 마주하는 일. 이러한 관점으로 볼때, 인간에서 있어서 진정한 일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진정한 본질적 의미의 일은 생계에 억압되어서는 안된다. 원래 자신의 꿈은 화가인데, 생계가 걱정되어 회사에 취직했다 라는 모씨의 이야기를 들으면 위 주장이 쉽게 이해 갈 것이다. 즉, 사회가 자신의 일을 바라보는 눈, 생계에서 해방된 상황에서 일이라는 것을 조명하면 본질적인 일의 의미를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자기 혼자 뿐이다. 게다가 먹을 것도 평생 놀고 먹을 만큼 넘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에겐 일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그리고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어느 순간 만큼은 일하지 않고 놀고 먹고 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을지 모른다. 그가 행복하다면 그게 맞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이 만든 인간이라면 필시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답답할 것이다. 몸이 근질근질 할 것이다. 뭔가를 하고 싶을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것, 그것을 했을 때 행복한 것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리고 그일에는 그의 강한 염원과 소망이 담겨 일자체가 그를 대변할 만큼 그의 정신적 표현을 나타내게 된다. 이것이 곧 자아의 표현이자 실현이다. 일을 성취하고 얻는 성취감은 이차적인 것이다. 일차적인 것은 그가 그가 생각만해도 가슴이 뜨거운 일을 할때에, 그 일을 하는 자체에서 얻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기쁨과 행복이다. 이것이 일이가진 진정한 의미다.

 그러나 요즘 세상은 어떤가. 자신의 눈이 아닌 사회의 눈에 이끌려, 생계에 이끌려 (생계에 어쩔수 없이 이끌리는 경우는 일단은 먹고 살아야하기에 어쩔 수 없다고 하겠지만,,)일을 즐기지 않고 그저 하고 있는 것에 그치고 있는 세상이다.

 

1. 목표란 무엇일까?


 먼 곳을 보고 겁먹지마라. 그저 묵묵히 하루하루를 열심히 계획한대로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곳에 닿아있는게 순리이다.

 그렇다면, '목표'를 정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위해 열심히 달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인가?

 목표란 절대적인 도달점이 아니다. 목표에는 방향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루하루 열심히 꾸준히 가더라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만 간다면 어디론가 닿긴하겠지만, 내가 원하던 그곳은 아닐 것이다

 목표를 설정하여 방향을 잡되, 그 목표만 바라본채 자신을 혹사시키지 말라. 바다 한 복판의 비바람치는 어둠 속에 어렴풋이 등대를 보고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어렴풋이 라는 애매한 단어의 의미를 마음 속에 이해가 가능한 형태로 설명하기 위해 아래의 예를 들어보자. 비바람이 일고 집채만한 파도가 술렁이는 파도에서 등대에 닿기 위해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등대를 보지 않고 자신이 가고 싶은 길만 가겠는가? 아니면 오로지 등대를 바라보며 항해를 계속할 것인가? 사실 두가지 모두 답이 될  수 없다. 등대를 보지도 않고 가다보면 망망대해에서 헤매다 결국은 바다 위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등대만 바라보고 가다보면 지금 당장 덮쳐오는 집채만한 파도를 이길 겨를이 없다. 영리한 항해사는 머릿속으로 등대의 방향을 기억하고 사나운 파도를 하나하나 넘는데에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다.

 인생에서 목표의 의미도 딱 그정도이다. 목표만 바라보며 살아갈 수 없다. 목표는 머릿속 혹은 마음속 에딘가에 어렴풋이 남겨두고 현재를 열심히,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도록 사는 것이 현명한 인생살이 일 것이다. 등대의 불빛은 분명 존재하고 자신이 지금 그 등대를 향하여 얼마만큼 빨리 가고 있는지는 느끼지 못하지만, 천천히.. 꾸준히.. 가다보면 어느새 그 곳에 다다라 있을 것이다.


2. 미래의 정의

 미래는 정해지지 않아, 앞으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무슨일이 발생할지 예상된 상태의 미래는 미래라고 할 수 있는가? 미래의 성질이 결여된 미래는 미래라고 할 수 있는가? 가령 일주일 뒤에 무슨일이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시험일이 일주일 뒤로 정해졌다면 시험을 치는 그 시간만큼은 미래라고 할 수 있는가?

 일주일 뒤가 시험일이라면 그 날은 어쨌든 미래이지만 시험이란 사건만큼은 미래가 아니다. 따라서, 현재에 충실한다는 논리는 일주일 뒤의 시험에게도 적용된다. 정해진 사건은 더이상 미래의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집에 좁고 낡은 컴퓨터 책상 한 대가 있다. 컴퓨터 한대가 들어가기에도 딱 맞는 크기라, 그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 하는 것 왜에 책을 읽는 다던가, 공부를 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마침, 요즘 여러모로 책상에 앉아 보낼 시간이 많아진 나에게 이 구닥다리 책상에 대한 불만은 커져만 갔다.

 어느 날, 아버지께 부탁을 드렸다. '아버지, 책상 하나만 사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이에 대한 아버지의 답변은, 2층 다락방에 있는 책상을 가져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부탁에 대해 곧바로 반론을 당해서 인지 처음에는 기분이 얹짢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검소한 생활 습관이 나에게 또 다른 교훈은 안겨주었다.

 인간은 왜 사치를 부리면 안돼는가? 자신이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사치를 부림으로써 쾌락을 얻는다면  사치라는 것을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게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인간의 본성상 사치는 필시,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자신에게 꼭 필요하지 않은 물품이라도 그것을 구매하게 된다면, 그러한 태도는 자신의 생활 습관으로 굳어진다. 이러한 습관은, 자신의 가진 소소한 것에 감사하지 않는 태도를 형성한다. 이렇게 감사하지 않는 태도는, 끊임 없이 불만과 욕망을 낳을 것이고 이는 불행으로 이어진다.

 물질적으로 풍족하다면, 사치하지 말고 검소하게 살아서 그 물질적 풍족을 그렇지 못한 타인과 나누어라. 필시, 성공은 자신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또한, 사치로 쾌락을 얻는다면, 다른 활동 이를 테면 소중한 사람과의 소통, 이상적 인격 성격 등으로 더 높은 가치의 쾌락과 행복을 얻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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