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소프트웨어
- 감성, 오성, 이성, 감정, 욕구



 

1. 배경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우선 조건은 사물과 사건을 구성하는 각각의 객체 구성요소를 면밀히 살펴보고, 이후에는 그 객체 구성요소간의 관계까지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은 신체라는 하드웨어와 몇 가지 소프트웨어로 구성된다. 소프트웨어라고 하면 몰인간적인 단어선택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생각이나 마음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하드웨어의 구성요소는 명백히 신체라는 단일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인간의 소프트웨어는 어떤가? 인간의 마음을 구성하는 요소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전의 포스트에서 인간의 소프트웨어를 구성하는 요소를 이성, 감정, 욕구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나는 다음과 같은 의문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소프트웨어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림이나 글 혹은 음악 등을 창조하는 예술가들의 능력은 어디에 해당하는 것인가?" 이는 기존의 소프트웨어 구성요소 이성, 감정, 욕구 중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2. 감성, 오성, 이성과 칸트의 순수이성 그리고 실천이성
 감성과 오성 그리고 이성을 칸트의 순수이성, 실천이성으로 설명한 다음의 글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먼저 출처는 다음과 같다.



1. 
세상에는 <정보>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 정보가 곧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감각기관으로 세상으로부터 정보를 취득합니다 그런 정보를 취득하는 능력이 감성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으면서 숱한 정보를 얻습니다. 아이들은 감각기관을 동원하여 정보를 얻습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좀더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예컨대 인터넷에서 무엇인가를 알아보려고 한다고 가정하죠. 그때 검색어를 입력할 것입니다. 이런 정보를 얻는 행위 자체가 곧 감성의 능력입니다.

 

———- 어떤 사람은 검색을 참 잘합니다. 남보다 빨리 더 많으며 또 유용한 정보를 얻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남보다 효과적으로 도구를 사용하겠죠. 지역을 정해서 검색하거나 혹은 시간을 설정하여 검색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은 이곳저곳에 있는 정보를 이때저때 구분해서 정보를 얻습니다. 이것은 감각기관이 잘 발달해서 그런 게 아니라 뭔가 남다른 두뇌활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능이 좋을 수도 있고 경험에서 터득한 앎이라는 게 있을 수도 있겠죠.

 

2. 수많은 정보가 모두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보를 지식으로 만드는 인간의 능력이 뭔가 있겠죠. 정보는 휘발됩니다. 기억속에서 지워지죠. 우리 인간에게는 휘발되고 사라지는 정보를 붙잡는 능력이 있어서 정보를 지식으로 만들어 줍니다. 이러한 힘이 바로 오성(Understading)“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공부 잘하는 능력, 똑똑함을 증거하는 능력입니다.

 

——— 정보가 휘발되지 않게 하려면 머릿속에서 잘 정리해야 합니다. 마치 컴퓨터에 여러 개의 폴더를 만들어서 다운로드 받아 수집한 정보를 잘 분류하여 보관한 다음에, 다시 인터넷으로 키워드 검색할 게 아니라 자기 폴더에서 재빠르게 찾아내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능은 아마도 이 오성의 능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냥 Understanding 지능이라고 이해해도 거의 무방합니다.

 

3. 공부잘하는 사람은 학벌도 좋고 직업도 좋습니다. 출세도 잘합니다. 정보가 없는 사람보다 정보가 있는 사람이 여러모로 유리하겠죠. 그렇지만 수많은 정보 중에서 거짓 정보를 걸러내고 알맞은 정보를 적시적소에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리더가 됩니다. 학벌사회는 오성의 능력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를 뜻합니다. 공부 잘하는 놈이 힘을 얻는 것이죠.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그게 우리 인류에게 도움이 될지는 의문입니다. 오성(悟性)이라는 단어에서 깨달을 悟는 현대 한국어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오성이라는 개념어는 철학을 어렵게 만듭니다. 최근에는 지성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이해력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저도 단어 표현에 대해서 여러 번 생각을 바꿨습니다. “지력 혹은 그냥 풀어써서 지적인 능력으로 번역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번역어 옆에다 괄호를 넣고, 그 괄호 안에 “Understanding”이라는 영어 단어를 하나 넣어주면 좋겠군요. 학문적인 이해가 아니라면 그냥 지능으로 이해해면 대략 맞습니다 .

