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전개

인간의 궁극적 삶의 목적은 행복이다라고 줄곧 외쳐왔다.

그러던 나는, 인간이 영위해야할 최종적 목적이 행복이라면,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모르고서는 진정한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모두가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가슴 속에서, 오로지 그 속에서만 느껴질 수 있는 무엇인가를 언어로 정의할 수 있을까..

그 때 친하게 지내던 이모님 말씀이 머리에 스쳐갔다. 


 "하고싶은거 하면서 살어. 인생 그냥 자기 만족이야."


만족하면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사고가 수정되었다.

만족하면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은 행복 그 자체이다.

 

자기만족 = 행복 

 

두 단어 사이의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단어는 동의어다. 

 

2. 생각의 전개에 대한 반론

ⅰ.어떻게 하면 자기 만족을 할 것인가?

 누군가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외부적 내부적인 방법이 있지만, 결국 외부적인 원인도 내부적인 원인으로 형태가 바뀌어 자기만족을 취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애인에게 선물을 받아서 행복하다는 어느 남자가 있다고 할 때, 사실 그 남자가 행복한 이유는 선물자체의 이유가 아니라, 선물을 받은 것이 나의 기분을 좋게했기 때문에 행복해 진 것이다(기쁜 이유 :  상대로부터 나의 존재감 인정, 그 선물을 이용해 나의 만족을 느낄 것을 상상). 반대로 누가 봐도 귀한 선물을 받아도 선물을 받는 그의 마음이 편치않다면그는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자기만족에 직접적인 자극을 주는 것은 내부성이라는 단일적인 원인이다. 행복은 외부의 자극보다 스스로의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외부적인 자극은 전혀 무의미한 것인가. 아니다. 외부적인 자극이 자기 만족까지 실현되는 매커니즘에서 외부적인 자극은 시작이고 내부적인 자극은 끝이다. 시작이 없으면 끝도 없다. 나를 위해서 외부적인 자극을 시작해준 외재적 존재에게 감사해야하는 이유이다.

 

① <외부적 자극이 없을 경우>  


 (시작 -내부적 자극)     ---->    (끝 -내부적 자극)     ---->    (자기만족실현 =행복)

예) 외로움이 더이상 외롭지 않은 내가 대견스러웠다.


② <외부적 자극이 있을 경우>  



(시작 -외부적 자극)     ---->    (끝 -내부적 자극)     ---->    (자기만족실현 =행복)

예)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 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노을지는 풍경을 보고 그 풍경에 녹아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정리하면, 행복=자기만족의 메커니즘은 그 시작이 내부적이든 외부적이든 결과는 내부적 자극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①과 ②의 예를 고민하면서 느낀 점은 (특히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부족한 사람은) 내부적 자극으로 시작되는 자기만족은 외부적자극으로 시작되는 자기만족보다 현저하게 그 수가 적다는 것이다. 즉, 외부적 자극은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더욱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며 자기만족의 시작점에 있다는 점에서 내부적 자극만큼이나 중요하다.

 

시작이 어떠한 자극이든 내부적 자극이 어떻게 징검다리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서, 같은 외부적 자극도 자기만족으로 이어질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자기만족을 더 많이 느끼기 위한 긍정적인 내부적 자극은 어떠한 형태인가. 가장 간단한 내부적 자극의 형태는 긍정이다. 긍정은 우리를 손쉽게 만족하게 할 뿐만 아니라, 더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요인들' 포스트참고)

 

3. 반론

ⅰ.자기만족은 올바른 방향성이 존재하는가?

타인의 만족도 자신의 것만큼 중요하므로, 타인의 만족을 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자기 만족 실현이 이루어져야한다. 타인 뿐만 아니라 자기도 만족할 수 있는 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인간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부처의 칠시가 모두의 행복을 위한 생활 속의 간단한 가르침이다.


ⅱ. 자기만족과 행복은 필요충분조건인가?

