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버스를 타고 20여분 떨어진 거리에 릉이 있다. 내가 살던 곳은 옛 어떤 왕국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었는데 릉은 왕릉과 왕비릉 이렇게 2개가 있고, 때때로 여기저기서 지금은 사라져 버린 옛사람들의 흔적이 종종 발견되고는 했다. 

  이 지역에 산지도 벌써 꾀나 되어가니, 우연찮게 릉과 마주치는 일이 수 십번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매번 그냥 그런 기분으로 아무생각 없이 그것들을 지나쳤을 뿐, 릉의 존재를 의식하고 한 번쯤 가서 사진이라도 찍어보고 싶다고 마음먹은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아마도 그런 기분이 문득 생긴 건 릉의 존재 자체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릉을 둘러쌓고 있는 소나무 방풍림에 먼저 끌려서였다. 릉을 둘러쌓고 있는 수백그루의 소나무는 겉보기에는 어두침침하고 침울한 색이었지만, 그 안의 공기는 신비해서 왠지모르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같은 것이 느껴졌다. 마치 신의 창조이래 한 번도 인간의 발길이 닿지않은 원시림의 자연이 울부지는 것처럼.

 3월의 날씨답지 않게 따듯한 날씨였다. 벌써부터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따금씩 내 피부를 스쳐가는 바람은 차갑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딱 체온만큼만 따듯했다. 그런 훈훈함 때문인지 혼자가는 산책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이른 봄바람을 맞으니, 머리속으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피부는 어머니의 배안에서 웅크리고 있었을 때의 따스함을 몸이 기억이라도 하는 듯했다.

 버스를 타고 릉으로 향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가는게 좋았다. 목적지는 필요 없었다. 때로는 목적지가 영원히 없었으면 하고 바랐다. (특히 버스 안에서 눈이 감겨올 때) 버스를 타고가면서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또 주위의 일상을 보면서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그것들에 무관심했었는지를 스스로 생각하면서 나는 점점 낯설었던 버스의 한 자리에 뿌리를 내렸다. 가끔씩은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버스는 중세시대의 창창한 바다를 나아가는 멋진 배고, 그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은 정처없이 바다를 떠도는 선원들이다. 그렇게 끝이 없는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순진하게도 기뻤다.

 버스는 운좋게도 목적지 바로 앞에 멈추어 섰다. 릉이 보였다. 맑은 날이었지만 하늘은 투명하지 않았다. 회색과 흰색의 중간 쯤의 색이었는데, 저런 하늘 아래 이런 맑은 해가 비칠 수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예의상" 릉에서 족히 100미터는 떨어진 거리에서 전체 스틸샷을 몇 장 찍고는 릉에 다가갔다. 말했듯이, 나는 이전에 릉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우선 내가 다가가고 잇는건 릉을 품고있는 소나무 숲이었다. 햇빛이 여기저기 비추었는데도 숲은 어두컴컴했다. 공기도 바깥과는 사뭇 달랐다. 소나무숲 주위에 보이지 않는 견고하고 투명한 벽이라도 쳐져 있는것처럼 그 안은 외부와 단절된 듯 조용했다. 릉은 담이라고 하기에는 윗부분이 넓고 높이는 낮은 돌담에 둘러쌓여 있었다. 그 돌담 밖에 있는 것이 소나무 숲이었다. 나는 돌담위에 올라갔다. 두 사람은 누울 수 있을 만큼 꽤나 넓었다. 다리쪽은 햇빛이 비췄고, 상체는 햇빛이 소나무에 가려 그늘져있었다. 나는 의외로 이런 감성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자연스레 가져온 핸드폰을 켜서는 10cm 의 '냄새나는 여자'를 들었다. 지금 내가 속한 그림과는 맞지 않는 가사였지만 멜로디는 풍경과 보기좋게 섞여 잘 어울렸다. 분위기에 취해 사진은 일찌감치 가방 속에 넣어버렸다. 사진으로 찍어 오래 기억해두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그냥 아무런 생각없이 전부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땅인 릉과 그것을 둘러싼 산자의 소나무 숲. 그 사이의 돌담. 그리고 그 돌담위에서 누워있는 나. 이런 생각을 하니 애매한 감정이 불쑥 느껴졌다.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그 돌담 위에서 나는 한가롭게 봄바람이나 만지면서 멜로디에 전율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이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죽음은 무언가에 의해서 단절된 상반된 것이 아니다. 소나무 숲의 일부가 돌담이기도 하고, 릉의 일부가 돌담이기도 한 것처럼 삶속에 죽음의 일부가 존재하는 것이고, 죽음 속에 삶의 일부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단절된 죽은 자의 땅이나 산자의 땅에 있는게 아니라, 그 사이 어딘가의 돌담위에서 위태롭지만 행복하려고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즉, 삶과 죽음은 함께 녹아있는 것이다. 완벽한 삶이나 죽음이란 애초부터 없다.

