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상력이란 무엇일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힘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힘



2. 왜 아이들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어른들은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을까?

아이들은 현실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사실 무엇이 현실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이들이 가진 가장 큰 힘이다), 자신이 생각나는 대로 하고싶은 대로를 중심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더 많은 상상을 할 수 있지만, 어른은 생각나는 대로 생각하기전 현실 가능성을 먼저 고려하기 때문에



3. 어른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

몇 가지 가정을 기존의 생각 속에 붙여보는 연습
  1. 만약에 안되는게 된다고 하면?


  2.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면?

    그치만 존재하지 않는 것 자체를 애초에 생각하는 능력이 필요하네.










잡스 : 심플한것은 가장 복잡하다.

겉으로 보기엔 심플하지만, 그 심플한 것 하나에 여러가지 비전과 철학을 넣기위해 얼마나 많을 고민을 했을까!


원인론

A(원인)하기 때문에 B(결과)이다.


-원인론이 사실로 증명되면 이론, 그렇지 않으면 주장(가설)







목적론

B(목적)가 되기 위해서 A(수단)한다.



-올바른 목적론이 성립하기 위해선, B(목적)과 A(수단)의 위치를 원인론으로 바꾸어 넣었을 때 논리성이 성립해야한다.

가령, 

목적론 : 돈을 벌기 위해서 취직한다.

-> 원인론 : 취직하기 때문에 돈을 번다


-목적론은 인간의 의도를 전제로 한다.


원인론의 결과는 두 가지의 성격을 가진다.

1. 인간의 의도를 가지고 있는 사실

2..인간의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실


가령 다량의 수증기가 증발됐다(원인) -> 비가 왔다(결과)

면접을 봤다(원인) -> 컨설턴트가 되었다(결과)


위의 예에서 비가왔다라는 결과는 인간의 의도가 배제된 자연 현상이기 때문에 1번의 성격을 갖는 결과이며

컨설턴트가 되었다라는 결과는 인간의 의도가 포함되었기 때문에 2번의 성격을 갖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번의 결과를 갖는 인과관계는 목적론으로 뒤지어 보았을 때 논리적 결함이 생긴다. 

비가오기 위해서 다량의 수증기가 증발했다 (X)

컨설턴트가 되기 위해서 면접을 봤다(O)


첫번째 예문이 논리적 결함을 갖는 이유는 목적론이란 그 정의 자체가 어떤 목적(의도)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인론중 결과에 의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인과관계는 목적론으로 바꾸었을 시 논리적 결함이 생기는 반면, 

원인론중 결과에 의도가 포함되어 있는 인과관계는 목적론으로 바꾸었을 시 논리적 결함이 발생하지 않는다.




원인론과 목적론을 이용한 로직피라미드

 로직 피라미드는 어떤 과제나 문제를 가장 꼭대기에 두고 그 원인을 역추리 하는 방법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1. 원인론을 통한 역추리 모델은 '내가 해결해야하는 것'을 꼭대기에 두고, '왜 그런 문제가 발생했는지'를 자문하며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내여 액션을 수행하기 수월한 모델이고,
2. 목적론을 통한 역추리 모델은 '내가 성취해야하는 것'을 꼭대기에 두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자문하며 구체적인 액션을 수행하기가 수월한 모델이다.

[원인론을 통한 역추리 모델]
문제 : 가게의 매출이 감소한다. (왜 가게의 매출이 감소할까?)
->1. 내부적 요인, 2. 외부적 요인
->1.1 종업원의 급료 증가 1.2 진열상품의 감소 .../ 2.1 국제 경제의 악화 2.2 경쟁사의 등장

이때 피라미드의 가지를 넓혀가면서 중요한 점은 
1. 각 분류가 겹치는 것이 없도록 mesi를 잘해야하는 것이고.
2. 부모의 원인으로써 고려되는 자식 가지는 어디까지나 가설이므로, 부모와 자식간의 가지를 연결하는 가설의 인과관계가 타당한지 증명되어야 한다.

[목적론을 통한 역추리 모델]
성취해야 할 것 : 가게의 매출을 증가시켜야 한다.(가게의 매출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할까?), 가게의 매출을 감소시키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됨.
이처럼 목적론과 원인론은 동전뒤집기와 같지만 생각의 기준이 달라지기때문에 목적론과 원인론 두 방향으로 모두 생각해보면 생각의 폭이 넓어진다.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소프트웨어
- 감성, 오성, 이성, 감정, 욕구



 

1. 배경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우선 조건은 사물과 사건을 구성하는 각각의 객체 구성요소를 면밀히 살펴보고, 이후에는 그 객체 구성요소간의 관계까지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은 신체라는 하드웨어와 몇 가지 소프트웨어로 구성된다. 소프트웨어라고 하면 몰인간적인 단어선택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생각이나 마음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하드웨어의 구성요소는 명백히 신체라는 단일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인간의 소프트웨어는 어떤가? 인간의 마음을 구성하는 요소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전의 포스트에서 인간의 소프트웨어를 구성하는 요소를 이성, 감정, 욕구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나는 다음과 같은 의문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소프트웨어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림이나 글 혹은 음악 등을 창조하는 예술가들의 능력은 어디에 해당하는 것인가?" 이는 기존의 소프트웨어 구성요소 이성, 감정, 욕구 중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2. 감성, 오성, 이성과 칸트의 순수이성 그리고 실천이성
 감성과 오성 그리고 이성을 칸트의 순수이성, 실천이성으로 설명한 다음의 글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먼저 출처는 다음과 같다.



1. 
세상에는 <정보>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 정보가 곧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감각기관으로 세상으로부터 정보를 취득합니다 그런 정보를 취득하는 능력이 감성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으면서 숱한 정보를 얻습니다. 아이들은 감각기관을 동원하여 정보를 얻습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좀더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예컨대 인터넷에서 무엇인가를 알아보려고 한다고 가정하죠. 그때 검색어를 입력할 것입니다. 이런 정보를 얻는 행위 자체가 곧 감성의 능력입니다.

 

———- 어떤 사람은 검색을 참 잘합니다. 남보다 빨리 더 많으며 또 유용한 정보를 얻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남보다 효과적으로 도구를 사용하겠죠. 지역을 정해서 검색하거나 혹은 시간을 설정하여 검색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은 이곳저곳에 있는 정보를 이때저때 구분해서 정보를 얻습니다. 이것은 감각기관이 잘 발달해서 그런 게 아니라 뭔가 남다른 두뇌활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능이 좋을 수도 있고 경험에서 터득한 앎이라는 게 있을 수도 있겠죠.

 

2. 수많은 정보가 모두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보를 지식으로 만드는 인간의 능력이 뭔가 있겠죠. 정보는 휘발됩니다. 기억속에서 지워지죠. 우리 인간에게는 휘발되고 사라지는 정보를 붙잡는 능력이 있어서 정보를 지식으로 만들어 줍니다. 이러한 힘이 바로 오성(Understading)“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공부 잘하는 능력, 똑똑함을 증거하는 능력입니다.

 

——— 정보가 휘발되지 않게 하려면 머릿속에서 잘 정리해야 합니다. 마치 컴퓨터에 여러 개의 폴더를 만들어서 다운로드 받아 수집한 정보를 잘 분류하여 보관한 다음에, 다시 인터넷으로 키워드 검색할 게 아니라 자기 폴더에서 재빠르게 찾아내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능은 아마도 이 오성의 능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냥 Understanding 지능이라고 이해해도 거의 무방합니다.