오로지 자기만족만이 행복인가. 다른 어떤 감정이나 생각도 행복으로 이어 질 수는 없는가? 지금 까지의 생각으론 그렇다. 자기 만족과 행복은 필요충분 조건이다.

 

ⅲ. 왜 자기만족은 사람마다 다른가?

환경에 적응해온 생활권의 결과인 문화권 또 자라온 환경 또 선천적인 요인들까지 개인에 행복 기준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다양하다. 행복한 사회를 위한 교육의 역할은 균일적인 행복의 기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 긍정하고, 타인의 행복을 위해 존중할 줄 아는 것 이 두가지만 가르치면 된다.

1. 여행의 준비단계 : 마음가짐

 어떤 것을 배운다거나 깨닿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에는 그로인한 부담감으로 여행이 퇴색될까 두렵다. 여행의 준비물은 설레임으로 충분하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그저 그렇게 일상에서 벗어난 것들을 보고 느끼다보면 어느새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짜증내는 상황에서 짜증을 내지 않는 다거나 복잡한 일들을 척척해내는 나를 보며 성장한 스스로를 발견하기도 하고, 이번 유럽여행과 같은 경우에서 처럼 한국 일본과는 너무나 다른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라이프 스타일 속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생각치도 않게 만나게 되는 좋은 사람들에게 좋을 말들을 듣기도 한다. 이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생각된다.


2. 제한된 시간과 여행

 앞으로 내가 마음껏 하고싶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될까. 대학교 졸업전 까지 딱 그때 까지일 가능성이 크다. 취업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봐서 알겠지만 막상 취업을 하면 야근에 일에 현실적인 면을 고려하느라 여행은 먼나라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른다. 대학 생활 때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경험하려고 노력한다면 지금은 역시나 무엇일지 모르지만 나의 생각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고 나의 인생을 바꿀 "좋은 것"들이 나를 찾아 올 것이다.


3. 향략여행과 고생여행

 유럽여행과 같은 타문화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경험하는 여행이 동남아 여행같은 향락여행과 다른 이유는 전자의 경우 1번과 같은 배울 점이 있기 때문이다. 배움이 있는 여행과 향락여행을 이분화 하는 것은 아니지만 향략여행은 몸이 편한 여행이기 때문에 그저 놀다오면 되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배우고 느낄 기회가 배움이 있는 여행에 비해서 적다. 예를 들어 티벳에 여행을 간 것과 발리로 여행을 간 것을 생각해보자. 실제로 겪은 일이 아닌 가정에 불과하지만 티벳 여행은 몸이 편하기 보다는 힘들 것이다. 위생이나 치안도 위험하고 먹을거리 입을거리도 내가 지금까지 경험하던 것과 다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새롭다.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은 행복한 감정보다는 고통의 감정이다. 왜 고통을 느꼈는지 분석하는데에서 큰 성장을 이룬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고생이 예상되는 곳의 여행은 고생만큼의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반면 발리 여행을 생각하본다면. 발리같은 유명 관광지는 모든 편의가 이미 준비되어 있다. 주변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관광지의 특성상 돈만 있다면 내가 사는 곳보다 더 높은 수준의 여가와 즐거움을 즐길 수 있다. 즐거움과 행복은 누리는 순간 만큼은 달콤한 것이지만 그것으로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4. 여행과 일상의 대립성

