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슬픈 이유에 대하여
 

 죽음이 슬픈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이 무엇인지, 슬픔이 무엇인지가 정의되어야 한다. 죽음을 단순하게 생물학적 입장에서만 정의할 수도 있지만, 철학적인 죽음은 그보다 복잡하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셸리 케이건)」에 의하면 죽음을 명확히 정의하기 위해서는 물리주의와 이원론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물리주의란 인간은 육체만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며 이원론은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 졌다는 주장이다. 즉, 물리주의와 이원론에 대한 논의가 선행된 후에 죽음이란 육체의 죽음인지 영혼의 죽음인지 영혼과 육체의 죽음인지에 대해 정의해야하는 것이다. 본 포스트에서는 죽음에 관한 장황한 정의는 생략하고 슬픔에 대한 이야기와 죽음이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이유에 대한 생각에 대해 정리해본다.


1. 슬픔에 대하여

ⅰ. 슬픔이란 무엇인가? 

  슬픔은 소중했던 뭔가를 잃어버렸을 때 느끼는 상실감()의 표현이다. 슬픔을 유발하는 중요한 상실(loss)의 대상을 정리하면 사람, 물건, 지위, 가치  네 가지가 있다. 애인·친구·가족과의 이별, 질병, 사고, 죽음, 싸움 등이 슬픔을 초래하고, 추억이 깃든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정든 집을 떠날 때,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동료들로부터 따돌림당할 때,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 성공하거나 존경하던 사람한테 실망할 때 등 여러 가지 상황에서 슬픔을 느끼게된다.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c.s루이스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는 슬픔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나는 내가 어떤 (슬픔의)상태를 묘사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슬픔의 지도를 그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슬픔은 '상태' 아니라 '과정'이었다. 

-c.s루이스 '헤아려본 슬픔' 中

ⅱ. 슬픔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슬픔은 우울함을 동반하여 부정적인 이미지로 보이기 쉽지만, 엄밀히 말하면 다른 기본적인 감정과 마찬가지로 슬픔은 좋고 나쁘고의 가치판단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슬픔이라는 과정을 이후의 변화하는 나의 모습을 통해서 내가 겪었던 슬픔이 좋았던 것인지 나빴던 것인지 판단하려 한다는 것이다. 슬픔을 통해 더 좋은 내가 되었다면 내가 경험한 슬픔은 좋은 슬픔이 될 수도, 슬픔을 통해 더 안좋은 내가 되었다면 경험한 슬픔은 안 좋은 슬픔이 될 수도 있다. 즉, 슬픔 자체는 가치 판단 대상이 아니지만, 슬픔을 대하는 나의 대처능력을 통해 좋은 것으로 기억될 수도 나쁜  것으로 기억될 수도 있다.  슬픔은 인위적으로 피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며 좋은 것인지 안좋은 것인지 평가도 할 수 없는 매우 자연적이고 중립적인 존재다. 따라서, 슬픔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슬픔을 대하는 나의 태도이다.


ⅲ. 슬픔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슬픔을 주는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솔직한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 솔직한 자세란, 내가 느끼는 슬픔을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고 슬픔이 우리에게 주는 그만큼만 그대로 받아내는 것이다. 그대로 받아낸 다는 것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눈물, 하소연, 분노 등의 자연스러운 해소 방법을 통해 뜨겁게 표현하고, 또 어떤 이유로 슬픈지 또 그 슬픔이란 대상이 내 마음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냉철하게 분석해서 그 슬픔을 나의 컨트롤 하에 두는 것이다.(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로 통할 수 있을까?) 
 프로이트의 구조이론에 근거하여 위의 과정을 분석하면, 의식과 무의식이 원활이 소통할 수 있도록 하고(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기) 슬픔이 가능한 한 의식의 영역에 많이 머무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냉철한 분석). 슬픔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않으면, 무의식으로 침전한다. 무의식은 내가 의식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한 번 무의식으로 빠져버린 대상은 다시 찾아내기 쉽지 않다. 무의식에 숨어버린 슬픔은 나도 모르는 마음 속 어딘가에서 더 큰 상처가 되어 다시 돌아온다. 