 

3. 공부잘하는 사람은 학벌도 좋고 직업도 좋습니다. 출세도 잘합니다. 정보가 없는 사람보다 정보가 있는 사람이 여러모로 유리하겠죠. 그렇지만 수많은 정보 중에서 거짓 정보를 걸러내고 알맞은 정보를 적시적소에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리더가 됩니다. 학벌사회는 오성의 능력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를 뜻합니다. 공부 잘하는 놈이 힘을 얻는 것이죠.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그게 우리 인류에게 도움이 될지는 의문입니다. 오성(悟性)이라는 단어에서 깨달을 悟는 현대 한국어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오성이라는 개념어는 철학을 어렵게 만듭니다. 최근에는 지성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이해력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저도 단어 표현에 대해서 여러 번 생각을 바꿨습니다. “지력 혹은 그냥 풀어써서 지적인 능력으로 번역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번역어 옆에다 괄호를 넣고, 그 괄호 안에 “Understanding”이라는 영어 단어를 하나 넣어주면 좋겠군요. 학문적인 이해가 아니라면 그냥 지능으로 이해해면 대략 맞습니다 .

 

———- 오성이 지배하는 사회는 학벌사회이며 엘리뜨사회입니다. 그런 점에서 별로 미덥지 않죠. 그런데 오성이라는 단어 대신에 지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지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돼서 엘리뜨 사회를 변호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맙니다. “이해력이 지배하는 사회도 마찬가집니다. 오성은 그저 정보를 지식으로 바꿔 주는 지적인 능력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오성지배 사회는 똑똑한 놈이 지배하는 사회인 셈이죠.

 

아마 이 정도라면 칸트철학의 <감성> <오성>의 의미가 파악되지 않을까 싶네요.

 

이제 <순수이성> <실천이성>입니다.

 

4. 지식이 많은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죠. 학벌도 좋고 엘리뜨이며 교수일 수도 있고, 전문가일 수도 있고, 과학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지능이 탁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그들이 생각이 제대로 된 사람일까요? 정보가 지식이 됐다고 해서 그 지식에 바로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이 지식의 진정한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지식이 틀린 것은 아닐까? 더 나은 지식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이나 회의가 들 수 있으며, 또는 자기가 갖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서 뭔가를 추상적으로/논리적으로 생각하려고 할 수도 있겠죠.

 

———- 법조문을 달달 외워서 사건마다 어떤 법조문이 적용돼야 하는지 알아채는 사람들은 확실히 법에 대해서 지식이 깊고 풍부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알고 있는 법지식이 때때로 의미 없을 때가 있습니다. 법에 의한 결론이 이상하다거나 현실에 맞지 않다거나 상식에 반한다거나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기는 힘이 무엇일까요? 정보에서 지식을 얻었는데, 그 지식의 진정한 의미를 구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이 바로 이성입니다. 이성은 여러가지 능력이 있습니다. 귀납적 추론을 할 수 있는 능력, 경험지식과 관습을 의심하는 능력, 세계와 대화할 수 있는 소통능력, 도덕적 명령을 내리는 능력, 행위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갖게 하는 능력이 이성의 권능입니다.

 

5. 정보는 오성에 의해 지식으로 상승하고 지식은 다시 이성에 의해 의미로 상승합니다. 감성에 의해 정보를 얻고, 오성에 의해 정보를 지식으로 만들며, 이성에 의해 지식의 진정한 의미를 인식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경험에 의해서 이성이 달라진다면 결국 경험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느냐에 따라 이성의 권능이 달라지겠죠. 물론 경험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이성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마다의 경험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 경험에 의해서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이성이 있지 않을까라고 가정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 가정이 옳다면 그때의 이성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것이겠죠? 이때의 이성을 칸트는 순수이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6. 칸트는 순수한 이성으로는, 경험과 무관하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이성의 힘으로는 이 세계의 배후에 있는 본질을 알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칸트는 인간이 없는 세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철학이 존재하는 까닭은 인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없는 세계에는 사물만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의미를 부여하고 파악하는 주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의미는 그 의미를 인식하는 주체가 필요합니다.  “존재는 존재로서 인식될 때 비로소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칸트는 사물이 존재함으로써 그 사물에 합당한 관념이 생기는 게 아니라, 그 사물에 대한 관념이 생김으로써 그 사물이 비로소 존재한다고, 거꾸로 생각합니다. 칸트는 이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선언하며 자뻑했지요. 그러나 이 자뻑은 실은 굉장히 겸손한 성격을 지닙니다. 칸트의 순수한 논리(경험이 배제된 논리)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알기 어렵거든요.

 

7. 우리가 흔히 생각 좀 하고 살아라고 말했을 때의 생각은 단순한 정보의 취득이나 지식의 획득을 칭하는 게 아닙니다. 소위 사유는 감성(감각)의 힘이 아니며, 오성(지능)의 힘도 아닙니다. 지적인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그/그녀가 사유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유는 감춰진 의미를 찾고 가치를 따지는 것이어서 단순히 공부를 잘한다는 것과는 특별히 관련이 없습니다. 똑똑한 놈이 더 악랄하게 굴 때가 있고, 공부 잘하는 놈이 생각 없이 한 사회를 위험으로 몰 수도 있습니다.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능은 높은데 (지능이 높은 사람/집단은 권력을 얻기 쉽습니다) 이성이 낮다면 사회는 위험에 빠집니다.

 

8. 그런데 진정한 의미 혹은 가치 판단이라는 것은 스펙트럼이 다양하고 저마다 입장이 다릅니다. 진보가 있고 보수가 생깁니다. 자유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공동체주의자가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신뢰하는 사람도 있고 자본주의를 악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는 법이죠. 어쨌거나 다양한 이성의 입장이 존재합니다. 이성의 힘으로는 절대적인 의미를 확정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진리는 알기 힘듭니다. 이렇게 좌절하는 순간 세상은 평화롭게 변합니다.

 

———- 대립하고 논쟁할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한 쪽이 무조건 승리해야만 하는 숙명 같은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성이 아무리 고차원이라고 해도 생각 좀 하고 살자는 다양한 가치와 입장이 존재하기 마련이며, 이 존재 자체를 이성이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이성은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이 올바르냐라는 질문은 사람마다 다른 답과 쌍을 이룹니다. “사유한다고 해서 좋은 방향으로만 가는 것은 아닙니다. 나쁜 방향으로 사유할 수도 있지요. 의도적이고 공개적이며 특히 집단적인 범죄가 대표적인 예가 되겠죠.

 

9. 이성적인 사유는 틀림없이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유의 한계를 이대로 방치해 버리면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인간의 최고재판소가 사라져버립니다. 이건 확실히 문제입니다. 순수이성은 이처럼 한계가 있고 무력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이론적인 무기력함입니다. 요컨대 참된 진리나 본질의 핵심에 대해서 이성이 함부로 이론적으로 최종 선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뭔가의 본질을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해서, 무엇이 올바른지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면인간사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엉망이 되겠죠. 무법이 판을 칠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정의를 이론적으로 구성하지 않고 실천적인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경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이성을 실천적인 측면에서 표현하면 그것이 실천이성이 됩니다. 순수 실천이성입니다.

 

10. 인간의 정의로운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올까요? 앞서 말한 감성, 오성, 이성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 세 가지 인간의 능력은 차이를 방증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공통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압니다. 시간과 장소와 인종을 초월하여 느끼는 공통된 자연스러움 공통된 죄책감 공통된 감동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노약자에 대한 배려, 거짓말에 대한 부끄러움, 살인에 대한 분노, 사랑과 우정에 대한 찬미 등등. 이런 대부분의 공통된 능력은 두뇌활동이 아니라 어떤 행위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위를 머뭇거리게 하거나, 촉발하거나, 단념하거나, 저지르거나, 부끄러워하거나, 후회하거나, 계율로 전승하는 사유가 있을 것이고, 이는 도덕적 사유입니다. 도덕적 사유를 지탱해주는 것은 인간의 양심이며, 요컨대 당신의 양심과 나의 양심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양심이 모든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법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법률은 대한민국의 모든 법률보다 더 중요합니다. 성문화되지 않는 인류의 헌법이기 때문입니다.