 

 "학생 거기 누워 있으면 안돼! 내려와 얼른"

 

 집으로 향하면서 생각했다. "봄은 의외로 가을만큼의 사색의 계절이다."

 

 

 

 

 

데카르트를 어떠한 방법보다 확실하게 설명하는 방법은 코기토 철학이다. 이는 데카르트 자신도 인정하는 바인데, 그의 저서 방법서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ego cogito, ergo sum)’라는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회의론자들이 제기하는 가당치 않은 억측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주목하고서, 이것을 내가 찾고 있는 제일원리로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방법서설 중에서]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이후, 절대 진리로만 여겨졌던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그 지위가 흔들리게 된다. 신학에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해결책을 제시해주던 교황청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상처를 입게 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마저 르네상스 시대에 알려지기 시작한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 위협받는다. 이것이 도그마의 위기이다. 절대적 진리인 도그마는 근대 이전까지 줄곧 사람들의 머리 속에 절대적인 진리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르네상스 이 후 도그마의 위기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기에 충분했다. 모든 것이 신으로 귀결되었던 때에 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은 정신적 카오스로 밖에 표현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도그마를 대신하기 위한 다른 진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때 데카르트가 들고 나온 것이 바로 자아 이다. 현재와 다르게 당시는 자아의 의식의 존재가 부정되지도 않았지만 인정되지도 않았다. 도그마의 붕괴 이전까지는 신이 모든 부족함과 궁금증을 대신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개인이 자아를 인식하고 자아의 자율성이 널리 인정받기 위해서는 자아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필요했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라는 도구를 이용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증명하고 그리고 제외하며, 다음과 방식으로 자아를 증명했다. 먼저, 우리는 보고 느낌으로써 자아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말이다. 가령, 어떤 여인과 사랑에 빠진 이는 그 여인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인식할지 모르지만, 그러지 않은 이는 그 여인이 세상에서 가장 이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또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이 현실이 실제로는 현실이 아니라 꿈 속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지각으로 자아를 인식하려는 노력은 절대적인 자아를 찾는데 적절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지각이 아닌 머릿속의 정신적 이성으로 자아를 찾으려는 노력은 자아를 인식하는데 적절한 것인가? 이것 마저도 그렇지 않다. 천천히 눈을 감고 2+3 = 5 라는 수학적 공식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정신적 이성은 꿈에서든 현실에서든 항상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 신체와 머릿속은 형태만 있는 껍데기일 뿐이고, 전지전능한 악마가 우리의 생각을 조정할 수 있다면 정신적 이성마저도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보자.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하더라도, 꿈을 꾸고 있는 나는 존재한다. 내가 지금 전능한 악마에서 철저히 속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속임을 당하는 나는 반드시 존재한다. 이런 의심을 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의심을 하는 나는 존재한다. 나는 의심한다,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보통 코기토라고 불리는 바로 이것이 회의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데카르트가 찾아낸 절대 확실한 철학적 진리다. 그런데 코기토에 등장하는 는 무엇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 내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데 있어 나의 물질적인 부분, 즉 신체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다. 오로지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내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영향을 주었을 뿐이다. 결국 코기토에 등장하는 는 사유하는 무엇 혹은 정신적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나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금껏 살펴본 대로, 데카르트는 기독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라는 두 도그마가 위기에 처한 시대에 새로운 도그마, 즉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절대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진리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탄생한 자아는 개개인에게 신으로부터 독립적인 의미를 주게 되었다.