2. 죽음이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이유 ; 나를 향한 슬픔, 죽은자를 향한 슬픔

ⅰ.나를 향한 슬픔

① 그리움, 아쉬움, 후회감, 두려움 ; 곁에 있는 사람이 죽었을 때 일차적으로 슬픔을 느끼게 되는 원인들

- 그/그녀와 함께 만들었던 추억에 대한 '그리움'

그/그녀와 함께 만들었던 과거의 행복한 추억을 미래에는 더 이상 만들지 못할 거라는 '아쉬움'

- 스스로는 더 잘해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그녀에게 더 잘해주지 못했다는 '후회감'

- 더 이상 그/그녀의 도움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


② 대체불가능성

 내 곁의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가 슬픔을 느끼게 되는 일차적인 이유는 그리움, 아쉬움, 후회감, 두려움이다. 이때, 그리움, 아쉬움, 후회감, 두려움의 원인이 되는 공통분모를 찾아보면, 결국 위 네 가지의  슬픔의 감정은 대체불가능성이라는 공통적 원인에서 기인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대체불가능성이란, 어떤 사람만이 가진 고유한 외적모습 그리고 그 사람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경험한 생각을 토대로 헝성된 고유한 내적모습이 합쳐진 존재의 유일성을 의미한다.  

- (대체불가능한) 그/그녀와 함께 만들었던 추억에 대한 '그리움'

- (대체불가능한) 그/그녀와 함께 만들었던 과거의 행복한 추억을 미래에는 더 이상 만들지 못할 거라는 '아쉬움'

- 스스로는 더 잘해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대체불가능한) 그/그녀에게 더 잘해주지 못했다는 '후회감'

- 더 이상 (대체불가능한) 그/그녀의 도움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


③ 죽은자의 대체불가능성이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를 향한 슬픔

 대체불가능성에서 기인된 그리움, 아쉬움, 후회감, 두려움이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이유는 "다시는 그/그녀와 시간을 보낼 수 없을 것" 이라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좀 더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보기 위해 다시 질문하면, "다시는 그/그녀와 시간을 보낼 수 없을 것"이라는 마음은 왜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가? 죽은자는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므로 세상에서 더 이상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즉, "다시는 그/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을 것"이라는 대체불가능성에서 기인된 슬픔의 원인은 죽은자를 향한 슬픔이 아니라 나를 향한 슬픔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가 그/그녀를 통해 느낄 수 있는 나의 행복의 감소」라는 사실이 대체불가능성이라는 매개를 거쳐 슬픔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④ 나를 향한 슬픔에 대한 그 외의 논의

 A. 슬픔의 깊이 ; 죽은자가 나와 어떻게, 얼마나 관련있는가?

 슬픔이 깊이는 그 이유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음을 알 수 있는다. 그리움이 아쉬움보다 더 슬프다거나 후회감이 두려움보다 더 슬프다거나 그 원인에 대한 우위를 따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움, 아쉬움, 후회감, 두려움의 감정은 그 중 어떤 슬픔의 원인이 더 슬픈 것이 아니라, 내가 사자死者와 어떻게, 얼마나 관련이 있느냐에 따라 슬픔의 깊이가 다르다. 그와 나눈 추억이 많다면 그만큼의 그리움, 그와 즐거운 시간을 많이 보냈다면 앞으로 그와 함께 보낼 수 있었을 즐거운 시간들에 대한 그만큼의 아쉬움이, 내가 그에게 잘 해주어야 하는 관계에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그만큼의 후회감이, 내가 그에게 많이 의존하고 그를 많이 존경해왔다면 그가 사라진 것에 대해 그만큼의 두려움이 파도가 되어 가슴 깊은 쪽까지 차갑게 적셔온다. 