 우리는 일상에서 산다. 일상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준다. 안정감은 우리에게 기존에 자신의 해오던 것 이상의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한다. (이는 안정감이 우리의 인생에 줄 수 있는 큰 장점인데, 항상 긴장을 유지해야하는 여행은 기본적으로 소모되는 에너지가 많기때문에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는 에너지를 허락하지 않는다)그러나 일상에서는 배움을 찾고자했던 날카로운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대학생이다. 학교를 다닌다. 학교에서는 수업을 듣고 같은 학교의 학생들을 만나서 이야기한다. 수업은 들으면 그만이고 학생들과의 관계에서도 큰 위기를 찾기는 어렵다.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숱한 것들이 내 옆을 지나가도 틀에박힌 일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을 놓쳐버리기 쉽다.(가령, 구걸을 하는 사람을 보고 의문을 갖고 스스로에게 답을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어떤 가르침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거지가 구걸하는 모습은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여행은 내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부터의 장소적 탈출이다. 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지나며,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 발을 딛고 서며,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 중에 머릿속은 호기심으로 분주하다. 왜 이런 음식을 먹으며, 왜 이런 장소가 탄생한 것이며, 왜 이런 사회적 시스템을 갖추게 된것이며, 왜 이런 문화 속에 살고있는 것인지 너무 궁금하다. 또 그런 생각들은 새로운 생각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 아니라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신의 가치관과 연관된 질문이나 인간 심리의 핵심적인 부분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새로운 곳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이의 여행은 에너지낭비와 시간낭비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이에 니체의 말들을 이용해보고 싶다.


1.니체는 진정한 과제는 "삶"을 고양하기 위해서 사실들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괴테의 문장을 이용했다. "나는 나의 활동에 보탬이 되거나 직접적으로 활력을 부여하지 않고 단순히 나를 가르치기만 하는 모든 것을 싫어한다.


 

 

2.니체는 "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 - 하찮고 일상적인 경험- 을 잘 관리함으러써 그것을 경작 가능한 땅으로 만들어 1년에 세 번 열매를 맺게 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 - 그 숫자는 얼마나 많은지!- 은 운명의 솟구치는 파도에 휩쓸리거나 시대와 나라가 만들어내는 혼란스러운 물줄기 속으로 말려들어가면서도 늘 그 위에 코르크처럼 까닥거리며 떠있다. 이런 것을 관찰하다보면, 우리는 결국 인류를 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 즉 적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만드는 방법을 아는 소수(극소수), 와 많은 것을 가지고 적은 것을 만드는 방법을 아는 다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고 말했다.


-알랭드보통, 여행의 기술中


 이러한 여행의 특성을 일상 속에서도 제공받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책읽기와 공부이다. 이들은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질문과 마주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생각의 영역 정립 그리고 통념에 묻혔던 생각들의 재정립하도록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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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가 필요해 3

정희재 日 (회사 1년차 직장인)

"대학 성적 맞춰서 오라는 회사 와서 일하구. 꿈이라는 말을 들으면 속이 꽉막히는 기분이에요."

 

 꿈이라는 말을 듣자 나도 속이 꽉막혀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고 싶은 일이 없다. 아직. 찾지 못했다. 이대로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간다면 나도 회사에서 껍데기만 된채로 일하고 꿈이라는 단어가 귓가에 흘러갈때마다 꽉막히는 속을 억지로 현실로써 뚫어내고 그렇게 죄인아닌 죄인으로 살아 갈 거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되는건, 난 아직 어리고 대학생으로써 물리적인 시간도 주어졌다. 어쩌면 내가 자라왔던 환경 상 아직까지 꿈이 없는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해왔지 당연시 되었던 행동이나 말들에 왜 그래야하는지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까지는 꿈이 없었다. 왜냐고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꿈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에 관한 단어라고 정의될지도 모른다. 그들의 말대로 꿈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분화해서 '꿈'을 하고싶은 일이라는 의미에 초점을 둔 다면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산다는 건 어떤 삶을 살겠다는 의지이지 꿈이 될 수 없다. 하지만, 하루하루 행복하게 산다는 생각은 장기적으로 꿈도 만들 수 있는 것을 아닐까. 예를 들어, 하루에 세개의 면접이 있는데 한 개만 갈 수 있다고하자. 하나는 대기업, 다른 하나는 공무원, 다른 하나는 유니세프. 나는 그날도 행복하게 살기위한 선택을하여야 한다. 좀더 가치 있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면 나는 유니세프를 택할 것이다. 이러한 것처럼 하루의 행복에 대한 선택이 전반적인 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행복의 선택은 경험이 넓어질 수록, 즉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아질 수록 더 행복한 인생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따라서, 시간이 주어진 이 시점에 많은 경험을 위해 노력해야한다..