 

———- 오성이 지배하는 사회는 학벌사회이며 엘리뜨사회입니다. 그런 점에서 별로 미덥지 않죠. 그런데 오성이라는 단어 대신에 지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지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돼서 엘리뜨 사회를 변호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맙니다. “이해력이 지배하는 사회도 마찬가집니다. 오성은 그저 정보를 지식으로 바꿔 주는 지적인 능력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오성지배 사회는 똑똑한 놈이 지배하는 사회인 셈이죠.

 

아마 이 정도라면 칸트철학의 <감성> <오성>의 의미가 파악되지 않을까 싶네요.

 

이제 <순수이성> <실천이성>입니다.

 

4. 지식이 많은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죠. 학벌도 좋고 엘리뜨이며 교수일 수도 있고, 전문가일 수도 있고, 과학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지능이 탁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그들이 생각이 제대로 된 사람일까요? 정보가 지식이 됐다고 해서 그 지식에 바로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이 지식의 진정한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지식이 틀린 것은 아닐까? 더 나은 지식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이나 회의가 들 수 있으며, 또는 자기가 갖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서 뭔가를 추상적으로/논리적으로 생각하려고 할 수도 있겠죠.

 

———- 법조문을 달달 외워서 사건마다 어떤 법조문이 적용돼야 하는지 알아채는 사람들은 확실히 법에 대해서 지식이 깊고 풍부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알고 있는 법지식이 때때로 의미 없을 때가 있습니다. 법에 의한 결론이 이상하다거나 현실에 맞지 않다거나 상식에 반한다거나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기는 힘이 무엇일까요? 정보에서 지식을 얻었는데, 그 지식의 진정한 의미를 구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이 바로 이성입니다. 이성은 여러가지 능력이 있습니다. 귀납적 추론을 할 수 있는 능력, 경험지식과 관습을 의심하는 능력, 세계와 대화할 수 있는 소통능력, 도덕적 명령을 내리는 능력, 행위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갖게 하는 능력이 이성의 권능입니다.

 

5. 정보는 오성에 의해 지식으로 상승하고 지식은 다시 이성에 의해 의미로 상승합니다. 감성에 의해 정보를 얻고, 오성에 의해 정보를 지식으로 만들며, 이성에 의해 지식의 진정한 의미를 인식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경험에 의해서 이성이 달라진다면 결국 경험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느냐에 따라 이성의 권능이 달라지겠죠. 물론 경험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이성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마다의 경험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 경험에 의해서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이성이 있지 않을까라고 가정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 가정이 옳다면 그때의 이성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것이겠죠? 이때의 이성을 칸트는 순수이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6. 칸트는 순수한 이성으로는, 경험과 무관하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이성의 힘으로는 이 세계의 배후에 있는 본질을 알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칸트는 인간이 없는 세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철학이 존재하는 까닭은 인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없는 세계에는 사물만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의미를 부여하고 파악하는 주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의미는 그 의미를 인식하는 주체가 필요합니다.  “존재는 존재로서 인식될 때 비로소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칸트는 사물이 존재함으로써 그 사물에 합당한 관념이 생기는 게 아니라, 그 사물에 대한 관념이 생김으로써 그 사물이 비로소 존재한다고, 거꾸로 생각합니다. 칸트는 이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선언하며 자뻑했지요. 그러나 이 자뻑은 실은 굉장히 겸손한 성격을 지닙니다. 칸트의 순수한 논리(경험이 배제된 논리)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알기 어렵거든요.