 대체불가능성에 의한 죽음은 나와 관련이 있는 죽은 자와 내가 매우 친밀한 관계였는지 혹은 서먹한 관계였는지를 불문하고 슬픔을 준다. 친밀하면 친밀할 수록 그리움과 아쉬움때문에 반대로 서먹했다면 후회감에 슬픔을 느끼게 된다.



ⅱ. 죽은자를 향한 슬픔


 하루에도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는다. 그 엄청난 수의 죽음은 대부분 우리와 전혀 상과없는 일이지만, 가끔은 우리에게 중요한 존재인 누군가가 죽기도 하므로 어떤 죽음은 우리와 아주 상관있는 사건이 된다. 그래서 그 누군가의 죽음은 우리에게 특별한 상실감으로 다가온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체할 수 없음'의 속성을 죽은 사람의 성격이나 특징으로 기술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서술한 내용을 살펴보면, 어느 누구도 미하일 로프를 잘 알지 못했다는 점을 명확히 짚고 있다. (...)즉, 한 인간의 특성과는 다른 중요한 무언가가 한 죄수의 죽음을 바라보는 이들의 반응과 연관돼 있음을 알려준다.

                                                                                -크리스토퍼  해밀턴 '일생에 한 번 내게 물어야할 것들' 中

 나와 상관있는 사람의 죽음은 죽은 사람의 성격이나 특징의 ' 대체할 수 없음 ' 의 속성이 원인이 되어 나에게 슬픔으로 다가온다. 반면, 나와 상관없는 죽음은 ' 대체할 수 없음 '의 원인을 지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나와 상관없는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고 애도하기도 한다. 즉,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나와 상관없는 죽음에 느끼는 슬픔에 대해서는 사자의 성격이나 특징의 ' 대체할 수 없음 ' 의 속성이 원인이 아닌 다른 중요한 무언가가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① 인간적 삶이 끝난 것에 대한 연민, 안타까움


 친구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내적인 삶이란, 친구가 자신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노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동물에게는 내적인 삶이란 게 없다. 때문에 하이데거는 동물은 죽을 수 없으며, 단지 소멸verendet할 뿐이라고 말했다. (...)

 하지만 이 불가사의(내적인 삶의 절멸;죽음)와 맞닥뜨리기 위해 망자의 성격을 조목조목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죽은 이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충격을 받고 불가사의에 일격을 당하고 만다. 이때 우리는 죽은 이에게 내적인 삶이 있었으며 그가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열심히 고군분투했다는 점을 인식하기만 하면 된다.

-크리스토퍼  해밀턴 '일생에 한 번 내게 물어야할 것들' 中

 위에서 언급하는 내적인 삶이란 '자신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노력'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기준이기도 하다. 동물은 순환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순환하는 삶에서는 과거의 존재와 현재의 존재가 구별을 보이지 않는다. 순환하는 삶은 단순히 언제, 무엇을 했다는 기록만으로 끝난다. 하지만, 인간의 삶을 순환하는 삶으로 인식할 수는 없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제와 오늘 같은 곳에서 일어나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생활패턴을 지내고 같은 곳에서 잠이들더라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존재가 아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존재가 되어있다. 즉,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로써 매 시간 다른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둥글게 순환하는 삶이 아닌 직선의 삶을 살아간다. 아기에 대해 느끼는 연민도, 죽은자에 대해 느끼는 연민도 이 때문이다.아기에 대해서는 '이 순수하고 연약한 존재가 변화무쌍 속에서 고통스럽기도한 인간의 삶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을까?' 하는 연민을 지닌다. 죽은자에 대해서는 그의 육체적 삶이 멈춘 것에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의 직선적인 삶의 구조가 끝난 것이 당혹스러운 것이다.하이데거는 죽음을 '자신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끝나는 것 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자신의 삶에 대한 이해가 없는 동물의 생물학적 끝은 죽음이 아닌 단순한 소멸인 것이다.