 인간의 삶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이다.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우리는 행복했을 때의 그 느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가치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나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며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을지 가치관을 세우려 노력한다. 사실 명예와 물질 보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삶이다.  

 

  우리의 선택은 아니였지만, 우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사회에 소속되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 그것을 원치 않는 사람은 (아마 불가능 할테지만) 사회의 약속, 의무, 사회 그 자체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자의반 타의반 사회에 소속된 사람들로 인간의 가장 절대적인 가치인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평등한 권리를 지닌 사회 내의 다른 구성원들의 의사도 반드시 존중하여야 한다. 어떤 사소한 방식으로든 타인의 행복을 방해하거나 박탈하는 것은 그들이 더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박탈하는 사형선고와도 다를 바가 없게되는 것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타인의 행복의 상처를 무시하는 일은 바람직한 사회 구성원의 일이 아니며 어른의 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아이이다. 여기까지가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 즉 소극적 행복의 조건이다.

 

 일본에 생활하면서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바라보다 내가 그들의 생활방식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후 그 충격은 나에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일본인들의 생활부터 말하고 싶다. 일본인들은 예의바르다.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의 입에서는 스미마센 이 파도를 이룬다. 자신의 행동이 남의 행복을 방해했을 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자각의 표시이자 사과의 표시이다. 사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보다는 그들의 DNA에 각인된 문화적 버릇이 주된 이유일 것이지만. 자신의 행동이 남의 행복에 "메이와쿠(민폐)" 를 끼친다는 생각이 깊어서 인지 그들은 소극적인 행복에 눌러 앉아버리기로 마음 먹은 것 같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들은 인간관계의 문을 닫고있는 느낌이 든다. 남에게 아예 신경을 쓰지 않으면 타인의 행복에 누를 끼치일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방안에만 틀여박혀 지내는 히키코모리는 그를 걱정하는 주의 사람들에게의 행복에는 누를 끼치지만 그 주의 사람들의 불행만 제외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불행을 끼치지 않는 문화시민이다. 누군가의 어깨를 치고 가고 무심결에 던진 말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지키지 못할 약속으로 상대를 찌푸리게 하는 활발한 사람들보다 오히려 타인의 행복을 덜 방해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소극적인 행복의 추구이다. 타인에게서 행복을 빼앗지 않는 것.

 

 필자도 지금까지 소극적인 행복 추구에만 머물렀었다. 아니, 그것밖에 없는  줄 알았다. 자신은 자신대로 행복을 누리는 동시에 사회에 소속된 몸이므로 타인의 행복을 빼앗지 않는 것. 그것이 인생을 사는 최고의 미덕인 줄 알았다. 타인의 행복을 빼앗지 않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에게 행복을 줄 수도 있다. 이것이 적극적인 행복의 추구이다. 타인의 행복을 빼앗는 일이 그들의 사형선고와 다를 바가 없다면, 타인에게 행복을 주는 일은 그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 넣는 것과 다름 없는 일이다. 소극적인 행복추구와 적극적인 행복추구의  조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또 그것이 진정으로 다함께 행복할 수 있는 멋진 길이다.

 

 

 

 

 

 

 

우리는 친해졌고 가까워졌고 익숙해졌다. 

그리고 딱 그만큼 미안함은 사소해졌고 고마움은 흐릿해졌으며

엄마는 당연해졌다. 

 

..... 

 

세상 모든 관계는 익숙해지고 결국엔 당연해진다. 

 

선물의 가장 강력한 힘은 그 익숙하고도 당연한 관계를  

새삼 다시 설레고 감사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선물을 고르고 카드 문구를 고민하며 그에게 마음을 쓰는 사이

어느새 그 사람은 내게 다시금 새삼스럽게 된다.  