헤겔 법철학에서 그가 가장 기저의 전제로 두고 있는 것도 절대적 진리인 자아의 존재이다. 그의 저서에서 그는 자유의지를 사회의 법 이전에 존재하는 진리로 정의한다. 그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법의 지반은 도대체가 정신적인 것이며 또한 그것의 더욱 엄밀한 장소와 출발점은 의지이면서도 더욱이 자유로운 의지이다. 결국 이 자유야말로 법의 실체 및 규정을 이루는가 하면 또한 법의 체계는 실현된 자유의 왕국이며 더 나아가 정신자체로부터 산출된 제2의 자연으로서의 정신의 세계이다."(4)

이상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의미 내용을 분석할 수 있다. 첫째로 법의 토대와 출발점이 정신으로서의 자유 의지라는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자유 의지가 법의 본성으로서 그것은 자신을 현실 세계에 실현하려는 목적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법철학에서 줄곧 견지하고 있는 자유의지는 자유의지라는 형태 이전에 자아에 대한 완벽한 인식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하다. 신에게서 독립된 절대적인 나의 존재(자아)가 있어야, 자유도 의지도 자유의지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와 헤겔의 법철학의 연관성

1. 일의 중요성.

 

   인간에게 있어서, 일을 함이란 자기 자신의 다른 표현이다. 지나 가는 옆집 아저씨에 불과한 사람도 그의 화실에 들어서면 멋진 화가가 된다. 그 화가는 옆집 아저씨에 불과한 일반성에서 화가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특수하게 만든다. 아랫집에 사는 젊은이는 그저 젊은이일지 모르나, 그의 일터로 돌아가면 그는 유능한 자동차 정비사가 된다. 일의 실현을 통해 무의미하게 대명사로 불리는 아저씨와 젊은이에서 화가와 자동차 정비공으로 재탄생 되는 순간이다. 일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의미를 발현한다.

 일의 본질적 의미를 생각해보기 위해 주의해야할 요소가 2가지 있다. 먼저는 사회가 개개인의 의미를 정해주는 것 같은 관점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일이란 사회에 보여주기 위해, 사회에 공헌하기 위해 선택하기 이전에 조금더 개인적인 면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다. 사회와 마주한 인간의 일의 의미가 하는 자신의 일이 아닌, 자기스스로와 마주하는 일. 이러한 관점으로 볼때, 인간에서 있어서 진정한 일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진정한 본질적 의미의 일은 생계에 억압되어서는 안된다. 원래 자신의 꿈은 화가인데, 생계가 걱정되어 회사에 취직했다 라는 모씨의 이야기를 들으면 위 주장이 쉽게 이해 갈 것이다. 즉, 사회가 자신의 일을 바라보는 눈, 생계에서 해방된 상황에서 일이라는 것을 조명하면 본질적인 일의 의미를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자기 혼자 뿐이다. 게다가 먹을 것도 평생 놀고 먹을 만큼 넘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에겐 일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그리고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어느 순간 만큼은 일하지 않고 놀고 먹고 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을지 모른다. 그가 행복하다면 그게 맞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이 만든 인간이라면 필시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답답할 것이다. 몸이 근질근질 할 것이다. 뭔가를 하고 싶을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것, 그것을 했을 때 행복한 것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리고 그일에는 그의 강한 염원과 소망이 담겨 일자체가 그를 대변할 만큼 그의 정신적 표현을 나타내게 된다. 이것이 곧 자아의 표현이자 실현이다. 일을 성취하고 얻는 성취감은 이차적인 것이다. 일차적인 것은 그가 그가 생각만해도 가슴이 뜨거운 일을 할때에, 그 일을 하는 자체에서 얻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기쁨과 행복이다. 이것이 일이가진 진정한 의미다.

 그러나 요즘 세상은 어떤가. 자신의 눈이 아닌 사회의 눈에 이끌려, 생계에 이끌려 (생계에 어쩔수 없이 이끌리는 경우는 일단은 먹고 살아야하기에 어쩔 수 없다고 하겠지만,,)일을 즐기지 않고 그저 하고 있는 것에 그치고 있는 세상이다.

 

1. 목표란 무엇일까?


 먼 곳을 보고 겁먹지마라. 그저 묵묵히 하루하루를 열심히 계획한대로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곳에 닿아있는게 순리이다.

 그렇다면, '목표'를 정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위해 열심히 달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인가?