 



3.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곁에 있는 사람의 죽음뿐만 아니라 우리와 연관이 없는 사람의 죽음에 이르기 까지 죽음이란 우리에게 슬픔 이외의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래 불안에서의 인용문은 죽음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바를 제시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의 가장 큰 효과는 나일 강변에서 술을 마시든, 책을 쓰든, 돈을 벌든, 우리가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로부터 가장 중요한 일로 시선을 돌리게 해준다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덜 의존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신에 죽어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 자신의 소멸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생활방식을 향해 눈길을 돌리게 된다.

-알랭드보통 '불안' 

 알랭드보통의 불안에 따르면 우리는 죽음의 간접 경험을 통해 자신의 인생의 더욱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할 기회를 얻는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 후 인생의 경로가 눈에 띄게 변하는 사람들을 보면 전혀 설득력 있는 이야기 인것 같다.


4.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생각들

ⅰ. 삶과 죽음 혼재론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 뿐만 아니라 많은 소설가 또한 삶과 죽음의 혼재에 관해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삶의 끝에 죽음이 도래한다는 삶과 죽음의 단절론을 거부하고, 삶 속에 곧 죽음이 있고 죽음 뒤에 삶이 있을 거라는 삶과 죽음의 혼재론을 믿는다. 삶 속에 어디에나 이미 죽음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이 한 껏 친절하게 느껴지기 까지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생각으로 삶속에 죽음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죽음을 넓은 의미로 파악하여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죽음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비가시적인 죽음도 죽음이라고 한다면 – 가령 나의 도전의 죽음나의 의지의 죽음사랑의 죽음우정의 죽음 – 우리의 삶은 이미 많은 죽음을 경험했고 또 경험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간접적인 죽음의 경험 후에도 우리는 죽음 혹은 소멸의 고통에 전율한다이러한 고통덕분에 우리는 실제의 죽음에 대하여 예비 경험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삶 속에 죽음이 혼재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예를 들어사랑의 소멸 후 (여기서 사랑은 소멸이라 해야 할 지 죽음이라 해야 할 지)우리는 찢어질 듯한 가슴 속 상처를 느낀다이처럼 이미 삶 속에 혼재하고 있는 죽음은 우리에게 죽음의 공포를 경감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의 도처에 존재하는 죽음에 관하여(삶과 죽음 혼재설)-죽음에 관한 포스트 인용

 죽은 자의 땅인 릉과 그것을 둘러싼 산자의 소나무 숲. 그 사이의 돌담. 그리고 그 돌담위에서 누워있는 나. 이런 생각을 하니 애매한 감정이 불쑥 느껴졌다.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그 돌담 위에서 나는 한가롭게 봄바람이나 만지면서 멜로디에 전율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이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죽음은 무언가에 의해서 단절된 상반된 것이 아니다. 소나무 숲의 일부가 돌담이기도 하고, 릉의 일부가 돌담이기도 한 것처럼 삶속에 죽음의 일부가 존재하는 것이고, 죽음 속에 삶의 일부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단절된 죽은 자의 땅이나 산자의 땅에 있는게 아니라, 그 사이 어딘가의 돌담위에서 위태롭지만 행복하려고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즉, 삶과 죽음은 함께 녹아있는 것이다. 완벽한 삶이나 죽음이란 애초부터 없다.

- '가치관제작소 (삶과 죽음에 관해서)' 

도쿄에 올라와서 기숙사에 들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내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 그것 뿐이였다.

-중략-

 처음에는 그렇게 잘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잊어버리려해도 내 안에는 뭔가 뿌옇게 흐린 공기덩어리 같은 것이 남아 잇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덩어리는 단순하면서도 뚜렷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형상을 이런 말로 바꿔 놓을 수가 있다. 그것은 이런 것이었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말로 해버리면 평범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공기덩어리로서 몸 안족에서 느겼던 것이다. 당구대 위에 나란히 놓여 잇는 네 개의 빨간색과 하얀색 공 안에도 죽음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마치 미세한 티끌처럼 폐 속으로 들이마시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죽음이란 것을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잇엇다. 즉 죽음은 언젠가는 확실히 우리들을 그 손아귀에 거머쥐게 된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들을 사로잡는 그날까지 우리들은 죽음에 붙잡히는 일이 없는것이다.. 라고