 

그리고 그 마음이란 반드시 전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익숙하고도 당연한 관계가 급기야 무뎌짐으로 퇴화돼 버린다면

이젠 그 어떤 선물도 뒤늦은 노력도 의미없다.  

 

아무 관심도 갖지 못하고 베란다 귀퉁이에서 바짝시들어 버린 난초에게

때늦은 물과 거름은 소용없는 일이다.  

 

관계가 시들기전에 서로가 무뎌지기 전에  선물해야 한다.

마음을 전해야한다.

 

-응답하라 1994 06화 선물학 개론 中 에서.

 이 세상의 만사는 인과응보다. 어떤 일이 생기게 된데에는 혹은 어떤 생각이 거기 까지 미치게 된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또 그 이유에는 이유가 있고 이러한 과정이 끝도 없이 맞물려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다. 

 

 나는 지금 그 왜에 대하여 또 왜라고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왜 우리는 왜에 대해서 사색해봐야 하는지.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검정 베일로 가득 둘러쌓여 있다. 특히나, 인과응보가 더 복잡하게 얽힌 현대는 더더욱 그렇다. 누구하나 나서서 왜 그런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속에 각인되어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짙다. 그러나, 사람이 어떠한 일을 할때에는 왜 그렇게 행동해야하는지 왜 그렇게 생각해야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유를 알아야 스스로의 이성에 가하는 납득이 확실하다. 논리적 이성으로 인과를 지배해야 이해가 확실하다. 이것이 곧 가치관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왜 그런지 모르고 하는 행동이나 생각은 속이 텅빈 갈대와 같아서 이리저리 흔들린다.

예를 들어 살인이라는 당연한 부정적인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고 하자. 이때 나는 왜 살인하면 안되는지 이성적으로 생각한다. 인간은 행복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존재이지만, 함께 어울려 사는 우리들은 우리의 행복과 동일하게 타인의 행복도 존중해야한다. 곧, 타인의 행복에 해를 끼치지 않는 행복을 우리는 누려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살아서 행복해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살인은 나쁜 것이다. 이는 우리의 행복만큼 중요한 타인의 행복은 앗아가는 것이므로 좋지 않다.

 

이 세상 모든 것에 왜라고 질문하고 자타(自他)의 행복이 전제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으로 인과를 판단하라. 혹시 그것이 당연한 것일지라도.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왜'는 내가 가진 가장 큰 지적 재산이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20여분 떨어진 거리에 릉이 있다. 내가 살던 곳은 옛 어떤 왕국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었는데 릉은 왕릉과 왕비릉 이렇게 2개가 있고, 때때로 여기저기서 지금은 사라져 버린 옛사람들의 흔적이 종종 발견되고는 했다. 

  이 지역에 산지도 벌써 꾀나 되어가니, 우연찮게 릉과 마주치는 일이 수 십번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매번 그냥 그런 기분으로 아무생각 없이 그것들을 지나쳤을 뿐, 릉의 존재를 의식하고 한 번쯤 가서 사진이라도 찍어보고 싶다고 마음먹은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아마도 그런 기분이 문득 생긴 건 릉의 존재 자체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릉을 둘러쌓고 있는 소나무 방풍림에 먼저 끌려서였다. 릉을 둘러쌓고 있는 수백그루의 소나무는 겉보기에는 어두침침하고 침울한 색이었지만, 그 안의 공기는 신비해서 왠지모르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같은 것이 느껴졌다. 마치 신의 창조이래 한 번도 인간의 발길이 닿지않은 원시림의 자연이 울부지는 것처럼.

 3월의 날씨답지 않게 따듯한 날씨였다. 벌써부터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따금씩 내 피부를 스쳐가는 바람은 차갑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딱 체온만큼만 따듯했다. 그런 훈훈함 때문인지 혼자가는 산책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이른 봄바람을 맞으니, 머리속으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피부는 어머니의 배안에서 웅크리고 있었을 때의 따스함을 몸이 기억이라도 하는 듯했다.

