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에 日'열패감'…"우리가 어쩌다 한국에 뒤처졌나"
기생충에 日'열패감'…"우리가 어쩌다 한국에 뒤처졌나"
[한중일 톺아보기-4] ※톺아보기란 '샅샅이 더듬어 뒤지면서 찾아본다'는 순우리말입니다. 한중일 톺아보기는 동북아에서 일어나는 굵직한 이슈부터 소소한 소식까지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지난 10일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을 비롯한 4관왕 소식은 '코로나19' 사태로 시름 깊은 국민에게 가뭄의 단비와 같은 뉴스였습니다. 이번 쾌거는 일본에서도 톱뉴스로 보도됐는데요. '기생충'의 수상 소식은 아사히신문과 마이니치신문 등 주요 일간지 1면은 물론, 야후 재팬의 주요 뉴스 코너를 장식하며 눈길을 끌었습니다. '기생충'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으로 이미 예술성을 인정받은 데다 아시아권 영화를 통틀어 처음으로 상업성·대중성까지 최고 수준임을 입증한 것이기에 더 관심을 갖는 거겠죠. 특히 TV아사히, 후지TV 등 일본 방송은 ’기생충’의 무대가 된 반지하 집과 주변을 상세히 촬영해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영화 산업은 한국 영화 산업보다 역사가 깊고, 본격적인 대중예술로 자리잡기 시작한 시점도 훨씬 이릅니다.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시점도 한국보다 반세기가량이나 앞섰죠. 일본 영화는 1951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라쇼몽'으로 베니스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10년 넘게 황금기를 누렸습니다. 반면, 한국영화가 3대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작을 낸 건 1961년 '마부'(강대진 감독)가 최초였죠. 아카데미에 출품작을 낸 시점도 일본이 훨씬 이릅니다.
이 같이 훨씬 앞서 있던 일본 영화가 후발 주자인 한국영화보다 못하다는 소리가 근래 일본 내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5년 전 일본의 유명 원로배우이자 영화감독인 쓰가와 마사히코는 "불행히도 영화에 있어서는 일본은 한국에 크게 뒤지고 있다. 대학생과 유치원생 정도 차이가 난다"고 말해 구설에 올랐습니다. 일본 등 아시아 영화를 주로 취급해온 영국 배급사 서드윈도필름스의 애덤 토렐 대표도 "한국에 비해 일본 영화 수준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과거에는 아시아에서 일본 영화에 대한 평가가 가장 좋았는데 최근엔 한국은 물론 중국, 대만과 비교해도 입지가 불안하다"고 쓴소리를 했습니다. 일본 영화계에 무슨일이 있는 걸까요.
◆갈라파고스화된 일본 영화계
일본 영화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문제점은 '갈라파고스화'입니다. 갈라파고스화는 영화 산업에 있어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으로, '상품을 만드는 데 자신들만의 표준만 고집해 세계 시장에서 고립되는 것'을 뜻합니다. '어느 가족'으로 2018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도 일본 영화의 문제점으로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인데요. 그는 "이대로는 일본 영화가 세계에서 잊혀버릴 수 있다"며 "일본은 국내 시장만으로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으니 해외 진출 의욕이 떨어지고, 국내 관객에게 어필할 것 같은 기획만 해서 갈라파고스화가 심해졌다"고 했습니다. 또 "2000년대 이후 해외 영화제에 가보면 일본 영화에는 사회·정치 상황을 소재로 한 것이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며 "일본 영화의 폭이 좁아지는 느낌" 이라고 말했죠.
현재 일본 영화 시장은 '재패니메이션'으로 불리는 애니메이션과 만화 원작의 실사영화가 주류를 이룹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은 영화에 비해 대중성이 떨어지고 국제영화제에서도 실사영화에 비해 비주류로 취급받는 게 현실입니다. 고레에다 감독 말처럼 세계에서 널리 인정받고 수출도 더 하기 위해서는 실사영화에 좀 더 보편적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테마를 선정할 필요가 있는 거죠. 야타베 요시히코 도쿄국제영화제 작품선정디렉터도 "일본 영화가 국제영화제 수상과 멀어지는 이유는 테마와 관련이 깊다. 젊은 감독들이 내놓는 작품은 여고생 주연 청춘물이 너무 많다. 영화의 사회성 등 더 큰 테마에 관심을 갖지 않으니 국제영화제에서 먹히기 어렵다"며 고레에다 감독과 같은 견해를 보였습니다.
◆오리지널 각본이 나오기 힘든 환경
일본에서 만화 원작 실사영화가 주를 이루는 반면, 오리지널 각본 영화가 안 나오는 이유는 뭘까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실사판을 선호하는 일본 관객 탓으로 볼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먼저 거론되는 것이 '제작위원회' 문제입니다.
제작위원회란 일본에서 영화 등을 제작할 때 만드는 일종의 조합으로, 복수의 출자사가 공동투자하고 사업을 진행합니다. 일본 경제산업성 자료에 따르면, 현재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상업영화 중 약99%는 제작위원회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제작위원회 의사 결정 구조는 만장일치를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참신하고 색다른 제안이 받아들여지기 어렵고 각본은 물론 감독, 캐스팅에도 일일이 보수적인 제작위원회에서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리스크가 분산돼 흥행 실패 부담을 줄일 수 있지만, 제한된 수의 출자사가 안정적 수익만 좇다 보니 국내에서 흥행이 담보되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실사판 영화만 제작되고 있는 것이죠.