 -중략-

그러나 기츠키가 죽은 밤을 경계선으로 하여, 나로선 이제 그런 식으로 죽음을 단순하게 파악할 수는 없게 되어 버렸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저쪽에 있는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 죽음은 ;나; 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잇는 것이며, 그 사실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런 공기덩어리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열여덟 살의 봉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심각해지지 않으려고도 노력했다. 심각해진다는 것이 반드시 진실에 가까워진다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어슴푸레하게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ⅱ. 죽음은 영원한 현재보다 축복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유한한 삶에 더욱 충실할 수 있다. 무한한 삶 속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갈까? 운동 경기에 시간이 주어진 만큼 선수들이 주어진 시간내에 자신의 기량을 더욱 뽐내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유한한 삶은 우리에게 더욱 윤택한 삶을 선사한다.


ⅲ. 죽은 자의 땅으로의 합류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부모, 선생, 친구, 연인 등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앙한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죽음은 우리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은 때로 우리보다 먼저 이승을 건너기도 한다. 죽은은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해 마지않던 먼저 죽어버린 그들과 다시 함께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준다. 배우자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한 남자가 '이제 당신 옆으로 갈게' 라는 유서만을 남기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건, 죽은 자의 땅으로 합류해 내가 사랑하고 존경했던 사람과 다시금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 아닐까.



5. 죽은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나를 꼭 기억해 줫으면 하는 것. 내가 존재했고, 이렇게 와타나베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언제까지라도 기억해줄래?』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미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 등장하는 나오코의 한 마디는 우리에게 중요한 두 가지를 알려준다. 

 그 첫번째는 죽은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그들이 죽고나서도 산자가 그들을 기억해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 산자가 그들의 존재를 기억해주는 것이 죽은자에게 혹은 죽음을 맞이한 자에게 있어서 가장 뜻 깊은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의 2가지를 이해해야한다. 그 두 가지란, 상념적 존재와 물질적 존재이다. 여기에 상념적 존재와 물질적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가 있다. 가령 지구가 어느 날 사라질 거란 예고도 또 사라진 흔적도 없이 일숨에 사라졌다고 가정해보자. 탁상 위에 놓여있던 쿠키가 누군가에게 한 입에 먹히기라도 한 것처럼 지구라는 행성 전체가 그렇게 쿠키처럼 사라졌다고 생각해보자. 무엇이 남는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지구에서 몇 억 광년 떨어진 행성의 우주인이 지구를 끈질기게 관찰하고 있었고 그 우주인은 지구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게 되었다. 그 우주인은 지구를 기리고자 지구가 어떤 행성이었는지, 또 그 행성의 위치는 어디였는지, 지구라는 행성 안에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 지구의 생명체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를 기록하고 후대에 남긴다. 이번엔 무엇이 남는가? 지구에 대한 기억이 남는다. 이처럼 어떤 물질적 존재가 있었고 그것이 사라졌을 때 그 존재의 기억마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로 끝인 셈이지만, 존재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그 존재는 어떤 측면에서는 사라졌다고 할 수 있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여전히 살아있다고 할 수도 있다. 반대로 어떤 물질적 존재가 현존할 때, 그 존재에 대한 기억이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면, 그 존재는 어떤 측면에서는 살아있으나 어떤 측면에서는 사라졌다고 할 수도 있다.

죽음을 맞이하려 하는 자는 이처럼 자신의 물질적 존재는 사라지지만 상념적 존재는 잊혀지길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념적 존재로써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는 한 산자들과 함께 할 수있을 거라는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위와 같은 시각의 연결선상으로 볼 때, 실제 물질적 존재의 죽음이 아닌 상념적 존재의 죽음-가령 이별과 같은-은 물리적 존재의 죽음과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완전한 이별이 없기에 완전한 상념적 존재의 소멸도 없겠지만, 완전에 가까운 상념적 소멸이 가능하다면 이별한 사람의 물질적 존재가 현존하는지 사라졌는지는 알바가 없게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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