 버스를 타고 릉으로 향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가는게 좋았다. 목적지는 필요 없었다. 때로는 목적지가 영원히 없었으면 하고 바랐다. (특히 버스 안에서 눈이 감겨올 때) 버스를 타고가면서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또 주위의 일상을 보면서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그것들에 무관심했었는지를 스스로 생각하면서 나는 점점 낯설었던 버스의 한 자리에 뿌리를 내렸다. 가끔씩은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버스는 중세시대의 창창한 바다를 나아가는 멋진 배고, 그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은 정처없이 바다를 떠도는 선원들이다. 그렇게 끝이 없는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순진하게도 기뻤다.

 버스는 운좋게도 목적지 바로 앞에 멈추어 섰다. 릉이 보였다. 맑은 날이었지만 하늘은 투명하지 않았다. 회색과 흰색의 중간 쯤의 색이었는데, 저런 하늘 아래 이런 맑은 해가 비칠 수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예의상" 릉에서 족히 100미터는 떨어진 거리에서 전체 스틸샷을 몇 장 찍고는 릉에 다가갔다. 말했듯이, 나는 이전에 릉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우선 내가 다가가고 잇는건 릉을 품고있는 소나무 숲이었다. 햇빛이 여기저기 비추었는데도 숲은 어두컴컴했다. 공기도 바깥과는 사뭇 달랐다. 소나무숲 주위에 보이지 않는 견고하고 투명한 벽이라도 쳐져 있는것처럼 그 안은 외부와 단절된 듯 조용했다. 릉은 담이라고 하기에는 윗부분이 넓고 높이는 낮은 돌담에 둘러쌓여 있었다. 그 돌담 밖에 있는 것이 소나무 숲이었다. 나는 돌담위에 올라갔다. 두 사람은 누울 수 있을 만큼 꽤나 넓었다. 다리쪽은 햇빛이 비췄고, 상체는 햇빛이 소나무에 가려 그늘져있었다. 나는 의외로 이런 감성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자연스레 가져온 핸드폰을 켜서는 10cm 의 '냄새나는 여자'를 들었다. 지금 내가 속한 그림과는 맞지 않는 가사였지만 멜로디는 풍경과 보기좋게 섞여 잘 어울렸다. 분위기에 취해 사진은 일찌감치 가방 속에 넣어버렸다. 사진으로 찍어 오래 기억해두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그냥 아무런 생각없이 전부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땅인 릉과 그것을 둘러싼 산자의 소나무 숲. 그 사이의 돌담. 그리고 그 돌담위에서 누워있는 나. 이런 생각을 하니 애매한 감정이 불쑥 느껴졌다.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그 돌담 위에서 나는 한가롭게 봄바람이나 만지면서 멜로디에 전율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이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죽음은 무언가에 의해서 단절된 상반된 것이 아니다. 소나무 숲의 일부가 돌담이기도 하고, 릉의 일부가 돌담이기도 한 것처럼 삶속에 죽음의 일부가 존재하는 것이고, 죽음 속에 삶의 일부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단절된 죽은 자의 땅이나 산자의 땅에 있는게 아니라, 그 사이 어딘가의 돌담위에서 위태롭지만 행복하려고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즉, 삶과 죽음은 함께 녹아있는 것이다. 완벽한 삶이나 죽음이란 애초부터 없다.

 

 "학생 거기 누워 있으면 안돼! 내려와 얼른"

 

 집으로 향하면서 생각했다. "봄은 의외로 가을만큼의 사색의 계절이다."