 

11. 한나 아렌트의 이른바 <악의 평범성>에서 비롯되는 사유의 문제는 이론적 사유의 문제이면서 도덕적 사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도덕적 사유는 자기만의 사유가 아니라 타인도 포함하는 사유입니다. 타인과 나, 양측 모두에게 도덕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진실된 도덕이 아니라는 것이 칸트의 견해입니다.

 

12. 이렇게 해서, 감성, 오성, 이성, 순수이성, 실천이성을 설명해 봤습니다. 저는 철학자가 아니고 한낱 전기공학을 전공한 사람이라서 틀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이상의 글은 정보와 지식의 구별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은연중에 정보보다 지식이 더 높은 단계인 것으로 전제되고 간주되어 있습니다. 이런 전제를 한 번 흔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지식보다 정보가 더 중요하다라고 말이죠. 이게 바로 20세기, 21세기에 유행하는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숨겨진 정보, 거세된 정보, 오성에 의해 채택되지 않는 정보, 저 무한하고 꿈틀대는 정보의 바다, 정보의 거대한 자기분열, 선택된 정보의 권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지식과 이성의 왜곡현상에 대한 탐구. 바야흐로 빅데이터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3. 인간을 구성하는 소프트웨어 : 감성, 오성, 이성, 감정, 욕구
.감성(sensibility)
① 감성의 정의

 우선 영어 사전을 찾아보면, 감성을 ‘sensitivity’ 혹은 ‘sensibility’라고 정의하고 있다. 감성과 혼동되는 개념인 감정은 ‘emotion’이나 ‘feelings’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의미의 차이가 조금은 명확해지는 것 같다. sensibility라는 영단어를 분해해서 생각해보자. sensibility는 ‘sense’ + ‘ability’ 즉, ‘sense하는 능력’의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sense란 무엇일까? ‘sense’란 ‘감각’이라고 부르는 것을 말한다. 감각은 주위 환경(몸 속, 몸 자체, 몸 밖을 다 포함한다.)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오감을 통해 받아들여 그 의미를 파악하는 과정을 말한다. 정리하면 감성이란  외부적 / 내부적 자극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② 감성이 지니는 의미
 감성이라는 인지작용은 1. 인지의 시작이되는 가장 처음의 시작점 일뿐아니라 2. 
감정, 이성, 욕구라는 다른 인지작용을  불러일으키거나 다양한 인지작용들을 결합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감성이라는 인지 작용을 통해 감정(feeling)을 느낄뿐만 아니라 이성과 감정이 결합된  복합적인 앎을 얻게 된다. 이는 예술가들의 창조성으로 이어지는데, 감정이나 이성의 단일 변수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힘이라는 점에서 감성의 중요성이 느껴진다. 높은 감성을 지닌 사람일 수록 더 다양한 인지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같은 것을 보고도 특별한 인지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한 인지의 경험이 쌓여나간다면 두 사람이 경험한 세계는 전혀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


 철학적 의미의 감성과 세속적 의미의 감성


사진1 -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진




사진2 -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사진





사진3 - 이성을 불러일으키는 사진

 위의 시각적 이미지들을 비교해보자.먼저 「사진1」을 보고 그 결과는 사람마다 판이할 수 있다. A라는 사람은 따듯하고 포근한 감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고, B라는 사람은 여자의 머리카락이 길다, 햇빛이 눈부시다라고 이성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으며, C라는 사람은 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철학적인 감성의 정의에 의하면, A와 B는 시각적은 감각(Sense)를 받아들였으므로 감성이라는 인지능력이 높은 사람이지만 이지만 C는 감성이 낮은사람이다. 한편,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감성적이라는 표현의 세속적 의미의 범위 안에서 A라는 사람은 감성적이 사람이라고 평가받지만 B는 감성적인 사람으로 평가받지 못한다. 이는 세속적 의미의 감성이란 단순히 긍정적인 감정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중요도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비교대상을 각기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진으로 옮겨볼 수 있다. 「사진1」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감성 사진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2」는 생리적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감성 사진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3」은 이성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이라고 볼 수 있다. 철학적 의미에서 위의 세개의 시각적 이미지는 모두 감성사진에 속한다. 한편 세속적 의미의 감성이라는 정의의 틀안에서는 「사진1」만이  감성으로 평가될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직감은 곧바로 느껴 아는 것으로 설명·증명 등을 거치지 않고 곧 사물의 진상을 마음으로 느껴 알거나 그 감각을 말한다. 직감은 감성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ⅱ.오성(understanding) -오성에 관한 내용은 위의 글을 참고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은 감성이다. 그렇지만 수많은 정보가 모두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정보를 지식으로 만드는 인간의 능력이 존재한다정보는 휘발된다기억속에서 지워진다우리 인간에게는 휘발되고 사라지는 정보를 붙잡는 능력이 있어서 정보를 지식으로 만들어 준다이러한 힘이 바로 “오성(Understading)“이다. 쉽게 말하자면 정보를 이해하는 능력으로 공부 잘하는 능력똑똑함을 증거하는 능력이다.

① 오성을 촉진시키기 위한 팁

인간이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은 자료를 보고 스스로 학습하거나 타인의 강의를 통해서 학습하는 방법이 전부이기 때문에, 자료나 강의를 통한 학습은 것은 오성이 발현되는 모든 대상을 대변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료나 강의를 통한 학습 중 자신이 이해한 부분과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은 어디까지 이해하고 어디까지 이해하지 못했는지 그리고 왜 이해하지 못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인지하고, 이해하기 위해 정보를 조사한다. 

- 이해한 부분이나 이해하지 못한 부분과 관계없이, 자료나 강의에서 설명되지 않은 부분 중 호기심이 남는 부분은 정보를 조사한다.

-공부 후에는 전체적인 내용을 조망하며, 이해한 부분, 이해하지 못한부분, 이해하지 못했지만 습득한 부분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

*정보 조사의 방법 : 1. 아는 사람에게 질문하는 것은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 주의할 점은 질문을 할 시에는 효과적으로 질문을 하기 위해 자신을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겠는지 구체적이며 명확하게 상대에게 알린다. 2. 인터넷으로 검색한다. 주의할 점은 얻고자하는 정보외의 잡다한 정보들을 제껴내고 내가 조사하고자 하는 내용에 포커싱을 맞추어 조사를 진행해야 한다.

 

ⅲ.이성
① 이성의 일반적 정의과 이성
이 지니는 의미
 이성은 인과관계를 추론하는 능력이다. 감성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고, 오성을 통해 정보를 이해하여 지식으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이성을 통해 지식의 의미를 추론하지 못하면 정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성을 통해 얻은 지식이 어떠한 인과관계를 통해 어떤 의미를 가질지 추론하는 것이 이성이다. 공부는 잘하지만 일은 못하는 사람은 오성(이해력)은 뛰어나지만 이성(인과관계의 추론력)이 낮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성은 욕구, 감정, 감성을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원하는 모든 욕구를 충족할 수 없을 때 욕구 간의 충돌을 중재할 수 있으며, 부정적이며 각성이 높은 감정을 정상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감성의 민감도를 조절해 주의 환경에 사용하는 에너지의 양을 조절하는 기능을 할 수도 있다.





②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이성의 일반적 의미는 인과관계를 추론하는 능력이지만, 칸트는 이러한 이성을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으로 나누어 보았다. 순수이성이란 어떠한 경험적 판단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이성을 의미한다. 가령 1+1 =2 이라는 이성은 개인의 경험적 판단에 의해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이성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순수이성이란 과학적 이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과학적이란 의미는 "인과관계를 일반화시킬 수 있는 것" 을 의미한다. 하지만 순수이성은 다음과 같은 한계를 갖게 된다. 가령, A라는 정치인은 무상 급식에 대해 찬성한다. 왜냐하면, 학창시절 돈이 없어 밥을 못먹었던 그의 경험이 판단의 근거가 된다. 반면 B라는 정치인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으로 무상 급식의 결과 발생하게 될 비용에 대해서 생각한다. 무상급식에 대한 주제를 두고 A라는 정치인의 의견도 합당한 것처럼 보이고, B라는 사람의 의견도 합당한 것처럼 보인다. 판단에 대한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사람과 그 사람의 자라온 환경에 따른 경험에 의해, 이성의 결과가 다르게 작용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순수이성을 적용할 수 없다는 한계에 직면하다. 이로 인해 등장하게 된 것이 실천이성이며 이는 경험적 이성이다. 