 

7. 우리가 흔히 생각 좀 하고 살아라고 말했을 때의 생각은 단순한 정보의 취득이나 지식의 획득을 칭하는 게 아닙니다. 소위 사유는 감성(감각)의 힘이 아니며, 오성(지능)의 힘도 아닙니다. 지적인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그/그녀가 사유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유는 감춰진 의미를 찾고 가치를 따지는 것이어서 단순히 공부를 잘한다는 것과는 특별히 관련이 없습니다. 똑똑한 놈이 더 악랄하게 굴 때가 있고, 공부 잘하는 놈이 생각 없이 한 사회를 위험으로 몰 수도 있습니다.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능은 높은데 (지능이 높은 사람/집단은 권력을 얻기 쉽습니다) 이성이 낮다면 사회는 위험에 빠집니다.

 

8. 그런데 진정한 의미 혹은 가치 판단이라는 것은 스펙트럼이 다양하고 저마다 입장이 다릅니다. 진보가 있고 보수가 생깁니다. 자유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공동체주의자가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신뢰하는 사람도 있고 자본주의를 악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는 법이죠. 어쨌거나 다양한 이성의 입장이 존재합니다. 이성의 힘으로는 절대적인 의미를 확정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진리는 알기 힘듭니다. 이렇게 좌절하는 순간 세상은 평화롭게 변합니다.

 

———- 대립하고 논쟁할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한 쪽이 무조건 승리해야만 하는 숙명 같은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성이 아무리 고차원이라고 해도 생각 좀 하고 살자는 다양한 가치와 입장이 존재하기 마련이며, 이 존재 자체를 이성이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이성은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이 올바르냐라는 질문은 사람마다 다른 답과 쌍을 이룹니다. “사유한다고 해서 좋은 방향으로만 가는 것은 아닙니다. 나쁜 방향으로 사유할 수도 있지요. 의도적이고 공개적이며 특히 집단적인 범죄가 대표적인 예가 되겠죠.

 

9. 이성적인 사유는 틀림없이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유의 한계를 이대로 방치해 버리면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인간의 최고재판소가 사라져버립니다. 이건 확실히 문제입니다. 순수이성은 이처럼 한계가 있고 무력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이론적인 무기력함입니다. 요컨대 참된 진리나 본질의 핵심에 대해서 이성이 함부로 이론적으로 최종 선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뭔가의 본질을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해서, 무엇이 올바른지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면인간사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엉망이 되겠죠. 무법이 판을 칠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정의를 이론적으로 구성하지 않고 실천적인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경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이성을 실천적인 측면에서 표현하면 그것이 실천이성이 됩니다. 순수 실천이성입니다.

 

10. 인간의 정의로운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올까요? 앞서 말한 감성, 오성, 이성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 세 가지 인간의 능력은 차이를 방증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공통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압니다. 시간과 장소와 인종을 초월하여 느끼는 공통된 자연스러움 공통된 죄책감 공통된 감동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노약자에 대한 배려, 거짓말에 대한 부끄러움, 살인에 대한 분노, 사랑과 우정에 대한 찬미 등등. 이런 대부분의 공통된 능력은 두뇌활동이 아니라 어떤 행위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위를 머뭇거리게 하거나, 촉발하거나, 단념하거나, 저지르거나, 부끄러워하거나, 후회하거나, 계율로 전승하는 사유가 있을 것이고, 이는 도덕적 사유입니다. 도덕적 사유를 지탱해주는 것은 인간의 양심이며, 요컨대 당신의 양심과 나의 양심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양심이 모든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법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법률은 대한민국의 모든 법률보다 더 중요합니다. 성문화되지 않는 인류의 헌법이기 때문입니다.

 

11. 한나 아렌트의 이른바 <악의 평범성>에서 비롯되는 사유의 문제는 이론적 사유의 문제이면서 도덕적 사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도덕적 사유는 자기만의 사유가 아니라 타인도 포함하는 사유입니다. 타인과 나, 양측 모두에게 도덕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진실된 도덕이 아니라는 것이 칸트의 견해입니다.