 

 

 

 

 

데카르트를 어떠한 방법보다 확실하게 설명하는 방법은 코기토 철학이다. 이는 데카르트 자신도 인정하는 바인데, 그의 저서 방법서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ego cogito, ergo sum)’라는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회의론자들이 제기하는 가당치 않은 억측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주목하고서, 이것을 내가 찾고 있는 제일원리로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방법서설 중에서]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이후, 절대 진리로만 여겨졌던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그 지위가 흔들리게 된다. 신학에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해결책을 제시해주던 교황청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상처를 입게 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마저 르네상스 시대에 알려지기 시작한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 위협받는다. 이것이 도그마의 위기이다. 절대적 진리인 도그마는 근대 이전까지 줄곧 사람들의 머리 속에 절대적인 진리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르네상스 이 후 도그마의 위기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기에 충분했다. 모든 것이 신으로 귀결되었던 때에 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은 정신적 카오스로 밖에 표현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도그마를 대신하기 위한 다른 진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때 데카르트가 들고 나온 것이 바로 자아 이다. 현재와 다르게 당시는 자아의 의식의 존재가 부정되지도 않았지만 인정되지도 않았다. 도그마의 붕괴 이전까지는 신이 모든 부족함과 궁금증을 대신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개인이 자아를 인식하고 자아의 자율성이 널리 인정받기 위해서는 자아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필요했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라는 도구를 이용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증명하고 그리고 제외하며, 다음과 방식으로 자아를 증명했다. 먼저, 우리는 보고 느낌으로써 자아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말이다. 가령, 어떤 여인과 사랑에 빠진 이는 그 여인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인식할지 모르지만, 그러지 않은 이는 그 여인이 세상에서 가장 이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또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이 현실이 실제로는 현실이 아니라 꿈 속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지각으로 자아를 인식하려는 노력은 절대적인 자아를 찾는데 적절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지각이 아닌 머릿속의 정신적 이성으로 자아를 찾으려는 노력은 자아를 인식하는데 적절한 것인가? 이것 마저도 그렇지 않다. 천천히 눈을 감고 2+3 = 5 라는 수학적 공식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정신적 이성은 꿈에서든 현실에서든 항상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 신체와 머릿속은 형태만 있는 껍데기일 뿐이고, 전지전능한 악마가 우리의 생각을 조정할 수 있다면 정신적 이성마저도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보자.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하더라도, 꿈을 꾸고 있는 나는 존재한다. 내가 지금 전능한 악마에서 철저히 속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속임을 당하는 나는 반드시 존재한다. 이런 의심을 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의심을 하는 나는 존재한다. 나는 의심한다,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보통 코기토라고 불리는 바로 이것이 회의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데카르트가 찾아낸 절대 확실한 철학적 진리다. 그런데 코기토에 등장하는 는 무엇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 내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데 있어 나의 물질적인 부분, 즉 신체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다. 오로지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내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영향을 주었을 뿐이다. 결국 코기토에 등장하는 는 사유하는 무엇 혹은 정신적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나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금껏 살펴본 대로, 데카르트는 기독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라는 두 도그마가 위기에 처한 시대에 새로운 도그마, 즉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절대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진리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탄생한 자아는 개개인에게 신으로부터 독립적인 의미를 주게 되었다.

헤겔 법철학에서 그가 가장 기저의 전제로 두고 있는 것도 절대적 진리인 자아의 존재이다. 그의 저서에서 그는 자유의지를 사회의 법 이전에 존재하는 진리로 정의한다. 그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법의 지반은 도대체가 정신적인 것이며 또한 그것의 더욱 엄밀한 장소와 출발점은 의지이면서도 더욱이 자유로운 의지이다. 결국 이 자유야말로 법의 실체 및 규정을 이루는가 하면 또한 법의 체계는 실현된 자유의 왕국이며 더 나아가 정신자체로부터 산출된 제2의 자연으로서의 정신의 세계이다."(4)

이상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의미 내용을 분석할 수 있다. 첫째로 법의 토대와 출발점이 정신으로서의 자유 의지라는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자유 의지가 법의 본성으로서 그것은 자신을 현실 세계에 실현하려는 목적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법철학에서 줄곧 견지하고 있는 자유의지는 자유의지라는 형태 이전에 자아에 대한 완벽한 인식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하다. 신에게서 독립된 절대적인 나의 존재(자아)가 있어야, 자유도 의지도 자유의지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와 헤겔의 법철학의 연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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