 목표란 절대적인 도달점이 아니다. 목표에는 방향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루하루 열심히 꾸준히 가더라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만 간다면 어디론가 닿긴하겠지만, 내가 원하던 그곳은 아닐 것이다

 목표를 설정하여 방향을 잡되, 그 목표만 바라본채 자신을 혹사시키지 말라. 바다 한 복판의 비바람치는 어둠 속에 어렴풋이 등대를 보고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어렴풋이 라는 애매한 단어의 의미를 마음 속에 이해가 가능한 형태로 설명하기 위해 아래의 예를 들어보자. 비바람이 일고 집채만한 파도가 술렁이는 파도에서 등대에 닿기 위해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등대를 보지 않고 자신이 가고 싶은 길만 가겠는가? 아니면 오로지 등대를 바라보며 항해를 계속할 것인가? 사실 두가지 모두 답이 될  수 없다. 등대를 보지도 않고 가다보면 망망대해에서 헤매다 결국은 바다 위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등대만 바라보고 가다보면 지금 당장 덮쳐오는 집채만한 파도를 이길 겨를이 없다. 영리한 항해사는 머릿속으로 등대의 방향을 기억하고 사나운 파도를 하나하나 넘는데에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다.

 인생에서 목표의 의미도 딱 그정도이다. 목표만 바라보며 살아갈 수 없다. 목표는 머릿속 혹은 마음속 에딘가에 어렴풋이 남겨두고 현재를 열심히,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도록 사는 것이 현명한 인생살이 일 것이다. 등대의 불빛은 분명 존재하고 자신이 지금 그 등대를 향하여 얼마만큼 빨리 가고 있는지는 느끼지 못하지만, 천천히.. 꾸준히.. 가다보면 어느새 그 곳에 다다라 있을 것이다.


2. 미래의 정의

 미래는 정해지지 않아, 앞으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무슨일이 발생할지 예상된 상태의 미래는 미래라고 할 수 있는가? 미래의 성질이 결여된 미래는 미래라고 할 수 있는가? 가령 일주일 뒤에 무슨일이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시험일이 일주일 뒤로 정해졌다면 시험을 치는 그 시간만큼은 미래라고 할 수 있는가?

 일주일 뒤가 시험일이라면 그 날은 어쨌든 미래이지만 시험이란 사건만큼은 미래가 아니다. 따라서, 현재에 충실한다는 논리는 일주일 뒤의 시험에게도 적용된다. 정해진 사건은 더이상 미래의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집에 좁고 낡은 컴퓨터 책상 한 대가 있다. 컴퓨터 한대가 들어가기에도 딱 맞는 크기라, 그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 하는 것 왜에 책을 읽는 다던가, 공부를 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마침, 요즘 여러모로 책상에 앉아 보낼 시간이 많아진 나에게 이 구닥다리 책상에 대한 불만은 커져만 갔다.

 어느 날, 아버지께 부탁을 드렸다. '아버지, 책상 하나만 사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이에 대한 아버지의 답변은, 2층 다락방에 있는 책상을 가져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부탁에 대해 곧바로 반론을 당해서 인지 처음에는 기분이 얹짢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검소한 생활 습관이 나에게 또 다른 교훈은 안겨주었다.

 인간은 왜 사치를 부리면 안돼는가? 자신이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사치를 부림으로써 쾌락을 얻는다면  사치라는 것을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게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인간의 본성상 사치는 필시,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자신에게 꼭 필요하지 않은 물품이라도 그것을 구매하게 된다면, 그러한 태도는 자신의 생활 습관으로 굳어진다. 이러한 습관은, 자신의 가진 소소한 것에 감사하지 않는 태도를 형성한다. 이렇게 감사하지 않는 태도는, 끊임 없이 불만과 욕망을 낳을 것이고 이는 불행으로 이어진다.

 물질적으로 풍족하다면, 사치하지 말고 검소하게 살아서 그 물질적 풍족을 그렇지 못한 타인과 나누어라. 필시, 성공은 자신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또한, 사치로 쾌락을 얻는다면, 다른 활동 이를 테면 소중한 사람과의 소통, 이상적 인격 성격 등으로 더 높은 가치의 쾌락과 행복을 얻어라.

 인간은 두 번 태어난다는 말이있다. 제1의 탄생은 육체의 탄생이며, 제2의 탄생은 자아의 탄생이다. 난 전자의 탄생은 이루었지만 후자의 탄생은 아직 이루지 못했다. 내가 누군지, 또 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등 에 대한 자기 스스로를 곧게 새우는 정리가 마음속에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다행히, 시작은 한 것같다, 시작조차 하지 못한 인간들이 넘쳐나는데 말이다.) 그래서 일단은 , 잃어버린 나를 찾고 제2의 탄생을 이루고자 한다.

 지금 까지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이 사는데 필요한 철학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고 확립하는 철학, 둘째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인간 근본적 궁금증을 해결하는 철학, 세번째는 자신과 사회의 근본을 찾고 답하는 철학이다.