 

12. 이렇게 해서, 감성, 오성, 이성, 순수이성, 실천이성을 설명해 봤습니다. 저는 철학자가 아니고 한낱 전기공학을 전공한 사람이라서 틀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이상의 글은 정보와 지식의 구별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은연중에 정보보다 지식이 더 높은 단계인 것으로 전제되고 간주되어 있습니다. 이런 전제를 한 번 흔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지식보다 정보가 더 중요하다라고 말이죠. 이게 바로 20세기, 21세기에 유행하는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숨겨진 정보, 거세된 정보, 오성에 의해 채택되지 않는 정보, 저 무한하고 꿈틀대는 정보의 바다, 정보의 거대한 자기분열, 선택된 정보의 권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지식과 이성의 왜곡현상에 대한 탐구. 바야흐로 빅데이터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3. 인간을 구성하는 소프트웨어 : 감성, 오성, 이성, 감정, 욕구
.감성(sensibility)
① 감성의 정의

 우선 영어 사전을 찾아보면, 감성을 ‘sensitivity’ 혹은 ‘sensibility’라고 정의하고 있다. 감성과 혼동되는 개념인 감정은 ‘emotion’이나 ‘feelings’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의미의 차이가 조금은 명확해지는 것 같다. sensibility라는 영단어를 분해해서 생각해보자. sensibility는 ‘sense’ + ‘ability’ 즉, ‘sense하는 능력’의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sense란 무엇일까? ‘sense’란 ‘감각’이라고 부르는 것을 말한다. 감각은 주위 환경(몸 속, 몸 자체, 몸 밖을 다 포함한다.)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오감을 통해 받아들여 그 의미를 파악하는 과정을 말한다. 정리하면 감성이란  외부적 / 내부적 자극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② 감성이 지니는 의미
 감성이라는 인지작용은 1. 인지의 시작이되는 가장 처음의 시작점 일뿐아니라 2. 
감정, 이성, 욕구라는 다른 인지작용을  불러일으키거나 다양한 인지작용들을 결합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감성이라는 인지 작용을 통해 감정(feeling)을 느낄뿐만 아니라 이성과 감정이 결합된  복합적인 앎을 얻게 된다. 이는 예술가들의 창조성으로 이어지는데, 감정이나 이성의 단일 변수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힘이라는 점에서 감성의 중요성이 느껴진다. 높은 감성을 지닌 사람일 수록 더 다양한 인지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같은 것을 보고도 특별한 인지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한 인지의 경험이 쌓여나간다면 두 사람이 경험한 세계는 전혀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


 철학적 의미의 감성과 세속적 의미의 감성


사진1 -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진




사진2 -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사진





사진3 - 이성을 불러일으키는 사진

 위의 시각적 이미지들을 비교해보자.먼저 「사진1」을 보고 그 결과는 사람마다 판이할 수 있다. A라는 사람은 따듯하고 포근한 감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고, B라는 사람은 여자의 머리카락이 길다, 햇빛이 눈부시다라고 이성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으며, C라는 사람은 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철학적인 감성의 정의에 의하면, A와 B는 시각적은 감각(Sense)를 받아들였으므로 감성이라는 인지능력이 높은 사람이지만 이지만 C는 감성이 낮은사람이다. 한편,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감성적이라는 표현의 세속적 의미의 범위 안에서 A라는 사람은 감성적이 사람이라고 평가받지만 B는 감성적인 사람으로 평가받지 못한다. 이는 세속적 의미의 감성이란 단순히 긍정적인 감정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중요도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비교대상을 각기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진으로 옮겨볼 수 있다. 「사진1」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감성 사진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2」는 생리적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감성 사진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3」은 이성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이라고 볼 수 있다. 철학적 의미에서 위의 세개의 시각적 이미지는 모두 감성사진에 속한다. 한편 세속적 의미의 감성이라는 정의의 틀안에서는 「사진1」만이  감성으로 평가될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직감은 곧바로 느껴 아는 것으로 설명·증명 등을 거치지 않고 곧 사물의 진상을 마음으로 느껴 알거나 그 감각을 말한다. 직감은 감성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ⅱ.오성(understanding) -오성에 관한 내용은 위의 글을 참고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은 감성이다. 그렇지만 수많은 정보가 모두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정보를 지식으로 만드는 인간의 능력이 존재한다정보는 휘발된다기억속에서 지워진다우리 인간에게는 휘발되고 사라지는 정보를 붙잡는 능력이 있어서 정보를 지식으로 만들어 준다이러한 힘이 바로 “오성(Understading)“이다. 쉽게 말하자면 정보를 이해하는 능력으로 공부 잘하는 능력똑똑함을 증거하는 능력이다.