◆구조적 문제로 중간 규모 예산 영화 적어
일본 영화 산업은 저예산 독립영화와 도호 등 거대 회사가 만드는 메이저 영화로 이원화돼 있어 수천만~1억엔의 중간 규모 예산 영화가 너무 적습니다. 야타베 디렉터는 "외국의 젊은 감독들은 해외 프로듀서와 접촉하고 홍보하면서 좋은 작품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모으려 노력한다. 이를 위해선 국제적으로 공동제작을 총괄할 수 있는 프로듀서가 필요한데, 그런 능력을 갖춘 프로듀서가 일본엔 매우 적다"고 말했습니다. 해외에서도 통하는 영화를 만들려면 기술적인 퀄리티를 높일 수 있는 예산 확보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겁니다.
또 그는 저예산 독립영화로 크게 성공한 경우도 있지만 그런 사례를 롤모델로 봐선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작비 300만엔 정도로 제작된 저예산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국내외에서 호평을 받았고 많은 흥행 수입을 올렸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야타베 디렉터는 좋은 각본이 있다면 프로듀서는 이를 300만엔이 아니라 수천만 엔을 들여서 찍을 수 있게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는 국제 공동제작 형태로 해외 자본 도움을 받거나 해외에서도 먹힐 만한 각본을 고민하는 등 글로벌하게 통용되는 제작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며 "국내에서 만족하지 않는 자세가 한국영화가 급성장한 원동력"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떨어진 활력과 비합리적 수익 배분 구조
현재 일본 영화 시장은 활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일본 영화 시장 규모는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 3위(2019년 기준·한국은 5위)일 정도로 큽니다. 하지만 큰 시장 규모에 걸맞지 않은 관객 수와 매출액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본 연간 영화 총 관람객 수는 인구수가 자국의 40%밖에 안 되는 한국에 추월당한 지 오래(2011년)고, 연 매출액 역시 10년 넘게 제자리 입니다.
국민 1인당 영화 관람 횟수 또한 연평균1.4회(2018년 기준·한국 4.2회)로 선진국은 물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도 최하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같은 현실은 일본 영화가 심한 부침을 겪고 있는 상황과 무관치 않습니다.
수익배분 문제도 있습니다. 고레에다 감독 같은 거장조차 일본에서 제작 자금조달 어려움을 많이 호소합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한국의 영화 수익 배분 시스템을 예로 들며 "한국에선 보통 영화 흥행 수입 중 45% 정도를 극장 측이 갖고, 남은 55% 정도를 투자자와 제작사(감독 등 제작진)가 6대4 비율로 나눠 갖는다. 제작진 손에 떨어지는 흥행 수입은 곧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데 쓰인다. 반면, 일본에선 흥행 수입 중 50%는 극장에 가고, 남은 50% 중 10%는 배급사, 40%는 투자자에게 간다. 감독에겐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감독이 1%의 성공 보수를 받기 위해 협상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이 부분에 있어 한국과 일본 시스템은 큰 차이가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기생충'의 수상이 정부 지원과 로비 덕?
'기생충'의 수상을 포함해 한국영화의 성장을 국가적 지원과 로비 활동 덕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영화 칼럼니스트 히라쓰지 테쓰야는 '기생충' 수상 소식을 축하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작품 자체가 우수한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한국은 영화진흥위가 국책으로 영화 제작을 지원해왔다. 일본의 40% 남짓한 인구에 경제 규모도 3배 넘게 차이 나는데 제작비 10억엔 이상의 작품을 만들 수 있던 것은 이 지원 덕이 크다."
그는 일본인으로서 아쉬움도 나타냈습니다. 일본에서도 찾아보면 '기생충'과 비슷한 주제의 영화는 많았다고 주장하며 "시상식은 정치다. 외국 영화상에 지명되는 작품들은 할리우드 외국인기자협회에 로비 활동도 적극적으로 한다. 그런데 일본 영화는 출품만 하고 로비 활동을 하지 않는다. 출품뿐 아니라 작품을 알리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 노력 없인 세계에서 승부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이런 반응을 "열패감 때문" 이라고 일축합니다. 그는 "로비 자체를 나쁘게 볼 것도 아니지만, 일본이 로비를 더 잘한다. 오히려 그동안 한국영화는 그런 활동이 없어서 좋은 작품을 냈음에도 수상하지 못했던 것 뿐이다. '기생충'은 국가적 지원도 전무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사실 일본도 10년 전부터 '쿨 재팬'을 표방하며 자국 문화를 홍보하기 위한 민관펀드 등 국책 지원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영화의 경우 쿨 재팬의 일환으로 설립한 관제영화사 '올 니폰 엔터테인먼트 웍스(All Nippon Entertainment Works)'가 별다른 성과 없이 2017년 22억엔이 넘는 적자를 기록하고 민간에 매각됐죠.
◆포스트 봉준호 나오려면
이번 '기생충'의 쾌거는 봉준호 감독의 천재성이 빚은 결과입니다. 하지만 한국영화계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황금기를 누린 한국영화의 토양이 있었기에 가능했기 때문이죠. 영화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보여온 한국 관객들의 역할도 큽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국영화가 외형적 성장은 했지만 정체기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최근 몇 년간 눈에 띄는 작품은 드물고 비슷한 장르물만 반복해 쏟아져 나오는 상황이란 겁니다.
전문가들은 포스트 봉준호를 위해선 흥행만을 염두에 둔 획일화된 제작 공정을 탈피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전양준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은"지금처럼 흥행 실패를 피하려 천만 영화 흥행 공식과 배우 캐스팅에 의존해 영화를 만드는 태도는 종식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전찬일 평론가는 구조적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그는 "포스트 봉준호를 위해선 인재 발굴이 시급하다. 영화인 개개인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일부 주류에게만 지원이 가는 구조적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며"투자하고 반대급부를 얻을 생각만 말고 인재의 미래에 투자한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채 침체 일로를 걷고 있는 일본 영화계. 한국영화가 이를 반면교사로 삼고 '기생충'을 기점으로 다시 한번 도약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신윤재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