 첫번째 철학과 두번째 철학은 다행이도 걸음마는 띤 상태이다. 그러나, 아직 나는 세번째 철학인 나 자신과 사회에 관한 물음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첫번째와 두번째 철학을 상대하는 데만 해도 곤욕을 치루고 있기때문이다. 지금 여기에, 내가 지금 까지 생각해왔던 자아를 찾는 철학과 나와 타인을 대하는 철학에 대한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1. 나를 찾는 철학(한명에 대해서의 현실)

-인간의 궁극적 삶의 목표는 행복이며, 매시 행복하는 삶이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삶이다. 구체적으로는 행복하기 위해 가져야할 생각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잠시 생략하도록 한다.


2.나와 타인을 관계를 찾는 철학(두명에 대해서의 현실)

-이상적인 인간은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자신 이외의 타인과 함께 삶은 살아가게 된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사람은 그의 부모, 자신이 살아온 환경, 만나온 사람, 교육받은 것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개개인마다 독창적인 인격을 형성하게 된다. 설령, 모든 삶의 조건이 같더라도, 인간마다 선천적으로 차이점이 있으리라. 

 사람마다 독창적인 인격을 갖는다는 말은, 사람마다 행복을 정의하는 기준이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예를 들어, A라는 인간은 편하게 쉬면서 여유를 느끼는 삶을 행복이라고 여기는 반면, B라는 인간은 항상 열심히 노력하고 땀흘리는 삶을 행복이라고 여긴다. 이때, A와 B가 한 집에 살림을 차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삶의 패턴이 극명히 다른 둘은 불보듯 뻔하게 갈등 겪에 될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A라는 인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은 부를 축적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여긴다. 반면, B라는 자신의 소유물을 지키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자다. 이때, A와 B가 한 집에 살경우, A는 B의 물건을 빼앗이 부를 쌓으려 할테고, B는 이에 대해 큰 불만을 갖게 될것이다.

 첫 번째 예는, 서로에게 직접적인 피해는 끼지 않지만, 다른 생활 패턴으로 간접적이 피해를 끼지게 될것이다. 또한 두 번째 예는 그릇된 행복의 기준을 가진 자로 인해, 어느 한 사람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게된다.

 이때, 하나가 아닌 둘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이 드러난다. 혼자서 사는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던 행복이 질이 좋은 종류건 좋지 않은 종류건 그것은 생각할 바가 아니다. 그저, 그 행복을 누리기만 하면된다. 그러나 둘의 현실에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해야한다는 전제에, "그러나 그 행복은 타인의 행복을 방해하면 안된다"라는 조건이 붙는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자신이 정의하는 행복이 소중한 만큼, 타인이 정의하는 행복도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나와 타인의 관계에서는 개인은 쾌락을 최대로 누리지만, 그 것이 타인의 행복을 침해한다면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행복을 누리도록 해야하는 것이다.


3.나와 사회의 철학(세명 이상의 현실)

 위에서 자신과 타인의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았다. 그렇다면, 셋 이상의 여러사람이 모인 현실에서 인간은 어떻게 이상적 삶을 영위해야 할까? 자신과 타인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자신의 행복만큼 소중한 타인의 행복이 자신이 쾌락을 누리는 과정에서 상처받지 않겠다 '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살아가면 된다. 이는 분명, 행복을 누리는 것에 있어 아무런 제한이 붙지 않는 혼자의 현실보다는 골치아프지만, 셋 이상의 여러 사람의 모인 현실은 그 양상이 더욱더 복잡해진다. 셋 이상의 여러 사람의 모인 현실에서는 타인의 행복권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양하고 다른 여러 행복의 기준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타인의 행복권에 대한 이해조차도 다른 어떤 이의 행복권을 침해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부터 인간은 '법'이라는 도구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 법은 분명, 인간의 자유를 법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둘 염려가 있지만, 타인의 행복마저 침해하는 자유로운 행복권은 이미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자신이 정의하는 행복이 소중한 만큼, 타인이 정의하는 행복도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셋이상이 모인 현실에서 인간은, 여러사람의 뭉쳐진 행복을 기준으로 그 행복들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는 조건 안에서 법을 만들어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일 것이다. 때로는 행복을 위해 자신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불만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행동이 타인을 행복을 침해한다면 절대 용서될 수 없다. 진정 자유로운 행복을 원한다면, 그가 사회를 떠나 홀로 삶을 사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일 것이다. 