① 오성을 촉진시키기 위한 팁

인간이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은 자료를 보고 스스로 학습하거나 타인의 강의를 통해서 학습하는 방법이 전부이기 때문에, 자료나 강의를 통한 학습은 것은 오성이 발현되는 모든 대상을 대변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료나 강의를 통한 학습 중 자신이 이해한 부분과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은 어디까지 이해하고 어디까지 이해하지 못했는지 그리고 왜 이해하지 못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인지하고, 이해하기 위해 정보를 조사한다. 

- 이해한 부분이나 이해하지 못한 부분과 관계없이, 자료나 강의에서 설명되지 않은 부분 중 호기심이 남는 부분은 정보를 조사한다.

-공부 후에는 전체적인 내용을 조망하며, 이해한 부분, 이해하지 못한부분, 이해하지 못했지만 습득한 부분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

*정보 조사의 방법 : 1. 아는 사람에게 질문하는 것은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 주의할 점은 질문을 할 시에는 효과적으로 질문을 하기 위해 자신을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겠는지 구체적이며 명확하게 상대에게 알린다. 2. 인터넷으로 검색한다. 주의할 점은 얻고자하는 정보외의 잡다한 정보들을 제껴내고 내가 조사하고자 하는 내용에 포커싱을 맞추어 조사를 진행해야 한다.

 

ⅲ.이성
① 이성의 일반적 정의과 이성
이 지니는 의미
 이성은 인과관계를 추론하는 능력이다. 감성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고, 오성을 통해 정보를 이해하여 지식으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이성을 통해 지식의 의미를 추론하지 못하면 정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성을 통해 얻은 지식이 어떠한 인과관계를 통해 어떤 의미를 가질지 추론하는 것이 이성이다. 공부는 잘하지만 일은 못하는 사람은 오성(이해력)은 뛰어나지만 이성(인과관계의 추론력)이 낮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성은 욕구, 감정, 감성을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원하는 모든 욕구를 충족할 수 없을 때 욕구 간의 충돌을 중재할 수 있으며, 부정적이며 각성이 높은 감정을 정상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감성의 민감도를 조절해 주의 환경에 사용하는 에너지의 양을 조절하는 기능을 할 수도 있다.





②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이성의 일반적 의미는 인과관계를 추론하는 능력이지만, 칸트는 이러한 이성을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으로 나누어 보았다. 순수이성이란 어떠한 경험적 판단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이성을 의미한다. 가령 1+1 =2 이라는 이성은 개인의 경험적 판단에 의해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이성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순수이성이란 과학적 이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과학적이란 의미는 "인과관계를 일반화시킬 수 있는 것" 을 의미한다. 하지만 순수이성은 다음과 같은 한계를 갖게 된다. 가령, A라는 정치인은 무상 급식에 대해 찬성한다. 왜냐하면, 학창시절 돈이 없어 밥을 못먹었던 그의 경험이 판단의 근거가 된다. 반면 B라는 정치인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으로 무상 급식의 결과 발생하게 될 비용에 대해서 생각한다. 무상급식에 대한 주제를 두고 A라는 정치인의 의견도 합당한 것처럼 보이고, B라는 사람의 의견도 합당한 것처럼 보인다. 판단에 대한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사람과 그 사람의 자라온 환경에 따른 경험에 의해, 이성의 결과가 다르게 작용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순수이성을 적용할 수 없다는 한계에 직면하다. 이로 인해 등장하게 된 것이 실천이성이며 이는 경험적 이성이다. 