③ 이성에서 파생된 제 6감각과 제7감각
 철학자 니체가 명명한 제 6감각은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의 감각을 뛰어 넘어, 사간의 흐름과 사실의 인과관계를 감지하고 반응하는 감각이다. 이는 보이지 않는 단일 사건이나 객체라는 사실을 통해 그 의미와 원인을 추론하는 이성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이성능력이 개체 자체의 인과관계의 추론에 한정되느냐 객체간의 관련성에 따른 인과관계의 추론까지 고려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제 7감각이란 다양한 객체간의 관련성에 따른 인과관계의 추론 능력으로 인과관계를 다양한 사건과 다양한 객체까지 확대해서 보는 능력을 의미한다. 최근 주목받는 IT의 힘이 제 7감각에서 나오는 것인데, IoT 기술이 대표적이다.


ⅳ.감정(emotion, feeling)
①감정의 정의
 감정은 기분을 의미한다. 감정을 이해하는 가장 효과적인 구분법은 긍/부적과 각성정도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② 감정이 지니는 의미

 1. 감정을 불과 같아 다른 소프트웨어를 짧은 시간에 압도할 수 있는 즉흥적인 구성요소이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2.감정은 효율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진화 방향에 의해 이성보다 오래 기억된다는 장점이 있다. 가령 가족들과 간 여행에서 우리는 세부적인 내용은 기억하지 못한다. 감명깊게 봤던 여행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어디를 먼저 갔었는지, 내가 맛있게 먹던 음식에는 뭐가들었는지에 관한 이성적 정보는 여행 이후에 물밀듯이 밀려오는 정보들에 묻혀버린다. 하물며 어디를 갔었는지 조차 가물가물할 때가 많다. 반면, 그때의 기분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여행지가 어떻게 생겼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그 때 어떤 기분이였는지는 쉽게 기억한다. 내가 맛있게 먹던 음식에 뭐가 들어있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그 음식을 한입 떠넣었을 때의 만족감은 오래 기억된다. 감정의 이러한 강력한 힘덕분에 세속적 의미의 감성이 감정을 자극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ⅴ.욕구

 ①욕구의 종류 : 본능적인 8욕구와 학습된 9욕구

 인간을 구성하는 소프트웨어중 이성과 감성은 비교적 명확히 규정한 반면, 욕구에 대한 정의는 비교적 명확하지 못했다. 현재 머리 속을 채우고 있는 생각 중 " ~ 하고싶다" 라는 생각을 욕구로 가정했다. 예를 들어, "친구와 놀고 싶다" "달콤한 케이크를 먹고싶다" "나만의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싶다" "여자친구 보고싶다" 등이다. 이는 직관적이긴 하지만 욕구를 이론적으로 분류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트렌드의 심리학]에서는 욕구를 본능적인 8욕구와 학습된 9욕구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제시했는데, 나는 이 분류를 참고하기로 했다.


Life force 8

우리가 날때부터 가지고 있는 여덟가지 기본 욕구는 다음과 같다. 여덟가지 욕구는 처음부터우리의 뇌에 각인된 것이며, 우리 삶에서 거의 모든 선택과 행동을 통제한다. 
 

 

・생존과 삶의 즐거움, 삶의 연장(생리적 욕구)
・먹고 마시는 즐거움(생리적 욕구)
・공포와 고통, 위험으로부터의 자유(안전의 욕구)
・안락한 주거 환경(안전의 욕구)
・성을 나누는 동반자(소속, 애정의 욕구)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보호(소속, 애정의 욕구)

・남보다 우월해지고, 앞서고, 뒤처지지 않는 상태(존경의 욕구)

・사회적 인정(존경의 욕구)


메슬로의 욕구 5단계설을 참고하면, 5단계 욕구는 생리적욕구 - 안전의 욕구 - 소속,애정의 욕구 - 존경의 욕구 - 자아실현의 욕구로 구성되는데, 이중 생리적 욕구/안전의 욕구를 저위욕구라하고 소속,애정의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를 고위 욕구라 칭했다. 이후 다양한 연구자들의 실증 연구에 따르면, 반드시 욕구가 위와 같은 계층을 이루고 있지 않고,  저위욕구(생물학적 욕구)가 해소되고 난 후에는 고위욕구가 사람과 사회마다 다른 계층을 따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Infused 
force 9

 아홉가지의 부차적 욕구는 생각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큰 통제력을 갖는다. 하지만 여덟가지 생명력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하다. 이 아홉가지는 학습된 욕구로 날 때부터 우리뇌에 각인된 것이 아니다. 세포 차원에 새겨진 것이 아니란 의미다. 본능적 8욕구는 우리 존재 자체에 영구히 각인되어 있는 반면에 아홉까지 학습된 욕구는 노력을 통해 무효화 시킬 수 있다.


・정보를 얻으려는 욕구

・호기심

・몸과 주변 환경의 청결

・능률

・편리함

・신뢰성/자격

・아름다움과 스타일의 표현

・경제성/수익

・흥정


② 욕구가 지니는 의미
 욕구는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행복과 가장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는 소프트웨어라는 점에 의미를 갖는다. 욕구의 만족은 감성, 감정, 이성의 소프트웨어와 신체라는 하드웨어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③욕구를 다룰 때 주의할 점 : 욕구의 상대성, 욕구의 일시성

 욕구의 가장 흐미로운 점 중 하나는, 욕구는 너무나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유동적이라는 점을 구체화하면, 욕구는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며, 욕구는 지속적이지 않고 일시적이다. 하나의 형태로 머무르는 법이 없다.

 

생리적욕구 - 안전의 욕구 - 소속,애정의 욕구 - 존경의 욕구 - 자아실현의 욕구


욕구의 상대성 : A라는 사람은 1명에게만 존경을 받아도 만족하는 반면, B라는 사람은 1억명에게 존경을 받아도 만족하지 못한다. 

욕구의 일시성 : 욕구는 어떤 기준을 넘어가면 지속적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만족되는 그 일시적인 순간에만 만족감을 느낀다. 


욕구의 이러한 성질은 왜 부자들은 다 쓰지 못할만큼의 재산을 갖고도 더 많은 재산을 원하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욕구의 목표치가 만족되는 순간에만 일시적인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에, 더 높은 기준을 계속해서 세워나가게 되는 것이다.


욕구의 이러한 성질은 우리가 어떻게 행복을 쟁취할 수 있는지도 제시한다. 욕구에 대한 만족도의 목표치가 만족된다면  만족된 욕구를 다시 끌어 내려, 기존의 목표치보다 다시 아래에 두어라. 욕구에 대한 만족도가 하락할시 상실감도 수반 되겠지만, 더 높은 만족기준을 새로 설정하지 않아도 일정한 상황/조건 아래서 안정적인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주말 부부가 그에 해당한다. 주말 부부는 평소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소속 애정의 욕구/생리적 욕구에 대한 만족도가 만족기준을 밑돈다. 이들은 주말엔 욕구에 대한 만족도가 만족기준을 충족하며, 평일에는 만족도가 만족기준을 밑돌게된다. 이러한 상황의 특수성으로 인해, 같은 만족기준으로도 행복감을 누릴 수 있다. 부부사이의 싸움도 현재의 욕구에 대한 만족도를 만족기준 아래로 낮추기 때문에, 화해할 시 상황이 변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다른 큰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만족기준을 끊임없이 높여가는 악순환 : 한번 높아진 만족기준은 다시 낮추기 어렵기 때문에, 끊임없이 만족감을 채워주지 않으면 행복감을 느끼기 어렵다.


