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사는가? 도저히 답이 없어 바꾸어 생각해봤다. 

 

" 그럼 사람은 왜 죽으면 안되는가?"

 

죽고난 뒤는 평행 세계의 어딘가 인지, 수직 세계의 어딘가 인지, 꿈 속인지, 아무 것도 없는 공허인지 어떠한 것도 확실치 않다. 이는 곧 다음 생은 현생보다 더 고통스러울지 고통스럽지 않을지 확실치 않음을 의미한다. 사후 세계는 어떤 곳일지에 대한 근거가 전무하므로, 근거가 없는 것에 베팅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죽으면 안된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고통이 눈으로 직접 확인되는 이 삶을 살아내어야 한다.

 

삶을 사는 이유가 죽지 않기 위해서라면, 죽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죽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존재" 해야한다. 존재는 다시 2개로 나뉘는데, physical presence와 mental presence이다.

 

physical presence(물질적 존재감) 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매우 기본적인 욕구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메슬로우의 욕구 단계설에 의하면 이러한 욕구는 저위 욕구에 속한다(생리 및 안정 욕구)

 

mental presence(관념적 존재감)는 위보다는 상위 존재감이다. 인간으로써 생존할 수 있는 생리적 욕구들이 모두 만족된다고 해도 관념적 존재감이 전혀 만족되지 못한 형태의 인간은 살아갈 수 있을까. 상상해보자. 돈이 많다. 100억쯤 된다. 사고싶은거 다 살 수 있다. 그런데 밖에 나가도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 인정해주는 사람 하나 없다. 가족도 없다. 세상에 그저 홀로다. 살수 없을 것 같다. 분명 몸은 멀쩡한데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죽지 않고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인간은 관념적 존재감도 필요하다. 메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에서 이러한 관념적 욕구는 비교적 상위 욕구로 소속 및 애정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 실현의 욕구로 설명한다.

 

영화 메트릭스에서는 mental presence(관념적 존재감)이 인간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 Factor 인지를 보여준다. 초기 기계 문명은 인간의 체온을 통해 열에너지를 취득한다. 하지만, 캡슐 안에 그저 가만히 사육당하는 인간은 오래 생존하지 못한다. 이에 기계 문명이 선택한 솔루션이 그들의 생각을 메트릭스 가상 세계에 넣고 그 세계 안에서 살게하는 것이었다. 사육당하는 인간은 physical presence(물질적 존재감)는 만족되지만, mental presence(관념적 존재감)가 만족되지 않아 생존(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쯤에서 다시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 이는 답이 없는 질문이므로 반대로 물어보겠다. 왜 인간은 죽으면 안되는가? 사후의 세계가 어떤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근거가 없는 사후 세계에 대해 죽음으로 베팅할 수는 없다. 이로써 인간이 죽으면 안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인간은 죽으면 안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죽지 않을 수 있는가? 존재하면 된다. 단, physical presence뿐만 아니라 mental presence가 모두 성립하는 존재여야 한다. 물질적 그리고 관념적 존재는 자기 만족을 통해 실현 된다. physical presence는 생리 및 안정 욕구의 충족, mental presence는 소속 및 애정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 실현의 욕구의 충족을 통해 실현된다.

 

한발짝 더 나아가 보자. 그럼 욕구 충족은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모든 종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가장 포괄적이고 간단한 방법은 "스스로의 노력을 통한 성취"다. 노력은 성취를 통해 자아실현을 이룰 뿐만 아니라, 자존감 형성을 통해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을 얻게되고 이는 생리 및 안정욕구를 만족시킨다. 이러니 어떤 이유건 간에 계속적인 실패를 거듭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되고 죽으면 안되는 이유에 반발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사람들이 돈에 미쳐 살아가는 것도 이해간다. 사람들이 돈에 미쳐 살아가는건 자신의 존재를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현대 사회에서 돈은 왠만해선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마법의 열쇠같은 것이다. 돈이 있으면 밥먹을 수 있고 등따실 수 있다. 또 주변 사람한테 돈주면 (진심이 아니더라 하더라도) 존경심이나 소속감도 얻을 수 있다. 돈만 있으면 다되는 세상에 있으니 노력이니 마음 공부니 이런거 필요없이 돈에만 메달리면 "존재"할 수 있고 죽지 않을 수도 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오래 살사람이다. 욕심이 많다는 건 자신의 존재를 확보할 길도 많다는 것이다. 오히려 위험한건 아무런 욕구가 없는 인간이다. 존재하기를 포기한 것이다. 

 

강남에 건물을 몇 채는 가지고 있는 최씨 아저씨. 길에서 붕어빵을 파는 김씨 아주머니. 사채업을 운영하면서 사람들 줘패고 다니는 강씨 청년. 명문대, 사법 고시를 거쳐 최고 로펌에서 일하고 있는 이씨 청년. 강도 및 상해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감옥에 있는 주씨 아저씨. 이들은 모두 죽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살고 있는 것이고, 제 각기 다른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보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어떤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아둥바둥 살고 있을까?

 

반론

삶의 관점에서 인간은 살거나 죽거나 2개 중 하나의 선택지인데 죽지않아야 한다면 살아야한다.

산다는 것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죽지않는다는 것은 산다는 것을 의미할까?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제대로 고민하기 위해서는, 삶의 목적을 알아야하고, 삶의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왜 살아야하는지 대답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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