③ 이성에서 파생된 제 6감각과 제7감각
 철학자 니체가 명명한 제 6감각은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의 감각을 뛰어 넘어, 사간의 흐름과 사실의 인과관계를 감지하고 반응하는 감각이다. 이는 보이지 않는 단일 사건이나 객체라는 사실을 통해 그 의미와 원인을 추론하는 이성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이성능력이 개체 자체의 인과관계의 추론에 한정되느냐 객체간의 관련성에 따른 인과관계의 추론까지 고려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제 7감각이란 다양한 객체간의 관련성에 따른 인과관계의 추론 능력으로 인과관계를 다양한 사건과 다양한 객체까지 확대해서 보는 능력을 의미한다. 최근 주목받는 IT의 힘이 제 7감각에서 나오는 것인데, IoT 기술이 대표적이다.


ⅳ.감정(emotion, feeling)
①감정의 정의
 감정은 기분을 의미한다. 감정을 이해하는 가장 효과적인 구분법은 긍/부적과 각성정도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② 감정이 지니는 의미

 1. 감정을 불과 같아 다른 소프트웨어를 짧은 시간에 압도할 수 있는 즉흥적인 구성요소이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2.감정은 효율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진화 방향에 의해 이성보다 오래 기억된다는 장점이 있다. 가령 가족들과 간 여행에서 우리는 세부적인 내용은 기억하지 못한다. 감명깊게 봤던 여행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어디를 먼저 갔었는지, 내가 맛있게 먹던 음식에는 뭐가들었는지에 관한 이성적 정보는 여행 이후에 물밀듯이 밀려오는 정보들에 묻혀버린다. 하물며 어디를 갔었는지 조차 가물가물할 때가 많다. 반면, 그때의 기분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여행지가 어떻게 생겼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그 때 어떤 기분이였는지는 쉽게 기억한다. 내가 맛있게 먹던 음식에 뭐가 들어있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그 음식을 한입 떠넣었을 때의 만족감은 오래 기억된다. 감정의 이러한 강력한 힘덕분에 세속적 의미의 감성이 감정을 자극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ⅴ.욕구

 ①욕구의 종류 : 본능적인 8욕구와 학습된 9욕구

 인간을 구성하는 소프트웨어중 이성과 감성은 비교적 명확히 규정한 반면, 욕구에 대한 정의는 비교적 명확하지 못했다. 현재 머리 속을 채우고 있는 생각 중 " ~ 하고싶다" 라는 생각을 욕구로 가정했다. 예를 들어, "친구와 놀고 싶다" "달콤한 케이크를 먹고싶다" "나만의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싶다" "여자친구 보고싶다" 등이다. 이는 직관적이긴 하지만 욕구를 이론적으로 분류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트렌드의 심리학]에서는 욕구를 본능적인 8욕구와 학습된 9욕구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제시했는데, 나는 이 분류를 참고하기로 했다.


Life force 8

우리가 날때부터 가지고 있는 여덟가지 기본 욕구는 다음과 같다. 여덟가지 욕구는 처음부터우리의 뇌에 각인된 것이며, 우리 삶에서 거의 모든 선택과 행동을 통제한다. 
 