  











自信感이란 무엇인가?


본 포스트는 자신감과 자존감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을 적은 글인데, 자신감과 자존감에 대한 개념은 '자존감의 여섯기둥'이라는 책을 접한 이후 확실히 정의가 되었다. 단순한 개인의 생각이 아닌 전문가의 의견의 정보가 필요한 경우에는 http://valuefactory.tistory.com/53?category=765085 참고

1. 自信感
ⅰ.자신감의 정의



 자신감이란, 자신감의 한자어를 분석해보면 그 뜻을 이해하는데 어느정도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自信感 : 자신을 믿는 감각.
자신감이란 능력과 과업의 난이도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

ⅱ.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하면 자신을 더 잘 믿을 수 있을까?
이는 #행복의 정의에 대한 조금 깊은 생각 의 포스트 에서 정의한 용어들을 참고하여 존재감의 내적인식과 외적인식을 분석해봄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포스트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존재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욕구 너머의 가장 근원적인 것이며 이는 물질적 존재와 상념적 존재로 나뉜다. 상념적 존재는 다시 존재감의 내적인식과 외적인식으로 나뉘게 된다. 존재감의 내적인식과 외적인식이라는 용어를 빌리면 높은 자신감이란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는데,


높은 자신감이란, 존재감의 내적인식이 외적인식보다 더 큰 상태를 의미한다


즉, 타인에 의해 자신이 누구인지 규정되는 것보다 자신 스스로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더 잘 규정할 수 있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감각이라는 것이다.






ⅲ. 어떻게 하면 존재감의 외적인식에 휘둘리지 않고 존재감의 내적인식을 성장시킬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자기자신을 잘 알 수 있을까?

 "당신은 A를 잘 알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당황했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A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물건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건이 될 수도 있다. 무언가를 안다는 도대체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특히나, 그 대상이 객관적 범주를 벗어났을 때 해답은 점점 더 모호해진다. 가령, 자동차라는 기계는 비교적 객관적이다. 자동차의 외관, 엔진, 바퀴, 핸들, 엔진과 바퀴를 잇는 톱니 등의 하드웨어, 그리고 사용자의 명령을 기다리는 소프트웨어 등을 하나하나 알게 되고, 그 연관관계를 알게된다면 "나는 자동차를 잘 알고 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과 같은 주관적 대상을 알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사물을 분석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세분하하면 대상을 알아내고 연구하는데 매우 용이하다. 인간은 신체라는 하드웨어와 감정, 생각, 욕구라는 3가지의 소프트웨어로 구성되어 있다. 즉, 인간의 구성요소인 신체, 감정, 생각, 욕구를 알게 된다면 스스로를 어느정도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존재감의 내적인식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신체, 감정, 생각, 욕구를 잘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나의 감정은 어떤 상태인지, 욕구는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생각은 지식과 지혜를 축적했는지 파악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한 욕구,감정,이성이 드는 이유를 파악해야만 비로소 벌거벗은 깊은 내면의 자신과 만날 수 있다. 세계와의 끊임없는 상호교류를 통해 자신이 객관적으로 어떤 성격을 가진 인간인지 스스로의 가치를 관철시킬 수 있게 된다.(성격이란, 인간의 소프트웨어인 감정, 생각, 욕구의 일관된 행동양식이다)
 


ⅳ. 어떤 방법을 통해 자신의 성격을 알 수 있을까?

①. 스스로에 대한 솔직함

 자신의 감정, 생각, 욕구에 솔직한 태도가 필요하다. 자기 자신의 감정, 생각, 욕구를 분석하는데도 스스로를 속이게 되면 당연 자신을 잘 알 수 없게 된다.

②.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가 분명히 납득가도록 끊임없이 질문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에 더하여, 다양한 세상을 경험하는 것은 생각을 넓혀나가고 감정과 욕구를 원만하게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하는 동기를 부여받게 된다. 책은 가장 좋은 동기부여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2. 自尊感이란 무엇인가?
ⅰ. 자존감의 정의
 내가 나에게 얼마나 만족하느냐 하는 개념.

자존감이란 두 가지의 요소로 이루어진다.

하나, 자기 효능감 : 외부, 내부로부터의 도전에 대해 대처하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 + 자신의 생각하는 능력에 대한 확신

둘, 자기 존중 : 자신이 성공하고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것

ⅱ. 자존감과 자신감의 차이는 무엇인가?
자신감은  자신을 믿는 감각이며 자존감은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감각이다.

 

5. 自尊心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자존심을 한자어 풀이 이상 생각해보지 않을 생각이다. 한자어로 자존심이란, 자신이 존중되는 마음을 뜻하는데 이는 타인이 나를 향하는 방향이다. 즉, 타인이 자기 자신을 얼마나 존중하는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욕구의 일부에 불과하다. 

성격

personality ,  ]
요약
개인을 특징짓는 지속적이며 일관된 행동양식.

R.B.커텔은 성격이란 어떠한 주어진 상황에서 그가 어떠한 행동을 할 것인가를 우리들에게 예상케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J.F.다실은 성격을 조직화된 행동의 전체적인 모습이라 하고 특히 지인()들에게 일관된 상태로서 특색이 인정되었을 때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B.노트컷은 성격을 주로 개인이 특히 그 자신답게 그가 속해 있는 집단 내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구별되는 행동에 관련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성격은 개개인을 구별하는 생득적(습관적인 것으로서 비교적 안정된 정신·신체적인 기초구조를 형성하는 중핵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H.월런은 성격의 정의를 내릴 때 3개의 좌표를 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즉, 첫째는 상황과 사물, 둘째는 생리적 균형, 셋째는 때()이며, 이 3자 중에서 어느 하나가 유력하더라도 다른 요소를 제외하고는 논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상과 같은 여러 학설 이외에 최근 특히 학자들이 지지하는 것으로는 G.W.올포트와 M.A.메이의 학설이 있다.올포트는 성격이란 개인의 환경에 대한 고유한 적응을 규정하는 정신물리적 조직으로서의 개인 내의 역동적 체제라고 하였다. 여기서 정신물리적 조직이란, 고대인이 생각한 것과 같이 성격을 단순한 정신으로 보지 않으며, 정신과 신체와의 통일적 조직체로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체 및 정신적 제요소의 단순한 가산적() 총화로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발전하는 역학적 관점에서 고찰해야 할 역동적 체제이다. 그것은 변동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배후에서 그것을 지배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한편 메이는 성격의 사회적 측면을 강조한다. 즉, 성격이란 사회에서의 개인의 역할 및 상태를 규정하는 모든 성질의 통합이라고 하였다. 성격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자극을 주고 어떻게 평가되느냐의 사회적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고방식에 입각하면 고도()에서 혼자 사는 사람에게는 성격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다른 사람과 밀접한 인간관계에 있으므로 이 학설은 확실히 일면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성격의 주체성이 무시되어 있는 것이 단점이다.

올포트 생리학적·심리학적 관점에 입각하여 유전적 측면을 중시하는 데 대해 메이는 사회학적·심리학적 관점에 입각하여 환경의 영향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성격의 올바른 개념은 양자의 어느 한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통합한 곳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성격은 자신과 아울러 다른 사람으로부터 주어진 자신과의 양면에서 고찰해야 할 것이다.

성격 형성의 기본 문제

전술한 바와 같이 성격은 정신물리적 통일체로서 파악되는 것이므로 신체가 성격의 기초가 된다. 그리고 성격의 체질적인 기초는 거의 유전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한다. 또한 신체 및 그 기능은 성격형성에 많은 역할을 한다. 