  너무나도 흔한 말이다. 주위에 것에 감사하라. 그러나, 때로는 이처럼 당연한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당연할 줄 알면서도, 막상 생각해보면 왜 그런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든 흔하게 듣는 말,, 주위에 것에 감사하라. 하지만, 왜 주위에 것에 감사해야하고, 우리가 주위에 감사를 느낌으로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왜 감사하는 인생을 살아야 할까?'라고 막상 생각해보면, 막막하다. 잘 모르겠다. 그래서 반대로 '왜 감사하지 않는 인생을 살면 안될까?' 라는 질문을 통해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전자의 질문과는 다르게 후자의 질문에는 대답이 비교적 쉽게 나온다. 그만큼,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른는 삶에 익숙해져 있다는 방증이리라. 오늘 아침도 나는 '왜 감사하지 않는 인생을 살면 안될까?'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할 수 있을만한 경험을 했다. 군대에 상근예비역으로 입대하여, 인사과에 배정된 나는 군상의 작업을 잠시 도와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이 짓을 해야하지? 내 자리는 마땅히 인사과 근무가 아니던가?' 라는 불만을 토해냈다. 그러자, 또 마음 한 구석에서 이런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 난 왜 향방에서 일하지 못하고 대대까지 끌려와서 이 고생을 하는가?' 불만과 욕심이 커져만 갔다. 현역이 아닌 상근예비역으로, 또한 작업반이 아닌 인사과에서 일하는 것은 신께 기도할만한 감사이거늘 내 마음은 자꾸 쓸데없는 말을 뱉어냈다. 나도 모르게 온갖 불만을 쏟아내다가 문득 제정신을 차렸을 때, 내 마음은 불행으로 가득차고 답답했다.

 그렇다면 이번엔, 전자의 질문이였던 '왜 감사하는 인생을 살아야 할까' 에 대해 답해보고자 한다. 자신의 상황이 어떻든, 그 상황을 긍정하고 감사하게 된다면, 나는 내가 지닌 행복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그 행복을 지키려 애쓰게 된다. 또 그 마음은 자연히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내고 그 행복은 마음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하여 우리는 주의의 모든 소중한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볼 마음자세를 준비할 수 있게된다. 인간의 궁극적 삶의 목표가 정신적 행복에 있는 이상, 자신을 매시(每時)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감사"라는 사고 방식이 얼마나 위대하고 소중한 것인지 알겠는가? 예를 들어, 


'아, 비록 내가 한 칸 집에사나, 나를 차가운 바람으로 부터 막아줄 집한채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 '이제껏 살아왔지만 나는 겨우 바람하나 막아줄 누추한 집밖에 얻지 못했군..'


' 아 나는 비록 보잘 것 없는 음식을 먹으나, 굶는 것에 비하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고작 이런 것 뿐인가?'


'아, 나에게 큰 사랑과 믿음으로 매사에 행복을 주는 나의 아내에게 얼마나 감사한가?' <-> ' 더 이쁘고, 돈많은 아내를 얻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의 세가지 태도를 바라보자. 자신의 상황이 어떻든 그것을 긍정하고 감사히 여기는 자는 비록 객관적으로 봤을 때 상황이 힘들지 모르지만, 자신이 가진 행복은 지킴으로써 인간 궁극적 목표에 걸맞는 정신적 행복을 충분히 누리고 있다. 또한, 이러한 감사의 마음 가짐은, 행복을 만들고 또 이러한 행복은 자연스레 마음을 풍성하고 아름답게 하여, 그러한 자세는 타인에게 기쁨을 주고 자기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즉, 매시 행복한 삶은 사는 이상적 인간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반면 후자의 경우처럼, 자신의 상황을 부정하고 감사를 느끼지 못하는 자는 자연스레 불만을 토하고, 이는 욕심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마음은 사악한 것이라 마음의 어느 한 부분에서 불만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 불만은 삽시간에 정신 전체로 퍼져나가고, 그 인간의 마음은 숯검댕이 처럼 시커멓고 행복과는 거리가 먼 마음이 된다. 따라서, 하는 일마다 망쳐가고 또 불만을 토해내는 악순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불만을 통해 생성된 과욕은 마음을 본질과 멀어지게 하여 초조와 불안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인간은, 행복하지 않은 인생을 살고있는자다.


이것이 인간이 주의의 모든 것에 감사를 표해야하는 이유이다. 감사하는 삶은 자신을 매시 행복하게 만든다.


201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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