 

・생존과 삶의 즐거움, 삶의 연장(생리적 욕구)
・먹고 마시는 즐거움(생리적 욕구)
・공포와 고통, 위험으로부터의 자유(안전의 욕구)
・안락한 주거 환경(안전의 욕구)
・성을 나누는 동반자(소속, 애정의 욕구)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보호(소속, 애정의 욕구)

・남보다 우월해지고, 앞서고, 뒤처지지 않는 상태(존경의 욕구)

・사회적 인정(존경의 욕구)


메슬로의 욕구 5단계설을 참고하면, 5단계 욕구는 생리적욕구 - 안전의 욕구 - 소속,애정의 욕구 - 존경의 욕구 - 자아실현의 욕구로 구성되는데, 이중 생리적 욕구/안전의 욕구를 저위욕구라하고 소속,애정의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를 고위 욕구라 칭했다. 이후 다양한 연구자들의 실증 연구에 따르면, 반드시 욕구가 위와 같은 계층을 이루고 있지 않고,  저위욕구(생물학적 욕구)가 해소되고 난 후에는 고위욕구가 사람과 사회마다 다른 계층을 따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Infused 
force 9

 아홉가지의 부차적 욕구는 생각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큰 통제력을 갖는다. 하지만 여덟가지 생명력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하다. 이 아홉가지는 학습된 욕구로 날 때부터 우리뇌에 각인된 것이 아니다. 세포 차원에 새겨진 것이 아니란 의미다. 본능적 8욕구는 우리 존재 자체에 영구히 각인되어 있는 반면에 아홉까지 학습된 욕구는 노력을 통해 무효화 시킬 수 있다.


・정보를 얻으려는 욕구

・호기심

・몸과 주변 환경의 청결

・능률

・편리함

・신뢰성/자격

・아름다움과 스타일의 표현

・경제성/수익

・흥정


② 욕구가 지니는 의미
 욕구는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행복과 가장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는 소프트웨어라는 점에 의미를 갖는다. 욕구의 만족은 감성, 감정, 이성의 소프트웨어와 신체라는 하드웨어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③욕구를 다룰 때 주의할 점 : 욕구의 상대성, 욕구의 일시성

 욕구의 가장 흐미로운 점 중 하나는, 욕구는 너무나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유동적이라는 점을 구체화하면, 욕구는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며, 욕구는 지속적이지 않고 일시적이다. 하나의 형태로 머무르는 법이 없다.

 

생리적욕구 - 안전의 욕구 - 소속,애정의 욕구 - 존경의 욕구 - 자아실현의 욕구


욕구의 상대성 : A라는 사람은 1명에게만 존경을 받아도 만족하는 반면, B라는 사람은 1억명에게 존경을 받아도 만족하지 못한다. 

욕구의 일시성 : 욕구는 어떤 기준을 넘어가면 지속적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만족되는 그 일시적인 순간에만 만족감을 느낀다. 


욕구의 이러한 성질은 왜 부자들은 다 쓰지 못할만큼의 재산을 갖고도 더 많은 재산을 원하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욕구의 목표치가 만족되는 순간에만 일시적인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에, 더 높은 기준을 계속해서 세워나가게 되는 것이다.


욕구의 이러한 성질은 우리가 어떻게 행복을 쟁취할 수 있는지도 제시한다. 욕구에 대한 만족도의 목표치가 만족된다면  만족된 욕구를 다시 끌어 내려, 기존의 목표치보다 다시 아래에 두어라. 욕구에 대한 만족도가 하락할시 상실감도 수반 되겠지만, 더 높은 만족기준을 새로 설정하지 않아도 일정한 상황/조건 아래서 안정적인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주말 부부가 그에 해당한다. 주말 부부는 평소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소속 애정의 욕구/생리적 욕구에 대한 만족도가 만족기준을 밑돈다. 이들은 주말엔 욕구에 대한 만족도가 만족기준을 충족하며, 평일에는 만족도가 만족기준을 밑돌게된다. 이러한 상황의 특수성으로 인해, 같은 만족기준으로도 행복감을 누릴 수 있다. 부부사이의 싸움도 현재의 욕구에 대한 만족도를 만족기준 아래로 낮추기 때문에, 화해할 시 상황이 변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다른 큰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만족기준을 끊임없이 높여가는 악순환 : 한번 높아진 만족기준은 다시 낮추기 어렵기 때문에, 끊임없이 만족감을 채워주지 않으면 행복감을 느끼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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