예컨대 신체가 약소한 자는 운동경기 기타 신체적 활동에 관한 장면에서 열등시되는 경험 때문에 사람들이 모인 곳에 나가려 하지 않는다거나, 남자다운 행동이 적다거나, 안정성이 없는 따위의 특성이 뚜렷해지는데, 신체가 강대한 자는 이와는 반대로 신체적인 자신감에서 사람들 앞에 서슴없이 나타난다거나 남자다운 행동이 많아진다거나 안정성이 있는 등의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이와 같이 신체의 강약은 신체적인 면뿐만 아니라 심리적 성격면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므로 아동의 체형()이 그 성격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아동의 지능은 거의 대부분 신체적 운동을 통한 외계와의 접촉에 의하여 발달하는 것이며, 또 아동의 사회성은 친구들과의 놀이나 스포츠 등을 통하여 육성되기 때문이다. 

습관과 성격 형성

성격형성에서 습관이 지닌 역할은 매우 크다. 모든 행동은 한번 시행되면 일종의 소질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발생한다. 그것은 다음에 동일한 것을 행하게 되면 용이하게 할 수 있으나 다른 것을 행하게 되면 반대로 어려워진다. 
일정한 대상에 대하여 동일한 시행을 반복할 때에는 점차 그 행동이 쉬워져 나중에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기계적으로 행하게 된다. 이것이 습관(habit)이라는 것인데, 이른바 조건반응에 의하여 후천적으로 획득되는 것이다.

한번 획득된 습관은 제2의 본능이라고 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다. 그러므로 좋은 습관형성은 좋은 성격을 기르는 것이 되며 나쁜 습관형성은 나쁜 성격형성의 본질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환경과 성격 형성

성격은 소질적인 기질()과 생육환경() 및 사회적 역할 등에 의하여 형성된다. 환경에 적응한 성격형성으로 열대·한대·섬나라·사막 등 지리적·풍토적 환경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그 풍토 또는 엄격한 생활조건에 적합한 생활을 하여 성격이 형성된다. 직업생활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되면 그 직업에 알맞은 형()이 형성된다. 예를 들면 교사형·목사형이나 상인 근성()·기술자 근성 등의 형이 형성된다. 또한 육아조건에서 욕구불만 유무에 따라 원만한 성격이 형성되느냐 신경질적인 성격이 형성되느냐가 결정된다. 이와 같은 환경에 적응하여 형성된 성격에는 각 환경에 공통된 것을 볼 수 있으며, 이와는 달리 환경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서 자아에 적응한 성격 형성도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격 [personality, 性格] (두산백과)


성격과 개인차의 이해 성격의 이해를 통한 개인차의 이해와 편견의 극복

성격에 관한 이론과 설명은 무수히 많다. 심리학에서 가장 관심을 받고 있는 주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만큼 우리 인간이 지닌 성격의 특성과 구조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서 인간의 성격을 표현하는 말 자체가 정말 다양하다. 그 말들의 수만큼 성격은 다양한 측면과 종류들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격에 관한 이론들 역시 마찬가지로 다양하다. 프로이트(Freud), 융(Jung), 그리고 아들러(Adler)에 이르는 정신 역동 이론들에서부터, 로저스(Rogers)의 현상학적 자기 이론, 그리고 올포트(Allport)로 대표되는 특성 이론은 물론이며 이미 이 캐스트에서 소개된 고전적 및 도구(혹은 조작)적 조건형성 이론까지 성격에 관하여 다양한 설명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공간에서 이 모든 이론들을 일일이 열거하고 설명하는 것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심리학 개론’서적을 옮기는 일에 그칠 것이다. 따라서 이 공간에서 필자가 뜻한 목적은 여기에 있지 않다.

성격 연구를 통해 우리가 인간과 세상을 보는 시각이 향상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논할 것인가? 조금 색다른 각도로 성격에 관한 심리학 연구가 우리의 일상생활에 주는 관점의 변화에 초점을 맞춰 보고자 한다. 즉, 성격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성격 연구를 통해 우리가 인간과 세상을 보는 시각이 향상될 수 있음을 이야기 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성격에는 정말 다양한 종류가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다양한 성격요인들을 몇 가지 차원으로 분류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들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예를 들어, 한스 아이젱크(HansEysenck)와 같은 심리학자는 다양한 성격요인들을 얼마나 감정적이냐 안정적이냐의 차원과 얼마나 외향적이냐 내향적이냐의 2가지 차원(나중에는 3개로 확장하였지만)을 중심으로 아래와 같이 분류하였다.1) 요는 다양한 성격요인들이 아래와 같은 차원으로 인해 ‘분류’가 된다는 것이다.

한스 아이젱크의 성격분류

이후 보다 차원의 종류를 늘려 인간의 성격을 이해하고자 하는 접근들이 나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른바 ‘성격의 5요인(big 5)' 이론이다.2)3) 이 5개의 주요 요인에는 성실성, 동조성, 신경성, 개방성, 외향성이라는 다섯 가지의 특성이 포함되며 이 요인들은 대부분의 문화나 인종에 있어서 보편적으로 사람의 성격 특성을 이해하거나 각기 다른 사람들의 그에 따른 성격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사용되어 왔다. 4)

5요인

하위요인

성실성

체계적인

비체계적인

조심성 있는

조심성 없는

자제력 있는

의지가 약한

동조성

온화한

무자비한

신뢰하는

의심하는

도움이 되는

비협조적인

신경성

근심하는

평온한

불안전한

안전한

불쌍한

자족하는

개방성

상상력이 풍부한

실제적인

다양한

일정한

독립적인

동조적인

외향성

사교적인

수줍어하는

재미있는

진지한

다정다감한

말이 없는

성격의 5요인

이런 노력들은 모두 지향하는 바가 분명하다. 우리가 지닌 수많은 성격요인들을 보다 포괄적인 범주로 묶어서 어떤 사람의 성격을 보다 쉽고 빠르게 이해하려는 것이다. 심리학의 수많은 성격 이론들이 바로 이러한 목적을 향해 지금까지 숨가쁘게 달려왔으며 여기에서는 단지 몇 개의 예를 봤을 뿐이다.

우리는 얼마나 성격을 이해하고 파악하려 하는가?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나 자신과 타인의 성격을 이해하려 하는가? 이 질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당연히 그러려고 노력한다.”고 대답할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당혹스럽게도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다른 회사에 있는 친구가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의 A과장님에 대해 묻는다. “영수야, 너희 회사 A과장님 성격 어떠니?” 이 질문에 가장 흔한 첫 대답은 “과장님 성격 좋지.” 혹은 “성격 정말 안 좋아.”로 시작한다. 그 다음에는 “왜 좋냐하면 말이지. 통도 크시고, 결재해 주실 때도 편하다니까.” 혹은 “왜냐하면 쩨쩨하고, 회식 끝나고 꼭 2차, 3차 끌고 다녀.”라는 특정 행동에 기초한 진술이 뒤를 잇는다.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겠지만 더 많은 경우 우리는 어떤 사람의 성격에 대해 진술 할 때 “좋다-나쁘다”의 차원에 입각한 나의 판단을 일단 먼저 얘기하고 그 판단을 ‘지지’할 것 같은 그 사람의 ‘행동’을 나열한다. 과연 이러한 말들이 내가 어떤 사람의 성격을 이해했다고 말해줄 수 있을까?

물론,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 식으로 하는데 그럼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비정상이냐?”라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런 방식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상대방 역시 어떤 사람의 성격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의 성격을 나열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성격이 ‘좋은지-나쁜지’여부에 더 관심이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문의 의도와 대답의 방식 모두 이런 식으로만 이루어진다면 가까운 미래에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을 할 때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지닌 정보가 아무 것도 없음을 알고 당황해 하는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개방적인 사람은 상상력이 풍부하기 때문에 일상적인 것보다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좋아할 것이다. 비협조적인 사람은 동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신뢰보다는 의심을 많이 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하나하나가 예전에 연구로 입증된 사실들이지만 한편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쉽게 되는 말들이다. 성격의 요인에 기초한 다양한, 하지만 단편적인 지식들은 우리로 하여금 쉽게 납득되며 따라서 어떤 사람이 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면 나는 그 사람에 대해 보다 더 정확히 예측할 수 있고 따라서 내가 그 사람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조금은 더 명확해 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 부모님께 드릴 생신 선물을 살 때나 혹은 오랜 만에 만난 친구를 대할 때 우리가 가끔씩 ‘어떤 것을 고르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모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격은 잘 알고 있을까?

