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버스를 타고 20여분 떨어진 거리에 릉이 있다. 내가 살던 곳은 옛 어떤 왕국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었는데 릉은 왕릉과 왕비릉 이렇게 2개가 있고, 때때로 여기저기서 지금은 사라져 버린 옛사람들의 흔적이 종종 발견되고는 했다. 

  이 지역에 산지도 벌써 꾀나 되어가니, 우연찮게 릉과 마주치는 일이 수 십번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매번 그냥 그런 기분으로 아무생각 없이 그것들을 지나쳤을 뿐, 릉의 존재를 의식하고 한 번쯤 가서 사진이라도 찍어보고 싶다고 마음먹은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아마도 그런 기분이 문득 생긴 건 릉의 존재 자체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릉을 둘러쌓고 있는 소나무 방풍림에 먼저 끌려서였다. 릉을 둘러쌓고 있는 수백그루의 소나무는 겉보기에는 어두침침하고 침울한 색이었지만, 그 안의 공기는 신비해서 왠지모르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같은 것이 느껴졌다. 마치 신의 창조이래 한 번도 인간의 발길이 닿지않은 원시림의 자연이 울부지는 것처럼.

 3월의 날씨답지 않게 따듯한 날씨였다. 벌써부터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따금씩 내 피부를 스쳐가는 바람은 차갑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딱 체온만큼만 따듯했다. 그런 훈훈함 때문인지 혼자가는 산책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이른 봄바람을 맞으니, 머리속으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피부는 어머니의 배안에서 웅크리고 있었을 때의 따스함을 몸이 기억이라도 하는 듯했다.

 버스를 타고 릉으로 향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가는게 좋았다. 목적지는 필요 없었다. 때로는 목적지가 영원히 없었으면 하고 바랐다. (특히 버스 안에서 눈이 감겨올 때) 버스를 타고가면서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또 주위의 일상을 보면서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그것들에 무관심했었는지를 스스로 생각하면서 나는 점점 낯설었던 버스의 한 자리에 뿌리를 내렸다. 가끔씩은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버스는 중세시대의 창창한 바다를 나아가는 멋진 배고, 그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은 정처없이 바다를 떠도는 선원들이다. 그렇게 끝이 없는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순진하게도 기뻤다.

 버스는 운좋게도 목적지 바로 앞에 멈추어 섰다. 릉이 보였다. 맑은 날이었지만 하늘은 투명하지 않았다. 회색과 흰색의 중간 쯤의 색이었는데, 저런 하늘 아래 이런 맑은 해가 비칠 수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예의상" 릉에서 족히 100미터는 떨어진 거리에서 전체 스틸샷을 몇 장 찍고는 릉에 다가갔다. 말했듯이, 나는 이전에 릉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우선 내가 다가가고 잇는건 릉을 품고있는 소나무 숲이었다. 햇빛이 여기저기 비추었는데도 숲은 어두컴컴했다. 공기도 바깥과는 사뭇 달랐다. 소나무숲 주위에 보이지 않는 견고하고 투명한 벽이라도 쳐져 있는것처럼 그 안은 외부와 단절된 듯 조용했다. 릉은 담이라고 하기에는 윗부분이 넓고 높이는 낮은 돌담에 둘러쌓여 있었다. 그 돌담 밖에 있는 것이 소나무 숲이었다. 나는 돌담위에 올라갔다. 두 사람은 누울 수 있을 만큼 꽤나 넓었다. 다리쪽은 햇빛이 비췄고, 상체는 햇빛이 소나무에 가려 그늘져있었다. 나는 의외로 이런 감성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자연스레 가져온 핸드폰을 켜서는 10cm 의 '냄새나는 여자'를 들었다. 지금 내가 속한 그림과는 맞지 않는 가사였지만 멜로디는 풍경과 보기좋게 섞여 잘 어울렸다. 분위기에 취해 사진은 일찌감치 가방 속에 넣어버렸다. 사진으로 찍어 오래 기억해두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그냥 아무런 생각없이 전부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땅인 릉과 그것을 둘러싼 산자의 소나무 숲. 그 사이의 돌담. 그리고 그 돌담위에서 누워있는 나. 이런 생각을 하니 애매한 감정이 불쑥 느껴졌다.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그 돌담 위에서 나는 한가롭게 봄바람이나 만지면서 멜로디에 전율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이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죽음은 무언가에 의해서 단절된 상반된 것이 아니다. 소나무 숲의 일부가 돌담이기도 하고, 릉의 일부가 돌담이기도 한 것처럼 삶속에 죽음의 일부가 존재하는 것이고, 죽음 속에 삶의 일부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단절된 죽은 자의 땅이나 산자의 땅에 있는게 아니라, 그 사이 어딘가의 돌담위에서 위태롭지만 행복하려고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즉, 삶과 죽음은 함께 녹아있는 것이다. 완벽한 삶이나 죽음이란 애초부터 없다.

 

 "학생 거기 누워 있으면 안돼! 내려와 얼른"

 

 집으로 향하면서 생각했다. "봄은 의외로 가을만큼의 사색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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