글쎄.. 불행히도 이것 역시 ‘네’라는 대답이 쉽게 나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필자가 수 년 전 모 방송사에서 했던 실험이 있다. 스튜디오에서 필자는 다섯 명의 남녀 대학생들에게 빈 종이에 자신의 손을 대고 그 손을 따라 선을 그려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심리학자인) 필자가 “저는 여러분이 주신 여러분 각자의 손 형태를 보고 여러분의 성격을 맞출 수가 있습니다.”라고 말한 뒤 10여분 뒤 돌아왔다. 그리고는 각자에게 봉투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고 그 봉투에는 필자가 분석한 성격의 내용이 들어있었다. 다섯 명의 학생들은 각자 받은 봉투를 열고 그 내용을 읽어보았으며 하나같이 “정말 꼭 들어맞는다.”라고 신기해했다. 그 5명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한 후 필자는 다른 사람의 성격이 분석된 내용을 읽어보도록 하였다. 모두 한바탕 웃어버렸다. 왜냐하면 그 다섯 사람에게 주어진 내용은 모두 같은 것, 즉 똑같은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일종의 몰래카메라였다. “당신은 자존심이 강해서 남에게 머리를 숙이고 굽히는 것을 대단히 싫어해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잘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조직에서 일을 할 때는 성과를 높이기 위해 자존심을 굽힐 줄 아는 현명함도 있습니다.”라던가, 혹은 “당신은 친구를 신중하게 고르는 편입니다. 주변에 친구가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주위를 둘러보면 필요한 친구가 잘 눈에 띄지 않음을 늘 걱정하기도 합니다.”라는 질문에 우리는 모두 “네, 맞습니다.”라고 말을 한다. 살다보면 그런 경험을 한번쯤은 했기 때문이다. 이를 조금 더 확장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성격조차도 완벽히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다른 사람의 성격에 대한 나의 판단은 오죽하겠는가.

우리나라에서 더욱 그 경향이 심한 예를 하나 더 들어보도록 하자.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20개를 대답해야 한다. 이러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쓴다.

“1. 2남 2녀의 차남”
“2. 고등학교 동문회의 부회장”
“3. OO 산업의 XX 부서 과장”
“4. OO 동아리의 회장”

등등 말이다. 이것이 과연 나일까? 문화차이가 꽤 크게 나온다. 개인주의적 문화가 발달한 나라의 사람들의 응답과 비교해 보면 말이다. 이들에게서는 다음과 같은 응답이 먼저 나온다.

“1. 나는 (조용하기 보다는) 활발하다.”
“2. 나는 (경쟁적이기 보다는) 자신에 주로 초점을 맞춘다.”
“3. 나는 (협동을 좋아하기 보다는) 혼자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사회 속에서의 나의 위치’로 나를 규정하는 문화에서는 ‘고등학교 동문회의 부회장’, ‘OO 산업의 XX 부서 과장” 등의 응답이 먼저 나온다.<출처:gettyimages>

상대적으로 Big-Five와 같은 성격이론에 나온 말들이 더 자주 등장한다. 다시 말해서 성격에 관한 내용에 더 가깝다는 말이다. 여담이지만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개인주의가 발달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운영하는 회사나 대학원에 자기소개서를 제출하면 매우 의아하다는 반응을 듣곤 하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자기소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처럼 ‘사회 속에서의 나의 위치’로 나를 규정하는 것이 지니는 장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나라 사람의 사회성이 매우 높고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잘 해내는 책임감의 원동력도 여기에 상당부분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인간은 그리고 우리문화권은 조금 더, 성격의 이해라는 과목에 있어서 취약한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다른 단서를 쓴다. 어떤 사람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 말이다.

범주 정보를 사용한 성격 이해의 오류: 다양함의 간과

우리는 범주 정보에 기초해 이상하다는 느낌을 먼저 만들어 내고 그 느낌에 기초해 성격을 ‘추리’해 낸다.
<출처: corbis>

서로 유사해 보이는 개체가 여럿이 모여 있을 때 이 개체들 하나하나의 이름들을 일일이 사용할 수도 있지만 “XX들”이나 “OO들”이라는 하나의 라벨(label)을 통해 보다 간편하게 그리고 한 번에 그 개체들 모두를 지칭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사용되는 개념을 인지심리학에서는 범주(category; 예, 개, 집, )라 부르기도 하며 사회심리학에서는 집단(예, 남녀, 노소, 내국인 혹은 외국인 등)이라는 단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에서는 집단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성격이나 특성을 쉽고 빠르게 이해하기 위해 이런 정보를 사용하라는 유혹에 쉽게 빠진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55세의 중년 남자로 지방 중소도시에 살며 사무직 종사자’라고 사전에 들은 유재흥씨를 지금 막 만났다. 이 사람은 그런데 “청바지를 입고 있고, 왁스를 바른 최신 유행의 헤어스타일에 검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있다.” 어떤 느낌을 당신은 지금 경험하고 있을까? 약간은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그 당황스러움은 곧 이런 생각으로 이어질 것이다. “재미있는 분이네.”라든가 “특이한 취향을 지닌 사람이군.”등 말이다. 무슨 뜻일까? 한 마디로 ‘이상하다’는 뜻이며 이는 그 사람이 무언가 평균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식으로 타인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낳아간다. 하지만 유재흥씨에 대해 들은 사전 정보가 ‘상상력이 풍부하며, 재미와 다양함을 추구하며, 외향적인 성격인 분’이라면 어떨까? 지금 내 앞에 있는 유재흥씨의 모습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성격을 먼저 파악하거나 듣게 되면 세상의 더 많은 사람들이 ‘정상’이고 ‘이상할 것이 없는’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범주 정보에 기초해 이상하다는 느낌을 먼저 만들어 내고 그 느낌에 기초해 성격을 ‘추리’해 낸다. 순서가 바뀐 것이다. 그리고 내 추리에 의한 그 사람의 성격은 사실 그 사람과 무관한 경우가 허다하다. 당연히 많은 오류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 오류들은 그 사람들 입장에서 억울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앞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대하는 데 있어서 치명적인 오류들로 재탄생할 가능성이 크다.

성격의 올바른 파악을 통한 개인차의 이해, 그리고 편견과 고정관념의 극복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를 위해서는 속성(trait)과 상태(state)라는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 개인의 성격에는 속성적 측면과 상태적 측면이 존재하는데 속성은 그 사람의 지속적인 특성으로 상황이나 시점이 바뀌어도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일관적인 행동 경향성을 나타나게끔 해 주는 요인이다. 반면, 상태 의존적인 요인은 상황과 시점이 변화함에 따라 쉽게 영향 받고 따라서 변화하는 측면이다. 어떤 것이 더 그 사람의 기본적인 성격에 가까울까? 속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성격 속성을 판단하는 것은 당연히 그 사람을 여러 차례 다른 상황과 시점에 만나는 것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상황과 시점에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으면서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측면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를 통해야만 우리는 그 사람의 타인과 다른 무언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 나면 그 사람 역시 다양한 성격 요인 중 몇 가지에 있어서 그야말로 ‘남과는 구분되는’ 사람일 뿐이며 이상하거나 다르다(심지어 우리는 이를 위해 ‘틀리다’라는 부정적 표현까지 쓴다)는 오해를 할 필요가 없게 된다. 남자, 여자, 노인, 어린이, OO지역 사람, OO나라 사람 등과 같은 범주적 정보는 그야말로 그 사람이 속해 있는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낮은 수준의 정보일 뿐 그 사람의 성격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거의 없다. 왜? 그 사람이 남과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정보를 오히려 덮어버리고 우리가 그 범주에 대해 기존에 지니고 있는 고정관념만을 사용하게 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과정을 통해 성격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 개인차를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김경일 이미지
김경일 |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고려대학교에서 심리학 석사를 받았으며 미국 University of Texas - Austin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국제학술논문지에 Preference and the specificity of goals(2007), Self-construal and the processing of covariation information in causalreasoning(2007) 등을 발표하였다.

발행2011.08.15. 


행복의 정의에 대한 조금 더 깊은 생각



1. 배경

 이전의 포스트에서는 행복을 만족과 동의어로써 정의하였다. 하지만 늘 찜찜하게 생각했던 것은 "인간은 언제, 어느 것에, 왜 만족하게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의 결여였다. 나는, '심리학으로 팔아라' 라는 책을 통해 해답없는 질문에 관한 힌트를 얻고 행복의 정의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의해 보기로 했다. '심리학으로 팔아라' 라는 책에서는 인간의 욕구를 본능적 8욕구와 학습된 9욕구로 구분하여 인간의 욕구를 공략하는 방식으로 세일즈를 진행하는 요령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 세분화된 욕구의 구분은 나에게 욕구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이전부터 욕구는 인간의 소프트웨어를 구성하는 3대 요소 - 감정, 생각(이성), 욕구-중 하나 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욕구의 역할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욕구에 대한 깊은 사고를 통해, 행복, 불안, 존재에 관한 관계가 이전보다 명확히 구분됨을 느낄 수 있었다.


2. 존재-욕구-만족-행복(존재-욕구-결여-불안/스트레스)

 깊은 사고활동 끝에, 존재, 욕구, 만족, 행복, 불안에는 다음과 같은 인과관계가 있지 않을까라는 '가정'을 세우게 되었다.



ⅰ. 행복과 만족이 같은 의미라면, 만족/결여의 대상은 무엇인가?

 무엇에 만족한다는 것인지에 대한 답을 욕구에서 찾았다. 욕구를 이론적으로 구분한 메슬로의 욕구 5단계설을 참고하면, 5단계의 욕구는 생리적욕구 - 안전의 욕구 - 소속,애정의 욕구 - 존경의 욕구 - 자아실현의 욕구로 구성된다. 

 인간은 자신의 욕구가 충족될 때, 만족을 느끼며 이것은 행복으로 이어진다. 즉, 「욕구의 충족 - 만족 - 행복」 의 인과관계가 되는 것이다.


ⅱ. 욕구결핍과 불안/스트레스의 관계

  우리는 언제 불안하며 언제 스트레스를 받는가. 기본적인 예시들을 적어보자. 취업이 되지 않을때 불안하다, 상사가 공격적인 언행을 일삼을 불안하다, 이성친구와 헤어진 후 불안하다, 상대가 바람을 피는 것은 아닐지 불안하다, 내가 새로운 집단에서 잘 해낼 수 있을지 불안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을 때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하다, 이번 프로젝트를 제대로 끝낼 수 있을지 불안하다, 가족이 화목하지 않아 불안하다. 

 위의 사례 외에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불안을 느끼는 무수한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어떤 불안이던 간에 불안은 욕구가 충분히 충족되지 않은 결과 발생함을 알 수 있다. 몇 가지의 불안을 욕구와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취업이 되지 않은 학생은 현대사회에서 생존이 걸린 돈벌이가 없으므로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가 결여될 뿐만 아니라 타인에 의한 존경을 성취할 수 없고, 자아실현도 실패한 상태이다. 또한 가족이 화목하지 않아 불안한 사람은, 원만하지 않은 가족관계 속에서 소속 애정의 욕구가 결핍되고, 가족이 와해된다면 가족을 통해서 형성되어온 안전의 욕구조차 보장되지 못한다.


ⅲ. (한 층 더 심오한 질문)인간에게 왜 욕구가 필요한가?

 나는 만족과 행복의 인과관계를 이어준 욕구에 대해 한 층 더 깊이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인간의 욕구를 본능적인 것" 이라고 생각을 끝맺는 것은 "그것은 신의 뜻이다" 라고 단정하고 모든 인과관계를 신의 뜻으로 돌려버리는 중세 시대 유럽인의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 더 근본적인 부분까지 인간은 왜 위와 같은 욕구를 가지게 되는지 철학적 고찰이 필요하다.

 인간은 무엇보다 '존재' 자체에 의미가 있다. 인간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보다 더욱 심오한 것은 없다. '존재'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존재해야만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즉, 인간에게 욕구가 필요한 이유는 존재하기 위함이며, 바꿔 말하면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욕구이다. 

 존재는 위와 같이 두 가지로 나뉜다. 물질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존재와 상념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존재감이다. 물질적 존재란 신체가 온전히 보존되는 것을 의미하며, 매슬로의 5욕구 중 저위욕구(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가 이에 해당된다.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칼슘 비타민을 섭취하고, 물을 마시고, 안전한 집을 통해 맹수와 해충으로 부터 신체를 보호하는 것. 

 상념적 존재를 의미하는 존재감이란 내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는 감각이다. 가령, 물질적으로는 존재하나 아무도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존재감에 대한 내적인식은 존재감에 대한 외적인식에 의해 위협받는다. 세상 사람 그 누구도 내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물리적인 존재는 이미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만큼 존재감은 존재 못지 않게 중요하다. 고위욕구(소속/애정욕구 , 존경욕구, 자아실현욕구)는 존재감에 대한 외적인식과 존재감에 대한 내적인식의 발현이다. 자신에게 존재감이 있음을 외부로 부터 성취하기 위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하고, 사랑을 나눈다. 자신에게 존재감이 있음을 스스로 성취하기 위해 자아실현을 이룬다.


 존재감에 대한 내적인식과 존재감에 대한 외적인식은 알랭드 보통의 '불안'에 적힌 문구를 더욱 이해하기 쉽게 한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 사람들이 우리 농담에 즐거워하면, 우리는 나에게 남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자신을 갖게 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면, 나에게 큰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방에 들어갔을 때 눈길을 피하거나 직업을 밝혔을 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

 이상적인 세계에서라면 이런식으로 남들의 반응에 좌우되지는 않을 것이다. 무시를 당하든 주목을 받든, 칭찬을 받든 조롱을 당하든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누가 엉터리로 우리를 칭찬하는 소리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여, 다른사람이 우리가 못났다고 넌지시 암시한다 해도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나라는 사람에 대하여 아주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내가 똑똑하다는 중거를 댈 수 있고 바보라는 증거도 댈 수 있으며, 익살맞다는 증거도 댈 수 있고 따분하다는 증거도 댈 수 있으며, 중요한 인물이라는 증거도 댈 수 있고 있으나마나 한 존재라는 증거도 댈 수 있다. 이렇게 흔들린다면 사회의 태도가 우리의 의미를 결정하기 마련이다. 무시를 당하면 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자신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고개를 쳐들며, 미소나 칭찬과 마주치면 어느새 역전이 이루어진다. 혹시 남의 애정 덕분에 우리 자신을 견디고 사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주어야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없다. 남의 관심때문에 기운이 나고 무시때문에 상처받는 자신을 보면,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어디있나 싶어 정신이 번쩍들기도 한다. 동료 한 사람이 인사를 건성으로 하기만해도, 연락을 했는데 아무런 답이 없기만해도 우리의 기분은 시커멓게 멍들어버린다. 누가 우리 이름을 기억해주고 과일 바구니라도 보내주면 갑자기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환희에 젖는다.

                                                                                        -  알랭드 보통 '불안' 中에서(이레출판사 p 21~22)

 위 글에서 남들의 관심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사람은 존재감의 외적인식이 강한 사람이다. 반면, 남들의 반응에 쉽게 좌우되지 않고 스스로를 규정할 줄 아는 사람은 존재감의 내적인식이 강한 사람이다. 



3.  반론, 다른 생각들

ⅰ. 웅대한 자연을 보고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어떤 인과관계를 거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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